주일오후설교

드론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5. 5. 25. 19:40

드론 하나님

2025년 5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8:18-23

(38: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38:19)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38:20) 예레미야가 가로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고한 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
(38:21)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38:22)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38: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어냄을 입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으로 불사름을 입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와 선지자 예레미야의 대화입니다. 시드기야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바벨론이 진짜로 쳐들어오게 되면 나는?’입니다. 즉 시드기야는 ‘나’를 생각하고 그 어떤 경우라도 ‘나’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이점으로 우리는 시드기야와 선지자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관심사는 계시의 전달과 성취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진리이고 그 외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지자 입장을 이해합니다. 진리가 진리됩게 진행되는 것이 이 모든 세상이라면 이미 진리 안에 있는 자 입장에서 굳이 걱정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일련의 마땅한 논리성입니다.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리인지 거짓인지 나중에 되어진 것을 그때 가서 정하겠다는 것은 그때까지 두려움과 염려는 당연히 따라옵니다. 마치 이미 시험에 합격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사람과 합격 여부를 모르는 자의 초조함과 마음 상태가 같을 리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 ‘내가 천국에 합격했다’로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성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을 알고 느긋함을 갖는 자가 성도입니다. 즉 진리의 진리됨에 있어 성도는 자기를 뺀 자를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 빼기’ 상황은 애초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황입니다.

여호수아 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여기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의 이동 모습은 오늘날 안목에서 보면 ‘열차 이미지’ 같습니다.

열차 이미지란 ‘선(線)line’ 같은 형태입니다. 폭은 없고 앞 뒤만 길게 뻗어나온 모습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광야를 이동할 때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게 행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이는 시간적으로 표현하면 ‘전과 후’가 상호 연결되어 있는 식으로 성립하고 그리고 움직입니다.

즉 운동성을 띠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열차 뒤쪽에 해당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제시한 계시는 자꾸 이미 확정된 진리의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데 시드기야 왕은 자기 안위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돼?”

이미 구약 창세기 9장에서, 세상은 멸망의 대상으로 규정났습니다. 멸망 안 되겠다고 버티고 발악하는 것은 자신의 팔자 중심이지 진리 중심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드기야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반항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처럼 자신이 멸망 후의 세상에서 지켜보고 이끄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선(線)구조는 다른 민족의 면적 구조로 다른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는 ‘새로움’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현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잡혀 감’입니다. 이런 방식은 새로운 방식의 전과 후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는 선(線)-구조로 바꾸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잘 사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앞/뒤, 그리고 옛 것/새 것을 어떤 식으로도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구약  시절에서는 개인 신상에 대한 염려에 대해서 이해 줄수는 있다하지만 신약 입장에 와서는 보다 단호합니다.  

개인 사정은 진리에서 빠지고 복음에서 빠집니다. 마태복음 9:13에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제사’를 의도적으로 대립시키십니다.

이 두 개념을 대립시킨다는 말은 어느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의 원인이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사의 원천은 인간의 행함, 즉 율법적 실천과 관계된다면 긍휼은 인간의 그 어떠한 시도와도 관련없습니다. ‘제사를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평소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과 자비를 얻는 것과 연관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긍휼을 드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드려서 긍율을 계속 공급받게 한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 걱정 중심으로 살기에 하나님께 바칠 긍휼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조치는 ‘죄인을 부르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3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라는 자신 행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네 안에서 통과시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제 하라’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죄인되게 합니다. 아무도 자신에 행한 것을 자기에게 잊거나 걷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했다’를 ‘죄인이 죄를 지었다’로 바꾸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긍휼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내놓은 긍휼은 없고 죄만 내어놓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조치하시는 것은 ‘옛것/새것’을 예수님의 실천에 의해서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복음 9:17) 복음은 결코 옛것에 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땅에 쏟아져 허망하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담기 위해 복음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겨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새 부대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새 부대에만 적합한 복음을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실천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무조건 예수님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따라서 날마다 새로움이 나오는 바로 그곳에 옛것과 더불어 새로움이 같이 나오는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긍정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죄사함을 방해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5강-예레미야 38장 18~23절(드론 하나님)2505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8장 18~23절입니다. 구약성경 1117페이지입니다.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예레미야가 가로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고한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어냄을 입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으로 불사름을 입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 왕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나면서,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네가 이야기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나라가 망한다고 치자. 망했다면, 그동안 바벨론에 항복하지 말라고 주장했던 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바벨론 왕에게 가서 나를 고발하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나는 항복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항복이 일어난다면, 많은 사람이 이제는 저쪽 바벨론에 붙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겠느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여, 저 사람이 우리에게 왕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이렇게 부추겼습니다. 가만두면 안 되겠지요?’라고 이런 식으로 하면, 시드기야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느냐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만약 이지만.

