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건축물
2025년 4월 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9:15-22
(9:15)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9:16) 전에 애굽 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
(9:17) 솔로몬이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9:18) 또 바알랏과 그 땅의 들에 있는 다드몰과
(9:19)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
(9:20)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있는 자
(9:21)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9:22)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아니하였으니 저희는 군사와 그 신복과 방백과 대장이며 병거와 마병의 장관이 됨이었더라
솔로몬이 여러 군데에 건축을 합니다. 이는 그만큼 이스라엘이 평화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주변 이방민족들과 수시로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이방민족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이는 이방민족이 믿는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자기 백성이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라 전체가 평화가 찾아오고 평정이 되니 그 안정감을 누리는 자신들이 대단히 신앙이 좋은 줄로 여겼습니다. 즉 마땅히 이 평화를 자신이 누릴 자격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이 금방 들통난 겁니다.
요한계시록 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과연 받기는 받았느냐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사랑은 서로 호감이 가고 만나면 반갑고 즐거워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사랑의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서 하나님을 보이지 안찮아요? 어떻게 사랑을 받고 어떻게 그 사랑을 상실하는지가 모호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점은 구약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기가 풍요하고 넉넉하면 절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의 기운이 솟아오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기쪽에 문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사회 전체가 안정적이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점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솔로몬이 지은 건축물입니다. 대표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비롯해서 그 성전을 보호하기 위한 국방 요충지에 솔로몬을 건물들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곳곳에서 내분과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지었던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솔로몬 시절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은 전부 황무지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솔로몬이 지었던 건축물들은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를 측정하는 계측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국가들도 거대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음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전을 건립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신을 믿는 마음으로 결속을 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내란이나 분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의 마음들이 권력에 대한 신뢰도가 약화됩니다.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옆 나라로부터 정복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모아져야 나라가 오래 가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왕은 대단한 건축물을 건립하여 왕 자신이 신의 은혜을 입고 이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한 인물임이 부각됩니다. 이 권력집중을 오래 끌기 위해 왕들은 신화를 덧입혀진 신전이나 관심사를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기념적인 건물을 짓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건물을 짓게 하셨지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친히 궁극적인 건물, 혹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일관되게 일하시고 있음을 나타내보이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관여해서 짓지 아니하면 건축물을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지을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왜 인간들은 온전하고 바르지 못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최종적으로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종 마련해주신 평화는 최종 영광스러운 성전의 건립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이끄는 전쟁들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깃도‘라는 지명은 요한계시록 16:16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실제로 므깃도는 애굽에서 북쪽 지역까지 이어지는 최단거리 길이요 또한 동쪽 아람나라로 가는 길의 갈림길 역할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방왕과 북방왕이 서로 이스라엘을 삼키기 위해 군대가 집결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에 인류 최후의 전쟁을 구약적 지명을 통원해서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곧 전체 인류와 하나님과의 전쟁을 보여줍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대드는 이유는 구원이나 천국이나 영생을 인간이 원하는 대로 얻을 수없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한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한 최종 성전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그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는 건축물입니다.
이사야 54:11-13에 보면, “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좋은 천국이 누구라도 원하는 자는 들어가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요한계시록 3:7에 보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즉 천국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다시는 지옥으로 갈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입니다. 조건은 이것입니다. ’자기 이름‘이 지워져야 합니다. 인간세계에서 ’맞다‘ 혹은 ’틀리다‘를 논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기준으로 ’맞다‘와 ’틀리다‘를 결정합니다.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맞고’, 나를 그대로 살려내는 일이라고 무엇이 되었든 ‘틀린 일’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는 순전히 일방적인 주님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천사들에 의해서 측량된 천국이라는 건축물은 철저하게 사람 수로 채워지고 건설되는 공간입니다.
“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계 21:14-17)
오늘날 성도들이 곧 이 세상에 계시를 알리는 ‘언약의 건축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열심히 지은 인생이지 말고 언약으로 지은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열왕기상 9장 15-22절(언약의 건축물) 25040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9장 15-22절입니다.
