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보다 더 큰 이
2025년 4월 23일 본문 말씀 : 열왕기상 10:21-22
(10:21) 솔로몬 왕의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10:22)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왔음이더라
솔로몬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는 결코 솔로몬이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의 내용이 실제로 역사 안에서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그 번영이었습니다. 솔로몬 이전 다윗 시대에 이미 이러한 언약의 효과를 받았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부귀 영화를 아낌없이 소비할 곳도 다윗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은 도로 주님께 드리기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겁니다. 많은 것을 얻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것을 어디에다 바쳐야 되느냐도 안다는 것이 바로 이방 민족의 국왕들과의 현격한 차이점입니다. 바칠 곳이 없으면 ‘내가 버린 돈, 나를 위해 산다’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가시적으로 큰 국가 영광과 번영으로 주어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언 3:1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15-17)
즉 땅에서 사는 인간에게 있어 최고 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래 사는 것과 풍부하는 사는 것, 바로 이 조건으로 의하여 주어지는 마음의 평화라고 본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솔로몬이 직접 경험한 바로 그것이 진정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최종 완결상태일까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12:42에 보면,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귀 영화보다 더 큰 것을 예수님께서 주신다고요? 그게 뭐지요? 어떻게 솔로몬의 부귀영화보다 더 클 수가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올때부터 주어진 불변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참여’라는 사실입니다.
이 외의 다른 길, 다른 방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유월절 방식은 온갖 악마의 방해 공작을 뚫고 직접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마음 속까지 찾아와서 심어놓으신 사실입니다. 이 길을 알고부터는 그 인간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유월절 삶의 방식 이외의 모든 방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삶의 길입니다. 그것이 다윗 언약에도 계속 이어져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단순히 성전 짓기 위해 주변 나라로부터 받았던 귀한 재물들을 소모한 것이 아니라 자신마저 그 성전에 합류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란 그저 모든 것을 다 놔두고 가야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겁니다.(대상 29:15)
물론 솔로몬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바는 과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느냐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우리 몸에 바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안으로 우리 자신이 합류되어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게 가능한가 말입니다.
솔로몬이 받았던 육적인 양식은 창세기 3:17에 나오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힘든 형편과는 대조적으로 참 여유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부귀영화는 솔로몬보고 준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보고 주위 나라에게 솔로몬에게 준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솔로몬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솔로몬은 자신의 몸을 성전에 받을만한 몸이냐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 그는 성전을 준비하면서 거창하게 1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이요 또 그 전제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대상 29:21)
이 번제는 바로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 만족하셔서 하나님께서 받은 제물을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먹으면서 평화를 실감케 하십니다. 일체 너의 모든 일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그런데 이 평화가 되기 위해서는 솔로몬에 와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손이 해야만 할이 그 뒤에 남아 있습니다. 즉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필히 오셔서 솔로몬보다 더 큰 선물과 평화를 자기 백성과 공유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줄기차게 예수님을 추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들의 심보를 아십니다. “네가 나를 찾는 것을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은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요 6:27) 즉 솔로몬이 아무리 부귀 영화가 엄청나도 다 썩을 양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요 6:29)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는 일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가정에서 예수님을 섬겼지만 그들은 혈육 너머의 혈육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빠가 난데없이 죽었는데 그들을 엄청 삐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빠를 살려주고 난 뒤, 마리아는 자신이 그동안 귀하게 모아놓은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 발에 쏟았습니다.(요 12:3)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해석을 붙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 마리아는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마가복음 7:27-28에서는 귀신들인 딸을 둔 이방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들들에게 줄 영생의 떡을 개같은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실 때, 그 여인은 기꺼이 이 규정에 동의하면서 자신을 없는 존재로 간주하시고 그 아들에게 떨어지는 떡 한 조각으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합류된 백성이요 그들 속에 천국의 평화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알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소모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열왕기상 10장 21-22절(솔로몬보다 큰 이) 25042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0장 21-22절입니다.
열왕기상 10:21-22
“솔로몬왕의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
본문에서 ‘잔나비’는 원숭이를 말하고요, 그 뒤를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23-29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솔로몬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23절)라고 되어 있고, 솔로몬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24절) 해서 엄청나게 가져왔어요.
