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살아있음과 있음

아빠와 함께 2024. 11. 16. 09:26

서울강의202401114a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8절부터 하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이 뭔지를 알아야 멸했다는 주님의 하신 일이 뭔지도 알겠죠. 마귀의 일이 먼저 전제되고 그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면, 마귀의 일과 예수님 사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요한일서 3장 8절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겠죠.

3장 8절, 죄 짓는 것은 마귀에게 속했다는 이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는 이 말씀. 이 말씀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서 시작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라고 했으니까 그것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봅시다.

‘죄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 이렇게 되어 있죠.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죄 짓는 자라 했습니다. 죄 짓는 자(者), 이건 인간입니다. 마귀와 인간이 관련성 있다. ‘마귀는 자기 일을 나타낼 때 인간을 통해서 나타낸다.’ 그런 뜻이죠.

그러면 이제 찾아봐야 되죠. 마귀의 일을 하는 인간을 찾아보면 된다 이 말이죠. 마귀와 관련성 있고 마귀 일을 하는 그 자. 그 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10절에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오, 여기 이제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요. 떼로 나타났다 이 말이죠. 마귀 잡으러 가자 이 말이죠. 가는데 그 마귀의 자녀들이 뭐냐 하면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마귀 일을 하고 있는 마귀에 속한 자고 그들이 뭐냐? ‘죄 짓는 자’에요. 방금 했던 이 말은 사실 이 자체만 봐서는 무슨 뜻인지 잘 몰라요. 대비가 있어야 돼요, 대비. 그러면 죄 안 짓는 자는 죄 안 짓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에요. 죄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고, 죄 안 짓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11절에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극한 대비를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이 단박에 이런 의문점이 들 거예요. ‘형제사랑 안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 그럼 갑자기 얼굴에 다크써클 싹 끼면서, 지금까지 복음 안 거 다 헛 거였어. 헛 거였어. 소용없었어. 오늘 본문을 보니까 난 때려죽여도 형제사랑을 못 하겠는데. 아, 난 끝났어. 끝났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부지런히 복음 따라왔는데 아, 여기서 끝이네요. 막 편지 보내야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 굉장한 위로가 되는 말씀이 뭐냐 하면 9절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뭐가 됐습니까? 내가 죄 짓고 싶으면 내가 죄 지을 수 있고 내가 죄 안 짓고 싶으면 죄 안 짓는다,를 하나님이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까 질문이 뭐냐? ‘목사님, 형제사랑 안하면 구원 못 받습니까?’라는 질문은, ‘내가 내 구원을 위해서 형제사랑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 내 행함으로 구원받았고, 만약에 형제를 사랑 안하면 내가 형제를 사랑 안한 것 때문에 나는 지옥 가는구나.’ 이러한 기우, 염려, 걱정 이런 것들이 막 발생될 수가 있죠.

연세가 많아도 계속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 행함에 따라서 지옥이냐 천국행이냐 결정된다는 이 의식, 생각. 그럼 이 생각이 어떻게 됩니까? 이 생각의 발생이 9절과 정면으로 안 맞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죠. 벌써 방향이 다르죠.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여기에 자신의 결정, 선택, 각오, 의지, 열심, 행위 이런 걸 막 투입시키는 거예요. 투입시켜서 ‘하나님, 내가 이 정도 투입했으면 얼추 하나님 가까이 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지가 혼자 그렇게 해놓고 또 혼자 생각하는 거예요. ‘뭐? 모자란다고요? 그러면 십일조를 덧붙이면 되겠습니까? 그게 안 된다고요? 그럼 십에 이조는요?’

자기가 자기의 법을 만들어요, 법률을. 내 행함을 살리는 쪽으로 법을 만들어요. 내가 해낼 수 있는 법을 자기가 만들어서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예요. 뭐 오징어 게임합니까? 상금 몇 백억 놓고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 겁니까?

자, 이렇게 게임하듯이 구원되는 게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되는지 그걸 알 필요가 있어요.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아주 잡아놨어요. 뭔가 현혹을 시켜놨다고요, 마귀가. 그건 바로 마귀 들린 자한테 그 모습을 찾으면 되겠죠.

특별히 또 하나님께서 친절하시게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크레파스 통에 크레파스가 쭉 들어 있잖아요. 열두 가지 색 중에 시커먼 색깔이 하나 들어가 있는 거예요. 가룟 유다. 왜 알록달록한 색깔에 시커먼 색깔이 있을까요? 가룟 유다를 마귀 들린 자로 심어놔서 그 마귀 들린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의 차이를 보게 하는 거예요. 차이를. 어떤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

가룟 유다가 마귀 들렸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가 ‘나 마귀 들렸다!’ 이런 소리했던가요? 전혀 그런 행동을 안 보였죠. 그럼 안에 마귀 들어있는 가룟 유다가 평소에 행동이나 말이나 태도에서 주님과 다른 제자들에게 뭐를 발설했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 존재에서 나온 생각을 발설한 거예요. ‘예수님, 제 생각에는요.’ 이런 거. 그건 뭐 베드로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가룟 유다는 마귀가 들렸지만 마귀의 특이한 특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에요.

“제 생각에는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갖다 허비할 게 아니고 저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호감도가 높아질 거고 예수님이 하는 하늘나라 전파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걸 이미 아시고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겼겠죠. 돈 쓰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단 말이죠. 다른 사람도 신경을 쓰는데 회계 당사자는 아니니까 가룟 유다보다는 신경을 덜 쓰고, 가룟 유다가 집중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게 나오는 겁니다. ‘살아있다’하고 ‘있다’하고 어떤 차이가 날까요? ‘살아있다’와 ‘있다’. ‘살아있다’는 ‘있다’에 대한 인간의 평가에요. 그게 ‘살아있다’에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보기에 어떤 식으로 있는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여기에 있다,가 돼요.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의 평 또는 인간의 느낌, 자의식적 감각이 돼요. 그런데 ‘있다’는 누구한테 속하는가? ‘살아있다’를 빼고 그냥 ‘있다’는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있다’를 못 느껴요. ‘살아있다’를 느끼지, ‘있다’를 못 느낍니다.

살아있는 가룟 유다가 자기 뜻대로 안 되고 하니까 살아있는 것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을 죽어있다는 것으로 자기가 개입했죠. 그 말은 뭐냐? 평소에 ‘나는 안 죽었어.’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안 죽었다. ‘나 있기는 있는데 내가 살아있는 채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관계없이 ‘거기 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보는 관점이에요. 네가 마귀에 속하든 네가 나에게 속하든 하나님의 관점은 ‘있다’에요. 하나님이 있다고 보는 것, 그 있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작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는 대상으로 그냥 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것은 내가 있음을 내가 다루겠다는 것이 살아있는 거예요.

