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2a 울산강의-역대기하(12강) 14장 11절 : 전쟁의 상대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4장부터 하겠습니다. “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년을 평안하니라” 10년 동안 평안했다? 말씀을 이렇게 하는 그 의도가 이스라엘은 이름 그 자체가 싸우는 나라에요. 싸워야 된다는 겁니다. 전쟁이 없다는 것은 그냥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고, 전쟁이 없을 경우의 조건이 따로 있고, 전쟁이 생길 조건이 따로 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을 대상으로 상대로 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해나가신다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전쟁하시는 하나님. 그럼 하나님 체제는 뭐로 구성돼 있는가? 천사들로 구성돼 있지요. 천사들, 만군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전쟁 취지에 맞추어서 움직이도록 뭐 훈련할 필요 없어요. 시키면 따르도록 돼 있는 그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서 지구상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상대를 둘을 상대해요. 하나는 우상과 상대해서 전쟁, 또 하나는 인간과 상대해서 전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지만 그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 상대 아니라면 또 누굴 상대하느냐? 인간이 우상을 섬긴다면 그 배후에 조종자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나오는 게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신약에 나타납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세상 신, 악마지요.
자, 간단하게 생각해서 이스라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럼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을 이방 민족이라 해요. 이방민족은 우상을 섬기게 돼 있거든요. 배후에 마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뭐가 있느냐? 언약이 있어요. 이방민족에는 언약이 없어요. 그럼 전쟁은 뭐와 뭐와의 싸움이냐? 언약과 비-언약의 싸움이 전쟁이다. 여기에 종사하게 되었고, 이 전쟁을 하면서 전쟁의 취지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사명을 받은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과 이방나라가 전쟁할 때에 각자의 우두머리, 일본말로 오야봉이 나오겠지요. 이방민족의 오야봉은 우상이 등장하고, 이스라엘엔 누가 등장하느냐? 이스라엘은 만군의 하나님을 앞장세워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 하나님보고 시킬 수는 없고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전쟁할 때 ‘그냥 언약대로 해’ 이런 지시를 내리거든요.
그럼 이방민족은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자리에 다른 게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약자리에 힘이 들어가요. 칼, 그리고 병거(마차), 또 말, 창 이런 것들로 전쟁무기를 삼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서는 겁니다. 무기치고는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지요. 하나님의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니까. 그런데 주의 이름 부른다고 무기가 되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돼요.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주께서 쫓아와 도와주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을 의지하면 되지 않느냐? 인간은 어떤 압박, 절망이 되지 않으면 주의 이름을 안 부르게 돼 있어요. 인간은 이방민족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방민족은 뭐로 싸운다? 이방민족은 언약 대신에 힘이 동원되지요. 칼, 병거, 말, 창 이걸 합치면 뭐가 돼요? ‘힘’이죠. 전쟁할 때 힘을 모아서 더 강한 힘이 약한 힘을 이긴다는 법칙, 원칙 이게 이방민족한테는 철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될 때 기존의 어떤 나라에서 살던 사람이 이스라엘로 나왔지요. 어느 나라에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살았잖아요. 애굽에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히브리 민족도 그 언약이 없는 나라에서 살면서 그것도 몇 년? 십년, 이십 년이 아니에요. 사백삼십 년. 엄청나지요. 엄청난 세월 동안에 하나님을 모르는 그 나라에서 430년. 보통 성경에서는 사대 째 살았다 하는데 그때는 한대가 100년이 넘으니까 400년이 훨씬 넘었어요. 줄곧 애굽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인들이 살 때 평화로웠어요. 애굽 사람과 잘 지내면 되니까요. 이웃과 잘 지내면 되고. 그런데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언약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예 언약에 대해서 개무시하는 왕이 등장했습니다. 그걸 출애굽기 1장에서는 ‘요셉의 은혜를 모르는 바로 왕’이라고 돼 있어요. 바로 왕 앞에 뭐가 붙느냐? 요셉이 주신 은혜에 주신 다 잊어버린 왕, 바로 왕.
그러니까 요셉의 은혜를 모른다는 말은 자체적인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자들이 히브리인들이 힘이 약하니까 노예로 삼았습니다. 노예로 삼을 때까지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해도 해도 너무 해요. 하여튼 모든 가진 힘까지 다 빼앗았어요. 아들 낳으면 다 죽이라 했으니까. 힘없는 딸은 살려두고 힘 되는 장차 힘이 되는 아들은 다 죽이라 했으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힘을 쏙 빼버린 그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힘이 없으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되겠어요? 힘이 없으니까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지요. 그때 찾은 것이 여호와를 불렀던 거예요. 여호와의 이름을 그냥 부른 게 아니에요. 절망적일 때 불러요.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힘으로는 세상에 살 수 없다고 여길 때 여호와를 부릅니다. 여호와를 부르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예전처럼 살게 해 달라.’ 그냥 살게 해 달라가 아닌 예전처럼 살게 해 달라.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 부를 때 그 취지가, ‘이방나라와 전쟁해서 이기게 하옵소서’ 그거 아니에요. 인간은 전쟁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피곤한 일이에요. (이야기 못하도록 해주세요. 나가서 이야기하도록. 일종의 전쟁이에요.) 지금 목사님 나가셔서 조용히 해 달라 했는데, 목사님이 만약이 힘이 없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지요.
여호와의 이름은 언제 부르느냐 하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최대치의 힘조차 전혀 없을 때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힘을 빼는 여호와의 이름을 안 부르는 인간들을 부르게 하는 조치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을 궁지에 몰아넣지요. 그동안 그만큼 이스라엘이 누굴 가려왔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가려왔던 거예요.
여러분들이 달이 언제 밝고, 별이 어제 아름답고, 햇빛이 좋다는 점을 언제 알겠습니까? 평소에 ‘나는 햇빛 좋아’ 이럽니까? 평소에 ‘달이 좋아’ 그렇지 않지요. 하늘에서 단비 내릴 때 좋다고 언제 느낍니까? 평소에 비가 좋은 줄 모르잖아요. 언제 비 내리는 게 좋냐 하면 이 경우에요. 산불 났을 때. 헬리콥터 백 대 동원해도 소용없을 때 이건 인간에겐 절망적이죠. 산불 진화했는데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니까 비 한 번 싹 십 밀리미터 이상 와버리니까 그만 뉴스에 나오지도 않아. 조용해져 버렸어요. 비가 내리니까. 그만큼 인간은 혜택을 많이 입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심판기준이 나오는데 1장부터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준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사 멸망케 하신다는. 은혜는 받아놓고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서 오는지를. 윤석열이 대통령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압니까? 모르지요. 김건희 때문에 오는지 생각하지 모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애굽이기 때문에 언약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바로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심각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소위 성도라는 작자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조치를 해요. 여러분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구원받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게 돼 있어요. 로마서 10장도 마찬가지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를 리가 없어요. 자기가 자체적으로 끌어 모은 그 돈, 힘 그것으로 평안하게 잘만 살고 있는데 굳이 주의 이름을 부를 찬스, 기회가 안 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찾는다는 거예요. 여기는 칼과 병거와 말과 창 눈에 보이는 무기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기에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건 소용없어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언약이란 그 요소에 부합될 때만 이스라엘이 돼요. 언약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만 이스라엘이지 이스라엘을 그냥 살려달라는 것은 이방나라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언약이 와서 나의 모든 마음을 통치해주옵소서.’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힘으로 살려하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게 생뚱맞은 이야기고 ‘그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의 정리됐을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을 살리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원도 아니다. 뭐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언약대로 효과, 실효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쟁만 하나님께서 벌이십니다.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이스라엘도 잘리지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언약을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역대하 14장 봅시다.