그리고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26절). 그만큼 솔로몬이 주위로부터 얻은 것이 많다는 겁니다. 자, 이 본문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어서 성경에 기록된 그 이유가 무엇인가? 솔로몬은, 인간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지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번영을 솔로몬이 누린 거예요. 이것은 솔로몬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졌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겁니다. 원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7절에 있는 대로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겨우 밥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조건이었지요.
그런데 그 조건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이 엄청나게 잘 사는 그것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왜 솔로몬은 이렇게 엄청난 수입을 얻게 되었는지?’ 그것은 바로 다윗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이 없는 나라와 언약이 있는 그 상황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솔로몬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잠언 3장 15-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실제로 지혜를 얻는 자는 어떤 혜택을 받느냐 하면, ‘오른손에는 오래 사는 것, 그리고 왼손에는 부귀영화가 주어진다.’라고 되어 있어요.
저주받은 땅에서 살면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최고경지, 최고 수준을 솔로몬이 보여주는데 이것이 그냥 상상이 아니라 실제 현실로 보여주고 있다는 그 점을 통해서 언약과 관련해서 ‘아, 이게 실제구나. 언약의 능력이 진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나라에는 그것이 허락이 안 되었으니까요.
그 부귀영화는 솔로몬이 열심히 고생해서 모은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다른 민족들, 이방 민족들이 솔로몬에게 자꾸 모여들었던 겁니다. 그 이유가 열왕기상 10장 24절에 보면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그 지혜에 대해서 그들은 금이나 은을 줘도 아깝지 않을 값어치를 얻는다고 여겨서 솔로몬에게 이런 엄청난 부귀영화를 안겨주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끝이냐 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신 복은 솔로몬 때 절정이었다. 끝.’ 뭐 그런 건가요? 국가적으로 봐서도 솔로몬보다 더 잘살 수는 없고, 솔로몬보다 더 부강할 수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솔로몬이 최고 정점을 찍었으니 하나님의 언약은 솔로몬 이상으로는 못 넘어서는가?’ 하는 생각이 들겠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29장에 보면, 솔로몬이 받았던 그 부귀영화가 실은 다윗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알았고 솔로몬은 미처 몰랐던 것이 있어요. 다윗은 뭘 알았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하나님께 도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역대상 29장 12절에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하면서 그다음에 14-15절에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곧 “우리는 이 땅에서 그냥 나그네 같은 존재입니다. 이 모든 부귀와 영화는 아낌없이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그 장소를 다윗은 발견했어요. 그게 성전이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하 29:14)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이게 바로 언약이 없는 세상 나라와의 차이점이에요. 세상 나라는 잘 먹고 잘살면 자기를 위해서 그것을 소비해요. ‘하나님께서 내 가치를 알아주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다른 민족들이 나를 보고 선물을 준 것이 아니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그들이 선물을 주었다.’라고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 해석은 사무엘하 22장 44-45절에 나와 있어요.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모든 열왕들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나에게 드린 것은 이방인들처럼 홀라당 자기들의 부귀영화와 사치를 누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것을 도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에 그들이 나에게 줬다.’라는 거지요. 심지어 스바 여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의 지혜는 당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그 지혜를 주신 당신이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한다’(왕상 10:9)라고 했거든요.
‘당신이 우리보다 더 똑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한테서 받았지요? 여호와 하나님께 받았지요? 나는 아낌없이 내가 가져온 모든 보물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하나님에게서 온 그 지혜가 너무 놀라워서 당신의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취지를 스바 여왕이 말한 거예요.
그런데 이방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다윗은 ‘바쳐야 될 곳이 그들에게는 없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바치는 곳이 있었다.’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자기가 통하니까요. 그 정신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애굽에서 나왔다.’라는 그 정신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출구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라는 그 출구뿐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 거기다가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서 자신을 소실시키고, 없애버리고, 소멸시키는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알려준 유일한 출구, 유일한 길이에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다윗도 알았고, 솔로몬도 알았겠지만 뭘 알았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만약에 인간의 아이디어라면 이방 나라도 다 그런 생각을 해야 해요.
