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두 노선
2025년 5월 2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2:1-5
(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12: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에
(12:3)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12:4)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12:5) 12:5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평소에 솔로몬에 불만이 있는 요소를 차기 왕이 들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들의 요구와 충돌되는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히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왕상 11:29-32)
이 예언의 내용에 대해서 르호보암이나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라도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발표 즉시 실행에 돌입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 속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대조하면서 누가 나쁘고 누가 옳은가를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같은 인간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옳은 자라고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란 계시가 나타난 즉시로 실행에 돌입하기 때문에 자기 관점을 고수하면서 자기 삶을 추진하는 자로서는 계시와는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피해자처럼 보이고 가해자는 포악한 르호보암 왕으로 보이겠지만 둘 다 계시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한계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대로 되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왕상 12:15) 즉 인간들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옳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다양성의 형편을 뛰어넘을 안목을 갖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처해있는 시공간에서 순응하고 적응하기를 이어갈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들 각자 자기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자신도 자신만의 인생을 어떻게든 형성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함부로 타인의 삶에 대해서 평하거나 간섭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다양성을 최종 분류할 기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여전히 모든 것의 최종성에 도달될 수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계시)는 주어지는 즉시 그 완성도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언 안에는 최종적 내용이 품어져서 서서히 풀러져 나오게 됩니다. 함부로 주저없이 타인들의 다양한 삶을 공격한 인물이 신약에 나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의 신성한 오지랖을 들어봅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7-10) 세례 요한이 이렇게 함부로 타인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이유는 천국, 곧 종말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례요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레받는 현장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겠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도 없으신 분이 죄 씻어주는 세례를 받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에 대해서 최종적인 평을 내리시는 분이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아무리 다양함이 있더라도 두 노선으로 최종 정리가 내려집니다. 선악과만 따먹은 자와 선악과+ 생명나무 따먹은 자로 나뉘어집니다. 선악과만 따먹은 자는 최종 하나님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르호보암 같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자기 친구들과 의논해서 솔로몬 이후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결정했습니다.
그런 지난 솔로몬과 함께 일했던 정치 원로들의 말을 거절했습니다. 원로들의 조언은 이러했습니다. “왕이 먼저 백성들의 종이 되신다면 우리 백성들도 기꺼이 왕의 종이 되겠습니다”입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이러한 솔로몬 시절의 신하들의 의견을 솔로몬 통치가 자기 시대에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가 아닌 증거로 보았습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과 비교합니다. 자신의 새끼 손가락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고 큰 소리치면서 이스라엘에서 과거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온전한 장악력으로 발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르호보암의 주장도 모두 아히야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계시 실행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관점에서 이스라엘에게 남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정신을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요셉을 통해 애굽에 은혜를 주신 그 하나님을 거부하는 바로왕이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유월절 양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피해자요 바로왕은 가해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인간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만한 자는 아무도 없음을 아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는 유월절의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진정한 왕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하늘에 계시다는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도 제대로 왕 개념을 구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만이 왕입니다. 이 왕은 하나님의 계시 실행에 통해서 성취됩니다. 이 계시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온전한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천국에 와 있는 자에게만 이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읽은 이유가 생겨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순응과 적응으로 자기만 삶만 챙기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2강-열왕기상 12장 1-5절(다양성과 두노선) 25052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2장 1-5절입니다.
열왕기상 12:1-5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에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르호보암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여로보암이라는 사람, 솔로몬 때 고급 관리인 신하가 등장하고요, 그 사람은 애굽에 있었는데 이스라엘로 불러올린 거지요. 그다음에 이스라엘 온 회중, 백성이 등장합니다.
르호보암, 그리고 여로보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구분하려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옳은 편에 선 자는 누구고, 나쁜 편에 선 자는 누구냐를 따지는데 성경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옳은 인간이 없습니다.
옳은 인간은 없고 성경에서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예언이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것만이 옳아요. 열왕기상 11장 29-32절에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여기에 아히야가 나오는데 아히야가 옳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 지파에 한 지파 더하면 열한 지파잖아요. 열두지파가 아니지요. 그런데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에 속하면서 유다 지파가 대표로 되는 거지요. 대표가 되는 한 지파인 유다 지파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유다 지파 한 지파, 그 나머지는 열 지파라 할 때 나머지가 열 지파가 아니에요.
