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1212a 요한일서 3장 12절(사랑의 구조화)-이 근호 목사
그림설명:이근호
그림에서처럼, 사람이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다른 나무로 바뀌어지면서 비로소 완성된 사랑이 나옵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3장 10절부터 24절까지 해보겠습니다.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렇게 돼 있죠.
요한일서 3장에서 24절까지 쭉 읽어보게 되면, 무엇을 나타내느냐? 이걸 나타내요. ‘현상’이라는 것.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러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분류를 할 때 사도 요한은 딱 두 종류로만 분류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 발상이 대단한 발상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1.사랑하는 관계, 또 하나는 2.사랑하지 않는 관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리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딱 두 개의 분류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두 개의 분류, 1번과 2번 두 분류가 나온다는 것은 이런 분류를 할 수 있는 그 토대, 근거는 단 하나에서 나온 두 분류죠.
이것은 쉬운 겁니다. 서울대학에 시험 치러 온 학생들이 결과적인 현상을 나타내는데, 뭐냐 하면은 합격한 자와 합격되지 않은 자. 그렇게 분류되죠. 서울대학교 시험 치러 온 학생이 고급차 타고 왔다 또는 걸어왔다. 고급차 타고 왔으니까 합격, 걸어왔으면 불합격, 이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서울대학에 합격, 불합격은 수능과 내신 뭐 그렇게 여러 가지 다른 거 합쳐서, 하여튼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죠. 하나의 기준. 그게 뭐냐 하면 단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단 하나의 기준.
그러면 사랑하는 자는 다른 걸 사랑하는 게 아니고요. 이 단 하나의 기준을 사랑하는 자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랑하는 자나 사랑하지 않는 자도 자기 집 식구나 자기 자식이나 손자 굉장히 사랑해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기에, 자기 식구나 자기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 이웃들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 돌보고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기부하고 아프리카에 우물 판다고 돈 주고 그렇게 할 수 있고 환경 문제 할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11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잖아요. 아프리카에 우물 파라고 돈 주면 하나님의 자녀고 돈 안 주면 마귀의 자녀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분류를 할 때 둘로 나타내는 것은 ‘서로 안 맞기 때문에 우리 따로 가자. 우리 섞이면 안 돼. 우리 가는 길이 달라. 화끈하게 고만 따로따로 놀자.’ 이래서 두 분류를 하는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예를 들면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온다.’ 그걸 기준으로 하게 되면 이 세상은 두 종류로 나눠져요. 아프리카에 우물 파는데 기부한 사람/ 기부하지 않는 사람 딱 그렇게 나눠지겠죠.
그런데 문제는 사도 요한은 아프리카 우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로 둘로 구분 짓는 그 단 하나의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그 단 하나의 기준이. 정답이 궁금하십니까? 그 기준이 뭔지 궁금하십니까? 뭐 ‘궁금하십니까?’ 이러면 뭐 알려주겠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그 딱 하나의 기준이 뭐냐? 알려 드려야죠. 단 하나의 기준. ‘기준 없다.’에요. 단 하나의 기준: 기준 없다. 기준이 없는 거예요. 기준 없는 것이 한 사람은 천국가게 하고, 한 사람은 지옥가게 합니다. 환장하죠, 환장해.
기준을 하게 되면, 뭐 아프리카 우물 판다하면 아프리카에 돈 보내면 되잖아요. 우리의 행함을 추가하면 되거든요. 그 기준에 맞춰서 행함이 주어지면 되는데, 이 요한일서 3장에서 그리고 요한일서 전체에서 인간들이 추가적으로 보정하거나 버티거나 추가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답은 뭐냐? 기준 없음으로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는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오케이? 쇼킹하지요. 쇼킹합니다. 서울대학교 시험 치는데 “자, 60분 동안 문제 푸세요.”라고 문제지를 줬어요. “자, 이름 쓰시고 문제 푸세요. 시작!” 했는데 문제가 없어요. 이름 기재하는 건 있는데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문제가 없는데, 어떤 애는 탈락되고 어떤 애는 합격했어요. 그럼 정답은 뭐냐? “‘문제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제시된 문제는 아예 없었습니다.’가 그게 기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건 뭐 합격이죠.
하나님께서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내면서 사람에게 기준을 왜 제시하지 않냐 하면은 모든 인간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자한테는 죽었다는 사실 그걸로 주님께 충분해요. 그런데 죽었다는 그 인간이 뭔가 내세우고 뭐 구원받기 위해서 행함을 시도한다면 그 자체가 뭐냐? ‘나 안 죽었다’라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이론대로라면 우리는 죽은 채로 있어야 하느냐?” 여러분, 죽은 채로 한번 있어 보죠. 뭐 한 일주일 동안 죽은 체 하는데 일주일 이후에는 몸이 근질근질 할 거예요. 못 참겠다! 이렇게 나올 수 있지요. “도대체 언제까지 죽은 체 하는 겁니까? 언제까지? 벌써 내가 일주일 동안 죽은 체 했는데 아직도 모자랍니까? 앞으로 뭐 몇 개월 더 해야 돼요?” 그럼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구, 살았네. 죽은 척은 하는데 실제로는 살았다고 의식하면서 죽은 자가 구원된다 하니까 죽은 척한 행함을 네가 지금 아주 야무지게 실시했구나.”
주님의 이 기준 없음에 대해서 인간은 처음에는 따르려고 애를 쓰지만 나중에는 ‘더는 못 참는다!’ 이게 불룩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더는 못 참는다. 참을 수가 없다. “내 미래다, ‘내’ 미래. 내 미래, 내가 천국 가냐 지옥 가냐 하는 것은 내 미래인데 내 미래에 내가 왜 관여를 못해? 이거는 부조리하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내 미래다, 내 미래. 아니, 내 미래인데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내가 어느 정도 어떤 지분을 가져야 되지 않느냐? 내 미래를 일방적으로 타인이 결정하지 말고. 내 문제인데. 뭐 내 의견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 의견을 왜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합니까?’ 그런 발언하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어른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 결정은 나한테 묻지 말고 아빠 엄마가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그런 것은 ‘어른스럽다’의 반대가 되겠죠. 이게 뭡니까? ‘어린아이 같다’ 이렇게 되죠. 어린아이 같다. 자기의 자율권, 결정권 다 넘겨버리는 거예요. 다 넘겨 버리는 거. 어린아이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하셨죠. 여러분 잘 아시죠. 어린아이를 예수님이 딱 세우시고, 앞에 쫙 12명의 누가 있겠습니까? 어른들이 있죠. 어른들이 있는데 주님께서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무리한 요구인지를 여러분 아시겠죠. 그 현장에 있다 치고 아시겠죠. 이미 제자들은 어린아이 시절을 지났어요. 어린아이 시절이 지났는데 그 시절 지난 이후에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조건 걸기를,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너희들 다 잘렸어. 너희들 다 끝났어.”라는 일방적 선포로 들릴 수밖에 없지요.
너희들은 못 간다. 너희들은 못 간다. ‘너희들은 못 간다’ 이걸 제가 다른 말로 표현할게요. ‘내 힘으로 못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힘으로 못 간다. 이제 와서 내
힘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힘자랑 하는데 천국에 가게 되면 누가 높은 자리 앉느냐 힘자랑 하는데, 그런 것은 힘을 신봉하는 세상 권세자들이나 할 짓이다. 권세자들이나 할 짓이다. 너희도 한 통속이고 세상 권세자도 너희와 똑같다.” 그 다음에 이야기가 뭐냐 하면,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마치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요청하는 것처럼 느끼게 될 거예요.
