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지나가면
2025년 4월 3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1-8
(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11: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11:3)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11: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11: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의 통치 전반부에는 잘했는데 후반부에서 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전반부를 도리어 신기하고 놀랍게 여겨야 합니다.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셔야 합니다. 결국 솔로몬이 여자를 좋아하고 우상을 섬긴 것은 그동안 가리워진 하나님의 사랑이 제대로 드러나는 사례라고 보시면 됩니다.
솔로몬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이 지워집니다. 모세나 이삭처럼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여디디야‘였습니다.(삼하 12:25)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었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었으면 더욱 더 그 사랑에 증진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리고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사랑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사랑에 미처 있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행동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하여 아기를 임신시켜 아기가 출산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아기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죄가 없는 아기를 죽이지 말고 자신을 죽여달라는 식으로 금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기를 금방 죽이지 않고 아픈 상태를 이어가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 사태에 다윗과 관련성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인간적 생각같으면 다윗이 진심으로 죄를 자복했으면 죄없는 아기를 살려줄 만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아기를 죽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소식을 접하고 다윗은 태도가 돌변합니다. 무슨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에 복귀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기가 내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이는 내가 죽은 아기 쪽으로 가게 하신다는 뜻”이라고 정리합니다. 즉 다윗이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한다 할지라도 죽은 아기의 운명을 변경할 수 없듯이 자신도 또한 같은 입장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의 세계 사정을 다윗에게 제대로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언약을 통해 주어지는 사랑은 인간의 그 어떤 선한 행동이나 반성으로 가리워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언약은 기어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며 새 아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어진 것은 ‘여디디야’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음’입니다.
이 아기는 다윗이 낳은 아기가 아닙니다. 다윗 언약에서 나온 아기입니다. 이삭처럼 말입니다. 언약이 제공되는 일방적인 그저 주시는 사랑이 인간의 잘남으로 가리워져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요한일서 4: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경우도 양보없이 드러내십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사실 이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알기에 상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지나가고 나고 헤어지고 나면 그동안 상대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사랑했음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상대의 사랑보다 자기 쪽에서 상대에게 보낸 그 사랑에 스스로 매료된 겁니다. 이단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잘하고 있으니 끝까지 잘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네가 잘하고 있는 듯하지만 언젠가는 불신앙으로 돌아설 것이다. 이를 기뻐하라, 너는 육이니까”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좋아했는데 신약에 와서 이런 것을 ‘육이 육을 좋아하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솔로몬이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전 7:28) 따라서 잠언에 나오는 식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그러니까 남자든 여자든 결국 늙으면 모두 무너지게 되니 그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보면 이러한 솔로몬의 대책은 더욱 최종적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바로 “육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원칙입니다. 육이 아니라 영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인간의 육적 욕망이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인간은 육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곧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뵐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다 이루심’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육과 육의 만남이 아니라 말씀과 말씀의 교류의 연합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0-32) 즉 예수님의 몸으로서 여자와 예수님 몸으로 남자로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집니다.
말씀의 능력, 주님의 다 이루심의 능력이 여자로 하여금 남자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사랑하게 합니다. 어떻게요? 자신의 죄를 경유해서 말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가리는 나에 대한 자기 사랑을 죄로 규정하시는 능력이 작용하는 겁니다. 즉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신기하게 계속 하나님께 살려내고 있음을 놀랍고 고맙고 감사토록 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는 게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 것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28강-열왕기상 11장 1-8절(사랑이 지나가면) 250430-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1장 1-8절입니다.
열왕기상 11:1-8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오늘 본문 11장 1절에서 8절, 이것만 봐도 앞에서 솔로몬에 대해서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복 주시고, 나라가 부강했고, 스바 여왕이 와서 지혜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던 모든 것이 일거에 다 무효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났지요.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좀 잘하지. 예전처럼 그렇게 조심하면서 살지. 사람이 잘 가다가 끝에 가서 이런 사달이 났네. 끝을 좀 조심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들 해석하는데 이것은 반대로 해석한 겁니다.
