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아빠와 함께 2024. 10. 19. 10:22

서울강의202401017a 요한일서 3장 6절(품)-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3절부터 하겠습니다.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하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지금 이 말씀을 보면서 여기서 이 말씀을 성도한테는 굳이 줄 이유가 없이 되어버렸어요. 이 말씀 내용자체가.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깨끗하고 죄 짓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는데, 성도라는 자가 만약에 죄를 짓고 깨끗하지 않다고 한다면 무엇에 위반되느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방치했다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죄 짓지 않게 했으면 죄 짓지 말라는 말을 성도한테는 굳이 할 이유가 없죠. ‘네가 열심히 하라’ 지금 이런 쪽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네가 범죄하지 않도록 내가 조치했다.’ 그럼 성도는 ‘고맙습니다.’하면 끝나는 문제죠. 뭐 깨끗하라든지 죄 짓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고요. ‘형제를 사랑하라’ 이런 말도 필요 없어요. 주께서 형제 사랑하도록 해주시겠지. 내 일 아니니까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이걸 한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무리에요.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하나님께서 지켜줘서 죄 짓지 않는다는데 왜 굳이 깨끗하게 살아요?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말을 성도가 들으면 “저보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쪽 가서 이야기하라고요. 우리는 해당사항도 안되는데 왜 굳이 우리보고 이야기합니까?”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앞뒤 논리가 그래요. 논리가.

6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오케이. 범죄 안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잔소리하지 말라고요.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로 알 테니까 우리한테 그렇게 잔소리할 필요 없다. 죄 짓지 말라는 이야기도 우리한테는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안 듣겠습니다. 우리가 죄 지을 가능성이 있으면 이 이야기를 듣겠는데, 죄 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이 이야기를 성도보고 할 이유가 뭡니까?

더 심하게 말해서, 성도는 죄 짓고 싶어도~ 죄 짓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죄가 안 되도록 자꾸 조치를 했으니까, 죄 짓고 싶은 성도의 희망과 뭘 해도 죄 안 되게 해주시는 주님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께 적용시킨다면 여러분들이 이래야 돼요. 목사님, 죄 지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그때마다 주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서 ‘네가 방금 한 행위는 죄 아니다!’ 이러고 가니, 죄 짓는 나는 할 맛이 안 난다 이 말이죠. 죄 좀 지어보려 하면, 이건 분명히 죈데 주님께서 나타나서 ‘그거 죄 아니다~ 내가 죄 아닌 걸로 조치해놨어.’ 이렇게 된단 말이죠.

학교에서 재벌4세가 같은 반에 있는 좀 어리버리한 애를 쥐어 팼어요. 학교 폭력이 되니까 교무실에서 ‘너는 퇴학이야. 교육청에서 와서 너 문제 삼을 거야.’ 했는데, 그날 오후 아버지가 다녀가고 난 뒤 담임선생님한테 ‘저 죄 많이 지었죠?’ 했더니 ‘너 죄 아니다. 끝났어.’ 아버지가 아마 사립학교 후원금을 많이 낸 모양이에요. 애는 피투성이 돼서 지금 병원 가 있는데 다음 날 깁스하고 왔는데 죄 아니래.

그러면 이런 정황이 재벌4세에게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무슨 의미냐? 이 의미입니다. ‘개인은 없다.’ 개인은 없다는 거예요. 구약부터 신약까지 하나님은 개인을 개인으로 다룬 적이 없어요. 개별자를 개별자로 다룬 적이 없습니다. 개별자를 다룬 것은 누가 했냐? 마귀가 와서 그때 생긴 인식이 나는 개인이라는 인식이에요.

개인이 생겨버리면 그 개인에게 관심사가 주어지겠죠?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죄는 자기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뭐냐? 나에게 무관심한 것, 이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러한 관점을 여러분 장착하시고 요한일서 3장을 다시 보시면 죄라는 이 사실이 개인이 잘못을 했을 때 죄가 되는 게 아니고요. 죄란 개인이 자기에게 관심 두는 것이 바로 죄라 했습니다. 자기에게 관심 두는 것. 자기 영광에서 인간은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자기 영광에서 못 벗어나요. 그리고 인간이 자기한테 관심 두게 되면 스스로 자기 존재를 철회할 수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철회할 수 없어요. 개인이 자기 영광을 어떻게 벗어납니까?

여러분들이 성도니까 이게 뭔가 싶어서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성도 아니라면 주무셔야 돼요. 성도 아니면 주무셔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일이 상상을 초월해요. 인간이 24시간 자기에게만 신경 쓰고 관심 두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선악 기준은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게 바짝 긴장하면서 하루 종일 살아가거든요.

인간의 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에게 관심 있기 때문에 자기 실수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게 죄에요. 자기 실수에 대해서. ‘아차!’ 이러든지 ‘내가 등신같이 왜 그런 짓을 했지?’ 이게 죄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환경’에서 나와요. 환경. 환경 자체를 두고 죄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 자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도 그렇듯이 창세기 2장부터도 이미 인간은 환경 속의 인간이에요. 개인적인 게 없습니다.

여러분 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들 때 아담은 뭐했죠? 잠잤잖아요. 잠을 잤다고요. 인간이 잠자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한테 관심이 없어요. 잠은 인간을 존재에서 무(無)존재로 바꾸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잔다. 내가 잔다, 내가. 남이 자는 게 아니라 내가 잔다, 잔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백오십 여섯 마리,… 백만 이천 마리, 하다가 자버리면 꼴까닥 자는 그 순간에는 자기 존재가 날아가버려요. 자기 존재가 날아간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너는 잠이나 퍼질러 자거라. 잠자라. 네가 너 된 것은 잠자고 있을 때에 조성된 환경이고,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네가 마주 대하는 것은 환경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인간인데, 인간들은 그걸 자기 개인으로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어떤 사람인데 인간은 환경을 나중으로 여기고 내가 먼저 있고 ‘내가 그때그때 반응을 나타낼 환경은 어떤 환경이지?’라고 자기가 환경에 대한 평가나 거기에 대한 감각을 갖게 돼요.

그래서 인간의 선악기준이라는 것은 환경과 조율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선악기준이 달라져요. 환경과 조율하면서. 조율 아시죠?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하는 노래. 하늘이여, 조율 한번 해달라는 거예요. 인간은 그때 상황 따라 반응을 나타내면서 자기 자신, 개인이 잘했다 못했다를 판정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칙이죠. 이거는 엉터리입니다. 그거는 벌써 마귀가 만든 건데 그걸 저는 마귀의 새로운 피조물이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마귀한테도 적용됩니다. 마귀가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 아담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 아담의 후손이고.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라는 환경이 있잖아요.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조성한 아벨이라는 환경을 어떻게 했습니까?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 제거하는 작업을 했어요. 내 제사는 하나님이 안 받는데 네 제사는 왜 받아? 없애버려야 되겠다. 없앤다는 것. 자기 자신, 개인이 유지되면 그것은 선(善)이거든요. 자기에게 계속 관심이 유지되게 되면 자기는 선이고, 반대로 자기에게 관심 없어버리면 하나님이 내 제사에 대해서 관심 없어버리면 가인은 그걸 악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입장에서 계속 선하기 위해서는 누굴 없애야 됩니까? 동생을 없애야 돼요. 동생을 없애고 난 뒤에 하나님이 찾아왔잖아요. 그때 가인이 하는 말이,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나는 내 개별자, 나 개인만 지키면 되지, 내가 동생이라는 환경까지 신경 써야 되겠습니까?”(창 4:9) 이런 이야기해요.

