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겨울수련회 다니엘강해 제 9강 : 인간과 인자 - 이 근호 목사
마지막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다니엘 12장 끝 대목 11절,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를 것 같으면 처음부터 천삼백삼십오 일로 마감하면 되는데 왜 여기에 천이백구십이라는 숫자를 쓰고 그다음에 천삼백삼십오라는 숫자를 또 나열했는가? 그 두 개의 상반되는 숫자를 굳이 기록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1335 빼기 1290을 하게 되면 여기 45일이라는 기간이 유난히도 우리 눈에 띄게 만드는 거예요. 1335-1290=45, 45가 눈에 띄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1290일은 뭐냐 하면 인간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이 1290일로 끝납니다. 더 이상 늘여봤자 인간은 견딜 수가 없어요. 그 시련과 고난을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1335일이라 해서 의도적으로 45일을 부각하면서 추가하는 이유는 이 45일이 인간의 시간이 아니고 인자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시간에서 인자의 시간으로 나올 때, 인간에겐 이 45일이 없는 시간이에요.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기록하고 그다음에 1335일, 인자의 시간을 이렇게 나열하면서 인간의 시간과 그리고 그다음에 없어야 될 시간 45일이 겹쳐지도록 의도적으로 다니엘 계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은 인간으로서는 1290일, 여기서 다 끝났어요. 인간에 대한 마땅한 하나님의 처벌과 시간은 1290일로 끝났습니다. 끝난 시간에 일어난 일이 뭐냐 하면 모든 제사가 폐해지는 거예요.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멸망케 할 물건을 세운다. 모든 제사를 폐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그 마지막 사다리까지 치워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되지 못해요. 창세기 3장 24절, 생명나무 가는 길을 철저하게 하나님이 차단하는 그 취지가 일관성을 갖고 있어요. “내가 언제 너희들을 구원한다고 했어? 구원 안 해. 너희는 구원대상이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잖아. 생명나무 따먹을 자격 없다고. 일은 너희가 저질렀으니까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도 너희에게 당연하다. 그런데 거기서 너희들이 이미 처벌 받을 것을 합당하다고 여기면서 구원을 엿보는 것은 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율법을 줘서 구원시킨다고? 그 율법의 사다리, 하늘나라 사다리는 내가 걷어치우겠어. 너희들 자체적으로 율법도 날아가고 그 자리를 멸망의 것, 악마의 것이 채우는 그 시간, 1290일로 충분하다.”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따라서 1290일 이후에는 시간은 더 이상 없어지는 겁니다. 없는데 1335일은 뭐냐? 45일은 뭐냐? 이제부터 인간 구원 아니고 인자 구원이에요. 그러면 인간 구원의 시간은 끝났고 인자 구원은 뭐냐? 인자 구원은 인자되시는 분이 겹쳐진 45일에 있을 때, 없어야 되는데 있을 필요도 없는데 인자의 세계 쪽에서 제공된 이 부분을 성경에서는 ‘남은 자’라 해요. 남은 자.
남은 자의 특징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남은 자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남은 자가 발생되는 거예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남아 있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남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국은, 너는 생명나무 따먹지 못한다고 차단시켜놓고 이제 와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라는 제안을 또 하시는 이유가 뭐냐? 앞뒤가 안 맞잖아요. 구원을 안 하려면 철저하게 구원을 안 해야지, 이제 와서 긍휼하심의 카드를 내미는 이유가 뭐냐?
긍휼하심은 인간이 구원될 자격이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게 긍휼하심이에요. 긍휼하심이 생산되는 장소가 인간의 구원 열망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남은 자로 세우기 위한 토대로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다니엘 7장 볼까요?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죠. 인자 같은 이. 그럼 인자 같은 이가 있다면 인자되는 모델은 따로 있고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자를 만나러 온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다니엘 8장 17절,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왔는데 그 나아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누가 누구보고 인자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다니엘보고 인자라고 하는 거예요. 인자야. 그럼 ‘인자야’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인자 같은 분에게서 나온 거죠.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모든 벌어진 일의 원천이 다니엘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고 “인자야 기다려라. 내가 너 닮아갈게.” 죄인의 형상을 입고 오시거든요. “인자야, 기다려. 내가 너 닮아갈게.” 할 때, 닮아가겠다고 제안한 그 분이 인자 같은 분이에요. 인간 같은 분이에요.