십년 동안 평안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해야 될 텐데. 그 이유가 3절에 나와요.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왜 전쟁이 없었습니까? 6절에,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이렇게 돼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에 율법에 위반되는 십계명에 위반되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있는 곳에 두게 하지 말라 했거든요.
성경에서 십계명도 나와 있지만 ‘우상을 네가 사는 데 두지 말라’ 했을 때 그 말을 들을 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인들이 납득이 잘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섬기기 말라는 우상을 왜 자꾸 섬기는지 도저히 심보를 이해 못하겠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그렇고. 왜 하지 말라는, 하나님이 우상을 그렇게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가 우상 섬기는, 틈만 나면 우상 섬기고 시간만 나면 우상 섬기고 심심하면 우상 섬기고. 우상 못 섬겨서 환장할 일 있습니까? 왜 자꾸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섬기느냐 말이죠. 섬기는 이유에 대해서 도통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현대인도 그래요.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뭐냐? 로마서 1장에 그 낌새가 나와 있어요. 약간의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됐습니다. 왜 우상을 섬기느냐? 인간의 마음을 딱 제가 지적해드릴게요.
‘인간은 누가 자기를 지시하는 걸 싫어해요.’ 왜냐하면 마귀의 마음은,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신이 되기 때문에. 내가 신인데 나는 나 섬기기도 허겁지겁 바쁜데 내가 누구의 지시를 따르고 누구의 똘마니로 사는 게 행복해요?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내가 나한테 명령하고 내가 나한테 지시하는 게 행복해요. 자기가 절대자 되고 싶은 욕구를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교회 나와도 자기 본성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주 심한 말을 해요. 어떻게 개가 인간이 되겠느냐? 개는 개지 개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느냐? 다시 말해서 ‘너는 짐승이야. 짐승이 어떻게 인간 노릇한다고 인간 티낸다고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짐승보다 더 못해. 심지어 소보다 더 못해요. 소는 자기의 주인을 알건 만은 우리 이스라엘은 그 소보다 더 못해요.
자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런 소리를 하니까 선지자가 갈수록 더 미워지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본성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자꾸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생각을 하지 내가 하나님 앞에 개가 된다는 것을 나에 대한 인격모독으로 간주합니다. 욱하고 올라오지요.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주님께서 이거는 내 아들에게 줄 것이지 개 같은 이방사람한테 줄 생명의 떡이 아니다. 개나 소나 다 주냐, 이렇게 하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래도 주인 집 개 되면 되잖아요. 주인 집 아들, 그것까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내 주제를 아니까. 하지만 주인 집 개가 되면 좋은 점이 뭐냐? 주인 집 아들이 안 먹겠다고 갖다버린 그 떡이 떼구르르 굴러서 밥상에서 떨어질 때 그것 누구 차지? 개 차지. 오늘 제목을 ‘개 차지’라면 이상하다. 개가 차지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가 제공한 것을 회수하는 과정 속에서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그 여인이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 눈치 챈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것을 던져놓고 거기 걸려든 자만 잡아당겨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착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던져놓고 주의 이름에 걸려든 자만 천국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주의 이름을 부르질 않아요. 주님께 종속되는 것은 자기 것이 몽땅 전부 다 말살되고 부정된다는 걸 너무 잘 알거든요.
내가 부정된다면 내 것이 없어지잖아요. 내 것이 없다면 내 평생 동안 나는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내 것이 없는데요. 사람이 자영업자 밤새 열여섯 시간 일해도 그것 누가 시켜서 일합니까? 내 것이기 때문에 밤새도록 일해요. 퇴근했는데 전화 오면 또 배달해주고, 아침 다섯 시 되면 또 일어나요. 왜? 내 것이니까요. 내 것은 나한테 귀하니까요. 다른 귀한 것이 없어요. 나한테 나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이거는 교육 받은 게 아니고 한국 교육이 잘못된 게 아니고 타고난 거예요. 언약이란 것은 다 튕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왜 우상을 섬기는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에 동서남북 주변의 우상들이 빠끔히 전부 다 지켜보는 쪽으로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놨어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본성을 알거든요. 내가 은혜로 이 땅에 넣어줬지만 우상 섬기는 너를 지켜보는 세퍼트에다 모든 잡종 개들을 깔아놓고 그들을 의식하면서 그들처럼 살고자 하는 그 본성을 너희가 감추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사사기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걸 주께선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딱 두 자에요. ‘시험’ 테스트. ‘너 내 백성 맞아?’ 평생토록 테스트하는데 테스트하는 자리가 뭐냐? 언약이 전혀 없고 십자가를 모독하고 모조리 지옥 못 가서 환장한 100미터를 10초, 11초 달리면서 후다닥 지옥으로 달려가는데 온 정신을 다 팔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태어나게 해서 너희도 저들처럼 저런 사고방식으로 살거냐고 묻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이야기하시는데 영생으로 가는 길과 지옥으로 가는 길, 그 대목에서 주님께서 숫자로 알려줍니다. 이건 안 찾아봐도 알겠지만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그다음에 뭐예요? 많다.
많은 사람들이 다 진리인 줄 알고 따라가요. 이게 민주주의 원칙 아닙니까. 다수결이 힘이 발휘하는 제도, 다수가 진리에 가깝고, 소수는 비진리적이다. 그런 식으로 꾸준히 통계학적으로 교육 받고 양성되는 세상, 이 세상입니다. 찾는 자가 적기 때문에 백프로 그거는 비진리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교육받았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걸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아요. 인간의 본성은 같은 사람끼리 어울려 산다. 그래서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전쟁은 인간끼리 하는 게 아니다.’ 인간끼리 하는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의 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교회 새벽제단에 와서 울고불고 마룻바닥을 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 응답해주옵소서. 소원 들어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기도 들어보면 누구와의 싸움이에요? 남과 싸우는 거예요. ‘저 인간 이기게 하옵소서.’ 이런 거요. ‘미운 저 인간 나한테 굴복당하고 지게 하시고 저 인간이 나한테 사과하게 하옵소서. 형님 잘못했어요, 언니 잘못했어요, 사과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나는 엄매 기 살아, 일자 눈썹 하고. 저쪽은 엄매 기 죽어, 하는 이 보람, 이게 인간의 승리하는 쾌감 아니겠어요? 보람 아니겠습니까.
