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50313a 요한일서 3장 24절(춤추는 말씀)-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23절, 24절 하겠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우리’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만 알려진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유일하게 챙기는 것은 ‘우리’. ‘우리’라는 뉘앙스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우리’라는 범주에 들지 않는 ‘우리’ 바깥에 있는 저희들을 전제로 하고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우리’는 특별하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들의 집합, 대상자, 이게 ‘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저희’와 ‘우리’의 차이점을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없습니다. 인간들이 ‘나 저들과 안 놀아. 우리끼리 놀자.’한다고 그것을 ‘우리’라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24절에 나오죠. ‘우리’가 성립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요소가 개입되어야 ‘우리’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이걸 다시 글로 쓰면, ‘인간세계↛우리’. 인간세계에서 ‘우리’는 성립될 수 없어요. 갈 수가 없어요. ‘인간세계우리’. 인간세계에 성령이 들어옴으로써 ‘우리’가 발생됩니다. 성령이 없으면 ‘우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성령 없이는 그냥 ‘인간들 전부가 우리’가 돼요.
인간세계↛우리
인간세계우리
인간세계(성령 없이)→인간들 전부가 우리
인간들이 성령 없이 ‘우리’라고 하는 그 ‘우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없는 ‘우리’가 발생된 ‘우리’, 이 둘의 차이점을 사도 요한은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배경에는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0(제로)에 수렴한다.’
0이란 무슨 뜻이죠? 없을 때를 표시하는 수학적 기호죠. 모든 인간은 0에 수렴한다. 0으로 모인다 이 말이죠. 0으로 모이면 인간이 ‘있다’가 나중에는 인간이 ‘없다’로 모여드는 거예요. 인간이 없어요. 없으면 인간세계에서 ‘우리’라는 것도 나중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일서의 사도 요한을 통해서 준 계시인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같은 사도 요한이 썼으니까 같은 취지로 나타나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땅에 있는 자들에게. 땅에 거하는 자가 독수리 입장에서는 뭐가 돼요? 그 전부가 하나의 ‘우리’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우리’는 무엇에 휩싸여있는 ‘우리’가 되겠어요? 불길한 징조를 받을만한 집단으로의 ‘우리’에요.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12절에 보면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영원할 것 같은 낮과 밤. 인간들은 인류 자신들이 영원하게 존속된다는 근거로써 자연세계의 영원함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어요.
스핑크스(Sphinx, 고대 오리엔트 신화에 나오는 괴물)가 오이디푸스(Oedip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라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냈어요. 오이디푸스라는 사람은 고린도에 있는 왕자인데, 고린도와 테베가 가까워요. 고린도에 있는 왕자가 불길한 신탁(神託, 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일)을 받아요. 신탁을 받는데,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혼인한다는 신탁을 받고 그게 불길하니까 뛰쳐나옵니다. 뛰쳐나와서 방황하다가 근처 테베라는 도시가 있어요. 오이디푸스가 고린도라는 지역에서 왕가인 동시에 테베라는 지역의 왕이 되는데요. 왕이 되게 된 이유가 스핑크스와 대결해서 이겼기 때문에 지혜롭고 용감하다는 평을 받아서 왕이 돼요.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 중 두 번째 수수께끼가 뭐냐 하면 “언니가 동생을 낳고 동생이 언니를 낳는다. 이게 뭐냐?” 이렇게 하죠.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가 두 개인데요. 스핑크스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독수리 날개를 달고 몸통은 사자 몸통을 했어요. 현재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꿇어 앉아있는 그 스핑크스 말이죠.
첫 번째 수수께끼는 뭐냐 하면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 걷고 저녁에는 세 발 걷는 게 뭐냐?” 이렇게 돼요. 동일한 목소리를 가진 입장에서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 맞죠? 그게 뭐냐? “인간이다.” 그 수수께끼를 맞히고 난 뒤에 스핑크스가 발광을 해요.
그러고 난 뒤에 질문을 하나 더 했어요. “언니가 동생을 낳고 동생이 언니를 낳는 게 뭐냐?” 정답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되게 어려운 문제고 오이디푸스도 굉장히 당황스러웠는데 오이디푸스는 이야기합니다. “밤이 낮을 낳고 낮이 밤을 낳는다.” 그걸 듣고 스핑크스가 자결합니다. 미쳐가지고 스스로 죽죠.
이게 신화거든요. 신화인데, 신화는 현재적 역사에서는 노력이 들어가고 노력이 끝나면 자기 노력한 것은 신화로 변해요. 역사라는 게 그렇습니다. 신화는 승리자가 자기를 찬미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게 신화에요. 승리자 또는 영웅이. 그런데 그 신화 이야기 특징이 뭔가 굳건한 게 있어요. 안정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요. 그게 뭐냐? 자연세계에요, 자연세계.
인간은 어디까지나 믿을만한 게 못되는데 이 세상에 믿을만한 것은 자연세계 뿐인 거예요. 믿을만한 자연세계 법칙을 신의 몫으로 돌리고 변덕스러운 것은 겸손하게 인간의 몫으로 돌리는 겁니다. 그래서 변덕스럽지 않은 자연의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며 그게 이왕 태어난 세상 제대로 잘 사는 거라고 그렇게 신화가 유포돼요. 유포가 되면 생겨나는 게 뭡니까? ‘우리’라는 거예요, 우리. ‘우리’가 생겨나죠.
이 ‘우리’를 만드는 데에는 성령이라는 게 필요치 않아요. 성령이 필요치 않고 기본적인 것은 자연세계,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이 변치 않는 불변의 원칙, 법칙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짐승은 제키고, 그건 남 목소리니까, 우리 인간들의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다.
그러니까 영웅들이 자기가 역사 속에서 큰일을 하게 되면 그게 신화로 바뀌죠. 이 신화 속에는 우리가 한 것이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능력이기 때문에 자연을 다스리는 그 능력과 유사한 것이 인간의 영웅 속에도 들어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이 하나처럼 공교하고 영원하게 한결같이 유지가 된다면, 그게 진리처럼 유지된다면, 인간의 생각, 영웅이 한 화려한 법칙을 신화화시키면 우리는 그 영웅 밑에서 우리가 하나의 마음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분쟁이나 다른 의견 없이. 그런 겁니다.
그러면 그 신화에 해당되는 자가 누구냐? 뭐 동상(銅像)의 대상자가 되겠죠. 광화문에 누가 있죠? 이순신 장군, 또 세종대왕.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는 거예요. 영웅 되면 그 사람이 한 일이 대단하다고 동의한다면 우리는 단군의 후손들로서 지금은 한 마음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동대구역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박정희 대통령 공덕비 같은 게 있어요. 대구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안에서 하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잘해서 죽어도 상관없어요. 왜? 그 사람의 업적은 신화 속에 신이 되기 때문에. 그럼 인간의 도리는 뭐냐? 자연을 지배하는 신, 자연법칙의 신에 잘 부응하고 말 잘 들으면 우리 인간도 신은 아니지만 신처럼 영웅들로 우리 스스로 자부할 수 있다는 게 신화입니다.
