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다윗의 등불

아빠와 함께 2025. 5. 22. 09:32

다윗의 등불

2025년 5월 2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34-40

(11:34)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11:35)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11: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11: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11: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11:39)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11: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솔로몬이 범죄해도 다윗 언약은 지속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면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 언약에 위배되는 역할을 한 사람이 됩니다. ‘지속되는 다윗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죽어도 유지되는 겁니다. 다윗은 죽어도 ‘다윗의 등불’은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등불이란 온 세상이 깜깜할 때 유일하게 빛이 제공되는 조명입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등불의 존재감은 더욱 소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바는 ‘등불은 소멸되지 않는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멸되지 않는 바를 드러내기 위한 기능들을 반복적으로 그 시대에 등장해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즉 등불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는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요 이것은 곧 모든 인간들의 활동과 그들의 출생과 죽음까지도 이 등불의 존재와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드라마가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살던 자가 과거에 홀연히 출현되어 그 시대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드라마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현 시대의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그 현시대와 더불어 소멸된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에게 마땅한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인물이 과거 시대에 섞여서 살아가는 드라마에서는 이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미래 시대에 인물은 자기 시대에 했던 역할이 있듯이 그 사람이 다시 과거 어느 시대에 참여하면 그 시대에 맡은 역할이 또 있을 겁니다.

이처럼 인생을 인간 자기 만족이나 행복이나 ‘자기 의미로 채우는 사적인 생애’로 생각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때 태어나는 그 시대에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의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시대의 인간이나 인생이든 본인이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충실하도록 주어진 생애는 그 어디에도 허락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을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다윗의 등불’이란 ‘하나님의 왕되심의 지속성’을 말해주는 역사의 모티프입니다. 이 왕되심이 주인공이 되어서 스토리가 형성되면 여기에서 다음의 두 종류의 사람군이 생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도전하는 부류와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 부류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왕되심이 없었으면 결코 출현되지 않는 출연진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단호히 거역하는 그런 출연진도 각 시대에 걸쳐 일어나게 됩니다.

당연히 이들은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역한다는 곳은 곧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아비멜렉이 그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삿 9:5)

기드온 당시 사람들은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기드온이 입었던 에봇을 신성시했습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 8:27)

이런 차에 기드온의 아들 중 아비멜렉이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백성들의 호응에 바탕으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왕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틀어막고자 하는 정치적 반역입니다. 이것말고 가정적으로 다윗의 등불에 도전하는 사례가 다윗의 가정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 왕자가 배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미치도록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제로 누이동생을 범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범하고 난 뒤에는 끓어오르는 사랑 대신에 미움으로 더 강력했습니다. 처녀를 욕되게 한 겁니다. 이 사실을 접한 친 오빠인 압살롬 왕자가 왕자 중에 제일 맏이인 암논을 죽이고 이참에 그는 아버지의 자리까지 탐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여론을 자기 쪽으로 몰아세워 다윗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다윗 개인 가정사에 나타난 다윗의 등불 정신에 도적한 의식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죽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죽은 아들이 애닳아서 펑펑 웁니다.(삼하 18:33) 즉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한 것이 하필 자신의 자식이라는 점이 괴로웠던 겁니다.

다윗의 등불의 지속에 있어 인간들 종교의 한계를 드러내게 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서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여호와 선지자 100명을 몰래 물신양면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위는 엘리야를 만나면서 자기 한계를 드러냅니다. 제발 자신의 신상에 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부탁합니다. 자기 목숨만큼은 살리고 싶었던 겁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노골적으로,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대세 종교인 바알과 아세아 종교와 갈멜산에서 한판 붙기를 공개적으로 제안합니다. 이는 엘리야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비록 엘리야는 역할을 할 뿐이지만 여호와의 이스라엘 왕되심은 영원히 지속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계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등불’ 정신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왕이십니다. ‘왕위를 받는 귀인’이라는 누가복음 19:11-27의 내용이 예수님 자신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관해서 소개하면서 10므나 비유로 거론하시는 이유는 다음의 내용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27)

오늘날 범 사회적으로 각자가 하는 바로 그 일의 현장에서 본인들을 왕으로 여깁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이 사람들을 참석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인공이신 드라마에서 그들은 지옥불에 들어갈 사람으로 분류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주님의 왕되심을 보여주는 출연진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열왕기상 11장 34-40절(다윗의 등불) 25052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1장 34-40절입니다.