전쟁은 인간끼리 하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민족 싸워서는 안 된다. 분명히 하나님께선 이방민족과 전쟁을 붙여놓고 오늘 본문에 여기 아사 왕이 구스라는 현재 이집트의 남쪽이거든요. 남쪽나라와 싸워요. 그런데 그 쪽에서 군대가 백만 명 올라왔습니다. 백만 명이니까 숫자로 치면 그냥 100이죠. 근데 아사 군대도 만만치 않아요.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 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8절) 합해서 오십팔만. 그런데 구스는 얼마냐? 9절에,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쳐들어온 겁니다.
이거는 성경 봐도 어떻게 돼요? 이거는 사람 대 사람, 이스라엘민족과 이방민족의 싸움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 봐버리면 이 성경이 어떻게 응용되느냐 하면, 윤석열 탄핵받을 때 ‘하나님이여, 좌파 오면 우리나라 공산당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 잘 믿는 미국 성조기까지 흔들어가면서) 천만 성도가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하오니 주께서 이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하나의 복음의 국가로 지켜주셔서 악마의 공산당으로부터 지켜주옵소서’ 하는 거예요.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윤석열과 이재명의 싸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잖아요.
누구와의 싸움이냐? 정답 궁금해요? 나와 하나님과의 전쟁이에요. 이방민족이 무기로 갖고 온 것이 평소에 우리가 저런 무기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동질성을 주님께서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내 안에 잠복돼 있는 은근히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비-언약적인 요소를 주께서는 이방민족과 부딪치는 상황을 만들어서 우리 속을 들춰내는 겁니다.
‘하나님, 교회 오는 것도 좋지만 그저 누가 한 오십 억 유산 남겨주는 갑자기 부자 되게 하면 참 좋겠다’는. 그럼 주님께선 그 돈이 왜 필요한데? 돈 있으면 행복해요, 이러거든요. 돈이 왜 행복한데? 돈 있으면 이 울산바닥에서 나는 1%에 속해 승리자가 돼요. 전쟁에서, 전쟁이란 말을 칼싸움한다는 게 아니고 비교대조하는 거예요. 이거는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잡담하던 3층, 3층이 갑자기 졸지에 집안에 우환이 있고 아파서 중풍 걸려 망하고, 여기 2층에 있는 새순교회 교인들이 다 부자 되어 큰 예배당 짓고 이사 간다면, 그다음에 다시 이곳에 온다면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겠습니까, 안 느끼겠습니까? 강의할 때 잡담하다가 저주받지 싶더라, 이렇게 남보다 내가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큰 잘 사는 동네에서 중간 쯤 하는 것보다 못 사는 동네에서 1등할 때 무슨 제왕이나 황제나 된 것처럼 그런 느낌이 오잖아요.
제가 문제 내겠어요. <범죄도시>의 마동석의 소원은 ①대통령, ②국무총리, ③형사 몇 번입니까? 형사지요, 형사. 대통령 싫어요. ④대법원장, 법을 알아야 대법원장 하지요. 그냥 깡패 패는 이게 계속 자기 우월감을 유지시켜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 존재가 이 동네에서만은 절대적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그것이 사는 나의 삶의 동력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안 통한다 해도 에브리데이 매일 싸워요. 매일 대조하고 매일 비교하고 그게 나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는 거예요. 저 사람보단 못하지만 저 사람보단 낫다. 엄마는 맨날 자식에게 ‘오늘 수학 몇 점 맞았어?’ 이걸 왜 묻습니까? “엄마 백 점 맞았어.” “네가 최고다” 이렇게 되지요.
그 애가 커서 인간은 본성이 안 바뀌니까 어른이 된들 노인이 된들 사는 보람은 이미 딱 굳혀졌고 정해져 있어요. 나는 사람과 상대해서 내가 이긴 사람을 확인하는, 그러면 나는 족하다. 더 이상 소원 없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고 오늘날 우리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절망으로 몰아넣어요.
그래서 오늘 역대하 14장을 보면서 보는 사람마다 좀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이 아사 왕이 우상을 섬겼습니까, 아니면 철폐했습니까? 철폐했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았습니까, 아닙니까? 바르게 살았지요. 바르게 살았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아사 왕을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지 않아야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 있는 하나님이잖아요.
‘착하게 살았더니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환란도 주지 않았다.’ 뭐 이렇게 돼야 우리가 신앙생활 제 조건 구비됐다 할 수 있는데 분명히 우상 철폐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돌아온 대가는 뭡니까? 백만 대군이에요. 그것도 무기가 상상도 넘는 최첨단 무기, 게임이 안 돼요. 후티 반군 작살났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건 도대체 하나님 뜻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바르게 살았잖아요. 우상 철폐했잖아요. 됐잖아요. 더 이상 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왜 우리 가정을 힘들게 합니까? 주께선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사고방식 좀 봐. 하나님 뜻을 네가 알아, 몰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너를 지켜주고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이 잘 산다는 이유 때문에 잊어버리는 것이 말씀이 언약이고, 또는 못 살면 못 사는 데로 잊어버리는 것이 말씀과 언약이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언약은 인간은 관심 밖이에요. 인간은 지 몸뚱이만 편하면 오케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아사 왕으로 하여금 이런 교훈을 주는 거예요.
“네가 말씀대로 살았다?” “예. 살았습니다.” “좋아. 이제는 언약이 너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가르쳐줄게. 야. 백만 대군 빨리 여기 투입해.” 오십팔 만 대군이 아무 짝도 소용없도록 거의 곱빼기에 달하는 백만 대군. 거기에 무기도 옛날 재래식 무기가 아니고 아주 첨단 무기를 동원시켜서 구스나라가 하나님 믿는 유다나라와 전쟁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유다나라 아사 왕이라면 어떤 대책 회의를 해서 전쟁을 해야 되겠어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영업 한다고 은행에서 대출받았는데 예상대로 장사가 안 돼요. 안 되는데 매달 이자 갚을 날이 다가왔을 때 부부는 그 전날에 모여서 대책 회의합니다. 어떤 대책 회의입니까? 돈은 없지요. 은행이자 갚을 날이 내일인데 어떤 대책을 세우겠습니까?
일단 급전을 당긴다. 제3금융권을 두드린다. 아니면 어버이날 기념으로 십만 원 드리고 천만 원 당긴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이자 쳐주고 엄마 노후대책, 생활비 다 드릴 테니까 한 번만 당겨주세요” 한다. 어떤 대책으로 하겠습니까? 기다리세요.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할게요. 이러한 곤란한 지경은 주님이 벌이는 전쟁이다. 몇 번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아사는 ③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이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자영업 속에서 이게 얼마나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그걸 응용하고 구현될 수 있는가? 얼마나 우리가 성경과 동떨어지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돼요. 아사라는 이 왕이 제가 방금 ①번, ②번, ③번했잖아요. 그러니까 아사 왕이 ①번과 ②번을 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졌어요.