오늘 요한일서 3장 전체 내용 다 읽어보셨죠.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뭔가 요청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요청하는 것‘처럼’. 사실 요청한 게 아니에요, 요청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요청한 것처럼 하고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하시고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게 아니고 섬기려 하심이라”(마 20:28, 막 10:45)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제자들이 좀 머리가 있으면 딱 알아들어야 돼요.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 선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불가능을 분명히 확정지어 놓고, 그다음에 불가능한 족쇄가 어떻게 가능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가에 관해서 제자들 너희들이 할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족쇄는 풀렸다.
“어린아이 같이 되지 못해서 지옥 가야 마땅한 그 지옥의 족쇄가 풀렸다면, 너희들은 누구를 주목해야 되는가? 아직도 네 행함, 네 가능성을 주목해야 되는가? 아니면 누구를 주목해야 돼?”라고 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나를 대속물로 주러왔다. 이것이 세상 권세자와 반대 방향으로 가시는 주님의 길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제자들 가운데 끼어있다면 여러분의 태도는 어떤 식으로 여러분의 태도를 정리 정돈해야 될까요? 어떤 식으로? 만약 여러분이 끼어있다면? 이렇게 정리 정돈하시면 됩니다. ‘아, 주님께서 뭘 하실 모양이다. 하실 모양이다. 주께서 주님만 하는 남은 일이 뭐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관여하지 못하고 주만 하시는 무슨 일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다음에, 그 주께서 하시는 일, 이 땅에 오셔서 하고자 하는 일,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될 거예요.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다 이루었다.
그런데 그 다 이루었다는 것에 여기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죠. 다른 사람은 어른스러우니까. 주님의 뜻과는 배치되는 내용이 막 튀어나오니까. 그럼 다 이루었다면 나를, 제자들을 배제하고 다 이루었잖아요. 제자들을 배제하고. 구원될 자가 주님 일에 협조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님이 다 이루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 이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겠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가지 못한다는 내용, 그것도 다 이루었겠죠. 그것도 다 이루었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이미 어른이라서 어린아이로 돌아가질 못해요. 돌아가지 못하면 지옥행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걸 전제로 해서 다 이루었다면, 주님께서 그다음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다 이루었다의 공로와 혜택을 줄 때에 제자들은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어른 상태가 아니고 자기의 가능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유치원생 어린아이가 되겠죠. 그럼 열두 제자는 뭐가 됩니까? 유치원생, 유치원에 같이 다니는 같은 동무들이 되겠죠.
같은 동무들 이들의 공통점, 이들의 특징은 모든 일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모든 판단을 하지 않는 상태에 돌입하는 겁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그 지독한 악마가 심어준 그 선악체계.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악체제에 적용받지 않는 세계가 형성됩니다. 순진무구하게 모두가 어린아이같이 되는 그 상태가 됩니다.
덧붙여서 마태복음 7장 산상설교의 일종에 보면 이런 말씀 있죠.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것도 모르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 비판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것도 뭐냐면 판단에 관한 문제잖아요. 그런데 어린아이에게는 이런 게 없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이런 게 없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환경을 그냥 즐기는 것뿐이에요.
만약에 판단하게 되면 인간은 어떤 판단을 하느냐 하면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걸 판단한다고요. 그런데 어린아이한테는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에요.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게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이거는 이미 어린아이 시절을 지나간 거예요. ‘엄마 회사가 너무 잘 됐대. 나 그러면 용돈 타겠네.’ 이건 어린아이가 아니죠.
엄마가 무슨 사업을 하든 사업이 부도가 나든, 현재 나의 판단을 하지 않는 여기에서는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부모 사업이 잘됐다고 해서 ‘내가 판단을 똑바로 했다.’ 이런 생각을 어린아이는 가질 필요가 없어요. 부모 사업이 잘되든 못되든 간에 ‘엄마, 아빠만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뭐 이렇게 나오는데 사업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이것을 한번 점검해 봅시다. 어떤 것을 점검해야 되냐면, ‘사랑으로만 과연 세상의 전체 일어나는 현상을 조직화할 수 있느냐?’ 사랑으로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다 이루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전부다 체계화시키고 조직화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다 이루었다’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여러분들이 설명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놀랄 일이 아니죠. 왜냐하면 모든 놀랄 일은 ‘다 이루었다’로 이미 선점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땅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다 이루었다’를 받쳐주기 위해서 부속적으로 파생된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에 전부다 다 연계돼 있으니까 ‘다 이루었다’를 정점으로 해서 모든 것은 그 안에 하부 조직으로 다 체계지어 있으니까 놀랄 만한 일이 없지요.
“할머니는 당뇨가 심해서 앞으로 3개월까지 못 삽니다. 놀랍지요?” 병원에서 이렇게 하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게 뭐 놀랄 일입니까? 예? 의사 선생님은 아직까지 놀랄 일을 경험도 못해봤어요. 그게 놀랄 일이에요?”
가스 불 안 끈 채로 성경공부 간다고 나왔는데 성경공부 쉬는 시간에 전화가 왔어요. 홀라당 이층집 다 탔대요. “어머님, 빨리 오세요.”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야, 천천히 간다.” “아니, 왜요?” “그게 뭐 놀랄 일이고, 그게?” “개집도 탔는데.” “개집이 타든 그게 뭐 놀랄 일이야.”
“집사님 애가 사고 쳐가지고 지금 유치장에 있는데 피해자가 3억에 합의보자 합니다. 놀랍지요?” “그게 뭐 놀랄 일이야, 그게? 그게 무슨 놀랄 일이야.” 그러면 형사가 “아니, 그게 놀랄 일 아닙니까?” “형사님 잘 들어보세요. 그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위해서 우리 아들이 동원된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지금. 그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룸하고 네 아들 구치소 가는 거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평소에 그 연관이 왜 안 짜였어요, 그래? 미리미리 짜시지. 미리미리 짰어야지. “아이쿠, 이러면 안 되는데.” 뭘 이러면 안 돼요? 무슨 놀랄 일이 있어요?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놀랄 일은 이미 마감됐는데. 더 이상 접수 안 받아줍니다. 더 이상 놀랄 일 접수를 안 받아줘요. 다 끝나버린 거예요.
지금 표정들 보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네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아, 나는 빨리 육신을 벗어버리고 주님께로 가고 싶다.” 그러니까 뭐 주위 사람들이 “아휴, 더 사셔야 됩니다.”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에요. 그럼 사도 바울이 죽겠다 하는 게 그게 놀랄 일입니까? 그래서 옆에 사람이 말려서 ‘더 사셔야 돼요.’ 이래야 돼요?
사도 바울이 자기가 빨리 육신을 벗고 싶다는 것은 사도 바울 입장에서 무엇과 관련된 일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와 다이렉트로 연결된 이야기거든요. 다이렉트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육신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을수록 ‘다 이루었다’를 훼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기에 나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빨리 육신을 벗어서 주님께로 가는 것이다.
그게 빌립보서 1장에 나오고(“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1:23)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5:8) 이야기입니다. 죽기 전에 내가 해야 될 뭐 여러 가지 리스트 있잖아요. 버킷 리스트. 사도 바울보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건 뭡니까?” “빨리 죽는 거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빨리 죽는 거. 그런데 주님께서 그걸 지금 안 들어줬지요.
