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속의 타자
2025년 5월 1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26-33
(11:26)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11:27)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11:33)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여로보암이 등장합니다. 그는 솔로몬 밑에서 일꾼을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함을 보였기에 솔로몬이 감독직을 맡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왕이 아닙니다. 그저 왕이 하는 일에 동원된 종일 뿐입니다. 여기서 왕이라는 자리와 종이라는 자리 사이에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왕이란 일반 백성들이 왕을 세우면 언제든지 세울 수 있고, 백성들이 반대하면 얼마든지 왕이라도 그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일반인들이 자기 자기를 평소에 바라보는 사고방식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지정받은 자리는 인간들에 의해 세워지고 끌어내려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이든지 언약이 여전히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자리가 왕 자리입니다. 집안의 개와 종의 차이는, 개는 기르는 것이지만 종은 부리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로보암의 인식이 솔로몬 왕의 인식과 차이납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자신을 위한 자신이 아니라 왕을 위한 존재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게 되자, 하나님쪽에서 언약의 실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야 될 상황을 조성하셨습니다. 선지자 아히야를 보냈습니다. 이 선지자는 새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선지자가 걸친 새 옷이 가차없이 찢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나쁘고 누가 옳다로 이해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나 언약의 본질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솔로몬이 과오로 인해 숨어있는 언약의 본질이 차갑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의 새 옷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말해줍니다. 왕의 자리란 언약과 관련되어 있지 결코 민중들의 요구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면서 솔로몬의 자리는 참된 언약의 왕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서 일반인들이 생각한 왕의 자리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이 잘못된 왕의 자리는, 힘의 세기와 권력의 집중력으로 조성되는 그런 자리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이스라엘 내부를 통해서 들추어지게 된 겁니다.
솔로몬이 그동안 앉았던 왕 자리는 다윗 언약을 통해서 규정된 다윗 왕의 자리의 연속입니다. 여로보암 같은 경우, 자신이 왕족 출신이 아니라 아예 왕됨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선지자가 계시를 들고 자기에게 찾아오는 순간부터 그는 왕의 자리가 곧 힘 있는 자의 왕으로 굳히게 됩니다.
이는 언약의 특별남이 삭제된 왕 개념입니다. 다윗의 경우,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진정 이스라엘 왕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경우가 바로 시편 51:3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즉 다윗은 출생 자체가 죄와 더불어 있는 처지였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을 이스라엘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취지와 관련있습니다. 시편 3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이 말씀은 신약의 로마서 4:6-8은 이렇게 적용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즉 ‘불법의 자리’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면 ‘사하심’의 의미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불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불법이란 내 이산, 내 공간에서 벌어진 내 삶이 나를 위한 삶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여로보암의 삶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섬길 때, 잠자는 여로보암의 요소가 깨어난 겁니다.
즉 힘이 있고 권력 있으면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는 인식 말입니다. 왕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쟁취될 수 있는 자리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다윗 언약의 복을 받아 온 나라가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그 대단한 이스라엘을 솔로몬 자신을 위한 나라라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종에 불과한 여로보암이 왕이 자리를 넘보는 심보와 동질임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다윗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 왕인 다윗이나 솔로몬은 진정한 언약적 종의 자리에 앉은 왕입니다. 솔로몬 이후 성경에 나와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은 이 지상에서 형편없이 망가지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3-14)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받으시는 종이 왜 형편없는 몰골이 된 겁니까? 그것은 이사야 53:11에 나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어떻게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까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나의 종의 망가짐이 자신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고백할 자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즉 그분이 찔림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허물과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죄악된 존재라는 인식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여로보암과의 차이점은 솔로몬 본인이 망가지므로서 비로소 자기 안에 계속 다윗이 나타나므로서 솔로몬은 더는 자기를 위한 삶은 없습니다.
솔로몬은 선지자가 되었고 예언자가 된 겁니다. 마치 약속의 땅에서 만나가 그치면서 떡으로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 생명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누가 성도일까요? 자신이 세상에서 애써서 얻어낸 모든 것을 내 것이라는 여기는 바로 이것이 불법인 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속에 있는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한시적인 우리 것은 늘 갉아 먹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밥값한다고 해서 불법이 아닌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0강-열왕기상 11장 26-33절(솔로몬속의 타자) 25051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1장 26-33절입니다.