‘아이고, 형님. 살아있네!’ 이렇게 하잖아요.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이 큰 고기 낚으면 ‘오, 형님 살아있네!’ 이렇게 하잖아요. 그때 어느 인간이 ‘살아있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있음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런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걸 굳이 구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접근하는 이유는, 인간의 있음은 살아있다는 것도 포함되지만 이미 ‘마귀에게 속한 있음’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이미 간파하시고 그냥 있음으로 접근해가는 거예요.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때 주님은 앞에 이것까지 포함시킵니다. ‘악마가’ 살아있다. 악마가 너희에게 살아있다. 모든 인간은 벌써 출생 자체가 죄 짓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있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을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 예속되어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속한 거예요.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뭐밖에 나올 게 없습니까? 죄 짓는 것밖에 나올 게 없는 겁니다.

따라서 그 증거가 뭐냐?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오셔서 이 마귀의 일을 멸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의 마귀에 속함에서 자진해서 벗어날 위인은 없습니다. ‘살아있음’, ‘악마가 살아있음’을 제거해버리고 그냥 ‘있다’만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끄집어낼 위인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형제를 사랑한다 했어요.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자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는데 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난데없이 형제가 어디서 툭 튀어나왔겠습니까, 형제가? 이 형제는 예수님께 속한 자가 예수님의 형제고 가족입니다.

“누가 내 누이고 누가 내 모친이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너희들이 바로 내 형제요, 자매고 모친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이 말은 형제의 존재성, 또는 존재는 이미 소속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예수님께 소속되어 있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지는가? 사랑에서 뭐가 빠지는가? ‘내가 살아있다’가 여기서 빠지고, 존재(성)와 존재의 만남이 바로 사랑이 되는 거예요.

너 한 달 수입 얼마야? 너 공부 잘해? 이런 조건을 따지는 게 아니고, 거기 있네. 거기 있음. “어? 거기 있네.” “아, 당신도 거기 있네. 그럼 당신 보기에 나는 어때?” “너도 거기 있네.” 이렇게 될 때, 둘 다 뭐가 빠졌어요? 내가 빠졌죠. 내가 빠질 때 그 관계를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빠질 때. 있음 자체를 인정해주는 게 사랑이 되는 거예요.

내가 있네. 어? 주님이 거기 계시네. 임재죠. 주님이 거기 계시네. 그럼 그 주님과 나 사이 관계가 뭡니까? 사랑이 되는 거예요. 있음 자체가 서로 공유되는 관계. 공유된 공간을 마련할 때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요모조모 따질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냐하면 따진다는 것은 내가 남을 사랑할 때 따지는 거예요, 내가. 내가 누락이 안 될 때, 내가 제거가 안 된 상태에서는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그 사람을 상대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평가하게 되는 거예요. 저 사람 사랑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그러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은 누구 사랑이에요? 살아있는 나에게서 나온 사랑이 그 사람한테 가겠죠. 그게 바로 마귀에 속한 죄 짓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 지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거기에 합류를 했죠. 주님께서 합류했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려야 되는데, 모든 인간이 옹기종기 전부다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마귀에게 속했는데 여기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 뛰어들었죠. 뛰어들었으니까 색깔을 약간 달리해서 칠해보겠습니다.

뛰어드시고 그다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뛰어드시고 그다음 빠져버렸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빠져버렸죠. 그럼 여기 뭐가 생겼어요? 예수님(이 뛰어들었던) 자리에 빈 공간이 생겼죠. 빈 공간. 마귀 세계에서 갑자기 마귀의 권세를 유일하게 이기고 탈출에 성공한 빈 공간이 생긴단 말이죠.

그동안 인간들이 마귀에 속해서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식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나는 뭘 해야 구원받느냐 이런 식으로 살아있다. 그러면 이 빈 공간은 뭐가 됩니까? 마귀에 속하지 않는 분이 들어왔다 남긴 이 자리는 ‘살아있다’가 아니라 그냥 ‘있다’가 돼요. 그냥 있다.

내가 ‘살아있다’에서 ‘있다’로 갈 때, 이게 갈 수가 없어요. 살아있다⇏있다. 왜냐하면 마귀가 철벽수비를 하기 때문에. 마귀는 김민재에요. 철벽수비를 하기 때문에 ‘있다’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마귀의 권세를 이긴 자만이 ‘살아있다’에서 그냥 ‘있다’가 되는 거예요. 자꾸 ‘살아있다’가 되면 내가 나를 평하게 돼요. 내가 나를. 나는 살아있는데 어떻게 살아있을까?

주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무가치’한 겁니다. 무가치하거든요. 지금 성경말씀은 사랑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두 개를 연결시켜봅시다. ‘어떻게 무가치한 것 속에서 사랑이 나오는가?’ 이거 뭐 해결책 있어요? 가치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인간들끼리 만나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요? 사랑이 나온다고요? 무슨 사랑이 나옵니까? 사랑은 얼마나 고귀한데 가치도 없는 것끼리 무슨 사랑이 나와요.

그래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 대신에 인간이 도입한 것은 뭐냐 하면 육적인 사랑이에요. 육적인 사랑이 나와요.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얘기하는 것은 무슨 사랑입니까? 성령에 의한 영적인 사랑이 나오죠. 육적인 사랑에서 영적인 사랑으로 건너갈 수가 없다니까요, 이게. 육적인 사랑⇏영적인 사랑.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 율법사가 예수님한테 “성경을 압축하면 그거 맞습니까?” “그래, 맞다. 너 그렇게 살면 되잖아.” 그 율법사가 하는 말이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 뭐 어떻다고?” “이웃이 누굽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이웃도 모르면서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뭔가 해보려고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웃이 누굽니까? 이웃은 누구냐 하면 자기가 누락된 사람이에요. 자기가. ‘저기 강도만난 사람 있네?’ 그다음 ‘나 있네?’ 나 살아있음이 빠지고 있음과 있음이 연결될 때 그게 사랑이라 이 말이죠.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만난 사람 도와줄 때, ‘무엇을 노리고 도와줬습니까? 왜 도와줬습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그 사마리아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돼요. 질문하는 사람 자체가 자기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어떤 사랑을 베풀고 어떻게 행하면 나의 가치가 지금보다 더 강화되고 내 사랑이 커지겠는가? 더 풍성해지겠는가?’ 이 생각하겠죠. 그럼 강도만난 사마리아 사람은 그거 노리고 했습니까? ‘저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겠지.’ 이거 노리고 했습니까? 그런 거 없죠.

강도만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강도만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있음이에요. 강도만난 사람이 있음 같이 강도를 만나든 안 만나든 그냥 있고 자기 자신도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있어요. 그냥 있다고요.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아버지에 의해서 여기 인간세계에 그냥 와계신 거예요.

너희들도 있는데 너희들이 예수님께 올 수가 없어요. 왜? 마귀에게 속해서 살아있다고 우기거든요. 살아있다는 말은, 있음 앞에 살았다는 말을 붙였다는 건 뭐냐?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가치 있게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가 벌써 단정 짓고 있는 거거든요.

