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성령의 매개체

아빠와 함께 2025. 6. 1. 17:01

성령의 매개체

2025년 6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9:4-10

(39:4) 유다 왕 시드기야와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길로 좇아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39:5)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39:6) 바벨론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였으며
(39: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39:8)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39:9)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잡아 옮겼으며
(39:1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사람이 도망친다는 말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아를 계속 구성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투리라고 건져서 내가 원하는 나를 계속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끝까지 따라와서는 나의 계획을 와장창 무산시킨다는 겁니다. 추잡고 더럽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잘게 부셔서 그 쪼가리들로 완전한 자기 백성을 만드십니다.

이 일을 벌리시는 현장에서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자신의 장래를 성장할 자식들이 다 몰살합니다. 즉 더는 시드기야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수시로 판단을 내리고 평가를 내리게 한 그의 두 눈, 즉 ‘보고 판단내리는 행위’는 말살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그저 하나님의 조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잡혀버려라’입니다.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벌리시는 일의 일관성에 해당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시드기야가 오해한 것은 원인을 자기쪽에 있다고 여기는 자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실행해온 일들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솝 이야기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우가 포도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잘 익은 포도에 푹 빠졌습니다. 포도를 따먹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실패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나면서 하는 말이 이러합니다. “아마 저 포도는 도저히 못막을 정도로 신 포도일 거야”라고 말입니다.

이 여우의 형편은 제대로 성공하지 못함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실패하지 못함에 잘못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수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 헤아리고 대처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인간들 각자는 알지 못한 원인들에게 밀려온 파도에 늘 휩싸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늘 결과로 들이닥치는 한 모퉁의 파도결입니다. 난처하고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땟목을 타고 가면서 땟목을 수리하는 식으로 인생 여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수리한 데를 또 수리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물에 침몰하게 됩니다.

전면적으로 손대지 말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말씀과 약속의 일관성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면서 모든 피조물에다 시간을 할당하셨습니다. 이 시간이 끝나는 날 한데 만나자는 겁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모든 우주 사물들은 동일한 속도로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경우든 변함이 없는 빛의 속도, 즉 1초에 300,000km로 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서로들 사이에 속력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간축 말고 공간축으로도 달리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곧 어떤 공간에서 살았던 시간이 끝나는 날, 즉 모든 것이 주님으로 인해 멈추는 날이 곧 약속이 완성된 날이 됩니다.

시간축 달리기를 멈추는 그 순간을 미리 경험하고 품고 산 사람이 신약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결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완성된 공간에 삼킴을 당하여 주님과 더불어 움직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혼선을 유발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0:22-25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심령에 매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에 의해서 사도는 각 성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도의 일관성을 토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1:4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드디어 사도 바울은 유다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성령에게 받은 소식이라고 하면서 극구 예루살렘을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뿐만아니라 사도행전 21:8-14에 보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치 성령님 내부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의 관심사가 이미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는 점에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살 경우에 사도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혹은 복음의 매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 1:15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조절하거나 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배하는 것과는 반대로 죄가 통과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신상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냥 놔두지 않고 주의 일을 맡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6강-예레미야 39장 4~10절(성령의 매개체)2506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9장 4~10절입니다. 구약성경 1118페이지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와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길로 좇아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바벨론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잡아 옮겼으며,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대항할 수 없는 자는 살렸고 대항했던 자는 다 죽이는 것을, 바벨론이 마지막 유다 나라, 북쪽 이스라엘은 일찍 날아가고, 남아 있는 소위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자칭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도 처참하게 몰락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굉장히 하나님이 의도를 가지고 멸망시켰습니다. 인간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행위가 어떻게 대립하고 반대되는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죽겠지’라는 것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그러한 일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여기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 왕인데, 시드기야 왕은 자기가 전쟁 중에서 패배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힘이 없어서 패배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는 하나님이 벌이는 일에 도망치고 있었던 겁니다.

도망쳤고, 하나님은 끝까지 따라갔고, 따라가서 몰락할 것을 기필코 몰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원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그래서 현재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있겠다고 했을 때, 그 주인공, 그 공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거기 모였다는 두세 사람의 모임은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모였다는 거, 그것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로 전환되려면, 우리 쪽에서 어떤 대책을 하느냐. 도망칠 생각을 하지 말고 주께서 찾아오시고 있다는 쪽으로 우리 마음을 정리해야 합니다. 주께서 너를 찾아주신다는 거. 주님께서 찾아주시는 그 이유는 우리를 잘해주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먼저 주신 계획이 있어요. 스케줄.

