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솔로몬
2025년 5월 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1:14-22
(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11:15) 전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 장관 요압이 가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장사하고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11:16)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이 하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 달을 그곳에 유하였었더라
(11:17)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 아비의 신복 중 두어 에돔 사람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하여
(11:18) 미디안에서 발행하여 바란에 이르고 거기서 사람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나아가매 바로가 저에게 집을 주고 먹을 양식을 정하며 또 토지를 주었더라
(11:19) 하닷이 바로의 눈 앞에 크게 은총을 얻었으므로 바로가 자기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로 저의 아내를 삼으매
(11:20) 다브네스의 아우가 그로 말미암아 아들 그누밧을 낳았더니 다브네스가 그 아이를 바로의 궁중에서 젖을 떼게 하매 그누밧이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아들 가운데 있었더라
(11:21) 하닷이 애굽에 있어서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잔 것과 군대장관 요압의 죽은 것을 듣고 바로에게 고하되 나를 보내어 내 고국으로 가게 하옵소서
(11:22) 바로가 저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기에 네 고국으로 가기를 구하느뇨 대답하되 없나이다 그러나 아무쪼록 나를 보내옵소서 하였더라
출애굽 시건이란 압제당하는 이민족 중의 한 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그 나라를 탈출하고 다시 힘을 길러 자신이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자신의 민족들을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시킨다는 영웅 스토리의 중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스토리에서 악의 역할은 애굽의 바로왕이 되고 선한 쪽은 모세일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출애굽 스토리를 핵심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이방민족을 잔인하게 권력으로 집행하고 있다면, 이 이스라엘에게 지배당하는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제 2의 모세같은 영웅담이 나올 수가 있을 겁니다. 단 하나님의 언약이 주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하닷이라는 인물은 입장 바뀐 이방민족인 에돔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잔인한 압제에서 꼼짝도 못하고 지배받으면서 에돔의 성인 남성들을 다 죽었는데 단지 어린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몰살에서 벗어나 애굽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거기서 애굽의 바로왕의 신임을 받아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기어이 자기 민족을 이스라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출애굽의 이방민족 버전’처럼 여겨지는 하닷의 탈출과 성장과 성공담은 이 모든 것이 솔로몬이 하나님의 언약노선을 고려하지 않는 이스라엘 통치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이스라엘의 운명이 솔로몬 왕에게 일임되어 있는가 아니면 다윗 언약에 일임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이스라엘을 언약으로 통치하십니다. 언약을 품고 있는 이스라엘이 언약이 없는 비-언약적 이방민족을 철저하게 몰살시키는 취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녔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 구원’에 목적으로 두고 하나님께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 성취’에 목적을 두고 일하심이 드러납니다.
‘나를 안다’와 ‘언약을 안다’는 대척적입니다. 반대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기쁨에 인생의 낙을 겁니다. 쾌락적으로 사는 것만이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늙은 승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몸이 편하면 남이 불편하고, 내 몸이 불편하면 남이 편하다”는 정신으로 평생 살아왔습니다.
이 말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 하나 희생해서 힘들어 살면 남들이 행복하고, 나 행복부터 챙기면 주위 사람들이 나로 인해 힘든 생이 된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하나님의 언약과 전혀 관련성 없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해야 언약적입니다.
“사람이 불편하면 타인을 공격할 수 없고, 사람이 멀쩡하면 그때부터 남을 공격하는 여유가 생긴다”고 말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정신이 망가지면 의로운 바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가 됩니다. 즉 사람이 멀쩡하다고 여기면 인간은 자기 기쁨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원하는 바는 ‘하나님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양의 기쁨이 우선이 아닙니다. 양을 찾으러 다니신 목자의 기쁨이 우선입니다. 양은 그 목자의 기쁨에 합류될 때만 예상 못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자기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기쁨, 언약의 기쁨이 우선이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그동안 대단한 이스라엘 통치는 마치 알라딘 요술 램프에서 나온 거인과 같습니다. 덩치 큰 거인이 인간이 감히 못해내는 일들을 처리합니다. 하지만 그 대단한 거인은 다시 작은 요술 램프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호리병 안에서 그 존재성이 잠식당해야 합니다. 거인의 끝은 가느다고 흐릿한 연기와 같습니다.