그럼 자연에 복종한다는 게 뭐냐? 자연을 신들이 지배하기 때문에 신들의 지배 아래 있으면 되죠. 지금 제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말하는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요한계시록 8장에서 이야기한 그 불길의 대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불길함의 대상. 그걸 우리가 이렇게 귀한 시간에 왜 알아야 되느냐? 지금 인간들이 ‘우리’라는 것과 성경이 말한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다른데 이걸 혼동하기 때문에 구분 짓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좀 어렵습니다. 자연세계의 안정성이 신들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게 신화의 내용이라면 그 신들이 모여서, 자연세계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으니까요, 어둠의 신, 저승을 관리하는 하데스라는 신, 태양을 관장하는 신 등 여러 신들이 있으니까 그 신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게 있어요, 신화의 세계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니까 신화지만 이걸 구약으로 하면 바알에서 나온 거니까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신 개념인 바알 개념이 그리스로 넘어가게 되면 신화가 되는데요. 그전에 이미 자연세계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연구한 것이 바알을 믿던 바벨론의 천문학자들이에요. 바벨론 천문학자는 앗수르에서 나왔고 앗수르는 수리아에서 나온 거고. 옛날부터 쭉 전통적인 데서 지식이 누적된 겁니다, 천문학이. 해와 달의 변화를 알아야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고 하니까, 달에 의한 간만의 차라든지 달뜨고 해 뜨고 해뜨고 달뜨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정확하게 수치로 해서 정확한 시간에 농사지어야 우리는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신들의 말을 잘 듣는데 신들이 모아서 내린 법칙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운명’이라 하는 거예요, 운명. 제가 어렵다고 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부터 인간은 종교라는 게 있는데 종교라는 것은 ‘운명은 신에게 속했다’, 이게 운명이에요. 그 운명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데 이걸 ‘신탁(神託)’이라고 해요, 신탁.
오이디푸스 신화에 있어서 세 가지의 신탁에 오이디푸스가 놀아나고 있습니다. 아까 첫 번째 이야기했죠?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 부인되는 엄마와 혼인한다.’ 그 신탁. 그 신탁을 받아요. 이러한 신탁을 받으니까 여기서 오이디푸스라는 사람이 꼬물락 꼬물락하면서 이 신탁을 피할 궁리를 합니다.
아, 이게 바로 종교가 갖는 모순점이에요. 인간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안 피하면 되는데, 피할 수 없는데 나한테 손해라고 생각하고 내 팔자가 더럽다고 생각할 때는 이 운명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운명에 도전해서 운명을 내 힘으로 바꿔보겠다는 이것은 이렇게 해줘야 이게 영웅값을 하는 거예요, 영웅값. 이게 영웅이 되는 거예요.
오이디푸스가 그 신탁을 피해 도망치면서 방랑하다가 스핑크스를 이겼다 했죠? 스핑크스를 이기고 난 뒤에 테베라는 곳에 갔는데, 마침 임금이 죽었어요. 임금이 죽고 난 뒤에 혼자 남은 왕비하고 오이디푸스가 결혼해서 왕이 돼요. 테베의 왕이 됩니다. 테베의 왕이 되니까 고린도에 있는 자기 아버지하고 고린도에 있는 엄마하고는 관계없으니까 드디어 우쌰!하고 운명을 성공리에 벗어난 거예요.
그런데 죽었던 왕 이름이 라이오스에요. 라이오스가 죽고 난 뒤 그 자리를 이어받아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전염병이 도는 거예요, 테베에. 전염병이 도니까 크레온이라는 처남한테 신전에 가서 신탁을 한번 받아보라고 얘기하죠. 신탁을 받은 내용이 이렇습니다.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 나라가 오염됐는데 이것은 범죄자를 제대로 체포해서 척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죄자의 벌에 대한 값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시가 오염되었다.” 딱 그것만 이야기해요.
그럼 그 이야기를 듣고 왕인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합니까? 왕의 위신이 있으니까 “반드시 내가 그 범인을 찾아내서 내가 왕인 이상 이 도시를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겠다. 그런데 그 범인이 누구냐?” 말 안 해요. 그 범인이 누군지는 말 안 해요. 그러니까 신탁을 왜 또 받느냐 이 말이에요, 자꾸. 자꾸 신탁에 놀아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복잡한 거 많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가 고린도 왕의 아들이 아니고 이 테베 왕의 아들이었던 거예요. 테베 왕의 아들인데 오이디푸스가 어릴 때 왕이 갔다 버려버렸어요(왕인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불길한 신탁 때문에). 버린 것을 누가 주웠느냐? 고린도에서 주워서 왕자로 만든 겁니다. 고린도 왕자가 되었는데 방랑하는 중에 길에서 나이 많은 아버지를, 그땐 아버지인줄 모르죠, 시비가 붙어서 길 비켜라 하다가 죽인 거예요. 대충 이 정도하면 스토리를 알겠죠?
그 사실을 엄마이자 부인인 왕비가 알고 자살합니다. 자살하고 난 뒤에 오이디푸스가 자살한 어머니의 황금 핀으로 자기 눈을 찔러요. 내가 죽으면 엄마이자 아내인 라이오스를 만날 텐데 이 눈으로 어떻게 볼 수 있겠나, 이 눈가지고 못 본다 해서 장님이 되었어요. 그렇게 자기는 안 죽고 방랑할 때, 세 번째 신탁이 있습니다. 딸 안티고네가 신탁을 받는데 너희 아버지는 죽을 땐 괜찮게 죽는다는 그 소리 듣고 딸이 아버지를 돌보면서 이야기는 대충 끝나요. 뒤에 보면 두 아들이 싸우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있는데….
지금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성경 자체를 사람은 신탁으로 본다는 거예요.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고 복음을 몇십 년 동안 공부해도 이걸 신탁으로 보는 거예요, 신탁. 제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어떤 인생을 살겠습니까, 하나님?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속에 영웅 심리가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영웅 심리라 해서 큰일 하는 게 영웅 심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우리’인데 인간들은 같은 인간이니까 대충 알잖아요, 알지만 특출나고 싶은 거예요. 아는 것 중에서 특출나게 되면 그게 우두머리가 되겠고 영웅이 되겠죠. 오이디푸스는 영웅이니까요. 영웅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신화가 나오죠. 이 성경 전체를 신화로 보는 거예요. 영웅으로 보는 거예요.
오이디푸스 같은 사람은 우리 도시가 오염되었으니까 깨끗하게 정화를 해야 되죠. 그 범인을 색출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범인이었단 말이죠. 범인이었을 때, 오이디푸스는 그냥 처벌받는 게 아니고 자기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심한 처벌, 자기가 자기한테 처벌 내려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영웅의 한 요소가 되는 거예요. 내 죄를 내가 아니까 그 죄에 대해서 누가 나를 징계하기 전에 알아서 내가 대담하게 나를 징벌하겠다는 거예요.
이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모든 인간들, ‘우리’라는 공통점이 안고 있는 그 면면들을 오이디푸스가 신화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다 해줘요. 우리 마음속에 어떤 요소들이 들어있는가를.