그럼 왜 다니엘에게 그런 제안이 주어졌느냐? 다니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계시 받은 자에요. 시편 8편에 보면 여러분도 잘 아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서 ‘무엇이관대’가 두 번 나오죠. 처음에는, ‘인간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하나님께서 언약, 약속을 주십니까?’ 이 뜻은 뭐냐? ‘인간은 범죄했기 때문에 버려져도 상관없는데, 왜, 왜 버려야 될 쓰레기 같은 이 죄인에게 찾아오십니까?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 의아해하는 차원에서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 하나님 찾아올 줄 알았어. 내가 열심히 기도하니까 응답받을 줄 알았어.’ 이게 아니라, ‘왜 찾아오십니까?’ 되묻고 있는 거예요. ‘안 찾아오셔도 되는데. 죄값은 저주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왜 굳이 쓰레기 같은 나에게 왜 찾아옵니까?’라고 하면서, 찾아온 이유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내 속에 언약을 박아놓고 그 생성물이 되는 인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온다는 사실을 다윗은 시편을 통해서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발생되는 나 이후에 남은 자의 입장에서 호칭되고 있는 인자라는 분이 찾아온 거예요. 그걸 미리 다니엘에게 이야기하고 나중에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지자라 합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자기 호칭을 인자라는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추가는 덤으로 주어진 것이고 인간 아담의 자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남편과 동침해서 아기를 낳은 게 아니고, 남편 배제하고 출생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왜? 인간으로서 사는 게 아니고, 인간 아담의 이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따로이 나가는 이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인자.
그 말은 인간은 그냥 흙이지, 그건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율법을 주는 것은 ‘너는 인간이 아니므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인간도 아닌 주제에 인간인 양 흉내내지 말라. 흙이면 흙으로 살아라. 네 주제파악하고. 율법을 지킨다고? 말씀을 지킨다고? 그 율법과 말씀이 너를 저주할 거야. 심판할 거야. 끝까지 책임을 물을 거야. 너희들은 끝났어. 이게 1290일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1335일, 45일에 없어야 되는 게 생겨난 거예요. 없어야 될 시간이 45일입니다. 45일은 인자가 뭔가 새로 시작하는 순간이거든요. 율법이 폐해졌다. 그다음 45일 동안에 율법의 완성이 긍휼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생됩니다. 그 시간이 45일입니다.
여기에 누가 개입했는가? 남은 자 되는 우리 인자가 여기에 관여하죠. 인간은 끝, 인자 시작. 인간은 끝났고 인자는 시작되고. 그러니까 인자는 이 시작점을 알리기 위해서 장벽을 세웁니다. 단절점을 세우죠. 그 단절점을 세 자로 뭐라 하느냐?
십자가. 제일 중요할 때는 잠시 운을 떼야 됩니다. 십자가. 십자가가 단절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알아듣지 못한 sign. 시그니처(signature)에요. 인간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시그니처.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도 알 수 없는 시그니처, 신호, 기표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은 것, 성령을 받은 자, 영적 사람은 비로소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표가 바로 십자가에요.
세상의 관원들과 세상의 지혜자들은 이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하나님이 원했던 바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과 구절들 다 뽑아서 조립해도 십자가가 안 나옵니다. 왜? 인간이 조립했기 때문에. 원어사전 펴놓고 모든 신학개념 총동원하고 구속사, 언약사, 뭐 십자가 복음 이야기 다 해도 안돼요. 큰 신학교 가면 무려 15만권의 책들이 도서관에 쫙 있습니다. 그런 것들 다 해봐야 폐지에요. 1kg에 50원 주는가 모르겠어요. 하여튼 노인네들 리어카 끌고 다니는 폐지에 해당돼요.
그거 공부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그게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실컷 공부한 것 다 폐기한 사람이에요. 다 폐기한 사람은 구원받아요. 신학교 가서 공부한 것, 이것이 바로 쓰레기라는 것을 기꺼이 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목사가 되죠. 그러니 목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학을 해야 됩니다. 왜? 버리기 위해서.