이는 곧 극히 작은 것 위에 크고 나머지 모든 것이 세워지는 모습입니다. 솔로몬의 인생 말기의 모습은 솔로몬의 본질로 환원된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의 통치가 이방민족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작용하는지를 알아 봐야 합니다. 신명기 7:24-25에 보면,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그 언약 노선에서 벗어나면 이방나라가 망한 것처럼 그들도 진멸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신 8:19-20)
그렇다면 솔로몬의 통치가 아니라 ‘다윗 언약의 통치’가 어떤 모습일까요? 시편 51:14에 보면, “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피 흘리게 하는 죄는 바로 다윗의 모친에서 물러받은 요소라는 겁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즉 다윗은 자신의 죄로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죽는 것’과 ‘사라져 가는 것’과의 차이를 위함인 줄 알았습니다. 더는 자아를 살릴 수 없는 그 최소 지점 위에서 나머지 모든 인생이 출발하는 겁니다. 진정한 인간의 본질은 죄 덩어리, 곧 쓰레기입니다. 따라서 솔로몬도 이 다윗 언약 앞에서 다윗에게 일어난 최소의 지점이 그에게도 말년에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든 내가 살아야겠다’가 아니라 모든 것들은 당연히 끝장 나야만 한 세상인 것을 알고 더는 자신을 살리겠다는 일념이 곧 비언약적인 생각인 것들을 알아야 했던 겁니다. 언약 없는 이방민족을 이스라엘이 잔인하게 밟아야 마땅한 것처럼, 다윗 언약은 자기의 사라짐을 거부하는 자신에게 잔인하게 작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구약은 종말이 되기 직전의 도시에 대해서 알려지는 소식이라면, 신약은 이미 완전히 이 세상은 다 멸망한 종말 이후의 도시에 알려지는 소식입니다. 즉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성도의 지상 삶은 다윗언약을 홀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계심에서 비롯된 나타남입니다. 주님의 구원되신 그 기쁨에 함께 들어가게 되므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환상이며 영화같은 비-현실임을 잘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재미로 사는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망상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열왕기상 11장 14-22절(사라지는 솔로몬) 25050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1장 14-22절입니다.
열왕기상 11:14-22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전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장관 요압이 가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장사하고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이 하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달을 그곳에 유하였었더라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 아비의 신복 중 두어 에돔 사람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 하여 미디안에서 발행하여 바란에 이르고 거기서 사람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나아가매 바로가 저에게 집을 주고 먹을 양식을 정하며 또 토지를 주었더라 하닷이 바로의 눈 앞에 크게 은총을 얻었으므로 바로가 자기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로 저의 아내를 삼으매 다브네스의 아우가 그로 말미암아 아들 그누밧을 낳았더니 다브네스가 그 아이를 바로의 궁중에서 젖을 떼게 하매 그누밧이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아들 가운데 있었더라 하닷이 애굽에 있어서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잔 것과 군대장관 요압의 죽은 것을 듣고 바로에게 고하되 나를 보내어 내 고국으로 가게 하옵소서 바로가 저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기에 네 고국으로 가기를 구하느뇨 대답하되 없나이다 그러나 아무쪼록 나를 보내옵소서 하였더라.”
본문이 좀 길었습니다만 여기 나오는 ‘하닷’이라는 인물은 마치 옛날의 모세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다가 모세를 핍박하고 또 히브리인을 핍박하는 바로 왕의 압제를 이기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시 40년 후에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을 해방하고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한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지요.
출애굽사건의 절차가 ‘핍박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다시 자기 민족에게 찾아가서 핍박받기 전의 그 민족의 나라를 세우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모세가 그러한데 오늘 본문의 인물 하닷은 에돔사람이에요. 에돔은 다윗시대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원수, 이방 민족에 속하는 겁니다. 뿌리가 되는 아버지 이삭에게서 야곱과 함께 났지만 서로 싸우는 적대 관계지요.