“아니, 그거 말고. 사도 바울님, 살아서 일단 살았다 치고 산 상태에서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뭐 골프를 잘 치고 싶다든지 크루즈 여행을 하고 싶다든지 아니면 어떤 뭐 다이아 반지를 선물로 받겠다든지 뭐 좋은 차 스포츠카를 선물로 받겠다든지 뭐 그런 거 없어요?” 하게 되면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만있어 봅시다. 그 좋은 차, 집 사고 하는 그것과 다 이루었다와 지금 연관이 있는가를 조사해보니 다 이루었다의 조직표에 그게 안 들어 있네요.” 이렇게 될 거예요.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이루었다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고, 세상, 그게 마귀 자녀죠, 세상과 연결된 조직에서 나온 거죠. 세상에 연관된 조직. 조직의 맛을 한번 보실래요?
그러니까 tree, 나무가 두 개 있는데요. 사도 요한은 나무 두 개를 해놔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딱 둘로 분류가 되는데 하나는, 다 이루었다. 하나는, ‘다 이루었다’를 극렬하게 저지하고 방해하는 것. 그런 거 듣지도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그쪽. 마귀 쪽의 트리. 조직표.
트리라 하는 것은 조직표를 그리면 이게 꼭 나무 같거든요. 정점으로부터 밑에 내려와서 파급된 것. 모든 현상까지 다 긁어모은 하나의 정점이 있는데 이 정점이 예수님의 정점과 딱 두 개가 있다는 것이 요한서 3장 11절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각각 거기서 그들은 현상을 나타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 같으면 자녀다운 현상, 마귀의 자녀 같으면 숨길 수 없는 마귀의 자녀의 현상이 나타나죠. 이 현상이든 저 현상이든 인간 자신의 자율성이라든지 자기의 행함을 여기 조직표에 자진해서 끼워 넣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두 조직표 두 tree, 나무 중 어느 한 쪽에 속해 있지, 자기가 여기 두 나무 사이에 따로 나와가지고 ‘보자, 보자. 내가 어느 쪽으로 가게 되나?’ 자기가 골라잡을 그러한 존재가 아니에요.
왜? 인간은 마귀보다 힘이 약하고, 인간은 예수님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힘센 마귀나 힘센 주님이 인간을 자율적인 외톨이로 그냥 방치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situation, 현 상황이에요. 소속이 딱 두 소속으로 벌써 딱 분류돼 있어요. 뭐 죽어서 분류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이미 분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요한일서도 없었을 거고 이런 사실을 어느 인간도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그때 유대 나라에는 뭐가 있었는가? 유대나라 신학, 유대교 신학이 있었지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열심히 추진한 일이 있습니다. 그건 그들 나름대로의 분류를 하는 거예요.
율법을 따르고 지키는 자와 율법을 모르고, 알더라도 율법에 대해서 열심으로 매진하지 않는 하층민들. 저질스러운 질 낮은 노동에 종사하는 자들, 율법에서 가르치는 그 정결법에 참여하기가 곤란한, 시간상 여건상 곤란해서 율법적인 죄를 그때그때 때마다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그걸 덤터기 쓰면서 그냥 밥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분류하죠.
멀리서 찾을 거 없죠. 천주교 보면 되죠. 자, 성당에 가면 신부들이 고해성사 하는 데 있죠. 방을 만들어 놓고, 이쪽은 신부가 앉아 있어요. 열혈 사제가 앉아 있어요. 열혈사제 알아요? 전직 특수부대 요원인데 지금 한창 이 드라마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남길인가 삐딱하니 앉아 있고. 저쪽 편에는 김홍식, 마약사범이 옆에 또 있어요. 그러고 이제 고해하는 거죠.
이 분류를 보세요. 이쪽 사제는 항상 성당 안에서 고상한 거룩한 삶을 살기 때문에 묻은 때, 묻은 먼지가 좀 적어요. 왜냐하면 수녀들이 깔끔하게 성당 내부를 청소해가지고요. 깨~끗하게 청소했기 때문에 때가 없는데, 여기에 세상에 아주 노동의 강도가 센 그냥 육체노동에 찌든 그런 사람들이 올 때는 벌써 알아서 기어오잖아요.
“그동안 잔업 한다고 성당 두 번 빠졌습니다. 성찬식도 빠졌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사제가, 신부가 처방전을 내려줘요. 처방전을. “식후 30분에 주기도문 두 번 하고. 주기도문 외우시고 성경 하루에 두 장 읽으시고.” ‘식후 30분’은 내가 집어넣은 거고요. “주무실 때 우선 꿇어앉아서 천주님께 기도하시고, 집에 가서 주기도문 좀 이렇게 외우시면 됩니다. 그다음 사람!” 바쁘다. 줄섰다, 지금. 나 빨리 점심 먹으러 가야 돼. 빨리, 그다음 사람! 내과 의사도 아니고 이건 뭐… 간호사! 그다음 사람 보내. 그다음 사람 들여보내.
이게 뭡니까? 이 자체가 뭡니까? 분류잖아요. 자기가 트리의 정점에 서 있잖아요, 자기가. 누구든지 바리새인처럼 의가 낫지 아니하면 어디 간다?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 천국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인간들은 그거라도 그들은 원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미래는 내가 결정하고 싶고 내 자율성을 결정하고 싶은데 내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 행함으로 거기에 관여가 되면 내 미래가 보장될 수 있겠습니까? 이거는 근원적인 궁금증이고 이거는 근원적인 내 불안에서 유래된, 이거는 꼭 해답을 얻고 싶은 요소입니다. 자기의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죽음 이후에 자기 사정에 대해서.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은 필수적이죠.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어떤 것을 몰랐냐 하면, 자기들에게 행함을 요구하고 율법 잘 지킨 자가 의로움과 경건함의 가중치 그것이 자꾸 높아질수록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는 그 가르침이 악마가 그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그 바리새인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앞잡이 되어서 유대인 전체를 마귀의 자녀로 다 만드는 그 현상들을 자아냈죠. 그러면 그 유대인만 그러냐?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됩니까? 물어볼 것도 없지요.
만약에, 만약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께서 아까 제자들한테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그런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정점으로 해서 예수님이 가르친 그 산상설교를 정점으로 해서 하나의 트리를 만들어 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 트리에서 제일 꼭대기가 예수님이면 이게 다 이루었다가 되겠죠. (벌레가 자꾸 날아다니는데 이건 무슨 현상입니까? 무슨 관련된 현상입니까?)
다 이루었다가 되면 다 이루었다를 정점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있잖아요. 38년 된 병자, 간음한 자 용서, 물이 포도주 되고, 물 위를 걸으시고, 물고기 배에서 꺼내어 세겔 주는 거. 그 모든 것이 여기 하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딸랑딸랑 방울처럼 전부다 연결돼서 매달리겠죠. 매달려 있겠죠. 방울처럼 모든 말씀과 행하심이.
그럼 여기에 같이 있는 사람들은 ‘다 이루었다’라는 그 확연한 사실에 대해서 무엇을 어떤 내용을 다 이루었는가를, ‘다 이루었다’로부터 해서 요런 말씀들을 거쳐서 다시 ‘다 이루었다’로 올라가면 되겠죠. 이게 바로 십자가로 인한 성경해석이죠. ‘다 이루었다’부터 출발해서 그 ‘다 이루었다’가 알알이 어떠한 이슬과 열매들을 가지고 톡톡 터지듯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우리한테 들려주느냐.