그 스케줄을 계속해서 나는 멈추지 않고 너에게 적용시키겠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감기 걸려서 교회 못 나왔다는 건, 주께서 감기로 찾아갔다는 거죠. 잠을 못 자서 못 오신 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도망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시드기야는 도망을 쳤어요. 도망을 친다는 것은 뭔가 급할 때 나 살려라 도망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도망친다는 것은 뭘 빠뜨렸느냐 하면, 내가 주님의 매개체라는 사실을 빠뜨린 거예요.

주께서 일하실 때, 나를 갖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빼버리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리는데, 주께서 도움 줄지 안 줄지만 생각한 거예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거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매개체로 사용하는데, 매개체라는 말은 이런 겁니다. 소리가 전파되려면 공기가 있어야 해요.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소리의 매개체는 공기죠.

빛은 모든 것을 매개로 해서 빛이 들어옵니다. 빛이 물속에 들어올 때는 빛이 굽어서 들어오거든요. 굽어서 들어온 걸 보고, ‘빛이 물에게는 못 이기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빛은 가장 최 단거리로 오게 되어있어요. 그게 최 단거리예요. 그래서 주님은 빛이 모든 것을 매개로 사용하듯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데 모든 피조물을 다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도망치면 안 돼요. 피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시드기야와 여기 사람들이 망하게 했다고 하는데, 망한 것이 아니고 재조립하죠. 공장에 보내서요. 사람의 인생은 뗏목과 같습니다. 뗏목 같은데, 뗏목을 타면서 인간들은 자기가 탄 뗏목을 본인이 수리합니다. 뗏목을 탄 채, 뗏목을 수리하니까, 뗏목이 물에 침몰 되죠.

내 인생을 계속 개선하고 바꿔나가는 거, 그거는 운전자가 자기 차를 수리하는 것과 똑같거든요. 운전자는 정비사가 아니잖아요. 차를 맡겨야지요. 자기가 뭐하겠다고 이렇게 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리콜(recall)합니다. 다시 공장에 집어넣어서 완전히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는 작업 가운데, 오늘 본문 내용이 나옵니다.

시드기야는 도망치다가 잡혔고,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판단을 내리는 그런 지점이 되는 두 눈, 보는 것으로 믿게 되는 두 눈을 바벨론 왕으로 하여금 빼게 만들었어요. 두 눈 빠지고, 자기의 미래를 보장할 아들들을 다 죽이고, 그럼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 자신은 이제 주어진 상황대로 맡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시드기야를 보면서 남의 일로 여기지 마시고, 성령께서 맨날 우리 두 눈을 뽑는다는 거, 그리고 우리 자녀들, 우리 모든 것을 주께서는 없는 존재로 삼는다는 겁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가 있는데, 손자가 투표에 대해서 자기 견해를 밝혔어요. 나 같으면 권형국을 찍는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플래카드의 색깔이 노랗다는 거죠.

노란색이 친근감을 주기 때문에 나 같으면 권형국을 찍는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판단력이라는 겁니다. 판단하는 기준이 자기 자신의 취향에서부터 나오거든요. 오늘 아침에 제가 팔공산 쪽으로 운동하러 가면서 뭘 봤느냐 하면, 대구 동구 환경청에서 나와서 청소해요. 청소하는데, 청소 포대기를 보니까 불법 현수막을 가지고 마대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현수막 철거한 것을 버린 것이 아니고, 재봉틀을 사용해서 담을 수 있는 마대를 만들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현수막은 선으로 되어있잖아요. 선을 둥글게 말아서 구(球)를 만든 거예요. 원형의 구를 만들어서 거기에 뭔가 담기게 한 거예요. 선은 안 담기니까. 여러분이 시간이라는 것을 좀 알아야 하는데, 시간이라는 것은 선으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시간을 둥글게 말아 버리면, 이게 마대가 되고 담기는 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발견했느냐 하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독일, 1879년 3월 14일~1955년 4월 18일)이라는 과학자가 이것을 발견했어요.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똑같은 속도로 간다’ 그게 뭐냐 하면, 태양이든, 지구든, 인간이든, 모든 사물이든, 모든 속도는 똑같아요.