이것은 두 개가 되는 겁니다. 한 지파와 그 외 다른 전체가 한 나라, 이렇게 되는데 이 예언, 이 계시가 옳습니다. 계시가 옳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계시가 주어진 동시에 이미 실현에 돌입하게 됩니다. 인간이 지키면 실현된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계시는 주어졌다 하면 그대로 실현되는 거예요. 인간의 행동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에게 천사 셋이 계시를 줍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아브라함보고 뭘 하라든지 하지 말라든지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내년이 되면 아들이 생겨” 이미 계시가 이 땅에서 실행에 돌입했습니다.
그때 사라가 아브라함과 둘이 픽 웃었지요. ‘농담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웃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웃은 것까지도 천사들이 다 간파해서 “웃었지, 웃었지? 내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리더냐?” 그래서 아들이 이름이 ‘웃었다’ 해서 ‘이삭’이에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생각의 간격, 그 벌어짐, 띄어짐.
‘하나님 쪽에서는 인간 쪽에는 도달되는데,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 쪽에 도달될 수가 애초부터 없었다.’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언, 그게 계시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사가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늙었어도 애가 없었어요. 물론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사가랴를 보고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그때 사가랴 역시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눅 1:18) 이렇게 나왔어요.
사가랴가 “저나 제 아내가 나이가 많습니다.” 했을 때 인간이 나이 많아서 애 못 낳는다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그러면 ‘아, 인간 입장에서 자기 한계를 보여줬구나.’ 그러면 될 텐데 “내가 말하는데 네가 토를 달아? 나이가 많아서 애 못 낳는다고? 너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해서 그때부터 벙어리가 된 거예요.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눅 1:20).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주어진 그 자체가 이미 실효성이 발휘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막을 어떤 대책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기뻐해야 할 소식은…,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할 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계시가 이루어지는가 점검하면서, 검토하면서 한 번 믿어볼까?’ 이러면 안 돼요.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그 계시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해요.
그 계시가 완전히 완결된 그 지점에 미리 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계시가 계시답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이미 구원된 자만 볼 수 있다. 이미 천국에 온 사람만 성경을 볼 이유가 있다, 천국에 온 사람만.’ 이것은 물론 신약에서 성령이 왔을 때 하는 이야기고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구약입니다.
따라서 구약은 날카롭게 예언과 그리고 나머지 예언 맞은 편에 있는 모든 인간들, 이렇게 둘로 나눠야 해요. 그래서 ‘유다 나라 사람은 착하고 그 나머지 이스라엘 나라는 악하다’라고 이렇게 나누면 안 됩니다. 나중에 유다 나라도 망해요. 그것도 계시에 의해서 망합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에 있어서 예루살렘과 유다 지파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등불’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하니까 오늘날 성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 당시 유다 나라 사람들이 어떤 착각, 어떤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유다 나라에 붙으면 산다’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인간과의 갭, 간격이 놓여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열왕기상 12장부터 보면서 그 간격, 곧 하나님의 예언이 어떤 식으로 각자 자기 잘났다고 하는 인간들 속에서 그 벌어진 간격을 어떻게 계속해서 나타내 보이는가, 쪼개 놓고 있는가에 유념해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2장 1-5절까지 읽었습니다만 사실은 이 본문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15절까지 이어집니다. 15절에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계시를 잠시 주고 하나님께서는 빠지는 듯하지만, 그래서 계시는 계시고 인간들끼리의 어떤 정치적 상황이 벌어지지만 백날 벌어져 봐야 그들은 계시가 준 범위 내에서 계속 움직일 뿐 계시 밖으로 뛰쳐나가는 행동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는 나의 관점에서 출발해서 문제에요, 나의 관점.
성경은 주님의 관점, 입장에서 성경을 보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의 한계가 나의 관점이에요. 저는 성경을 보면서, 또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가끔은 저의 20대를 돌아봅니다. 저의 10대나 20대를 돌아보면서 어떤 특징이 있었는가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저의 20대에 남의 일에 간섭을 안했던 것 같아요.
그것을 오지랖이라 하지요. 20대에 남에게 뭘 간섭한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오만데 간섭을 하지만요. 왜 간섭을 안 했는가? 생각해 보니 그게 ‘다양성’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다양성. 20대를 지나면서 나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의 일에 집중했어요. 내가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취직하고, 어떻게 결혼하고, 어떻게 내 인생을 꾸려나갈까에 온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그렇게 쏟다 보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가는 것은 저 사람 인생이고, 나름대로 내 코 앞에 떨어진 것, 그리고 내 미래를 살아가야 할 그것은 내 인생이다.’라고 한 거예요. 공부를 해 보면 그것을 ‘다양성’이라 하는 거예요.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니까 내가 남의 인생을 간섭할 필요가 없지요.