예를 들어서 ‘비판하지 말라’하는 그 말씀 같으면, 전에는 우리가 ‘아, 이거 행해서 구원 받아야지.’ 이렇게 나왔다면 다음에 이제 성령 받고 난 뒤 다 이루심을 알고 보면, 그 다 이뤘다는 내용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과 관련성 있게 이렇게 연관성 있게 다시 십자가만 드러내는 해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만 드러내는 해석.
그럼 절망적이에요, 절망적이 아닙니까? 어때요? 절망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로마서 6장 같은 경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다 이루심,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하여 같이 죽은 자는 그리스도가 살아나시매 같이 살아났다(롬 6:4, 6:3-11)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어떤 사람이 손 들고 “사도 바울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에게 네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는 그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물으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으이구,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듣네.
어린아이 같이 된다 하는 것은 그건 주님의 요구 사항인데 거기에 대해서 너희 쪽에서는 이미 불가능한 걸로 결론지어졌잖아요. 그 불가능함, 불가능하다는 그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돼요. 다 이루었다 표현으로 바꿔치기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참 쉽죠? 너무 쉽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전도하라. 어떻게? 무시로. 무시로 무시로~ 전도하라 했잖아요. 그럼 그 말씀 어떻게 지킵니까? 방금 예를 들었는데 응용문제 나가면 하여튼… 수학 정석 다시 봐야 돼. 응용문제 내면 또 못 맞추고…. 네가 무시로 무시로 전도하고 또 쉬지 말고 기도하고 뭐 어떻고 있잖아요. 사도 바울 편지에 쭉 나오잖아요. 있는 것으로 족하고 있는 걸로 만족하고 돈을 사랑하지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그 말씀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킵니까?
그럼 사도는 뭐라고 해요? 뭘 지켜, 지키기는! 뭘 지켜. 나 같으면 ‘다음 사람, 다음 사람’ 부르겠는데. 뭘 지켜? 왜 본인이 분류를 해, 본인이. 지킨 나와 안 지킨 나. 뭐 아로나민 골듭니까? 먹는 날과 먹지 않는 날이 확실히 다른. TV를 봐야 뭐 이해가 되지.
무슨 말씀을 지켜요? 아니, 말씀을 왜 지킵니까, 우리가? 우리는 다 이루었음을 확인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죄인을 여기다가 심어놨는데 지키긴 뭘 지켜요? 있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는 이 모습. 그래서 나는 내 힘으로 만약 이걸 지키려는 자체로 나는 죄인이 된다. 이 사실이 바로 타인에게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도 못 지키는데 네가 천국을 가?”라고 하면 뭐라 합니까? “그런데 가.” “뭐 무슨 기준인데?” “기준이 없어.” “뭐 그런 게 다 있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어.” “네가 미쳤구나.” “그래, 내가 사랑에 미쳤다.” ‘사랑에 미쳤다’가 오늘 요한일서 3장 아닙니까. 사랑에 미친 거예요.
어디 미치지 않고서야 요한일서 3장 16절, 미치지 않고서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떻게 형제를 위해 목숨은 버릴 수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예를 들면요. 동서끼리 같은 교회 다니는데 동서 아들이 신장암 걸렸다. 그래서 쓱 보니까 형님네 DNA하고 맞는 것 같은 느낌 들어서, “그거 두 개 있어서 한 개는 떼 줘도 산다는데, 그거 한 개 떼 주시렵니까?”라고 한다면 1번, 화낸다. 2번, 곰곰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본다. 3번, 떼 가라고 한다. 4번, 멱살 쥔다. 몇 번입니까? 정답은 ‘너 죽고 내 죽자’입니다. 너 죽고 내 죽자.
“네 새끼 살리는데 내 새끼가 왜 동원되어야 되는데? 내 새끼가 나한테 얼마나 귀한 자식인데.” 그러면 저쪽에서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쳤는데….” “시끄럽다! 내가 아브라함이가?” 그 현상을 보고 사도 요한이나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 이루었다.” 그게 ‘다 이루었다’에서 파생된 현상입니다. 파생된 현상이에요.
인간은 말씀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척하지만, 한 순간도 어느 순간도 어느 쉬워 보이는 말씀 하나 지킨 적이 없습니다. 괜히 자기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왜 우리 힘으로 못 지키냐? (벌레 하나도 못 쫓아내는데.) 다 이루심을 경유해서 말씀이 완성되는데, 인간은 다 이루심을 경유 안하고 ‘아, 요거는 내가 지킨다’ 그런 구절 보이거든요.
그런 구절 중에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온 구절도 있어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 딱 보면서 사람들은 뭐를 자신하느냐 하면 “원래 우리 집안 DNA가 양선과 온유는 끝내줘. 아버지 순하지, 엄마 순하지, 자식이 안 순할 수 없어.” 그걸 지 마음대로 양선이라 하는 거예요. 양선. 그게 무슨 양선입니까? 반드시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 될 때, 그게 온순함과 온유함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해석은 그건 주께서 안 받아주는 해석입니다.
지금 아까 그 질문이 아직 유효하니까 또 물어보겠습니다. ‘사랑으로만 과연 모든 세계의 현상을 조직화할 수 있습니까?’ 제가 물었죠. 그러면 답변은 예와 아니요, 예스, 노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쪽입니까? 네? 제가 뭐 어떤 속임수를 씁니까? 한두 번 쓴 거 아니지만. 예스에요, 노에요? 예스가 되지요.
이게 바로 성도로 하여금 아직도 세상을 살게 하는 이유입니다. 다 이루심이 네 몸뚱아리 거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가운데서 네가, 다 이루심과 십자가와 전혀 관련성 없는 것들이 어떻게 관련성 있게 나타나는지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되는 순간 순간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과 조직화가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정점에 있는 자기 트리를 평생 동안 현재 수립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 여기 있음’을 정점으로 해서 그다음에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나’가 있고 나에서 자기만의 세계가 형성되게 되면 여기서 두 분류가 생겨요. 두 분류가 생기는데 그거는 뭐냐? in과 out. 안과 밖이 생깁니다. 안과 밖.
저 사람은 내 편, 저 사람은 내가 배척해야 될 내 바깥으로 내보낼 자, 이건 내 안으로 거두어드릴 자. 이게 안과 밖이에요. 인간들이 이런 짓을 한다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어떻게 될까요? 똑같지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녀, 마귀의 자녀. 그 작업을 주님께서 완벽하게 다 현재 완성시켰습니다. 예수님 안이냐, 예수님 밖이냐. 그것으로써 의롭다, 악하다 모든 성경개념은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로 분류가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 입장에서는 이미 성도도 인간이잖아요. 인간이라서 인간 같으면 어떤 위치에 있다 했습니까? 나를 정점으로 세워서 나한테 유리하고 나한테 불리한 사람이 안과 밖에 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냐 하면 내 중심의 안과 밖 이것을 예수님의 다 이루심으로 이걸 바꾸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
너 어떻게 구원할까 하는 문제, 이건 아니고요. 우리의 구원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고요. 예수님의 안에 있으면 구원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면 이미 성령이 임했고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구원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구원된 사람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증인돼야 된다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증인이 뭐냐? 시작을 어디서부터 하느냐?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부터 하죠. 내 중심으로부터. 내 중심으로 하는 이 고집이 있는데 이 고집이 어떻게 돼요? 성령님의 강력한 그 힘에 의해서 내 중심이 뭐로 바뀝니까? 나 있던 자리가 주님의 뭐로 침투 공격 받아요? 다 이루심으로 공격받는 거예요.
