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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의 완성

아빠와 함께 2025. 2. 14. 10:36

유월절의 완성

2012년 5월 2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2:1-6

(눅 22:1, 개역)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눅 22:2,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눅 22:3, 개역)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눅 22:4, 개역)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눅 22:5, 개역)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2:6, 개역)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누가 누구를 팔아넘긴다는 것은 부녀자나 정신박양자나 어린아이를 유괴했을 때나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적들에게 팔아넘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상품이나 사물이나 물체가 아닌 이상 납득되기를 난처한 일입니다. 그동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주장에 이의를 많이 걸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엉터리 해석을 내놓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비판과 비난이 예수님의 운명에 결정적인 것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의 발언에 대해서 신학적이고 종교적이고 영적으로 예리하고 비평해도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일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경찰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발언들은 신학적인 정신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이전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개입’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사단, 곧 악마가 최종 인간들을 장악하기 위한 현실상은 영적이나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만 예수님에게 정치적 현실의 호된 맛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 공모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의 현실관은 사단이 주도적으로 만들어준 현실관입니다. 즉 가룟 유다의 현실관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비-현실적인 존재라고 낙인 찍힐 각오를 해야합니다.

가룟 유다가 보기에 예수님은 초반 활동과는 달리 후반부에 갈수록 추상화되어가고 관념화되어가는 듯이 보인 겁니다. 초반에는 많은 기적을 일으켜서 대중들이나 제자들 사이에는 큰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할수록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는 발언들을 쏟아놓았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현실관을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발언을 들여놓어야만 될 납득할 만한 이유와 접촉점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기적들을 날이 갈수록 보다 많이 만들어 보여주어야 더 많은 군중이 예수님 편에 가담될텐데 오히려 기적을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신비에 쌓인 ‘요나의 기적’, 곧 ‘죽음의 기적’을 언급하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비롯해서 제자들은 당황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한 그 무엇이 보장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의도적으로 기피하시면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현실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를 못한 겁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현실관 말고 다른 현실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결국에는 가룟 유다가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관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돈과 권력으로만 최종 정리가 되는 현실관입니다. 가룟 유다는 갈수록, 예수님이 어리석은 민중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시편 99:1과 시편 100:3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사들 집단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이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계획에 개입이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스스로 일하지 인간의 의견을 들어보고 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편 100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 따로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현실관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에게는 다른 현실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학적, 영적 차원을 정치적 차원으로 가져가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돈과 권력의 힘으로 살 듯이 사람이 죽는 것도 돈과 권력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보여주므로서 참된 현실은 오직 그것 뿐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그 때는 유월절 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이 자진해서 유월절 희생양으로 절기에 가담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 유월절 의미를 완성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에는 죄로 인한 희생 제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에 죄를 새기는 것이고 그 죄를 야기한 주체들을 이 정치적 현실 차원에서 성립시키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비-복음이며 비-진리이며 비-현실인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은 모든 택한 자들의 죽음을 보여주는 죽음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살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을 판단하는 시점부터 어린양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이 됩니다. 자신을 죽어야 되는 자인 것을 아는 순간만이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죄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은 세상적인 현실관을 갖고 있는 가룟 유다에게 악마가 들어가게 했습니다. 악마가 궁극적으로 하는 짓이 무슨 짓인가를 보여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악마는 애써 예수님이 제시하는 현실관에 사람들로 하여금 눈 돌리지 않게 합니다. 이 말은 곧 악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현재 당당하게 살아있고 살아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선전합니다.