열왕기상 11:34-40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솔로몬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우상 섬기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솔로몬은 제거 대상이고, 솔로몬이 제거 대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도 함께 망해야 한다는 것, 그게 보통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에 의하면 솔로몬이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인데 ‘네가 잘못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다윗과의 언약의 조항 가운데서 네가 미처 몰랐던 것이 드러난다’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다윗의 등불’이에요. 다윗의 등불은 솔로몬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그런 것이 있는지 그 존재를 몰랐을 거예요. 솔로몬이 왕으로 있는 그 위치 때문에 왕이 잘못되었으니 나라가 하나님의 언약대로 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은 잘못했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네요? 예루살렘은 멀쩡하네요?

그것은 ‘너 말고 너와 함께 있는 게 있다’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다윗의 등불이에요. 그런데 등불이라는 그 뉘앙스를 생각해 보세요. 등불이란 밝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등불은 깜깜할 때 그 존재감을 나타내지요. 빛을 발하는 존재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언약을 주실 때부터 다윗의 등불을 높이 부각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대대로 왕들을 주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다윗의 등불은 솔로몬이 범죄 할 경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에요. 열왕기상 15장 3절에 왕이 등장합니다. 아비얌이라는 유다왕이 등장하지요.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라고 나와 있습니다.

‘온전치 못하였으나 그런데도 유다나라는 건재하게 이어져 간다.’라고 하고, 그 이유가 열왕기상 15장 4절에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라고 하는 거예요.

‘등불이라는 것이 존재했는가?’라고 할 때는 이렇게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을 때, 곧 다윗에게 준 언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다윗의 등불 덕분에, 다윗의 등불이 기반이 되어서 유다 나라가 이어진다는 겁니다.

열왕기하 8장 17-18절에도 여호람이라는 왕이 등장하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여호람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니라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런데 19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그러니까 솔로몬, 아비얌, 여호람을 통해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이 뭐냐? ‘진짜 이스라엘은 다윗의 등불 안에 들어 있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다윗의 등불 안에 이스라엘이 들어 있다.’ 소위 인간들이 ‘우리는 이스라엘이다’라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이스라엘로 쳐주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은 등불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등불은 깜깜하다, 어둡다, 이제는 절망이다, 끝났다 할 때 빛을 발하면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누구냐 하면, 그 등불을 봐야 할 사람들이 어둠에 속해 있지요.

그런 식으로 등불과 나 사이의 관계가 이어져 있는 사람에게만 등불의 가치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지요. 혼자 잘났고 똑똑하다는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나 자신의 구원은 나의 선함과 착함으로 다 결판난다’가 아니고, ‘나는 어떤 면에서 구원받지 못할 존재인가?’를 등불에 의해서, 다윗의 등불의 입장에서 비췸을 당할 때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약간 복잡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등불이 함께 가는 유다 나라의 그 왕들, 어설픈 왕, 우상 섬기는 왕, 솔로몬 왕 같은 그런 분들의 역할은 뭐냐? 그분들이 해야 할 일은 뭐냐? 그것은 간단하게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역할이지요.

나의 모든 확정된 미래와 장래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 등불에 달려 있지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이런 관계, 등불과 나의 관계는 ‘나는 비록 못났고 죄짓고 어리석지만, 그 등불과 나 사이의 관련성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등불에 의해서 살아 있으면 이스라엘 역사 아닌 그 마지막에 완전한 이스라엘, 천국 가는 이스라엘 될 때까지 그 등불 기능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이런 뜻이에요. 보통 등불이 없는 곳, 이 세상, 등불의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 시대에 자기가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 태어나면 주민등록이 있지요. 거기에 생년월일이 나와 있잖아요. ‘내가 현재 이 시대에 한 백 살 살다가, 좀 욕심을 낸다면 한 백 살이나 살다가 죽으면 나는 흙으로 소멸되어 없어진다’라는 이것이 보통 상식이잖아요.

