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912a 요한일서 3장 1절(세상)-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한일서 3장 1절에서 역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어려운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라는 단어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세상과 우리는 끊어져 있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죠.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럼 우리는 어디에 속하느냐? 그 문제가 어려운 문제에 속합니다.
이 어려운 문제는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견줄 수 있어요. 그것도 동일하게 상당히 난해한 말씀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6장 14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여기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세상을 도입하는 거예요. 나는 세상에 있지 않고, 내가 있는 곳에는 세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난해한 말입니까. 이런 내용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정 돌보고 직장 생활하고 그냥 일상을 살아가고 추석 맞이하려고 벌초하고… 이런 사실도 모르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당신에 대해서 아십니까?”라는 질문. “알죠.” “그러면 당신은 어디에 속했습니까? 세상에 속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국회 청문회 나와서 그런 이야기한다면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답변하려면, ‘그럼 어디에 속했습니까?’라는 물음에도 답변할 수 있어야겠죠. 그럼 어디에 속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의하면, “나는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공간을 제시하는데 이 공간은 세상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공간, 사건 속의 공간이기 때문에 사건은 공간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지나가면 그만이니까. 사건은 ‘그때 있었어.’하고 그때 지나가면 남는 건 세상밖에 남지 않죠. “너 어디에 있는 거야?” “사건 안에 있어.” “무슨 사건?” “십자가라는 사건 안에 있어.” 그럼 그쪽에서 “그래서? 십자가 사건 안에 있다는 것이, 그게 무슨 의미를 우리한테 제공할 수 있느냐?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똑같은 질문을 예수님도 수차례 받았습니다, 바리새인한테. “너 뭐야?” 이렇게 되죠. “너 누구야? 너 어디에 속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돼, 말아야 돼?” 이런 질문들을 했죠. “성전세 낼까, 말까?” 그런 질문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예수님의 정체가 모호해요. 굉장히 모호합니다.
분명히 자기의 키와 신장, 몸무게 이런 걸 딱 보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 안에 하나의 개인으로서 분명히 나타나 있거든요. 심지어 사람들은 ‘나 그 사람 안다. 자기 아버지가 목수였어. 목수의 아들이며 고향은 베들레헴에 있었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상 파악이 다 되어 있는 거예요.
그들은 신상 파악이 다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청소년 때부터도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찾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냐?” 부모가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해요? “왜 저를 찾습니까? 저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잖아요.” “무슨 아버지? 너 또 뭐하려고? 다른 아버지 사귀었어? 어느 아버지?” “나는 우리 아버지 집에 있었는데요.”
그럼 요셉이 ‘나는 너에게 뭐야? 그럼 나는 너에게 뭔데? 아버지도 아니고… 그럼 나는 뭐지?’ 그렇게 요셉이 질문을 안했죠. ‘참 특이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했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어요. 어쨌든 간에 소속이 특이해요. 소속은 특이한데 의도적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로서 사셨습니다.
‘접근 불가능하면, 그럼 예수님 안 만나면 되지 않겠느냐? 못 만난다면 안 만나지 뭐. 굳이 만날 필요가 뭐 있어?’ 그렇게 세상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죠. 싫으면 나도 싫다,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면 ‘만남이란?’ 성경에서 만남이 뭐냔 말이죠. 주님과의 만남, 만남. 주님과 만나야 구원받는다는데 그 만남이 어떤 정황을 가지고 만남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를 만남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에 그 만남의 규정에 어긋나게 되면 그것은 전혀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되고, 주님 만난 적이 없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세상이라는 것에서 못 벗어나고 있고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거예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면 오늘 본문 3장 1절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세상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데 그 다음에 뭘 모르느냐 하면 세상이 현재 예수님과 같이 만남이 되는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세상은 그걸 분석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제가 세상 사람보고 이런 이야기하면 ‘굳이 그걸 분석해야 돼? 그걸 판단할 필요 있어?’ 이렇게 답변할 거다 이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요한일서 2장 22절. 그러니까 요한일서 한 구절, 한 문장만 해도 몇 시간해도 못 할 정도로 굉장히 함축되어 있어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고 요한일서도 마찬가지에요.
여기 요한일서 2장 22절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질문 자체가 도발적이에요. 대뜸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나하고 만날 사람인지 안 만날 사람인지, 내 질문에 대한 너의 답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뜻입니다.
‘거짓말하는 사람 누구에요?’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십계명에 거짓말하지 말라 했는데, 어떤 사람이 거짓말하는 겁니까?”라고 물어본다 이 말이죠. 그럼 상대방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니, 거짓말이 뭔지 아직도 그걸 몰라요? 자기는 알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 하는 게 거짓말이잖아요. 양심은 못 속이고. 양심은 아는데 타인을 속이기 위해서 다른 말하는 게 거짓말이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왜 당신은 거짓말이 뭐냐, 진리가 뭐냐, 주님이 뭐냐, 구원이 뭐냐, 천국이 뭐냐, 지옥이 뭐냐 그 이야기에서 경유해야 될 곳을 경유하지 않고 왜 막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말하는 천국은 이렇다, 세상은 이렇다, 주님은 이렇다, 예수님은 이렇다, 하나님은 이렇다 하는 것은 너의 생각이 아니고 네가 소속되어 있는 이 세상의 속성을 반영해준다 이 말이죠. 속성을.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말하는 말본새가 전부다 거짓말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천국은 이렇고 뭐 어떻고 저떻고, 모든 것이… 속한 곳이 세상이기 때문에 성경 용어 다 동원해서 이야기해도 그건 거짓말이 된다는 겁니다. 거짓말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이것은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어요, 만남과 관련해서.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님과 만난 적도 없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가 거짓말이다.