열왕기상 11:26-33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여기에 반역자로 ‘여로보암’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은 왕이 아닙니다. 현재 솔로몬만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여로보암에 대해서 열왕기상 11장 28절에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라고 해서 솔로몬이 여로보암에게 일을 맡긴 거지요.
솔로몬은 일을 시키는 왕이고 여로보암은 왕이 아닙니다. 그냥 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누가 반란을 일으키는가? 종이라 할 수 있는 여로보암이 종 중에서도 큰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규합해서 솔로몬왕에게 대드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여러보암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솔로몬 너나 나 여로보암이 차이가 뭐가 있느냐? 똑같은 인간 아니냐? 차이가 있다면 솔로몬 당신에게는 백성들이 있고, 권력이 있고, 소유가 넉넉하고 나는 당신보다 그런 것이 적다는 것뿐이고 나나 당신이나 똑같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여로보암은 왕이 아닌 것이 감히 왕에게 대든 셈이 되었어요. 그러면 솔로몬의 위치, 자리는 뭐냐? 왕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왕 된 것은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다윗이 지정한 다윗 혈통의 왕이고요, 다윗이 왕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왕이 나타난 형태가 이스라엘의 왕이예요.
보이지 않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왕을 내려줬습니다. 그런데 감히 왕도 아닌 자가 ‘너나 나나 힘이 좀 더 세다 약하다, 권력이 있고 없고 그것뿐이지 지금이라도 내가 권력을 끌어모으면 당신 자리 빼앗을 수 있어.’라는 인식은 곧 무엇에 대한 도전이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드러내는 그 본질에 대한 도전이에요.
여로보암 보기에는 솔로몬도 똑같은 인간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솔로몬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솔로몬이 앉아 있는 그 자리, 그 직분, 위치가 하나님이 정한 거예요. 여로보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힘의 서열로 겨루자는 거예요. 누가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가, 그것으로 겨루자는 겁니다.
그러나 솔로몬 입장에서 ‘이것은 인간이 정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해 준 자리인데 그 가치를 네가 지금 모독하고 있다.’라고 본 겁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대들었으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그 차이점을 아는 것이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겁니다.
왕의 신분은 백성들이 힘 모으면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힘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솔로몬의 자리는 말씀으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된 겁니다. 이 차이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종이라는 것은 왕 앞에서 어떤 입장이냐? 옛날 조선시대 선조 왕 때 이야기입니다. 고관대작의 종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 집에서 개를 키우는데 주인이 그 개를 아주 예뻐했어요. 종이 무심코 하는 말이 “내가 개보다 못하구나. 개는 저렇게 예뻐하는데 우리도 좀 예뻐해 주면 안 돼?” 이렇게 할 때 여주인이 이런 중요한 말을 했어요. “개는 기르는 것이지만 종은 부리는 것이다.”
종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선을 넘어서는 안 돼요. 종은 철저하게 종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종은 자기를 위한 삶은 용납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위한 삶은 없어요. 자기 시간 없고요. 자기 공간 없어요. 여로보암을 솔로몬이 지명했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서 여로보암에게 지명한 거예요.
그 자리를 지켜줘야 해요. 지금 솔로몬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여로보암으로 하여금 솔로몬에게 대들도록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반란이고 모독인 거예요. 이것은 솔로몬이 지켜야 할 자기 자리,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조건하에 왕이 된 그 자리인데 솔로몬이 거기서 비켜났기 때문에, 종이 종노릇을 해야 하는데 감히 왕에게 대드는 이탈적인, 곧 언약 질서, 신분 질서, 그 자리의 질서가 엉키는 사태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거예요.
솔로몬 네가 원래 자리를 안 지켰다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로보암을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상 섬긴 솔로몬이나 여로보암이나 똑같지 아니한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경솔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솔로몬은 망하면서 비로소 다윗을 드러내요. 다윗 언약을 드러낸다고요.