그 상식이 틀렸다는 겁니다. 그 상식이 틀렸다면 뭐냐?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죽지 않는다. 왜 인간은 죽지 않는가? 등불이 죽지 않기 때문에 인간도 같이 죽지 않는 거예요. 등불의 그 기능을 위해서.

각 시대마다 등불의 기능이 그 시대의 요소들과 어울려서 함께 그 시대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제가 미국 드라마의 예를 들면 쉬울 겁니다. <하이랜더>라는 드라마를 1986년도에 미국에서 만들었어요. 죽을 뻔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 자가 영웅이 되어서 스코트랜드의 그 시대에 활동을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Highlander’니까 사전적으로는 땅보다 높다는 뜻이 들어 있지요.

그런데 2014년도에 만든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웃랜드>에요. 1945년도 2차대전에서 종군간호사였던 여인이 종전 후에 스코트랜드로 여행 갔다가 이상한 돌무더기를 만졌는데 1743년도의 스코트랜드에 등장해 버려요. 이것을 ‘타임루프(timeloop)’라고 해요. 시간을 초월해서 다른 시간대, 미래의 1945년도에 살았던 간호사가 1743년도의 시대로 가버립니다. 거기서 당시에 하이랜더의 불사조라는 제이미 프레이저라는 사람과 로맨스로 얽히면서 사는 이야기가 죽 나와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아웃랜더> 드라마가 2014년도입니다. <하이랜더>는 1986년도에요. 드라마 내용도 시간을 초월해서 1945년도의 미래 인물이 과거인 1743년도에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라마 자체도 2014년도 드라마가 1986년도의 드라마하고 섞여버린 거예요.

여기서 어떤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시대에 살다 소멸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소멸되지 않는 시간에 있어서 각자 모든 인간이 섞여 있다면, 같이 산다면 다 불사조가 되지요. 죽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뭐냐? 그 시대에 살다가 죽는다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요. 역할은 죽는 역할이지만 죽는 역할을 한 그 당사자는 안 죽고 다른 시대에, 또 앞으로 올 어떤 시대에 또 태어난다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불사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에요.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또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주님 앞에 다 소환돼요. 소환되어서 악한 자는 저주의 부활로 선한 자는 영생의 부활로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들에게 각자 자기 시대에 주어진 시간은 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어떤 역할을 맡는데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그 역할이 무엇인가?

그 역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맡은 그 역할이 뭐냐? 다윗의 등불의 존재를 드러내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봐야 할 것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다윗의 등불이 갖고 있는 역할이 있는데 다윗이 죽기 전, 그리고 다윗이 죽고 난 뒤에도 다윗의 등불과 연계되어 있고 다윗의 등불을 바라보는 그 원리들이 각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네 가지로 찾아봤습니다.

하나는 사사시대 때, 또 하나는 다윗이 살아 있을 때, 또 한 가지는 다윗이 죽고 나서, 또 한 가지는 신약시대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가지고 다윗의 등불의 기능이 어떻게 다윗 이전에도 타임루프처럼 미리 가 있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다윗의 등불의 기능이 뭐냐? 다윗의 등불은 여호와 왕 되심의 기능이에요. 하나님은 왕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는 그 기능이 다윗 언약의 기능, 다윗의 등불이 갖고 있는 본질입니다. 그러면 다윗 이전에 그 기능이 어디에 있느냐?

사사기 9장 1절에 나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전에 사사기 8장 27절에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미디인 군대를 물리쳤지만 본인이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어요. 왕은 누가 왕이냐? 300명 가지고 미디안 군대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 왕이 되심이에요. 그것이 사사시대에 다윗의 등불의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때 등장했던 인물이 기드온이고 그 당시에 ‘우리도 왕이 있어야 해. 그래야 우리가 안심하겠어.’라고 했던 그 백성들이죠. 그런데 아비멜렉이라는 기드온의 아들이 나머지 아들들 70명을 다 죽여버렸어요. 사사기 9장 5절에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왜 죽였느냐? 기드온은 왕 될 마음이 없는데 그 아들인 아비멜렉이 가만 보니까 사람들이 기드온 족보를 왕의 족보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로 결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아버지 집안에서 왕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버지 아들 70명 중에서도 내가 왕이 되어야 하겠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아비멜렉 사건입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다윗의 등불의 기능이 하나님의 왕 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자, 다시 말씀드립니다. 등불이 어떤 기능이냐 하면, 어두울 때 빛을 발하는 거지요, 어두울 때. 어둡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왕 되심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왕 되심인데 인간들은 하나님 왕되심의 뜻을 알지 못해서 곡해합니다.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누가 왕이 나타나면, 아니면 또 내가 왕이 되기로 하면… ‘이번 대선에 내가 나갈까?’ 이런 것 있잖아요.