열왕기상 9:15-22
“솔로몬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전에 애굽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 솔로몬이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또 바알랏과 그 땅의 들에 있는 다드몰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 있는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아니하였으니 저희는 군사와 그 신복과 방백과 대장이며 병거와 마병의 장관이 됨이었더라.”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건축하는 이야기입니다. 건축하는 이 이야기가 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에 나와 있는가? 솔로몬이 군사 행동하는 그것보다 건축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는 말은, 즉 어떤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그 모든 것이 평정, 완료되고 마무리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쟁은 평화가 아니지요. 그런데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되면 그 땅에 샬롬, 평화가 주어집니다. 그 평화를 기념하는 뜻에서 건축을 했습니다. 그러면 다윗 입장에서 전쟁을 일으키시고, 전쟁을 추진하시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으신 분,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솔로몬이 건축할 때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전쟁을 마무리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던져주고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그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여기 계시고, 꾸준히 일하시고 활동하신다.”라는 겁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모든 건축행위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살아계심, 언약을 실현하시는 분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시자의 역할, 증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평화가 왔다는 그것을 왜 꼭 건축물로 표현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건축이라 하는 것은 사람보다 오래 존재해요. 사람은 육체가 연약해서 오래 살아도 한 백 살쯤 살다 죽지만 건축물은 좀 더 오래 가잖아요. 내가 죽더라도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건축물이 ‘그동안 하나님이 이 약속의 땅에서 이러한 일을 하셨다. 그리고 그 증인으로 솔로몬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 때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료하셨다.’라는 것을 대대로 계속 전수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보다 오래 견디는 건축구조물, 벽돌 구조물을 건설한 겁니다.
이 말이 맞다면, ‘솔로몬 이후에 그 건축물이 완전히 박살 났다. 적들에게 깨져서 와르르 다 무너졌다.’ 할 때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솔로몬 때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하게 잘 이행했는데 솔로몬 이후에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너희가 나를 버렸다’라는 것에 대해서 솔로몬이 지은 건축물이 지침서, 지침이 되는 거예요. 건축물이 하나의 측정이 되고 증거가 됩니다.
처음 지을 때 그렇게 좋았던 건물이, 이제는 적들이 들이닥쳐서 귀한 보물 다 빼앗아 가고 불에 타버릴 때 그냥 ‘건물 하나 없어진다’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원했던 평화가 아니고 전쟁이 일어났는데 져버렸다? 그때는 이겼고 지금은 졌잖아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비정상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에 에베소교회 보고 이야기하기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다른 성경 말씀도 다 어렵고 그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이 성경 말씀도 못지않게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려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것을 쉬지 않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의미가 유지되는 말씀이에요. 보통 사랑이라 하는 것은 보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은 누가 하시는가?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이는 인간보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희가 나의 첫사랑을 버렸구나.” 그러면 사람은 ‘뭐야 이게? 우리 인간들밖에 없는데 우리 말고 여기 또 누가 계신가? 우리는 인간들 하고나 사랑하면 그것으로 끝나잖아. 인간들끼리 좋아하면 좋은 세상이잖아. 그런데 우리 말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분이 또 있다는 그 말이지? 어디 있는데? 안 보이는데? 없는 것 아니야?’
이러한 반응을 나타낸다면 이미 그 사람은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사랑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현실감 있게 살아 있는 것,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분이 나 말고 주님이라는 것, 그렇게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걸 믿지 않는다면 성경 말씀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요.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9장에 나오지요. 거기 사도바울이 나오는데 그때는 사도가 아니고 그냥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지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기세등등해서 예수 믿는 사람 체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 줄 알고 가는데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사울에게 나타났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9장 7절에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같이 가던 사람들, 사울의 일행들 말입니다. 사울은 지금 주님과 주고받고 대화가 돼요.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이까”(행 9:5). 같이 가던 일행은 그런 말을 던지지 않아요.