그러니까 똥피죠. 그냥 피살이 하나 화투치면서 갖다버리는 거예요. 버리기 위해서는 이걸 왜 버려야 되는가를 알고 버려야 돼요. 뭘 버리냐? 내가 인간이 아니므니다. 인간임을 버리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버려야 될 쓰레기인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기도, 선교, 전도, 헌금,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쓰레기에요. 그래서 쓰레기입니다.
그럼 쓰레기 안 되기 위해서 그런 것들 안하면 되지 않느냐? 아니에요. 버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나는 왜 인간에 머무는가, 쓰레기에 머무는가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고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버려야 되니까요.
자식을 버리기 위해서는 그냥 못 버려요. 자식에게 정성을 쏟아놓고 버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아들한테 다 집 사준다고. 요즘도 그런 집이 있는가? 집을 사주기야 하겠습니까. 좀 사는 집이야 집 사주죠. 보통 전세에 보태 써라, 하면서 뭐 얼마 주지도 않아요. 한 3억? 6억? 서울 사니까 한 5억, 촌에 살면 한 3억 정도. “이거 뭐 몇 푼 되지도 않는데 너희 결혼해서 새 집 아파트 사는 데에 보태고 나머지는 대출 받아서 사라.”하고 주는 겁니다.
왜? 자식을 버리기 위해서. 왜 버려야 되는가? 그 자식 안에 평생 내 정성과 사랑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어떤 사랑? 인자? 아니요, 인간으로서. 그저 인간으로서. 씨족 사회에서. 우리 가족 아니냐 하는 그것. 내가 정성을 다하여 몸 바쳐서 충성했던 자식을 나를 버리듯 버리는 것.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버리는 거예요. 사랑하는 독자를 버리는 그 취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출생한 거예요. 우리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 내 종교를 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겁니다. 나의 한계, 내가 심판받고 저주받아 마땅함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남은 자라는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남은 자 카드는 기대하지 마세요. 이 남은 자 카드는 인간의 기대에 의해서 남은 자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인자되시는 분이 아버지하고 맺은 창세 전 계약에 의해서 그 남은 자 명단은 이미 리스트가 작정된 거예요.
인간은 인간으로는 끝났고 인간에서 인자로 바뀌어야 될 거기에 인간에게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오직 긍휼하심을 여기서 집어넣는 겁니다. 긍휼하심을 집어넣었을 때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냐를 보여줘야 되죠. 그게 구약성경에서는 십분의 일로 되어 있어요.
십분의 일이 나오는 대목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12절,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십분의 일이 남아있을지라도 잘려버립니다.
그런데 이 십분의 일이라는 의식이 인간으로서는 가장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 같은, 이순신 장군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배 열두 척 같은 거죠. ‘적어도 십분의 일 정도는 남아 있어야 거기서 희망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깊숙이 거주하고 있는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서 심판을 취소해달라고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오십 명부터 시작하는 거죠. 오십이라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인구 밀집도에 비하면 이것은 퍼센트가 아주 낮죠. 아주 낮은 비율입니다. 50명, 그다음 45명, 40명,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경매하는 것도 아니고 점점 더 내려갑니다. “45명 손 들어보세요.” 이런 거요. “안된대. 그러면 40명까지 양보할 용의가 있습니다. 내 조카만 살릴 수 있다면.”
조카 롯이 구원받는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조카 롯을 구원하기 때문에 조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삼촌 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지금 흥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죄송합니다만 저 30명까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30명의 의인을 살리기 위해서 심판하는 것을 좀 지연시켜주시기 바랍니다. 30명 갑니다~. 아니에요?” 아, 이거 점점 가능성이 없어요. “20명 갑니다, 주여. 20명. 20명만 있다면 심판은 중지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아, 20명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지막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이 죄송하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휴, 심호흡하고, “10명은 남아있겠죠? 10명은요?”
끝났어, 끝났어. 10명도 아니래. 끝난 거야. 10명 단위로 끊어지기 때문에 10명 다음에 뭡니까? 아예 없다는 거예요. 인간들 중에서 구원받을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밝혀진 거예요.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는 겁니다. 단 한 명도.
어떤 분은 심심해서 이런 질문해요. “목사님 교회에 신자가 몇 명입니까?” 왜 신자가 있어야 돼요, 왜? 성경에는 없는데!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인자를 구원하죠. 그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간 속에 있는 인자만 쏙 빼먹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신의 인간됨을 뽑아내서 구원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쓰레기니까 장례식에 불살라 없애버리고요.