그동안 솔로몬이 잘한 것이 이상해요. 하나님을 찾은 그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거예요. 인간은 결국 자기의 본성대로 돌아간다. 신앙인 척하고 바르게 살고, 그렇게 해봤자 다 허세였고 진정 자기 자신을 몰랐기에 뭔가 대단한 척을 했을 뿐 인간의 끝은 결국 자기의 본성을 이겨낼 수가 없고 본질대로 돌아간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앞은 괜찮았는데 뒤가 안 괜찮았다.’가 아니라 솔로몬의 앞부분에 뭐가 있었는가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앞부분에 대해서 사무엘하 12장에 나옵니다. 24-25절에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나단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했고 그 뜻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있다, 해서 사랑이 들어있는 인물로 출발한 것이 솔로몬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솔로몬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했기에 그 이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솔로몬이 막 태어났을 때니까 솔로몬이 사랑받을 짓을 한 것은 아닐 것이고, 그 이름이 ‘여디디아’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아버지 다윗과 밧세바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짓을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열매라고 주신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 관심사가 ‘솔로몬이 왜 이렇게 되었나? 왜 인간이 이렇게 망가지고 타락해 버렸을까?’ 하거나 ‘솔로몬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하고 솔로몬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정작 우리가 관심 둬야 할 것은 ‘다윗언약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언약이 무엇인가?’
다윗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그 사랑을 사랑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다윗언약에 들어가야 했던 자들은 사랑받을 짓을 전혀 하면 안 돼요. 훌륭한 짓을 전혀 할 수도 없고, 또 했다고 평가를 받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다윗 언약안에 들어 있는 인간이 사랑받을 짓을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언약이 아니고 반언약이에요.
보통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네가 신앙생활 잘하고 있으니 솔로몬처럼 그 꼴 나지 말고 끝까지 잘해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단입니다. 볼 것도 없이 이단이에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 너 결국 불신앙으로 드러날 거야.” 이게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랑이라고 어떤 규정을 해버리면 졸지에 그 인간이 제대로 사는 사랑받을 만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마중을 나가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 취급받으면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께도 사람 취급받으면 하늘나라 갈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우리 인간에게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 취급받을 수 있는 재주와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걸 알려주는 것이 언약이에요, 다윗언약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12장을 다시 봐야 해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일단 아기가 태어나요. 태어났는데 환자로 태어납니다. 곧 죽을 아이로 태어나요.
그런데 태어난 그 아이가 자기로 인해서 아프니까 책임감이라 할까요, 내 죄가 거기에 담긴 아기를 보면서 ‘죄는 내가 졌는데 죽기는 왜 네가 죽느냐?’ 하면서 너무 안타까워서,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살려달라고 ‘죄는 나에게 있고 이 아기는 죄가 없으니, 저의 회개를 봐서라도 살려달라’고 합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악바리로 기도합니다. 그 정도 회개했으면 하나님께서 아파서 죽어가던 애라도 낫게 해서 “봤지? 앞으로는 죄짓지 말아야 한다. 죄지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 내가 너 회개하는 것 봐서 애 살려준다.” 이렇게 해줘야 소설이고 드라마고 재미가 나잖아요. 그런데 소설은 허상이고 실제는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케 해요.
다윗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기도하고 회개하는데 애는 죽어요. 애를 죽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거 봐. 네가 회개하는 것, 반성하는 것 다 소용없지, 그치? 네가 그런 존재야. 네 책임감? ‘잘못했습니다?’ 네가 이 사태를 다시 돌이킬 줄로 기대했어? 그것이 잘못이야.”
애가 죽고 난 뒤에 다윗의 태도는 하나님의 언약에 딱 들어맞는 합당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애가 죽고 난 뒤에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회개하고 반성하고 금식하던 것도 다 끊어버리고 말짱한 얼굴을 해서 밥도 먹고 정상적으로 돌아옵니다. 책임감 같은 것도 일체 없고요.