그러면 내 중심은 나 중심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나의 사랑이죠. 그렇죠? 그러면 이것을 주님께서 다 이루심으로 공격하잖아요.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사랑으로 사랑을 공격’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사랑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공격할 때 이 사랑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 앞에 있는 사랑을 성경에서는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명기 같은 경우에 ‘나의 질투심으로’. 나의 질투심으로.
나의 너를 향한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질투성을 띈 사랑이기에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인 줄 알아라. 나의 사랑인 줄 알아. 상당히 허황되어 보이고 비구체적이고 비실제처럼 보이죠. 비실제적인 것처럼 보이고 너무 관념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이 실제로 이 역사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거는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서울강의202401212b 요한일서 3장 12절(사랑의 구조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요한일서 3장을 읽어보면 사랑이라는 게 굉장히 모호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겁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예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단정지어놓고,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굉장히 모호해요. 왜 모호하냐 하면, 모호한 이유가 우리의 평소에 인간 tree, 인간의 나무에서 행함을 하려면 어떤 개념이 손에 딱 잡히고 그다음에 그 개념을 내 행동과 맞추려는 이러한 식으로 그동안 인간은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해왔던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되기 전부터 인간은 이미 자기의 증인으로 살아왔던 거예요.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평생 동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증인이라는 게 낯선 개념이 아니에요. 이미 자기 자신을 PR(public relations, 홍보), 선전하는 식으로 모든 의식이 돌아가고 있단 말이죠. 그렇게 될 때에 ‘나는 사랑이라는 걸 했다.’라고 이렇게 자기가 잘났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늘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온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서로 사랑하라 하니까 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사랑하게 되면 여기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이게 딱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우리를 흥겹고 즐겁게 가볍게 해주는 게 아니고 더욱더 우리를 무겁게 만드는 말씀으로 이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뭔가 남아있는 숙제가 계속해서 있어야 되고, 그런 숙제로 오늘치 사랑했다면 내일 사랑할 것을 오늘의 사랑으로 퉁칠 수 있습니까? 안되죠. 오늘 사랑은 오늘로 사랑하고, 내일 만약에 미워했다. 그러면 또 나는 실컷 어제 사랑한 걸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줄 알았는데, 내일쯤 돼서 내가 미워하는 인간이 등장해서 막 미워했더니만 “요한일서 3장에 보면 네가 형제를 미워했기 때문에 땡 탈락이야. 취소.” 이러면 어떻게 돼요? 그럼 나오는 노래가 뭡니까? 난 어떡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끝에 계속해요. 난 어떡해~. 어떡해.
하여튼 입장 난처하게 만들어버려요, 요한일서 이 모든 글들이. 구원받고자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초를 치고 무거운 짐에다가 덤터기를 더 씌우고요. “뭐 적당히 사랑하면 안 됩니까?” “안돼.” “어느 정도까지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나는 그걸 사랑의 턱걸이했다고 보겠다.”
이렇게 나오면, “에라, 죽는 셈치고 뭐 신장 하나 내놓겠어요.” 이랬는데 신장 내놓고 난 뒤에 다른 교인이 와가지고 “나머지 신장도 내놔라.” 이거 뭐 도대체 어디까지…. 도대체 얼마면 돼? 사랑 얼마면 돼? 사망에서 생명으로 가는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가 투자할 사랑은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남아있어요? 몇 번 남아있냔 말이죠. 삼천육백오십여섯 번?
이런 점에 대해서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결론을 말씀드려야 돼요. 안 그러면 얼굴색이 더 검어질 것 같아요. ‘잃었다가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관성은 잃었다가 얻어야 돼요. 잃었다가. 안 잃은 채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자기를 증명하잖아요. 어떻게 때려죽여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발악을 합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해요, 자기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 자기를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잃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조치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죽음’이에요. 죽음. 그런데 죽음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기죽음. 조기죽음이 있고 두 번째는 만기죽음이 있어요. 만기죽음. 병장 다 따고 제대하는 거. 첫 번째는 일병 따고 조기 제대하는 거. 만기죽음은 육신을 거둬가는 거고요. 조기죽음은 율법에 의해서 죽이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죽인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가 적절하겠죠. 율법이 우리에게 준 것은 ‘선하다, 선하다’ 우기는 우리를 ‘악하다, 악하다’로 바꾸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선한 그 선함과 율법이 요구하는 선함이 수준차이가 너무 나요.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은 사람으로서는 달성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달성 못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선하다’가 달려있어요. 그럼 율법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어떤 경우라도 어떤 핑계도 소용없이 선하지 않은 게 돼요. 악함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 율법을 주심으로서 율법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극한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려줍니다. 극한적인 상태. 그게 뭐냐 하면 이사야가 이야기한 것처럼,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이사야가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안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안 달라졌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시선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 나는 달라졌다고 하든 안 달라졌다고 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그 자체로 망해야 마땅한 존재로 발각됩니다. 그걸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죄인 중에 태어났다고 하죠.
그러면 이 조기죽음에 의해서 인간은 뭐가 돼요? 죄인이 되죠. 죄인. 죄인인데 이게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은 처음 출발점까지 밀어붙인다는 거예요. 그러면 ‘전에는 착했는데 그다음에 화내서 악하다.’ 이렇게 궁시렁거리지 말고 끝까지 몰아붙이면 ‘애초부터 선한 것은 나에게 나올 수가 없다.’가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판단에서부터 해방이 되겠죠. 구원이 된다고요. 구원이. 나의 자기 판단으로부터 구출 받는 거예요. 내가 하는 어떤 판단도 이거는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을뿐더러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그런 상태까지 나아가게 돼요. 왜? 원초적으로 망하게 된 거니까.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자기 판단에서 해방되니까 나한테 책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책임이 없죠. 그럼 나에게 죄 있는 육신을 물려준 책임자는 누가 있어요? 책임자는 누굽니까? 울 아버지죠, 울 아버지. 울 엄마고. 울 엄마, 울 아버지는 그럼 누가 낳았습니까? 울 할아버지겠죠. 울 할머니고.
그렇게 나가면 누가 책임자입니까? 누가 죄의 책임자가 되죠? 원초적인 아담이 되겠죠. 그런데 아담은 죄를 책임집니까, 책임 못 집니까? 책임을 못 져요. 다시 말해서, 아담은 죄를 의로 바꿀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습니다.
자, 그러면 사랑은 뭐냐? “내가 왔잖아!” 하는 게 사랑이죠. 내가. 아담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아담 자리 거기 꼭 있어. 그거 지켜줘. 내가 그 자리에 끼어들께.”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수준으로 내려오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위세 떨지 않고 “내가 온 것은 사람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 함이라.” 인간 자리에 하나님이 같이 중첩해서 결합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 그러면 그 사랑 안에 내용이 둘이 되겠죠. 죄 없는 분과 죄 있는 인간,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랑의 증인되는 거예요. 내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여러분, 그것 좀 구분해야 돼요. ‘나는 나를, 내 잘남을 증명한다. 나는 증명하고 싶다. 나는 내 잘남 증명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간다. 난 이렇게 잘났다, 잘났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교회 갔는데 “이제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하면 그 사람은 그다음부터 뭐가 추가되겠어요? 나는 잘났는데 그 중에서 뭐도 잘났는가? 드디어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내 잘남을 증명하는 하나의 재료가 되겠죠. 그걸 주님께서는 거부하는 거예요.