그런데 아사 왕이 ③번을 택했다는 이게 신기한 일이란 말이죠. 이게 희한한 일이에요. 지금 코앞에 백만 대군이 와 있는데 이 전쟁은 우리가 할 전쟁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본인에 속한 담당자가 하나님이라고 넘겨버리는 이러한 태도, 이게 어떻게 인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이겠습니까?
또 문제 나갑니다. 백만 대군이 왔을 아사 왕은, 이 전쟁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게 ①번. 이걸 믿고 우리가 하겠느냐? ②우리는 죄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우리의 죄는 깔끔하게 하나도 없이 다 사라졌다. ①번과 ②번 어느 것이 믿지 힘듭니까? 벌써 ①번도 믿기 힘들지요. 내일 대출이자 갚을 돈 한 푼 없는데.
제가 왜 묻느냐 하면 그래도 정답은 여러분 알고 있잖아요. ①번입니까, ②번입니까? 십자가 피, ②번이 정답일 줄 알지요. 그런데 ①번이 어느 정도로 인간으로선 힘이 쏙 빠지는 절망적인 상황인 것을 여러분들은 짐작하시겠지요. ②번이 정답인데 ②번은 그것보다 더 절망적이어야 돼요. 아사 왕은 백만 대군 와서 유다나라를 완전히 작살을 내잖아요. 그러면 유다나라 백성들이 다 죽겠지요.
그런데 유다나라 백성들이 죽는다고 해서 그들이 죄 사함 받습니까? 5초의 침묵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사업 망한다고 죄 용서받아요? 내가 장사 안 된다고 죄 용서받습니까? 자식이 내 말 듣는다고 또는 안 듣는다고 해서 죄 용서받습니까? 죄 용서는 결국 내가 회개한다, 반성한다 해서 용서받을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 죄 용서는 어디 속하는가? 죄 용서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죠. 그러면 여기서 내릴 결론은 놀라운 결론이 나와요. ‘전쟁은 나와 하나님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게 신약성경의 내용이에요. 아사 왕이 백만 대군을 이겼다고 해서 그걸로 용서받는 게 아니에요. 예레미야가 선지자 노릇을 했잖아요. 엘리야가 선지자 노릇했지요. 모세가 선지자 노릇했잖아요. 그래서 모세와 예레미야가 선지자 노릇했다고 구원받고 죄 용서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엘리야와 모세가 하나님께 기대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내 대신 죽어야 돼요. 그런데 이 땅에서 죽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성공이란 말입니까, 패배란 말입니까? 패배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패배함으로써 구원은 누구한테 주어졌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도대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려요. 옛날에 기도원에서 눈물 흘리면서 반성, 회개? 어림도 없지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상을 철폐하고 세상에 이런 왕이 다 있네. 이렇게 훌륭한 왕, 하지만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추가적 다음 조치는 백만 대군 침략이었잖아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됩니까? ‘우상 철폐해도 안 돼, 이래도 안 돼. 뭐 대책이 없네.’ 그거에요. 하나님을 제대로 하는 사람의 특징은, 내가 어떤 대책으로 내 인생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은 하나님께선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쁨으로 느낍니다. 대책 없어요.
그럼 대책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춘천에 무슨 국수가 있지요? 막국수 있지요. 막 사는 거예요. 감사함으로 막 사는 거예요. 자신의 망가짐을 쳐다보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망가지는 즐거움. 아무것도 내 행위를 내세우지, 뭐 있어야 내세우지, 없는 데요. 없다는 데서 오는 그 감격, 그건 성령이 주는 감격이에요.
첫째 시간 다시 정리한다면, 하나님은 인간하고 싸우지 마라. 왜? 전쟁할 권리가 자격이 우리 인간에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문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문제거든요. 이걸 좀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야곱에게 이름을 이스라엘로 줬지요.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그렇지.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이건 옛날에 야곱에게 있었던 일이거든요. 이젠 주님한테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이 야곱이 실현했던 것의 실체에요. 야곱은 그냥 폼만 잡았고 주님이 주님 앞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 그 명분을 걸고 기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기어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없는데 없는 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 인간의 손 타는 게 아니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 본인이 다 긁어서 주님 자신에게 가져가서 홀로 그걸 다 이뤄버립니다.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뭘 한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주의 이름 안에 역대하 14장, 15장, 16장, 그전의 모든 성경이 함축해서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육신이 있기 때문에 매일 하는 전쟁은 자기 육신 건사하는 전쟁, 그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세계는 너무나도 좁다. 인간 대신 나, 나의 세계는 너무나도 좁아요. 평생 살아봐야 내가 생각하는 내가 긁어모은 정보의 양, 그걸로 이해하는 이 세상, 너무너무 얇고 좁습니다.
이스라엘이 기껏 알아봐야 하나님께서 허락해준 정보의 양 밖에 몰라요. 이방나라는 물론 아무것도 몰라요. 자기 민족 하나 건사하는 것 거기에 필요한 지식, 지성적인 것, 정보 그런 것만 넥서스, 연관된 관련된 그런 상황만 챙기지 그게 어떻게 전부 다를 알 수 있어요?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평생 동안 자기 싸움만 하다가 결국은 진리도 모르고 아는 것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사실 어딜 가는 게 아니에요. 끌려가는 거지. 악마한테 끌려가죠.
자기가 어디로 끌려가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지가 아는 대로 옛날 놀던 대로 살던 대로 살다가 죽으면 뭐 되겠지, 하고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죽습니다, 인간은. 성경이 왜 있습니까? 전체를 알아요, 전체를. 네가 아는 것 말고 성경 봐라. 전체, 하나님이 알고 있는 그 전체가 성경 안에 다 들어있어요.
전쟁하는 권한은 우리 주님한테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없으니까 쓸데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지 마세요. 우리는 주님의 전쟁의 전리품이기 때문에 비교할 때 인간의 의와 주님의 의와 비교하세요. 네 의와 내 의를 비교하지 마시고. 이것도 일종의 전쟁이거든요. 너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 이렇게 비교하지 마시고 주님의 의와 비교해요. 그래서 우리는 성도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면서 사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50502b 울산강의-역대기하(12강) 14장 11절 : 전쟁의 상대자
(강의:이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세 가지 전쟁의 유형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전쟁에서 국가 대 국가의 전쟁. 두 번째는 나의 전쟁. 세 번째는 영적 전쟁, 신약에 나타나는 영적 전쟁. 세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은 간단히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집트가 있고 그 밑에 수단, 그 옆에 에티오피아. 여기 홍해가 있고 아라비아 반도가 있어요. 여기 후티 반군, 예멘. 에티오피아 바로 옆에 있어요.