대구 TBC의 TV프로에 <싱싱고향별곡>이란 것이 있어요. 주로 노인들만 사는 대구 경북의 마을들을 찾아다녀요. 북 가지고 다니면서 사투리 심하게 쓰는 한기웅하고, 국악하는 이정영하고 둘이 가서 그들의 사연을 듣는 거예요. 왜 그걸 듣느냐 하면 다양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모르지만 방송을 통해서 듣는 거예요.
거기 출연하는 동네 사람들 대개 나이가 많아요. 어떤 사람은 젊어서 6.25 겪은 사람도 있어요. 나이가 90이 넘었지요.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죽 들어보는 거예요. 또 교육방송의 프로도 있어요. <다문화고부열전>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에서 우리나라에 시집온 사람들이 고부간에 갈등이 있으니까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시어머니가 캄보디아나 베트남이나 필리핀에 가서 같이 생활하면서 정붙이는 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극장> 또 <6시 내 고향> 주로 노인들만 보는 프로그램이지만 그들을 왜 보는가? 그들의 다양한 삶이 두 노선으로 분류가 안 되더라는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선악과 따먹은 사람과, 선악과와 함께 생명나무도 따먹은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마감이 되거든요. 모든 계시가 두 부류로 마감이 돼요.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 가운데서 생명나무 따먹은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예요. 선악과 안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에 생명나무 따먹은 사람까지 생긴 거예요(선악과+생명나무). 성경 바깥은 뭐냐?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인생 살아요. 그걸 다양성이라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
각자 자기 인생 자기 편한 대로 꾸려나가는 거예요. 다양성이지요. 그런 프로를 보면 저 사람은 다양성밖에 모르는데 맨날 ‘자기 인생이 너무너무 고생 많이 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수십 년, 5십 년, 6십 년 고생한 그것이 죄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봐요. 아, 없어요. 거의 없어요.
제가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계시의 마지막 종점에서는 딱 두 노선이에요.
그런데 내가 10대와 20대를 살아가면서 들었던 것은 두 노선으로 간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고 ‘각자 자기 인생 열심히 행복하게 살면 된다, 오케이!’ 그런 것들만 들어왔다는 거예요. 나중에 복음을 알고 그다음부터는 오지랖을 하게 된 거예요. 왜 오지랖을 하느냐? 끝을 아니까요. 마감을, 마감되는 현상을 아니까요. 좁은 문 아니면 넓은 문이에요.
그것을 어떤 강의에서는 두 서랍이라고 했는데 서랍이 딱 두 개밖에 없어요. 서랍에 담기는 거예요. 서랍에 모조리 담겨요. 처음에 삼립식품에서 호빵이 나올 때 온 국민이 그렇게도 좋아했어요. 어떤 부패한 경찰관이 길에서 과속하는 화물차를 세워서 벌금을 매기려고 했는데 마침 그 차가 호빵 운반차였어요. 호빵 받고 그냥 넘어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호빵인 줄 알고 쪼개보니 호만두였을때 실망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약간의 과정도 있습니다만. 인간은 쪼개봐야 알거든요. 이게 호빵인지 호만두인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호빵의 특징은 뭐냐? 호만두 아니면 호빵, 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른 다양성은 일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만 먹은 자와, 선악과에 생명나무까지 따먹은 자와의 차이점, 그 대결상태인데 그것을 구약적으로 보면 아직도 분류가 안 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오지랖, 신약에서는 그렇게 한다는 뜻인가?’라고 질문한다면 그렇습니다. 신약에서는 온 오지랖을 다 떠는 인물이 등장했어요.
마태복음 3장에 보면 그 오지랖 떠는 사람의 내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에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보세요, 이 무슨 오지랖입니까? ‘세례 요한, 네 인생이나 사세요.’ 남의 인생 어떻게 사는지 왜 간섭해요?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 이미 마감을 알아요. 마감선(線)에 서 있어요, 마감선. 모든 것이 종결된, 계시가 종결된 선상에 있으니까 남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오지랖 떨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 아니까, 모르는 게 아니고 아니까요. 진리를 아니까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광야에서 외치는 오지랖꾼 세례 요한에게 한계가 있어요. ‘이 마지막 때에 분명히 회개해서 구원받을 사람이 있다. 아마 있을 거야.’ 이렇게 혹시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오지랖을 떨었어요.