보고 있던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기니까 하나님께서 죽였다는 말은, 곧 내 아이가 죽었는데 그 애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다고 한 거예요. 방향성을 잘 생각해 보세요. 죽은 애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 전제를 다시 해 봅시다. 아직 애가 아파 죽은 것이 아니에요. 애가 아파서 죽어가고 있어요. 죽기 전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애를 죽기 전으로 만들어 놓고, 아직은 죽기 전의 아픈 상태로 만들어 놓고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를 유도한 다음에 애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때 다윗은 어떤 방향성을 보는데요, ‘저 애는 내가 있는 세계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죄로 인해 죽은 저 아이의 세계에 내가 가면 된다.’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회개하고 반성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죽으면 된다는 거예요. 사무엘하 12장 19절에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그리고 21-23절에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이게 무슨 뜻이냐? 지금 살아 있는 내가 회개하고 반성하는 이것조차도 죽은 아이 쪽으로 가야 할 죽어 마땅한 짓이 된다는 겁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죽을 죄인인 것에 변동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가뿐한 거예요.
이 일련의 사태가 뭐냐?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 자신에게 일말의 어떤 가능성이라든지, 나의 운명에 대해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내 운명을 다른 운명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떤 여지 같은 것을 아예 일소해 버리는, 아예 없애버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줬다는 겁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다시 동침해서 또 애를 낳았을 때 그 애 이름이 ‘여디디아’, 그 뜻이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이라 했으니까, 사랑으로 솔로몬을 줬으니까 이것은 뭐냐? 이 사랑은 하나님이 나의 행동, 회개나 반성이나 이런 것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주는 거예요. 왜 일방적으로 사랑하느냐?
다윗입장에서는 내가 사랑받을 짓을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없음이 확정되었기에 비로소 주님의 사랑이 안 가려지는 거예요. 가려지지 않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동안 인간들이 자기가 뭐 괜찮은 존재인지 알고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니까 그 사랑에 보답한다든지, 사랑에 내가 뭘 보태기 위해서, 사랑에 대해 화답하기 위해서 내 쪽에서 사랑받을 짓을 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짓이에요. 솔로몬이 물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삭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하고 물으면 “이삭이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세 명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요.
이삭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이삭의 본질은 인간이 아닙니다. 약속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어요. 언약에서 태어난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에서. 똑같은 원칙으로 솔로몬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다윗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다윗 언약에서 태어났어요. 다윗 언약에서 태어났으면 다윗에게 일어났던 상황이 똑같이 반복해서 일어나 줘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값이 드러나요. 그 사랑의 가치가 드러난다고요.
그 가치가 드러나려면 어떻게 하느냐? 솔로몬이 사랑을 받았으니까 아버지에게 약속한 혜택을 많이 입어요. 그때 사람들은 솔로몬이 훌륭한 줄 알고 있어요. 물론 솔로몬이 훌륭했지요. 하지만 그 훌륭한 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상한 일이고 기이한 일이라니까요. 그것은 다윗 언약,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주어졌지 솔로몬의 본질이 복 받을 만한 본질이라서 그렇게 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백성들이나 또 성경에 ‘다윗이 이렇게 훌륭했다, 훌륭했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다윗의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받을 만큼이나 착한 줄로 알고 있어요. 솔로몬이 말년에 그 마음이 나빠졌습니까? 아니지요. 그 마음이 달라졌습니까? 아니지요. 갑자기 나쁜 짓을 한 겁니까? 아닙니다. 본인이 몰랐던 본인의 본성이 드러난 거예요.