여로보암은 그게 없어요.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는 순간 솔로몬이 망한 것이 아니고 솔로몬 안에 들어 있던 다윗 언약이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다윗 언약이 솔로몬에서 가려지지 않고 다윗 언약이 다윗 언약대로 그대로 노출되려면 솔로몬의 범죄를 통해서도 다윗 언약은 멈추지 않고 고유의 자기 역량과 언약적 할 일을 다 해내고 있는 겁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은 언약대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는다.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할 때 이걸 생각해야 해요. 인간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간에 율법의 고유한 그 능력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이 율법대로 잘할 때는 복을 받았잖아요. 이것을 두고 솔로몬이 잘했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언약은 언약대로 일관성 있게 능력을 발휘하는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면 솔로몬이 우상을 섬겨서 나라가 뒤집어졌다고 할 때 ‘아이고, 솔로몬 어쩌나?’ 이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역시 언약은 생생하게 언약 본래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구나. 아, 정말 하나님이 왕이시지. 솔로몬은 껍데기였다.’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로보암은 이걸 몰라요.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볼 때 너라는 개인, 나라는 개인이 차이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왕이라는 자리는 힘이 세서 왕이지 힘없으면 너 왕 아니야.’라는 것이 여로보암 생각이고, 솔로몬은 자기가 우상 섬겨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비로소 ‘내가 왕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은 자기 모든 힘과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깨어져 가면서, 삭제되어 가면서 비로소 자신이 여호와의 종 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종이라는 것, ‘나는 왕이 아니고 나는 왕의 종입니다.’라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종이라는 개념을 성경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종이라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성경인데 두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여기에 종이 나오고 그 종을 뭐라고 묘사하느냐 하면,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그 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4절에 보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즉 평범한 보통 인간보다 심하게 상하였기에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왜? 상해도 너무 상했으니까. ‘저래서 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인생이 엉망으로 망가지지?’ 이렇게 놀랄 정도로 망가진 모습이지만 나중에는 그 종이 15절에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왕들이 입을 봉할 정도로 놀라버려요. ‘저분이 저렇게 되었어?’ 하고 놀랄 일을 주께서 종을 통해서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으키는가? 이사야 53장 11절에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했어요.
그러면 그 종이 그냥 말로 담당했습니까? 그 종이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으로 어떻게 남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그 말이지요. 이사야 53장 7-8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하였으리요?’라고 묻는 거예요. 예수라는 분이 형벌 받을 때, 심문당하고 처형당할 때 ‘우리의 죄를 씻는 방식이 저 방식밖에 없었어’라고 누가 감히 입을 열어서 고백할 수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아, 참말 인생 안됐다. 착한 분이었는데. 그분의 영혼이나 빌어주자.’ 이게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숨은 비밀이 있었던 거예요, 숨은 비밀이. 주님을 동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들로서는 동정심 많은 착한 짓이라 생각하겠지요. 다윗 언약은 그것을 뭐로 규정하는가? 그것을 불법으로 규정해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시편 32편 1절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시편 32편의 이 말씀이 로마서 4장 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은 예수님이 형편없이 된 것을 보고 동정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자기가 불법 된 자, 다시 말해서 자기는 폐기물이고 태어날 때부터 오류이며, 실패며, 죄인이며, 정신병 환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른다고요. 자기는 멀쩡하니까요.
그런데 다윗 언약의 계통으로 오신 여호와의 종이 다윗 언약에 준해서 이사야 53장 5절에서 도수장, 도살장에 끌려가는 종으로서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죽어갑니다. 그리고 미리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끝입니까? 끝이 아니지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라고 해놓고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무슨 뜻입니까?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없다고 여기고, 우리의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이 없다고 여기는 자를,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허물이 있고, 우리는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죄 덩어리로 태어났음을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4장 7절에서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했거든요. 불법을 사하심을 받는 자, 그러니까 출발점이 어디에 있느냐? 불법이어야 해요. 불법이 뭐냐? 그 불법이 여로보암이에요. ‘내 시간 모든 내 것이고, 내 공간도 내 것이고, 내 목숨 내 것이고, 내 인생 내 것이다. 나는 누구의 종이 아니다. 내 인생은 나를 위한 삶이다.’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뭐냐? ‘나의 모든 삶은 왕 나를 위한 삶이었고, 왕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위한 삶을 살았어야 하는 것이 나였다.’ 이게 숨어 있는 다윗 언약의 실체입니다. 솔로몬은 잘나갈 때 본인이 왕인 줄로 알았어요. 하나님이 복 주니까 자기가 잘해서 복 받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솔로몬의 껍데기가 벗겨집니다. 불법으로 태어난 인간이 내 힘, 나의 시간, 내 의지, 내 삶 위주로 돌아가는 이 우상…, 우상은 그런 거예요. 나를 돕기 위해 믿는 신이 우상입니다. 나의 삶을 허무는 신은 참된 신이고, 나를 지켜주는 신이 우상이에요. 솔로몬이 자기가 너무 잘 살았잖아요. 그걸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외교정책을 통해서 많은 인질을 잡은 거지요. 애굽이나 주변 나라의 공주들과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튼튼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이스라엘이 있어 줘야 내가 왕이 되고, 왕이 되어야 여로보암한테 “야, 너 봉사해. 요셉 지파 있지? 그 동네 건축 너한테 책임 지울게.” 하고 여로보암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어요. 그때 여로보암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여로보암 자신도 나는 솔로몬의 신하, 종이 된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솔로몬과 여로보암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자리가 장차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종 되심을 위한 왕이라는 자리인 것을 솔로몬은 일찍이 몰랐던 겁니다. 자기가 뭔데 그걸 알았겠어요.