하나님의 자기 구원경로에요. 인자 됨의 구원경로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 보너스가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구원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쾌하게 명확하게 이미 결론난 지점에서 그다음부터 “천국백성 뽑기는 너희들의 의도나 너희들의 기대와 상관없는 거다. 상관없어. 일방적이야. 일방적인 내 자애로운 사랑에 의해서 되는 거야.”라고 해야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천국은 그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신천지, 구천지 그렇게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호와의 증인처럼 양복 입고 돌아다녀서 그렇게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양복 입는다고 구원받을 것 같으면 양복 열 벌도 사겠다.
자, 그럼 이 긍휼하심은 어디서 생산되는가? 인간으로 하여금 “돌아서. 너 돌아서. 너 보지 마.” 인간이 돌아서고 난 뒤에 만든 것이 긍휼입니다. 그게 출애굽기 33장에 나와요.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19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여기 은혜와 긍휼이 나옵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과 독대했던 모세가 “무슨 근거로 은혜와 긍휼이 거기서 무작정… 어떻게 만들어지죠?” “얼굴 돌려. 얼굴 돌려! 돌려. 네가 볼 쨉이 못 돼.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 긍휼이 나옵니까?” “너는 거기 관여하지 마. 관여하지 마. 너는 네 얼굴을 못 봐. 돌아서서 내 등짝만 봐. 못 봐.” 그리고 지나갈 때, “수구리(고개 숙여)!”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네가 관여하거나 개입하거나 정보를 빼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정보는 누가 아는가? 이 정보는 바로 이미 긍휼을 주고 은혜를 준 자에게만 이 정보가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명백함을 아는 사람에게만 이미 은혜와 긍휼이 전달되고 넘겨졌다는 사실이에요.
다니엘 12장 보겠습니다. 8절에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이렇게 되어 있죠.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 아, 이게 다니엘서 마지막에 나오는 다니엘의 고백입니다. “들었는데 그 내용 안에 들어있는 절차와 경로 모든 것에 대해서 저는 모르겠습니다.” 다니엘은 그냥 모르겠다고 되어 있죠. 그러나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웁니다. 몰라서 울어요.
성도란 자기한테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계시라는 책, 계시책에 그냥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라 계시책에 모든 것을 완성한 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성도입니다. 따라서 이 계시된 책이 공개가 될 때 이게 현실이 되는 거죠. 이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도 직접 요한계시록 5장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책을 보게 되는데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사람이 없더라. “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울었더니” 크게 우는 겁니다.
자기 아버지 죽었다고 우는 게 아니에요, 지금. 자기 사랑하는 사람 죽었다고 우는 게 아니고, 이미 완성이 되고 완료가 된 이 책을 펴줘야 이게 공개가 되고 그래야 현실이 되거든요.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게 현실이 되어간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도 요한은, 다니엘도 마찬가지고요, 사도 요한이나 다니엘은 자기로서의 관심은 끝났어요. 자기를 대체하는 하나님의 계시책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그 계시책을 내가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계시책 스스로 그 내용이 펼쳐져서 모든 것이 공개되는 데에 관심이 있어요.