선교 단체에서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취직하고 시집가면 다 꿈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 힘과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꿋꿋하게 살아남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당연히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골로새서 2:15-16에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절기를 철폐되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제 더 이상의 유월절은 없다는 말입니다. 지킬 유월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의 죄와 예수님의 어린양의 관계가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죄 씻어줄 제사가 남아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선언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참된 현실임을 말해 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8강-눅22장 1-6(유월절의 완성)1205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2:1-6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상품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닌데 다 큰 성인을 ‘얘야, 사탕 사줄 테니 저쪽 아저씨 하고 살아라.’ 하고 팔아넘긴다는 것이 얼른 납득이 안 되지요. 누가 고발이나 고소를 하는데 거기에 사단, 악마까지 개입되어서 요란을 떨 필요까지는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는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요새 같으면 예수님이 요주의 인물이라면 누가 팔아먹을 필요도 없어요. 그냥 경찰이나 검찰에서 나와서 영장 보여주고 데려가면 기자들 나와서 사진 막 찍어대면서 ‘할말 없습니까?’ 하면 ‘모든 것은 검찰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래서 넘어가면 되는데 이렇게 사단이 개입된다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이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 우리가 보는 이 현실은 사람들과 사람들이 의논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시편 99편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만 들어보세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하나님께서 천사들 속에 둘러싸여서 거기에 좌정, 앉아 계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거기에 아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하고 의논하지 않고 천사들에 둘러싸여서 ‘1번 천사, 가서 일해. 3번 천사, 가서 일해. 6번천사 일 다 잘 했어?’ ‘잘 했습니다.’ ‘그러면 7번 천사 내 보내.’ 이렇게 천사들에 둘러싸여서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그냥 밀어붙이는 거지요.

 

거기에 사람이 왜 끼어듭니까? 그것이 바른 현실이라고 시편 99편에 나옵니다. 그리고 천사들에 둘러싸여서, 사람은 거기에 안 들어가요, 흔적도 없어요, 천사들에게 둘러싸여서 천사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움직이는 그 하나님께서 시편 100편에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서 이 땅의 일을 하시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의 자기양떼, 자기사람, 자기천국백성을 만드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의견이나 협조나 이런 것이 일체 필요치가 않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시편 99편과 100편에 나오는 이 말씀, ‘아,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양이 따로 있고 그 양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알아서 다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수용을 하려면 우리가 나에게 적용시키는 모든 행위를 손을 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태어나서 나름대로 구성해 놓은 현실관이 따로 있어요. 그리고 이 현실관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파악하면서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죽으면 안 돼. 죽어서도 좋은데 가야 돼.’ 그 일방적으로 자기가 아는 현실관 속에서 일방적으로 맞춤 나를 다시 제작해서 그것을 기어이 천국으로 밀어 넣는 식으로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힌트 삼아서 자꾸 자기에게 손질을 가하는 겁니다. ‘주여, 이 정도 하면 내가 천국 가서 살만합니까? 이정도 거룩하면 천국 가겠습니까? 이 정도 경건하면 죽어서 천당 가겠습니까? 이 정도 착하면 죽어서 예수님 만날 수 있겠습니까?’ 자꾸 이것을 따져가면서 내가 이 현실 속에서 합당한 사람인지, 구원받을 사람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맞추어서 자기에게 손질을 가하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가룟유다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어린애로 아는 겁니까? 어느 여자를 술집에 팔아넘기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팔아넘김은 아니고 가룟유다가 돈을 받고 서기관과 대제사장에서 팔아넘긴 것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쪽에서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한 겁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동조자가 굉장히 많으니까, 예수님은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으니까, 전에 세례요한 잡을 때처럼 요란을 떨면 나중에 큰 탈이 나기 때문에, 민중들의 반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내부에 공모자가 있으면 돼요. 예수님 집단 내부에 자체적으로 분열이 일어나서 폭삭 망하도록 한 겁니다.

 

내부 밀고자에 의해서 ‘우리 예수라는 집단 손 좀 봐주세요.’라고 했을 때 현실적으로 그 뒤처리가 정당화가 되는 겁니다. 기업의 비리가 있을 때 내부 공모자가 있어야 돼요. 뭔가 찔러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빌미로 세무조사가 나오든지 해줘야 외부에서 강제로 했다는 안 좋은 인상을 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일을 조용하게 처리하겠다는 거지요. 여기서 약간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의 발언에 대해서 비난했던 사람은 사실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군이나 경찰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인 권한이 없어요.

 

종교적으로, ‘저것은 율법에 잘못된 해석이며 저런 소리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이렇게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라는 자가 율법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정신적인 거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 정신적인 공격은 아무리 정신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현실은 돈이 오고 가야 현실이고 경찰이 와서 잡아가야 현실이고 그것이 가장 또렷한 현실, 가장 손에 닿는 현실, 확실한 현실, 빼도 박도 못하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겁니다.