그럴 때 하나님이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이 핏소리가 하늘까지 왔는데? 핏소리가 들렸는데?”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0) 가인은 ‘나는 개별자입니다.’ 그거 주장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 환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러니까 가인과 하나님 사이에 선과 악을 정하는 기준 자체가 달라요. 틀리다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돼요? 나한테 관심 있는 것을 나한테 무관심으로 돌릴 때 이것은 악에서 선으로 바뀌었다 할 수 있죠. 그럼 어떻게 하면 온통 24시간 나에게만 관심 두고 사는 내가 전혀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떤 환경이 오면 그렇게 되는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5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에게 죄가 없으면 죄 없으신 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우리 죄도 없이 하려고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분이 죄가 없이 왔는데, 우리는 마귀의 피조물이 되어 우리한테 관심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죄라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자기한테 관심 있으니까 새로운 주님의 환경을 덧입혀서 나한테 관심 두는 우리 환경 자체를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주면 되겠죠.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바꾸는 것은 윤리 도덕이에요. 윤리 도덕은 백날 해봐야 여전히 자기한테 관심 있다고요. 인간이 이 괴로운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를 해방시키고 자유를 더 부풀게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자기 의롭게 살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외부의 상황이나 내부의 상황가지고 계속해서 탐색을 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선악기준은 환경에 반응을 나타내는 식으로 자꾸 기준을 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경에 대해서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제대로 알게 되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다음에 ‘아니야, 아니야. 환경만 알면 안 돼. 내가 누군지 내 내부를 탐색하고 내 내부를 분석해서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그 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보다 나를 자유롭게 해방시킬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시도를 누가 많이 하죠? 작가들이 하죠. 인간의 내부 탐색. 여자들 갖고 다니는 파우치 또는 주머니. 주머니를 만드는 바느질 기법이 또 있어요. 홈질(running stitch, 바늘땀을 위아래로 드문드문 성기게 꿰매는 바느질법으로 옷의 터진 곳이나 구멍난 곳을 꿰맬 때 혹은 주름을 잡거나 솔기를 붙일 때 주로 사용) 겉을 만들고 창구멍으로 뒤집어버리면 하나의 동그란 주머니가 생기잖아요.

인간 내부를 탐색해서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이게 작가죠. 인간 내부가 이렇다. 그럼 그게 자유입니까? 그게 구원이에요? 파우치의 안과 밖을 아무리 뒤집어도 자기 속을 뒤집어내도 그게 행복을 보장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전히 자기한테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거기에 없어요. 인간은 거기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있습니다. 인간은 ‘있다’가 해당되지 않는 존재에요. 인간은 ‘있다’가 해당되지 않는 대상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여기 있다. 그런데 잠자게 되면 잠자면서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어요? 잠자면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잠을 잠으로써 이미 자기 생각에서 자기가 철회된 거예요. ‘잠을 통해 인간은 철회 당한다.’ 있다가도 없는 걸로 철회당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럼 잠 안 잘 거예요, 그래서? 버틸 겁니까? 계속해서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해도 나중에 잔다 이 말이죠. 그러면 버틸 때까지 있는 것 같지만 잠잘 때는 없죠. 잠깨면 또 있잖아요. 있음이라면서 뭐 그런 게 있어요? 있다가 없다가 없다가 있다가. 그게 뭐 있는 거예요? 계속 있어야지요.

인간은 철회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잠이라는 환경 속에 빠질 때, 잠 속에 빠질 때 인간은 철회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있다, 없다에 대해서 생각 못해요. 이 잠이라는 환경 속에서. 잠은 아담 뿐 아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계시를 줄 때 그렇게 잠을 자게 하셨어요.

창세기 15장 12절 “해질 때에 아브람이”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깊이 잠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잠들게 해요. 왜? 인간은 자꾸 환경과 조정을 하기 때문에. ‘조율 한번 해가지고 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립해보자.’ 자꾸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더욱 더 단단히 인식하게 되면 나는 그만큼 더 자유롭고 많이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러면 내 힘으로 내가 버틸 수 있다.’ 자꾸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의식이 사라져야 되는데 자꾸 자기 의식을 공고히 해요.

자기 의식에 더 천착하고 자기 의식을 공고히 하는 직업이 바로 작가입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오락으로 봐요. 자기가 자기와 갖고 노는 오락. 오락이 많은 사람들에게 동조가 되면 노벨 문학상 타는 거예요. 구원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락 쪼가리에요, 오락 쪼가리.

나는 내 내부를 이렇게 탐색했는데 너는 네 내부를 어떻게 탐색했냐? 남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오락과 즐거움에 돈 한 만원, 이만 원씩 주고 소설책 사보잖아요. 소설책 사들고 아파트 테라스에 할 일없이 다리 꼬고 원피스 입고 앉아서 커피 향기 음미하면서요. 그땐 홈드레스 원피스 긴 걸로 쫙 입어야 돼요. 그래야 우아하니까. 우아가 아니고 악이에요, 그거! 악이라니까요. 자기 영광, 자기 찬미, 자기 찬양, 자기 만족, 그런 겁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잠잘 때 사다리 내려왔잖아요. 물론 요셉도 마찬가지고요. 꿈을 꿨으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에 대해서 인간은 어떠한 근거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잠을 자고 있는지를 확정할 수 있는 자기 근거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여기 있다는 근거를 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뭐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일은 철회가 되지 않는다는 근거만 이 환경 속에 담아준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 성도의 특징은 뭐냐? 나는 철회되고, 나는 잠을 자고 치매 걸리고 나는 죽을 수도 있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철회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를 성도되게 보장하는 근거요, 환경입니다.

성도는 그 환경이 우선이에요. 환경이 먼저 있고 그 환경에 의해서 조율당하는 자가 성도에요. 왜 십자가지? 이렇게 되죠. 성도는 ‘왜 십자가지?’ 이렇게 되고, 불신자는 ‘왜 내가 여기 있지?’ 이렇게 되고. 성도는 ‘십자가가 뭐냐’를 탐색하고, 불신자는 ‘내가 누구냐’를 탐색하고요. 나는 채식만 먹고 살았다, 뭐 이런 거. 자랑이다, 그거!

광주 5․18때 사람들이 죽었다. 그거는 심각한 문제다. 그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철회할 수 없는, 하나님이 광주 때 사람을 죽게 한 그것이 십자가와 무슨 관계 있는가 그게 중요한 문제라니까요! 왜 선악을 본인이 결정해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나쁜 거고 그걸 위로하고 보듬어주면 착한 거고. 왜 본인이 결정하느냐고요, 인간은.