인간이 신을 대하면서 신을 뭐로 봅니까? 안정적인 절대자로 봐요. 절대자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절대자에게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운명, 다른 말로 하면 숙명이 나오죠. 숙명. 그럼 이 숙명, 운명이 나올 때 인간은 숙명이 나한테 나쁘게 작용했을 경우에, 좋게가 아니라 나쁘게 작용했을 경우에는 인간도 파닥거리면서, 구더기도 밟으면 꿈틀하잖아요, 꿈틀하면서 신의 운명을 피해보려고 노력하겠죠.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이게 성립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게 성립 안돼요. 이성 대 이성, 신의 이성과 나의 이성, 신의 논리와 나의 논리, 어느 것이 더 철저하고 완벽하냐? 한번 붙어봐? 이런 게 있다고요, 이런 게.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인간들도 똑같이 마찬가지죠. 사랑이 없으니까 사랑 대신 논리로 들어가는 거예요, 논리로. 사랑이 없으니까.
왜 사랑이 없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철저하고 지독한 자기사랑, 자기집착이죠, 자기집착에 빠져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은 이미 자기로 확정났어요. 확정적이고 그다음에 신에 대해서나 타인이나 남에 대해서는 이 자기사랑을 토대로 해서 여기서 이성적인 논리와 윤리와 도덕, 특히 책임감, 영웅적인 희생정신 이런 것들이 나온다니까요.
자기사랑을 근거로 해서 타인에게는 책임지는 태도, 희생적인 모습, 나 하나 몸 버려서 남이 잘되는 그런 희생적인 것, 그리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이런 것들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망에 누구도 걸려듭니까? 절대자가 갖고 있는 숙명, 운명도 인간의 자기사랑에 근거한 논리와 자기희생과 여기서 엮여지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누가? 오이디푸스가요? 모든 인간이 다요. 모든 인간이 다.
나 하나 고생하면 되지 뭐. 나 하나 고생하면 신의 자존심도 높이고 살리고 인간으로서의 이성적인 책임감, 성실함도 챙기고. 그렇죠?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자기사랑을 놓습니까, 놓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자기사랑을 못 놔요. 자기사랑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사랑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이게 책임감이고.
이것이 신화의 구조고 이방 종교의 구조고 우상숭배의 구조입니다. 이것이. 그래서 제가 신화를 소개해드리는 이유는 인간은 날고 기고 까불고 찧고 해도 신화의 범위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신화의 범위 밖으로 못 벗어나요.
한 50대 가까운 40대가 중국집에 모여서 소주하고 중국요리 시키고 떠들썩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남자들. 이야기하죠. 여러분들도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죠? 드라마 말고 실제로 그런 거 본 적이 있죠. 그들이 술 한잔 먹고 말할 때 말하는 자세, 태도 한번 보세요. 우리는 아까 짜장면 식사할 때 봤어요. 태도가 뭡니까? 허세와 허풍과 위선이죠.
허풍과 허세, 위선이 뭐에요? “아, 가만있어봐. 이건 내가 낸다.” 이런 거 있잖아요. 돈 안내면서 보조 맞추려고 옆에 같이 끼어가지고 카운터 가까이 가고. 앉아있는 인간들은 “야, 2차는 내가 낼게.” 이런 거. 오이디푸스입니다. 나 하나 희생하면 되잖아. 내가 고생할게, 내가. 가정을 위해서 내가 고생할게. 나 하나 버리면 되잖아. 이런 거. 영웅 심리에요. 그 영웅 심리의 바탕이 뭐라고 했습니까? 변하지 않는 대자연법칙.
그런데 아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드론 떴죠, 드론. 저주의 원자폭탄을 곧 떨어뜨릴 드론 뜬 거예요. 제가 며칠 전 낮 설교 말고 지난 주 낮 설교(20250302 주일 오전 <육신의 용도>) 초반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나팔소리 앞에서 우리의 존재성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했어요. 나팔소리 앞에서. 거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귀 멀고 눈 멀고 다 먼다 했죠.
모든 육체적인 우리의 모션, 태도, 행동, 거기다가 천사들이 뭐를 하냐?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니까요(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빰빠바밤밤 빠~ 나팔 불어버리면, 나팔 불고 공중에서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등장할 때, 거기 중국집에서 소주 먹고 허세 떨고 있는 인간들,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돈 내가 낼게. 지금 ‘내가 낼게, 니가 낼게’ 할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나팔 소리는 낯선 소리에요. 인간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소리입니다. 왜? 천사가 불기 때문에.
한 가지 목소리는, 오이디푸스에서는 신탁을 받는 대상자로서 인간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목소리는 신의 소리지만, 오늘 본문과 성경 전체에 의하면 이 한 가지 목소리는 계명이고 이 계명은 뭐로 전달되는가? 성령의 목소리에요, 성령의 목소리. 모든 계명. 모든 계명이 성령의 목소리로 전해질 때 이것이 성경이죠. 성경.
모든 성경은 딱 한 가지 목소리만 냅니다. 주님의 목소리만 내요. 주님만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우리 목소리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 앞에? 주님 앞에서 허세와 허풍, 영웅적인 행세, 있는 척, 아는 척하는 그것이 어떻게 돼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워버리겠죠. 그걸 묻어버리겠죠.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런 거예요. 이 예가 좀 과하다 싶어도 할 수 없어요. 뭐 과해도 해야 되겠어요. 창문이 있고 그 안에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좀 사는 집, 아들 하나 딸 하나 네 식구가 화목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고 있어요. 굉장히 화목해보입니다. 물론 가끔 “성냥 사세요~”하는, 곧 얼어 죽을 성냥팔이 소녀가 지나가겠지만 어쨌든 이 가정은 화목합니다. 안이 화사하고 따뜻하고 온기가 넘치고 행복이 넘쳐요.
그런데 바깥에서 동전이나 날카로운 쇠 꼬챙이가지고 유리창을 그어보세요. 끼익-하고 그어보세요. 이 기분 나쁜 소음, 그 소음에 안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어떻게 돼요? 순식간에 전부다 무용지물이 됐죠. 소용없게 됐죠. 조금 전까지 행복했던 그 순간이 다 날아가버리죠. 찌익-하고 인간의 세계 유리창에 흠집을 내는, 스크래치를 내는 날카로운 듣기 싫은 소리, 이 소리가 뭐냐 하면 한 가지 목소리, 바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게 계명이에요.
유리창 안에는 뭐가 형성되어 있는가? 화목한 이 안에는 ‘우리’가 형성되어 있어요. 이 ‘우리’를 계명으로 긁어버리죠. 유리창에. “이게 무슨 소리냐?”하고 보면 벌써 유리창에 금이 가있어요. 찌익-. 대각선으로 한 줄 그어도 되지만 가위표로, 다 아니야. 좀 더 과하게 표현하면 다른 면에 보니까 글자가 쓰여 있어요. ‘화’, 다른 쪽에 ‘화’, 또 다른 쪽에 ‘화’. 전 유리창에. 유리창이 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유리창은 그대로 있되, 인간들의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되, 이미 거기는 스크래치가 나버렸다 이 말이죠. 일체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결국 그 자체가 폭파되면서 인류는 0으로 수렴돼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안부를 묻는 게 아니에요. 죽은 자한테는 안부를 묻는 게 아닙니다. 뭐 희망이 있어야 안부를 묻지. 기껏 물으려면 “어제도 죽었는데 오늘도 죽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잘 죽어지내고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그래서 말씀에 의하면 이거예요. 말씀에 의하면 ‘너는 너를 살려두어서는 안된다.’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요한복음 5장 39절.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이 땅을 떠날 때 이 땅과 헤어질 때 그냥 곱게 헤어진 게 아니고, 뭐 날개 타고 엘리야처럼 불수레 타고 올라간 게 아니고 뭐로 마감되었습니까? 죽었죠. 그 죽음을 성령은 극단적으로 우리에게 안깁니다. 극단적으로. 아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죠. 예수님의 하나님의 죽음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단 말이죠.