그런데 이방 나라는 그것을 몰라요. 이방 나라는 자기의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서, 지켜내기 위해서 자기 소유물을 자기를 위해서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을 통해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게 구원되는 길도 아니고 하나님의 왕 되심의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의 왕 되심의 권한 속에 유월절 어린양처럼 나를 없애버리는 그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윗 당신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 유월절 어린양만이 통로가 된다’라는 것, ‘이게 진리가 되고 다른 길은 없다’라는 그것이, 그동안 이방 나라에 작동해 온 악마의 생각, 마귀의 생각 그 방해를 뚫고 하나님의 언약의 힘으로 다윗에게 그리고 솔로몬에게 전달된 겁니다. 특별히 그렇게 전달된 거예요.
다윗과 솔로몬의 입장에서 유월절 양에 합류하는 정신 없이는 이 땅에 살아도 소용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자기 벌어놓은 것을 소비하다가 그냥 지옥이나 가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께 바치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가진 것 바치면 되지 자기를 갈아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오버할 필요까지 뭐가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로마서 11장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인간의 것을 안 받아요. “하나님, 제 정성이니 받으세요.” 인간이 정성을 바치는 그 압력에 ‘어이구, 네가 주면 내가 받아야지’ 이렇게 넙죽 받는 분이 아니에요.
인간은 땅에서 종신토록 고생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늙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4-5절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라도 되어 있어요.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 부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제 목숨 갈았습니다. 제 목숨 받아주세요.”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왜? 더러워서 안 받아요. 우리의 정성, 성의 안 받습니다. 하늘에서 보기에 추접하고 더러워서 그래요.
우리가 뭐로 구성되어 있는가? 요한일서 2장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꽉 차 있어요. 이것은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요일 2:15) 않기 때문에 추접하고 더러운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것을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습니다.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솔로몬 그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서 최고의 영화와 부귀를 누렸지만 거기서 솔로몬의 한계점이 드러납니다. 솔로몬이 받았던 것은 세상의 양식, 그러니까 ‘인간의 것, 세상의 것이 누가 많으냐’ 하는 그 전쟁, 그것이 끝이 아니고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세상에 있는 땅의 양식 말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의 양식이 솔로몬 너머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솔로몬에 와서 부귀영화를 통해서 다윗 언약이 제대로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 보고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 이유를 다 알거든! 떡을 먹고 배부른 그 까닭으로 나를 찾았잖아”(요 6:26).
그리고 요한복음 6장 27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솔로몬에게는 이것이 없지요. 아까 본 잠언 3장 16절에,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자는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됐잖아. 이게 너의 소원이잖아. 땅에서 이만한 영화를 누가 누릴 것이냐?’ 그게 솔로몬 생각이고, 예수님 생각은 ‘그거 다 썩는다. 너를 나에게 바친다고? 너도 썩어.’ 썩는 것밖에 없어요, 썩는 것밖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안 받아요. 더러워서 안 받아요.
안 받는데 아까 조건이 뭐냐? 유월절 양 거기에 합류가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더러운 거기에 피 찍어 바른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란 드라마가 최근에 시작되었어요. 거기에 김혜자가 나와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심판대에 이르게 되었어요. 중간에 지하철 문이 강제로 열리면서 탈락해서 지옥으로 막 떨어지고 기차는 천국을 향해요. 천국에 막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보안검색대가 죽 있어요. 보안검색대 옆에 박스가 있어서 “세상에서 가져온 것들 다 여기에 놓으세요” 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녀딸 사진도 놓고요, 어떤 사람은 5만 원짜리 지폐도 놓고, 휴대폰도 놓고, 노트북도 놓고, 받은 상장도 놓습니다. “몽땅 놓고 그냥 오세요”라고 했어요. 제가 보면 그 드라마에 빠진 것이 있어요.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해요. 자기 목숨 버리지 않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솔로몬은 그게 안 되었던 거예요.
언약은 이미 주어졌으니까,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인 솔로몬에서 다윗 언약이 겉으로만 보면 완성되었어요. 왜? 부귀와 영화, 이 땅에서 극상의 고귀한 것은 그득하니까. 겉으로만 봐서는 ‘다윗 언약이 완성됐네. 이제 끝났네.’ 하는데 그것은 땅의 양식이잖아요. 썩어질 것이잖아요. 그거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걸 좀 자세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약속한 거예요. 좀 어렵지만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겁니다. 인간은 상대 안 하니까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때 어떻게 줬느냐?