1초에 30만 킬로, 빛의 속도로 갑니다. 보통 액셀(자동차 가속페달) 밟을 때, 속도가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것은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아니고, 축이 시간 축으로, 그러니까 1초에 30만 킬로로 시간과 더불어 가고 있는 이 속도가, 잠시 우리 느낌에 공간 축으로 삐져나가니까 속도가 차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그 말을 할 때, 아무도 이해를 못 했어요. 속도가 초당 30만 킬로로 가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그게 믿어지고, 어느 축으로 간다는 것은, 공간 축으로 빠지면 시간 축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시간과 공간이 다 같이 어떤 축이 있어서, 같은 물리적 양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하느냐 하면, 창세기에 보면 시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시간을 만드셔서, 모든 피조물 속에 시간을, 만들어진 시간을 할당해요. 배분을 하는 거죠. 배분해서 ‘우리 시간 끝날 때, 같이 모이자’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끝나는 그 순간이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도망을 쳤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추격당해서 말씀에 포로 잡혔는지, 그러니까 말씀에 담긴 사람인지, 그 두 구분으로 분류되게 되어있습니다.

끝까지 말씀이 따라와서 ‘요것은 내 것이다’라고 잡아챘는지, 아니면 ‘내가 알아서 말씀 지킬 테니까 내가 원하는 사항을 좀 만들어 달란 말입니다’라고 도망치고 있는 사람인지, 그러니까 시드기야 같은 사람인지, 예레미야 같은 사람인지, 둘로 구분하는 그 일을 주께서 하셨던 겁니다. 지금 이래서는 여러분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실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신약성경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걸 본 사람들은 역시 성경은 이해하기 힘들다, 힘들다 느껴지지만, 그중에 유독 힘든 곳이 사도행전에서도 몇 군데 나와요. 그중 하나가 사도행전 21장 4절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서 다시 약속의 땅,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스라엘인 두로에 잠시 상륙했어요.

두로에 상륙해서 짐을 푸니까, 제자들이 찾아와서, 4절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라는 이 대목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제자들이 바울을 걱정해서, ‘성령께서 그러시는데, 우리 뜻이 아니고요, 사도님께서 오해하지 마시고요, 우리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절대로 예루살렘에 가지 마세요. 가시면 잡힙니다’라고 했어요.

또 10~12절에 보면,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되어있어요.

이 대목이 왜 이상하냐 하면, 성령께서 개입했잖아요. 성령께서 이야기했다면,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이 말을 들어야 하죠. 성령께서 이야기하니까. 사람의 말이 아니니까요. 어떤 분은 ‘나는 사람의 말을 안 듣는다’라고 했는데. 사람의 말이 아니고 성령의 말이니까, 이건 들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아, 나는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고집을 부립니다.

고집을 부리면 어떤 모순이 생기느냐 하면, 성령과 성령이 다투는 바가 되어버리죠. 다 같은 성령의 말씀인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해석을 그렇게 하지 않고, 해를 입으니까 올라가지 말라는 그 해석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테스트하는 걸로 이해하는 거예요. “네가 살고 싶으면 올라가지 말라. 그러나 죽을 것 같으면 너는 올라가라. 너는 어느 쪽이야?”

사도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말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시드기야는 도망쳤어요. 왜 도망치죠? 자기가 누구의 매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 좋으라고 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나 좋으라고, 내 인생 내가 좋으라고 내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시드기야가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둘로 구분할 때, 예수님이 기어이 찾아가서 “요건 내 것이야. 내 양이야”라고 뽑아올 때, ‘야, 나는 구원받았구나’라는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제 주님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종이 되었구나’라고 이해를 해줘야 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예를 들면, ‘축하합니다. 천국에 합격했습니다’라고 할 때, ‘나는 되었어. 역시, 나는 이제 구원받았어’라고 할 것이 아니고, ‘난 이제 죽었구나’라고 그렇게, 그것도 슬프게 하면 안 되고,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구나. 내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구나’라고 되죠.

이스라엘 역사를 파괴해서 이스라엘을 완성시키는 것처럼, 리콜해서 완성시키는 것처럼, 옛날에 나를 위해 살았던 나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그 ‘나’를 리콜해서 이제는 주님께 종으로 부름을 받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걸로 이제는 전환 시켜주는 거예요. 이게 주께서 찾아옴의 원하는 것이고 노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에요.