 

돈을 주고받고 경찰이 와서 체포하고 그래서 정치적인 힘이 가장 확실한 현실로 자리 잡았다, 그것 말고는 다른 현실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어느 교회 목사가 문제성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 경찰이 나서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이단단체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좋은데 그 사람이 돈을 세탁을 했다, 그러면 경찰이 덤벼드는 거예요. 경찰 출동하지요, 체포되지요, 시민권박탈 되지요, 출국금지당하지요, 그럴 때 화들짝 사람들이 겁을 내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은 예수님의 말씀도 아니고 그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바리새인들의 고상하고 경건하고 올바른 비판도 아니에요.

 

역시 경찰이 출동하고 돈 문제가 오고가야 그것이 실감나면서 ‘야, 우리가 꿈속에 사는 것이 아니고 진짜 현실답게 우리가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 문제를 추상적인 문제에서 실제 현실문제로 그 형태를 바꿉니다. 바꾸어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여러 가지 현실 중에 일부냐,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는 현실을 대체하는 하나의 현실이냐, 그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이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세상현실 속에 살면서 돈과 경찰이나 검찰의 권력, 이런 것이 중요하면서 교회 와서는 천국이 중요한 것처럼 모인 집단이 교회에요.

 

교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데 목사나 주교 급쯤 되면 그 사람들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로비를 해서 교회가 정치적으로 세력을 가지고 그 지방에서 유지가 되고 그 나라에서 권력을 잡고자 하는 사업을 벌려야 천주교가 유지되고 교회가 유지되는 겁니다. 기독교협의회 같은 것, 조계종 이런 것, 이것은 정치적 집단이거든요. 목사나 신부나 그 중들이 불교경전이나 성경 몰라서 그렇겠습니까? 진짜로 교회의 교회됨, 성전의 성전 됨, 절이 절답게 되려면 그런 성경책에 나오는 고상한 개념들은 다 소용없는 것이고 문화부에 돈 집어넣어야 되고 청와대 아는 권력자와 연줄이 닿아야 되고 조찬기도회를 해서 정치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정치적으로 작업을 걸어줘야 교회나 천주교가 유지된다는 것을 윗사람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 말입니다.

 

순진하게 교회 와서 세례 받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지만 실제로 교회가 커지면서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주려면 그런 종교적인 현실 말고, 그런 종교적인 현실은 단지 관념일 뿐이지요, 그런 종교적인 현실이나 신학적인 현실 말고 정치적인 작업이 거기에 들어가야 됩니다. 제가 어제 쓴 글처럼 세상만사는 사람 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현실뿐이지 여기에 사람 말고 다른 것이 개입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99편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룹들 안에 좌정하시고 시편 100편에 보면 하나님은 그룹들, 천사들을 보내서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양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할 때 인간들의 정치적인 작업 이런 것은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현실을 믿어야 됩니까? 시편 99편에 나오는 대로 여호와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셔서 어떤 사람의 말도 여기에 끼어들 수 없고 천사들로 친히 작업하셔서 자기가 친히 기르시는 양들을 양답게 만들어가는 그것을 현실로 믿어야 됩니까, 아니면 복음 전하고 예수님 전한다고 잡고 체포하고 교회에서 돈의 힘이 가세되어서 돈 많은 사람은 일찌감치 장로 되고 돈 없는 사람은 20년이 되고 30년이 되어서 장로투표에서 떨어지고 교회가 땅을 사는데 정치적인 힘을 이용해서 쉽게 땅 사고 또 팔아서 장사하고 펀드나 주식투자해서 돈 벌어서 교육관도 짓는 것, 어떤 것이 진짜 현실이며 어느 쪽을 믿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경찰을 어느 쪽에서 동원할 수 있느냐, 예수라는 한 인간을 체포하는데 있어서 경찰을 동원하는 힘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비난을 해도 그것은 힘도 안돼요. 예수님의 모든 차원이 종교적이거나 영적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때부터는 바리새인은 사라지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개입하는 계기가 유월절 절기입니다. 사월초파일 행사를 할 때 서울 종로 거리를 빌려서 연등행사를 하는데 목탁 두드리고 앉아 있으면 그것을 빌려줍니까? 종로경찰서장을 알아야 되고, 그것도 안 되면 그 윗선의 경찰청 높은데서 압력이 가야 되고, 또 종로구청에 아는 사람한테 협조를 구해야 되고, 행사하는 동안에도 경찰들이 다 지켜줘야 되고,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서 공격하는 것도 무마할 수 있는 힘들도 있어야 되고.