나중에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그걸 알았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건 내가 삭제당하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라고 삭제당할 때 내 안에 내가 아닌 남, 타자, 나를 나 되게 한 그 타자, 아버지 다윗, 내가 삭제당할 때 그 속에서는 아버지 다윗의 신앙 고백이 드디어 동일한 선상에서, 동일한 차원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왕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저는 모친의 죄에서 출생해야 했군요. 그리고 이 죄는 출생한 입장에서는 내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죄로 태어난 인간이 자기 죄를 씻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내 죄를 내가 씻는다는 자체가 죄에요. 이게 불법이에요. 중요한 것은 로마서 4장에서 불법은 가리우심을 받아야 하지 불법이 알아서 자기가 자기 불법을 드러내 회개한다고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생각과 내 시간과 내 삶은 다 나를 위함이에요. 이게 불법이에요. 왜? 종이 아니니까, 나는 주인 행세를 하니까. 이게 여로보암이거든요. 솔로몬이 아닙니다. 다윗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면 되느냐? 불법자로 사셔야 해요. 잘하잖아요. 정말 안 가르쳐줘도 너무 잘 알아요.
문제는 일을 누가 벌이느냐? 내가 벌이면 안 돼요. 나의 외부에서 벌이는데 그 외부가 솔로몬한테는 다행스럽게도 자기 내부에 있어요.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습니다. ‘내 속에 영원한 것이 없으면 우리는 여로보암입니다.’ 그건 잘린 자예요. 내 속에 영원한 것이 있으면 영원한 것이 일시적인 나를 갉아먹어요.
그러면 나는 처음에는 내 삶, 내 삶, 하다가 내 삶이 영원한 예수님의 삶에 의해서 깎아집니다. 깎아내려져요. 삭제돼요. 저는 이것을 복권이라고 봅니다, 복권. 복권 있을 때 그 안의 내용이 ‘꽝’이 될지 ‘백만 원’이 될지 몰라요. 그런데 이걸 갉아먹어야 해요.
동전을 가지고 갉아 먹는데 이 동전이 다윗 언약입니다. 여호와의 종 되심이에요. 예수님이 도살장에 들어가는 십자가에요. 십자가 동전으로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우리 인생을 긁어내게 되면 이게 ‘꽝’인지…, 꽝은 지옥 갑니다. 영원한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으면, 축하드립니다, 천국 갑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긁어내는 거예요. 여러분, 불법자 되세요. 모든 생각은 나를 위한 거예요. 내 시간, 내 노력, 다 나를 위한 거예요. 그런데 외부에서 어떤 사건을 통해 이걸 긁어내요.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긁어내면 뭐가 되는가? 솔로몬 돼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이 진리를 알고 얼마나 기뻐했는지요. 그래서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지고 난 뒤에 날개 짓한다.” 미네르바라는 것은 신화에 나오는 진리의 여신이에요. 부엉이가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에 활동하는 것은 원래 부엉이가 야행성이거든요.
인간들이 긁어낼 거 다 긁어내고 고요하게 잠잘 때는 나의 시간 나의 삶이 없잖아요. 그냥 푹 자잖아요. 그럴 때 진리는 날개 짓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진리라는 것은,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사후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모든 진실은 그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철저하게 우리를 이용하죠.