우르릉, 그런 천둥소리야 흔하게 들리잖아요. ‘뭐야? 천둥소리?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자연에서 천둥 치는 소리는 예사지 뭐.’ 그런데 의미 있게, 유(有)의미지요, 의미 있게 대화를 한 사람은 일행 중에서 오직 사울 한 사람밖에 없어요.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
이런 대화가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한 정도가 아니고 이건 미쳤다, 그냥 미친 거지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사울이 편지를 남겼다면 사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동일한 마음 자세가 되지 아니하면 사울의 편지를 봐도 그냥 인간 소리, 개소리, 말소리나 짐승 소리, 그냥 물리학에서나 말하는 음파, 소리의 진동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 의미가 담기지를 못합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으로서 제일 답답한 게 뭐냐 하면, 대화가 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를 않고 있다는 그 점이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것은 누가 이야기했는가? 이것은 모세가 이야기한 거예요.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지요.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거쳐서 자기에게 인간의 말로, 모세의 말로 들리는 거예요. 그래 놓고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그 말은 모세의 말이 아니고 내 말이니 네가 믿어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 그러니까 구약 사람들이 무엇을 학수고대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채로 말씀하지 마시고, 딱 깨놓고 싸나이답게 온몸을 보이시면서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나온 거예요.
주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왔어요. 왔는데 인간들 쪽에서…, 제 손가락을 보세요(같잖다는 투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든다). 이거에요. 우리가 믿는 여호와가 아니라는 거예요. 손가락을 흔들면서. 그 당시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었지만. ‘음? 아니야, 아니야. 당신은 메시아 아니야.’ 십자가에 주님 달릴 때 사람들이 그랬어요. 조롱하면서 ‘아니야, 아니야. 왜? 내가 납득이 안 돼. 내가 납득이 안 되면 그건 아니야.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이자.’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지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말씀해도 못 알아듣는 이유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인간 자신에게. 오늘 본문이 구약이니까…, 아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야기했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서 건축구조물을 통해서 계시를 줬습니다.
평화로우니까, 전쟁이 없고 큰 건물들이 지어졌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솔로몬을 통해서 그 내력을 듣고자 했지요. 솔로몬은 거침없이 이야기했어요. “이 모든 건축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시의 건물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솔로몬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겁니다. 솔로몬의 궁전도 역시 예루살렘에 있어요.
밀로는 예루살렘에서 약간 동쪽, 예루살렘에 붙어 있는 동쪽의 언덕이 밀로예요. 예루살렘성은 이야기했어요. 하솔은, 헐몬산, 약 2800미터나 되는 높은 산인데 정상 쪽은 시리아에 있고요, 그 헐몬산에서 갈릴리 호수로 내려오는 그 중간지점에 있어요. 레바논의 테러집단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이스라엘에 접수한 그 동네입니다.
그다음에 므깃도, 므깃도는 갈멜산 근처에 있어요. 이 므깃도는 요즘 말로 하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애굽에서 올라와서 현재 이라크나 이란쪽으로 가는 길목이고요, 또 동쪽으로는 시리아로 빠지는 길목이 므깃도에요. 레바논, 시리아, 터키로 가는 길로도 갈라지는 그 갈림길이 므깃도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는 이 므깃도가 ‘아마겟돈’이라고 나오는데 그 아마겟돈은 예루살렘을 중앙에 두고요, 남쪽의 세력과 북쪽의 세력이 예루살렘을 먹기 위해서 최후의 전쟁을 벌이는 곳이에요. 예루살렘에는 언약궤가 있는 곳이지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
요한계시록에서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메시아 되어서 하늘나라로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인데 그곳을 지켜주는, 북방과 남방으로부터 지켜주는 요충지가 므깃도입니다. 다른 길은 험해서 원활하지 않아요. 큰 도로가 거기니까 그 도로를 통해서 예루살렘을 먹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남방왕과 북방왕의 이야기는 다니엘에 상세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단 11장). 그 므깃도에 대해서 사사기 5장 19절에도 나옵니다.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돈’이라는 지역을 노리고 가나안 토속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고 되어 있어요. 이것도 계시인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계시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짊어지고 운반하고 있는 운반체를 건드리면 모조리 계시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건드리면 스파크가 일어나서 그게 계시가 됩니다.