아우슈비츠 독일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독일 장교들이 가두고 고문하고 많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늘 걱정한 것이 뭐냐. 지금 전쟁 중인데, 만약에, 물론 나치 독일이 이기지만, 만약에 연합군, 미군이, 영국군이, 러시아군이 이긴다면, 그때 포로 잡힌 유대인들이 그동안 자기들을 학대했다고 나를 고발하게 되면, 내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되겠느냐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불신자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그냥 자유 하면 되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면, 살아있을 때 교회도 안 나오고, 복음도 안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 대가에 대해서 내가 보복당할 것이 겁이 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닌데, 보복당할 걱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아내는 교회를 나오고 남편은 교회를 안 나왔을 때, 남편이 아내에게 평소에 자꾸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나중에 너 천국 갈 때, 네 바짓가랑이 붙들고 가도록 좀 허락해달라. 지금은 내가 교회 다닐 마음이 없는데, 혹시나 마지막 심판이 있다면, 네 빽(인맥)으로 같이 좀 천국 가자. 너 교회 다닐 때 내가 학대 안 했잖아. 그 정도만 해도 나는 하나님께 선행한 거 맞잖아.

이 마음이 마치 천국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처럼, 여러분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예레미야가 이런 시드기야에게 해줄 말은 무엇이냐. 바로 여호수아 1장에 나오는 그 원리를 그대로 언급해 줍니다. 여호수아 1장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1장 7~8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이걸 순종하면, 네 앞길이 형통한다는 겁니다. 그 당시 이미지를 오늘날 현대 과학 시대의 이미지로 바꿔서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열차 이미지입니다. 기차 이미지. 넓은 들판에 외롭게 철로를 따라서 기차가 홀로, 길고 황량한 속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는 아무리 그 주변의 땅이 넓다고 할지라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 됩니다.

하나의 단선 위로 가는 것처럼 가야 하는 거예요. 좌로나 우로나를 고려하면 안 되고 딱 그 선만 따라가야 해요. 선 따라 가게 되면 여기서 어떤 게 생기느냐 하면, ‘앞과 뒤’만 생겨요. 옆은 없으니까. 좌나 우, 옆은 없으니까, 앞과 뒤만 발생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갈 때,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그 60만 대군이 정돈해서 하나에, 저 위에서 보게 되면, 하나의 단선처럼 꼬불거리면서 자기만의 세계, 그러니까 선을 합하면, 세계선(World line),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하나의 선으로써 그 광야를 통과합니다.

그 광야를 통과하면서 좌우로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바로 이방 민족을 만나죠. 이방 민족은 선 개념이 아니고 면적 개념이죠. 뭐 정복하면 정복하고, 우리 힘대로 남의 땅이라도 정복하면 그만이라고 되는데, 이 이스라엘은 비록 땅을 정복하고 차지할 때도, 앞장선 언약궤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멈추라면 멈추며, 앞에 있는 기관차의 의지에 따라서 꼬불꼬불 그들은 어떤 선을 유지해야 해요. 정렬해야 해요. 그게 방향성입니다.

하나님이 도착해야 할 그곳까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의 열차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열차처럼 움직이게 되면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진리는 뭐냐. 옛것과 새것이 한 선 위에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지나간 것은 옛것이고 앞으로 가야 할 것은 새것이에요. 그걸 누가 보고 있느냐. 그걸 하나님께서 드론 띄워서 보고 있습니다. 그 드론을 창세기 9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지개라고 되어있어요.

무지개의 특징은 이 땅은 이미 멸망 받았다가 됩니다. 이 땅은 이미 물속에 멸망 받았다. 멸망 받고 난 뒤에, 왜 인간들은 번성하고 민족들은 왜 등장했는가. 그 민족과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해 내는 거예요.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민족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민족은 어떤 목표 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표 점은 하나님의 율법을 앞장세워야 비로소 그 목표점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무지개 아래서,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꼬불락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속을 이렇게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상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들은 뭘 해야 하느냐. 옛것은 잊어버리고 그다음이 새것인데, 그 새것이 중요해요. 새것은 인간은 모릅니다. 새것을 인간은 뭔지 모릅니다. 새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새것을 생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결론 부분을 위해서 미리 신약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여기서 무엇과 무엇이 대비되는지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자비하심,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그냥 용서한다는 그거예요. 그게 긍휼이죠.

그렇게 그냥 용서한다는 것과 무엇이 대조되느냐 하면, 내가 열심히 제사 드리고 예배드린다는 것, 예배 제사 드릴 때는 반드시 뭘 바친다? 예물을 바치잖아요. 하나님께 예물 바치고 제사 드려야 복 준다는 것은 구약 내내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익히 알고 있는 문제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 자비로 오셨잖아요.