 

목탁 두드리고 있으면 돌부처가 기어 나와서 그것을 다 해줍니까? 아니잖아요. 돈 봉투도 줘야 되고 술도 사 먹여야 되고, 그 조계종 행사를 위해서 애쓰신 그 훌륭하신 분이 도박을 하는 거예요. 종교나 천국, 이런 것은 다 안 믿습니다. 현실은 돈이에요, 돈이 있어야 절이 되고 교회가 되고 성당이 되고 유지되는 겁니다. 그 속에서 과연 예수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영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스스로 자기를 맡긴 겁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합니다. 가룟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유다라는 제자는 현실감이 몽롱한 상태가 아니고 예수 믿고 그런 상태가 아니라 가장 냉철하게 현실을 제대로 뚫어본 사람이지요.

 

예수가 인자라고 했으니까 가룟유다는 인자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아보는 거예요. 인자가 어디에 나온 용어인가, 다니엘에서 구름타고 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메시아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라면 구름타고 와야 되고 많은 이적과 더불어서 자기 조국 유다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켜야 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 할 때는 그럴 듯 했었어요. 그래서 그가 자진해서 회계장부 맡으면서 자기의 모든 청춘을 바치면서, 그래봐야 3년밖에 되지 않지만, 예수님의 부름 받은 사도라고 하면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 하는 논쟁에 끼어들었을 것이고 같이 모든 것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점차 뭐라고 하느냐하면, 민중들은 기적을 바라니까 기적의 도를 점점 더해서 높여가면 결국 더 많은 숫자가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래서 예수님께 속한 숫자가 예수님을 공격하는 숫자보다 많게 되면 정권이 바뀌고 그러면 이 나라는 우리가 접수하는 거예요. 새로운 당이, 예수당이 성립해서 자기는 정권잡고 한 자리 차지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갈수록 뒤로 가면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자꾸 현실과 동떨어진 희한한 소리를 자꾸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당신이 기적을 베풀라’고 하니까 전에 사용했던 그 기적을 베풀면 그만인 것을 갑자기 기적은 멈추면서 ‘내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해서 자꾸 자기가 죽는다고 해요.

 

스승으로서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입니까? 아버지가 자기 집안 식구들 모아놓고서 술이나 먹으면서 하는 소리가 ‘나는 약 먹고 죽을 것이다. 약 먹고 죽을 것이다.’ 그러면 커가는 자식들이 그 아버지에게서 뭘 배우겠습니까?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든지 해야지 맨 날 각죽 거리기나 하고. 그런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많이들 경험 했겠지요. ‘아이고 네 엄마 때문에 못살겠다.’ 그런 소리 살면서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가만있는 엄마는 그대로 죄인 되어버리면서 패가 아빠 쪽으로 쏠리게 해서 동정표를 유도하는 느낌이 막 들잖아요. 예수님이 죽겠다고 하니까 가룟유다는 감을 잡은 거예요.

 

어리석은 백성들을 예수가 기만한다는 겁니다. 그 가룟유다의 생각을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삽입을 시켜 봅시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국 가룟유다 꼴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가룟유다의 안목과 시선이 현실감각에 있어서 몽롱한 것이 아니고 현실을 제대로 보고 모든 사람이 ‘예’ 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나선 용감한 발언일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가룟유다의 존재를 놓치면 안 됩니다. 가룟유다 입장에서 그동안 내가 예수님과 한패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 정신을 번쩍 차린 거예요. 지난 15동안 이근호의 친구였다, 하는 어느 목사의 양심고백처럼.