오늘 본문에도 그게 나와요. “전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장관 요압이 가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장사하고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이 하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달을 그곳에 유하였었더라”(왕상 11:15-16).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에 있어서는 출애굽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에돔 남자들을 전멸시켰습니다.
바로 왕도 히브리인이 애를 낳으면 딸은 살리고 아들은 무조건 다 죽였습니다. 이만큼 철저하게 요셉의 후손들인 히브리인들을 애굽나라의 종으로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 잔인한 권력을 집행하는 그 모양처럼 다윗도 애돔사람들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에돔은 완벽하게 다윗에 의해서 통치당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행한 것이 뭐냐? 출애굽정신 곧 언약정신입니다, 모세언약. 하나님이 언약을 줘서 언약이 없는 그 애굽나라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언약이 언약없음을 이긴다는 것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애굽의 압제에서 따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위력이 세상 어떤 나라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출애굽 정신에 입각해서 철저하게 주변 이방 나라를 압제했어요. 아주 잔인하게 압제했는데 솔로몬이 그 언약을 벗어나자마자 이번에는 그 이방 나라가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복속되어 있던 자기 나라를 이스라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통치하에 있는 나라냐, 아니면 이스라엘이 다윗 언약의 통치하에 있는 나라인가?’를 정리해 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같으면 ‘나는 내가 구원받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느냐, 곧 내가 천국 가고 싶다는 나의 의지가 나를 지배하고 있느냐, 아니면 너를 이미 천국 백성 되게 했다는 하나님의 새언약,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지배하고 있느냐?’와 같은 질문이에요.
만약에 우리의 믿음, 나의 기대, 나의 희망이 ‘교회 한 4, 50년 다녔으니 이제는 복음도 알고 성경도 다 아니까 나는 오늘 죽어도 구원받는다.’라는 것이라면 자신의 의지가 자기를 통치하는 거예요. 그런 안일함,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다고 여길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안 죽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여길 때 벌써 그것은 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통치되는 방식이거든요.
‘자기의 생각이 자신을 늘 컨트롤하면 된다, 통제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십자가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에요. 새언약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하는데 자기 기대와 만족에 의해서 자기가 통치되는 겁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반대이야기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점심을 먹고 상을 치우는데 젓가락 하나가 데구르르 구르더니 없어졌어요. 떨어지는 소리는 들렸는데 안 보인다는 말이지요. 떨어졌으니 어디 있겠지, 하고 밥상 후딱 갖다 놓고 지나온 경로를 다시 봐도 젓가락 하나가 없습니다. 두 개 다 없으면 차라리 섭섭하지 않겠는데 한 개만 덜렁 남아서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동전 하나 잃은 여인처럼 온 구석을 다 쑤시고 다니다가 결국 젓가락 하나를 찾았어요. 여기서 주의해야 합니다. ‘젓가락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그걸 찾고 싶었던 나의 기쁨, 혹은 나의 만족인가?’ 그러면 안 돼요. 주님의 기쁨이어야 해요.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수밖에 없는 나, 나를 건져낸 기쁨은 구원받은 내 기쁨이 되면 안 돼요. 나를 건져낸 것은 주님의 기쁨이어야 하고, 구원된 자는 주님이 기뻐하는 것에 뒤늦게 참여하는 형식이어야 하지 ‘나 식겁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지옥 갈 뻔했네.’ 이것은 자기만족이에요, 자기만족. 이것은 언약과는 전혀 상관없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기대한 대로 안 되다가 기대한 대로 되니까, ‘잃어버렸던 젓가락 찾으니까 아 기쁘다!’ 이렇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의 기쁨은 어디서 찾습니까? 어느새 우리는 언약에서 배제되어 있는, 언약과 상관없는, 언약의 하나님의 그 작용에서 이탈되어 있는 상태를 평소의 우리 일상 가운데서 느끼는 거예요.
