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강-YouTube강의(소원 에스더 5:3)20241203-이 근호 목사
제491강, ‘소원’.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보람이 자기 안에 있는 소원이 달성되는 데 에 있거든요. 사는 재미가요. 보통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원’이라 하는데 인간의 정신 같은 것을 파악하는 그런 세계에서는 이걸 ‘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원이라고 한다면 별로 나쁘다는 인식이 없어요. 사람은 소원이 있잖아요. 어릴 때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크리스마스인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시면 네가 뭘 갖고 싶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네 소원을 들어주신대. 어떤 거 갖고 싶어?” 할 때는 그 소원을 이야기하는 애한테 “네가 정말 마음씨가 못됐구나.” 뭐 이렇게 나무라고 그런 거 없죠.
사람이 살아가는 활기나 에너지는 소원 성취에 있다는 걸 누구나 다 압니다. 안 믿는 사람들 가게 입구에 보면 네 자로 벌건 글씨로 쓴 게 있어요. 소원성취. 벌건 테두리해서 ‘소원성취’. 절에 가도 그런 게 많죠. 염원이죠. 염원. 끊임없이 끊임없이 쓰러지지 않고 세상을 기어이 살아내는 힘은 바로 내게 소원이 생겨나고 그 소원을 달성한다는 희망이 있는 한 나는 버티고 또 버틸 수 있다는 것. 인간 마음의 생리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연구하는 데서는 이걸 뭐로 바꾼다 했죠? 욕망으로 바꾼다 했죠. 욕망으로 바뀌면 어떤 점에서 달라지느냐? 소원 비는 것은 굉장히 소박해요. ‘참 나쁜 사람이다.’ 뭐 이런 욕을 들어먹지 않을 정도로, ‘아직도 굉장히 수수하시네요.’ 뭐 이런 이야기 들을 정도로 누구나 소원이 있는데, 욕망이 되어버리면 어떤 뉘앙스가 있느냐? 남이야 울든 말든 남이야 좋든 나쁘든 나는 내 욕망달성에 환장했다, 또는 미쳐있다 이런 식으로 나쁜 해석이 가미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소원도 아니고, 성경에서는 욕망도 아니고, 성경에서는 이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더 나쁘게 이야기해요. 욕심.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책망했어요. 왜 기도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답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율법은 지킨다고 우기면서도 기도하는 모습 보니까 율법이 없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나라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나라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뭐냐? 이방나라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벌건 부적 갖다 붙이는 거 붙이는 거 비슷하게 소원성취에요. 소원성취. 그러면 이방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을 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때는 무엇을 빼야 되느냐 하면, 내 소원성취 차원에서는 일체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정신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평소에 어떤 욕심을 바탕으로 해서 행동에 나서고 일에 나서고 행위에 나서는지를 율법이 끝까지 탐정처럼 추적해나가신다는 거예요. 율법이. 교회 와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은 내 소원 따로 있고 이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 이렇게 되잖아요. 오늘날 교회가 그래요. 그런데 진짜 율법정신은 율법은 먼저 있고 ‘네가 갖고 있는 소원 다 내놔봐. 내가 하나하나 밟아줄 테니까.’ 이게 말씀의 기능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나한테는 남이 모르는 소망이 있는데 이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잘 보여야 복을 얻으니까 응답 받으니까 잘 보이는 방법은 ‘주께서 이래저래 하라고 한 율례, 법도 있으니까 그거 지켜주면 그 보상으로 내 소원하나 들어주시겠지.’ 이게 바로 이방인들, 다시 말해서 천국을 가지 못할 인간들의 태생적인 본능이다 이 말입니다.
소위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걸 아셔야 돼요. 아셔야 되는데 성경 이야기하면 주무시고 설교가 끝나는 순간 잠이 깨고. 깨서, 오늘 날 위해 뭘 기도하나. 방금 설교내용이 우리의 소원을 작살내는 내용이거든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할 때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기도한다는 것이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 기도할 때 하나님 모르는 이방나라하고 왜 그리 똑같은가? 네게 있어야 할 줄은 주께서 이미 아시느니라. 자꾸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지마라. 하기 전에 너에게 딱 맞고 꼭 필요한 것은 주께서 주신다는 겁니다. 주시는데 뭘 통해서 주시는가?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말씀 내용을 주신다는 뜻이에요. 말씀 내용을.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무엇을 구하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오잖아요. 그 말씀의 전제가 있어요. 내 원대로 내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다 들어줄게.
그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갖고 있는 뜻은 일체 묵살되고 내 뜻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너희들은 나의 손이 되고 발이 되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따로 있고 너희는 종으로서 거기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너희들이 마치 주인인 양 행사하면서 따로이 뭔가 이것만큼은… 누구 노래 가사처럼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이런 거. 임재범 노래 나오죠.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 여자만큼은 허락해주소서, 뭐 이런 식으로. 안되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의식이 바로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겁니다.
구약성경 에스더 5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날따라 유난히도 예뻐 보이는 자기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고 “왕이 이르되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아주 기분이 업됐어요, 업됐어. 갑자기 아내의 미모가 확 당겼던 모양이죠. 특히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미모에 죽고 못 사는 남자에요. 전번 와스디라는 여자도 미모 자랑하려다가 튕겨나갔잖아요. 거부당했잖아요. 에스더한테도 미모에 반해서 다 주겠다는 겁니다.
왕이 세 번씩이나 얘기할 때 에스더가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해요. 저는 나라의 반도 필요치 않습니다. 속으로 뭐라 했겠어요? ‘그런 건 네가 좋아하는 거고. 내가 좋아하는 건 차원이 달라, 인간아. 나라의 반 하는 건 네가 좋아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내 소원은 뭐냐?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택한 민족이 하나님 없는 이방민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일, 압제를 당하는 그런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면 더는 소원 없습니다.’ 이게 에스더의 소원이에요. ‘하나님 섬기는데 좀 그냥 가만두면 안돼요? 하나님 기쁘게 하는데 좀 방해하지 말고 기쁘게 영광 돌리게 놔두면 안돼요?’ 이게 바로 에스더의 소원이었어요.
그래서 잠언서 제일 마지막 대목에도 그런 게 나오죠. 31장 30절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주님의 공동체에게 칭찬받는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칭찬받는다는 겁니다.
미모 너무 가꾸지 마시고요. 뭐 타고난 미모 가릴 수는 없다만 우리의 우선순위가 내 미모 내가 갖지 말고 이 미모를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께서 진짜 원하시는 기쁨은 ‘나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 고백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