 

그러니까 ‘내가 바로 예수의 제자다. 이 예수의 제자가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정신 차리고 예수에게 그만 속아 넘어가라. 이제 정신 차리고 그만 기만당해라.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현실을 직시하고 똑바로 봐라. 무엇이 현실인가? 경찰이 와서 잡아가는 것이 현실이고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이 현실이야. 왜 자꾸 그 현실을 놓아버리고 뭔가 종교라는 것, 모호한 것, 추상적인 것, 아무 실체도 없는 것, 그런 낱말들이나 개념의 덩어리를 가지고, 얼마든지 스스로 설 수 있고 나 자신만의 세계를 꾸릴 수 있는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접어버리고 왜 종교라는 아편, 마약에 빠져 있는가? 돈도 안 되고 누가 그냥 취직시켜주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거기에 빠지는가? 이제야 말한다. 예수는 가짜였다. 내가 그것을 확실히 보여줄게.’ 하고 예수를 팔아먹은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2장 3절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고 합니다. 악마가 들어갔다고 표현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어떤 개인이 개인적인 신상발언을 할 때도 개인적으로 복음을 훼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영적인 것은 그냥 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정치적인 현실관으로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사탄의 진짜 얼굴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 사탄입니다. 성당을위해서 정치적으로 노는 추기경들, 그리고 조계종의 중들, 그게 바로 사탄의 모습이거든요. 결국은 모호하고 추상된 것은 돈을 끌어내는데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돈이 되려면 ‘우리 교회 오시면 출세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출신중에 대통령이 계십니다. 우리교회 나오시면 대통령과 다 연줄도 닿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까? ‘혹시 사업하다 어려운 일 생겼다든지 인허가 문제, 이런 것은 우리 교회 장로만 되시면 수월하게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얼마나 현실적이냐 그 말이지요. 사탄이 들어갔을 때는 교회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돈과 정치적인 것만 현실이라고 인정할 때 그것은 독자적으로 그런 아이디어가 떠 오를 수가 없고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왜 악마가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쪽에서, 예수님 스스로가 먼저 제시한 것이 있어요.

 