‘안 나가려고 해도 자꾸 주위에서 나가라고 하네.’ 이런 것, 옆에서 으쌰, 으쌰, 하게 되면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여기면서 ‘나도 왕이나 해볼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봉사 좀 하면 “장로 한번 해보실래요?” 그렇게 할 때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그때 다윗의 등불이 등장하는 거예요.

제 말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다윗 언약, 물론 다윗은 그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기드온의 시대에 ‘나도 왕이 되어 볼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왕 되심에 저항하는, 모독하는, 대드는, 등불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역할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예요.

다윗의 그 등불에 의해서 백성 된 자와 백성이 될 수 없는 자 두 부류로 나눠지는 역할과 기능을 각자 태어난 그 시대 사람들이 출연진이 되어서 불사조, 죽어가면서도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은 다윗 시대에는 다윗 언약으로 다시 드러나잖아요.

그러면 기드온 때 있던 사람들은 비록 죽어도 그 사람들은 불사조가 되어서 그때 자기 시대의 드라마 말고…, <아웃 랜더>와 똑같아요. 1945년도 말고 1743년도에 똑같은 기능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각자가 해내고 있다는 그 말이죠.

왜? 등불이 살아있으면, 등불이 불사조라면 그 등불의 기능도 불사조기 때문에요. 그 기능적으로 똑같은 일이 반복돼요.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루프(loop)’라고 해요. 같은 질의 시간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다윗 시대 때 다윗의 등불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다윗의 등불의 기능을 정치적으로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가정적으로, 가정에서 역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정하고 ‘나도 한 번 왕 돼볼까? 대장 돼볼까?’ 하는 요소가 사무엘하 13장에 등장합니다.

1-2절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암논은 첫째 아들입니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상사병 걸렸다, 이 말이거든요.

성경에서 다윗 개인 가정의 자기 큰아들이 배다른 누이동생을 연애했던 이야기가 여기 성경에 왜 나오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짠 계시의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모티프는 끝났어요, 이미 확정됐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다윗 언약 속에 있는데 다윗 언약이 각 이스라엘 시대마다 모티프가 되어서 동일한 주제로 하나님이 다윗 등불을 드러내는 드라마로 계속해서 이스라엘 속에 반복적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데 다윗의 가정에 큰아들이 배다른 여동생을 사랑한다는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느냔 말이죠.

나중에 암논이 다말과 강제로 동침을 했죠? 사무엘상 13장 15절에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동침하고 난 뒤에는 전에 열렬히 사랑했던 그 마음보다 오히려 미워하는 마음이 더하다고 되어 있어요.

다말의 친오빠가 압살롬이에요. 압살롬이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 가정의 왕자들을 다 집결시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자기 여동생을 욕보였던 큰아들 암논을 거기서 쳐 죽여요. 쳐 죽이고 압살롬이 그다음부터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내가 왕 되어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백성들에게 여론 조사를 시켜요. 여론 조사를 해보니 압살롬이 압도적이에요. 인물 훤하지, 키도 크고요, 머리카락은 어떤 가수처럼 멋있어요. 여론 조사에서 거의 70프로를 차지하고 나머지 후보들은 20프로여서 박스권을 못 벗어나요. 경북, 경남, 부산, 대구 그 박스권을 못 벗어나요. 투표하면 압살롬이 압도적으로 왕이 되는 겁니다.