이 계시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보죠. 책이 펴지게 되면 이 책 안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인자의 자기 구원 또는 자기 구원에 관한 경로가 나오죠. 이 책이 펴졌을 때 펴지고 난 뒤에 상황이 여러분 궁금해요? 궁금해야 돼요, 이것은. 그 궁금한 걸 제가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4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성도 안에 인자의 영, 성령이 오게 되면 관심사가 하나님이 주신 정보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내 안에 인자가 들어있어요. 그 인자가 펼쳐질 때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인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로와 절차를 self 실현하는 그런 세계를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했고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36절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게 하나님의 자기 경로에요. 자기 경로. 긍휼을 입은 사람은 거기에 말려들었고 말려들었기 때문에 관심사가 책 안에 있는 겁니다. 계시책 안에 있는 정보에 대해서, 어서 그게 공개되고 현실화되어서 내 삶이 거기에 푹 빨려 들어가도록 그걸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기는요. 자기 안에 들어있는 계신 분이 나를 활용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펼쳐진 그 현실세계와 그걸 늘 접하고 마주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접하는 데에서 오는 감사와 찬미와 감격과 황홀함이 있죠. 신기함이 있을 것이고. 어느 것 하나 주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보고 감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내가 어떤 인생사정, 어떤 인생굴곡을 겪었건 그것이 다 하나님 사랑의 파편들이고 긍휼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긍휼의 양태였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을 부러워할 일이 없죠. 어떤 사람이 성도인데 돈까지 많아. 가정까지 화목하고 애 공부도 잘해. 자기들 몸도 건강해. 자, 이렇게 되면 어때요? 그것도 사랑이겠죠, 뭐. 동질의 사랑이에요.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로마서 9장 잠시 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건 덤입니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어요. 일방적으로 주겠다는데 그걸 말릴 권세도 없고 안 받겠다 할 권리도 없고 받겠다 하는 요구도 가당치 않아요. 일방적으로 그냥 긍휼을 주시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아니요’가 두 개 들어가죠.
인간의 시대가 끝나고 인자가 이 땅에 죄인 속에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인자 스스로 자기 안에서 완성을 시킨 그 결과가 뭐냐? 긍휼하심이에요. “내가 불쌍히 여기겠다는데 다른 사람은 이의 달지 마라. 내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는데,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하고 사랑하겠다는데.”
“뭐 저 사람은 죄인이고 세리고 창기고…” “세리, 창기가 너보다 먼저 천국 간다. 세리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그 당사자는 그런 직업마저도 지금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양태로 보는데 네가 건방지게 뭐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할 게 뭐 있냐?” 영자의 전성시대가 되었든 별들의 고향이 되었든. 남한테 동정 받을 필요도 없고 남한테 기죽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요소가 끼어들지 않으니까 백퍼센트 인자의 요소만 남는 겁니다. 인자의 요소만.
그런데 성령의 장벽이 아까 뭐라고 했어요? 십자가라는 장벽이죠. 주님께서 십자가라는 장벽을 심어놓고 장벽 이전에 인간의 아이디어, 멸망과 저주 받을 생각이죠, 그 인간의 생각과 본인의 능력으로는 절대 안 됨을 분명히 하고, 심판받을 자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분명한 사랑의 토대를 제공하면서 그 사랑이 모든 죄와 속죄를 저 바다 건너에 던져버린 것처럼 다시는 죄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고 내세운 것이 바로 긍휼하심이거든요. 그 근거는 저 사람의 죄를 위해서 내가 대신 다 치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대신 다 치뤘다는 자에 대해서 누가 감히 죄 있다고 시비 거냐 이 말입니다.
뭐 짱돌 들고서 간음한 여인 붙들고 와서 죽이겠다고 달려들어? “아저씨들, 잠깐 기다려보세요. 내가 인간의 끝장을 보여줄게.”하고 볼펜인지 매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땅에 글을 썼습니다. 요한복음 8장이죠. 뭐 쓰고 있는가 하고는 전부 다 짱돌 들고 하나씩 기웃거렸는데 ‘당신이 열일곱 살 때 이런 짓 한 것. 지난 여름밤에 한 일을 내가 다 알고 있다.’ 쭉 쓰니까, 저 여자한테 던지려 했던 그 돌로 당신 맞아야 마땅하지? 그렇지?
율법에 의해서 당신이 죽어 마땅한 죄를 쫙 나열하니까 나이 많은 사람부터 왜 먼저 튀느냐? 왜 현장을 도망치느냐?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이게 적금 붓듯이 누적이 많이 되어 있어요. 딱 보고 난 뒤에 “바쁜 일이 있어가지고… 지금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가야 되겠습니다.” 그다음 나이 오십 대가 보고 “아이고, 나도 가야겠다. 가스 불 안 끄고 왔네.” 다 가고, 젊은 사람 있으니까 “안 갔나?” “아, 예. 갈게요, 갈게요.” “너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진이었지?” “아이고, 갑니다.” “공개해봐, 유튜브에?” “아, 갑니다. 간다는데.”
바보 같은 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가면 안돼요. 그렇게 가면 안 되고 들고 있던 그 돌로 자기 정수리를 찍어내려야 돼요. 그게 주님께서 원한 거예요. 자기는 의롭고 싶고, 남을 정죄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기 의를 유지시키려는 이 본색. 여기에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들어있고요.