또 한 예를 들겠습니다. <인간극장>을 보니 94세의 골골한 스님과 그 스님의 딸이 나와요. 63세인 그 딸도 역시 출가해서 중인데 그 딸이 아버지 스님을 봉양하고 있어요. 아버지 스님이 치매기가 있어요. 평소에 아버지가 늘 했던 말씀이 있답니다. “내 몸이 편하면 남이 불편하고 내 몸이 불편하면 남이 편하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자기도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예요. 자, “내 몸이 편하면 남이 불편하고 내 몸이 불편하면 남이 편하다.”라는 이 말이 두 가지의 해석이 있어요. 첫 번째 해석은, 언약과 상관없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개입 없이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내 몸 하나 불편하게 해서 열심히 일하면 남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 몸 하나 편하자고 농땡이 부리면 남들이 그만큼 힘들어진다.’라는 식으로 세상에서 해석해요. 노스님부터 딸 스님까지 전부 다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고요.
언약은 어디 있습니까? 언약은 어디 있지요? 성경에서 언약, 언약,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요, 전부 다 자기에게서 나와서 자기를 통해서 자기로 돌아가는 회전논리에 빠져서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회전논리라는 것은 코카콜라 뚜껑처럼 계속 돌리는 거예요. 돌려서 열면 열리고, 반대로 돌리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뺑뺑이 돌아봐야 항상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만족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든지 무슨 고생을 해도 합니다. 뭘 해도 보람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조건하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젓가락을 잃어버렸을 때 ‘젓가락 좀 찾았으면 좋겠다.’ 하다가 ‘찾았네! 기쁘다!’ 이것은요, 하나님의 기쁨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자기 기쁨이지요. 언약과 상관이 없는데 그게 무슨 구원이겠습니까? 안되지요.
오늘 본문 열왕기상 11장을 보면서 자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솔로몬이 잘하다가 끝에 가서 이런 사달이 났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고 제가 이야기를 했지요. ‘아, 조금만 더 버텼으면 솔로몬은 진짜 대단한 왕인데 왜 끝에 가서 인간이 그렇게 망가지는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도 보는 거예요. ‘만약 솔로몬이 끝까지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에돔사람 하닷이 철저하게 이스라엘 통치하에 있다가 거기서 벗어날 길은 없었겠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읽지는 않았지만 열왕기상 11장 2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그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
여기 르손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25절에는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의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 이런 식으로 하닷이 이르라엘 통치에서 벗어나고, 또 르손도 벗어나고, 나중에는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서 통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끝까지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될 것을 끝에 가서 이방의 공주들과 결혼해서 우상을 섬기고 언약을 버렸기 때문에 이런 낭패가 일어났다’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다들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은 없어지고요, 내가 솔로몬이라고 감정이입이 되어서 ‘아, 조금만 잘 했으면…’ 이것은 현실 세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로부터 어떤 영화를 보는 거예요. 영화 관객들의 공통점은 주인공과 마음이 하나로 동화가 되어 있어요. 주인공이 잘못되면 가슴이 아프고요, 주인공이 잘되면 박수 치고 그래요. 물론 영화는 항상 주인공이 잘돼요. 그래서 영화는 관람하는 그 값을 해요.
그런데 그것이 환상이에요, 망상이고. 현실은 그게 아닙니다. 현실은 어떠냐? ‘내 몸이 편하면 남이 불편하고 내 몸이 불편하면 남이 편하다.’ 이것에 언약이 작용하면 그 현실에서는 이렇게 됩니다. ‘내 몸이 불편하면 남을 공격 못 하고, 내 몸이 편하면 남을 공격할 수 있는 여력, 에너지가 생긴다.’
언약의 반대말은 ‘나 위주’에요. 언약의 반대말은 ‘나 위주’ 즉 그 노스님 위주에요. 그 노스님이 무슨 이스라엘이 언약을 알겠습니까, 십자가를 알겠습니까. 십자가 빼고, 모세 언약 빼고, 다윗 언약 빼고, 약속 다 빼고 살아봐라. 그 노스님처럼 살아가요. 나 하나 불편하게 해서 남에게 잘해주면 거기서 보람을 느끼면서 그게 뭐가 되는가? 자기 의가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망가져 봐야 해요. 인간이 망가지게 되면, 그동안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자기를 감추고 가렸던, 자신을 제2의 자기로 묘사했던, 멋있게 만든 모든 것이 치매 걸려서 망가지게 되면 남는 것은 짐승, 짐승밖에 없어요.