성령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되지, 내 잘남의 증인 안 되거든요. 나를 증거하라고, 나 구원받은 것 증거하라고 성령 준 게 아니란 말이죠. 예수님의 증인되려면 예수님의 증인 요소, 그게 사랑이라 했잖아요. 그럼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랑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사랑 안에 두 가지 다 들어있죠. 주님은 죄를 대신해서 말씀을 다 이루신 의인이 되고, 그 의인된다는 것은 우리 육신 자체가 아담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 사랑의 요소로 결합되는 거예요.
사랑은 만남이에요. 만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의인이 죄인을 만남으로써 사랑을 이루었어요. 사랑을 이뤘다고요. 따라서 이 사랑이 일차적으로 오게 되면 율법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미 산 자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네가 죽었다는 말이야, 살았다는 말이야? 두 개 하지 말고 하나로 몰아세워. 응? 죽었다 했다가 살았다 했다가. 정체를 밝혀라. 너 어느 쪽이냐?” 하는데 둘 다가 있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요소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예수님의 증인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요소가 그겁니다. 죄인으로 오셔서 의인되셨거든요. 그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어야 ‘예수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사랑이 무엇이냐’를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거 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알아야 구원되는 겁니다. 사랑을.
사랑을 알아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거든요. 그 작업. 그 작업은 예수님 자신의 신분 자체가 죄인과 의인 두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었잖아요. 죄 있는 육신과 의로운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도 주님께서 성령을 주니까, 우리 육신은 이미 죄 있는 거니까요, 이미 마련되어 있으니까 성령만 오시면 뭐가 돼요? 죄가 의로 변하는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겁니다.
창녀촌에 일하시는 그분들이 손님 기다리기 심심하니까 화투를 친답니다. 옛날 이야기인데 요새도 그런지 모르겠어요. 요새는 화투치지 않고 휴대폰 보겠죠. 화투를 칠 때, 누가 와서 화투 있는 걸 다 뒤집어 펴놓는다면 어떻습니까? 신기한 일이겠죠.
죄인데 죄다 죈데 이걸 뒤집어놓는 순간 다 뭐로 변해요? 죄인데 의로 다 변해요. 죄가 의로 변한다고요. 이게 뭐냐?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잔칫집에 아무 쓸모없는 물이 잔칫집에서 가장 요긴한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를 예수님이 “내가 해줄게.”라고 하신 거예요. 가나 혼인잔치에서.
불신자한테는 이런 이야기까지 모호하기 짝이 없어요. 비구체적이고 허황되고. 왜 이런 성경이야기를 들이대도 그들은 그걸 모호하게 생각해서 ‘안 믿는다.’ 이렇게 나올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뭔가 강력한 거부 저항체제가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저항체제가 뭐냐 하면 내 잘남을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한 의식이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내 잘남을 밀어붙이는 의식이 어떠한 원칙에서 이뤄지는가? 이 부분이 조금 난해해요. 이제부터 난해하다고 내가 미리 선언했습니다. 그 점을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미리 그들 안에 가득 차있는 선점해있는 어떤 삶의 원칙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그게 놀랍게도 ‘진리’입니다. 진리.
인간에게 진리라 하는 것은 언어와 사물이 일치되는 것, 이걸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어와 사물이 일치될 때 자신은 ‘정답을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 이치를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의 정답을 알게 되면, ‘정답을 품은 존재가 “나”다.’가 되겠죠.
이게 바로 소위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옛날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정답을 이야기함으로써 여기서 뭐가 발생하는가? 권위가 발생해요. 권위가.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왔을 때, 그들이 의기양양했던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간음에 대해서 그들이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나는 바람피우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음죄에 대해서는 나는 간음죄 지은 적이 없다는 이 사실과 본인들이 일치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따라서 ‘나는 이 사람을 돌로 칠 자격은 있지만, 난 그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입장에 있지는 않다. 왜? 그만큼 고상하고 거룩하니까.’라는 식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를. 심지어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 데려와서, 예수님도 ‘이 여자는 잘못되었네. 그런데 당신들은 이 여자를 제대로 율법으로 나무라니까 당신은 옳네. 옳다.’ 그걸 예수님 입으로 듣고 싶은 거예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니까.
시험을 왜 칩니까? 시험을 치는 이유가 뭐에요? 시험이 없으면 내가 어느 정도로 정답률에 가까운지를 몰라요. 그런데 초등학교 1,2학년 때 수학시험을 치잖아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백점 안 맞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어린아이는 선생님이 찍어준 도장,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 시험지 들고 집에 가서 엄마를 보여줄 때, 자기 잘남을 증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보장받은 거예요.
막 흔들면서 가죠. “나 산수 백점 맞았다.” 그럼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잘했어! 오늘 맛있는 거 돈가스 해줄게.” 이렇게 된다고요. 내 잘함에 대한 뭐가 주어지죠? 보상이 주어지는 거예요. 내 잘함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내가 잘난 존재라는 내 평소의 의도에 딱 들어맞았다가 돼요. 평소 의도에.
만약에 어느 교회 1층에 기도실이 있는데, 이상하게 그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착착 된다면 그 사람은 그 교회 떠나겠습니까, 안 떠나겠습니까? 안 떠나죠. 자기 잘남, 자기 의를 증명할 수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된 적이 없어요.
물론 교회 떠나는 것은 기도응답 때문에 떠나는 그러한 순수한 이유가 아니에요. 교회 떠나는 이유는 돈 문제입니다. 내가 밀어준 목사가 차기 목사 안 되고 다른 목사가 오면 떠나버리죠. 왜? ‘그동안 그 교회에 돈 갖다 부은 게 얼만데 적어도 나도 지분이 있는데 왜 내 발언권 무시하느냐? 그러면 나 그 목사하고 같이 교회 안 다녀. 나중에 목사 나가고 난 뒤면 그 목사 나가고 갈게.’ 그런데 그 목사가 나갈 때 계엄을 선언하고 나간다면? 그럼 슬슬 한번 나도 나가볼까, 정계에?
이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 잘남, 내 발언 잘남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에, 우리 절에, 우리 성당에 신상 진리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신상 진리 확보되어 있습니다. 오셔서 우리 설교 듣고 믿기만 하면 진리에 의해서 진리의 나라 천국갈 수 있습니다.’ 그걸 선전해대는 거예요. 그걸 쉽게 말하면 ‘우리 교회는 역사적 정통성이 있습니다.’ 그거 비슷하게 하는 거예요. 절도 마찬가지고요.
성철 스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할 때, 앞에 있는 ‘산’은 실체 있는 산이고 뒤에는 그걸 언어로 표현할 때 산으로 표현한단 말이죠. 이 두 개가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이래서 성철 그 사람이 미쳐버린 거예요. 흐르는 물과 내가 표현하는 물이 같은 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왜?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수시로 변하는 세상의 세밀한 변화를 담을 수 없고 두루뭉술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 사랑이 뭔데? ‘좋아한다.’ 좋아하는 게 뭔데? 계속해서 그 단어를 표시하는 기표가 의미와 결합하려고 애를 써도 그 의미는 적절한 표현에 달라붙질 못하고 오래 가지 못하고 또 미끄러지고 다른 것을 또 요구하는 거예요. 처음에 결혼할 때 “나 당신 사랑해.” 해놓고 한 십년 뒤에 또 “사랑해.” “아이, 지겹다. 뭐 다른 표현 없나?” “좋아해.” 그 ‘좋아해’도 한 십년 가다가 “또 없나? 계속해서 좀 더 더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구사하란 말이야.”