본인이 최종적으로 있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그래놓고 나중에 나이 70, 80되면 치매 걸려 죽어요. 70돼서 치매 걸렸다는 말은 40대는 뭔 뜻입니까? 치매의 예비단계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90에 죽었다면 70대에 걸린 치매는 뭡니까? 죽음의 징후죠. 90대에 죽은 그 노인네가 2살 때 뭐했습니까? 태어났다. 응애거린다. 그게 뭡니까? 죽음의 징후요, 치매 걸리기 전(前)단계죠.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 자아가 없어요. 자아가 있으면 환경과 조율하게 돼버려요. 자아가 있으면. 그걸 알고 아빠, 엄마가 애 하나 놓고 묻잖아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다고요. 네가 조율 해봐라. 지금 네 환경에서 네가 조율 잘 할 때, 네가 이익 얻으면 선이 되고 네가 손해 보면 너는 악이 되는 거야. 선악기준을 아빠, 엄마 함께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스스로 배우면서 자아가 돈독해지는 겁니다. 자아가 절대화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경 누가복음 15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있다고 인간이 아니고 잃었다가 얻을 때 인간이 돼요. 탕자. 이 교회 이름이 뭐죠? (탕자교회). 잃었다가 얻을 때 인간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에 인간이 아니에요. 그거는 마귀의 피조물들이 주장하는 거고, 잃었다가 얻어야 돼요. 잃었다가 얻어야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한테 유산을 미리 달라 해서 갖고 가죠. 그때 둘째 아들이 성공할 것을 기대했습니까, 폭삭 망하기를 기대했겠어요? 성공하기를 기대했죠. 그럼 앞으로 자기가 기다리는 환경은 자기의 성공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말하는 성공은 누구 성공입니까? 하나님 성공입니까? 아버지 성공입니까? 누구 성공입니까? 자기 성공이에요. 이게 전형적인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

그 아들이 밖에 나갔어요. 나갔는데 이건 누가복음 15장 한 대목 봐야 돼요. 누가복음 15장 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왜 갑자기 자기의 꿈꾸는 사업이 안 됐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기서 뭐가 들었죠, 14절? “그 나라에 크게” 그다음에 뭐가 들었어요? “흉년” 이거 누가 잘못된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흉년이 들어요? 난 아버지 유산 받아서 지금 사업벌이고 있는데 누구 마음대로?

코로나는 누구 마음대로 코로나에요? 중국? 중국 식품 시장에서 시작된 코로나? 중국 시장에서 발생시킨 거예요? 도대체 코로나는 누가 발생시켜가지고…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 경제가 다 망했어요. 아직 경제회복 안 됩니다. 코로나 시기에 돈을 너무 많이 버려가지고 코로나 이후에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해요.

애 적게 낳아서 소비 안하지, 코로나에 경제적인 충격이 너무 많아서 ‘야, 이거 돈 쓰면 안 되겠다. 나중에 무슨 일 또 터질지 모르니까 미리 예비하자.’ 해서 돈 꽉 쥐고 있으니까 경제가 안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가질 않는 거예요. 그럼 사업 벌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코로나 이후에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나을 줄 알기는 뭘 나을 줄 알아. 코로나는 3년이지만 자영업자 경기 안 좋은 건 지금 몇 년째 가고 있는지 몰라요.

그러면 코로나가 선입니까, 악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코로나가? 선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란 말이죠. 그런데 인간 보기에는? 개별자 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 보기에는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에요. 어려운 이야기 아닙니다. ‘내가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가’ 지금 이 문제에요. 내가 있다는 것은 근거가 없고요. 내가 있다-근거 없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근거 있음이에요. 왜? 십자가 사건이 있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현재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근거를 어디서 찾느냐? 내가 여기 만들어졌으니까 내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일 것이다. 내가 있으려면 창조주가 있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거든요. 창조주 하나님 믿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무슨 짓했습니까? 그 하나님을 어떻게 했어요? 죽여 버렸죠.

창조주 하나님 믿는 자가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렸으니까 어느 근거가 선이에요? 하나님이 인간한테 맞아죽은 이것이 진짜 하나님 됨의 유일한, 오직 하나의 근거에요. 다른 근거는 없어요. 유일한 근거가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만 근거가 된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구원의 근거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내가 존재하고 하나님이 나를 존재하도록 만들었다는 이 이야기가 결코 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조성한 환경이에요. 내가 나를 선한 인간으로 하기 위한 환경이에요.

신약 때, 구약 때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께서 모조리 흉년을 내렸어요. 흉년을 내리니까 인간은 위기가 찾아왔죠. 개별자적 위기에요. 위기가 찾아오면서 여기서 그들은 환경 바꿈을 생각해야 될 판이었어요.

나갈 때는 단독자로서 나갔잖아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단독자로 나갔다가 이제 다시 아버지께로 갈 때는 어떻게 됩니까? 단독자가 아니고, 아버지의 환경 안에서 새롭게 탕자로 들어오는 내가 되죠. 그럼 나는 아버지의 환경에 개별자가 아니고 부분이 되는 겁니다. 부분. 내가 나에게 전부가 아니라, 나는 일개 부분이 돼요. 전부는 아버지가 전부가 되고 아버지의 본질, 본성,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사랑 이런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particle, 부분이 되는 거예요. 내가 부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 집에 와도 개별자하면 안되죠. 게다가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히 꽁꽁 묶었죠. 왜? 반지를 끼워줬으니까요. 아들이 까불면 “야, 이리 와. 그 반지 누구 거야? 너 전에 먹은 소고기 다 게워내. 잔치 벌인 거 게워내.” 안되잖아요. 그 반지 끼우고 소 잡고 동네방네, 내 아들 돌아왔다 했어요.

돌아왔다 하니까 그 생각나네요.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월남에서 돌아올 때는요. 탕자로 돌아온 게 아니에요. TV, 카메라 사들고 돌아왔다고요. 그 당시 우리나라 월급의 100배가 넘으니까. 성공해서 돌아왔죠. 그러니까 그건 인간된 적이 없죠.

잃어버렸다는 것. 인간은 개별자로 있으면 절대로 자기를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치매 걸려도 자기를 안 잃어버려요. 그런데 원래 환경 입장에서는 인간은 잃어버린 자가 된 겁니다. 잃어버린 자. 내 환경에서 너는 집 나갔어. 집 나갔단 말이야. 너는 너 스스로 인간인 줄 알지만 아버지 환경에서 너는 사람 아니야. 그냥 잃어버린 자였어요.

잃어버린 자니까 이 탕자는 뭘 해야 돼요? 자리. 누구 자리?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절대화 시켜 만든 자리가 아니고 ‘내가 만들지 않은 자리’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는 자리, 이것이 바로 선(善)입니다. 이게 선이에요. 내가 만들지 않는 자리. 내가 만들지 않는 자리의 근거는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철회될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마귀가 지배하는 환경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절대로 영원히 철회되지 않는 절대 기준을 작성하는 데에, 만들어내는 데에 하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승리에요. 근거 없다고 이야기하지 마. 내가 만들었어. 이 예수님이 근거를 만들었어요. 인간은 개별자, 절대자, 단독자 일체 허용하지 않고 그것이 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절대 근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 방금 이야기한 것을 딱 한 자로 이야기하면 어떤 글자가 적당한가? 오늘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크게 쓰겠습니다. ‘품’. 탕자가 어느 품에 안깁니까? 아버지 품에 안기죠.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에게 하나님이 만든 자리가 있어요. 자기의 자리, 거지 나사로의 자리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어디 가죠? “품에”. 그런데 부자는 품이 없어요.