그래서 해석의 결론은 뭐냐? 짐승이 되면 하나님의 의가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다윗 언약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짐승이 되게 하는 겁니다. ‘끝까지 잘 버텼으면…’ 그게 아니고 원래 자리로 환원하게 되어 있어요. 언약은 원래 자리로 환원해야 해요. 환원, 돌아간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의 부귀와 번영을 보면서 백성들은 누구만 쳐다보느냐 하면 솔로몬만 쳐다봤어요. ‘솔로몬 임금님이 잘해서 이런 복을 받았으니 계속 잘해주세요.’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무엇과 반대가 되느냐 하면, 다윗 언약과 반대가 돼요. 다윗 언약은 시편 51편에 이렇게 나옵니다.
시편 51편 14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피 흘린 죄, 내가 우리아를 죽여버린 그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다윗 언약입니다. 그게 다윗 언약이에요. ‘정말 내가 정신이 나갔어.’
그런데 그 정신이 나간 것이 다윗이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진짜 모습이에요. 아까 치매 걸리면 뭐 된다고 했습니까? 짐승 된다고 했지요. 지금 우리나라 행정당국에서 뭘 걱정하느냐 하면, ‘치매 머니’를 걱정해요. 치매 머니가 뭐냐? 정신 멀쩡할 때는 자기 돈 관리를 잘해요.
부동산, 아파트, 집, 토지, 현찰을 관리하는데 치매 걸리면 그 돈 관리를 못 한다는 겁니다. 투자를 한다든지, 저축한다든지, 돈을 어떻게 굴린다든지 이렇게 못 할뿐더러 그 돈을 어디에 두고는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치매 걸린 환자 1인당 2억이 된다는 거예요. 이 자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 이것을 사자성어로 ‘치매 머니’.
지금 이스라엘의 보화는요, 이스라엘의 번영은 솔로몬 때문에 주어진 게 아니에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주인이 아닙니다. 진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줘서 그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해 왔던 거예요, 다윗 언약을 통해서. 이제 여러분들이 아귀가 맞아야 돼요. 여기 하닷의 에돔, 그 에돔은 다윗 언약의 통치를 받은 거예요. 다윗이 아니고 다윗 언약.
다윗의 통치를 받는 거 하고 다윗 언약의 통치를 받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나는 것이냐? 이런 차이가 납니다. 신명기 7장에, 역시 모세 언약이죠, 신명기 7장 24절에 보면, 여기서 “그들”은 이방 민족입니다. 에돔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르손, 이건 아람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 밑에 현재의 요르단, 그리고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에요. 이스라엘 남쪽,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둘 다 약속의 땅의 이방 민족입니다. 그 이방 민족에 대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잘 들어보세요. 24절-26절에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너는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필경은 그들을 진멸하리라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여기에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붙이시리니” 이렇게 붙이는데 그 붙이는 조건이 뭐냐? 이스라엘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이방 민족에게는 무엇이 없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그러니까 언약이 있는 나라를 만들어서 언약이 없는 나라를 치는데, 언약이 없는 나라를 치면서 뭐라고 하시는가? 신명기 7장 25절에 “그들의 조각한 신상” 우상이죠, 그것들을 다 불사르고 그들을 다 멸망시키고 만다는 거예요.
여기에 인간의 사적인 행복? 구원? 이런 문제 없습니다. ‘나 하나님 믿어서 천국 가야지.’ 이런 거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성취가 하나님의 제1순위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성취하는 게 하나님의 관심사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뭘 어떻게 나를 잘 되게 할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구원받는 인간은요, 언약이 삽입되고 난 뒤에 구원받는 인간이에요. 언약이 들어오지도 않은 인간을 하나님은 일체 구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심어놓고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원하는 거죠.