“형님, 살아있네~” 이거 뭡니까? 욕입니까? 격려하는 거잖아요. 대단하십니다! 이런 거란 말이죠. “형님, 있네요.” “이거 뭐… 방금 그거 무슨 뜻이야? 나 있잖아, 그래. 뭐 가치 있게 있다는 말이야, 가치 없게 있다는 말이야? 그거 분명히 해보라.” “형님, 가치를 논할 입장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는 마귀에 속했든지 하나님께 속했든지 둘 중 하나지, 그 자체로서 내놓을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기는 있는데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서 그때 비로소 가치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겠죠.

주님께서 인간세계에 왔어요. 마귀에 다 속한 인간입니다. 열두 제자 다 마찬가지고요. 마귀로부터 빠지지를 못해요. 벗어나질 못합니다. 주님께서 벗어나서 남긴 곳이 이 빈 자리죠. 이 빈 자리에 만약 누가 들어오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비로소 이 능력의 자리, 예수님이 빠져나갔던 그 자리에 누가 들어온다면 이 사람도? 그다음 차례는~? 이 사람이겠죠. 예수님 먼저 빠지고, 그다음 차례는 여기 들어가면 또 빠지고, 다른 사람 빠지면 또 다른 사람 들어가서 빠지고. 그래서 열한 제자가 그런 식으로 다 구원받는 거죠. 가룟 유다는? 이 안(빈 자리)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한번 봅시다. 13장 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그다음 뭡니까? “다는 아니다” 열두 제자를 앞에 두고 깨끗하다 해서 마치 전부가 깨끗한 것처럼 이야기하시는데 뒤에 단서를 붙이죠. 다는 아니거든.

다는 아니라는 이 말을 잘 들어보세요. 잘 들어보셔야 돼요. 지금 예수님께서 발 씻어주러 먼저 왔잖아요. 그럼 예수님께서 발 씻기시는 행위가 없었더라면 열두 제자 몽땅 다 그냥 더럽죠. 무가치한 거예요. 그냥 더러운 거예요. 깨끗함이란 열두 제자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사항 없습니다. 다 깨끗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으로써 주께서 앞으로 하실 일이 택한 자 너희들 몽땅 다 깨끗하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깨끗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다는 아니라는 말은 여기서 갑자기 염색이 잘못 돼서 얼룩 덜룩이 생긴 거죠. 옷에 염색을 해야 되는데 “염색이 잘 됐나?” “잘 됐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이거 무슨 말입니까? 죄 씻음이라는 염색약이 안 묻은 게 남아있음으로써 확연하게 그 차이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 차이를.

그 차이는 가룟 유다가 앞으로 행할 일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아주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탄이 가룟 유다를 다루게 할 때, 주님께서 “네 할 일 해야지.” 가룟 유다보고, 마귀죠, 네 할 일 해야지. 그 차이를 극단으로 가게 함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의 가치가 확 드러나요. 가치가.

이 세상은 주님 보기에 가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유독 예수님이 오시고 빠짐으로써 비로소 없던 가치가 새롭게 발생되는 거예요. 없던 가치가 새롭게 발생되는 것을 요한복음 12장 23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온다. 아, 이거 신비롭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갑자기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이르느냐? 요한복음 12장 20절부터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빌립은 준제자, 준사도입니다. 빌립은 나중에 집사 된 사람이죠. 일곱 집사.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누굽니까? 예수님의 제자에 속하죠.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헬라인이 이방인이거든요. 갑자기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자고 연락 왔을 때 예수님의 반응이 뭐냐? 드디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는 거예요.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유대사회에서 이방인들은 구원받질 못합니다. 왜? 더럽기 때문에. 그럼 유대사회에서 깨끗한 자는 누굽니까? 육신에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요.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양보 못 하는 두 가지의 원칙이 있어요.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육신의 할례를 행해야 돼요.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 백성 아니라 하는 것은 에스겔, 또 그 앞에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사야, 에스겔. 특히 에스겔에 많이 나오고요.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리고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독특한 시간관으로서 유대인들만 이해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돌아오는 일주일마다 한 번씩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건 뭐냐? 모든 시간의 완성은 바로 유대인,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할례를 받았던 우리들에게 집중해서 시간이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모든 시간의 시작과 끝이 우리, 할례 받은 이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만 구원받는데요, 아브라함 자손이냐 아니냐는 뭐로 구분되는가? 창세기 17장에도 나오죠. 하나님의 할례가 없으면 계약 자체가 성립이 안 된 걸로 간주해요. 계약 자체가. 여러분 차표를 예매할 때 실컷 해놓고 나중에 구매 버튼 안 누르면 어떻게 돼요? 예약 안 된 거죠. 최종적인 것인 할례를 행하고 모든 이 세상 일어나는 일은 내 몸에 할례행한 이것과 관련되어서 일어나고 있다. 왜? 요지부동 하나님의 계약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창세기 한번 봅시다. 17장 9절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 조항이 변경됩니까? 아니,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 이게 변경된다고 이게 무효 된다고 그들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안 했겠죠.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한 거니까요. 지상의 인간에게 천상이 찾아와서 맺은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거예요. 그들이 원한 것도 아니고 제시한 언약이 뭐냐? 할례죠.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이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자기 아들 할례 안 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다지고 다지면서 내 할례 언약 안 잊어버렸지? 그치?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져야 될 건 뭐냐? 간단하죠. 자기 몸에, 우리 가장의 몸에 뭐만 유지하면 돼요? 할례 행하고 아들 낳으면 하나님 뜻에 따라서 할례 행하면 구원 끝. 구원 끝난 거예요.

유월절에 하나님이 당부한 것은 어린 양의 피도 있지만 조건이 있었어요. 할례를 행하고 어린 양의 피를 발라라. 할례 행하고. 심지어 할례 행하고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자는 언약의 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할례 행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건 소용없는 거죠.

유월절 양의 피, 인간 외부의 사건이죠, 외부의 사건이 인간 속에 새겨진 할례, 내부의 사건과 연관 지어서 양쪽 다 두 개 있어줘야 언약이 완성되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구원을 성사시킨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 양보하고 싶어도 뭐 인간 마음대로 양보 못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유대인들은 꿈쩍도 안 한 이유가 뭡니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라 해서 안식일 지키잖아요. 안식일 기억하고. 아니, 기억하죠. 오늘은 무슨 요일? 금요일. 내일은 무슨 날? 안식일. 옳지. 그거 지키고, 또 하나는 뭡니까? 할례를 행하고.