‘너희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유월절을 즐겨라. 나는 제대로 된 현실, 나는 진짜 현실에 맞는 유월절을 해야 되겠다. 너희들은 나를 팔아 넘겨라.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될게.’ 하는 하나님이 고도의 전략이었습니다. 여기에 유월절의 해답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누구도 유월절 드리고 그 다음에 또 유월절 드리는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번 유월절 드렸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린 유월절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유월절 행사 날에 그들의 정치적 유월절에 자진해서 희생되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모든 절기, 안식일, 유월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그런 것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라, 왜, 십자가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회 나오면서 기존에 자기가 돈과 경찰(권력), 이런 것도 현실이고 그래서 그 현실도 나름대로 그냥 두고 교회 와서 천국이라는 현실을 같이 나란히 겹쳐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유월절이 현실이고 네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돈과 권력의 현실은 이미 십자가로서 제대로 된 현실이 아님을 내가 들통 내었다는 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 실제로 직장생활을 하고 돈 버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이게 꿈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사로자 하기 때문에 어린양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유월절 어린양은 ‘모든 죽어가는 자를 위해서’라고 하거든요. 죽어가는 자를 위해서, 물론 택한 백성이지만, 시편 100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양들이 있어요. 그 기르시는 양들 중에서 한 양을 잡아서 다른 양을 대신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계획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아이디어, 인간의 어떤 현실에서도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적용시킨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유월절 어린양이 되려면 택한 백성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살아봐도 죽는다는 사실 그것을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저만치 어린양의 죽음이, 비로소 눈에 띄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그것만이 진짜 현실로 받아들일 때, 죽는 것도 단지 늙어죽는다는 그것 말고 내가 엉뚱한 현실을 신봉하는 그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다는, 내가 죄인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 죄를 어찌할꼬, 라고 알 때 그 내가 생각하는 현실 밖으로 내가 스스로 탈피할 수 없고 박차고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거기서 박차고 나왔던 유월절 어린양이 보이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주여!’ 라고 외칠 수가 있는 거예요. ‘나의 죄를 대신 가져가신 주여!’라고 외칠 수가 있는 겁니다. 선교단체 학생들, 저도 대학교 때 선교단체 가입해서 벤치에 앉아서 전도도 하고 많이 해 봤어요. 말을 잘못했습니다. 많이는 안 해보고 수십 명 정도는 될까, 하여튼 해 봤어요. 선교단체에서 시키는 대로 ‘이런 식으로 4영리를 펴놓고 전도하면 됩니다.’ 할 때 왠지 못생긴 여학생한테는 안가고 싶고 그래도 전도라는 것을 빌미로 해서 예쁜 여학생한테 말도 걸고 했거든요.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양쪽 다 먹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선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을 하게 되면 혹시 아직까지 내가 남겨둔 일, 해야 될 일, 그러니까 우리 집안이라는 현실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숙제의 현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빨리 네가 졸업하고 취직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결혼해서 아파트에서 살아라.’ 하는 그 기존현실이 요구하는 숙제가 있잖아요. 그 현실을 잠시 미루어놓은 그것을 내가 전도에 몰두하게 되면 내가 안 한대신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해 줄 수가 있다는, 그래서 이것도 먹고 저것도 챙기는 식, 천국도 가고 내가 원하는 세상적인 것, 나는 이렇게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그 애들은 입맛 열면 십자가고 입만 열면 유월절 어린양이고, 그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외치고 전도한 이유가 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죽기 싫은 거예요. 어디서, 이 현실 속에서 죽었다는 소리는 듣기 싫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뭐냐 하면, 내가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그 현실 속에서, 너희들이,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라고 부인할 수 없는 아주 차가운 현실, 돈이 있고 경찰 동원하고 그래서 체포당하고 사형당하는 이 뚜렷한 현실, 누가 대신 나를 살려주지 않는 분명한 현실, 그 현실 속에서 나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너희는 그 속에서 못 빠져 나왔다 그 말입니다. 못 빠져 나왔으니까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악마가 만든 현실 속, 어느 인간도 악마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교단체 하다가 나중에 시집간다든지 선교단체 하다가 나중에 취직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린양의 십자가가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때는 교회 장로 될 생각하고 교회에서 큰 소리 칠 생각이나 하지 십자가도 다 알고 선교단체에서 하는 것도 다 해봤고 그 다음부터는 어린양이 안 들어와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남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사는 가정꾸리기와 남보다 더 빨리 승진하는 직장에서의 성공, 출세해서 능력 있는 남자라는 소리 듣는 것,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온다니까요. 가룟유다가 바로 그것을 원했던 겁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예수의 힘을 빌려서 정작 내가 원하는 현실 속에서 가장 현실에 적응 잘하고 그 현실에서 가장 우수한 존재로서 부각될 수 있는 새로운 미래의 자아상을 꿈꾸면서 가룟유다는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꼼수에 멋지게 말려든 겁니다. ‘수고했다. (어깨 툭툭 두드리면서) 지옥가거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면서 ‘가룟유다! 어이구, 시간 다 되었네. 스케줄상 네가 활동할 타이밍이야. 가라.’ 하니까 멍청하게 ‘예’하고 갔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예수님과 가룟유다만 아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빨리 팔아먹어라. 나를 빨리 팔아먹어라. 너는 내부 공모자고 밀고자야. 빨리 팔아먹어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그 팔아먹는 가룟유다를, 우리가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는 밀고자요 내부공모자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를 따라가도록 되느냐 하면 ‘어이, 가룟유다! 너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자. 나도 옛날에 십자가 이야기했는데 그것 아무 소용없더라.’ 그렇게 우리가 가룟유다를 따라가 줘야 돼요.