수백 번 이야기 했어요. 수백 번 이야기 하면 뭐합니까? ‘내 몸 하나 불편하면 남이 잘되고…’ 그저 덕 닦고, 도 닦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나 때문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지금 이러고 있다고요. 지금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넌 지금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명기 8장 19-2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 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만일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방금 제가 말한 그 이야기입니다, ‘네가 그 땅에 가서 다른 언약이 없는 민족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면, 주님께서 이스라엘 너라고 할지라도 이방 민족과 같이 멸망시킬 것이다. 잘 들어!’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한 번 이스라엘을 봐줬다고 해서 계속 봐주는 법은 없어요. 계속 언약이 살아 있느냐가 조건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자, 이 조건에 의해서 사무엘하 8장 13절에 보면,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에돔 사람을 쳐 죽였어요. 왜? 에돔 사람이 뭐가 나쁜데요? 그들끼리 형제자매가 얼마나 우애가 좋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인격적으로 타고난 양심으로 얼마나 착실하고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그 1만 8천을 왜 쳐 죽입니까?
다윗이 쳐 죽이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언약이 비 언약을 보고 그들을 처벌하신 거예요. 언약이 되시는 하나님이 언약이 없는 인간을 치신 거예요. 이게 언약적 권력 집행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대리로 하지만.
사무엘하 10장 15-19절에 보면, 아람 사람입니다, 이번엔 르손에 관한 건데요.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대 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린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뭐 다윗이 이방의 연합군과 싸웠다는 이야기죠. 언제 말입니까? 다윗 언약이 작동되는 그 다윗 언약 시대에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에 와서는 그 르손 사람이, 아람 사람이 독립했어요. 이스라엘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독립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굽 바로 왕에게서 탈출했는데 하닷 사람은 오늘 본문 내용에 보니까 바로 왕에게 인정을 받아요.
바로 왕의 도움을 받습니다. 꼭 모세 같아요. 요셉하고도 비슷하고요. 요셉도 애굽에 살았잖아요. 애굽 제사장 딸과 결혼했고요. 최고 권력층이죠. 그러니까 이건 솔로몬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안 돼요. 다윗 언약에서 솔로몬이 자기의 본모습을 보인 거예요.
조금 설명이 필요해요.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이니까 설명이 필요한데 이렇게 설명드리면 되겠습니다. 시편 51편의 그 대목을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거예요. 14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 모습을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면, 내가 씻을 수 없는 죄의 현장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거예요, 새롭게. 그래서 시편의 유명한 말씀, 51편 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멀쩡한 나를 어디로 환원시키느냐? 내가 출생했던 그 시점으로 환원시켜요. 그러면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죄가 뭉쳐져서 된 죄의 덩어리가 곧 나였다는 거예요. ‘엄마가 내보내는, 전달하는 그 죄 덩어리의 일부가 나였다. 내가 그 죄 덩어리다. 엄마의 죄 덩어리.’ 쉽게 말해서 쓰레기다, 이 말이에요. 쓰레기다, 이 말이죠.
제가 국민학교 때, 그때는 뭐 학원도 별로 없고 학교 마치고 오다 보면, 동네 공터에서 약장수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어요. 그냥 약만 팔면 사람들이 잘 안 모이잖아요. 뭘 하느냐? 차력을 해요. 15센티 정도의 막대기를 하나 꽂아놓고 막대기 위에 커다란 돌을 딱 얹어요. 균형감이 있어서 그게 안 넘어져요.
이것은 물리적인 균형이다, 이렇게 안 합니다. 사람들 속이기 위해서 ‘이것은 나의 기, 나의 힘이 들어가서 이렇게 극히 작은 것 위에 큰 것이 딱 꽂힌다.’라는 거예요. 애들이 막 보고 있잖아요. 그때 “애들은 가라!” 하면서 그다음에 뱀을 꺼내요. “배암이 왔어요, 배암이 왔어요! 한번 잡솨봐. 이 뱀의 효력이 이 약병에 다 담겨있으니까!”
