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된 두 사람
2025년 6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9:11-18
(39:1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39: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39:13) 이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39:14)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중에 거하니라
(39:15)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39: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39: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39:18)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자가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서 만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이 사형장까지 따라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즉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상대의 목숨을 대신해서 자신이 죽겠다고 나설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돌아올 대가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원을 모두 각자 구원이야” 하지만 구원되고 난 뒤에 만나서 대화해보면, 더는 모르는 사이로 헤어질 수는 없는 단일한 운명에 얽혀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파급효과는 컸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헤치려는 내용처럼 들리는 계시였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를 지킬 생각하지 말고 나라가 망하기를 받아들여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 국가를 나를 수호하고 보존하는 국가이기에 그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국가보다, 아니 더 큰 범위인 하나님까지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동원되라고 요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건방진 태도는 인간이 출생하면서 벌써 문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독하게 악한지 본인도 미처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서 구원받겠다는 자세가 기껏 나를 미래까지 보장해달리는 기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국가의 내부 단결성을 선지자가 훼손한다는 것은 곧 국가 반란죄에 해당될 수 있기에 고소당하고 즉결 처분 형식으로 죽습니다. 아주 위태로운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예레미야 38:8-9에 보면, “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고하여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방인인 환관 에벳멜렉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레미야 인생에 끼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사태가 안 돌아가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달리 말해서 예언을 믿는다는 것이 인간에게 성사될 일입니까? 예언은 그냥 일단 그 달성 여부를 지켜보다가 얼추 예언대로 된다고 할 때에 도박걸 듯이 그 가능성 믿고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까?
국가에서 하는 선거나 게임 같은 것도 확률성을 짐작해서 자기에게 유일한 식대로 해석해서 결과를 예측하려 합니다. 무모함에 최대한도로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유다 나라는 망한다고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발언은 그동안 쌓아온 군사력 비교나 정치적 지략과 경험 때문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에게는 그냥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논리성을 차단하면서 말입니다. 예언대로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그것은 인간의 소관도 아닌 겁니다. 이 말은 이 예언을 듣고 분노하는 군중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든 아니든지든 그것조차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일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서 예레미야도 구원하고 에벳멜렉도 구원하십니다. 예미야나 에벳멜렉이나 모두 사람보다 모든 것을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앞으로 세상이 그렇게 진척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구원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는 행위가 나옵니다.
만약에 제 때에 바벨론 나라가 예루살렘까지 안 쳐들어왔다면 에벳멜렉이나 예레미야나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핀잔을 받았을 것입니다. “경솔하게 나서지마 하나님 말씀이라고 다 곧이 들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 이번 기회에 명심했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못믿고 또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본질 자체가 제사장에 대한 보호 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이 자체가 믿음을 요구하는 계시에 해당됩니다. 민수기 3:11-1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대신’은 구원 개념의 요소로서 들어가게 됩니다.
즉 구원될 자로 하여금 ‘누군가 나를 대신 했구나’라는 의식이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인간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면서 경로를 남겼습니다. 이 경로에 대해서 보통 ‘구원의 경로’라고 이해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을 ‘저주하는 경로’라는 사실입니다.
산사태로 인하여 계속 사이로 자리잡은 아름다운 마을이 통째 흙더미에 묻히는 것처럼 주님이 오신 경로에 계시가 담겨 있는 이 현상을 유발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에 레위지파를 가지고 나머지 12지파를 대신케 하므로서 다른 지파들은 자신의 구원에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게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이들이 다 잠자고 있는 밤에도 비가 주룩주룩, 처벅처벅 내려서 자기 할 일을 쉬지않고 하듯이 말입니다. 밤비는 밤에도 잠자지 않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쉬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서 대신하심의 일을 수행한 덕분에 오늘도 성도는 저주에서 구원으로 이동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의 활동이란 1년 내내 순환되는 절기와 더불어 움직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 중 각 가장들은 많은 예물을 들고 대제사장이 있는 곳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에게 가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내용 중의 핵심은 항상 희생제물의 죽음 곁에서 일하는 레위지파 없이는 다른 지파도 없다는 점을 명심받습니다.