자, 여로보암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여로보암은 ‘사람은 타고난 위치가 없다.’라는 거예요. 영원한 것도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운 좋아서 왕가에 태어나 솔로몬이 왕이 됐다는 거예요. 자기가 왕가에서 태어났으면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이럴 텐데 왕가가 아니라서 감독자, 노가다 감독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우상적인 마음을 여로보암에 들어가게 한 거예요. ‘내가 힘없어서 너에게 빌빌거렸는데 너 솔로몬 봐. 내가 힘을 모아서 당신 자리를 차지할 거야. 자리가 별거야? 힘 있는 자가 차지하는 것이지.’
이 차이가 ‘자리값이냐, 밥값이냐?’에요. 밥값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 세상은, 돈이 질서를 잡아주는 세상이에요. 제가 부산 강의 마치고 목사님이 부산역까지 데려다줬는데 이야기를 했어요.
부산에 신축 아파트 건물들이 있어요. 뭐 70층, 80층, 어떤 건 100층이 넘는 것도 있어요. 그런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목사님, 저 건물 짓고 난 뒤에 돈 없고 가난한 자에게 저 건물들을 공짜로 준다든지, 또는 돈 없는 대학생에게 그냥 공짜로 들어가서 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답변했어요. “경제가 엉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인 없는 곳에 그냥 들어가서 살라고 했을 때 시골에서 놀던 사람들, 또 시골에서 농사짓다 힘들어진 사람들이 도시에 돈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가 있다는 소문 돌면 그 사람들 다 들어옵니다. 다 들어오면 그 동네 신축 아파트가 사자성어로 ‘우범지대’가 돼요.
현재 미국의 대도시 샌프란시스코, LA, 시애틀, 미국의 유명한 도시들 중앙이, 그 고급 건물들이 우범지대가 됐습니다. 마약 하고요. 그러면 20억 아파트라고 하면 어떻게 질서가 잡히느냐? “돈 주고 들어가세요.” 20억이라는 돈을 주고 들어가야 나라가 돼요. 공짜로 구제하면 안 됩니다. 이게 밥 값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 세계에요. 여로보암 세계입니다.
힘은 힘의 순환에 의해서 스스로 힘의 질서가 잡혀야 해요. 구제하고 이러면 안 돼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해요. 이게 기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게 일시적인 거예요. 영원한 것이 일시적인 것을 깎는다고 했죠?
신명기 8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주 희한한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 이게 왜 희한한 말씀인지 한 번 들어보세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왜 이상하냐 하면, 만나는 일종의 떡이잖아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잖아요. 그런데 떡을 주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뭐, 먹지 말란 말이에요? 여기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들어있는데요. 만나를 주되 만나라는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서 말씀이 나오는 그 시대까지 내가 너희를 끝까지 계속 이끌고 가겠다는 거예요.
그 이끌어 가는 과정속에 솔로몬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직 덜 벗겨졌어요. 완전히 벗겨지는 것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의 그 일은 예수님이 와야 다 이뤄져요. 다는 벗겨지지 않지만 솔로몬이 그 시대에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뭐가 되느냐?
전도서, 잠언서, 아가서 그걸 통해 솔로몬은 예언자가 됩니다. 솔로몬은 자체가 말씀이 되었어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기를 위한 삶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솔로몬은 일종의 말씀이 된 겁니다. 눈에 보이는 만나는 먹는 용도죠. 만나 먹을 때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까 만나가 없어졌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만나 먹었잖아? 이제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라.’ 하고 만나를 내리지 않은 거예요. 만나를 주지 않은 겁니다.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서 인간들에게 먹을 걸 준 거예요.
먹을 것 주면서 ‘네가 목숨 유지하니까 그게 영생인 줄 알지? 아니야, 일시적인 거야. 그 목숨 깎여야 해.’ 그런데 영생은 어디 있는가? ‘네 목숨 안에 영생이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내 힘으로 살았다는 것, 그게 벗겨져야 하죠.