먼저 쇼 보여주고 약 사는 걸로 관람료를 대체하는 그때 약장수들이나 요즘 군산에 있는 섬 이름 뭡니까, 이만 원 회비 받고 여행하면서 약 파는 그 약장수들이나 똑같은 거예요. 참 전통과 역사가 오래됐어요. 가장 작은 것에 그동안의 가장 크고 내세울 만한 나의 모든 것을, 시편 51편에서는 그 위에 딱 세우는 거예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통치를 잘했다? 아니에요. 그게 솔로몬의 큰 거예요. 큰 건데 어디에 그걸 세우느냐? ‘솔로몬은 자기 부인 된 사람들과 같이 우상을 섬겼다.’ 하는 그 작은 것에, 솔로몬의 모든 지난날을 그 위에 딱 세운 거예요.
알라딘의 요술램프 있죠? 엄마 없이 살던 아이에게 자기 아버지의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사실은 마법사인데 속아 넘어가지요. 알라딘 보고 동굴 가서 요술 램프 가져오라고 하는데 알라딘이 동굴에 들어가서 그걸 찾았어요. 동굴 입구에서 “그거 이리 다오.” 하니까 안 줍니다.
그 마법사가 동굴을 완전히 봉해버리죠. 알라딘이 요술 램프를 문지르니까 거기서 거인이 나오거든요. 나중에 어떻게 잘 돼서 공주랑 결혼 하고 부자 돼서 잘 살았다는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거인을 한번 보세요. 거인이 덩치는 아주 커요. 그런데 거인의 아래쪽 꼬리를 보면 꼬리가 애매해요. 모호해요. 이게 꼬리인지, 아니면 그냥 연기인지, 작은 호리병 같은 데서 나오다 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빠져나온 덩치는 우락부락하고 크잖아요. “주인님 뭘 해 드릴까요?”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솔로몬의 본질은 뭐냐?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열심히 잘한다’가 아니라, 또 ‘솔로몬은 언약 앞에서, 죽어야 된다.’라는 말도 아니에요, ‘솔로몬은 사라져야 된다.’라는 거예요. 솔로몬이 죽으면 안 돼요. “내가 우상 섬겼으니 책임지고 죽겠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그동안 솔로몬의 본질이, 그 거인처럼 끄트머리가 아직 덜 나왔어요. ‘잘 한다, 솔로몬! 훌륭하다, 솔로몬! 솔로몬의 지혜가 제일이구나.’ 스바 여왕이 와서 “당신의 지혜는 놀라운 지혜입니다.”라고 했죠. 그러니까 솔로몬은 태어난 게 아니고, 이렇게 나타난 거예요. 나타난 겁니다. 나타났는데,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다윗 언약을 혼동하고 오해했어요. ‘다윗 언약을 지키는 분이 오면 우리나라는 번영한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백성들이 솔로몬을 대단한 사람으로 본 이유는, 솔로몬이 신약 사람이 아니고 구약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지금 다윗 언약이 끝이 아니에요. 그 언약의 끝은, 진짜 다윗 언약의 완성은 장차 오실 메시아, 새 언약 되는 분이 오시는 겁니다.
차이가 뭐냐? 구약은 종말을 앞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것이 구약이에요. 신약은 이미 세상이 끝나고 난 뒤에 폐허 위에서 듣는 것이 신약 성경입니다. 세상이 끝난 후에 황폐한 도시 위에서 듣는 것이 신약이고, ‘너 까불면 망한다’라고 하는 것이 구약이에요. 그래서 구약은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소리를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준 거예요.