살아있을 때 부자라고 행세하던 그 행세가 그대로 이어져서 지옥가도 행패부리고 있어요. 물 달라고. 물 좀 주소! 물 맡겨놨나, 왜 물 좀 달라 해요. 우리가 목마르니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세요. 왜 너한테 물을 줘야 되는데? 목마르거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물을 줘야 돼? 진작 네가 거지되고 아프지. 그럼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데.

자꾸 혼자 살라고 하는 거예요. 마귀의 피조물이니까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꾸 혼자 살게 만들었어요. 혼자 탐색하고 연구하고 개척하고. 개별자로. 그러니까 아까 요한일서 3장을 보면서 보는 사람마다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자기를 개별자로 여기고 ‘아이고,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노?’ 걱정이 늘어졌어요, 걱정이.

불법을 행하지 마라. 깨끗케 하라. 그다음에,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 10절에. 걱정이 늘어지는 거예요, 이 성경보고. 괜히 봤어, 괜히 봤어.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 동서나 올케가 와서 행패부리면 미워하고 싶은데 요한일서 3장 10절이 생각나가지고 ‘미워하면 안 되는데…. 자꾸 자기 나이를 갈구는데 참을라 하니까 공황장애 올 판이고. 이거는 우울증 걸릴 판이고. 성질낼라 하니까 요한일서 3장 10절이 또 가만두지 않고.

심지어 요한일서 3장 16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큰일 났어, 큰일 났어. 큰일 났어요.

시험을 치는데 앞에 같은 교회 다니는 학생부 애가 있다. 자기도 학생부인데 언뜻 보니까 시험 시간에 몰라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시험지가 거의 백지다. 그럼 형제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너 내 이름 써라. 네 이름 내가 쓸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게 마땅하니라. 시험지를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장렬하게 자기는 꼴찌하고 형제는 그 반에서 1등 하게 만들고. 어떻습니까? 장하십니까?

이런 의식이 전부다 개별자에서 나와요. 개인의 착함이 나 개인을 구원시킨다는 의식이에요. 이게 마귀 생각이에요. 뒤에 오신 분들을 위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죄란 자기한테 관심 두는 걸 죄라 해요. 의란 자기한테 관심 없는 것. 자기한테 관심 없는 게 의에요. 자기한테 관심이 없어요. 탕자 주제에 뭐 이쁘다고 관심을 둬요? 탕자 주제에.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한테 무관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늘 잠자면 되죠. 늘 잠자면 돼요. 그걸 신약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미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말입니다.

환경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지 않는 환경으로 바꾸어준 것이 주님의 철회할 수 없는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존재에서 사건으로’. 또는 ‘존재의 품에서 발생된 사건화 된 나’. 나는 내 존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건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가 사건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주님의 부분으로서 살아갑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협조해주시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필요할 때마다 계속 살려내신다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야곱이 잠잘 때, 꿈꿀 때, 아브라함이 잠잘 때, 아담이 잠잘 때 그런 경우죠.

그리고 아벨 같은 경우는 잠을 너무 오래 자. 죽어버렸으니까. 형한테 맞아죽었으니까 오랫동안 잠을 자죠. 그러나 아벨이 비록 죽어서 잠들었다 할지라도 그 환경, 피가 발생된 환경은 하나님이 챙기고 가인에게 찾아가죠. 그러면 됐죠. 원래 아벨은 자기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자기 제사 받아준 것에 대해서는 그건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로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믿음이라 하죠. 자기한테 관심 없으니까 자기 믿음도 없어요.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또는 믿음의 부분. 예수님 믿음의 한 조각. 파이 한 조각. 예수님이 벌여놓은 파이 중 한 조각이 아벨의 입에 들어간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들어가고 이삭에게 들어가고. 각자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의 단면을 모자이크 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에요.

그러니까 개별자 또는 단독자라는 자체가 성경에서 성립 안 되는 이유가 근거가 없어 그래요. 존재한다는 근거가 없어요. 나중엔 치매 걸려 죽어버리니까 없어지니까 앞에 있던 것은 없어지기 위한 예비단계이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할 수 없어요. 영원히 있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이 그 있음 존재의 근거가 될 뿐이지, 있음이 죽음의 근거는 아니에요.

인간이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아담의 죄 때문에 죽어요.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이거 다 알고들 있는 이야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 드는데요. 왜 본인이 시건방지게 죄 지었다고 하느냐? “너 왜 수업시간에 자? 이리 나와. 손들어.” “선생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느그 조상 아담이 죄 지었다. 됐냐?” 지금 네가 말한 바,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자체가 죄야, 인간아! 그게 단독자잖아, 단독자. 아담의 연약한 육체를 받아서 국어시간에 막 졸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선생님은, 네 조상 아담을 깨우기 위해서 내가 정신 차리라고 벌 세웠다.

논법이나 논리가 간단하잖아요. 또 다시 이야기하지만, 참 쉽죠? 참 쉬운 거예요. 성도한테는 쉽고, 불신자한테는 뭐가 되겠어요? 미움이 되겠죠. ‘사랑은 미움에서만 주어진다.’ 만약에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개별자 내 사랑이 또 살아있게 돼요. 이거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나한테 관심이 없으려면 내가 기껏 주님한테 한 것은, 지독하게 미워했을 뿐이에요. 주님에 대한 미움 같은 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사업 벌이려 하니까 갑자기 코로나 터지는 거. 사업하려 하니까 갑자기 흉년이 드는 거. 누가복음 15장에. 왜 자꾸 나만 못살게 굴어? 이런 거요. 왜 자꾸 나만 못살게 굴어.

환경 자체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게 주님에 대한 미움입니다. 내 쪽이 미워할 때, 내 쪽이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미워할 때 비로소 그 미움을 근거로 해서 그 미움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요. 그러면 십자가가 철회될 수 없는 최종 근거는,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나는 네 미움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일체 탓하지 않겠다.’ 하는 사랑으로 오죠.

실컷 미움을 다 받아놓고는 그 미움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걸 사랑으로 죄 사함으로 갚아주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 사했다는 근거는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내놓은 거예요. 자기 목숨을 내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강력한 내 존재 위주의 삶을, 아예 근거 자체를 박탈하고 내가 강력하게 나는 여기 있다고 여겼던 그 근거에다가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 사건을 박아 넣는 거예요.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가능하지,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느냐?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강의202401017b 요한일서 3장 6절(품)-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존재의 사건화’라 했어요. 존재의 사건화. 이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했거든요. 인간들이 미워한 것을 모아서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인간들이 미워했음에 대해서 그걸 미움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극한적인 미움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걸 만들어버렸죠.

피조물이 하는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은 그걸 극단화시켜버려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돼요.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철조망 쳐놓으면 될 걸 가지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약을 실컷 올려놓고 따먹었다고 내쫓고 그거 반칙 아니냐?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할 것 같으면 나중에 십자가 지시고 그런 골치 아픈 절차를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으로 처음부터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든지, 안 그러면 아예 심어놓지를 말든지 그러면 인간들은 안 망하고 하나님과 평화롭게 살 수 있는데 왜 선악과 따먹게 해서 이렇게 노출되게 했느냐?