그럼 골로새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설명할 때 뭐를 건드렸습니까? 절기, 안식일 건드렸고요. 그거 다 끝났다는 거. 그다음에 또 뭘 건드렸어요? 몸에 할례 하는 거. 로마서 2장 29절.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몸에 행하는 할례 그걸로 되나? 몸의 할례를 고수하는 것은 애써 십자가를 믿기 싫어서 그 짓하고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 것하고 바꿔라 이 말입니다. 할례 행하는 것하고. 이게 바꿔집니까? 뭘 믿고 바꿔요? 그걸 어떻게 바꿔요? 너희들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은 할례를 통해서 충분히 거룩하다는 것이 보장되었다는 이 사실을 본인들은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할례를 행하든지 안식일을 지키든지, 행함이잖아요, 행함은 내가 ‘있음’에서 오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살아있음’에서 오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러니까 너는 마음의 할례를 못 한다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는 칼날로 인하여 내 자아 자체가 그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 자체가.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은 살아있음이 누락된 거예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는 거. 그래서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를 행동으로 옮기면 이런 고백이 됩니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에요. 그러면 백부장 그 사람은 살아있는 거예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살아있으면 자아가 살아있으면, 자아가 가만있지 않고 자기 쪽에서 주님께로 나아가려고 노력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어떤 지시를 따라도 그건 주님의 지시가 아니고 내가 나한테 지시를 내린 게 돼요. “사랑하라.” “뭐 사랑하지.” 그게 사랑이 됩니까? 사랑이 안 되는데요.

아까 우리가 한 게 요한복음 13장이었죠. 다는 아니라 했죠. 그러면 이제 가룟 유다는 빠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빠지고 나머지 열한 제자가 있죠. 그 열한 제자,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14장 2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존재하시다가 부재하시다가 그다음에 임재가 되는 거예요. 재(在)가 세 개 있는데 앞의 글자가 다르죠.

주께서 존재하시다가. 어떻게? 제자들의 있음과 예수님 있음이 같이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만 있음에서 없음이 돼요. 영광을 받기 위해서 제자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없는데 다시 오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럼 뭡니까? 임재가 돼요, 임재.

옛날 존재하는 방식으로 계신 게 아니고요. 나 있음, 있음이 아니라 나의 있음을 본격적으로 예속시키고 다루시는 분으로 우리가 어디 가든지, 미국 가든지 필리핀 가든지 어디 가든지 간에 같이 있는 임재로 오시는 거예요. 임재로. 부재를 거쳐서 임재가 된다니까요. 존재→부재→임재.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있다’가 되면 이 자체가 마귀의 임재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있다는 식으로 미국을 가나 러시아를 가나 우크라이나를 가나 거기는 항상 마귀와 더불어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육적인 사랑이에요. 자기 자신의 자아가 누락되지 않는 사랑이에요. 자기가 빠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간세계에 살아있음에서 빠졌어요. 빠질 때 그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 유대인들 보기에 자기는 안식일 지키고 할례 지키잖아요. 그럼 안식일 없고 할례 없는 사람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백 프로 어디 갑니까? 지옥 가죠. 저주 받죠. 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으니까. 모든 율법의 완성은 할례와 안식일이거든요. 할례 받은 자가 지키는 안식일, 이러면 하나가 되죠. 할례 받은 입장에서 지키는 안식일, 이게 율법의 완성이라면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죠. 율법이 없다는 말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없어요. 언약 밖이고 축복의 밖에 있어요.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헬라 사람이 예수님 뵙고자 왔을 때 바로 이 자리, 유대인들은 안 가는데 갈 수 없는 저주받은 이방인들이 이 자리를 채울 때, 비로소 예수님이 임재하는 기능이 발휘되는 그 영광으로 주님이 드디어 영광 받을 때이고 그게 하나님 뜻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나갔죠. 나갔는데 낮이었어요, 밤이었어요? 밤이죠(“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나가고 난 뒤에 아까 이방인 경우와 똑같은 경우죠.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가룟 유다가 할 일이 예수님 존재를 이 세상에서 팔아먹어 죽여 없애는 그 기능이죠. 마귀가 그 기능을 해요. “아저씨, 좀 나가주세요. 여긴 아저씨 낄 자리가 아니에요.”하고 죽여 버렸는데, 예수님이 일단 들어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깥으로 나가든 말든 예수님의 자리가 마련된 거예요. 우리 인간들끼리, 마귀에 속한 인간들 끼리끼리의 그 영역에 예수님 본인이 다녀가셨다는 그 자리가 발생된다고요. 그 자리가 사랑의 자리에요. 그게 살아있음이 아니고 있음의 자리에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의 그냥 있음을 보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우리의 아무것도 보지 않아요. 강도를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찾아오시면 그걸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자, 마지막에 이거 질문하고 첫째 시간 끝내봅시다. 우리 모임에서는 뻔한 질문이지만 오랜만에 오신 집사님이 한번 답변해볼까요? 둘 중 어느 게 맞는가? 1.남을 공격해야 내가 산다. 2.남에게 공격받아야 내가 산다. 어느 게 맞습니까? 답변하기 민망하십니까? 어느 쪽이에요?

2번이 맞죠. 남한테 공격받아야 돼요. 왜? 예수님이 영광 받은 방법은 공격을 받은 방법이에요, 공격을. 그런데 1번은 뭐냐? 마귀가 형성한 이 공간에서는 남이 죽지 아니하면 내가 살 길이 없어요. 내가 패 죽여 버려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돈을 번다는 것은 사기 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갖은 엄살을 다 떨어야 약간의 수입이라도 추가됩니다. 그냥 기계적으로 하는 것은 예상한 돈만 나오지만 여기서 아주 동정어린 모션을 취해야 돼요. ‘아휴, 요새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갖은 엄살을 다 떨어야 푼돈이라도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엄살을 교인들이 누구한테 합니까? 주님한테 해대죠. 그럼 주님의 답변은 뭡니까? “그냥 죽어, 인간아. 엄살떨지 말고. 나도 죽었어. 네가 뭔데? 네가 통뼈도 아니고. 내가 죽었는데 너 무슨 통뼈야? 너는 왜 안 죽어야 돼? 나 공격받아 죽었어. 너도 공격받아 죽어.” 10분 쉽시다. 더 민망하기 전에.

 

 

서울강의202401114b 요한일서 3장 8절(살아있음과 있음)-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자아는 상대와 결합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아 자체가 남과의 통합에 최대 장애물이 돼요.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줬느냐? 회계하는 거, 계산하는 거, 장부 정리하는 거. 이것이 자아 속에 이미 들어있는 이유는 자아형성과정에서 나한테 손해되는 것은 멀리하고 이익 되는 것만 누적되어서 자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저 사람 만나서 나한테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를 늘 재죠.