예수님 건드리면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그게 새언약이 돼요, 신약이 됩니다. 이스라엘 건드리면 구약이 되고요. 오늘날 성도 건드리면 그리스도의 몸을 건드린 것이 되어서 요한계시록의 계시대로 현재 진행 중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어떤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은, 우리가 보기에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 나라의 전쟁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를 이방 민족이, 하나님은 안 보이니까, 여호와는 안 보이니까 ‘뭐 저것도 우리같이 만만한 일반적인 민족이겠지.’ 하고 건드리니 그게 계시가 되어서 마지막 최후의 인류가 멸망하는 이유들을 쏙쏙 보여주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 므깃도,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또 하나 더 있어요. ‘게셀’. 이 게셀은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쪽으로 한 30킬로 뚝 떨어진, 예루살렘과 지중해 중간에 있는 마을인데 이 게셀 쪽에 솔로몬이 건축을 크게 했어요.
이게 예루살렘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다 방위 체제를 갖추는 겁니다. 그리고 이 게셀이라고 하는 곳은 전에 여호수아 때 정복하려다 실패한 곳이에요(수 16:10). 다윗 때 와서야 정복이 되었어요(삼하 5:25). 그리고 솔로몬 때에 선대들이 다 정복 못 한 곳을 정복해 노예로 삼았다(왕상 9:21)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 나라는 어떻게 건축하는가?’ 그걸 잠시 설명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오늘 내용의 윤곽을 잡으실 거예요. 이스라엘 말고 세상 나라가 건물을 짓는 것은 국가 건립의 신화를 조성하는 겁니다.
건물을 크게 지음으로써 신화를 만들어요. 특히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집트가 그렇잖아요. 이집트에 구왕국과 신왕국이 있는데 신왕국 때 여러 잡족들을 통합한 왕이 람세스 2세에요. 그때가 모세하고 겹치는 시기입니다. 그 시기에 피라미드 세웠죠.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건물을 지었잖아요.
그동안 전쟁으로 이집트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나고 종족 별로 서로 잘났느니 못났느니 막 싸운 거예요. 이번 대선에 김문수 나오죠, 이재명 나오죠, 홍준표 나오죠, 김동연도 나오죠. 전부다 대통령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 옛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자기 패거리 데리고 전부 나온다 이 말이죠.
그걸 통합해 놓고 이제는 그런 것들과 완전히 초월적인, 신화니까, 감히 인간 같은 것들과 비교도 안 되는 초월적인 신으로 등극해야 그다음에 백성들이 신처럼 우러러보면서 다시는 혼란기에 접어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건축을 한 거예요. 내가 설립한 국가를 오래오래 번창하고 지속하기 위해 건축을 한 겁니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보기 전에 그리스 같은 경우에 도시 국가인데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 신을 동원시켜요. 신을 동원시켜서 ‘우리나라가 신에 의해서 이뤄진다.’ 그게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그래서 신전을 지을 때는 높은 곳에 지어요. 우러러보라고 높은 곳에 짓습니다. 내려다보는 것은 지배자요, 쳐다보는 것은 하수잖아요. 파르테논 신전에 신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여러 신들의 보호 아래 아테네 도시 국가는 번창하고 싶다.’ 이게 바로 그리스가 신전을 지은 이유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잘 들어보세요. 기원전 69년경에 박혁거세가 태어납니다. 나정 마을이라고 삼국유사에 보면 나와요. 박혁거세가 신라의 초대 왕(기원전 57년)이잖아요. 그 왕이 생기기 전에 토지가 없었느냐? 왜 없어요. 토지 있죠. 백성이 없었느냐? 있죠.
박혁거세가 말에서 태어났어요. 말이 우는 곳에 가보니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나온 것이 박혁거세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신화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양산재(경주 탑동)라는 곳에 건물을 짓는데 여섯 개의 촌락, 6개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박혁거세를 최초의 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서 건물을 짓는 겁니다.