하나님은 피조물이 하는 일을 하나님 안에서 극단화시켜버려요. 하나님 스스로. 조금 미워해도 ‘절대적으로 미워했다’로 해석해버린단 말이죠. 그건 피조 존재를 하나님 자신이 희생당하는 십자가 사건에 필요한 소스, 재료로 끌어당겨서 그래요.

인간은 조금 미워했지만, 하나님은 많이 미움 받은 걸로 그렇게 간주를 해놓으셨다는 말은 이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요. 오늘 요한일서 본문에도 나오죠. 여기 사랑이란 말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11절에 나오죠. 사랑이 나온다고요.

십자가 상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이 주님을 미워했다. 미워한 거 맞잖아요. 미워했으니까 돌아가셨죠. ‘우리가 미워했는데 주님은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한다.’ 이건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개별적인 존재가 천국에 들어오는 이런 불상사가 생겨버립니다. 천국에서 우리 이름은 주의 이름에 예속된 이름이 되어야 돼요. 주의 이름의 일부가 되어야 되지, 내 이름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어요.

그걸 어려운 말로, 내 존재는 주님 존재에서 뻗어 나온 가지다. 이 가지 하나하나가 사건화 되어서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주님의 이름만 찬송하고 받은 면류관도 주의 이름 앞에 던지게 되는 계기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자신이 받은 미움을 극대화시켜버리면, 여기서 나온 능력도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상처 주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주님을 밉게 하는 일로 해석이 우리에게 도달되어야 되겠죠. 그런 해석이.

그게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 이거 담당이에요. 인간을 사건으로 전환하는 담당자가 옵니다. 그걸 보혜사, 성령이라 하죠. 성령이 오게 되면 요한복음 16장 8절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뭐한다? “책망하시리라”

책망한다는 것은 앞으로 잘하라는 게 아니고, 죽을 때까지 책망을 받는 거예요. 성령으로부터. 왜? 이미 사랑을 받았으니까. 이 사랑으로 인하여 어떤 책망도 사랑은 그 책망을 너끈하게 능가하는 죄 사함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우리는 책망 받으면서 기쁨과 감사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책망 받으면서 나오는 것은 감사죠. 책망 받음에서 나오는 것은 감사입니다.

그럼 책망은 왜 하느냐? 인간의 존재성 때문에 그렇죠. 존재를 사건화 만들기 위해서. 이 사건의 적은 뭐냐? 내 존재를 존재라고 꽉 움켜쥐는 것, 이게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미움으로 그렇게 간주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주님, 오늘은 어느 쪽을 먹어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 ‘너 죽을래?’

네가 뭘 먹든 그게 십자가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이 말이에요. 아무거나 먹어. 아무거나. 네가 아무거나 먹고 네가 뭘 해도 너에게서 나올 것은 나에 대한 죄밖에 안 나온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먹어. 짬뽕 먹고 죄 지을래, 짜장면 먹고 죄 지을래? 뭘 먹어도 나오는 것은 한결 같이 죄이기 때문에 네 마음대로 잡수세요. 네 마음대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내가 유럽에 가는데 독일 갈까, 프랑스 갈까, 영국 갈까? 아무데나 가. 어디가도 죄니까. 네가 프랑스 가면 내가 찾아갈 거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거야. 독일 가도 마찬가지야. 독일 가도 마찬가지에요.

요한복음 16장 9절에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존재가 개별자가 되고 개인의식을 갖고 있으면 모든 선악은 본인 존재를 존재로 유지하기 위해서 환경과 조율하면서 그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주는 거예요. 반응을.

한국에 있으면서 김정은이 나쁘다 하는 인간을 김정은이 초청해서 ‘목사님, 우리 평양에 오시렵니까?’ 평양에 가니까 호텔에 여자 넣어주고 그다음부터 용돈도 주고 쇼도 해주고 하니까 갑자기 김정은에 대해서 어떻습니까? 남한에 있다가 어디로 갔어요? 환경이 북한으로 바뀔 때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사진도 같이 찍고 하죠. 그거 왜 그렇습니까? 내 존재가 존재로 환영받고 유지되는 이것이 선이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김일성, 김정은 욕하는 것이 표를 많이 얻는 내 선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늘 이렇게 회까닥하는 거예요. 상황 봐서 그때그때 달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인간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존재는 근거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음’ 그것뿐이고, 왜 있음? 모르겠음. 너는 오늘 왜 있었는데? 모르겠음. 내가 왜 있는지 모르겠음.

아무 이유도 없이 무의미한 채로 그냥 시간만 소비하고 있어요, 그냥. 모든 인간이 다. 계속 시간 소비하고 있어요.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 내년되면 또 바뀌는데? 떡국 먹고 한 살 또 바뀌는데?” 늘 바뀌어요. “도대체 당신이 42에요, 43이에요?” “올해는 42이고 내년에는 43이고.” “어느 게 맞습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이러고 있다고요.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나중에 죽게 되면 그다음부터 나이가 중지돼요. 그러면 이 땅에 사는 것은 중지되는 나이에 대한 예비단계죠. 예비단계에요. 종결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종결된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종결된 적 없고 그냥 무작정 갈 때까지 그냥 가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그냥 가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는데, 그 미래가 점선으로 되어 있거든요. 실선으로 가다가 점선으로 되어 있는데 이 점선에 대한 무지, 모름. 모른다는 말은 앞의 실선도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이것도 몰라요. 노벨상 타고 그 다음날 자살했다. 이거 뭐에요? 노벨상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게.

나의 일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진짜 근거 있는, 영원한 근거 있는 존재자, 주님의 사건화 된 사건의 모습으로 나는 하루하루 주께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살려주셨다 이 말이죠.

그럼 십자가 사건에서 두 가지가 나와요. 십자가 사건 다음에 주께서 하신 일이 뭡니까? 부활이죠. 십자가 사건에서 부활이 나올 때, 모든 인간이 십자가 사건에서 사건화 되어버리면 여기서 두 가지의 부활이 나와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처럼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또 하나는 뭡니까? 심판의 부활로.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로 나왔으니까 단독적 인간, 개인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죠. 주님의 십자가 사건화 된 인간들만 있고 두 부류로 나뉘어져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어요. 골라잡아 잡아, 할 것도 없어요. 이미 다 분류가 된 상태의 두 종류 인간만 부활되기 때문에 이 부활을 다시 거꾸로 십자가 안에 집어넣으면 십자가 사건은 심판이고 구원입니다. 심판이고 구원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심판과 구원은 일방적으로 하나님 권한이에요. 뭘 통해서? 피조물에게 일어났던,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고 마귀도 포함됩니다, 피조물을 통해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선 그걸 자기 사건화시켜 버립니다. 자기 사건화. 일방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근거에다 그들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일서에 아까 성령 이야기 있잖아요. 요한일서도 성령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보혜사가 너희에게 찾아왔으니”라고 되어 있다고요. 보혜사가 찾아왔다는 것은 네 존재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새로운 환경이 생명의 부활이라는 환경이 너를 덮쳤다는 거예요.