자, 다윗은 지금 아무 힘이 없어요. 없는데 다윗 언약은 살아있거든요. 다윗이 하나님이 짠 드라마의 모티프가 아니고, 다윗 언약이거든요, 다윗의 등불. 다윗의 등불이 살아있기 때문에 사무엘하 18장 15절에 보면 압살롬이 죽어요.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


그리고 사무엘하 18장 5절에 보면 다윗이 부탁했습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요압 보고 ‘네가 전쟁에서 승리한 건 좋은데 압살롬은 죽이지 말고 데려와라. 죽이지 마라. 내 자식이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요압이 그냥 죽여 버립니다. 다윗 언약, 하나님이 왕 되심이 살아있는데 압살롬과 요압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의 등불의 취지에 위반되는 두 가지의 다른, 하나님의 등불에 저항하는 악한 모습을 자기가 살던 그 시대에 나타내고 있어요. ‘아웃 랜더’죠. ‘하이랜더’고 ‘아웃랜더’에요.

사무엘하 18장 33절에서 다윗이 통곡을 하고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얼마나 울었는지 궁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듣도록 울었어요. 심하게 울었습니다.

압살롬이 누굽니까? 아버지한테 대들었던 자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압살롬이 대들었다는 생각은 안 하고 내 자식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어떤 시대든, 단군 시대든 어떤 시대든 ‘다윗의 등불’만 핵심으로 해서 그 등불의 어떤 요소가 등불을 모독하고 저항하는 요소냐, 그리고 어떤 부류가 하나님의 다윗 등불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왕 되심의 취지를 아는 요소냐, 각시대마다 그 두 부류로 갈라지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제 다윗 시대 지났고 압살롬 시대 지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등불은 어떻게 되는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가정 영역’에서의 다윗의 등불이었습니다. 아까 본 기드온은 ‘정치 영역’이고 이번에는 ‘종교 영역’에서 다윗의 등불의 취지가 어떤 식의 반대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봐야 해요.

다윗의 등불에 반대하는 것을 들춰내서 ‘아하, 다윗의 등불은 그 내용과 대치 관계에 있구나.’를 드러내는 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드라마처럼 꾸며가고 있단 말이죠. 열왕기상 18장은 엘리야 시대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절에, 엘리야 시대에 아합이 궁내대신, 아합은 북쪽 이스라엘이죠,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 오바댜라는 사람이 “선지자 일 백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우상 숭배가 대세가 되어버린 나라에서 오바댜는 왕실의 운영을 책임지는 궁내대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유지하면서 몰래 하나님 여호와 믿는 그런 선지자들 100명을 50명씩 구분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생존하도록 몰래몰래 그 일을 한 거예요.

북한에서 목사 몰래몰래 도와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북한 자체가 기독교를 완전히 핍박하잖아요. 그럴 때 이 오바댜라는 사람이 과연 다윗의 등불 기능을 제대로 했느냐는 점을 물어봐야 해요. ‘다윗의 등불은 하나님의 왕 되심이다. 그래서 오바댜는 여호와의 왕 되심을 믿고 여호와 믿는 목숨이 위태로운 자들을 도와줬다. 그 정도 했으면 충분히 여호와 등불의 기능이 되잖아.’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왜? ‘여호와의 선지자를 도와줘도 그게 왜 아니냐? 다윗의 등불의 내용을 충분히 반영해 주지 못하느냐?’ 그것은 오바댜가 도와주기는 하면서도 자기가 죽을 생각을 안 했다는 점 때문이에요. 도와주면서 자기 목숨도 하나님께서 챙겨주기를 바랬던 거예요. 이 한계가 어디서 깨지는가? 엘리야 선지자를 만나면서 오바댜의 그 한계가 드러나요.

“엘리야 선지자님. 저 만났다고 이야기 마세요. 저 죽어요!”(왕상 18:9, 12, 14) 반면에 엘리야는 대놓고 아합 왕을 만납니다. “우리 내기할까? 바알 선지자 450, 아세라 선지자 400, 총 850명의 선지자 전부 다 나와! 나 하나만 갈게.” 그래서 갈멜 산에서 제단 쌓고 엘리야는 공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거든 날 죽여도 괜찮다.”하고 자기 목숨을 내놓은 거예요. 이게 바로 엘리야 시대의 드라마에요. ‘아웃 랜더’, 드라마에요.