에티오피아에서 댐을 건설했어요. 나일 강을 에티오피아를 거치는 노선이 있고 아프리카 안쪽에서 수단으로 오는 노선 둘이 합쳐서 이집트를 거쳐서 지중해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에티오피아에서 댐을 건설했다고요. 댐을 건설하고 수단과 의논해서 수력발전해서 나온 전기를 나눠줄 게, 이렇게 돼요. 그러면 에티오피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력수급 상승, 농업생산 상승이 돼요. 수단은 전력수급 상승, 농업생산 하락이 돼요. 이집트는 전력수급 하락, 농업생산 하락.
중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댐을 만들고 라오스에서 만들게 되면 태국이나 캄보디아, 저쪽에 말레이 반도 말레이시아에서는 큰 타격 입겠지요. 한국은 어떠냐? 한국은 이상하게 특징적인 것이 모든 강줄기가 한반도에 자체적으로 다 있어요. 소백산이고 태백산이고 물이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 막는 게 없어요. 근데 이 나라는 분명히 남의 나라인데 댐으로 수로를 막아버리면 물이 없어요. 인도에서 물 막아버리면 파키스탄에서 물 안 나가는 것처럼 그래 된다고.
그럼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은 ①영토 전쟁이겠지요. ②혈통, 씨. 물이 없으면 못 살잖아요. 육신 전쟁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네가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경우에만 젖과 꿀이 흐르고 너의 신은 여기서 말살되지 않을 것이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굴 버렸습니까? 여호와를 버렸잖아요. 버렸으니까 그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황폐한 땅이 돼버려요. 그건 하나님도 어디서 철수했다? 약속의 땅에서 철수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이름이 있는 천국이고, 약속의 땅이지 이 땅의 영토, 이 땅의 혈육, 아담의 혈육, 이 땅의 살기 좋은 그러한 땅의 토지 모조리 하나님의 창세기 3장 17절 약속대로 저주를 받습니다.
인간들이 여기 태어나서 살면서 기껏 알아봐야 어느 범주를 못 벗어나느냐 하면 영토 전쟁과 육신 전쟁, 나라가 잘 돼야 국민들도 같이 잘 되니까. 국민이 뭡니까? 그 영토 안에 살고 있는 신을 육신들, 혈통들, 육체들을 말하잖아요. 인간들이 공부하고 해봐야 아는 게 국가단위의 전쟁 범위 내에서 안다는 거예요.
‘우리 남편 이번에 월급 많이 탔다’ 이게 뭔 뜻입니까?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 남편이 종사하는 속해 있는 대한민국이 요즘 경제가 괜찮다는 이야기에요.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우리 남편이 월급 탄 거예요.
지금 중국에선 이민 갈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엄청나게 이민 간다는 거예요. 홍콩도 이민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빈 집이 많다는 거예요. 왜? 못 살겠다고. 이민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몰타로 간다는. 몰타는 팔만 원 내면 시민권 준다니까. 이태리 반도 앞에 섬나라. 시민권 돈 주면 되는 그런 나라 찾아간다고요. 중국에 돈 있는 사람은 전부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거기로 이민 가요. 미국은 FBI 때문에 못 들어가고. 그런 나라 간다 이 말이죠.
인간은 백날 설쳐봐야 국가라는 범위 내에서 탈출이 안 돼요. 우크라이나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요? 자기들도 다른 나라 청년들처럼 K-pop 듣고 청춘을 즐기고 싶어요. 나라 자체가 60세 밑에 전부 다 모병을 하니까 못 빠져나오고 군대 갈 수밖에 없지요. 나라가 그래요, 나라가. 인간이 백날 공부하고 뛰어봐야 나라의 범위 내에서 살아가요. 나라에 종속된다니까.
그러면 국가에 종속된 게 나의 전쟁이라면 나의 전쟁은 할 게 없지 않느냐? 인간이 그냥 먹을 것 있고, 입을 것 있다고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심리적으로 이미 태어날 때부터 상처를 입고 나와요. 아이는 쾌락적입니다. 쾌락이란 육신에서 올라오는 육체 내에 대한 어떤 여러 가지 쾌락이 있거든요. 먹고 싶은 것, 오줌 싸는 것, 이런 것 쾌락인데 이 쾌락을 아빠, 엄마가 거기서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 사는 게 아니고 가정이라는 둥지 안에서 살기 때문에 둥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질서가 깨지잖아요.
여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지시와 명령에 통해서 자기의 쾌락이 저지를 당해요. 저지를 당하면 ‘나는 이제 바른 인간이구나.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하지 않아요. 뭐냐 하면 상실감을 느껴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상실감을 갖게 돼요. 그 상실감은 허하잖아요.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결핍을 느끼면서 그 허한 대목을 점점 커나가면서 부모로부터 받던 것 말고 다른 데서 그 상실한 걸 마저 채우려고 하는데 그 모든 경향성이 몸의 쾌락과 관련돼 있어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그래서 그 쾌락과 관련되면서 끊임없이 상실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거리를 찾아요. 그걸 어디서 찾는가? 자기가 나가는 사회에서 그걸 찾아요. 그러니까 어릴 때 가정형편상 상실된 게 다 다르니까 각자 하고 싶은 게 다 다른 거예요. 다른 것을 찾고 있는데 우연히 같은 것을 찾는 사람 있으면서 둘이 만나서 결혼하게 되지요. ‘우리는 너무 잘 맞아’ 뭔 뜻입니까? ‘우리는 똑같은 것을 상실한 사람이야’ 그런 뜻이에요.
그냥 그들은 조건을 보지만 ‘난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이유가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과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어긋나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건 누구 전쟁입니까? 사회에서 나 하나 나에 대한 쾌락을 만족, 쾌락 만족이 행복이거든요. 행복을 얻기 위한 나의 전쟁을 사회에 나와서 평생토록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고, 그다음에 자식 키우고. 근데 자기 어릴 때 형제간에 너무 괴롭히더라. 그러면 자식을 안 낳지요.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 남편 붙들고 우리끼리 행복하게 여행갈 데 가고. 여행도 시시한 데 가는 게 아니라 아프리카 이런 데 없어요. 유럽여행 가서 마음대로 하자. 좋다, 오케이 했거든요. 문제는 그 남편/아내가 내 쾌락을 마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세월 가면서 한 2년, 3년 살면서 '이 남자/여자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전쟁이란 것은 원초적인 결핍성과 상실감으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나름대로의 전쟁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내가 속한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내 쾌락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난 뉴질랜드 자연과 함께 살래, 해서 이십 대에 언어연수 간다고 거기서 사는데 뉴질랜드 사람 등쳐먹겠습니까, 한국사람 등쳐먹겠습니까? 같은 한국사람 등쳐먹지요.