‘너희’라고 부르는 ‘우리’들이, ‘우리’라고 부르는 ‘너희’들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 이제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 따라서 이점을 네가 수긍한다면 인정한다면 너는 너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왜? 그게 자기집착이고 애착이고 자기사랑이기 때문에. 자기사랑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에 새롭게 형성되는 성령에 의해서 형성되는 우리 안에서 유지되는 사랑하고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상관없이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예를 과도하게 한 거죠. 과도하게 든 예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사야 64장 4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사야를 제가 언급하는 이유는 신약에서 이사야가 함축되어 있는 내용이, 사도 바울과 요한, 베드로도 있고요, 이 사도들에 의해서 다양한 색깔로 나옵니다. 색깔로 나올 때 이 사도들이 한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묶어보면 예수님 이전에 선지자는 분명히 예수님을 겨냥하면서 묶인 채로 묶음을 가진 채 내용이 될 거란 말이죠. 이 내용이 뭐냐 하는 거예요.
이 내용이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나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에게서 ‘사랑’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 등장하게 되면 사랑의 내용이 나와요. 내용이 뭐냐?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걸 이야기해요. 그러면 우리가 알던 ‘우리’, 인간들끼리의 ‘우리’하고 전혀 다른 ‘우리’를 지금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새로운 우리냐?” 묻는 거예요. 기존의 우리 말고. 새로운, 생각지도 못한 ‘우리’냐? 미리 생각한 우리 말고 생각지도 못한 우리냐 이 말입니다.
이사야 65장 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새 하늘과 새 땅, 뿐만 아니고 이 마음까지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겁니다. 그 새로운 마음이 들려면 기존에 있었던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 그것은 제로(0)로 수렴되어야 되죠. 소멸되어야 되죠.
자연세계가 가르쳐준 게 없어야 되죠. 자연세계와 정들었던 모든 관계는 청산되어야 되죠. 자연세계를 통해서 인간을 주눅 들게 했던 신들, 신화의 신하고 헤어져야 돼요. 헤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특히 그 신들이 제공했다는 것, 줬다는 변치 않는 운명이라는 것, 숙명 그것과 바이바이 해야 되죠.
우리는 운명이나 숙명을 따질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우리에게서 이미 주님에 의해 빼앗겨버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저는 구원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부채도사님? 구원받겠다? 안 받겠다? 내 자아를 위한 운명이라든지 성경보기, 성경해석하기, 그거 다 날아가야 되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나’, 내가 내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한 ‘나’가 이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내가 전에 속했던 ‘우리’와 새로운 ‘우리’와의 그 차이성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거예요. 우리의 새로운 차이성.
그럼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내용은 뭐냐? 그것은 여러분 잘 아시는 주기도문에 나오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루어지이다’ 하는 것은 꽉 찼다는 거예요.
우리가 있는 이 자연세계부터 해서 모든 것, 전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있고 주님께서는 그 말씀이 그대로 가동될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님과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같은 생각, 사랑, 주께서 주신 새로운 사랑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는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그걸 오늘 요한일서에서는 ‘계명’이라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4절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이게 뭐냐 하면 ‘저의 숙명, 저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을 근거 자체가 날아갔다는 거예요. 새로운 우리가 생겨난 근거는 ‘주 안’이에요. 주 안. 예수님 안이에요. 23절에서는 그것을 ‘사랑 안’이라 해요. 사랑 안. 그게 사랑 안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 것을 알려준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사도 요한의 이야기죠. 그리고 아까 고린도전서 2장 9절의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입니까?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요. 사랑하는 자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것, 요한일서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가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성령 안에 있고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세상은 이렇게 보이죠.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이 유리창 안에 있다고 보고 유리창은 투명하기 때문에 유리창 바깥에서 사람들의 활동이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다 보이죠.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훤하게 보이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안목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의 안목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사랑이 뭐냐?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할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우리가 알 것은 사랑 안에서 보게 되면 저쪽에는 뭐가 보이냐? 유리창 너머에는 뭐가 보이냐 하면 자기사랑에 미쳐있는 것들이 보이죠. 자기사랑에 환장한 인간들.
‘그건 뭐 오이디푸스 신화라든지 신화에서 그렇지, 다른 데는 안 그러잖아.’ 이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과학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신화에서 나온 거예요. 과학의 대상이 자연현상이에요. 자연현상. 바벨론 점성가들이 했던 것이 오늘날 인공지능까지 연결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우리’가 형성되고, 그 ‘우리’라는 것은 바로 너와 나의 만남이 되고, 만남이라 하는 것은 너의 정보와 우리 정보를 서로 연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넥서스>(2024), (nexus: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의 결합, 네트워크).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로 유명한 <사피엔스> 지은 사람, 유발 하라리가 책을 냈죠. 그 사람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바로 정보라 하는 것은 서로 멀리 있는 것을 만나게 해주는 거라는 거예요.
만남은 뭐가 되겠어요? 나, 너가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 우리에서 나온 게 인공지능 로봇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찬미에요. 그리고 자기들이 영웅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거예요. 인정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 조건이 어떤 조건입니까? 해가 달을 낳고 달이 해를 낳는 조건 하에 그게 성립되는 거예요. 자연세계가 그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자연, 그리고 인간들, 동식물들을 껴안고 갈 때 그게 바로 우리가 되고 그 우리에서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오죠. 자기의 이성과 논리로서 못 빠져나와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 빠져나오는 방법은 뭐냐? 그것은 10분 쉬고.
서울강의20250313b 요한일서 3장 24절(춤추는 말씀)-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준비한 그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우리’에 합세할 수 있는가?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끝과 연결되어야 한다.’ 끝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끝. 끝의 모습으로 등장한 우리 자신이어야 돼요.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2.시작과 연결되어야 한다.’ 시작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시작을 어떻게, 태초에 시작을 어떻게 했는가를 알리는 방편으로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끝과 시작을 연결시키는 여기에 투입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거예요. 두유 먹고 빵 먹었다. 왜 두유 먹고 빵 먹나? ‘태초에 주님이 계시고 마지막에 주께서 끝장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두유 먹고 빵 먹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시작과 끝이 이미 확정되어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면서 퍼지는 일종의 치맛자락. 일렁거리는 치맛자락 있죠, 치맛자락.