그 드라마에서 엘리야가 맡은 역할은 뭐냐? 다윗의 등불, 하나님의 왕 되심을 품고 있는 내용들에 ‘여호와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나로서는 영광스럽습니다.’ 하는 내용까지 추가가 되죠. 동시에 오바댜는 여호와를 도와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산이었습니다. 도와주면서 자기 목숨 챙기겠다는 것은 잘못된 거죠. 이게 종교적 영역에서 다윗 등불이 등장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신약에서 이 다윗의 등불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누가복음 19장에 열므나 비유가 나와요. 19장 11절에서 27절까지 나와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이야기하실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4-15절에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떤 귀인이 “내가 잠시 가서 왕위를 받아서 다시 올 게.”라는 그 이야기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귀인이 종 열을 불러서 한 므나씩 돈을 주면서 네가 장사하라 하시고, 그 주인은 왕위를 받으러 가는 거예요.

왕위니까 이게 뭡니까? ‘다윗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왕 되심에 부합되는 지상의 왕은, 메시아는 과연 누구냐?’가 이 시대의 모티프가, 주제가 되는 거예요, 이 모든 드라마의 주제가, 각자 그 시대에 역할들이 있단 말이죠. 그 역할은 두 종류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왕위에 대해서, 하나님 왕 되심을 아는 역할이지요. 또 하나는 왕위에 도전하는 역할, 각 시대에 인간은 두 부류밖에 없어요. 나중에 어떤 사람은 “열 므나 남겼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하는데 한 므나를 받은 사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럴 때 누가복음 19장 27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 시대가 드라마처럼 흘러가는데 확고한, 완전히 뚜렷하고 명백한 주제가 뭐냐? 예수님의 왕 됨을 원하는 쪽과 원치 않은 쪽으로 분류되는 그 드라마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여러분들이 출연진이에요. 여러분들이 출연료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출연진으로 등장한 거예요.

사람은 그냥 살다가 늙어 죽는 게 아니에요. 어떤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은 다윗의 등불에 의해 두 가지 기능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왕 됨에 도전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왕 됨을 반기느냐? 그 두 가지 기능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주민등록증에 생년월일이 있는 것처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겁니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서 그 드라마는 어떤 영역에서 펼쳐지는가? 그걸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사회 영역’에서 다윗의 등불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어떤 임금이, 임금입니다, 왕입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 결혼식을 마련했어요.

결혼식을 마련했는데 종들을 통해서 임금님 결혼식의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보냈는데 어떤 사람은 못 간다고 이야기했어요. 임금님 아들 결혼식에 못 간다고 거부했습니다. 못 가는 이유가 뭐냐?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마 22:4-5)

이게 사회입니다. 자기 노동 현장으로 갔어요. 자기 직업이 있어요. 자기가 재밌어하며 매진하는 자기의 업무가 있고 직장이 있잖아요. 이게 사회 영역이에요. 이 사회 영역에서 인간은 그 사회, 자기 직장에서 자기가 주인공이고, 주체자고, 왕이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의 등불에 대한 도전입니다. 자기 밭 갈러 가야 되고, 어떤 사람은 장사한다고 가버리고, 또 어떤 사람은 ‘임금이면 임금이지 내 시간이 따로 있는데 왜 자기 종들을 보내서 자기 시간에 내 시간을 소모하라고 해? 아, 기분 나쁜데?’ 하고 종들을 잡아 죽였어요.

이 말은 ‘임금아! 네 드라마만 있는 거 아니고 나도 주인공이야.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고 드라마 주연이야. 그런데 네 드라마, 당신 아들 결혼식 하는 그 드라마 찍는다고 주인공인 내가 거기 갈 것 같아? 종 이리 와. 내가 죽여 버린다.’ 그래서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까 혼인 잔치가 텅텅 비겠죠. 사거리에서 아무나 불러서 내 혼인 잔치를 채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시하는 이 현장이 2025년도 지금 이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 오늘날 어두움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등불, 이 등불이 예수님이에요. 그분은 우리의 왕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드라마를 위해 출연진으로 이 땅에 태어났어요. 우리의 인생 자체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으로서 살아온 그 드라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 내용, 등불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과연 흔하게 있을 것 같습니까? 없죠. 없지만 주께서 성령 주신 사람은 또 있어요. 어쨌든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다윗의 등불이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 등불의 기능, 두 가지 상반된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에서 영원히 살고 한쪽은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한 거기에 초청받은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내 인생만 행복하고 잘 살면, 그러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모독하는 그러한 생각인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50521)요약 열왕기상 11장 34-40절(다윗의 등불) 이근호 목사

대전강의가 월요일에 있죠. 주일설교를 요약합니다. 목요일 안양강의는 수요설교를 요약하고요. 금요일에 하는 광주강의는 수요설교를 요약해야겠지요. 지난 수요일에 ‘다윗의 등불’에 대해서 설교했잖아요. 결정적인 것은 그거예요.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였습니다.