이유가 뭐냐? 이 욕망을 상실한 걸 채우기 위해서 그 매개가 뭐냐? 언어거든요. 언어가 통한다는 말은 정서가 통한다는 뜻이에요. 같은 언어, 같은 한국 사람을 등쳐먹고 사는 거죠. 외국에서 못 살겠어요, 하면 외국의 인종차별 때문에 못 살겠어요. 그거는 아주 시급한 문제가 아니고 외국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같은 한국 사람이 위허하지요.
세 번째 영적 전쟁이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전쟁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어요. 국가 대 국가의 전쟁, ‘누가 내 영토 빼앗기만 해봐’ 영토 문제와 그 속에 있는 국민들의 대대로 내려오는 습관, 정통, 관례, 문화, 관습, 종교 이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전쟁이죠. 그러나 이건 형식이고 내부는 무슨 전쟁입니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우리의 정신세계 자체가 결함이 있다는 것, 정신병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이 전쟁. 이 두 가지 국가 안에서 나의 전쟁하다가 우리는 그 긴긴 인생을 다 허비합니다. ‘자식이 내 말 듣지 않는다’ 뭔 뜻입니까? 자식은 내 욕망을 마저 채울 수 없는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세 번째 전쟁, 영적 전쟁을 합니다.
첫 번째 전쟁이 뭐예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었지요. 영토 싸움. 두 번째가 내 육신이죠. 육신을 능가하고 초월하고 영토를 초월한 다른 세계의 백성이 되기 위한 전쟁이 바로 신약에 등장합니다. 구약에서는 이게 안 돼요. 왜냐하면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땅이라는 영토가 있었잖아요. 그 영토 지키고, 그리고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었잖아요. 그 혈통과 영토가 자기 자신한테는 시험거리가 된 거죠. 이스라엘한테는. 지킬 수도 없는데 지켜보려고 악바리처럼 애쓰는 것, 오늘 본문의 아사 왕도 마찬가지에요.
사무엘상 17장 45절, 47절 두 절만 보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그 대목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지금 다윗이 거짓말하고 있지요. 어떤 거짓말입니까? 이렇게 해야 옳지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물맷돌 하나 돌리면서 네게 간다” 이게 정답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이게 실증적이죠.
자기 물맷돌 이야기를 왜 안 합니까? 여기서는. 사울한테는 이야기했죠. “어릴 때부터 물맷돌 하나로 사자들 때려죽였습니다.” 왜 블레셋 앞에서는 그런 소리 안 합니까? 그게 47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시 말해서 이 물맷돌 잘 던지는 나라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무기에 끼어들 군번은 아니라는.
이 말은 이번 전쟁은 붙여주는 전쟁이거든요. 잘 하면 전쟁에 승리한다가 아니라 이미 승리된 채로 다윗은 그 전쟁에 관여한 바가 돼요. 신약에서 성도란 것은 이렇게 하면 죄 용서받고,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이 된 채로 도대체 내가 왜 천국을 가야만 되는 거야, 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일평생을 보내게 하는 것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내가 뭐 가치 있다고 이 구원에, 천국 백성이 된 거야. 도대체 이유가 뭐야?’ 그걸 찾아보는 거예요. 나이가 죽을 때까지 운동하면서 또 손모가지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되면서 왜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왜 이렇게 구원된 거야, 라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그 모습을 보일 때 저와 여러분들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그 전쟁이 영적 전쟁이거든요. 그러면 그 영적 전쟁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스가랴 5장 후반부와 본격적인 6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1절) 그 두 산 사이라는 것은 나중에 주님께서 임하는 산이에요. “그 산은 놋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말이 몇 마리죠? 말이 네 마리죠. 이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이 세상을 네 사위, 각지어진 걸로 봐요. 모든 말들이 천사들로 하여금 빈틈없이 안 둘러본 곳이 없도록 그 사각형으로 돼 있는 이 세상에 전부 다 파견해서 심판해버립니다. 영적 전쟁의 방식이에요. 마치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할 때 천사가 안 다녀간 곳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빠짐없이 다 가요. 왜? 심판하기 위해서.
스가랴 5장에서는 왜 그렇게 하느냐? 바로 에바라는 부피를 재는데 거기 둥근 납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납이 들어간 그것을 멸망당할 이 세상 전부에 대한 대표 급으로 그 여인, 죄악 된 여인에 대한 심판이 감행됩니다. 그래선 여러분들이 확인하기 힘들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기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20절, 제가 읽어볼게요. 보기는 18절부터 봐야 되는데 19절부터 보면,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일천육백 스다디온이니까 4×4×100입니다. 맞지요. 한 스다디온이 185미터거든요. 1,600 곱하면 296킬로미터, 말굴레까지니까 말굴레는 1.2~1.5미터까지. 그러니까 세상 전체가 졸지에 뭐냐? 포도 밟아서 포도알갱이 개체가 개별자가 모두 깨지면서 모두 다 한 통속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밟아서 포도주 만드는 진노의 작업장으로 변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일이에요. 사각형. 그 사각형에 담긴 노래를 제가 가사로 교재로 적어왔습니다. 우선 한글 가사를 봅시다. , Tom Jones가 불렀던 노래.
기차에서 내려와서 보니 옛 고향집은 그대로 있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 나와 계시네
길 아래쪽에선 메리가 뛰어오고 있고(메리는 옛날 여자친구)
금발머리와 체리 빛 입술의 메리
고향의 모습이 이렇게 정겹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니 이렇게 좋은 걸
모두 날 맞으러 나와 줄 거야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면서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니 이렇게 좋은 걸
옛집은 아직 그대로 있고
비록 페인트칠은 갈라지고 색은 바랐지만
내가 올라가 놀던 오크나무(참나무)는 그대로 있고
오솔길 따라 사랑스런 메리와 같이 걸었다네
금발머리와 체리 빛 입술의 메리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니 이렇게 좋은 걸
실제로 이 사람이 가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거기 내레이션이 나오는데, Then I awake 그때 잠에서 깨어나, 꿈이에요, 꿈. 꿈인데 어떤 꿈이냐 하면,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회색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 여기 영어가사에 보면,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At four grey walls, 사각형으로 갇혀있는 교도소에 본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that surround me 나를 둘러싼
And I realize, yes, I was only dreaming 이제야 단지 꿈을 꾸었다는 걸 깨달았네
For there's a guard(간수) and there's a sad old padre 늙고 신부가 슬픈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새벽이 되면 팔짱을 끼고 걸어가겠지
Again I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나는 다시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게 되겠지
그러니까 사형당하기 직전에 사형수가 꿈속에서 고향의 푸른 잔디를 본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모두가 나를 보러 오겠지. 왜? 오래된 처마 밑에 나를 누이니까. 나를 고향의 푸른 잔디 아래 묻어주겠지. 한글로 해서 맛이 안 살잖아요. 저작권이고 모르겠어요. 영어가사를 보세요. 지금 꿈이에요, 꿈.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
As I step down from the train
And there to meet me is my Mama and Papa
Down the road I look and there runs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reaching, smiling sweetly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The old house is still standing tho' the paint is cracked and dry
And there's that old oak tree that I used to play on
Down the lane I walk with my sweet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At four grey walls that surround me
And I realize, yes, I was only dreaming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Again I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Yes, they'll all come to see me
In the shade of that old oak tree
As they lay me '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이 노래가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지금 교도소에 있어요. 이거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늙은 신부로 돼 있지만 복음을 아는 목사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슬픈 얼굴로 보고 있어요. 이번에 대선 나간다. 그러면 복음을 아는 사람은 뭡니까? 슬퍼요. 이재명 하고 김문수 하고 또. 이게 꿈이거든요. 이 세상 자체가. 옛날 살았던 꿈 범위 내에서 못 벗어나요.