그것이 레위지파가 다른 지파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직통하는 지파가 레위지파로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의 효력으로 기도가 응답되는 겁니다. 오늘날에 있어 레위지파는 성도입니다. 주님께서 이 성도를 위해 ‘대신’ 기도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의 기도가 묵살되는 것과 그렇게 해서 알려지는 주님의 뜻 성취가 예수님의 활동으로 실시됩니다. 마치 쉬지 않는 밤비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끼리의 대화에서 십자가의 대신 하심에 관한 내용이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7강-예레미야 39장 11~18절(구원된 두 사람)2506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9장 11~18절입니다. 구약성경 1119페이지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대로 행하라, 이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중에 거하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예언이 절망 가운데서 주어집니다. 국가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힘이 집결 되어있는 곳이죠. 그런데 그 국가가 나의 보호막이 되지 못할 때, 그동안 우리는 이 국가라는 든든한 배경 속에서 어느 정도 안일하게 살아왔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 때문에 예언이 막히고, 국가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이 막히고, 국가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막힌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온 교회가 다음 우리나라 차기 대통령도 보수 쪽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온 교회가 철야 기도했습니다. 자기 기도가 무슨 계시인 듯. 그러나 국가에 대해서 애착을 느낀다는 것은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의 반영이죠. 국가를 그만큼 자기 안녕과 부와 보존을 위해서 애썼다면, 그러면 국가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던 하나님을 인간들이 얼마나 이용해 먹었느냐는 말입니다.
엉터리 하나님이에요. 사람들이 엉터리 하나님인 줄 모르는 것은 내가 원초적으로 문제성 있는 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멀쩡한 하나님을 자꾸 옳은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멀쩡하지 않은 데서 건져냄으로써 내가 그동안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구원의 효과입니다.
내가 저런 데서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 행동했구나. 이런 것을 끄집어내 줘야, 발견하는 거예요. 그게 불연속성인데요, 자꾸 연속성, 연속성으로 이어가려고 하지 말고, 뭔가 끊어주는 것이 있어 줘야 해요. ‘나, 이제 죽었다. 나는 인간도 아니라’ 원래부터 인간도 아닌 게, 언제부터 인간 행세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죠. 끊어줄 때 구원이라는 말을 했듯이,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는 제목이 구원받은 두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 얼른 보면, ‘어, 예레미야가 구원받았네’라고 되지요. 갇히게 한 것은 하나님 믿는 나라의 왕, 시드기야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압박해서 가두게 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누가 구원했느냐 하면, 하나님 믿는다는 나라의 실체를 들춰내고, 적에 의해서 예레미야가 구원받아요. 같은 조선 민족이 독립투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 사람이 독립투사를 구원하는 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예요. 내가 내 구원설계에 대해서, 내가 내 예상을 슬그머니 집어넣어서, ‘하나님, 제 구원 예상한 거 맞지요? 그죠?’라고 자기 자랑을 약간은 획득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주께서 어떻게 도사같이 아셨는지, 그걸 꺾어버려요. 내가 싫어하는 자의 바램에 의해서 내가 권을 받다니. 이건 참 수치스러울 정도로,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구원되어서, 나중에 정말 고개 숙여서 고맙다는 절을 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고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 사람 원수로 생각했는데, 원수가 날 구원한다면, 그때는 너무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어떻게 살지요? 이만큼, 우리가 예상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받는 예레미야가, 구원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고 이제 구원받고 난 뒤에도 또 예언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예레미야 예언대로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스라엘 나라도 없고 하니까, 꼭 예언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예레미야 구원이 아닙니다. 여기 16절에 보면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서, 17절에 “내가 그날에 너를 구원하리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구한 한 사람, 그리고 여기 에벳멜렉 구한 그 한 사람, 그래서 오늘 제목이 ‘구원받는 두 사람’이 됩니다. 구원받는 두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기서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되어야 할까요? 성립되어야 하겠죠.
이런 점이 성경을 보면서 난해한 내용에 해당됩니다. ‘너 구원받았어?’ 구원받았어. ‘나도 구원받았어’ 그럼 둘 사이에 무슨 관계죠?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어떻게 수천 킬로 떨어져 있고, 시대도 따로 떨어져 있고, 아브라함 구원받았어, 나 구원받았어. 아브라함과 나와 무슨 관계지? 이 관계를 엮어본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논리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성경, 특히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바로, 어떻게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내막까지 사도바울 편지 내용 속에 다 들어있어요. 자,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예레미야 38장 7~13절까지 보면, “왕궁 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의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고하여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라고 했어요.
환관이 대장 정도 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환관이에요. 그것도 이방인입니다. 구스인이죠. 지금의 에티오피아 아니면 수단인지 그건 확실치 않지만, 대충 그 동네 사람이죠. 옛날 남쪽에서 온 그쪽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남쪽이요. 어쨌든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 예레미야 잡히는 것을 보고, ‘이건 이래서는 안 됩니다’가 아니라 이걸 악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살았어요.
비록 구덩이에 갇혔지만, 당장 죽지는 않았어요. 시드기야가 신하의 말을 들어주면서 죽음에 가까운 징벌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구덩이에 집어넣은 겁니다. 그런데 환관의 말을 듣고 시위대 뜰로 옮겼어요. 그러나 여전히 감금된 상태죠. 감금된 것은 곧 아무 일이 없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 일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그렇게 예레미야를 공격하고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시드기야, 말 안 듣는 시드기야의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그들이 망하고, 왕은 눈 뽑히고, 아들들 죽고, 그리고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었잖아요.