 

따라 가줘서 우리가 그쪽 편에 서 줘서 나팔 불면서 폭탄을, 소위 예수 믿는 이 사도들을 향하여 막 날려야 돼요. ‘예수는 어리석은 대중들을 기만했던 희대의 사기꾼이다.’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은 다 그 교만과 사기술에 말려들었지만 우리 위대하시고 똑똑하신 대제사장들과 역시 공부 많이 하신 서기관들이 지혜로워서 사기꾼과 아닌 것을 솎아내듯 예수님을 제거해버렸다, 거기에 분통을 터뜨린 제자들이 몇 몇 있었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너무 죽여서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울이라는 사람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아무 실체도 없고 그저 말뿐, 이미 사라져 버린 죽은 예수를 들먹거리면서 계속 살아 있다고 말만 무성하게 하는 것들이 설쳤는데 이제는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역시 현실이란 돈과 권력과 경찰 같은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지 그 이외의 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지금도 가룟유다에 편들면서 하는 그 이야기를 우리는 애써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들어야 돼요. 그것을 들을수록 우리는 십자가의 고마움을 더 크게 느끼는 겁니다. 우리는 자칭 신자라고 해서 그런 이야기를 두고 ‘에이, 이단아, 삼단아, 가룟유다를 유혹한 사단아, 나까지 유혹하려 드느냐?’라고 하면서 그것을 버리지 말고 그쪽 현실을 자꾸 뒤집어 써야 돼요. 뒤집어쓰면서 바로 내가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그 입장에서 다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이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건너 뛸 수가 없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을 말하거든요. 모든 인간적인 것은 스톱,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죽었다는 그 말은 사실은 내가 반신불구다 하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당연한 듯이 ‘너는 죽었고’라는 말을 계속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들을 때마다 버리고 들을 때마다 버렸는데 사실은 왜 우리가 반신불수며 왜 어떻게 해서 우리는 꼼짝도 못하는 사람인가를 그동안 우리가 여러 겹 덮고 있는 이 현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고 있는 외투를 우리 힘으로 벗길 수 없다는 이 진짜 현실, 내가 이 현실을 어떻게 박차고 나올 수가 없다는 진짜 현실을 확실히 알 때 예수님의 피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천사들,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과 예수님 홀로 다 하셨습니다. 저의 구원, 저희가 양된 것도 순전히 하나님 작품이고 예수님 작품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가장 위험할 때가 내가 잘했을까 혹 못했을까, 하고 자기를 돌아볼 때 그것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에요. 우리는 잘하고 못하고 간에 예수님 어린양의 보혈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잊지 않았지요? 히브리서 9장 1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우리로 하여금 닫혀 있던 천국 문을 통과해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죽 나와 있거든요.

 

이 이야기가 언제 우리에게 기쁨으로, 환희로 다가올까요? 그것은 지독스럽게 돈과 세상권력에 미쳐 살 때, 그리고 이 돈 없으면 난 죽는다고 느낄 때, 그럴 때 난데없이 그야말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난데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신 그 일이 우리에게 그렇게 큰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주여, 나의 만든 이 나의 영역보다 천국이 더 좋고 내가 열심히 한 것, 이 평생토록 노력한 것보다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 더 귀한 줄 믿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천국에서 문지기로 있는 한 날이 더 좋다는 시편 84편의 말씀이 그대로 지금 앞당겨서 내 안에서 아카시아 향기처럼 좍 퍼져 나가는 겁니다.

 

‘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믿는다는 것이 교회에서 까부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구나. 이게 믿는 것이구나.’ 안 돼! 우리가 안돼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했다니까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한 거예요. 우리가 기껏 기대하는 것은 뭐냐, 아까 선교단체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 해주면 나에게 뭘 해줄 겁니까?’ 기껏해야 이것이 가룟유다에요.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이 모든 성경에 나오는 현실을 이 세상눈에 보이는 현실로 다 옮겨 놓았는데 우리가 잘못해서 옮겨놓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유월절 어린양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현실에 콕 박혀서 사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까발리시고 또 보여주시는 겁니다.