옛날 어릴 때 놀던 그 미끄럼틀, 학교, 아빠, 엄마, 그리고 작은 기차역. 그건 내가 어릴 때 유치원부터 고향에서 자랐던 푸른 잔디까진 아니지만 대구 도시 같으면 골목에서 구슬 놀이했던 친구, 동창생들 전부 다 죽음 앞에서는 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이에요? 곱게 늙어 죽는 죽음이 아니에요. 교도소에 죄 때문에 저주받는 죽음이에요. 그 죽음 앞에 보면 옛날 지나간 것은 꿈입니다.
꿈이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라도 기껏 돌아가는 것이, ‘내가 죽고 흙이 되어서 묻어주겠지. 묻어주러 오겠지’ 아니에요. 묻어주러 오는 그 사람 같이 늙어 같이 묻혀요. 고향의 공동묘지에. 그럼 죽으면 어디 가느냐? 대책 없고 해결책 없어요. 뭐 사업 잘하고 체육회 임원 되고 다 좋은데 그거 꿈 아니에요? 다 허풍이잖아요. 주님은 영적 전쟁하신 분입니다.
아까 노래엔 탐 존스가 부르지 않아서 내레이션이 없는데 그래도 내레이션에 나오는 교도소의 죄수는 천만다행이에요. 꿈인 줄을 사형당하기 직전에 안 거예요. 마치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처럼. 철학박사도 아니에요, 물리학박사도 아니에요. 그냥 강도에요. 강도인데 뭘 알았어요?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 이유는? 죄 지어서? 아니에요. 이 교도소 출신이기 때문에. 사각형 된 교도소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고 여기서 직장생활하고 노후대책 세우고.
그런데 그것이 뭐냐? 사각형, 하나님의 저주의 사각형 안에 있는 진노의 대상 안에 있는 땅과 자기의 혈통, 육신과 내 족보와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것이 가상세계였다는 겁니다. 이게 거짓세계였다는 거예요. 사각형이라고 제가 표현했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당구대와 같아요. 백날 이민 가고 해봐야 쓰리쿠션 튕기고 이 사람 못 만나면 저 사람 만나고, 모든 것은 인간의 만남이 끝이고 그게 사회고, 만난 인간들이 만나면 인간 대 인간의 싸움, 그 피곤한 싸움 외에는 우리 한평생에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교사 됐으면 아침부터 출근해서 학생과 싸우지요. 같은 선생과 싸우고. 직장생활하면 상사와 싸우고 부하직원과 싸우고. 가정주부면 개와 싸우고 시가집과 싸우고 비교하고. 우리는 남과 싸울 전쟁할 자격과 권한이 일체 없습니다. 싸워서 얻어야 될 하등에 그러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역대하 1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래서 모임에 있어서 형편상 오지 못하는 그분들은 나름대로의 전쟁 중입니다. 전쟁하고 있지요. 내가 패배자 되지 않을 전쟁이죠. 역대하 14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아까 다윗이 했던 골리앗과의 전쟁을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뭐냐? 언약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이 친히 나서시는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여기에 보면 11절에,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여기서 아사 왕이 기도합니다. 강한 자와 그다음에 약한 자 할 때 아사 본인은 강한 자에 속했습니까, 약한 자에 속했습니까? 자기를 약한 자로 보지요. 약한 자는 자기가 이 세상에 살면서 경험한 것은 강한 자에게 반드시 지게 돼 있어요. 패배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아예 찾을 때부터 자기를 싸움 해보고 진다가 아니라 패배자로 규정한 다음에 여호와를 찾게 돼 있다 말이죠. 내가 뭔데, 내가 내세울 게 없는데 지금보다 더 패배할지라도 당연한 거지. 내가 뭐 내세울 게 있어야 승리하지. 승리할 것 없어, 라는 그런 자세,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자세할 때 우리는 그 몸짓과 태도와 마음자세, 그리고 기도 모든 것이 어딜 향합니까? 여호와를 향하게 돼 있어요.
여호와를 바라본다는 자체가 이제는 내 전쟁에서 떠나서 누구 전쟁으로 전환된다? 주님이 개입되는 주님의 전쟁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내가 약할 때 내세울 것 없고. 이걸 신약으로 말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뭐냐 하면 나에게는 일체 내세울 의가 없는 거예요. 의로움이 없어요. 없을 때만 누굴 찾아요? 주님을 찾는다고요. 잘 들으세요.
나에게는 나의 의가 붙어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에게 나만의 의로움과 선함이 절대로 붙어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인한 거예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내가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살고 내일 새벽 2시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거는 내 소관 아니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횡재인데 여기서 욕심을 내서 내일까지 더 살아야 됩니다. 몇 년 더 살아야 돼요. 우리 딸내미 시집가는 건 봐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이런 식으로.
그걸 왜 봐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산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너는 죽을 보람 외에는 찾지 마. 너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죽어도 할 말 없어. 주께서 너를 살리는 것은 너의 의 내세우라는 게 아니고 죽어야 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오게 되면 죽은 자가 그 의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꾸역꾸역 언제까지 살지 모르겠지만 계속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아사는 아예 자기를 약한 자로 규정을 해버립니다. 약한 자의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전쟁 아니고 이 전쟁을 주님 전쟁한다면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는 누구에요? 주님이죠. 이게 신약과 좀 다른데 구약은 영토 싸움이거든요. 지게 되면 약속의 땅이 적들에게 점령당해요. 그런데 신약에는 뭐가 있습니까? 우리 육신도 이미 한계 드러났고, 그다음에 우리의 영토도 죽는 마당에 영토가 왜 필요해요. 죽는 자에게 공동묘지가 굳이 있어야 돼요? 없지요.
그래서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아직도 한계성이 드러나죠. 구약적 한계성. “하나님이여 우리의 전쟁을 주의 이름으로 전환시키오니 주님이 계시는 이 나라가 주의 이름을 안 부르는 언약이 없는 나라한테 접수당하지 않도록 주께서 친히 좀 지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켜주옵소서”라고 했어요.