화목 제사가 있어요. 역대상 끝에 보면 다윗이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처음으로 드린 줄로 대개 알고 있지만 다윗이 먼저 드렸어요. 그 대목이 역대상 29장 21절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이요.” 이게 일천번제에요.
레위의 제사법에 의하면 이걸 무슨 제사라 하느냐? 이걸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를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야! 나하고 너희하고 이제 평화다.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이제 전쟁도 없어. 다 끝냈어.” 화목제물로 드려진 소가 1천이고 양이 1천이잖아요. 제사 끝나고 난 뒤에 이거 다 나눠 먹잖아요.
이게 뭐냐?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되신 나라에서 화목제물의 양식, 하나님의 양식을 백성들이 선물로 받아서, 하나님이 먹을 때마다 기뻐하는 것처럼 그 기쁨에 같이 동참하는 제사를 ‘화목제’라고 하는 거예요.
화목제의 결과가 뭐냐 하면, 평화에요, 평화. 평화라니까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가 애써서 평화를 얻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추접하고 더러운 게 무슨 평화를 얻어요? 다만 평화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화목제를 완성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지금 솔로몬도 선물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 선물 하나하나가 “나 이제 너한테 주기만 할게. 원래부터 넌 나한테 바칠 수가 없어. 내가 그냥 주기만 할게. 내가 주는 선물만 고맙다고 하면서 그냥 받아 누려. 이게 천국이야.” 그게 화목제에요. 제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 제사가 화목제거든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게 “혹시 어떤 집에 가거든 이렇게 이야기해라.” 12절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이게 ‘샬롬’ 다시 말해서 ‘화목 하라’, ‘이 집에 평화가 임합니다.’ 여러분, 천주교인들 가게 보세요. “이 집에 평화가 임하기를” 이런 것 많이 걸려 있죠. 마태복음 10장 12절의 말씀이에요. “이 집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걱정 붙들어 매세요. 내가 그냥 줄게. 네 것 달라고 안 할게. 줘도 안 받지만, 그냥 줄게.” 이게 화목제에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의미, 십자가를 화목제물로 봐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 아래 있는데 율법 외에 한 법을 따로 세워서 그게 화목제물’인데 25-26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유월절의 취지는요, 인간이 신학교 가서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악령의 방해를 뚫고 직접 찾아와서 전달하고 심었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심어지는 거예요. 뭘 심어놨다고요?
‘출구는,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주께서 심으시는 이 유월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화목제다.’ 따라서 그 화목제에 합류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화목제의 능력으로 합류가 되는 겁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라는 그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천국에 들어가려 할 때 심사하는 아가씨들이 “또 뭐 버릴 거 없습니까? 할머니는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다 버렸네.”
“그러면 이제 들어가면 됩니까?” “아니 하나 더 있어요. 천국에서 살 때 몇 살로 사시겠습니까? 1번, 22세. 2번, 25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주인공이 “나는 80살로 살래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천국에서 살 나이까지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습니다.” 하고 그 드라마에 나와요. 실제로 성경에 있는 천국은요, 우리 몸을 제거하기 때문에 우리의 나이도 같이 제거돼요. 나이 따지고 할 것도 없어요. 천국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왜? 천사와 같아서, 영광스러워서 나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게 이거예요. ‘오늘 본문에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대단한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는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말씀 가운데서 그런 요소가 꼭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마땅히 할 수밖에 없죠.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을 주실 것이 분명하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런 요소가 뭡니까?’ 하고 궁금해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게 마태복음 12장 42절에 보면,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고 예수님 자신을 이야기했어요.
‘솔로몬도 대단하지만, 솔로몬이 너희에게 그 당시 준 것도 참 대단한 부귀영화지만 나는 더 크다.’ 이런 뜻인 거예요. 도대체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걸 주시려고 솔로몬이 받은 부귀영화보다 더 주시는 겁니까?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활동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센 거? 이거다.” 하고 주십니다.
