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강-YouTube강의(공부 전도서 12:12)20241119-이 근호 목사
제489강, ‘공부’. 나이 칠십이 된 어떤 사람이 고백하기를, 자기가 결혼하기 전 젊었을 때 자기는 꿈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자기가 은행장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젊을 때 철딱서니가 없어서 나쁜 친구하고 어울리면서 부모 말 안 듣고 기분에 빠져서 기분에 휩싸여서 ‘공부 뭐 나중에 하지. 지금은 즐길 때야.’해서 뭐 원 없이 신나게 즐겼다는 거예요.
이 고백을 누가 하느냐 하면 한적한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어떤 농사꾼, 나이 칠십 된 농사꾼이 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은행장, 은행 지점장 이야기하는 거겠죠, 은행 지점장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 자기는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산골에서 농사짓는 것은 내 꿈이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그럼 내 꿈과 ‘꿈이 아니었다’라는 현실 사이에 뭐가 누락되었는가? ‘공부해야 될 시기에 공부 안했다’가 되어버려요. 공부할 시기에 공부를 안 해버리면 그 당시엔 ‘나중에 공부해야지.’ 이렇게 되지만 이 공부라는 게 뭐냐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함축해서 내가 실용성 있게 써먹기 위해서 그 정보를 내 머리에 지식으로 담는 게 공부에요.
따라서 공부라 하는 것은 옛날 그때 일어난 것을 공부하는 게 아니고, 공부라 하는 것은 오늘도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들을 매일같이 그 정보를 흡수해서 나한테 실용적이라고 느낀 것을 써먹을 수 있는 그 바탕이 바로 공부잖아요. 실용성 있는 지식 또는 기술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데 공부할 시기에 공부는 내일, 한 달 뒤, 일 년 뒤, 십년 뒤에 그때 공부할 기초가 돼요. 기초가 쌓일 시간에 기초가 안 쌓여버렸으니까 그다음부터는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짜증나는 거예요.
그러면 공부를 못할 경우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공부 잘하는 사람을 찾질 않아요. 자신이 무식하다는 수치가 드러날까 싶어서 누구를 찾아가고 누구하고 대화하고 누구하고 놀고 누구하고 전화하고 누구하고 어울리느냐? 자기와 말이 통하고 아니면 자기보다 공부를 더 안 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는 그 현장을 더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공부 안했다. 내 친구도 공부 안했다. 자, 공부는 안 해도 이 육신은 밥 내놔라, 옷 내놔라, 편안한 잠자리 내놔라, 남들처럼 고급차 타고 다닐란다 하죠. 공부 안한다고 해서 이 욕심이 싹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죠. 남 갖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하고 갖고 싶고, 남 풍성하면 나도 풍성하고 싶고.
욕심은 있는데 현실적으로 공부를 안 해서 남들로부터 돈값 할 만한 남들이 원하는 그런 고급 정보를 제시할 건덕지가 나한테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갖고 싶으면 갖고 싶고 남이 살고 싶은 대로 나도 살고 싶은데. 그럴싸해 보이니까. 공부하나 안 하나 욕망은 똑같으니까요. 더 깨끗한 환경, 더 말끔한 환경, 더 풍성하고 편리하고 모든 것이 빨리빨리 잘 돌아가는 그런 환경에 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모아야 그게 되겠어요.
그래서 공부를 못했다. 그다음에 뭐하느냐? 공부 못한 사람을 구하는 직장이 있을 거예요. 몸으로 때우는 직장. 그런데 거기에는 나처럼 공부 안한 사람들의 쪽수가 너무 많이 모여들어요. 많이 모여드니까 자기 쪽에서 많이 양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남보다 돈 적게 줘도 괜찮아요. 일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살던지, 아니면 지름길로 사기를 치든지 아니면 도박을 하든지.
사기와 도박은 다른 겁니다. 사기는 남을 속이는 것이고 도박은 운에 맡기는 게 도박이에요. 도박과 사기 둘 다 공부했냐 안 했냐가 상관없는 방식이거든요. 공부와 관계없이 순간적으로 내가 원하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처럼 느껴지는 게 사기와 도박입니다.
사기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교도소에서 죄수 되어서 범죄자가 되죠. 단순히 범죄 해서 감옥 가는 게 문제가 아니죠. 전과자가 되는 거예요. 사회에서 전과자 안 받아주죠. 점점 더 질이 떨어지는 직종으로 쓸려갈 수밖에 없죠.
그다음에 도박은 사기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사기는 내가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게 사기잖아요. 도박은 덫이에요. 남이 쳐놓은 것에 자기가 빠져서 내 의지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되는데, 도박은 들어갔다 하면 못 빠져나와요. 마약 같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자기가 너무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에 그 바보짓을 만회하고서 나오고 싶은 더 추가적인 바보생각이 또 들기 때문에 그래요. 나오면 되는데 패배하기 싫거든요.
자, 제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하고 농땡이 부린 사람 이야기를 방금 했죠. 그러면 성경은 그 사람 이야기를 아예 제쳐두고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결과가 똑같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안 가르쳐요. 공부한 만큼 행복하고 공부한 것만큼 인생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상 자체가 덫이에요. 세상 자체가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도서 12장 12절,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자, 일의 결국이 어떤 것이냐는 것은 13절, 14절에 나옵니다. 12절까지 솔로몬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너 공부 왜 열심히 했어? 왜 죽자고 열심히 한 거야?” “공부가 재밌어서 합니다.” “그게 다가 아닐 걸? 너 공부한 목적은 은근히 노리고 기대한 게 있어서잖아. 장래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내가 출세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이야기하고 그럼 많은 다른 사람의 돈이 내 쪽으로 내 지갑에 들어오고. 나는 그럼 부자 됩니다.” 그럼 제가 묻고 싶어요. “부자 돼서 뭐할 건데?” “부자 되면 좋지요.” 그런데 성경은 네 욕망, 공부할 때에 처음 공부하겠다는 그 의도가 부자가 되도 그게 스톱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부자 돼서 얼추 이 정도로 만족하면 좋겠는데 그건 인간이 아무리 공부해도 본인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공부하면서도 결코 공부로서 내 만족이나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악마가 만든 이 세상의 덫에 인간이 빠진 결과입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은 코앞에 있는 거 자기의 뜻대로 안된다고 분통내면서 하루하루 하나님 저주하며 살아가고 있고, 공부한 사람은 공부해서 막상 남보다 높은 자리에 부유한 자리에 왔는데 ‘이거 아닌데. 이게 이게 아닌데. 이게 인생 행복이 아닌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뭐냐?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면서 내가 공부 잘한 것도 소용없고 공부 못한 것은 더더구나 소용없고. 잘하나 못하나 인간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예수님의 판정 앞에. 인간은 공부한 것이 주님의 판정에 전혀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부하고 싶거든 공부하면서 내가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공부하라 할 수 없어요. 한다고 머리에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공부 못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별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분은 바로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바로 그 마음 자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