처음이 중요하고 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끝은 언제든지 망하게 되어 있어요. 마지막에 여자를 밝히고 우상을 섬기고, 그것은 그동안 몰랐던 것이 드러난 것이고 처음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솔로몬도 그렇고 모든 사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이단들은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 바르게 살아야지. 안 그러면 당신 구원에서 탈락한다.”라고 해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는데 ‘자기 부인’이라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필수적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복음적 진실은 뭡니까? “예,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이게 진실이 아니고 “주님, 저는 ‘자기 부인’ 안 하렵니다. ‘자기 부정’ 안 하겠습니다.” 왜?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만 아는 십자가가 그게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 부정이 안 된 상태에서 나온 십자가라서 이것은 그 십자가를 오히려 가려버려요. 십자가 믿는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요, 인간은요! 솔로몬도 그랬어요. ‘내가 이스라엘 왕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으니까 내가 어지간히 잘못해도 하나님이 그냥 봐줄 거다. 너무나 큰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이 자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열왕기상 11장에서 솔로몬의 본처가 나타나 있습니다. 1절에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솔로몬의 본처가 이스라엘 백성 중의 여자가 아니고 바로의 딸이에요. 그 딸이 왕후입니다. 왜? 솔로몬은 국가를 경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요새 같으면 미국이죠, 우리나라 대통령 아들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 딸과 결혼하게 되면 트럼프가 우리나라에 관세 20퍼센트를 먹이겠습니까? 이게 국가 경영 차원이에요. 하나님이 준 나라를 내가 키우기 위해서는 요령껏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못 돼서가 아니라, 여자를 밝혀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키워야 하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그 책임감이 문제가 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본처 따로 있고요, 다음에 3절에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합해서 1,000명 있잖아요. 그런데 아가서 6장 8-9절에 보면, 초반인지는 모르지만 숫자가 좀 적습니다.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우상 섬기겠다고 작심을 한 게 아닙니다. 여기 오늘 열왕기상 11장 본문에 보면 그냥 여자가 좋았을 뿐이에요. 여자들을 연애했단 말이죠. 이거 보니까 사사기 13장부터 쭉 나오는 삼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삼손이 “나 이스라엘 사사 노릇 안 할래.” 이게 아니에요. 그냥 하는데 뭐가 좋으냐? 여자가 좋을 뿐이에요.
하필 좋아하는 여자들이 전부 블레셋 여자예요. 솔로몬이 그렇게 여자를 좋아했는데 여자들을 뒤따라오는 그 우상들을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놀라운 것이, 처음에는 여자만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뭘 좋아했느냐? 내 여자가 좋아하는 그것을 같이 좋아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또 갖게 됐어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우상을 섬기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섬기는 것을 나도 남자로서 같이 사랑해 줘야 그 여자가 나와의 사랑을 지속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의 우상을 그냥 마구잡이로 허용한 거예요. 허용하니까 솔로몬이 우상을 섬긴다는 소문을 듣고 온 나라에 왕후와 왕후의 첩들이 믿던 우상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되듯이, 확 퍼지듯이 확산된 거예요. 우상 섬기는데 국가 예산이 막 들어가는 거예요.
나중에 솔로몬이 수습이 안 돼요. 자, 여기서 제가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솔로몬이 수습하는 것과, 솔로몬 이후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수습하는가, 세 번째는 예수님은 어떻게 수습하는가, 이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솔로몬이 이 난리를, 온 천지에 우상이 확산돼 버린, 그래서 오염된 이 난리를 어떻게 수습하는지? 전도서 2장 8절에 보면,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도서를 솔로몬이 썼거든요. 전도서 2장 8절에, 자기가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게 많이 두었는데 그 결과가 뭐냐? 11절에 보면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러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 이야기에요.
지금 수습됐습니까? 수습 안 됐죠. 무슨 말이에요?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라는 거예요. 그 수습에 대해서 전도서를 조금 더 보겠습니다. 7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어떤 걸 깨닫느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거 뭐 페미니스트가 들었으면 난리도 아니에요. 전도서는 지혜거든요. 수많은 여자를 만났는데 그 가운데 시건있는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뭐 대책이 돼요? 그래서, 그래서 이게 대책이 됩니까? 대책이 안 되지요.
잠언서도 솔로몬이 썼어요. 잠언서 31장 3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런데 이건 어떤 대책, 이런 것보다도 후회?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것, ‘내가 이 점을 왜 몰랐을까?’ 하는 자괴감, ‘역시 고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최고다.’
왜? 솔로몬이 여자들 비위를 다 맞춰줘야 했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궁에 혼란이 일어나고, 국가 전체에 혼란이 일어나니까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이게 어떤 대책이나 수습이 되질 않죠. 솔로몬 경우에는 계속 대책이 없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마지막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래요. 이게 또 무슨 뜻이냐?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왜냐? ‘중요한 것은 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나처럼 낙이 없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왜? 우리는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12장 1절부터 10절에 보면, ‘…모조리 다 중력에 의해서 흙으로 만든 조각품처럼 나이 들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해도 솔로몬은 뚜렷한 대책을 내세운 게 없죠? 그런데 이게 대책입니다. 아무리 봐도 대책이 아닌데 이게 대책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그게 요한1서 4장 10절에 나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분명히 했어요.