그때 타이밍 맞춰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까지 들어오지 않았으면, 예레미야는 그냥 죽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죽어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지, 예레미야의 존재 자체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예레미야에게 아직도 하실 일이 남아 있는 거예요. 예레미야를 가지고 죽었다가 빼냈다. 여기에 오늘 나오는 환관, 에벳멜렉은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도저히 참지 못해서, 예레미야의 팔자와 운명에 자기가 선뜻 끼어들었어요.
적극적으로, ‘나는 예레미야 편입니다’라는 식으로 끼어들었어요. 그러니까 바벨론 군대가 안 왔으면, 이 구스인 에벳멜렉도 죽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니까, 그냥 뭐 어찌된 것이 아니고, ‘너 조금만 있어봐. 네가 추천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말대로 안 되면, 너도 죽었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성장 과정이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면, 서로 이미 창세 전부터 식구가 되어버리고 예수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나중에 복음이 와서 서로 구원받고 난 뒤에 대화를 해보면, 비로소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어요’라고 이야기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갔을 때, 오늘 본문에서는 구스인 에벳멜렉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에벳멜렉이 이런 소리는 안 할 거예요. ‘나 아니었으면 예레미야 벌써 갔어. 내가 어떻게든 구덩이에서 빼냈잖아. 나 아니면 즉사했어. 나 아니면 당신은 죽었으니까, 당신은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이야기해’라고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그렇게 이야기했겠느냐는 겁니다.
안 했지요. 안 했어요. 예레미야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주청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그의 편을 들겠어요? 예레미야의 그 말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인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때려죽여도, 누가 뭐래도 그 말은 하나님의 계시야. 내가 선지자들 많이 만나봤잖아. 그런 것들은 다 인간을 좋게 하는 그런 말이고. 이건 정말 하나님의 계시야’라고 하는 거죠.
말리지 마. 이건 내가 알아서 예레미야와 한편 먹을게. 이러한 모습은 여기에서는 에벳멜렉과 예레미야의 관계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던 근원적인 본질이었습니다. 민수기 3장 11~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에 무슨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레위인을 택하여, 레위 지파 말고 다른 지파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체했다, 대신했다”라는 말이 나와요, 여러분은 십자가 의미 가운데, 대신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을 여러분도 아시죠? 대신했다는 거, 이게 이스라엘의 기본 원리입니다. 대신했다는 말은 직접 통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직접 통하는 자를,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일부를 택해서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을 내가 선택해서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직접 통하는 자. 그러면 이 레위인들이 활동할 때, 어떻게 활동하느냐. 하나님 절기의 순환에 따라서 활동해요. 하나님의 내리신 절기가 없으면 그들은 굶어 죽어요. 기존 교회 목사들 큰일 나죠.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없으면, 교회 재정 곤란하지 않습니까?
고난 주간 같은 거요. 그리고 자체적으로 추가도 하죠. 11월 31일, 양력 1월 1일, 이렇게 해 넘어간다고 절기 지키지요. 절기가 뭡니까? 돈 내라는 거죠. 재정을 보충하려고 자꾸 부각시키는 거죠. 추수감사절, 이런 때. 하여튼 추수감사절 할 때, 눈치 없는 촌사람들은 자기가 추수한 고구마 갖다주고, 앵두 갖다주고, 이렇게 하는데, 교회에서 요구하는 건, 전기세, 수도세, 이런 거 내는 현찰입니다. 그 고구마 몇 푼 안 해요. 성의 표시는 되겠지만. 전에 제가 이야기했지만, 예전 산 너머 교회에 있을 때, 자두 많이 먹었습니다. 나중에 자두가 너무 많아서 얼마나 미안한지요. 고맙지요.
제사장은요, 나머지 열한 지파에서 가져다주는 절기로 인해서 사는데, 그들이 절기에 한턱 크게 써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사는 데 급급한데, 당신은 늘 죽음과 붙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죽이신 어린양의 희생,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과 같이 붙어 사는 당신의 작업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아서 우리가 이렇게 풍족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걸 고백하는 입장에서 그들은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려야 하는 거예요.
절기일 때도 역시 주고, 절기도 그냥 절기가 아니고 사정을 잘 알아야 해요. 절기일 때는 이스라엘 각 가정에 가장을 다 모아서 신앙 세미나를 열어요. 세미나를 열 때, 율법 가지고 열거든요. 율법 가지고 하면서 신명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민수기, 출애굽기에 나오는 내용을 하면서, 그 내용에 기본으로 담겨있는 것은 아무 땅도 없고, 아무 경작도 안 하고, 아무 노동도 안 하고, 아무 사업도 무역도 안 하는 그런 레위인이 여러분 곁에 왜 있는지, 과연 여러분에게 빌어먹으려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있음으로써 여러분이 사는지, 그 관계를 분명히 하자.