이게 이런 뜻입니다. ‘열심히 일하세요. 그러나 그 값으로 영생은 주지 않습니다. 영생은 거저 줍니다.’ 열심히 일하면 뭐가 생기는가? 돈이 생기죠? 돈은 힘이잖아요. 열심히 일하면 부동산 생기죠.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밭뙈기 유산 받잖아요. 그것도 도시 계획에 의해서 길옆의 것을.
그거 받을 때 아버지가 이만큼 고생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밥값 하는 세상이란 말이죠. 아버지가 그 유산을 통해서 남겨준 교훈은 뭐냐? ‘놀면 죽는다. 굶어 죽는다. 열심히 일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게 우리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열심히 일하면 살 수 있는 그 세계에서 왜 여호와의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갑니까?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열심히 살았으면 이건 내 거잖아.’ 이 내 것이 문제예요. 내 것이 되면 이게 예언이 안 돼요. 계시도 안 돼요. 말씀도 안 돼요.
솔로몬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나는 여기 없고 여기에 말씀만 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불법을 행하세요. 불법이 나쁜 짓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지금도, 오늘 낮에도 불법을 행하고 왔잖아요. 열심히 살았잖아요. 열심히 살았으면 그 인생 왜 남을 줘요? 내 인생이죠.
여러분, 우리가 지금 구약 보고 있어요. 구약은요, 선하면 힘 얻고 악하면 힘이 빠지는 거예요. 솔로몬처럼 나라 다 뺏기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선과 악이 아닙니다. 성령과 악령이에요. 예수님과 악령입니다. 악령은 악마는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 이미 자기 거니까. 악령의 목적은 왕을 죽이는 거예요. 숨어 있는 왕을 죽이는 거예요. 악령은 메시아를 죽이는 게 목적입니다. 왜? 메시아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아무런 한 것도 없는 자를 용서해 주니까 그게 싫은 거예요. 자기는 용서를 못 받았으니까.
선과 악의 대립과 대립의 차이가 아닙니다. 대립과 대립의 차이를 넘어서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 또는 ‘나는 나쁘고 너는 옳다.’ 이게 아니라 그 대립 자체를 무산시키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나를 나되게 하는 영원한 타자, 타인, 또는 남, 그게 솔로몬에게 누구였던가?
다윗이었던 거예요, 다윗. “솔로몬아.” “예, 아버지.” “넌 내 예언대로 될 거야.” “예.” 예언대로 된다는 말은 잘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언이 예언대로 될 거야. 네가 잘되는 게 아니고 네 속에 내가 예언을 줬거든? 예언이 예언대로 될 거야. 내가 우상 섬기지 말라고 했지? 나라 뺏긴다고 했지? 다 뺏기잖아.”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네가 나라를 빼앗기지만 다 빼앗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35절에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하지만 36절에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라고 해서 예루살렘을 준다고 했거든요.
끝으로 오늘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의 29-30절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자, 이제 선지자가 누군지 알겠죠? ‘나는 여기 있으나 나는 없고 여기 말씀만 있다.’ 이게 선지자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만나는데 엘리야는 선지자잖아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데 엘리야 선지자가 과부에게 어떻게 했나 보세요. 이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과 마지막 떡을 먹고 죽으려고 할 때 그 선지자가 마지막 떡을 뺏어버려요.
마지막 떡을 뺏는다는 말은 ‘넌 네 마음대로 죽으면 안 돼. 왜? 네 인생이라든지 네 공간, 삶, 인생 자체가 그동안은 네 삶이었는데 내가 너를 뺏어버릴 거야.’ 뺏으면 사르밧 과부의 인생은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는 거죠.
참,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죽어요. 홀라당 뺏어 먹고 그다음부터는 계속 살려줘요. 살려주는 이유가, 사르밧 과부가 얼마나 자기가 불법인 줄을 몰랐던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그저 고생만 한 거예요. ‘고생도 죄냐?’ 고생이 무슨 죄입니까, 고생만 했는데.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죽었어요. 죽으니까 그때 과부가 선지자를 보고 실제로 멱살은 안 잡았지만 ‘누가 우리를 살려달라고 했는가? 우리 살려줄 때 좋았지. 그때 나 당신 존경했어. 그런데 왜 쌩뚱맞게 내 아들을 죽였어?’ 이게 뭐냐? ‘내 아들’, 내 아들, 내 인생보다 소중한 내 자식 당신이 뭔데 죽였느냐.