이 세상은 전쟁터거든요. 태어나자마자 자본주의 세계에 다 집어넣잖아요. 돈 버는 전쟁에. 그 전쟁터에서 모든 인간은 다 평준화되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모든 인간 중에 의인은 없나니. 다 평준화되는 겁니다. 아니, 돈을 버는데 죄 안 짓는다? 이거는 진짜 말이야, 막걸리야. 말도 안 되죠. 돈 버는데 왜 죄를 안 짓습니까? 경쟁시대인데요. 속일 걸 속여야죠. 선착순인데 그게 왜 죄가 안 됩니까? 선착순인데요.
성경에 선착순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천사가 찾아올 때 베데스다 못가 물을 움직이잖아요. 선착순 줄 딱 서 있어요. 그러니까 38년 된 병자가 뒤늦게 그걸 발견하는데 38년 되니까 나이가 많아가지고 시력도 안 좋아. 벌써 저쪽에서는 웅성거리면서 “물 떴다!”하고 들어가는데 자기는 뒤늦게 절뚝거리고 가니 벌써 끝났죠. “끝났습니다. 오늘 제품 다 팔았습니다.” 없어요.
그 베데스다 못가 이름이 뭔 줄 압니까? 자비의 못이에요. 자비의 연못입니다. 주님께서 와서 그야말로 전라도 말로 “뭣하냐?” 여기서 뭐하냐?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서 오는 자비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병들어 있어?” “순서가 안 와서 못 나았습니다.” “내가 직접 줄게. 내가 직접 줄 테니까.” “그럼 저는 뭘 내놓습니까?” “안식일 위반을 내놔라.” 안식일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네게 정말 자비가 있다면, 네 식대로 원하지 않는 긍휼이 일방적으로 새벽탁송으로 왔다면 그다음부터는 그 긍휼 앞에서 내가 나라고 여겼던 모든 자의식을 그 사랑 안에 묻어버려야 돼요. 사랑 전부와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그걸 제가 오후 설교 때 뭐라고 했느냐? 미치되 어디에 미쳐라? 사랑에 미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오후 설교 때 우리 교인들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습니다. 예배마치고 난 뒤에 라는 팝송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안 들었을 거예요. 제가 어떤 분에게 부탁을 했는데도…. ROSE. 사랑. 인간 속에서 인간 자체를 씨앗으로 해서 인자의 장미가 피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인간을 밭으로 사용해서 복음의 씨를 뿌리면 거기에 인자라는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또다시 간곡히 이 연사는 외칩니다. 가시면서 rose라는 팝송을 들어보세요. ‘Some say love~’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사랑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죠. 자기가 불쌍히 여겨놓고 그 사랑받은 당사자인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님의 사랑과 바꿔치기해서 거기다 던져 넣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출생, 이 씨족사회의 출생에 의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
가능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했으니까. 45일이라는 이 인자의 시간을 통해서 겹쳐져서 “너 할 것 다했나? 더 할 것 없지? 더 내놓을 것 없지? 그러면 너는 지옥 가. 이제부터 내가 할 거야.” 지옥가야 마땅한 자, 화로다 망하게 된 마땅한 자에게 (구원이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아예 없는 거예요. 아예 없는 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라는 인큐베이터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자기 구원을 달성하는 거예요. 인자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인자의 증인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그래서 우리가 가는 나라는 뭐냐? 인간의 나라가 아니에요. 인자의 나라입니다. 천국 가면서 뭐 옷맵시 다듬고 적당히 예의 차리고 그렇게 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그냥 피 발라서 가는 거예요. 피 발라서. 이사야에 예언되어 있어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구스인, 흑인이 어떻게 피부를 변하게 하겠는가? 표범이 어떻게 반점을 없애겠는가? 돼, 안 돼?” “안돼요.” “안 되는 인간 자체를 내가 몰살시켜버리고 아예 하얀 양털 같은 나를 네 안에서 내가 생산해낼 거야.” 이 쓰레기 같은 네 속을 통해서 인자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온 말씀. 예수님의 자기 이야기였어요. 인간을 충분하게 선악과 따먹게 하셔서 흙이 되게 하셔서 모든 과정조차도 하나님이 자기가 주가 되는 절차의 재료로서 사용되게 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17장 22절에 보면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그 다음에 누굽니까?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인자와 사람들을 대비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요소가 모든 인간에게 다 공통적으로 들어있어요. 어느 인간치고 아담의 후손치고 인자를 죽음에 넘기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넘겨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빼지 말고요.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그런 행동하지 말고. “모든 인간은 주를 믿지 않았지만 저는 주를 믿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고요.