당신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직접 하나님을 못 만나. 당신들은 직접 하나님을 못 만난다고. 기도할 때도 양 들고 우리에게 와서 기도해야, 우리가 대신해서 해주는 게, 그게 대신이에요. 뭐 하늘 쳐다보며 기도하면 되는 줄 알아요? 하나님은 율법 통로를 따라서 기도하라고, 제사 제도를 통해서 기도하라고 했어요. 그런 걸 자꾸 놓치면 안 돼요.
얼마전 스위스에 있는 블라텐(Blatten)이라는 마을이 있었어요. 관광객도 많고 너무 평화로운데, 그 블라텐 마을을 사진으로 보게 되면, 90퍼센트 이상이 깊고 하얀 계곡으로 되어있고, 위에 하늘이 조금 보여요. 그리고 계곡 밑에 동화같은 마을이 있는데 얼마나 예쁜지, 호수도 있고, 강도 흐르고, 이건 정말 장난감 회사에서 만든 장난감 집처럼 생긴 집도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을 보니까, 위에서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서 200만 톤의 토사가 흘러 내려오고, 그 아래 전체가 완전히 시커먼 물로 덮였어요. 맑지도 않은 시커먼 물로요. 아름다운 동화마을 없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어요. 빙하가 내려오는 그 경로가, 예수님이 내려오는 경로가, 사람들은 구원의 경로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물론 구원의 경로가 맞아요. 그런데, 그게 저주의 경로라는 것을 사람들이 몰라요. 세상을 완전히 저주로 덮는, 저주를 동반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도 몰랐어요. 레위인들이 매일 같이 희생양을, 그것도 아침저녁마다 잡았으니까, 매일 같이 그 희생양 죽음과 같이 되는 그 작업에, 그 일에 매진하는지, 그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게 뭐냐. 대신하는 거예요. 누가 대신하지 않으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대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 없습니다. 지금도 주께서 대신해서 기도합니다. 맨날 우리 기도만 기억하는데,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도하게 하고 그걸 거부하고, 주께 기도가 응답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 기도는 그냥 축복이고 내가 잘되는 거니까. 그걸 무시하고 주님은 우리 뜻대로 하는 그것을 심판의 자리로 여기고, 심판의 자리에서 주님의 기도 능력으로 그것을 뽑아내는 과정을 우리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며칠 전에 새벽에 비가 온 적이 있어요. 일주일 전인가 비가 왔는데, 빗소리를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어요. 뭘 느꼈느냐 하면, ‘왜 비는 밤에 잠을 안 자지?’ 왜 이렇게 밤에 잠도 안 자고 내리느냔 말이죠. 주룩주룩주룩. 나는 자는데, 비는 바빠요. 쉬지도 않고 내려요. 그게 밤비 아닙니까? 밤비는 누가 일하신다는 뜻입니까? 주님께서, 쉬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신 분이 지금도 주께서 일하시잖아요.
우리는 왜 그걸, 그 밤비의 수고를 모릅니까? 아무도 내 인생을 대체 안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리는 거지, 누가 나를 대신한다는 생각이 없어요. 왜? 나는 그만한 가능성과 그만한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데 구원은 누가 대신해서 구원해 준 거예요. 우리를 대신해서. 옥에 있는 예레미야를 건져낸 것은 에벳멜렉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대신해서 목숨 걸고 간청해서 산 거예요.
예레미야가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에벳멜렉이 그걸 가지고 내 덕에 네가 산 거라고 그러면 안 돼요. 예레미야의 말씀이 예레미야도 살리고 에벳멜렉도 같이 살리는 둘 사이에는 예수님의 대신하심, 대신 죽으심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 관계가, 서로 모르는 여러분 사이에, 인생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잖아요. 과거 이야기해봤자 소용없어요. 이야기해도 몰라요. 그걸 못 느껴요. 그건 사적이고 개인적인데.
다만, 이렇게 자기 바깥으로 못 나가는 우리 자아를,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말씀, 복음의 말씀, 대신 죽으심으로 한마음으로 묶여있다는 것은, 이게 주님께서 하나의 너희들이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통로가 되고 연락책이 된다는 것을 알리면서 아직도 우리를 이 땅에 살아남게 하시네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렇게 산 것은 내 노력 덕분이다. 맞습니다. 노력 덕분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안목으로 봤을 때는 (주님)나 때문에 네가 살아있음을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심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니, 우리의 어설픔과 주님의 성실함이 늘, 같이 만나는 그런 남은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