자꾸 인간들은 타인으로부터 내가 붙잡을만한 적절한 단어가 자기에게 들려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 단어 듣기를 만약에 못하게 된다면 슬프죠. 그래서 장례식 치를 때 울잖아요. “아이고, 당신이 벌써 가면 안 되잖아.” 왜 가면 안 되는데요? 나의 잘남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구사하고 날릴 수 있는 당신이 먼저 당뇨 걸려 죽어버리면 내가 좋은 여자라는 것을 누구한테 들어요?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그것 때문에 섭섭해서 우는 거예요. 자식도 소용없다. 자식은 왜 소용없죠? 자식은 남편처럼 그렇게 ‘엄마, 좋아해.’ 이걸 다정다감하게 못하니까. 타인이 없으면 나도 없으니까 미치는 거죠, 이제. 제발 내가 진리대로 사는 의로운 존재라고 누군가가 제발 좀 나한테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제발. 참.
인간이 사물과 일치되지 않는 이유는 언어에 인간이 손질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손질을 하느냐 하면 인간은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두 가지를 합니다. 언어표현에 있어서, 하나는 포개는 방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바꾸는 방식이 있는데 바꾸는 방식을 전치(displacement)라 하고 포개는 방식은 압축(condensation)이라 합니다.
전치, 압축 이게 평소에는 잘 안 나와요. 어디서 나오느냐? 꿈에서 나옵니다. 꿈에서. 압축하는 것을 은유(metaphor)라 하고 전치는 환유(metonymy)라고 이야기해요. 은유, 환유라고 언어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왜 이렇게 나오느냐? 압축하고 전치하는 이유가 나의 허점, 나의 약점을 꼬깃꼬깃 누구도 찾지 못하게 깊숙한 곳으로 감추는 양상으로 내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 데리고 다이아몬드 파는 보석상에 갑니다. 여러분들 그런 경우가 얼마나 허다했습니까? “골라. 오늘 당신 생일이니까 당신 원대로 해봐.” 다들 열 번씩은 그런 경험 있죠? “아니, 가격 따지지 말고. 당신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당신 마음대로 해. 한도 없이 무한대로 해. 나 수표 긁을 준비되어 있어. 준비되어 있다고.” 그래서 “이거.” 한다고요. “이거 뭐? 얼마짜린데, 이거? 아이고, 오백만원짜리? 그것도 보석이야? 내가 쓸 때 한번 크게 써.” 그래서 딱 잡았는데 보니까 이억오천만원짜리다.
“여보, 내가 너무 무리했지? 미안해. 당신이 그렇게 큰소리치니까 한 거야.” 이렇게 아내가 이야기할 때, 아내는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하는 겁니다. 상황 따라서 그 동일한 문장이 동일한 문장이 아니에요. 내일모레 이혼할 사람 같으면 ‘빨리 돈 쓰고 빨리 갈라서자.’ 이럴 수가 있지만, 그게 아니고 남편을 너무 아낄 것 같으면 ‘내가 이거 샀다 치고 나중에 물러야지.’ 똑같은 문장이라도 그 속마음은 압축과 전치로 숨기는 방식을 사용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이미 아담의 후손으로 자기 약점을 갖고 있는 이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사랑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챙기기 바빠가지고 할 수가 없어요. 오늘 안양강의에 연세가 좀 되시는 어떤 집사님이 ‘아이고, 나 같은 것은 보청기해서 잘 들리지도 않는데 잠이나 자고 밥만 먹는데 내가 이번 수련회는 안 갈란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때 갑자기 주의 말씀이 탁 떠오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전하는 말씀 그대로 한번 써볼게요. 주의 말씀이니까. 상당히 공손하게 쓰겠습니다. 간증을 하시니까. ‘네가 듣는 자냐?’ 다시 말해서 이걸 좀 풀이하면, ‘네가 언제 내 말을 듣고자 했던 자냐?’ 그분이 이렇게 풀이해서 설명해줬어요. ‘네가 듣는 자냐?’ 이 말은, ‘네가 귀 밝을 때 귀 좋을 때도 언제 내 말 듣고자 했는가?’에요. 그럴 때 눈물이 팍 쏟아지면서, 그거 뭐 보청기 끼고 앞자리 앉으면 될 걸 괜히 안 들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 자기가 핑계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이 간증이 옳으냐, 실제로 있었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현상입니까? 내가 의인 되었다가 죄인 되는 거예요. 죄인 될 때 뭘 느꼈어요?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가 느껴지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될 경우에만 다 이루심, 나의 잘남에 가리워졌던 주님의 다 이루심이 드러나면서 그때부터 나는 뭐냐? 내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증인으로 이미 채택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또다시 상기되고 환기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말은 감추기에 급급하죠.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날선 검이 되어서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 잘난 맛에 사는 그 모든 본성을 완전히 수술하듯이 헤쳐서 주님의 증인, 사랑의 증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너는 책임도 못 질 지경에 빠져있는 죄인이다. ‘죄인이니까 잘하겠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 너 책임도 못 져. 하지만 그 화투짝, 시커먼 화투짝을 주님께서 뭐로 바꿨습니까? 의로 바꾼 거예요. 이 땅에서는 죽었지만 네 생명이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는 겁니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이 성경말씀이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동원해서 그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자, 요한일서 3장 성경에 나온 대로 봅시다.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둘로 분류됐죠. 둘로 분류된 겁니다.
이 대목을 전에도 설명했지만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제일 난처해하고 당황스러운 것은, 가인이 악하고 아벨이 선한 것 같으면 하나님이 정말 아벨을 선하게 본다면 선한 사람답게 사전 예방조치가 있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아벨 죽을 때 가인보고 멈추라 하든지 칼을 뺏든지 천사를 보내서 조치를 해서 안 죽도록 해야 안 죽은 상태에서 ‘아이고, 죽을 뻔했다.’하고 아벨이 주님을 증거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죽고 난 뒤에 오면 아벨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무슨 위로가 됩니까? 죽고 난 뒤에 복수해봐야 산 사람이 복수한 걸 죽은 사람이 본 적 있어요? 보기나 합니까? 아무 소용없잖아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마귀한테 못 따먹게 조치하는 게 아니고 따먹히도록 자기를 내줬죠. 누가요? 하나님 자신을 마귀한테 내주신 거예요.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온 거예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분이다. 왜 내놓는가? 지옥도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사탄이 죄지었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피해자 입장에서 지옥 판결을 내리시기 위해서 악마로 하여금 걸려들도록 만드신 겁니다. 걸려들도록.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기 위해서 악마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옥을 지옥답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악마는 개과천선을 못해요. 그리고 악마에 속한 자도 마찬가지고요. 인간 자체도 마찬가지죠. 본인이 스스로 반성해버리면 천국에 그런 인간을 넣어주지 않습니다. 아무 기준 없이 들어가야 되거든요, 천국을. 왜냐하면 천국 자체가 주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들의 노림수나 하나의 목표로서 천국이 되면 안돼요. 그러면 천국을 바라봤다는 것이 천국 들어가는 요건이 되어버려요. 그런 것은 안돼요.
주께서 생명나무로부터 추방시킨 것은 생명나무 먹는 것도 먹고 싶다고 해서 주지 않고 어느 누구도 생명나무에 대해서 먹고 싶은 게 아니고 오히려 생명나무가 왔어도 그들이 기피하게 만들어요. 아무도 생명나무 과일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결정되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주시는 겁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죠. 탕자. 어느 누구도 탕자 된 적이 없다고요. 날 때부터 자기 집에서 살았고 자기 집을 떠난 적이 없어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은 lost가 안돼요. 잃어버림이 안돼요. 자기 잃어버림을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가 안 잊어버립니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탕자가 되어도 탕자 될 수가 없어요.