그래서 통합이 안 된다니까요. 너는 나의 쫄따구가 될지언정… ‘쫄따구 될 용의 있거든 나와 같이 일해보자.’ 이런 식이지, ‘내가 네 속에 들어갈게.’ 이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했을 때는 사실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은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하여튼 3장 16절이 유명해. 요한복음도 그렇지만 요한일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본문만 등장하게 되면 그다음 우려 섞인 걱정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형제를 사랑하되 목숨 바치기까지 사랑 안하면 그럼 우리는 구원 못 받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구원 못 받죠. 왜? 원래부터 구원이 안 되니까. 사랑하나 안하나 원래부터 구원이 안돼요.

우리 문제가요. 악마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문제는,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른다.’ 이게 문제에요. ‘어이!’라든지 이름을 부른다든지 ‘아빠!’라 부른다든지 타인에 대해서 호칭을 하는 거예요. 호칭을 하는 이유는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필연적으로 간주하고 호칭을 하기 때문이에요. ‘이름을 부르는 나는 여기 살아있다.’ 이걸 전제로 해서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이름을 왜 부릅니까? 그 타인이 내가 여기 확고히 있는 ‘내 살아있음에 알아서 합류하라’ 이런 뜻이거든요. 합류하라는 거예요. “여보, 나 지금 빨래 돌리느라 바쁜데 설거지 좀 해줘.”할 때, 방금 뭘 불렀죠? ‘여보’를 불렀죠. 여보. 이름 왜 불러요? 호칭을 왜 합니까? ‘여보’ 하든지 ‘오빠’ 하든지. 집에 오빠가 왜 그리 많은지… 그걸 왜 불러요?

당신이 당신 일 중지하고 내 일에 합류하라 이 말 아닙니까. 그래, 합류하면, 합류해서 뭐? 얻을 게 뭔데요? 그러면 살림살이 나아진다는 거예요. 빠른 시간 내에 빨래, 설거지 다 하니까. 살림살이 나아지면 누가 이득인데? 우리가 이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한다고 남편 변비 걸렸는데?

이게 이득이라는 말은… 이득이라고 설정되어 있는 그 조건, 그 요소는 아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자기 세계관이에요. 자기 세계관을 규모 있게 꾸리는 데에 있어서 늘 설계를 생각하는 거예요. 설계, 프로젝트를 생각한다고요.

무심코 보니까 남편이 TV보고 있다 이 말이죠. TV보는데 무슨 TV보느냐 하면 여자 연예인 나오는 프로보고 있는 거예요. 수요일에 한다는데. “여보, 설거지 해줄 수 있어?” “나 지금 TV봐야 돼.” 이렇게 되게 되면 살아있는 아내는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오죠. 짜증이 올라온다고요. 그럼 자기가 했던 계획에 차질이 일어났죠.

그래서 2.공격받지 아니하면 인간은 사랑을 못 느낀다. 공격받지 않으면 인간은 사랑을 못 느끼는 겁니다. 지독한 자기사랑에 준해서 외부의 타인들이 내 계획에 따라 움직여줄 때 ‘내 뜻대로 당신이 해주면 나는 맛있는 된장찌개를 해줄게.’라는 보상을 이렇게 내세우는데, 이 모든 잘못이 뭐냐 하면 내 존재(성) 안에 ‘나’라는 요소가 들어있음을 티내는 거예요.

육신은 그냥 있는 거예요. 있는데 그 안에 ‘나’라는 요소가 그 육신을 점유하고 있는 거예요. 돈도 안 내고. 점유하고 있으니까 이 요소가 말썽이 되어가지고 사랑이라는 건 순 거짓말이고 일방적으로 주변을 내 이름으로 통치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통치를 시도하려는 이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했던 그 버릇을 그대로 복제해서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을 자기 똘마니로 삼겠다는 그 심보에요. ‘하나님 저 사랑하죠? 사랑하면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이거 무슨 깡패도 아니고요.

그래서 제가 아까 세 자로 된 단어 이야기했죠. 뭡니까? ‘무가치’. 이걸 몰라요. 악마에 속한 자체가 가치가 없어요. 가치가 있어서 구원해주는 게 아닙니다. 가치 없는 자를 구원해요. 가치 없는 자를. 가치 없는 자를 구원하니까 이걸 기쁜 소식, 복음이라 하는 거예요.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왜 그런 이야기합니까? 자기 자신을 뭐로 봐요? 무가치한 걸로 보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봐요? 무가치하게 본 거예요.

어떤 마을에 죄인으로 평가받는 여자가 향유를 팍 깨는 게 뭡니까? 내가 향수라는 걸 소유하는 자체가 남들 보기에 자아의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딴 짓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알고, 주님의 가치와 자기 가치를 비교해서 자기 가치를 주님 앞에 무가치한 존재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여자보고 뭐라고 합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 “죄 사함이 많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

사랑이란 단어를 이야기해요. 내가 존재하는 것은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고 그게 끝이라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살아있음, 임재하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에요. 내가 이 땅에 있어서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았어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아라는 요소를 누락시키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그걸 살찌우길 원했던 겁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여, 선생님이여. 어떤 율법을 지켜야 율법을 다 지켰다 할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누굴 위한 율법이에요? 본인 구원받기 위한 율법으로 전제를 깔고 하는 거예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뭘 지켜야 내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싸가지하고는, 정말. 영생은 못 얻어요. 못 얻게 되어있는 게 영생, 생명나무에요. 그런데 율법 줬으니까 율법 따라가게 되면 율법 지키게 되면 영생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 부자 청년은. 돈은 많은지 모르지만 청년이잖아요, 청년. 시건머리 없다 이 말이죠. 차라리 ‘솔로’나 나가라.

길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은 없어요. ‘나는 이렇다’. 모든 인간의 자아가 이런 구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다. 내가 내세울 것은, 내가 보여줄 것은 이렇다. 나 이런 식으로 산다.’ 여기 ‘나’라는 이 요소, 원소가 그대로 살아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해서는 마귀의 밥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작전을 하느냐? 일단 주님께서는 이방인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했어요. 아, 의미심장하죠. 이방인의 고을로 가지 마라. 나는 이스라엘에게만 간다. 내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그러니까 선교, 전도 외치는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상당히 당황스러워 해요. 실제로 제가 총신 다닐 때 차영배 교수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선교특강을 했을 때 특강 다하고 질문하라 했어요. 내가 질문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없는데, 질문을 한 것 같기도 해요. 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 5-6절,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방금 이 말씀 나오는데 이 말씀은 지금 교수님 특강, 그때 한 50분 특강했나, 특강하고 내용이 안 맞네요.”라고 질문했어요. 제가 총신 때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교수가 답변을 못했어요. “빨리 끝냅시다.”

이방인들을 배제한 전도를 주께서는 지시했는데 왜 교수님은 이방인에게 전도가 된다고 이야기했는가? 그 교수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쪽수 채우는 것 그게 하늘나라 확장이라고 경솔하게 생각해서 그래요.