그러면 신약은 뭐냐? “아직도 이 세상이 망하지 않았잖아요. 아직 남아 있으니까 우리가 복음 듣고 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데 그게 아닙니다. 신약의 십자가가 죽으실 때 택한 백성은 같이 죽었어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타난 거죠. 누구의 현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 예수 그리스도 몸의 지체의 나타남으로 사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는 나타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솔로몬은 뭐냐? 안 죽었고, 안 죽었기 때문에 알라딘 요술 램프 거인의 끝처럼 자기 끝을 모르는 거예요. 대단한 거예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모든 걸 행하면서 그 알라딘 램프 앞에 있는 거인의 끝이 쥐꼬리처럼 아주 희미하게 없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여러분 죽으면 안 돼요. 여러분은 사라져야 합니다. 서서히 사라져야 해요. 사라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덩치가 대단한 덩치, 그리고 남 보란 듯이 대단한 존재인 것을 과시 못 해서 환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나 이 정도 잘 나간다고, 이 정도로 남 보기에 멋있게 산다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꼬리를 몰라요.
솔로몬은 세상 끝의 모습과 세상 끝 이후의 모습, 두 가지 모습을 다 보여줬습니다. 첫 번째,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어요. 아버지 다윗은 알았죠. 나는 바로 죄에 불과하다는 것, 이 죄인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으로 나타나게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솔로몬은 잘 나갔으니까 몰랐죠.
그래서 나중에, 언약에 의해서 잔인하게 통치되어야 할 이방 나라를 자기가 다 놓치고 있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솔로몬은 이 치매 머니,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이스라엘 것인데 치매 걸려서 다 빼앗기게 되어 있어요. 사기꾼들이 와서 이스라엘 거 다 가져가게 되었어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 난리 났죠. 그동안 솔로몬 있을 때 꿈쩍도 못 하더니 솔로몬 말년에 하나, 둘 독립을 하니까 그들은 왜 이렇게 됐는지를 모르죠. 아버지 치매 걸리면 어떤 사기꾼이 아버지 친구라고 하고는 돈 가져가도 모르잖아요. 다 빼앗기는 거예요.
백성들은 솔로몬하고 어떤 영화 찍고 있어요, 솔로몬이 있으면 잘 된다고.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사라지게 만들어서 진짜 다윗 언약의 주인공은 장차 오실 분이에요. 솔로몬이 아니고, 다윗도 아니고. 그러면 솔로몬은 뭐냐?
솔로몬을 통해서 그동안 누렸던 부귀영화가 너 잘나서 주어진 게 아니고, 진짜 다윗 언약의 주인이 오시게 되면 그분에 의해서 우리는 인간이 상상도 못 하는 큰 기쁨을 주는 희락의 나라 천국에 갈 겁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내 기쁨이 우선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그 기쁨에 참여하는 식이 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은, 양의 기쁨 이전에 잃어버린 양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이 우선이 되고 그 우선 되는 기쁨, 새언약의 주인공이신 우리 주님의 기쁨이 먼저 시작되고 주님의 십자가의 기쁨에 우리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게 신약 성경에 나온 복음이에요. ‘복음 들어서 기쁘다.’가 아니라 주님의 기쁨에 내가 참여되고 그 기쁨이 이런 기쁨이라는 것을 현재 우리 몸을 통해 나타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죽기 전에 복음을 알게 하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 내 것? 나는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그 막대기에, 주와 함께하는 우리의 남은 모든 것이 그 막대기 십자가 위에 아슬아슬하게 안 넘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잘난 거인이라고 할지라도 알라딘 램프에서 나왔던 거인처럼 다시 호리병에 쏙, 결국엔 십자가 안에 쏙 들어가야 해요. 십자가 안에서 나와서 십자가 증거하다가 다시 어디로 간다? 죽으면 주님의 십자가에,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에 합류하게 되면 바로 그 세계가 하나님의 기쁨으로 같이 누리는 기쁨의 종들 또는 기쁨의 백성들이 되는 겁니다.
솔로몬도 몰랐던 다윗 언약이 그렇게 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의 완성, 새 언약의 완성, 우리 주님의 나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끝 날에, 아니 끝 이후에 우리의 시민권이 이미 하늘로 가 있는 상태에서 황폐하기 짝이 없는 지옥 같은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저희들 이미 죽은 자로서 할 일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껏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 되었고, 십자가 기쁨이 주님의 기쁨인 것을 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