하늘에 있는 치맛자락을 ‘오로라(aurora)’라고 이야기해요. 지구의 자기장이 태양에서 방출되는 전자 또는 양성자와 부딪치면서 빛을 내는 거죠.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가 차단되는데 일부는 입자 형태로 들어오고 극지방으로 모아져서 이때 발생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일종의 에너지의 치맛자락이 되는 겁니다. 오로라.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서울 살든지 어디 살든지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치맛자락의 일부로서 천조각의 일부로서 장식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치맛자락으로 춤춘다고 보면 되죠. 그럼 우리 성도는 뭐냐? 성도의 일과는 주님의 말씀이 춤추는 대로 움직이는 치맛자락 같은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러한 치맛자락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어떤 식이 되어야 되는가? 한번 적어볼게요. ‘말씀이 없을 때는 수시로 죽어야 된다.’ 말씀이 없을 때는 수시로 죽어야 되는 겁니다. 말씀이 없을 때 왜 우리가 수시로 죽어야 되느냐 하면 말씀이 깨워줄 때 말씀과 같이 해서 우리가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말씀이 “야, 일어나!”하고 깨워줄 때 후닥닥하고 말씀과 더불어 활동해야 되기 때문에 이 일에 방해되는 것은 뭐냐? 나라는 존재죠. 나의 존재. ‘말씀이 없어도 나 여기 있잖아.’라는 것이 방해가 되는 거예요. 실제로 활동하고 존재하는 것은 말씀인데, 또는 말씀으로 움직이는 주님이 존재하고 활동하는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활동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활동하게 되면 무엇이 가리워져요? 말씀의 치맛자락으로 말씀이 춤추는 것이 나의 존재로 인하여 가리워지잖아요. 그럼 주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존재를 치워버립니다. 치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내 원대로 구원이 안 이루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내 뜻대로 원대로 내가 예상한대로 구원이 안 이루어지게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마가복음 5장 41절입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에 회당장 딸이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사람들이 울고 있으니까 사람들보고 나가라 하고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만 딱 데리고 죽은 아이한테 갑니다. 사람들이 뭐 죽었다고 막 울고 난리죠. 통곡하는 이유가 뭐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된 거예요. 죽었으니까 우는 겁니다.
여러분, 죽었는데 왜 울죠? 죽었는데 왜 웁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럼 너는 네 자식 죽으면 안 울겠나?’ 이렇게 또 반박하지 마시고요. 진지합니다. 죽었는데 왜 울죠? 말씀드릴게요. ‘살아있다는 것은 그동안의 관계들이 소복이 모여 있었다.’는 겁니다. 관계들이. 이 관계는 그동안에 만났던 관계들이 소복이 모여 있는 거예요.
내가 있으면 A,B,C,D,E,F,G,… 여러 가지 사람들을 많이 만났잖아요. 만났을 때 만났던 그 관계들이 내 안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친구 중에서 D가 죽었다 하면 A,B,C,E,F,G는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D는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관계 하나가 누락됐죠. 빠져나갔죠. 이게 비어 있죠. 전에 있던 게 비어 있잖아요. 이게 애석하니까 우는 거예요.
특히 자기의 개가 죽었다. 울겠어요, 안 울겠어요? 울죠. 내가 너한테 쏟아 부은 돈이 얼만데…. 내가 너 때문에 살았다. 너 아니었으면 나 우울증 걸렸어. 네가 꼬리 흔들어주니까 너 때문에 난 버틴 거야. 그런데 네가 죽으면 난 어떻게 해? 나도 따라죽을까? 네 가는 곳에? 그럴 수는 없고, 거창하게 내가 장례 치러줄게. 장례 치르면 누구한테 오라 하는데? A,B,C,D,E 친구들 오라는 겁니다. 자기 개 장례식장에 오라는 겁니다.
안 오면 또 슬퍼요. 안 오면 또 슬프다고요. 그럼 친구한테 “야, 내 개 장례식에 왜 참석 안해?” “그때 마침 일이 있어서 못가. 미안한데 그 대신에 내가 돈 보내줄게.” 돈으로 그 슬픔을 달래주는 겁니다. 사람이 우는 이유는 나를 구성하는 구성요소가 하나의 부속품이 빠져나가니까 온전한 나를 구성할 수가 없다고요.
엄마가 치매 걸렸다. 엄마가 치매 걸리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활동과 시간을 치매 호전시키는 데에 다 투자했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없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동안 자기가 엄마한테 투자했던 그것만 남고, 그 대상자는 그 성과는 자기 손을 떠났잖아요. 그만큼 자기 마음에 공백이 생긴 겁니다. 빈 자리가. 그걸 뭐로 메꿀 거예요? 어떻게 메꾸냐? 못 메꾸죠.
가끔은 가까운 곳에 산소 만들어놓고 추석날, 설날 가서 오징어, 요새 오징어 비싸다고요, 오징어 사가지고 가죠. 거기서 옛날에 살아있었을 때 이야기 있잖아요. “엄마, 나 왔다. 하늘나라에서 잘 있나?” 하늘나라는 지 마음대로 다 가, 하여튼. 쥐나 개나 소나. “하늘나라에서 잘 있나?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 시키는 대로 나 잘 살고 있으니까. 엄마, 조만간 만나.” 만나기는. 지옥에서 만나지 뭐. “만나자.” 하고 소주를 뿌리죠. 소주가 알코올 성분이거든요. 에틸 알코올 아닙니까. C₂H₅OH 이런 거 있어요. 그거 뿌리고 절하고 자기 딸한테 “야야, 우리 할머니다.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너도 잊지 마라.”하고 “집에 가자. 차 막히기 전에.”
이 짓 왜 합니까? 엄마 생각이 아니고, 허한 나의 빠진 이런 대목을 과거 방식으로 그대로 채우는 거예요. 과거 방식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라는 존재, 내 존재의 정보가 계속 살아있고 연결되겠죠. 비록 죽었지만. 그러니까 자아라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만남에 대한 기억, 추억, 이게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어디를 공략하겠습니까? 그 관계를 드론가지고 다 잘라버리죠. 싹뚝싹뚝. 어제 수요설교 같으면 토막내버려요, 말씀가지고. 그 관계를 다 끊어버려요. 이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린다고요. 끊음으로 말미암아, 너는 내 앞에서 살아있다는 소리하지 마라.
끊어내는 그것을 문장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내 모습(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일을 찾으라.’ 내 모습 또는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곳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무덤은 성경이기 때문에. 왜? 성경은 예수님의 무덤인 동시에 우리 무덤으로 전환되었어요.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주 안’이라 하죠.
주 안에 있다는 말은 같이 죽었고 같이 살았다는 말이에요. 같이 죽었고 살려면 그 근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근거가 이 두꺼운 성경말씀 전체입니다. 이게 근거에요. 주께서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내 존재가 있음으로서 어떻게 살까 생각을 해요. 누구를 살리느냐 하면 내 육신을 살리는 게 아니고 나를 살리죠.
육신을 살리는 것은 병원에서 하는 거고. 약 먹고 하는 거고요. 나를 살리는 것은 만남을 통해서, 만남의 기억과 추억을 결사적으로 붙들고 있음으로써 나는 기억이 돼요. 나는 기억의 뭉치니까 기억의 뭉치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유지될 수 있다고.
타인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그 타인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좋았던 내 모습을 내가 상실하지 않고 내가 죽지 않고 거기에 계속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좋았던 그 모습을 계속 붙들고 유지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헤어졌던 사람도 가끔 다시 회개하고 찾아오길 바라고 이런 거죠.
그게 모든 대중가요 가사에요, 이게. 모든 팝송이나 대중가요 가사가 이거에요. 비록 헤어질 땐 아프지만 언젠가 나 보고 싶어서 찾아올 거야. ‘슬픈 이별’ 그런 노래부터 해서 대부분의 노래가 이거에요. 미련이에요. 타인에 대한 미련 이전에 나에 대한 미련을 계속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한번 더 너에게 기회를 줄게. 나한테 돌아오면 내가 용서해 줄 용의가 있다.