그러면 만약에 주님께서 ‘네가 알아서 해라. 왜 나를 붙들고 저희 전쟁에 끼어 넣느냐’ 이럴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아사 왕이 다음 답변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할 때 이 사람이란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부셔지는 존재에 대한 표현이에요. 사람이란 표시가.
있는 것 같은데 손 만지면 바짝 마른 진흙덩어리가 어떻습니까? 뭔가 형체 있는 것 같은데 만지면 어떻게 돼요? 와르르 다 부셔지지요. 그럴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이 사람이. 이 단어가 구약에 몇 군데 나와요. 인간이란 것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 이사야 2장 22절인가(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인간이 인간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호흡을 줬기 때문에 아직도 살고 있지 호흡을 멈춰버리면, 그러니까 산소호흡기 떼어버리면 그냥 흙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사 왕이 여러분 어느 정도까지 내려갔는지 알 수 있지요. 아사 왕이 인간이 어떻다, 인간이란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리가 잘된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인간도 아닌 게 이 땅에 살고 있는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백성 삼아주고 있다는 조건 하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살려주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은 우상을 왜 조상들은 섬기느냐?
열왕기상 15장 16절에 보면 아사 왕이 부순 우상이 누가 섬기던 우상이냐 하면 할머니가 섬겼던 우상이에요. 집안의 어른이 섬겼던 신을 손자가 와서 여지없이 다 부셔버린 거예요. 이거는 그 가문의 고귀한 전통과 그 문화를 손자가 아낌없이 박살낸 걸 의미하는 겁니다. 조상을 위한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나라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조상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도입했다. 왜 우상을 섬기느냐? 아사는 왜 우상을 부셨고 할머니는 왜 우상을 섬기느냐? 신이라는 것은 우리를 살릴 때 신다운 신이라고 할머니는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래요. 고귀한 나를 살려줘야 하나님이 하나님답다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우선이다? 내가 1순위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점을 생각하면서 한국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교회를 생각해보세요. 그 교회에서 외치고 있는 게 무슨 소리냐 이 말이죠. 제가 대신 이야기해줄까요? ‘우리는 승리해야 됩니다.’ 개척교회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이 제단과 이 전당, 이 성전을 기어이 우리 손으로 신축해야 됩니다. 거기서 목사 사택도 하나 더 짓고, 그거는 살짝 보너스로. 그렇게 되겠지요.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11장 봅시다. 이것 모르면 오늘 강의 헛방입니다. 7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여기서 전쟁 있지요. 누가 이기고 누가 집니까? 성도지요. 두 감람나무, 성도. 누가 이깁니까? 짐승이 이기지요. 이게 이 세상입니다. 우리 교회 승리하자. 기어이 살아남자. 수십 년, 수백 년 전통 이어가자. 이것 소용없어요. 성경에 의하면 악마가 이기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겼던 그들의 승리의 기념물이 뭐냐? 8절, 9절에 보면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은 승리한 거예요. 누가? 짐승이 승리하고 누가 졌습니까? 주를 믿는 자가 진 겁니다. 그래서 주를 믿는 자는 9절에 보면 시체가 되었어요. 시체를 사흘 반 동안에 그들이 축하한다는 의미로 없애지 않고 계속 그 시체를 사람들이 구경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어디 갔지요? 12절에,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이건 완전히 예수님께 일어난 십자가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과 하늘로 승천 이것을 주님에게 일어난 이 사건이 그다음에 성도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이 땅에 성도를 발생시킨다는 뜻이거든요.
요한계시록 12장 11절, 제가 읽겠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여기는 누가 이깁니까? 짐승이 이깁니까, 성도가 이깁니까? 여기는 성도가 이기지요. 이기는 방식을 보세요.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죽는 것이 이겼다가 돼요.
요한계시록 20장 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그다음에 뭡니까?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목 베인 영혼들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지상에는 죽었지요. 어디 살아 있어요? 바로 주와 더불어 천년이란 시간이 초월하는 시간이 적용되는 그 나라에서 그들은 엄연히 살아 있어요. 사는 방법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어요. 왜? 예수님이 그랬으니까.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나라로 갈 수 없어요. 이 땅은 어차피 이렇게 되면 참 우리한테는 너무 위협적이라 하는데 제가 아까 스다디온 이야기했지요. 일천육백 스다디온. 이 땅은 어차피 교도소에요. 태어나면서 이미 죄수로 태어나서 평생토록 그 교도소 안에서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고 요양병원 다니면서 그 교도소 내에서 서유럽 배낭여행 가는 거예요. 이민 가고.
사각형이에요. 아까 봤지요. 실상은 뭐냐 하면 At four grey walls 네 개의 회색 담이에요. 네 개의 회색 담으로 갇힌 상태에 있어요. 그래서 동거해서 돈 벌고 직장생활하고 애 시집장가 보내고 그랬어요.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가 세상에서 꿈꾸던 것은 다 그냥 dream이죠. 오늘 되지도 않는 영어 자꾸 나오네.
And I realize, yes, I was only dreaming 내가 다 꿈에 불과한 걸. 내가 평생을 꿈속에서 살은 걸. 주님이 떠난 세계는 꿈이에요. 허상이고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빛으로 와서 어둠에게 이 성경책, 이 말씀을 복음을 전한 거예요. 빛의 복음을. 그러나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주님은 기쁜데 그들은 울고 있고, 주님은 슬픈데 그들은 웃고 있어요. 지금 소통이 안 돼요.
따라서 제가 마지막 내릴 결론은 소통은 되질 않는데 이게 웬 기적입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것, 이 성경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서 우리를 덮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이미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주 예수님만 증거하게 한다는 이 기적은 이 힘은 바로 영적 전쟁에서 주님께서 친히 겹겹이 쌓여있는 악마의 그 테스트를 뚫고 들어오시고 뚫고 우리를 주님 나라로 끌고 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시편 23편을 생각해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양이 알아서 길을 찾는 게 아니에요. 목자 없는 양은 없습니다. 길은 목자가 알아요. 목자가 좁은 길을 갔어요.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좁은 길 갈 사람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그 소리 듣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이에요. 똑같아요. 그때마다 성령으로 우리의 소원들 목표를 다 꺾어서 기어이 순간순간 우리로 하여금 ‘네가 자꾸 꿈꿀래. 정신 차려 인간아.’ 네 고향은 우리 주님이 가신 그쪽이 우리의 본적이고 그쪽 출신이란 사실, 우린 이 땅에서 이방인이고 나그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시고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절망적이고 어려울 때마다 해결해 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를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니 십자가를 알려주시고 이미 해결 난 채로 우리가 어디서 문제가 있고 어디서 잘못되었고 왜 죄인인 것을 날마다 깨달아지는 감사가 더욱더 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