이솝 우화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어떤 여우가 있는데, 포도가 너무 먹음직해서 어떻게든 따먹으려고 애를 쓰며, 폴짝폴짝 뛰어도 못 따먹어서, 결국 포기를 했어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여우가 하는 말이 ‘아마 저 포도는 너무 써서 못 먹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떠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의 중요한 해석은 이겁니다.

‘여우가 제대로 성공 못 했다’가 아니라, ‘충분히 실패하지 않았다’라는 겁니다. 여우의 문제점은 바로 그거였습니다. 충분히 실패하지 못했어요. 시드기야가 도망치는 것은 끝까지 내가 원인자,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겠다는 자기가 원인자 됨을 포기 못 해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뭐냐. 자기가 결과자 입니다. 원인은 따로 있어요. 자기가 원인이 아니고 나를 이런 상황에 집어넣은 원인은 따로 있고, 나는 그분의 종속된 결과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그 예가, 에베소를 떠나면서 교인들이 사도바울에게 가지 말고, 더 목회해달라고 사정하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떠나니까요. 그럴 때, 사도행전 20장 23~24절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게 사도바울의 마음인 동시에, 사도바울에게 주신 성령의 일관된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20장이거든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제자들이 말리는 것은 21장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미 “내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의 죽겠다는 나의 불안감이 주의 일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라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20장 31절에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33절에서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어요. 이 말은 내 관심사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하면서 크게 울었다고 나옵니다. 제가 이 대목을 말씀드린 이유는요, 그 당시 사도바울을 붙드는 에베소 교회 입장에서, 지금 사도바울이 도망치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를 붙드는 자기 자신의 욕심일까요?

시간이 가더라도 이 대목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할 때, 불교 신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고생하는 것은 마음에 고생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힘든 것은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심을 버리면, 소유를 버리면, 사람은 해탈의 상태가 되어서 욕심도 없이 편안해진다는 겁니다. 수요설교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람이 공산주의 사상을 따른다는 것이 정말 이상해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 속임수가 어떻게 먹히는지요. 우리 자신이 평등하기를 원치 않아요. 자기가 최고가 되기를 원하지. 학교 선생님이 문제 다 가르쳐 주고 그 반 아이들이 전부 백 점 맞으면, 그 학급에 부모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만 백 점 맞아야 해요. 남이 백 점 맞으면 안 돼요. 인간을 몰라도 그렇게 모릅니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다 잘산다’라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불교도 거짓말이에요. 이건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도 들어야 하는데, 뭐냐 하면, 내가 뭐가 잘못되어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께서 하는 고생의 매개체예요.

내가 죄의 매질, 매개체예요. 욕심의 매개체예요. 내가 욕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욕심이 나를 갖고 논다고요. 이거 모르면 불교 신자입니다. 절에 가세요. ‘마음을 낮추고...’ 낮추기는 누구 마음대로 마음을 낮춰요. 욕심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데, 욕망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데, 무슨 나를 낮춰요. 죄를 이겼다는 거, 십자가 피가 나를 이겼다는 말은, 이제부터 죄만 짓는, 죄를 따르는 나를 주께서 어떻게 부활의 세계, 천국에 이르게 하는가, 그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도망치면 안 돼요. 못나도 그냥 붙잡히면 돼요. 사도바울처럼 그냥 붙잡히면 됩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사는 그거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붙잡혔는가. 자기가 주님 가신 길에 매개체 되었지요.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라고 나오고 그 뒤에도 계속 태장에도 맞고, 맞고...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30절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께서 조금도 내가 주인공으로 튀지 않도록 밟을 대로 밟아버렸는데, 그렇게 밟힘으로써 이런 못난 인간도 합격했다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미 이렇게 성령으로써 천국에 넣어줬다는 것을, 내가 내 것을 조금도 내세울 수 없는 환경을 통해서 비로소 이게 전파된다는 겁니다. 전도는 사도바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전파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착하게 살고 영광 돌릴 수 있을까 하는 이것이 얼마나 이방 종교적이고 악마적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어떤 형편이든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만든 그 결과물로 하루하루 살아감에 대해서 감사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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