 

천국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천국이 좋아서 교회 온 것처럼 한 그 위선들이 그 십자가 어린양 앞에서 완전히 다 까발려 져야 돼요. ‘내가 이렇게 너무 나쁜 짓을 했어. 이래가지고는 내가 구원 못 받지. 그 전에는 더 나쁜 짓을 했고.’ 라고 할 때 마귀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너는 그만큼 착한 일을 해서 빨리 나쁜 짓을 커버해야 된다.’ 그것은 마고귀입니다. 사탄이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십자가 어린양의 복음을 반대하기 위해서 자꾸 우리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만들어요. 우리는 뭘 해도 우리 현실에서 못 벗어나는데,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벌써 벗어났는데, 우리는 뭘 해도 못 벗어나고 뭘 해도 살려고 애쓸 뿐인데 그 살려고 애쓰는 것이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런 짓들을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주님의 안목에서 보면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 맘 부림 쳐도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이 손대서 어떻게 구원받는 사람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노리는 것은 그런 십자가복음을 가리고 그것을 결별시키고자 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작용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행함이 있어야지, 행함이! 그냥 십자가만 믿으면 다가 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돼.’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주목하지 말고 예수 믿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주목해. 네가 중요한 거야.’ 자꾸 악마가 목사이름으로서 교회 이름으로서 자꾸 그것을 강요하는 거예요. 우리는 슬금슬금 거기에 말려들고. 얼씨구나 좋다, 하고 장단 맞추고.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다 그렇게 돼요. 만약에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 버리면 우리 자신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행했느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예요. 안개인데 무슨 의미가 따로 있습니까? 의미도 없는 것을 마귀는 애써서 강력한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을 내 쪽에서 시동을 걸어서 나한테 회수하는 것, 평생 우리가 하는 것이 이것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이런 일을 했지. 그 결과가 나한테 이렇게 돌아올 거야. 아, 신난다.’ 우리는 매일 아침으로 저녁으로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유월절, ‘다 이루었다.’를 애써 눈 돌리게 만드는 마귀가 만드는 강력한 현실의 파워입니다.

 

제가 수영을 못해요. 수영 배울 기회도 주어진 적이 없어서 수영을 못하는데 못하는 이유가 뭐냐, 육지의 습관 때문입니다. 육지의 습관이 물에서는 안 통하거든요. 적어도 하늘나라 가는데 수영하는데 있어서 육지의 습관이 방해를 놓는 것과 같은 방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당장 살면서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쁜 짓을 끊든지 술을 끊든지 어떻게든 다루어야 된다는 이 버릇이 남아 있으니까 천국에서 두 손 두 발 다 묶는 이것을 참지를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아무것도 안하는데 뜨냐는 거지요.

 

그런데 수영 좀 잘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해도 잘만 뜨데요. 그게 어떻게 뜨느냐, 그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데 손 안대고 주머니에 손 넣고 그냥 타요. 그런데 자전거 못타는 사람은 어떻게 핸들도 안 잡고 갈 수가 있느냐고 하지요. 처음부터 그냥 가는 거야, 그냥 가게 되어 있어요. 열두 제자, 가룟유다 빼놓고 열 한 제자가 다 예수님 때문에 그냥 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 때문에 그냥 예수님 세계에서 헤엄치고 그냥 사랑받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 거예요. 사랑은 우리 행위를 묻지를 않는 겁니다.

 

사랑을 받아 봤어야 알지. 악마가 자기는 지옥 가니까 그것이 뿔이 나가지고 자꾸 나를 집적거리면서 ‘뭔가는 너는 반듯하게 생활하라’고 그렇게 강요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왕 버린 몸입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버린 몸이지만 주님 주신 십자가, 그 기적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염소의 피도 아니고 송아지의 피도 아닌 예수님의 피로써 이제는 다 이루었다, 유월절은 더 이상 정치적인 축제도 아니고 종교적으로 교회에서 하는 축제도 아니고 이미 축제는 끝났습니다. 유월절은 끝났어요. 십자가로 다 승리해버렸습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 안하든 십자가대로 용서받은 사람만 정죄함이 없이 천국 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참 복음 안다 해놓고 돌아서면 오해하고 돌아서면 곡해합니다. 그 놈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남하고 비교해서 잘 믿으려고 하는 그 시도마저 사탄이 안기는 현실인 것을 저희가 깨닫게 하셨사오니 더 이상 우리 자신에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이 뭘 하셨는지를 늘 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