이 과부는 정신도 없어요. 둘이 죽으려고 하니까 살려줬더니, 이제 와서 내 아들 죽인다고 하니까. 그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죽였다가 살려주죠. 참기름과 떡으로 살던 인간을 선지자가 말씀의 완성으로 살려내 버리잖아요. 이게 불법한 자에게 말씀이 오면, 영원한 것이 오면 그 불법이 사함을 얻어요.
“어디 갔나? 그 죄 어디 갔지? 평생 네 모든 인생 네 게 아니었어. 죄 사함을 주기 위한 하나의 샘플이었어.” 이게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차이예요. 솔로몬은 선지자가 된 겁니다. 그냥 됐습니까? 우상 섬기고 선지자 된 거예요. 무슨 뜻입니까?
‘인간치고 어떤 인간도 불법 아닌 자가 아무도 없다.’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치고 자기 살아온 인생은 내 것이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인간이든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게 오늘날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아히야 선지자가 와서 여로보암에게 자기 옷을 내밉니다. 옷이 어떤 옷인지 이게 중요합니다. 새 옷입니다. 일부러 새 옷 입고 갔어요. 그것도 잘 찢어지는 옷감으로 해서 새 옷 입고 여로보암한테 가지요. “아저씨 좀 봅시다.” 이스라엘을 이렇게 쫙 찢어버립니다. 나라가 두 종류로 쫙 찢어집니다.
여기서 여러분, 주의해야 해요. 정치적 발언 하면 안 됩니다. 여로보암이 이재명이라든지, 김문수가 여로보암이라고 하면 안 돼요. 정답은 둘 다 여로보암이에요. 이래야 딴소리를 안 듣죠. 중요한 것은 예수의 나라, 다시 말해서 진짜 예루살렘의 나라는 ‘남은 자’여야 돼요. 내 것이라는 게 다 날아가고, 열 지파 날아가고 달랑 남은 것은 베냐민 지파와 예루살렘 성전의 지파, 다윗 언약에 의해서 두 지파가 솔로몬에게 떨어집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물으면 그 뜻은, 삭제시키고 또 삭제시키고 영원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그 나라만 남기고 나중에는 다 찢어지는, 모든 예언은 바로 그 하나를 이야기하기 위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법 된 자로서 이제는 여러분 속에 말씀만 있는 예언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떻게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예언자가 되겠습니까?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불법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이 시대에 유일한 예언자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수요설교(250514)요약 열왕기상 11장 26-33절(솔로몬 속의 타자)
수요일 설교 요약, 그 때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역시 본문이죠, 여로보암의 등장. 여로보암은 자기가 미래를 예시(豫示)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그런데 누가 오느냐? 선지자가 옵니다. 선지자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어떤 행동도 안했으면, 여로보암은 그냥 착실하게 자기 맡은 업무가 자기 팔자다 생각하고 감사하고, 감내했을 거예요.
괜히 바람을 넣었어요. 괜히...가만있으면 되는데 선지자가 와서 “당신은 나중에 나라가 둘로 쪼개질 때 당신이 많은 부분을 가져가고, 저 솔로몬은 조금 가져가게 될 거” 라니까 갑자기 뭔가 바람이 확 들어가는 거예요. “야, 이거 대선에 나서도 되겠다. 요번에 대선에 한 번 나가볼까?” 이런 생각이 훅 들어오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예언의 효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지니고 있는 그 바탕이 되는 다윗언약을 솔로몬이 잘 하는 것으로 내는 것은 축복만, 축복 면만 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뭐가 가려져요? 언약대로 하자면 저주받는다는 면이 가려지잖아요. 그러면 저주가 뭐냐? 솔로몬이 나쁘게 되는 게 저주라 하잖아요? 그러면 저주의 폭이 좁아져요. 다 안 밝혀진다고요.
저주라 하는 것은 뭐냐? 복 받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적이에요. 그런데 저주는 뭐냐? 내가 누구에게 의존적일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노력하고 얻은 것을 내 소유로 삼을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여로보암의 생각이 사람들 앞에서는 정상적인 거예요. 그걸 제가 뭐라 했냐 하면 ‘밥값’이라고 했어요.