뭐하는 짓입니까, 도대체. 내 목숨 버릴 곳을 찾아야 되는데 계속 남에게 연연하고 있는 거예요. 나 말고 내가 만났던 사람에게 연연하고 있는 거예요. 가끔은 전화 해봐요. 전화 왜 합니까? ‘지금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계속 괜찮아?’ 보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네가 갖고 있던 네 기억에서 내가 좋은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가끔은 검색하고 점검하고 싶은 거예요. 행정점검입니까? 감사원이에요? 점검하고 싶은 거예요.
딸이 공부하고 늦게 왔습니다. 엄마가 묻습니다. “어디 갔다 와? 요새 공부 안하고 딴 짓하는 거 아니야?” “공부해.” “그래?” “엄마 왜 또 안하던 일을 하고. 내 방에 와서 왜 이래?” “그런데… 너 나 어떻게 생각하는데?” “엄마, 나 지금 바빠! 지금 인강(인터넷 강의)들어야 돼. 바빠.” “그래, 바쁘더라도 엄마를 어떻게 생각해?” “알았어. 알았어. 바쁘다니까.” “뭐 말을 못 꺼내….” 이래가지고 시큰둥하게 엄마가 삐쳐서 가죠.
촌에 있는 부모가 시집, 장가간 자식들에게 가끔 전화하는 이유도 자기 추억관리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사네요. 내가 있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 존재의 이유죠. 네가 있다면 나 있고, 네가 없다면 나는 없다는 거예요.
내 안을 구성하고 있는 타인과의 모든 엮어진 관계, 정보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나를 지켜내는 그러한 힘이 되고 그런 활동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우리끼리’ 또는 ‘우리 사이’거든요. 이것을 성경말씀은 어떻게 한다고요? 드디어 이제 공격을 합니다.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보혜사. 14장 25절. 14장 25절 보시기 전에 14장 10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추억은 뭐냐?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기억은 뭐냐? 그게 10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육체로서는 예수님이 죽어서 아버지께로 가지만, 육체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자아 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이다.” 이랬으니까요.
요한복음 5장에서 그렇게 나오죠.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17절) 이 말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조건 하에 나는 살아있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만약에 나보고 죽으라면 나는 죽는다. 그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렵죠. 죽으면 죽은 거고 살면 사는 건데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는 그게 모호한 거예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말을 누가 알아듣겠어요? 예수님이 죽어야만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살아있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보고 죽으라면,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말씀 안에 죽었던 나 말고 다른 나, 다른 나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어려운 이야기를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시작도 내 안에 끝도 내 안에’ 방식으로 나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이 말입니다.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다. 새로운 피조물이 뭐냐? 시작과 끝이 내 안에, 내 자아 안에 몽땅 다 들어있는 요건을 갖춘 거예요. 그걸 뭐로 해줘요? 말씀으로 해준 거예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말씀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과 끝에 의해서 말씀이 완성되기 때문에 끝과 시작이 완성되었어요. 이 말도 어려워요. 시작은 시작이지, 완성이 뭐냐? 아니에요. 시작도 완성이 되어야 되고 끝도 완성이 되어야 돼요. 시작과 끝이. 왜냐하면 시작도 말씀으로 시작했거든요. 끝도 말씀으로 되잖아요. 그 말씀을 누가 완성했어요? 예수님이 완성하신 거예요.
이 말이 어렵지만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고 생각하면 돼요. 아버지가 말씀하셨고 완성은 누가 하고? 아들이 완성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것은 뭐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거죠. 그런데 여기 14장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되어 있죠. 그다음에 쭉 보게 되면 20절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쉼표) 너희가 내 안에,(쉼표)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안에 있다는 것. 아까 요한일서 3장 24절 보겠습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10절, 20절 그리고 13절 이런 것들을 보지 않고 바로 요한일서 3장 24절에 들어가니까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뭐 이야기해줘도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가 확 와닿질 않는 거예요.
요한일서 3장 23절에 보면 계명이라 했어요. 계명이 뭐냐? 사랑이에요. 사랑이 계명의 완성이에요. 이건 지금 찾아보기에 시간이 모자라요.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13장, 14장, 15장, 16장 쭉 나오는 이야기가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걸 요한일서 4장에서도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한일서 3장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장 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여기, 사랑이죠.
그러니 요한복음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아까 이야기한 말씀을 통해 알아야 되는데, 이걸 모르게 되면 “내가 저 사람 사랑하면… 하나님, 사진 찍어놓으세요. 내가 저 사람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저 이미 생명으로 들어간 거 맞죠? 딴 소리하기 없기입니다. 내가 사진 보여드릴까요, 사랑하고 있는지?” 이런 식으로 자꾸 내미니까 이건 뭡니까? 이건 자기를 영웅시하는 신화죠. 자기를 신앙의 영웅으로 간주하는 신화적 요소로서 둘둘 감은 거죠.
적어볼게요. ‘내 뜻대로 내 원대로 구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한다.’ 내 뜻대로 내 원대로 구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의 예수님의 사랑은, 구원은 인간에게 버림받음으로써 진행되잖아요. 여기 ‘내 뜻대로’에서 ‘나’는 누굽니까? 인간에 속하잖아요, 인간. 그러니까 인간이 뜻대로 원대로 하면 이거는 마귀가 있는 곳으로 가죠. 내 원대로 뜻대로. 그래서 내 원대로 뜻대로 구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된다.
그럼 이걸 좀 발전시켜봅시다. ‘내 뜻대로 내 원대로 구원되지 않게 하옵소서.’가 되어야 되죠. ‘하옵소서’ 이게 기도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뭐든지 내 뜻대로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 했으니까. 주님의 뜻이 나올 때는 뒤에 ‘하옵소서’를 붙이면 이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되죠. 주기도문 또는 주의 이름으로. ‘내 뜻대로 내 원대로 구원되지 않게 하옵소서.’가 되는 거예요.
이걸 더 발전시키면, ‘나를 구원하지 않게 하옵소서.’에요. 나를 구원하지 않게 하옵소서. 야,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에요. 내가 구원되지 않게 하옵소서. 같이 계신 주님만 구원되게 하옵소서. 내 안에서 주님이 구원되었음을 드러나게 하옵소서.
이게 수요일에 이야기한 증거죠, 증거. 마지막에는 증거로 시작해서 증거로 끝나는 거예요. 피조물은 증거하는 용도에요. 본인 고유의 노림수가 있어서는 안돼요.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되리라? “예수님의 증인되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되면 어떤 기도해야 되죠? ‘주님의 증인되게 했기 때문에 구원 내놓으세요.’ 하면 돼요, 안 돼요? 안돼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선교하고 아프가니스탄이나 브라질 여러 군데 가서 했는데 이래도 나 구원 안 해줄 거요?’ 이게 안되죠. 왜냐하면 그것이 뭐냐? 내 뜻대로 내 원대로 되는 방식에다가 성경을 짜깁기해서 집어넣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춤춰야 되는데 본인이 미쳤어요. 본인이 춤췄어요, 본인이. ‘Do you remember~' 본인이 춤추고 있는 거예요. 스텝 밟고 있는 거예요.
