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라는 칼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라는 칼을 들고 읽는 자의 머리와 마음을 정교하게 해부한다.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담겨있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진짜 예수 십자가 안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소개한다. ‘십자가 안에 있음’이 현실적으로 보여지고, 들려지고, 만져지지 않는 자들은 마치 진동 추를 바라보고 있는 듯 현기증만 느끼도록 이쪽인지 저쪽인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는 사도요한이 집요하리만큼 오직 하나의 사건에만 집중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읽는 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진행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가?”
“그렇다!”
“좋다. 그럼 형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답해보라!”
1. 당신은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빛 가운데 행한다’는 의미는 윤리적, 도덕적, 법적으로 볼 때,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자세히 조명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나의 모든 죄이다. 어두움을 낱낱이 실토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만이 빛이다. 어두움을 드러내고 고발하여 스스로 속일 수 없도록 조치하시는 것만이 빛이다. 그래서 빛이 어두움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하고 은혜주신 자만이 미쁘시고 의롭다고 인정토록 하는 강력한 힘이 바로 빛이다. 이러한 전체 상태가 빛이요, 깨끗함이다.
예수의 피로 깨끗해졌다는 말은 예수의 피가 아니라면 도저히 깨끗해 질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음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무엇인가? 예수의 피와 자신의 깨끗함 사이를 가위질 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것이 죄와 피의 전체 덩어리인 것을 모르고 아담의 선악체계에 묶여있는 깨끗함에 속아 ‘과거를 묻지 말라’면서 행위로 나가는 것이다. 가짜 빛을 조작한다. 결국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있다.
2. 당신은 형제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
이제 사도요한은 형제사랑이라는 계명을 들고 나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도 안에 ‘사랑없음’을 들추어내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면, 빛 가운데 행함을 구체화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서 마귀에게서 난 자까지 피 흘려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돈 몇 푼에 사랑 있네, 없네 타령하고 있는 성도의 사랑을 대조한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성도가 마귀에게서 난 자임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도 확고히 한다.
이러한 대치상황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계명이다. 그것도 주께 받은 계명이어야 한다. 이미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의문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계명! 형제사랑! 이것은 의문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마땅하지 않은가? (요한일서 3:16, 4:11)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러한 ‘마땅함’이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랑이 없다.
사도요한은 아담의 선악체계에 묶여있는 사랑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예초부터 없던 이질적인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다. 인간과 분리되어 있다. 별개의 세계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였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십자가 사건뿐이다.(4:10). 예수의 피만이 참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고 참 생명을 주신다.(5:20-21)
이러한 십자가 사랑의 실재성을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이 필요하다. 그 육체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 피와 물은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육체에서 사랑과 심판을 동시에 쏟아내었음을 증거한다.(5:8) 이때 이 상황의 증인으로서 성도에게 오직 십자가 사건만을 지속적으로 알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으로 성령이 비로소 등장한다.(2:20, 2:27, 4:13, 5:7)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만으로 알 수 있다. 십자가 사건만 방해한다.
사도요한은 너무도 실재적인 십자가 사랑이 성령을 통해 성도에게 날마다 터져 나오고 있음을 형제사랑의 계명이라는 활을 쏘아대면서 확인시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고(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1:10)...
3.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구별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이 형제사랑에도 분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구별해 내면 된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이 죄를 이렇게 구분하고 있는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생명이 누구의 손에 달려있는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과연 지금 성도의 생명을 지키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5:16,17)
어떤 죄가 사망에 이를 지, 이르지 않을 지를 사랑도 없는 성도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 안에서 생명을 보호받지 못한다면 악한 자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주제에 형제사랑이라는 명분아래 눈에 보이는 행위조각 열거하여 생명과 사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참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 있으므로 예수 밖은 사망이다. 사도요한은 이 경계선이 십자가에 달리신 육체로 꼿꼿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구별하려는 자체가 이미 아담의 속성임을 고발한다.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해 둔다.(5:21)
단지 십자가는 아래와 같은 분리작업을 쉼 없이 할 뿐이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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