암논의 다말 강간 사건이 유발되었을 때 압살롬이 왕이 되고자 한 거지요. 자신의 누이동생이 배다른 오빠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삼하 13:14-15) 그 배다른 오빠인 암논이 차기 왕이 될 영(0)순위의 왕자였잖아요. 암논은 다윗의 맏이였으니까요.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격분했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삼하 13:22).

그런데 더 나아가 압살롬은 이스라엘 나라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차기 왕을 뽑을 때 암논이라는 왕자가 차기 왕이 될 수 있겠는가?’ 압살롬은 그럴 일은 없다고 본 거지요. 자기 누이동생이 겁탈당함을 통해서 압살롬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합니다. 요즘 같으면 일종의 여론조사를 한 거지요. 여론조사를 해보니 다른 왕자들은 박스권을 못 벗어나더라, 그 말이지요. 압살롬은 인물도 좋겠다, 당장 투표한다 해도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때부터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 당한 것, 불의한 것들은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다윗 왕에게 가지 말고 나에게 와서 해결하세요.”(삼하 15:4)라고 해서 여론몰이를 합니다. 그런 여론몰이를 통해서 권력이 자기에게 모아졌겠지요.

그런데 압살롬이 결국 요압 장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삼하 18:14, 15). 다윗은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요압 장군이 죽이고 말았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힘의 균형에 의한 왕의 선출, 곧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왕의 자리를 권력이 집중화된 자리로 이해를 해 왔었습니다.

사사기 9장에서 기드온은 왕이 될 생각이 없었는데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낙인찍어요. 그렇게 하니까 기드온이 죽고 난 뒤에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 위해서 기드온의 나머지 자식들 70명을 살해합니다(삿 9:5). ‘힘의 균형에서 정점에 서 있는 자가 왕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기드온은 사사시대지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17:6)라고 되어 있지요.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말은 왕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서서히 왕을 한번 구축해 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던 시절, 그게 사사시대지요.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이 대성통곡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네가 왕이 되려고 그 부질없는 짓을 하다가 결국 네가 죽잖아. 내 혈육, 내가 사랑하는 아들 네가 죽어버렸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다윗은 무엇을 이해합니까? 압살롬 죽은 이유, 곧 ‘하나님 왕 되심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고 백성들에게 내가 인기가 있으니까 내가 왕이 되겠다.’라는 이것을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도전으로, 저항 세력으로 본 거예요.

압살롬은 왜 그렇게 했는가? 힘이 있기 때문에요. 압살롬 스스로 자신이 힘이 있다고 봤고, 또 일단은 반란에 성공했잖아요. 좀 오버를 해서 그렇지요. 그게 수요설교의 요점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안 믿으니까, 인정을 안 하니까 ‘자기 힘을 구축하면 그걸로 자기 동네에서 왕이 된다.’라는 이것은 조직 폭력배잖아요. 일종의 야쿠자죠.

철없는 고등학교 시절, 사회는 모르고 자기들끼리 누가 주먹이 세냐 하는 그룹, 여자애들도 그렇지만 특히 남자애들의 그룹, ‘누가 싸움 제 일 잘하느냐?’라는 힘의 우열로 고등학교 시절의 왕이 되는 그 범위를 인간은 나중에 커서도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 되심은, ‘다윗의 등불’은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왕 되심에 도전하는 세력을 들춰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왕 되심 앞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는 자, 그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이게 수요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료냐 구원이냐  (0) 2025.06.05
다양성과 두 노선  (3) 2025.05.29
솔로몬 속의 타자  (0) 2025.05.15
사라지는 솔로몬  (0) 2025.05.08
사랑이 지나가면  (0) 2025.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