마가복음 7장의 예를 들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뭘 주시는가? 어떤 여자의 딸이 귀신이 들렸어요. 그 여자는 이방인입니다.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내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디 개 같은 여자가! 우리 아들에게 돌아갈 떡을 당신이 너무 욕심내는 거 아니야?” 옛날 이방인들은 개였으니까,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이 없는 개같은 당신한테 왜 주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것이 없다.’ 정도가 아니고 “맞습니다. 저는 없는 존재입니다.”
천국 갈 때 내가 없어져야 해요. 내가 없고 새로운 피조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흙으로 된 나는 십자가에 죽게 되거든요. 강남 강의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나도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할 때 나는 그때 이미 부활해서 살았다.’ 뭐가 더 필요합니까? 뭐가 더 필요해요? 뭐가 더 소중한 거예요?
이게 유월절에 참여한 거잖아요. 내가 유월절 양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유월절 양이잖아요. 그러면 모든 일의 마무리와 완성, 그 다윗 언약의 자손으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맺어질 일이라고요. 내 일이 아니라고요, 내일이. 내가 왜 걱정해요? 내가 없어지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렇게 해요. “나 자녀 아닙니다. 맞습니다. 난 개입니다. 그런데 혹시 자녀들에게 돌아갈 몫 가운데서 자녀들이 먹다가 상에서 또르르 굴러서 떨어지는 그 생명, 그 생명 하나로 나를 다시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생명으로!” 이게 바로 솔로몬에 주신 부귀영화보다 훨씬 더 큰 거예요. 예수님의 그랬잖아요. 솔로몬보다 내가 더 크다고요.
요한복음 6장에서 “너희가 왜 나를 찾느냐?” 결국 예수님 찾던 사람 다 갔어요, 다 갔습니다. “너는 썩는 너 자신을 위해 날 찾았잖아.”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그들이 따라온 게 머쓱해서 물어요. “우리가 내 생각만 한 거 인정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서 양식을 얻을까요?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요한복음 6장 2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으니까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곧 ‘나를 믿는 것이, 다시 말해서 내가 아버지와 하는 일을 믿는 것이 그게 화목제물의 선물로 너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나를 믿는 자가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예. 예수 믿겠습니다.” 했죠.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이 하는 일이 뭐냐? 바로 예수님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는 그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 살을 찢겼다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 ‘찢겨진 내 살을 먹고, 흘린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요 6:53)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할까요? 무슨 수로 가능해요? 좋은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잘 섬겼어요. 봉양했습니다. 자기 딴엔 ‘예수님을 이만큼 섬겼으니 주님도 우리의 마음과 사정을 알아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어요. 나 여기 있고 예수님 저기 있으니까 잘 섬기면 여기 있는 나, 우리 가족에게 예수님이 잘 해주실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솔로몬이 왕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 너머의 왕, ‘왕 너머의 왕’이에요.
솔로몬은 혈육이잖아요? 아브라함 자손도 혈육이잖아요. 혈육 너머의 혈육을 주께서는 계속 언급해 온 겁니다. 마르다 마리아 이 혈육, 이 가족은 예수님에게 잘 해줬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혈육 너머의 혈육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오빠를 죽였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난리 났어요. 누이 둘이 뭐 예수님 죽일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오빠가 죽고 나흘 만에 살아난 뒤에 마리아가 어떻게 달라졌느냐? 요한복음 12장에서, 자기가 그동안 시집가려고 했었는진 모르겠지만, 당시에 여자들이 재산을 모으는 방식이 향수가 제일 비싸기 때문에 그걸 모아놨어요. 그 재산은 그야말로 날 위해 쓰려고 내가 모아놓은 나의 재산이에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님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 오빠가 죽었다 살아난 뒤에(물론 나중에 또 죽겠지만), 자기의 향수를 아낌없이 주님의 장례식을 위해서 소비해 버립니다. 주님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거예요. 그 말은 중간에 좀 집어넣어야 해요.
‘주님이 죽어야 절대 안 죽는 내가 죽을 수 있다.’라는 거예요. 내가 자살할 수는 없어요. 자살해도 소용없고요, 나를 죽이는 방법, 주님이 죽을 때 비로소 내가 죽는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그게 언약이에요. 그게 다윗 언약이라고요.
