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의 기본
고린도후서 5:15에 보면,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5:17에 보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에만 해당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로서 해석하는 성경 해석은 성경의 그 대목을 해석해도 필히 ‘나를 위한 진리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풍겨져 나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말은 곧 그가 외치는 구원의 복음은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한 복음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외치는 복음이다.
예를 들면,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전통적인 유대교 성경 해석에 정통했고 탁월했다. 하지만 거기서 모든 해석은 항상 ‘나를 위함’이 전제되는 있는 해석이었다. ‘여호와께 영광’이라든지,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이 구원해주심’,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하나님의 일하심’ 같은 모든 것이 ‘나를 위함’이라는 전제를 철거할 필요도 없이 ‘나를 위함’이라는 요건을 갖추더라도 진리 수립에 전혀 지장을 느끼지 않는 신학체제였다.
하지만 언젠가 그는 나사렛 예수님을 만났다. 그 때부터 그는 변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는 외친다 “더 이상 나를 위한 사는 삶‘은 진리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라고! 그가 구약을 대하든지 신약 시대에 살던 그가 외칠 수 있는 모든 진리와 복음에는 늘 “나를 위해 사는 삶’은 용납될 수 없게 하는 성질의 복음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위한 사는 삶’을 기대하고 예수를 말하고, 구원을 말하고, 언약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천국과 재림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고, 부활을 말하고, 은혜를 말해봤자 모두 복음의 능력이 아니다. 당연히 구원과 상관없는 혼잣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석이 ‘내가 나를 위한 사는 삶을 포기’한 데서 나올 해석인가? 그것은 그 어떤 말씀을 보아도 나를 죄인의 괴수되게 만드는 해석이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을 진정 죄인의 괴수로 보지 아니하면 결국에는 자신의 유익을 최종 계산한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보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성경 해석의 최종 귀착점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현명함을 확인하는 쪽으로 의미가 되돌아온다.
철학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다. 인생의 허무와 죽음을 강렬하게 주장하지만 결코 “나는 이래서 죄인 맞습니다”라는 소리는 죽어도 안하는 법이다. 개혁주의 신학도 마찬가지고 교회사의 모든 신학도 마찬가지다. 즉 그 어떤 신학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필수 요건으로 집어넣는 신학은 없다. 도리어 “내가 없으면 하나님 영광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발상은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나 할 발상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닐 때나 나올 진리 주장이다.
예수님을 위한 진정한 삶을 말하려면 먼저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를 살리고, 나를 구원코자 하는 신학 연구 자체가 최고수의 죄인들이나 할 짓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력으로 ‘자신을 위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인이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은 자기를 위한 삶을 포기했는가?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그야말로 성령에 의한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보고 겸하여 그 죄인의 괴수마저 구원해내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은혜만을 증거한다. 성경의 그 어느 구절을 해석해도 다음과 같이 최종 결론짓게 된다. 즉 “나는 그 말씀에 비추어볼 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서 더 이상 ‘나를 위한 삶’이 될 그 어떠한 구비조건조차 아예 박탈당한 상태이며,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되었습니다”라고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하게 된다.
이런 식의 성경해석은 참으로 ‘자기를 위한 삶’은 더 이상 자기에게 해당될 수 없음을 알게 된 자만이 수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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