너를 덮쳤으니까 더 이상 네 자신의 개인적인 행동에 대해서 네가 관심 둘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관심 둘 이유가 없고, 이 행동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꽁꽁 묶겠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일도 십자가 사건과 관련지어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떤 일도. 성도한테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죄 사함의 능력이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자체가 영원한 근거가 도달했다는 거예요.

불신자한테는 성령이 안 오잖아요. 그들은 뭣도 모르고 개인위주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책망을 누가 해요? 자기가 환경보고 선과 악을 본인이 판단하는 거예요. 남한에 있을 때나 북한에 있을 때 자기가 어느 것이 내 존재를 유지할 수 있고 존재를 건사할 수 있고 존재를 지킬 수 있을까. 그것만 통밥 굴리면서 계산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해에 보면 보리암(菩提庵)이라는 절이 있답니다. 암자라 할 수 있어요. 보리암이니까. 남해 보리암이 유명한데 대구 갓바위보다는 유명하지 않지만 경치도 좋을뿐더러, 경치가 아주 좋대요, 또 기도가 그렇게 잘 된다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불교 신자가 자기 죽은 조상, 그것도 불자(佛者)를 여기다 맡겨서 사십구재 장례를 치렀어요.

맡겨놓으니까 그 보리암 주최 측에서 이야기하는 게 그냥 사십구재 예배 드려주고 제사 드리면 되는데 이 죽은 영혼이 사십구재 떠돌다가 이제 구천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날 목욕을 하고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목욕비를 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목욕비를 냈죠. 목욕비를 내니까 이번에는 그냥 가지 말고 말 타고 가야 죽은 세상에서 대우 받는다고 말 타는 비용을 내라는 거예요. 뭐 놀이동산도 아니고.

지금 이 보리암이라는 불교 처세, 행동에서 근원적인 문제점이 뭡니까? 여기 불자라는 사람이나 중이나 모두 다 개별자에요. 개별자. 본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본인들이 신이에요. 자기 존재를 위해 저 사람을 이용해서 얼마나 빼먹는가,에 모든 걸 다 쏟죠. 상대의 약점을 노리면서 죽은 귀신 붙들고 이용해가지고 돈만 빼먹고 자기 존재를 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외에는 없습니다.

이걸 이렇게 생각해야지, 저들은 뭐 하나님도 안 믿고…. 그럼 교회는 하나님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죠. 자기의 기도를 믿고 자기 헌금을 믿잖아요. 무슨 십자가를 믿어요? 십자가를 믿으려면 능력이 와야 돼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거예요.

그 책망은 아주 극단적인 책망이에요. 자기는 짬뽕만 먹었을 뿐인데 짬뽕 먹은 것도 죄가 되는, 그것 또한 주님에 대한 미움이 되는 식으로 해석되어 버리는 거예요. “왜 먹었어? 왜 먹었어!” “배가 고파서 먹었어요.” “네가 배불러서 뭐하려고 하는데? 네 존재를 확고히 하려고 한 거 맞지?” “맞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사건화 되라 했어, 안 했어? 네가 이미 부활에 들어갔다는 걸 알아, 몰라? 응?”

나는 너에 대해서 탓하지 않아. 하지만 네 속에 십자가의 정신과 위배되는 것은 놓치지 않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나님 하시는 걸 내 것으로, 내 존재를 강화시키는 보험 들어놓는 식으로, 나를 사수하고 지키고 보호하는 식으로 성경말씀 인용하고 그걸 자기에게 끌어당기는 것, 그건 주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에이, 목사님. 그건 복음 모르는 불신자들이 하죠.” 우리는 돌아서면 불신자 돼요. 말씀들을 때는 또 이상하게 pretend, ~인 척 이렇게 되죠. as if, ~인 것처럼. 그러나 돌아서면 전부 다 불신자 돼요. 불신자 된다고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화를 위해서 구약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중심의 일들이 어떤 경로로 주님에 대한 오해와 곡해를 낳았는지 구약 한 구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구약 사사기를 통해서 보겠습니다. 사사기 19장 29절. 19장 25절 한 절 읽고 그다음 29절 읽겠습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27, 28절에 그 주인이 보고 떠나자 했는데 여인이 죽었으니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29절,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열두 토막 살인사건이에요. 레위인이 자기 첩 시체를 열두 토막 내어서 각 지파마다 택배로 다 보낸 거예요. 새벽탁송으로 다 보내버렸어요. 왜? 바로 정의구현을 위해서. 20장은 없다 치고 19장까지 딱 봤을 때, 그 다음 이야기는 한강 작가한테 맡겨야 돼요. 자, 이럴 경우에 어떤 조치가 있는가? 한강 작가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 내용이 20장에 나옵니다.

누가 정의래? 누구야? 누가 정의를 외쳐? 피해 입었다고 정의를 외칠 권한이 있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피해자가 되었다고 정의를 외칠 권한이 있어? 다시 말해서, 도대체 이 세상에 피해자라는 게 성립이 되냐 이 말입니다. 피해자라는 게.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사사기 21장 25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소견이 되려면 소견은 어디서 나오는가? 개인이 개별자일 경우에만 소견, 개인의 의견이 나오는 거예요. 개별자에서 나오는 거예요.

피해를 입었으니 복수를 해달라고 열두 지파에 호소를 하는 것은 이게 정의의 이름처럼 들리죠. 그리고 그 택배를 받았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탄식하고 개탄하면서 ‘어떻게 하나님 율법이 살아있는 나라가 이 지경으로까지 윤리 도덕이 나락으로 떨어졌는가. 이것은 참으면 안 되지. 다 같이 분기 내어서 일어나야 돼. 그리고 그 범인을 색출해서 다시는 이런 참혹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다수가 여기에 대해서 손을 봐야 된다.’

이건 뭐냐? 집단주의죠. 개인주의가 합치면 집단주의 되고 집단주의 속에 개인주의가 다 모여 있죠. 개인의 집합이 집단이에요. 집단의 부분집합이 개인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전부 다. 개별자 의식이 공유되면 집단이 되는 거예요. 바벨탑처럼. 여기에는 뭐가 흐르는가? 각자 개인이 갖고 있던 힘의 논리만이 작동합니다. 힘의 논리만이.

그런데 사사기 20장 내용 다 아시죠. 정의를 외쳤던, 누가 봐도 정의의 심판자로 자처해도 충분히 무방한 베냐민 지파 외에 나머지 지파들이 베나민 지파한테 아주 작살납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개별자에서 끄집어내는 그러한 정의, 그러한 공의는 하나님 앞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정의를 정의라고 받지 않아요.