전도는 주님만 하십니다.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일을 복제해서 자기가 택한 존재에다가 하나님의 예수님 있음을 집어넣는 게 전도에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죄인 속에 있다가 빠져나왔기 때문에. 일반 악마의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존재는 결합이 안돼요. 연합이 안돼요. 부부는 한 몸이라 하지만 한 몸 될 수가 없어요. 헤어져도 이혼이고 같이 있어도 이혼이에요, 그거는. 그러니까 결혼을 하시라고요. 어차피 이혼인데 못할 거 뭐 있어요.

존재와 존재가 연합이 안되고 결합이 안돼요. 안되는데 유일하게 되는 경우가 뭐냐? 이 세상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경우에요. 악마의 일을 멸하신 분이 여전히 악마 속에 있는 인간에게 와서 예수님 자신의 존재와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조건은 뭐냐? 그 인간의 자아를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게 아니고 그냥 있게 만들어요.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내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이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거든요. 고린도전서 6장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냐? 그 근거가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그냥 외치는 게 아니고 근거가 있단 말이죠. 근거가 뭐냐 하면 6장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랬잖아요. 값 주고 사신 거예요, 값 주고.

그럼 그 전에 인간이 악마 속에 들어있어서 못 빠져나갔던 이유가 값을 치를 가치 있는 값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무가치를 가치로 바꿀 수 있는, 개입될 가치 있는 것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악마한테 무작정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오늘 본문을 위해서 요한복음 14장을 봐야 돼요. 아까 우리가 본 것이 14장 28절이죠.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존재에서 부재, 부재에서 어떻게 된다 했어요? 존재에서 부재, 부재에서 존재가 안돼요. 임재가 돼요, 임재.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어디 가든지 같이 있는 거예요.

처음에 존재가 될 때는 인간들이 겪는 시공간의 한계를 같은 존재로 오신 예수님도 같이 겪었어요. 같이 시공간의 한계를 가졌던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끔 뭐 물 위를 걷고 했지만, 늘 ‘너희들은 여기서 걸어 온나. 난 구름타고 갈래.’ 뭐 이런 거 없었거든요.

항상 인간이 가진 존재의 시공간적 한계를 주님도 대부분은 같이 겪으면서 했고, 부재가 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임재 할 때는 시공간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주어집니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주님, 그게 바로 성령이죠. 성령이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를 성사시킵니다. 그 상태를.

그런데 우리가 봐야 될 게 뭐냐 하면 14장 18절, 19절이에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 고아 될 거야’란 말이에요, 그게. 너희 고아 될 거야. 그럼 한번 이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고아입니까, 고아 아닙니까? 그걸 고아라 하지 않고 세대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혼자 사는데 뭐 고아라는 말을 하느냐? 그런데 어느 날 소식도 몰랐던 아버지가 수소문해서 찾아왔어요. 보통 소식 모르던 아버지가 찾아올 때는 전부다 아버지가 병들었거나 돈이 궁할 때 성공한 자식한테 와서 돈 뜯어먹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달리합시다. 그게 세상이지만 이건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니까요.

아버지가 큰 재벌 되어서 뒤늦게 찾아와서 굉장히 미안하다는 식으로, “네가 모르게 네 앞으로 내가 너한테 유산을 76억 남겨 놨다. 그것도 모자라지만. 뭐 더 필요하면 더 줄까?” 이런 식으로 왔단 말이죠. “그래서 네가 아들이라 하려면 내가 며칠 간 같이 살아야 된다. 며칠 살다가 내가 미국에서 사업하고 뛰기 때문에 바쁘니까 내가 또 미국 가야돼. 그렇지만 널 고아같이 남겨두지 않겠다.” 이게 뭔 뜻이에요?

나 혼자 살던 아파트에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서 네 앞으로 유산 76억 있다 해놓고는 다시 떠나면서 고아같이 너를 두지 않겠다는 말은, 그 전부터 비록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그게 ‘선택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는 마귀를 선택했으니까 빼버리고 나머지 열한 제자는 내가 선택했다는 거예요.

내가 선택했다는 그 약속에서, 그건 너의 요소가 가미된 선택이 아니고 임의로, 다시 말해서 내 육신 안에 나가 살았다는 이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산에 넣지 않고 임의로, 그냥 우연으로, 그냥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방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거예요.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이 제자들이 이 말씀을 그 당시에 이해했겠어요, 이해 못했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봤으니까. 메시야로 보더라도 스승, 랍비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메시야로 봤단 말이죠. 랍비가 뭐냐? 위대한 스승. 내가 추종해야 될 분이죠. 따르면 된다.

자, 따를 때 베드로는 자기가 그냥 있습니까, 살아있는 겁니까? 살아있죠. 그 점을 한번 보잔 말이죠. 여러분들이 좀 복잡하더라도. 오늘 좀 복잡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새 계명이 왔습니다. 이 말씀 딱 들으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한다고요? ‘그럼 사랑 안하면 우리 구원 못 받습니까?’ 생각이 딱 들죠. 든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있는 게 아니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니까요. 그다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입각해서 그다음 36절에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그 계명을 주시고 우리와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지금 베드로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 새 계명을 주시면서 주님은 자꾸 제자들 곁을 떠나고자 한다 이 말이죠. 아니, 계명을 주시면 주시는 거지, 왜 굳이 필수적으로 계명 줬다는 것 때문에 반드시 떠나야 되는가. 그 이유가 베드로의 머리에서는 조화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업 크게 벌여 재벌 되어가지고 내 몫으로 76억을 줬다면 “그럼 아버지 나하고 같이 사시죠.” “아니야, 떠나야 돼.” “왜? 왜 떠나야 되지?” “그런데 걱정하지 마.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 “아버지, 저 원래 고아에요. 아버지 없었어요.”

아버지도 없는데 뒤늦게 아버지라고 찾아와서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고 하면, “아버지, 그러지 말고 새 계명 주셨으니 같이 삽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네, 서로 사랑할 테니까 떠나지 마세요.” 이럴 수도 있는데 사랑주고 “사랑 줬다. 이제 떠난다.” 이게 뭐냐?

그 새 계명은 누가 다시 와야 새 계명이 유효하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다시 와야 새 계명이 유효하다는 말이에요. 지금 기존 계명도 못 지키는 주제에 거기다 추가해서 새 계명 줘버리면, 있는 계명 다 지켜야 되고 거기다 또 새 계명 사랑까지 줘버리면 제자들이 감당 못합니다.

따라서 떠난다는 것, 너희와 헤어진다는 것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 당시에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계명도 좋지만 같이 있읍시다. 주님 가신다면 제가 따라 붙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이제 모든 퍼즐이 다 풀렸네요. 현재 네 존재는 나(예수님) 존재와 연합될 수 없다. 네 존재가 그런 수준밖에 안 되는 걸 이제 알았나, 이런 뜻이겠죠.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랍비여” 호칭했죠? 호칭 부르지 마. 호칭 부르지 마. “랍비여, 저는 랍비를 사랑합니다.” “그 소리 하지마라.”