세례 요한이 끝부분에 와서 전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진짜 끝까지 오지는 않았어요. 진짜 끝에 가면 어떻게 되느냐? ‘아, 아무도 없구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 세례 요한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쭉 가면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 주고, 쭉정이는 불에 들어가고, 지옥 불이죠, 알곡은 천국 간다고 했는데 그다음에 누굴 만나냐 하면 물세례 주던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딱 만났어요. 그때 세례 요한이 자기의 오지랖에 의문점이 딱 드는 거예요. ‘아, 이게 뭐지?’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여기 세례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의인이기 때문에 여기 죄인들만 받는 이 세례, 씻을 죄가 있는 자들만이 와야 할 이곳은 당신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왜 끼죠?” 세례 요한은 마지막의 마지막에까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통을 누가 이어받는가? 예수님이 이어받아요. “됐다. 세례 요한 네가 할 것은 여기까지. ‘혹시나 구원받을 사람 있을까?’ 하는 여기까지가 네가 할 일”이고 다음에 바통을 이어받은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는 사망에서 생명 옮길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계시를 ‘첫째는 이해하고, 두 번째 지키고’ 이 1과 2에 해당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신약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지금 보고자 하는 것은 열왕기상 12장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뭐만 보면 되느냐? ‘르호보암 왕과 그 백성들 사이에 누가 옳고 그른가? 르호보암 왕이 맞는가, 아니면 백성이 맞는가? 백성이 틀리는가, 르호보암이 틀리는가?’를 논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해요. 둘 다 옳지 않습니다. 둘 다 옳지 않아요. 이 점을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폭력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왕한테 당했다고 해서 그 백성이 착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르호보암 왕은요, “내가 지금 솔로몬왕 후계자로 왕이 됐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통치하면 되겠습니까?” 나이 많은 원로들에게 물어보니까 원로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왕이 먼저 백성의 종이 되신다면 백성들이 기꺼이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통치해야 합니다.”(왕상 12:7)라고 했어요.
그다음에 자기 젊은 친구들과 의논해 보니 젊은 친구들은 “솔로몬보다 더 세게 나가야 합니다. 더 세게 안 나가면 자꾸 솔로몬 이야기하고 상대적으로 왕을 아마 무시할 겁니다. 이건 인간들의 원리니까 무시 안 당하려면 더 세게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한 거예요.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왕상 12:10-11)
북한에서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통치할 때 김정은이 아버지와 같이 있던 원로들과 의논 안 했습니다. 자기 대학교 동창들하고 정치했어요. 아주 세게 나갔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니까요. 옛날의 정계를 빨리 청산하고 내가 전임자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횡을 하는 겁니다. 전제적인 장악력을 행사해야 해요.
어떤 초등학교 여교사는 자기 학급에서 르호보암 같은 행패를 부렸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본 당사자도 여기 와 있지만, 학급에서 조폭같이, 독재자같이, 히틀러처럼 군림했던 거예요. 자기 반에서 수학 잘하는 학생 지목해서 다른 애들 수학 가르치라고 해놓고 자기는 뒤에서 컵라면 먹고요, 선생님이요.
그리고 과학 시간에 바람 부는 것과 연기의 방향을 보는 실험을 하는데 다른 반 선생님이 실험하는 것을 본 모양이에요. 촛불 피워놓고 선풍기로 바람을 보내서 ‘불꽃의 방향을 통해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있다.’ 그 실험을 하는데 자기는 게을러서 준비를 못 했나 봐요.
4학년 담임인 그분이 5학년 남자 담임한테 가서 담배를 빌려와서 자기 반 학생에게 담배를 피우게 만들었어요. 그것도 연기가 잘 안 나오니까 애는 켁켁거리면서 담배 피우고 있고 선생님은 “빨리 연기를 좀 내란 말이야.”하고 독촉해서 실험을 그런 식으로 했어요.
그리고 애를 편애해서 자기가 컵라면 먹을 때 자기가 좋아하는 애는 한 젓가락 주고 싫어하는 애는 국물만 마시게 했어요.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은요, 세상을 볼 때 자기 재미로 살아가요. 그 외에는 어떤 자기의 노고와 고생에 대한 보람이 없어요.