자비로 오시면서 심판될 자에게는 자비로 오지 않게 심판해 버리고, 자비를 받을 자에게만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안 믿는 자에게는 심판의 하나님이고 믿는 자에게는 자비의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자비를 아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죠. 자비가 없었더라면, 주님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이것이 우리 안에 늘 자리 잡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러한 주님께서 오시면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제사 드리려면, 예물을 바쳐야 하고, 사도행전에서는 헌금도 바치고 하는 일이 있는데,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원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교회 담당자, 목회자, 당회장들은 이게 굉장히 신경 쓰이는 문제거든요.

나는 예물을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한다고 할 때, 이 소리를 듣고 교인들이 헌금도 한 푼 안 하고 예물도 안 가져오면, 교회 운영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어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자꾸 쉬쉬하고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뭐, 이천 년 동안 교회는 그렇게 해서 다 부흥했어’라고 하는데 교회 부흥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근원적으로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도 아닌 걸 교회 부흥하면 그게 뭡니까? 대순진리교입니까? 대순진리교 부흥해서 호텔사업 하잖아요. 부흥 많이 되었네요. 그런데 교회가 무엇이냐 하면, 누가 교회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이렇게 답하세요.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게 교회입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 쪽에서 살림 차리는 것이 아니에요.

구색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이 임하면 교회예요. 주님이 임하면. ‘주님, 숫자가 너무 없지요. 두세 사람인데, 한 사람 어디 가고 우리 둘밖에 없어요’라고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괜찮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해서 그 교회가 된다면 그다음부터 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우리 둘이나 남았지? 그지? 세상에 이런 자비가 어디 있나?’라고 바뀌는 거예요.

이게 뭐라고요? 이게 바로 새로움이라고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교회 되게 하고자 한다면 그게 교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난 후 성령을 받은 열두 사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건 누구나 다 아는 거예요. 뿔뿔이 다 헤어졌어요. 열두 사도가 새로운 집합체를 만든 적이 없어요. 제가 알기는 그래요.

각자 순교할 자리로 흩어졌어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 서쪽, 북쪽, 전부 다 흩어졌어요. 남쪽으로 간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는데, 도마는 인도까지 갔다는 거예요. 어쨌든 흩어졌어요. 하나의 집합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함께하겠다는 겁니다. 방탄 소년단 저는 잘 몰라요. 노래도 모르고 가사도 잘 모르는데, 방탄소년단이 각자 흩어져 삽니까? 아마 한국에 살고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군에도 가고. 하지만 방탄 소년단 노래는 지금도 전 세계에, 특히 저 아랍계통, 알라신 믿는 그곳 아가씨들까지 전체가 방탄 소년단 노래로 위로받고 살잖아요. 그 소녀들이. ‘세상 끝 날까지 방탄 소년단이 함께 있을지어다’

그 노래가 나온단 말이죠. 그 가수의 노래가 뭐냐. 그 가수가 보낸, 그들 마음속에, 팬들의 마음속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사도바울의 편지이고 베드로의 편지이고 야고보의 편지잖아요. 마태복음 9장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9장에서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말이 참 어려운데요, 13절에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하면, 그렇다면 주님이 원하는 것이 긍휼이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를 긍휼로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보통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나는 제사를 안 받는다” 그러면 뭘 원하시는가. “긍휼을 원한다” 그러면 긍휼을 드리면 된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남에게 베푸는 동정은 할 수 있어도, 긍휼이나 자비라는 것은 인간 안에 없어요. 자기 위주로 살기 때문에 없어요.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시느냐. 13절 뒷부분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주께서 긍휼 주기 위해서, 주께서 그 인간을 인간으로 부른 게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고 죄인으로 불러요. 만약에 어떤 상사가 회사 부하직원에게 ‘김대리, 이리 와보세요’라고 할 수는 있는데, ‘어이, 죄인, 이리 와’라고 하면, 아마 사표 낼 거예요. 사람을 말이야, 네가 뭔데 나에게 죄인이라고 해? 네가 뭔데, 나에게.

왜 사람들이 교회를 나와도 예수 안 믿고, 교회 안 나오면서 예수 안 믿는 이유가, 예수 당신이 뭔데 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내가 성실하게 했던 모든 것을 죄로 짓밟아 버리느냔 말이죠. 기분 나빠서 나는 예수 못 믿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다고 해도, 예수 믿는 이 행위는, 나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쳐달라고 이런 식으로 교회 생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4대째 신앙 집안입니다’라고 해요. 4대째 신앙 집안과 내가 죄인 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 되기 싫어서 4대째라는 말하는 거예요. ‘혹시 십자가 믿으십니까?’라고 하면, ‘내가 목사요’라고 해요. 목사와 죄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내가 헌금을 이 교회에 2억을 했습니다’라고 하면 2억과 죄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재산 반을 바쳤어도 죽었는데.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이야기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죄인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인간이 ‘죄인 여기 왔습니다’라고 하겠어요. 강제로 죄인을 부르는데, 부를 때 뭐냐.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죄인 되게 해요. 죄인 되게 하는데, 그 죄인이 말씀 뒷부분에 보면 뭐냐. 옛것이라고 되어있어요.