그게 13장 38절이에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네가 관계없는 자로 네 입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너는 너와 관계있는 사람이다. 네 마음에 드는 예수 상, 이미지를 유지하는 한 진짜 예수는 네 이미지하고 전혀 다른 존재다. 전혀 다른 존재에요.

그러니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한다. 어제 수요 설교에 의하면 이게 얼마나 실용적입니까? 하나님의 실용성이에요.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이에요, 실제로. 닭까지 거론하시는 모양이에요. 닭 우는 것까지.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한 번, 두 번, 세 번. 꼬끼오~

얼마나 정확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해요. 여기 매직 있잖아요. 몇 바퀴 돌릴까요?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에잇, 열 바퀴 돌아라. 이런 것 하나까지라도 주께선 이미 주님의 계획 안에 다 들어있는 거죠.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이 말은 현재 내 아버지 집에 너희들이 거할 곳이 1도 없다.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은 지금 오해하기를 살아있는 내가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살아있는 나를 주님이 구원해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죽여서 구원하지, 살아있는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에서 살아있음을 빼버리고 그럼 존재만 있죠. 그 존재가 (예수님) 자신의 살아있음, 마귀로부터 벗어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있음과 결합이 될 때 우리는 아버지 집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 합류된 것이 요한복음 14장 20절,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멘.

이 계획이 제자들이 원했던 계획입니까, 예수님의 계획입니까? 예수님의 계획이죠. 제자들은 이걸 원하지 않았어요.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상도 못했어요. 주님은 우리의 예상 요소를 빼버렸으니까. 우리가 뭘 예상한 줄 아시고 그걸 피해버렸으니까. 그래야 우리의 자아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통보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계획하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전혀 하늘나라에 가치 없는 것들이에요. 하늘나라에 가치 없는데 누구한테 가치 있어요? 마귀한테는 가치 있겠죠. 마귀한테는. 마귀한테는 가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자기의 가치를 북돋우고 그걸 증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남을 부르죠. 뭐라고? 여보. 또 뭐 일 시키려고. 여보.

내가 남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을 부르면서, 부른다는 말은 부린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필요한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 부르지만, 이건 절대로 임의적도 아니고 우연적도 아니고,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절대화시킨다면 그 절대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나의 절대적 행동이죠.

그래서 인간은 고독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못 받아들입니다. 남이 없으면 나도 죽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절대적인 고독이죠. 예수님 기도할 때 세 명 데려갔잖아요. 제자 세 명하고 같이 갔잖아요. 합해서 네 명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합해서 네 명이 아니고 기도할 때 예수님 따로. 세 명은 주무시고.

세 명은 기도를 왜 못했습니까? 기도를 못한 이유가 기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기도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기도할 이유도 없고 가면 잠잔다는 것을 아시고 세 명을 데려간 이유가 지금 이 시대, 예수님 보시기에 밤이 된 시공간의 시대에서 인간들은 깨어있어야 될 밤인 줄 모르고 자고 있다는 것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시간에 세 명과 따로 떨어져서 기도하신 겁니다. 인간은 정신을 어떤 식으로 차려야 될지, 정신 못 차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떤 식으로 차려야 되는지 그 조차도 인간은 알지 못합니다. 알 바를 몰라요.

예수님의 고독, 따로 떨어져 나오심과의 반대말이 인간의 외로움이죠. 외로움과 고독은 서로 반대말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인간의 외로움은 괴로움이고 이것은 정신병 같은 거예요.

사람이 쉬고 싶다 하잖아요. 혼자 쉬어보세요. 못 쉽니다. 누굴 불러다가 술을 먹든지. 오다 보니까 먹자 골목에서 맥주파티하고 있죠. 왜 자기 집에서 맥주 안 먹고 여기서 하느냐? 맥주가 그리운 게 아니고 외로움이 아파서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맥주라는 매개를 통해서 핑계를 대고 만나는 거예요.

젊은 애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럼 뭔가 축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축제가 뭔가? 할로윈 데이. 뭐 하나 덮어쓰고. 얼굴 덮어쓰니까 부끄러움이 사라졌죠. 자기 시선이 가려졌으니까. 그거 하다가 낑겨 죽었잖아요. 이태원에서. 까불다가.

그런데 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친구를 만났는데 결합이 됩니까, 결합이 안 됩니까? 결합이 전혀 안돼요. 따로 놀아요. 그런데 서로 아는 사이라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 친구 아이가~ 이러고 있다고요. 뭐 친구가 돈보다 귀하다고? 좋다고? 아이고, 그 노래 자체도 사기다, 정말. 나보다 귀한 게 어디 있어요? 나보다 귀한 게.

그걸 아시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니라” 했죠. 자,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 왔고 그 사랑이 그다음에 형제사랑으로 이어지죠. 순서가 그렇게 이어지는 겁니다. 임재가 먼저 있어줘야 임재한다는 그러한 증상으로서 형제사랑이 주님에 의해서 생겨나는 거예요. 우리는 서로 남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13절에, 사랑이 뭐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되어 있어요. 더 큰 사랑이 없는, ‘그 더 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이게 새 계명이다 이 말이죠. 옛 계명도 감당 안 되는데요. 옛 계명도 감당 안 돼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 만나고 다시 자기 집으로 갔지만.

여기다 새 계명까지 주어졌는데 그 새 계명의 수준이 어느 정도 높으냐? 너는 그냥 있음이어야 돼. 살아있음은 안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형제는 살아있음으로 만나는 관계가 아니고 있음과 있음으로 만나는 관계에요. 뭘 빼야 돼요? 살아있음이 빠져야 되죠. 그 빠지는 방식이 뭐냐? 마태복음 8장에, 주님을 도입하는 거예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어떤 집사님이 오셔서 같은 집사님끼리 만났는데 “집사님은 왜 저를 사랑합니까?” “집사님은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걸로 보입니까? 나 당신 사랑 안 해요. 주께서 사랑이라고 하니까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화를 왜 내지? 화 낼 문제가 아닌데. “주께서 형제라고 인정하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선 거지, 내가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보고 돈 빌려달란 소리하지 마세요. 사랑 핑계대고 다 우려먹으려고 하는 불순한 생각은 아예 차단해버리세요. 나한테 돈 빌려달란 소리하지 마라고요! 예? 아시겠어요? 옛다 100만원.” “아니, 100만원 급한 거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라하니 한 겁니다. 지금 제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죽은 인간인데 무슨 내 돈이 있습니까? 주의 돈이죠.” “이왕 주는 거 100만원 더 쓰지….” “이게 어디서 사랑을 빙자해서 등쳐먹으려고!”