입자가 더불어서 춤추는 그게 오로라인데, 오로라는 말씀이 와서 말씀의 춤에 우리가 같이 놀아나는 거거든요. 그럼 시도 때도 없이 말씀에 춤춰야 되느냐? 아니에요. 말씀이 오지 않으면 그냥 죽은 채로 있는 거죠. 죽음이 뭐냐? 내 추억과 내 관계를 고수하는 게 죽음이죠.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만큼 살 때까지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도 이렇게 우리 부모님 아파가지고 일주일에 다섯 번씩 들락거리면서 돈 쓰고 차비 쓰고. 기름값 계산하면… 철딱서니 없는 여동생들은 나중에 유산만 노리고. 이 싸가지 없는 것들. 고생은 나만 하고.
혼자 춤추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죽는 상태에서 본인의 추억과 기억이 삭제된 상태에서 움직여야 되는데, 그래야 주의 증인인데, 자기 열심으로 자기 증인으로 아주 발작을 일으켰어요. 지가 스핑크스인가. 그래놓고는, 이렇게 부모 효도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구원 내놔! 천국 티켓 내놔!
티켓을 우리가 달라할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우리가. 그런 입장이 못돼요, 우리는. 천국이 지 나라도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 나라에요. 아버지와 아들 나라지, 우리가 거기에 시건방지게 왜 끼어듭니까? 어른들 노는데. 끼어들 입장이 못 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건의한다고요. “내가 원하는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이 상황, 성령님과 함께 있는 이 상황에 그들을 집어넣어도 좋습니까?”라고 건의하죠.
그만한 권한이 있죠.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은 사랑을 완성한 그분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말씀을 못 이뤘으니까. 이룬 분은 예수님 혼자뿐이고 혼자서 아버지에게 건의할 수 있고 아버지와는 이미 협상이 끝났어요. 네가 원한다면 네 곁에 둬도 괜찮다. 네 곁에.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이런 말씀 있어요. “나는 너를 종이라 하지 않고 나의 친구라 하겠다.” 요한복음 15장 14절, 15절. 나의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 왜냐하면 친구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는 게 친구기 때문에. 네가 믿든 안 믿든 네가 지금 인정하든 그건 상관없어. 내가 이룬 성과에 같이 결국 춤추면 되니까. 춤추면 되니까, 너한테 부탁하고 뭐 이런 거 없어요. 나는 일방적으로 이미 너를 내 친구로, 내 곁에 두는, 영원히 천국에 둘 수 있도록 내가 이미 터전은 다 마련했고 이제 성령을 보내시면 되겠죠.
그게 성령의 보혜사에요. 성령의 보혜사.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성령의 보혜사, 그것이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보혜사)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되어 있죠. 요한일서 3장 24절.
흐릿했던 내용이 점점 더 또렷해지기 시작하죠. ‘아, 이게 주님 혼자 하시는 일이구나. 우리가 여기 끼어들 자리는 일체 없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성경 말씀 전체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제 요한복음 14장 보혜사 이야기에 들어갑니다. 14장부터 16장까지 성령 이야기요. ‘나의 존재를 인정할 그 어떤 요소도 성령님은 치워버리신다.’ 나의 존재를 인정해줄 그 어떤 경우도 성령께서는 아주 친절하게 다 치워버려요. 왜냐하면 내 속에 주의 존재가 부각되어야 우리가 증인의 자리에 서게 돼요. 만약에 내 존재가 부각되어버리면 주님의 존재가 도리어 나의 증인이 되어버렸죠. 주객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 근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16장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그다음에 뭡니까? “책망”하죠. 너희들의 존재에서 나온 모든 것들이 나의 존재에 대한 방해 작동을 했다 이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 할 때, 9절과 10절과 11절에서는 그에 대한 설명을 해놨어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이렇게 되어 있죠. ‘죄에 대해서라 함은’ 그 뒤에 괄호를 쳐놓고 우리가 한번 채워봅시다. 죄에 대해서라 함은 ( ). 죄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데 책망하는 이유가 뭐냐? 네가 한번 말해봐라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뭘 끄집어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죽으실 분이 아닌데 우리가 참 철딱서니 없어서 죽였습니다. 그게 죄입니다.” 이렇게 나오겠죠. 그런데 9절에 보니까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 뒤에 뭡니까?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럼 죄는 뭡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끝까지 믿는 거예요. 이게 죄가 되죠. 자기 자신의 행위, 자신의 생각, 자기 애쓴 것, 이걸 끝까지 붙드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건 성령이 책망하지 않으면 죄가 죄인 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네가 너를 믿는 것이 죄라면, 그럼 의는 뭡니까? 이게 바꿔치기 되죠. 너를 믿는 게 아니고 너를 책망하는 분을 믿는 거예요, 내가. 나를 책망하는 분을 믿는 거예요. “책망 더 해주세요~. 더 확실하게 궁극적으로 책망의 마무리까지 몰아세워주세요.” 이런 거요. 나 책망 받는 기분으로 살고 싶어. 그 즐거움으로 살고 싶어.
세상에 제일 즐거움은 뭐냐? 식욕, 정욕, 뭐 잠 오는 그런 욕심,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 큰 기쁨은 뭐냐? 주님한테 책망 받는 거예요. 그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책망 받는 거. 아침 이슬 먹고 기쁘다, 술 먹고 그런 거 기쁜 거 아니에요. 마약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책망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 우리 세계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다 나를 미화하는 식으로 나한테 왜곡되어서 받아들여집니다. 다 나를 영웅시하고 미화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의 짐이 점점 무거워져요. 버리려 해도 버릴 수가 없어요. 너무 아까워요. 내가 너무 아까워. 그동안 나를 위해서 충성 봉사한 게. 모든 능력과 모든 애씀을 거기다 다 투자했는데 이걸 갖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회사에서 4대 보험도 보장하지 않고 월급도 3개월 째 안주고 한달 월급이라고 해봐야 100만원도 안 되는데 여러분, 회사 나오기 힘들어요, 좋아요? 대번 버리고 나오죠. 자기한테 말씀으로 책망해줘 버리면 자기는 쓰레기장이라는 걸 알아요. 치매환자처럼. 모든 건 쓰레기만 주워 모았다 하는 말씀이 올 때, 거기서 빼내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냄새나는 쓰레기장에서 벗어나게 해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게 바로 9절에 나오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에요
10절에 봅시다. 죄에 대해서 책망한다 한 그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의에 대해서 책망한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그다음에 보지 않고 괄호를 쳐놓고 우리가 만약 내용을 채운다면,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게 의입니다.” 뭐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표적을 빗나가다. 잘못을 저지르다) 과녁 나오고 어디 양궁하는 것도 아니고요, 10점 만점에서 비켜나가는 게 죄입니다, 하마르티아 이상한 거 뭐 얘기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오이디푸스에요. 내 잘못을 누가 책임진다? 내가 알고 책임지는 것도 내가 알아서 내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자가 되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언제 주님이 우리보고 희생양 되라 한 적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희생양은 예수님뿐이에요. 뼉따구 확 꺾어버릴라. 뼉따구 꺾일 대상이 희생양이 안 됩니다. 희생양은 뼈가 꺾어지지 않는 분이 희생양 되는 것이지, 꺾이는 것은 희생양 자격조차 안돼요.