TV 프로그램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4십 년, 5십 년 평생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5분이나 10분 만에 다 들을 수 있거든요. 들으면서 결국 사회자가 주고받는 게 뭐냐? “아이고 아재요. 그렇게 고생했으니까 이렇게 집도 잘 짓고 잘 살고 자식들도 효도하잖아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마지막 계시가 누구냐? 본인의 존재가 계시에요. ‘내가 여기 있음’이 계시에요.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떤 누구도 인간의 이 본성을 위반할 수가 없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도 결국엔 자기 고생한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는 네 인생 사세요. 난 내 인생 열심히 살 테니까.’ 이렇게 되면 70억 인구 70억 가지 인생만 남아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좁은 길 그리고 넓은 길, 생명나무 따먹은 사람 그리고 생명나무 못 따먹은 사람. 따먹은 사람은 천국, 못 따먹은 사람은 지옥, 그렇게 되죠. 생명나무가 신약에는 하나님의 계시에요. 그냥 계시가 아니고 계시의 완성입니다.
계시의 완성에 성령을 통해 초청받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성경이 새롭게 보이는 거예요. 아까 저의 20대 때의 이야기를 했잖아요. “20대에 당신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저한테 물어보면 이거에요. 순응과 순응, 적응과 적응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시공간, 내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미래 그리고 현재에 있는 이 장소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
그것은 순응해서 살고, 적응해서 살죠. 남는 것은 뭐냐? ‘너희들은 너희들 인생 사세요. 난 내 인생 참하게 살겠습니다.’하는 다양성, 이 다양성을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왕의 횡포와 통제 가운데서 ‘아, 그건 아닌데 그건 심한 것 같은데’ 하면서도 끽, 소리 못하고 순응하고, 순응하고, 적응하고 적응해 갑니다. 역시 사람은 살아야겠다는 그 의지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잘못을 아느냐? 아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 탓해요, 왕 탓합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 없어요. 솔로몬 때는 왕을 잘 만나서 잘 됐다고 하고, 지금은 “우리가 솔로몬만큼만 해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했거든요. 그 말에 아들 르호보암은 “이미 지나간 사람이고 죽은 사람, 왜 자꾸 추억이나 살펴봅니까? 현재의 왕은 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복종하세요.”
그러면서 “야, 친구야. 어떡할까?” “더 세게 나가.” 더 세게 나가서 아버지의 치적을 아버지의 성과를 잊도록 아주 더 강력하게 심하게 압제와 압박을 가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조금 더 어려운 내용으로 들어가야 해요.
과연 인류에게 있어서 국가란 것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국가가 있으니까 당연히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인류에게 국가라는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사는가? 상호 호혜, 서로 돌보는 거예요. 상부상조, 물물교환, 기여하고 증여하고, 많이 가진 사람은 나눠주고 이렇게 살았어요.
사도행전 4장 31-35절의 말씀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31절에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다음에 32-35절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렇게 살고 싶습니까?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라는 사람은 19세기 중반에 이것을 가지고 최초의 공산주의, ‘원시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신학을 한 사람이에요. 사도행전의 이 대목을 보면서 인간의 힘으로 이 사도행전 4장 32절에 나오는 대로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밀어붙인 것이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이에요.
어떻게 하느냐? 그동안 각자 노동한 대로 자기 노동한 만큼 얻으면 되는 데 중간에 도둑이 있어서 깡패처럼, 양아치처럼 뺏어간 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자본가라는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마르크스가 국가를 인정하지 않아요. 공산주의 사회는 국가가 없어야 되는데 국가가 있다는 것이 수상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국가는 뭐냐? 국가란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거라는 거예요. 부르주아의 국가, 다시 말해서 가진 자들이 더욱더 많이 갖기 위해서 국가의 법을 이용해 없는 자들을 더 빼먹는, 더 수탈하고 약탈하는 수탈하는 것이 국가라는 겁니다.
따라서 당장 국가를 없앨 수는 없지만 서서히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물리치면 자본가들이 자본을 사회에 내어놓게 되고, 이제는 국가 자체도 없이 전 세계가 하나의 공산주의 사회가 되는, 사도행전 4장 32절의 말씀처럼 실행에 옮겨지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천국이라는 거예요.
아, 이게 마르크스 즉 오늘날 북한이나 사회주의의 중국, 러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다 공산주의 국가거든요. 이들이 뭘 빠뜨리고 몰랐느냐?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서 없는 사람을 도와줬다고 할 때 그들은 ‘자기 재산을 내줘서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굶지 않게 되었다.’라는 그걸 보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쳐다보는 사람들입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그들은 지금 엉뚱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마르크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나중에 국가가 없어지지만 지금 당장은 있어야 한다. 자본가의 것을 뺏기 위해서, 국가가 강제로 뺏어줘야 나중에 국가마저 없어지는 그런 사회가 오는 그 과도기가 있기에 국가가 그 일을 해야 한다.’라는 거예요. 부자 증세, 부자에게서 세금을 많이 거둬서 어떻게 해 보자는 그런 아이디어.