새 계명의 실현성, 일상성 또는 실용성은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에 나오는 새 계명, 14장에 나오는 거처를 함께 할 것이라는 그것이 지금 성도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 안에 전부 다 압축되어서 발현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이제 감이 잡히십니까? 10절 다시 보겠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이 대목입니다. 지금 성령을 받아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같은 형제들이 거처를 같이해요. 거처가 뭐냐 하면 거처가 성령이에요. 거처가 성령이거든요. 그럼 그 거처 안에 누가 들었어요? 아버지 들어있고 아들 들어있고 그다음에 형제 들어있죠. 그걸 한꺼번에 담는 거처가 뭡니까? 성령이에요. 아버지+아들+형제=> 성령.

적십자 심볼인가, 팔 벌려서 사람들 모아놓은 그런 심볼 봤죠? 적십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있잖아요. 공익단체나 이런 데, 종이로 팔 벌린 손 만들어서 서로 이어져 둥그렇게 감는 거. 성령 안에는 성령만 계신 게 아니고 오히려 성령은 없고 성령은 보듬어주고, 성령은 주님의 부활의 영이거든요, 아버지, 아들, 형제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가 성령 안에서 그대로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형제까지 그대로 이어지면 모두가 하나 된 거죠. 모두가 하나. 연합이 가능한 거예요.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죠? 지금 믿는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들 성령께 맡기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고, 이해는 하시겠죠? 성경구조를. 그럼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이렇게 될 경우에 특징이 뭐냐? “목사님, 이해합니다.” 아니 아니. 그게 성령 받은 게 아니고 마귀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는가가 비로소 눈에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마귀의 자녀.

12절 봅시다. 요한일서 3장 12절,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참, 이 말씀 하나하나가 중요해요. 아우를 죽이기 전에 악한 자입니까, 아우를 죽였기 때문에 악한 자입니까? 아우를 죽이기 전에 악한 자였어요. 그러니까 잠복된 악함이 있었는데 아우를 만나서 잠복된 것이 발현된 겁니다. 발현된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이래요. 성격 좋고 착하고 뭐 교회는 안 나가지만 사람 인간성 끝내준다. 이거 아직까지 계기를 안 만나서 그래요. 계기를 안 만나서. 십계명 있죠. 십계명 다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다 그 계명 하나하나에 위반자입니다. 부자청년은 뭐 지켰다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고요.

열 가지 계명을, 그 계명뿐 아니라 모든 계명을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오해해서 그래요. 원래 계명은 예수님 십자가를 경유해서 나타난 건데, 예수님의 십자가, 다시 말해서 너는 이미 죽은 자이다, 죄인이다 하는 그 사실을 빠뜨리고 ‘나는 현재 가치 있게 살아있다’라는 것부터 전제해서 계명에 들어가니까 누가 가만 안 있어요? 계명이 가만있지 않아요.

그럼 다른 계명 지켰어? 이 계명 지켰으면 다른 계명 지켜야지. 하나 어겼어? 그럼 너 저주받을 거야. 계명은 주님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계명 앞에서 온전함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럼 왜 온전하다고 생각하느냐? 아직 죄 지을 타이밍을 못 만나서 그래요. 그런 환경을 못 만나서 그래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맏딸이 결혼했는데 사위를 만났어요. 사위한테 김치를 해줬는데 그 사위가 외국 사위에요. 네덜란드 사윈가. “아이고, 김치 너무 맛있죠. 장모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눈치코치 없는 둘째 딸이 “그거 엄마가 한 거 아니고 홈쇼핑에서 산 건데?” 하니까 사위가 하는 말이 “좋은 물건을 고르는 것도 장모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사위가 말할 때 네덜란드어 통역해서 얘기가 오갔는데 김치 대접했던 그 장모님이 자기 딸보고 “주문도 네가 했다는 건 통역하지 마라.” 이랬대요.

인간의 육신은요. 주님께서 가져가게 되면 전에 죄 있는 육신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주님의 피 흘리심이 유일한 가치로서 거룩의 근거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만약에 죄가 안 나타나면 피가 유일한 근거가 못돼요. 피도 믿고 너도 착하고 이렇게 되면 근거 자체가 개판되어 버립니다. 마귀판 돼요.

‘피만이 거룩이 된다. 예수님의 피만 죄 사함이 된다.’를 위해서 우리는 들추어져야 되는 거예요. 들추어지기 위해서 주께서 그러한 상황을, 외국 사위를 만나는 그러한 상황을 주님께서 유발시킨 겁니다. 빨리 아들 커서 그런 외국 며느리를 본다든지 해야 그때서야 잠복된 내 죄가 나오죠. 한국말 서툰 외국여자가 “아이고, 시어머니. 음식 솜씨가 땡큐에요. 너무 좋아요.” 주문했다는 소리 안하고 “그래, 맛있게 먹으면 되지.” 뭐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에 어긋나죠.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속속들이, 마치 더러운 스웨터를 오래 입다가 벗을 때 거꾸로 뒤집으면 두두둑 보풀이 다 피잖아요. 양모 털이. 안쪽으로 숨긴 죄들이 두둑두둑하면서 피어날 때, 바로 우리의 육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의 그 현장에서 발생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그 사랑이 있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있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까짓 거 얼마든지 나 같은 거 욕 얻어먹고 누락될 수 있지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이 세상에 못할 것이 뭐 있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여보, 설거지.”하면 “예~” 죄인인데 뭐. 오늘 있음이 이 일을 위함이다, 하면서. 설거지를 해놓으면 아내가 설거지한다고 좋아합니까? 어떻게 돼요? 그다음에 또 반전이 있죠. “설거지하는 꼬라지 하고는. 내가 이것 때문에 당신이 하면 두 번 해야 돼. 시킨 내가 바보지.” 그렇더라도 그런 잔소리하는 아내가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냥 있음이 되어야 될 이 원칙을,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주께 갈 때까지 가면서도 끝까지 이 거처의 가치를 위해서 이 죄인에게 일어날 피의 깨끗함을 주께서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새 계명, 네가 사랑했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죠.

끝으로 마태복음 25장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걸 주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께 옷을 입혔습니까? 제가 뭘 했습니까?” “네가 한 게 아니고 있음이 했다. 있음을 내가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용했어. 너는 어떻게 하든 간에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런 사람으로 성령께서 너를 말씀이 완성하게 내가 사용했다. 됐냐?”

그럼 후딱 면류관 벗어서, 이거는 제가 쓸 쨉이 못 됩니다. 주님 쓰셔야 됩니다. 이미 천국 쪽으로 가는 사람이 늘 겪어야 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있는 게 아니고 그냥 존재인데 우리는 마귀한테 현혹되어서 내가 나로서 살았다고 계속 우기고 있을 때 십자가 지신 십자가 능력이 우리를 후려치면서 주님께서 네 죄를 위해서 이미 사했다는 그 기쁜 소식으로 우리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가운데 십자가 피의 고마움이 더욱 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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