하나님 사랑이 나타날 때는 어떤 요건과 같이 나타나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과 더불어 함께 나타나요. 이 점을 좀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어떤 노래 가사를 가져왔어요. 이 노래 가사는 제가 옛날부터 알았지만 해결이 안 됐었는데 지금은 좀 되는 것 같아요.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상호적이기 때문에 모를 리가 없어요.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이게 말이 안 된다고요. 아예 기억을 못 할 것 같으면 그대 나를 알아줘도 기억이 안 돼야 할 텐데 가사 내용이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라는 말이 이건 현실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문장이에요, 이게. 그런데 이게 어디서 해결이 되냐 하면, 이 노래 제목이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할 때는 사랑을 몰라요. 그런데 사랑이 지나가니까 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발견하는 거예요.
요한1서 4장 1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했을 때 비로소 내게 일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말하는 것은 ‘우리는 허물어질 때, 우리 모든 것이 망가질 때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에 준해서 우리를 사랑했다.’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제가 함축해 보겠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모세 이름이 먼저 있었죠? 이삭이 태어날 때 이삭 이름이 먼저 있었습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고요, 삼손도 마찬가지고요. 솔로몬도 마찬가지예요. 이름이 먼저 있었어요. 존재 뒤편에 먼저 이름이 있어요. 우리는 존재 뒤편에 있는 이름을 가리게 되는 겁니다.
모세 이름이 뭐냐? 물에서 건져낸 자예요. 모세를 따르는 자인 이스라엘도 물에서 건져내는 거예요. 지금 우리의 이름은 뭐냐? 주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본다는 것 자체가 주의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바르게 사는 것이 죄라고 규정해 버려요. 누가? 어떤 능력으로? 십자가의 능력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가 성경을 보시라고 하는 것은 도 닦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살아가면서 내 힘으로는 못 사는데 왜 자꾸 살려주는지, 그러니까 나한테 매료되지 말고 주님이 살려주신 그 자체,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에 매료되라고 성경을 보라는 거예요.
“열심히 성경 보고 도 닦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합시다.” 지금 이러라고 성경 보라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당장 죽어도 상관없는데 왜 자꾸 살아있지? 이게 기묘함 아닐까?’ 그 기묘함, 내 노력으로 산 게 아닌데 살려주시는 그 기묘함에 매료되는 것, 그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 증거하라고, 그 사랑, 사랑을 증거하라고 살려주는데 성경 보면서 내가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날마다 기쁘게 받아들여야죠. ‘아, 나는 더 살아도 죄만 지어.’ 이게 도를 닦는 모습입니까? 도 닦는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를 확인하는 모습이에요.
솔로몬이 다윗 언약을 안 거예요. 내가 비키면 비로소 주님의 이름이 보인다는 것, 내가 죄인이 될 때 비로소 십자가라는 것이, 왜 주님이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주의 이름이 그 십자가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이제 알고 거기에 매료되는 거예요. 거기에 푹 빠지는 겁니다.
두 번째,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유대인의 해결책이 뭐냐? 그것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나옵니다. 우선 느헤미야 13장 26-27절에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에스라도 마찬가지예요. 에스라 10장 하나 더 볼까요? 에스라 10장에 3절에 보면,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와 느헤미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쫓겨나고 난 뒤에 다시 본토 약속의 땅으로 성전을 재건하러 왔을 때가 에스라와 느헤미야거든요. 그들의 해결책은 뭐냐?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사람은 강제 이혼시키고, 그 이방 여인과 낳은 자식은 강제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이게 해결책이에요. 강제 이혼이에요.