사사기 21장 25절에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할 때, 여기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 소견대로 했다면 왕이 있다면 이건 어떻게 됩니까? 왕이 있다면 개인의 소견대로 행하지 못할 환경이라는 거예요. 왕이 있는 새로운 환경이 오게 되면 왕의 의견 앞에서 더 이상 개인 의견은 성립될 수 없는 환경을 미리 여기서 내다보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의 역할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적인 심판입니다. 심판이에요.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 대한민국과 똑같아요. 이 세상 82억 인구와 똑같아요. 각자 소견대로 해요. 소견대로. 군에 가도 탈영을 하지 않나. 북한군 이야기입니다. 김정은이고 김일성이고 없어요. 자기가 죽을 판인데 도망칠 수밖에 없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뭐가 없느냐? 품이 없어요. 포근하게 안기는 품이 없어요. 품에 대해서 시편에 잘 나옵니다. 시편 131편에 보면 1절부터 3절밖에 안되니까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어때요? 이 시가 한강 시보다 훨씬 낫죠? 한강 시는 뭔가 해답을 얻고자 하는 거고 이것은 이미 해답을 얻은 이후에 평화로움 속에 나오는 시잖아요. 찬미잖아요. 찬미. 3절에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제넘게 내가 끼어들지 말게 하옵소서. 이미 근거 있는, 철회될 수 없는 확정된 그 일, 사건의 일부로서 하나님께서 늘 움직이고 있음을 감사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시편에서 비슷한 내용인데 숫자가 서로 바뀐 게 있어요. 하나는 시편 37편과 또 하나는 시편 73편. 외우기도 쉬워요. 삼칠, 칠삼. 우선 시편 37편부터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아까 분명히 제가 언급했습니다. 영생의 부활이라는 집단, 그리고 심판의 부활이라는 집단, 두 개의 집단화된 그 집단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능력에서 나오는 사건들이 거기에 모인 거예요. 사건들이. 다수의 존재가 있는 게 아니고, 하나의 존재로 인해 발생된 사건의 혜택, 은택을 입은 선물 받은 자들, 은사를 받은 자들의 집합이 영생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이에요.

성도끼리 존재를 다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코가 눈더러 눈이 발더러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발은 발대로 하는 일이 있고 코는 코대로 하는 일이 있는데 네가 왜 탐을 내느냐.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 이야기할 때 그렇게 된 거예요.

키 큰 DNA로 키 큰 사람, DNA상 키 작은 사람 다 있는데 키 컸으면, 맨날 키 컸으면 하고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거예요. 키 커서 뭐할 건데? 그게 일대 일로 비교하고 자꾸 대조를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모든 정신병은 대조에서 오는 거예요.

누구의 대조?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아버지와 나의 대결 중에 거기서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상처 입은 것이 크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아버지면 아버지지, 나를 왜 학대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난 아버지니까 나한테 꼼짝 마라 이런 식으로 가족들을 아버지의 명예를 위한 희생물로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내가 아버지 같은 인간되면 내가 진짜 죽는다. 아버지를 원한의 대상, 복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대단했던 아버지가 나중에 치매 걸려가지고 ‘야, 나 아프다.’ 연기하면서 올 때, 연기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지만. ‘나 너 아니면 못 산다.’ 이러고 기어들어오거든요. 혼자서. 그때 복수하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잘해주면 되죠. 드디어 난 아버지 자리를 빼앗았어. 아버지가 이제 나한테 빌빌거려. 그걸 또 아버지가 눈치 채서 안다고요. 개코도 돈도 없으면서 또 아버지라고 큰 소리 친다고요. ‘너 나 무시하지?’ 가끔 술 한잔 먹고 들어와서 ‘너 나 무시하지?’

이건 뭐 끝까지 아버지의 위세와 권위를 유지하려 할 때, 도대체 남한테 보탬이 안 돼. 도움이 안 돼. 일평생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자기 개별자 때문에.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는 그 개별자 의식 때문에 그래요. 왜? 자기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외에 다른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의 나 됨의 유일한 근거가 내가 남한테 밀리지 않는 그 근거.

그래서 여기 37편에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존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심판의 대상, 저주의 대상으로 나중에 사건화 되고 발각될 거예요. 존재를 존재로 보지 말고, 사건이 뭉쳐져 있다고 봐야 돼요.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건이 아, 저런 모습이구나.’ 그걸 그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파악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73편. 73편은 아주 노골적이에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뭘 깔아놨어요? 왜 미끌어져요.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그다음 뭡니까? “질시하였음이로다” 질시했다. 질투했다는 거예요.

질투라는 것은 대비하고 대조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지는 좋은 인삼 뿌리 먹고 나는 이게 뭐야? 무 뿌리 먹고 이게 뭐야? 4절,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거 우리의 소망 아닙니까? 이런 게. 돈 되고 건강 되고. 나이 많아서 돈 되고 건강 되면 재앙 없고 말썽 없고 다복하고 행복하고. 더 뭐 집어넣을 내용이 없죠? 뭐가 없습니까? 책망, 성령의 책망이 없죠. 잘 되니까 잘 된 만큼 자기가 잘 된 것 가지고 단독자, 개별자, 개인으로 나설 때 그걸 교만이라 해요.

교만이 목걸이가 된다. 6절, “교만이 저희 목걸이”가 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목걸이가 있는데 안에 글자가 있어요. ‘교만’. 나 대단해, 이거. 교만이에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자기의 안정됨에서 뿜뿜 뿜어져 나오는 그 힘으로 자기 옷을 해 입고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눈 튀어나온 것도 문제다, 그쵸?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본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자, 이것이 구약의 한계입니다. 구약의 한계는 뭐냐 하면, 계속해서 개인이 개인적으로 선과 악에 대해서 본인이 기준을 만들어요. 정의로움, 사랑, 자비 이 모든 것이 개인이 잘 될 때 그게 선이고 그게 잘 될 때 그게 정의로운 일이며, 본인이 못되면 그건 불의한 거라는 인식. 이 개인의 인식을 아까 그 사사기 마지막에, 그들이 뭐가 없으므로? “왕이 없으므로” 생긴 마땅한 결과는 소견대로 사는 거예요. 개인플레이를 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즘은 왕이 계십니까? 소문 듣기는 그리스도가 왕이라면서요. 소문에. 그런데 행동하는 거 보면 개인플레이잖아요. 어디가 잘못된 거예요? 왕이신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뭔가 전달되는 게 없어 그래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게 없어서 그래요.

요한복음 16장 그 대목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같은 말. ‘너의 개인적인 죄 인식으로 인하여 주님이 결정해놓은 죄가 가리워진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결정한 죄’는 뭐냐? 주님이 결정한 죄는…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죽은 자한테는 새삼스럽게 선과 악이 없습니다. 선해도 그것 또한 죄고 악해도 역시 죄고. 이게 주님이 보시는 결정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속에 자체적인 선악기준이 있어요. 그런데 이 선악기준은 어떻게 만들어냈습니까? 환경 따라 그때그때마다 자기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면서 선악기준을 삼으니까 이건 구차한 핑계요,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나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이런 식으로요. ‘아주 악하진 않았잖아. 우리 자식새끼 먹여 살리는데 그것도 용납 안 되나?’ 이런 식으로 자꾸 변명조로 나오는 거예요.

그 개인적인 죄 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을 때, 주님의 죄 의식으로 이것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것을 책망한다 이 말이에요. 주님의 죄 의식으로 책망 받는 거예요. 책망 받는다면 이미 이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제가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자기한테 관심 두는 것이 죄라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자기한테 관심 없는 것이 의다. 내가 잘했다, 못했다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주님 주신 선물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죄 사함의 선물이에요. 책망조차도 선물이에요. 감사하죠.