그 대목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6~17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지금 시드기야 왕은 옛 부대예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어느 정도 죄인이냐. 만약에 바벨론이 진짜 침공했다면, 너희들 나 고소하지 마. 나 진짜 힘들어. ‘저 사람이 바벨론 제국에 대들던 사람입니다’라고 나오면, 나, 일제 강점기에 나는 잡혀서 당하잖아.

이게 자기 걱정이죠. 자기 걱정. 이게 옛 부대입니다. 자기 걱정? 나 주님 앞에 제사 드렸잖아요. 예물 드렸잖아요. 헌금했잖아요. 예배당 세웠잖아요. 나는 돌아다니며 강의했습니다. 복음 전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이렇게 하시죠. “어쩌라고? 그게 뭐 어째서? 네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거, 그게 문제다. 강의하고 해도 그게 죄짓는 행위라는 사실로 기억해야지”

왜 우리가 모든 것이 죄가 되어야 하느냐면, 그때 서야 긍휼이 긍휼 값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긍휼 값을. 지금까지 이야기해 볼 때, 이 성경 말씀은 도저히 우리 힘으로, 우리 신앙 실력으로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인간 행위에 대해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인간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답 없이 설교 끝낼 수는 없잖아요. 해답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 말은, 내가 뭘 했다는 것을 바꿔서 합시다. 내게 뭔가가 일어났다고 하세요. 내가 만약 어떤 사람을 동정해서 돈 만 원쯤 줬다. 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는데, 어떤 아이가 불쌍하게 바짝 말라서 슬리퍼 신고 왔다. ‘아줌마, 저 돈 없는데요...’ 그냥 가져가. 가져가. 식빵 하나 가지고 가. 이렇게 그냥 줬다.

이 행위, 전에는 우리가 불신자 되었을 때, 내가 주님의 십자가 긍휼의 사랑을 몰랐을 때, 일방적 사랑을, 일방적 죄사함을 모를 때는, 나름 내가 예수 믿는 값을, 이제 바르게 생활해서 주께 영광 돌렸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지 말고, 나에게 무슨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그리고 사건은 내가 간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패스해요.

왜?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졸지에 나를 옛 부대에 해당함을 고지하고,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건을 줄 때, 옛 부대에 담지 말고 새 부대에 담아야 복음이 복음대로 살아난다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옛 부대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 사건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내 행동에 대해서 좋게 평가해서, ‘주님, 주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어요’라는 그야말로 긍휼을 잃어버리고 자비와 죄 용서를 다 날려 보내고, ‘나는 이만하면 성도답죠?’라는 자기의 거짓된 행세가 툭 튀어나오는 사건을 유발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이 갑자기 쳐들어오면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라고 하시죠. ‘했습니다. 했어요. 내가 또 옛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이렇게 하면서, 성경에 보면 불신자들 있잖아요. 바리새인, 가롯유다, 그리고 복음에 대들다 탈선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새삼스럽게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심령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 욕하고 복음도 안 믿는 이단이라고 욕했는데, 그 욕할 쨉이 못 돼요.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저도 아담의 육신, 나도 아담의 육신, 똑같은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쥐나 개나 똑같아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게 바로 새로움이에요. 그게. 어제 알았던 자비 말고, 살아있는 동안 그 죄용서의 새로움이 아주 신선하게 상큼하게 매일 같이 나타나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들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일본 정원을 보면, 정원이 깔끔해요. 거기에 보면 빗자루로 쓸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어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빗자루로 쓴 흔적이 있는 것이 깨끗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정원이 깨끗합니까? 물리적으로 보면 그거나, 그거나 똑같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빗자루 쓴 흔적은 기차의 단선, 옛것과 새것이 연결 되어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모든 말씀의 채널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더러운 것이 있거든, 십자가의 뾰족한 끝으로,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으로 쓸고 지나가며, 그렇게 정화 시키고 주님이 친히 청소하신 빗자루 자국을 남기는 아름다운 마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 가도 나밖에 모르고,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자기 잘난 것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희들, 늘 수시로 오셔서, 그러한 더러운 옛것 속에서 새로움을 만들어 내시고 향기를 뿜어내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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