그 6촌(村) 가운데 하나가 이씨가 있어요. 알천 양산 촌장이 이씨인데 누구의 시조냐 하면 경주 이씨의 시조입니다. 그리고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모시는 사당도 지어요. 경주의 선도산에 성모사를 지어서 박혁거세를 신화화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6개의 촌장들로 구성되어 있던 것이 하나로 통합이 되죠. 그럴 때 뭘 한다? 박혁거세 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그 정신이 살아있으려면 건축물, 건물을 짓는 거예요.
로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시대는 조금 달라요. 그리스처럼 신전을 높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하도 크다 보니까 공동체, 백성들의 단합을 강조하다 보니 판테온(만신전)이라는 신전은 낮은 자리에 있고 높은 언덕에는 황제가 거기 자기 궁전을 지어놨어요. 그러니까 신보다 황제가 더 높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리스 시칠리아섬에 타오르미나라는 원형 극장이 있는데 로마가 건축한 겁니다. 시칠리아 제일 높은 곳에 지어서 백성들이 서로 단합할 수 있는, 그렇게 해서 신보다는 인간중심으로 단합해서 국가가 건립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 어떻습니까?
건축물이라는 것은 결국 현재의 단결과 단합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약간 더 설명한다면 군수나 도지사나 마을의 지방 의회에서 예산 따내서 어떤 상징물을 세우죠. 어느 지방의 군수가 황금으로 박쥐를 기념품으로 만들었는데 금값이 올라서 요새 대박이 났다는 뉴스 있잖아요. 꼭 그런 것을 해서 자기가 물러나도 기리기 위해 그렇게 하죠.
지금의 건축물은 인프라구축입니다. 공공건물이나 간접 시설물을 지음으로써 물류나 모든 시설이 편리하게, 그리고 나라의 재산을 불리기 위함입니다. 이건 다 세상 이야기고 성경에서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느냐?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중지되지 않고 지금 연속적으로 계속 이스라엘에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54장 11-12절에 보면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또 건물을 지어요. 예루살렘의 성전과 솔로몬 궁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건물을 짓는데 이 건물은 다윗이 짓는 게 아니고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짓는 건물이에요. 하나님은 건물 짓는 분입니다. 왜?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내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뭐로 보여주는가? 건물로 보여줘요.
그러면 솔로몬이 전에 지은 예루살렘의 건물은 어떻게 되는가? 이사야 25장 2절에 보면 “주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며 견고한 성읍으로 황무케 하시며” 다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어요. 솔로몬이 성전과 여러 가지 평화를 상징하는 건물을 지었지만 결국 몇백 년 뒤에 다 황무지가 되는 이유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기 언약을 사랑해요. 사람을 위해서 언약을 준 게 아니고 언약을 지키라고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언약을 지키기 위한 말씀.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오해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이 약속의 땅에 평화를 주고 잘 먹고 잘살도록 삶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적들을 물리치게 해주신 것은 다 우리 살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것은 아까 제가 구구절절 말씀드렸던, 이방 나라들의 단합 정신 같은 거예요. 그들이 애굽 신을 믿고, 그리스 신을 믿고, 로마 신을 믿고, 한국의 박혁거세 신을 믿되 그 신은 인민을 위하여, 인간을 위해서 있는 신이라는 거죠.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있는 건데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버릴 때는 가차 없이 황무지를 만들면서 그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내가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건축물을 새로 지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건축물의 기초석은 뭐가 됩니까? 그 기초석은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건축자의 버린 돌이 기초석이 됩니다. 그 점에 대해 마태복음 7장 24-27절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니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바람 보내고 창수 보내서 모든 집을 다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의 기초 위에 지은 집만 남기겠다는 약속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 주께서 이루신다는 언약이죠, 그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거기다가 나중에 의성 산불까지 나버리면 그 집이 날아가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집을 짓는다는 것은 거주자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예요. 내가 내 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고생 고생한 나의 과거를 그 집 안에 다 담아두는 거예요. 치매 걸린 할머니들이 자기 집에 있는 물건을 못 버리게 발악하는 이유가, 그게 다 자기가 끌어모아 놓았다는 거예요. “그걸 왜 버려. 차라리 날 버려라.” 이렇게 되죠.