우리 중 예수 믿어서 구원된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까지 세팅해서 옵션으로 다 포함해서 그냥 성령으로 오시죠. 믿음까지. 성령으로 온 새벽탁송 뜯어보면 믿음, 소망, 사랑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그거가지고 뭘 하라는 게 아니고 그 은혜와 그 사랑 안에 머물라는 거예요.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머물면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처럼 자체적으로, 성령의 은사가 자체적으로 작동해요. 우리가 밧데리 넣고 이렇게 뭐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은사가 자체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사랑의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럼 사랑은 뭐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 그 사람 착하네.” 하는데 착한 게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인자가 착하죠. 인자가 선한 겁니다. 착한 정도가 아니고 완벽하게 사랑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소망을 하더라도 믿음을 하더라도 소망, 사랑, 믿음 이것에 항상 뭐가 달라붙느냐 하면 나의 소망이 달라붙고 나의 믿음이 달라붙어요. ‘나’가 안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최고의 원류(原流), 마지막은 뭐냐? 나마저 떨어지는 것. 그게 뭡니까?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뭐다? 사랑이죠. 사랑. 사랑은 본류(本流)입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요. 인자가 고생했지, 인간이 고생했겠습니까. 히브리서 2장 6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고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십니까”해서 시편 8편에서는 다윗보고 이야기한 것 같은데 히브리서 2장에서는 다윗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바로 예수님 단독, 인자되시는 분에게 이게 해당된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주어지는 듯한 그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실은 그것은 모형이었고 실체는 장차 인간으로 오신 분이 아니고 인자로 오신 분을 겨냥해서 예언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그 인자로 오신 분께 예언된 말씀은 어떤 결실과 열매를 맺어야 되겠죠. 그 열매가 뭐냐? 예수님의 한 형제가 되고 식구가 되는 겁니다. 식구, 형제란 뜻은 뭐냐? 본류를 공통으로 같이 누린다는 거예요. 9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천사보다 잠시 못하다는 것이 뭐냐 하면 죽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죽으심. 스스로 죽음이란 장벽, 저주라는 장벽을 스스로 극복하시고 인간의 생활을 청산시키시고 인자의 생활을 하게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셨고 그다음에 그것의 열매가 뭐냐? 11절에 나옵니다. 마지막이니까 11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 지라”
본류가 단 하나죠. 단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러니까 우리가 당당하게 형님이라 부르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인자에 관한 말씀이에요. 누가 예수님보고 형님이라 했는지 알아요? 김대중입니다. 죽은 김대중, 노벨평화상 받은 김대중이 예수님은 나의 형님이라 했어요. 나 정치하는데 형님이 도와준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다움이에요. 인자다움이 아니고. 인간다움은 인자의 긍휼 안에서 끽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그저 이렇게 한 식구로 받아주는 것도 어떤 권리처럼 행사하지 말고, 이것도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사랑이고 긍휼이라는 것을 그걸 받아들이면 벌써 죽기 전부터 시작 전부터 주님과의 한 가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가족이니까 어디로 가는 거예요? 씨족사회로 돌아온 거죠. 씨족사회. 하나의 가족이니까. 마태복음 12장 끝에 48절 보면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 그걸 모친과 형제가 있는 현장에서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그들이 바로 인자의 가족입니다. 인간의 가족 아니고 인자의 가족.
항상 인간으로는 끝났고 주님의 긍휼로 인해 모든 저주와 심판과 지옥을 이제는 남의 일로, 나와 상관없는 일로, 날마다 여러분 속에서 바꾸어지는 것을 평생 살아가면서 천국 가서도 평생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속에 인간이 아니라 인자 되신 분이 들어오심에 대해서 참으로 감당할 길 없는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사오니 이제는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도 사랑의 상태고 상황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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