그리고 에스라 같은 경우에는 명단이 있어요. 이방 여인과 혼인한 자들의 명단을 발표해서 망신을 주면서 이혼하는지 안 하는지를 다른 사람이 확인케 했어요. 그러니까 유튜브에 명단 발표하는 거예요. 지독하죠. 자식이고 딸이고 간에 전부다 이방 여인과 관계있으면 내보내는 것, 그게 에스라 느헤미야가 내세운 해결책입니다. “우리가 이방 여인 때문에 망했으니까 안 망하기 위해서는 내보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 세 번째 해결책을 앞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이방 여인, 불신자들과 강제 이혼하고 자식 내보내면 그 인간 개과천선합니까? 그 마음이 달라졌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자기 의가 되겠죠. ‘나 봐. 하나님 이렇게 잘 믿어.’ 이렇게 되겠죠.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예수님의 해결책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솔로몬의 해결책은 ‘남자 여자 없이 결국 다 망한다.’ 그게 일종의 낌새를 준 거예요. 솔로몬이 나쁜 해결책을 준 게 아니고 뭔가 희미하지만 ‘남자 여자라는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이지 누굴 좋아하고 누구는 나쁘고, 이거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고린도전서 7장 같은데 보면, 에베소서 5장과 연관 지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계시에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그 계시에 의하면 “육은 그 자체가 흙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솔로몬이랑 좀 비슷하잖아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흙인데, 신약에서는 이걸 육신 육이라고 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게 육신인데 육신이 뭐냐? 인간은 번식하는 기계에요. 짝짓기 그리고 그 짝짓기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할 수 있다, 없다? 없다. 인간의 욕망은, 여자가 남자 찾고 남자가 여자 찾는 욕망은 인간의 힘으로 이것을 막을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그 이유가 뭐냐? 육이기 때문에, 육신이기 때문에요. 육신의 본능을 누가 이깁니까? 못 이기죠.
사도 바울은 그 간음 문제를 확산시켜요. 신약에서는 우상숭배가 간음이거든요. 신약에서는 ‘육신으로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라는 것, 이게 기본 모토에요.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못 이긴다. 인간은 그 육신 됨을 스스로 저항할 수 없다.’ 사실은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육신 가지고는, 육으로서는 하나님을 만나볼 수 없다는 거예요. 왜? 죽으니까, 육신에는 생명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얼추 됐죠. 성령이 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 안에 있어요. 예수 안에 있으면…, 참 이게 말하기 곤란한데,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말하기도 곤란하지만 말해야겠어요.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뭐냐? 될 수 있는 대로 결혼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인간은 욕망을 못 이기니까 결혼하지 말고 혹시 결혼했더라도 여기 7장 15절에, ‘남편이 있는데 그가 복음을 싫어하거든 그냥 이혼해 버려라.’ 이렇게 나와요. 13절에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라고 해놓고 15절에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그러니까 ‘만약에 믿지 않아 갈라서게 되거든 그냥 갈라서버려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결혼 자체가 너를 힘들게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좀 안 하는 방향으로 가면 어떻겠니?” 이렇게 나와요. 자,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의 반발은 뭐냐? “이왕 결혼했는데 어떡해요?”
이렇게 하니까 에베소서 5장에 사도 바울의 결정타가 나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25절에 보면 “아내들이여…” 이미 결혼을 했잖아요? 사도 바울은 결혼 안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이렇게 하고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어떤 경우냐?
육적인 남녀의 성별 그런 차원에서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바꿔치기 하는 가정, 말씀의 교류가 유지되는 가정에 한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걸 하라는 말은 우리가 이걸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네가 속해있는 그 말씀이 너로 하여금 에베소서 5장이 그대로 될 수 있도록 말씀이 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너희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정은 어떤 가정인가? 에베소서 5장에서 “그건 가정이 아니야. 네가 지금 결혼해서 너의 가정을 가진 것이 아니고 교회로 세우겠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을 세우는 거예요. 남편과 아내 사이에 그리스도 몸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역할이 한쪽은 아내 역할 한쪽은 남편 역할을 했다는 것, 이게 정답이에요. 이게 정답입니다.
이게 바로 말씀의 활동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전 이렇게 못 삽니다.” 주께선 말해요. 그게 신앙이라는 거예요. 말씀을 준 이유는 “이 말씀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네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께서 “넌 안 돼. 넌 안 되지만 안 되는 너를 통해서 말씀이 스스로, 주님이 스스로 자기 말씀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너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입장에서 바로 다윗 언약의 성취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 가운데 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이 교회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육으로 이 땅에 주신 것을 이제는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또한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 하나 없는 것을 도리어 다행으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우리를 통해서, 못난 우리를 통해서 모든 말씀을 다 이뤘다는 차원에서 이루어 가심을,
㉰우리가 거기에 매료되고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