흉년이다. 뭐 어쩌라고? 배추 값 올랐다. 뭐 어쩌라고? 배추 값 오르면 배추 안 사먹으면 되지.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사업이 안 된다. 무슨 개인적인 사업이 어디 있어요? 주님 십자가 사업밖에 없죠.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나한테 또 달려들 거야? 나를 또 미워할 거야? 이렇게 되죠.

그다음에 “의에 대하여” 다 같은 말이에요. 죄나 의나 심판은 전부 다 한 사건에서 파급되고 파생된 거예요. 십자가 사건에서 파생된 겁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것은, 너희들은 뭘 해도 죄인이다. 왜? 나만이 아버지한테 가니까. 사요나라. 잘 있거라. 바이바이. 너희들 놔두고 나 혼자 간다. 너희들은 아버지와 합류할 수 없어. 죄인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의에 대하여 책망하는 거예요. ‘그렇죠. 주님만 의인이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을 심판했던 그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 자, 임금 나와요. 아까 사사기 마지막에 뭐가 나온다 했어요? 왕 나오죠. 이제 그것만 설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왕.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은 자. 이스라엘에서에요. 이방나라 임금 말고 이스라엘에서 왕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모든 개인은 왕에게 종속, 예속됩니다. 예속되는 방법은 어떻게 되느냐? 왕이 없을 경우와 왕이 있을 경우 어떤 차이인가? 왕이 없을 때 하나님과 통했던 것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있을 때는 대제사장이 왕 밑에 가요.

그 말은 대제사장, 레위 언약의 결과가 각자 자기 소견대로 나와 버렸어요. 그만큼 이 제사장이나 레위지파에 대한 대우가 시원찮았다는 거예요. 관심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사사기 시대에 이방나라 따라 하기가 너무나 유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나라 따라 하기.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섬기는데 그들은 아주 매진했어요. 경쟁적으로 바알을 섬겼습니다. 경쟁적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새로운 환경이 주는 새로움의 매력을 고사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에요. 새로움이 주는 매력. 그럼 어떻게 돼요? 레위 제사법은 다 구닥다리다. 옛날식이다. 지겹다는 거예요. 제사도 지겹고 다 지겹다.

이게 어디서 나왔어요? 개인 의식, 개인주의 의식에서 발생된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뭐 기쁠 것도 없는데 무슨 하나님을 기쁘게 해. 그러니까 점점 더 기쁜 것을 향하여 가는 거예요. 기쁜 것은 어디서 제공했는가? 바알 종교에서 기쁜 것을 제공한 거예요. 그 종교는 내 행함에 대해서 보람을 주는 종교거든요. 빌고 바치면 나한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는 뭐냐?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는 거예요. 양들을 죽이니까. 율법에 의해서 죄 지으면 와서 양 잡아라. 양이 계속 죽어나가는 겁니다. 짜증나는 거예요.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사사시대에 엘리멜렉 가정이 자기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갔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나라가 이러니까 인간 중에 왕이 있어요, 없어요? 왕이 없어요. 왕이 없으니까 왕을 수입해야겠죠. 어디서? 모압에서. 모압에서 여자를 수입합니다. 수입한 여자가 누굽니까? 바로 “룻에게서”. 룻에게서.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나오잖아요. ‘기생 라합에게서’.

다윗 왕의 특징은 뭐냐? 이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거예요. 현재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의 선악기준을 무효로 돌리고 독단적인 새로운 선악기준으로 제사직을 장악하고 제사직에 관여해버리죠. 제사를 관여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양 잡고 소 잡고 형식적으로 염소 잡는다고 이게 지금 제사의 취지가 사는 게 아니에요. 취지가 살지 않고 이 양이 아니라 양을 대신한 인격자로서 기름 부은 왕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 거기에 따라서 제사와 상관없이 이 왕 나라는 외세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요시아 또는 히스기야 같이. 왕 하나 잘되니까 보세요. 여호사밧 같이. 왕 하나 잘되니까 나라가 태평하잖아요. 솔로몬의 경우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발생돼요, 유다 나라에서. 솔로몬 하나 잘되니까 나라가 부강하기를 극한에 이르렀죠. 이 언약이 다윗 언약이에요. 왕 하나 제대로 돼서.

그러면 이 왕 자리에 제사의 취지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이냐? 왕이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돼요, 왕이. 단독입니다. 단독. 단독으로 서게 되면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심판하시고, 왕은 그 심판 앞에서 죄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 관계에요.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께 사랑받아서 하나님께 용납이 되는 왕.

어제 수요일에 말씀한 것 있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다음에 뭡니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이에요. 이 철회할 수 없는, 철회되지 않는 영원한 확정된 구원의 근거에서 성령이 와버리는 거예요, 성령이.

그러면 왕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으로서 모든 죄 사함이 되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화목제물이 되니까 죄가 해결되죠. 죄가 해결되고 난 뒤에 해결된 상태에서 그 상태의 능력이 임해버렸어요. 그럼 이건 예수 안에 예수 사랑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생긴 거예요. 환경이 생긴 거예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는 죄가 성립이 된다, 안 된다? 성립이 안 되죠. 예수 안에 죄가 성립되어버리면요, 예수님 십자가는 헛되이 죽은 거예요. 이쯤해서 여러분 볼 대목이 있죠. 갈라디아서 2장 21절.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크게 외쳤다 하는데 우리도 다른 데 방해되지 않는 한 크게 한번 외쳐봅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네가 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건드리느냐? 네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간 존재된다는 그것이 얼마나 십자가를 모독하고 가리고 건드리는 일인 줄 네가 아느냐, 모르느냐?’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여기 “율법으로 말미암으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율법에 대해서 시편 119편을 봅시다. 119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율법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죠. 5절,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절에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쭉 나오고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그다음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이게 전부 다 뭡니까? 하나님이 요구하는 율법이죠.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이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아까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것 같으면 뭐를 헛된 것으로 돌린다? 십자가죠.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율법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주님 십자가에 관련이 없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이 와서 책망한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게 없다는 거예요. 죄든 의든 심판은 누구 담당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 담당으로 이미 다 확정된 거예요. 철회되지 않는 근거가 있는 거예요. 철회되지 않는 근거.

그럼 성령이 찾아온 우리는 뭐냐? 그 철회되지 않는 근거 위에 그 품에 안기면 됩니다. 그 품에 안기어~ 그 품에 안기면 되는 거예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푹 안기듯이 주님 품 안에서 십자가의 그 은혜 안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면 바로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3:6)

이 말은 그리스도에 속한 부류가 있고, 그리스도에 속하지 않으면 마귀에 속하죠. 마귀에 속한 자, 처음부터 그들은 뭘 해도 죄가 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되어 있어요.

이 요한일서와 쌍둥이처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고 같은 뜻을 전하는 요한복음 3장 이 본문 읽고 마치겠습니다. 3장 20절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그다음에 어디서 행합니까?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나님이 하신 존재의 사건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 믿는다 하는데 도대체 뭘 믿었는지. 하나님을 안다 안다 하면서 무슨 근거를 알았는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근거를 우리가 만들지 말고 성령에 의해서 그것이 파괴되고 십자가만이 철회되지 않는 영원한 근거로서 우리를 통해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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