인간의 몸 자체가, 내가 만든 건축물이 현재 자아상입니다. 이거 무시무시한 이야기예요. 완전히 이방 나라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나옵니다. 주님의 건축된 그 건물의 특징이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있습니다. 그걸 제가 읽어보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
성경에서 무서운 구절을 뽑아보라고 하면 아마 이 구절이 리스트에 포함돼야 할 겁니다. ‘닫으면 열 자 없고 열면 닫을 자 없다.’ 아까 누가 나한테 질문을 했어요. “천국에 가면 다시 지옥 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의 답이 뭐냐? “들어갔다, 하면 못 빠져나오고 들어가고자 하면 안 넣어줘요.”
일단 천국 가면 못 빠져나오고, 천국 가려고 하면 못 들어가요.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들어가면 못 나온다. 그건 별로 안 무섭죠? 문제는 천국 들어가고자 하면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못 들어가는데?” 인간은 자체가 틀려먹었기 때문에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 어떻게 측정이 가능합니까?” 물으신다면…, 요새 하도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말들이 많으니까 그 기준을 종잡을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 기준을 세우면 됩니까?” 내가 없어지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맞고요, 내가 살아있으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무조건 틀린 일이에요.
천국에 가는 사람은 내 이름이 삭제됐다는 조건하에 들어가는 거예요. 내 이름이 삭제될 때 내가 기초석이 되지 못하는, 주님이 기초석이 되는 집에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기초한, 내가 열성으로 노력했던 전체 인생을 걸고는 못 들어갑니다. 따라서 그 천국에는 내 모든 인생을 버려야 되는 사람들, 버리는 것을 원했던 사람이 들어가죠.
간단하게 취합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천국 백성은…, 잘 들으세요.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느냐? 내 목숨을 아낌없이 던질 자리를 찾았던 사람…, 내 목숨 안에 자존심, 체면 다 들어있죠, 내 의미나 가치가 다 들어있죠, 나의 의도 그렇고요. 내 목숨을 아낌없이 던져버려도 상관없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 그 사람만 천국 갑니다.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처럼.
여러분 구원 받은 강도가 십자가 밑에서 “나 참 강도짓 잘했어.” 뭐 이런 것을 주장하겠습니까? 못 하죠. 내가 강도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이, 내가 강도질하게 해서 나를 버렸다는 거예요. 내 인생을 버리고 주님의 인생에 합류시켰다는 그 점이에요. 그 점이 바로 옛날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갑니다, 보석처럼.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1절부터 쭉 보면 길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렇게 시작해서 거기 기초석이 있고 하여튼 전체가 다 보석이에요.
천사가 와서 측정해요. 15절에,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절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장광이 같다, 네모반듯하다는 것은 주께서 천국에 넣을 자만 들어온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약 2천 킬로미터가 넘는다고 되어 있고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천사가 측정한, 측량한 대로 측량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주께서 집어넣으면 나갈 사람 없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못 들어가고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기초석, 버림받은 돌, 성전의 새 머릿돌, 그 머릿돌에서 발광되는, 발산되는 에너지가 우리 자신을 천국으로 넣습니다.
이 말을 이렇게 요약하면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라고 살려놓았더니만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 사네?” 이게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겠죠. 주님을 위해서, 언약을 위해서 살려놓았기에 그때부터 그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간에 주님을 위해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라는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운반되는 겁니다. 마치 므깃도 건물처럼, 솔로몬이 지었던 건축물은 ‘이렇게 하나님이 다윗 언약대로 이룬 게 맞잖아.’라고 기념하는, ‘주님께서 여기 계시고 이렇게 일하셨다’라고 기념하는 기념물로서 건축물이 있는 것처럼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친히 천국에 넣어준 움직이는 기념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를 위해서 살라고 살려놨는데 첫사랑을 잊어버렸는지 자기 위신, 체면 챙기는 이게 웬 말입니까?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엇길로 갈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으로서 우리 신분이 이미 천국에 들어온 신분인 것을, 주를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