내가 열심히 해서 밥벌이하는 거, 이게 정상이에요. 이 세상은 밥벌이로 충족되고, 그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반역하고 난 뒤에 다시 솔로몬이 ‘나의 자리가 뭐냐?’ 하니까, 밥값 말고 ‘자릿값’이 있었어요. 그 자릿값이 다윗언약이었습니다.
다윗언약을 받은 때가 어떤 때냐? 다윗언약을 받고 난 뒤에 다윗은 바로 허물, ‘내가 태어날 때부터 허물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고장 났다.’ 이 말이죠. ‘나는 오류 있는 존재다.’ 그걸 자기는 몰랐죠. 그런데 죄 짓고 난 뒤에 보니까, 내가 그 때 죄 지은 게 아니고, 품고 있던 죄가 언젠가는 죄로 나타나야 될 것을 그때 나타난 걸로 된 거예요.
그러면 이미 내가 허물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났죠. 그러면 이 허물은 내 선에서, 이미 허물 받은 자가 자기 허물을 처리하지 못하죠. 이게 바로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그런데 그 딜레마에 빠진 동시에 감사해요. 왜냐하면, 딜레마에 빠졌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내 손으로 내 운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나로부터의 결별이고, 자유가 되는 겁니다.
아아, 이것이 바로 뭐냐? 그 자리가 왕의 자리에요. 하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왕으로 오실 때,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을 만한 모습이 아니고,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으로 왔어요. 망가진 모습으로... 그래서 어느 누구도 저 분이 잘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허물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증명해내는 겁니다.
허물을 다른 말로 하면, 불법이 되죠. 이 불법이 로마서 4장에서는 ‘불법을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해서 사도바울은 불법 있고, 가리움을 받는 이 두 가지의 사건을 이사야 53장에서 속죄 제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인데, 그 양의 특징이 입을 다물었어요. 말을 안 해요. 말이라는 것은 남을 설득하려고 하는 건데, 아무도 설득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 되어 있구요,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내 허물 때문에 그 분이 돌아가셨다.’라고 이야기할 자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이미 허물의 가리움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재정립해요.
“나는 모든 게 허물이었는데, 어느 정도로 허물이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허물이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나중에 고백한 것처럼 ‘나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맞죠. 맞는 거예요.
헛된 것을 다윗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헛된 것을 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다 끝나고 난 뒤에, 일이 다 마감되고 난 뒤에 “아, 이게 주의 일이구나. 나의 일이 아니고”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게 뭐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 지고 난 뒤에 날갯짓 한다는 거. 사람들에겐 끝난 이야기인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진리가 날갯짓해요, 진리가. 그 이야기입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로보암이 가만히 있는데 괜히 아히야가 와서 바람을 넣으니까 그때부터 여로보암이 “그렇지, 내가 여기서 남의 종노릇만 할 입장이 못 되지.”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어제 제가 영화 대사를 이야기 했잖아요. ‘개는 기르지만, 종은 부리는 거’라고.
그게 한국영화 <전.란>(2024년)에서 선조 시대에 ‘정여립의 난’이라 해서 머슴이 난을 일으켜서 나라를 구하게 해놓고, 나라에서는 그 머슴을 다 죽여 버리죠. 양반들의 공을 빼앗아갔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뭡니까? 성경은 정여립이 잘했단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종이 된다는 것은 바로, 종이 되신 예수님의 일에, 그 분이 가신 길에, 이미 그 노선에 들어섰다는 이야기예요, 우리도. 종의 특징은 부림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부림을 받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알아야 돼요.
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약에서는 ‘옳다, 그르다’로 이야기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령과 악령’으로 이야기하죠. 자, 악령의 노림수는 뭐냐? 사람을 다룬다? 사람은 다룰 필요 없어요. 왜? 자기 종이니까. 약령이 노리는 것은 뭐냐? 왕을 제거하는 거예요, 왕. 다윗언약에 의하면 모든 것이 왕으로부터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왕을 막아버리려는 거예요.
왕이 없으면 우리는 자유자가 되고, 독자적인, 절대적인 신이 되니까 고개 숙일 필요 없고, 누구의 종이 될 필요 없잖아요. 이걸 누가 하느냐? 나중에 여로보암이 해요. 여로보암이 그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저 왕가와 이제는 더 이상 엮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다수가 가짜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이 솔로몬을 통해서 폭로되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흘러가는 겁니다.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