구원되려면 잃어버리고 되찾아야 되는데 인간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어서 되찾은 적도 없어요. 잃어버린 것도 주의 뜻이어야 하는 겁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 점을 알아요. 잃어버렸다가 얻었다 하는 것은 누구 코스냐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에 관해서만 국한된 코스가 되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얻는 것, 그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아들, 누굽니까? 이삭의 코스에요. 이삭은 잃어버려야 비로소 수풀에 있는 양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존재로서의 차기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초청합니다. 나랑 같이 잃어버리고 나랑 같이 얻자. 이게 바로 성령이 보내준 초대장이에요. 성령의 초대장입니다.
한번만 하면 됩니까? 아니. 매일 해야 돼요. 매일. 매일우유 있죠? everyday 매일같이. 연세우유 말고 매일우유. 매일같이 잃어버리고 매일같이 잃어버리고 얻을 때 그때마다 다 이루심의 사랑은 인간의 어떤 행동, 태도에도 변함없이 계속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 오히려 사랑이 적용되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사로로 하여금 무덤에서 나오게 했거든요. 나오게 할 때 이상한 것은 나사로가 걸어서 나올 때는 이미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몸에 꽁꽁 감겨진 헝겊을 몸을 움직여 풀 수도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저 나흘 만에 살아난 나사로의 옷을 풀라고 했습니다. 그 옷이 무슨 옷이냐 하면 ‘죽음의 옷’이죠. 죽음의 옷.
인간의 육신을 주님께서는 죽음의 옷으로 간주해서 이 육신을 성령에 의해서 나중에 벗겨주게 되면 우리는 영광의 부활체가 되죠. 육신을 새로운 옷으로 덧입는다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러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어디서 파생되어서 나온 거예요?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육신으로부터 영광된 육신을 모델 삼아 거기서 나오는 일관된 모든 조치입니다.
예수님이 영광되면서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권한이 발생됐잖아요. 그러면 성령을 줄 때 성령에 무슨 내용이 있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영광을 얻는 그 순서 그 자체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주는 거예요. 이게 모호합니까? 이게 비구체성이에요? 구체성이 없는 겁니까? 이게 비실제적인 거예요? 가상적인 겁니까?
이사야 11장 6절 보겠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표범, 염소, 사자, 송아지, 살찐 짐승, 어린아이, 독사 이런 조합, 이런 동물들의 조합. 이렇게 조합할 때 인간들의 기존의 의미는 뭡니까? 독사는 독이 있다. 사자는 사납다. 인간세계에서는 그게 진리가 되죠. 진리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쓰는 단어를 갖고 와서 인간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인간에게 이미 진리라고 구축되어있는 이상은 못 받아들이는 말씀내용을 우리에게 들이미는 거예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에요. 이것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인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네가 너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도저히 못 받아들여요. 이 이사야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달달 외웠을 거예요. 언젠가 메시아 오면 말씀대로, 그들은 맨날 말씀대로라, 말씀대로 우린 이루어진다. 그동안 말씀대로 못 이루어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본인의 육신이 그걸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을 못 잡는 거예요.
자기가 마귀 편에 서서 자기 나름대로의 분류를 한 겁니다. 나한테 유리한 것은 안에, 불리한 것은 밖에. 나한테 잘해주면 선, 나한테 못해주면 악. 이미 인간이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자기가 떡하니 중심을 차지하고 있단 말이죠. 그것을 무엇이 공격합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그곳을 향하여 성령이 그 지점으로 날아오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분이 있을 자리에 우리 잘남이 거기에 박혀 있으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이 와서 매일같이 그걸 공격하는 거예요. 사랑이 내 사랑을 공격하는 거예요. 뭐라고? “죽어라, 인간아! 죽어라.” 죽으면 사랑이고 안 죽으면 미움이고 그런 거죠. 우리가 죽을 수 있습니까? 죽으라 한다고 죽을 인간이에요? 아니죠.
아까 조기죽음이 뭐라 했습니까? 말씀으로, 우리의 실상을 말씀으로 밝혀주죠. “아,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죽어 마땅합니다. 내가 이 땅에 살고자 했지만 사는 이유를 모르고 무조건 살고자 했는데 살 이유가 없군요.”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간단해요. “살 이유도 없는데 왜 살려주십니까?” “그거는 바로 너를 살려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내 나무의 한 열매로 이미 합류되어 있다. 내 안에, 내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일서를 한번 쭉 읽어보세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3장 15절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보세요. 인간들끼리 통용하는 언어의 진리체제에서는 이게 어려워요. 미움은 미움이고 죽이는 건 죽이는 거고 그게 같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라는, 주님 쪽에서 제시한 해석에 근거하면 나는 살인자 맞습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기뻐 날뛰며 춤추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결론내리면, 감사하면 성령의 일이고 ‘예. 알겠습니다.’하면 악마의 일이고. “예, 앞으로 잘할게요.” 하면 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또다시 잘난 존재로 증명하고자 하는 그러한 끈질김이잖아요, 끈질김. 아주 지독한 끈질김이잖아요.
그러면 이걸 여러분들이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매사에 살 가치도 없는데 주께서 주님의 사랑에 감복하라고 계속 하루 사는구나. 랄라랄라 라~” 노래 부르면서 가죠. 가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식구 또 만나가지고 다시 예전처럼 한바탕해요. 삿대질하면서 “니가~” 또 이제 시작됩니다.
주께서는 왜 그렇게 하느냐? 예수 믿는 잘난 그런 나를 증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 복음 아는 잘난 내가 나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 이루심 자리에 내가 건방지게 거기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내가 올라갈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 이루심 때문에 그 순환 고리를 또 돌려버려요. 회로를 돌린다고요. 회로를.
21절 볼 텐데 먼저 17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다 같은 취지에요.
주님께서 이런 상황을 우리한테 허락할 때, 너는 감사나 하라. 감사하라. “내가 못한 걸 주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의롭지 않고 주님이 의롭습니다.”하고 주님의 사랑만 높이라 이 말이죠. 내가 하려고 덤벼들지 말고요.
자, 21절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원했던 문장 있잖아요, sentence, 문장. 문장을 그대로 사용해서 다 이루심을 경유해서 우리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평소에 유대인들, 죄인들이 주님 앞에 자기 구원해달라면서 자기가 작성하고 자기가 생각해놓은 그러한 정답 같은 문장들이기 때문에. 지금도 종교단체 보면 이런 게 많아요. 책망할 것이 없고 담대하면 무엇이든 구하라. 주께서 들어준다고요.
그 계명은 바로 뭐다? 23절에 그 계명은 ‘사랑’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결국 오늘 강의의 결론은 뭡니까? 사랑에 두 종류가 있다.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랑의 두 종류는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다 이루신 사랑이 뭐를 친다 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치면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 “고맙습니다.”
감사가 나오는 그러한 다 이루심의 구조 안에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분류체계 안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 지키겠다고 나서지 말고 왜 나는 이 말씀을 내 잘남에다가 맞추어서 지키고자 하는지, 이러한 죄 많은 육신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다시 다 이루심 앞에 설 때에 십자가 앞에 설 때에 같이 이미 죽었고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