뭘 버는 거하고 바치는 것하고 어느 게 더 어려울까요? 돈 버는 거하고 바치는 것. 향수를 모으는 것이 어렵습니까,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그걸 지금 마리아가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은 악바리로 창세기 3장 17절처럼 벌어요. 그런데 바치는 것이 왜 어렵냐? 바칠 데가 없어요.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대로 쓰면 되잖아.’ 그대로 쓰다가 지옥 가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마리아는 자기의 향수를 주님 발 앞에 던졌습니다. “나를 주님 앞에 허비하겠습니다. 저를 그냥 낭비하겠습니다. 내 인생 여기 있다고 저는 고집부리지 않겠습니다. 나를 갈아서 주님 쓰시는 대로 쓰시라고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해요. 마리아가 몰랐던 해석을 부여합니다. “사람들 보기에 그리고 가룟 유다 네가 보기에는 마리아가 향수 뿌리는 것이 그냥 허비한 것처럼 보인다. 맞다. 땅의 양식을 노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맞다. 그러나 마리아는 내 장례식을 위해 미리 향수를…….” 장례에서 보통 향수 뿌리잖아요. 냄새나지 말라고 향품을 관 속에 넣죠. 그렇게 “…내 장례식을 위해서 향수를 뿌렸느니라”(요 12:7-8). 그렇게 요한복음 12장에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와 비교를 해야 해요. 솔로몬 시대는 너무 나라가 막강하고 주변 나라들이 기가 죽어서 아낌없이 조공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솔로몬의 그 많은 수입이 주로 외국에서 온 공물이었습니다. 통행세도 마찬가지고, 외국에서 알아서 전부 다 갖다 바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솔로몬보다 더 크시니까, 예수님이 다윗 언약을 완성했을 때의 그 영광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해요. 그걸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그게 누가복음 7장 24절-25절에 나옵니다.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왕궁, 왕궁. “너희들 광야에 왜 나왔어? 세상의 부귀영화, 그게 생명이 될까? 그건 썩은 양식인데?”라고 주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뭐냐?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였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었어요. 주께서는 거기에 우리를 갈아 넣어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또 솔로몬 이후에 뭐 중간쯤, 그런 거 없습니까? 있죠. 중간지점이 있어요. 다니엘 세 친구, 다니엘+세 친구니까 네 명이죠. 이 네 명이 누구하고 싸웠는가 하면, 그 당시 최고의 제국 바빌론 전체하고 싸웠어요. 저쪽은 왕입니다. 왕의 권세에요. 다니엘과 세 친구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누가 평화롭고 누가 이겼느냐?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이겼어요. 불 속에 넣어놔도 편안하게 있었어요. 이게 바로 솔로몬이 갖고 있던 힘이나 권력이나 오래 사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을 마지막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세상 영광, 김정은을 보세요. 얼마나 권세가 대단합니까?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행전 12장 21-22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백성들이 막 “김정은! 김정은!”하고 높인 거예요. 높이니까 23절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해충에 걸려 죽었어요. 아주 특이한 죽음입니다. 다니엘 5장의 벨사살 왕도 까분다고 예루살렘에 가져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용품 가지고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났어요.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 이걸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썼는데 다니엘 5장 26-28절에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30절에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이것도 특이한 죽음이에요. 벨사살 왕, 그리고 아까 본 아그립바 1세 헤롯, 특이한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썩어질 세상입니다.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썩어 죽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이유가 뭐냐? 추접하고 더러워요.
하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일체 미련 둘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보는 것은, 기죽지 말고, 이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에 기죽지 말고 유월절의 그 피 하나만으로 모든 샬롬, 평화가 여기서 주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까지 심긴다는 겁니다.
그 입구와 출구, 그 길,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가 사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 사실이 세상이 주는 부귀와 장수보다도 더 대단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통해 무엇이 나타나고, 무엇이 보여지고, 무엇을 알게 됩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 그냥 둬도 썩어가고, 어떻게 설쳐도 더럽다고 죽어 썩을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인 것을 새삼 발견케 해주시고, 따라서 주께서 알려준 그 화목제물, 십자가의 그 살과 피에 합류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