그게 바로 10절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분이 그 통로가 의가 되는 거예요. 그 관계가 의고 만남이 의에요. 이미 우리는 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자체로 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뭐로 재판했습니까? 정의를 위해서 재판한 거예요, 정의를 위해서. 탄핵, 탄핵, 탄핵,…. 여덟 번 탄핵, 여덟 번 기각, 기각, 기각,…. 이제 마지막 탄핵 남아있어요. 내란의 우두머리, 수괴 이제 탄핵 들어가요.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너희들은 나를 탄핵해도 소용없어. 왜? 나는 아버지께로 가니까.” 왜 그런 말을 못해, 그런 말을. “너희들은 내가 탄핵 대상이야? 내가 죽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어. 이제 아버지께로 간다. 뜻 다 이루고 아버지께로 간다. 이게 의야.” 너희가 몰랐던 의란 말이죠.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뭡니까? 생각지도 못해요. 인간들은 도저히 마음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이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요. 생각지도 않는 방식으로. 내가 뭘 어떻게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구원한다고요.
10절에 보면, 다시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봐도 너희는 나를 볼 줄 몰랐다, 그동안. 볼 능력이 없었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는, 너희는 소경이기 때문에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이라 하니까 볼 수 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음을 알려주는 책망을 하시는 거예요. 소경이 무슨 수로 구원을 받습니까?
‘소경인데 좀 봐줘서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기존에 있는 우리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면제된 채, 함께 죽는다는 절차를 안 거치고, ‘봐주자. 불쌍하니까 봐주자. 긍휼을 베풀자.’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것은 그건 영웅적인 신화에 해당되는 거예요. 오이디푸스 신화에 해당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내 잘못에 대해 책임지니까 아폴로 신이여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책임감과 희생정신에 대해서 신께서 감동하시고 나를 편안한 노후 되게 하소서. 편안하게 저승가게 하옵소서.’ 이게 신화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는 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다 높이고, 높이면서도 기어이 못 버리는 게 있어요. 콩고물은 건지겠다는 거예요. 이 정도로 높여줬는데 나도 덩달아 안정적인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사랑이에요, 끝까지.
그러나 여러분들은 아셔야 돼요. 인간은 끝을 모르고 시작도 모르고 중간에 툭 불거진 거예요. 불거져서 튀어나온 거예요. 이걸 김밥 옆구리 터졌다고 해요.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이게 마귀에 의해서 툭 튀어나온 거예요. 시작도 끝도 몰라요. 그냥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달려드는 게 뭐냐? “예수 믿는 것도 죄냐?” 이러거든요. 우째 알았지? 예수 믿는 것도 죄죠.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죄란 무엇인가?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요. 10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몰라서 믿지 아니함이요.
마지막으로 심판은 어떻게 됩니까?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우리가 심판을 잘못했습니다. 책망해주세요.’ 그게 아니고, 너희들은 심판을 잘못했다, 잘했다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심판 대상이에요.
그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경유하고 난 안목을 가지고 그들에게 그들이 한 짓을 되돌려주는 거예요. 이 되돌려주는 일을 누가 하시는가?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겁니다.
언젠가 제가 오후설교인가 오전설교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라 했던가요?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에요. 이게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12장 21절,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했죠. 모세는 주님 앞에 미움 받은 거예요, 사랑 받고 있는 거예요? 사랑받는데 사랑의 내용이 뭡니까? 심히 무섭고 떨리는 거예요.
히브리서 12장 28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두려움 가운데. 29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주님 사랑을 만나고 난 뒤에는 그딴 소리를 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내미는 사랑은 저쪽에서 주신 사랑에 비하면 이건 전혀 성질 자체, 속성 자체가 완전히 차이나는 거예요. 이쪽 사랑과 저쪽 사랑이 섞여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섞일 수가 없어요. 섞이지 않는 것을 일방적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일방적인 사랑이니까 내 있는 사랑에다가 일방적 사랑을 떡치듯이 같이 붙이는 게 아니고, 화들짝 놀라면서 ‘이건 사랑도 아니었구나.’하고 놔버리는 거예요. 이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거예요. 행여나 그 사랑에 흠집 날까 싶어서. 그 사랑에 내 행함과 내 잘남과 내 자랑과 내 오기가 혹시 끼어들까 싶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냥 사랑을 받는 거예요. 그 나라가 사랑의 나라고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냥 받는 겁니다.
적당한 예는 아닙니다만 할아버지가 되어서 설날에 손자, 손녀 오잖아요. 와서 제사드리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본게임으로 들어가죠. 전부 다 한복입고 손자들 다 쭉 서라 해서 절을 하는데 애들이 절할 때 덕담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봉투 안에 얼마 들었느냐 그게 관심사에요, 애들은. 그래서 봉투를 열어보니까 오만원 딱 들었거든요. 초등학교 학생이. 이걸 누구 코에 갖다 붙이냐는 거예요.
이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까? 이게 뭡니까? 내 방식, 내 뜻대로 구원되는 방식이 이미 선행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가치와 나의 의미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사랑해달라는 거죠. 참, 정말 건방진 거죠.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나 대신 죽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건 뭐 하나님 주특기잖아. 누가 죽으라했어? 죽은 건 난 모르겠고 어쨌든 간에 내가 가고 싶은 천국은 보내 달라 이 말이야.’ 이건 깡패도 아니고요. ‘예수 믿어줬잖아!’ 큰소리치고 있는 거예요. 그건 마동석한테 맞아야 돼.
지금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어요. 산채로 못 들어갑니다. 이게 기본이에요, 기본. 주님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죽임을 당해야 돼요. 죽임을 당하는데, 강의했지만 또 한번 더 합시다, 죽임을 당할 때 죽는 게 뭐냐? 숨 끊어진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죽임을 당할 때 그동안 내가 모아놨던 모든 인간관계가 그게 전부 죄요, 의를 공격하는 것이고,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관계를 우리는 이게 귀하다 여기고 소복이 모아놓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 힘으로 그걸 잘라낸다? 안돼요. 얼마나 아까운데. 안돼!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절에 가는 친구하고 고만 헤어지지. 안돼요, 안돼! 걔 큰 딸 시집갈 때 내가 20만원 부조했는데 그거 받아내고 헤어지든지 말든지. 안돼! 그동안 걔랑 지냈던 좋은 관계가 아까워서 그게 자기 일부가 되었으니까 그 친구는 나에게, 내가 얼마나 좋은 존재, 의미 있는 존재인지를 증거하는 증인 노릇하는 거예요. 나를 증명해줄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내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우리 남편은요. 술 먹고 나를 개 패듯이 패고요, 뭐 어떻고, 바람피우고, 못 살겠어요.” 그럼 서장훈이 “그럼 헤어지세요.” “안돼요!” “왜?” 그런 남편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천사가 되기 때문이에요. 천사가 되기 때문에. 부부라는 것은 전부 다 서로가 환상을 갖고, 자기사랑에 대한 환상이죠, 내가 있는 추억과 기억 속에 더 좋은, 내가 간직하고 싶은 추억에 누가 되지 않는 요소로서 더 추가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내가 괜찮은 존재인데 너하고 결혼함으로써 괜찮은 존재가 빛이 나기 위해서 했다. 둘 다 마찬가지에요. 둘 다 그래요, 둘 다. 자기 생각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사도 바울이 아주 극단적인 발언을 하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1번-결혼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니면, 2번-결혼을 통해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라는 뜻이다. 몇 번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2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내가 이미 죽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붙여주고 발생시킨 일이고 자식관계도 모든 관계가 내 힘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 못하기에 성령께서 마련해주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확인하는 그러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조건인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