그러니까 국가라는 자체가 느부갓네살의 바빌론, 메데/파사, 헬라 제국, 그다음에 로마 제국인데 그게 짐승입니다. 국가들이 있다는 게 짐승들이 있다는 거예요. 국가라는 게 다니엘에 보면 네 번째 짐승인 동시에 마지막 짐승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 국가가 짐승들의 국가구나.’ 요한계시록까지 안 봐도 다니엘만 봐도 나와요. 국가라는 것이 엄연히 있단 말이죠. 지금 200개 이상이 있잖아요. 국가가 하는 일이 뭐냐? 마르크스가 아니라면, 공산당이 아니라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질 것인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2024), ‘관심의 장소’라는 영화가 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담을 하나 끼고 한쪽에 호화 저택에 지상 천국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루돌프 회스’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 사는 사택입니다.
그 사택을 천국같이 꾸며놨어요. 그리고 그 부인은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수용소에 들어온 유대인 여성들의 모피를 두르고 화단에 꽃을 가꿉니다. 꽃이 잘 피도록 거름을 주는데 죽은 유대인들 태운 재를 가져다가 뿌리면 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높이 솟은 굴뚝에서 밤낮으로 시체 소각하는 재가 날리는데 애들은 그 호화 저택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고 진짜 최고급의 가정생활을 누리는 장면이 그 영화에 계속 나와요. 끝부분에 가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오고 영화 대부분은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 화목하고 정겹고 따사롭고 인자한 아버지고, 거기에 어진 어머니에다 애들은 구김살 없이 잘 크고, 늘 활짝 생글생글 웃으며 모자람 없이 살아가는 그런 모습만 보여줘요.
그런데 이 영화에 동화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역겨울 정도로, 구역질 날 정도로 대조가 되어 있는 참혹한 수용소 사람들이 일하기 위해 바깥에 나올 때 ‘알렉산드라’(폴란드의 실존 인물, 1927-2016)라는 10대 소녀가 작업장에 사과를 숨겨서 놔두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요. 사과를 숨겨두는 그 여자애와 화려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루돌프 회스라는 수용소 소장을 대비시킨 거예요.
자, 국가가 해야 할 것은 뭐냐? 국가는 이 땅이 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국가 자체가 짐승이기 때문에요. 십 대 소녀가 유대인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몇 푼 도와준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현실은 짐승의 원대로 가요. 지옥이 지옥대로 가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국가 아래서 우리는 체험하고 경험해야 해요. 어느 누가 정권을 잡든지, 표를 누구한테 주든지 국가가 마귀 집단이고 짐승이라는 것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계시가 예언이 예언대로 이미 완성했고, 그 완성된 작품 그 결과물이 바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오늘날 성도 자체이기 때문에, 예언의 완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가 이미 왔다는 것은 생명나무 받은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 때 이 세상이 극히 지옥다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빛나는 거예요.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애굽이 나오잖아요. 반역하는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다가 나온다고요.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에요. 출애굽기 1장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라고 되어 있어요. ‘요셉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애굽 나라가 그동안 요셉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거든요. 요셉 존재의 은혜를 모르는 왕이 나오면서 드디어 히브리인들이 고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 나라가, 국가가 본래 짐승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때 국가는 자기 악한 본성을 다 드러내요. 그 본성을 드러낼 때 이스라엘의 왕은 어딨느냐? 인간의 왕은 아니에요. 썩었으니까. ‘그러면 영원한 왕은 왕일 것이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자기 한계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영원한 왕은 왕이 아니에요. 인간 왕인 르호보암도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왕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 이 땅, 이 더러운 짐승 같은 세계에서 살다가 사람에게, 국가라는 짐승에게 맞아 죽은 분이 유일한 왕이에요. 이게 ‘유월절 어린 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은 물론 나쁘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잊었는가? 유월절 제사를 지낸다고 할 때 유월절 희생 제사의 의미를 그들은 지금 놓치고 있습니다, 놓치고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십자가 은혜 그걸 모를 때 어느새 적응하고, 순응하고, 다양성만 찾고, 내 인생만 찾는 그런 사람이 될 뿐인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참 위험한 사회를 통과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남 나쁘다고 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그것, 그것이 이 땅에 와서 죽었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큰 죄악이고, 탐욕이고,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해당되는지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