예수님과 만난 적도 없으면서 성경 백독 천독 봐서 연구한 사람, 신학교 가서 신학 연구해서 이야기한 사람 모조리 다 거짓말이죠. 왜냐? 그 사람은 세상에서 성경가지고 연구한 사람이에요. 세상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세상의 일원이고 세상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에요.
결국 지금까지 제가 이 시간 강의하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뭐냐? ‘내가 없는 곳이 어디냐?’ 내가 없는 곳, 없다고 여기는, 없다고 간주하는 그곳이 어디냐 이 말입니다. 여기 나 있잖아. 있는데 내가 없다고 간주할 수 있는 공간은 어떤 공간이냐? 어떤 공간이겠어요? 예수님 안이죠. 왜? 예수님 안에는 예수님만 계시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강도 두 사람이 달렸잖아요. 강도 둘 다 지금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죽든 말든 중요한 것은 본인 문제에요. 본인이 지금 십자가에 매달렸고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강도가 예수님 양 편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면 제 질문은 이거에요. 그 강도에게 곧 없어질 게 뭡니까? 예수님 옆에 달려있는 강도, 강도에게 뭐가 곧 없어지죠? 강도에게 뭐가 없어집니까? 현찰? 동전? 뭐가 없어져요? 가족? 뭐가 없어지죠?
자기 목숨이 없어지죠. 왜? 지금 죽어가고 있으니까 목숨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한 강도가 자기 목숨이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안 믿는 거예요. 아, 대단해요~ 살아있을 때 예수 안 믿는 것은 뭔가 중요한 것, 따로 지키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가보다. ‘예수보다도 내 목숨이 더 중요한 거야.’ 이럴 수 있죠.
오케이. 그렇다면 실험해보자.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제 서서히 숨이 거두어진다. 이제 지킬 게 없어요. 마지막 지킬 목숨이 날아가는데, 지킬 것도 없는데 “예수님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야.” 지킬 것도 없으면서 예수님은 안 믿어요. 이 말은 목숨을 바친다고 해서 이쪽 세상 공간에서 저쪽 주님 공간으로 나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연결이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없다는 것은, 내가 없는 대신 다른 게 있는 거예요. 다른 게. 하나님은 나를 없애고 다른 걸 주시는 거예요. 나를 없애는 대신 주신 것이 뭐냐? ‘매개’에요, 매개. 매개를 성경에서 뭐라고 하죠? 중보자. 매개에요. 매개가 있는 이상 나는 없어야 돼요. 그러나 내가 있는 이상 매개는 필요치 않습니다. 내가 그 매개를 가려 버리니까. 밟아버리니까요.
자, 세상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냐? 세상은 뭐가 없는 곳이냐? 매개가 없는 거예요. 무슨 매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가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십자가 안에서 볼 때에, 아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 보셨죠, 십자가 안에서 출석을 부르는데 ‘김광수, 송영옥 씨,…’ 이렇게 ‘우리’에 해당되는, ‘십자가 안’에 해당되는 사람 명단을 불렀는데 십자가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그 명단에 있어요, 없어요? 어린 양의 생명책 명단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14. But may it never be that I should boast, except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ich the world has been crucified to me, and I to the world.
매개죠, 매개. 주님의 책에 없잖아요. 없으면 우리는 없는 거예요, 그럼. 명단에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 ‘어딥니까? 주민등록증 보여드릴까요? 여기 삽니다.’ 왜 자꾸 있음을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아니, 주민등록증 있다고 천국 갑니까? 주민등록증 갖고 계시죠? 천국 가십니까?
내가 없다는 생각을 왜 못합니까? 내가 십자가 안에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 생전 처음 들어본 이야기지만. 뭐 없는 사람이 군에 오라면 군에 후딱 가고. 몸무게 아오, 또 2키로 불었어. 뭐 없는데 왜 갑자기 2키로 불은 게 나오고. 내가 없는데 몸은 왜 간지럽고… ‘목욕할 때 됐나?’ 왜 이런 생각이 들고 왜 이러지?
없는 내가 마치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 자신이 매개, 십자가라 할 수 있고 또 요한일서에 의하면 피입니다, 피, 그 매개를 가리는 거적때기, 일종의 육신이죠, 육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매개를 가려버리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길게 썼지만 성경에서는 너무나 냉철하게, 냉혹하고 냉정하게 이 긴 문장을 간단하게 두 자로 이야기했어요, 우리말로. ‘치마’.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치마요.
그러면 육신은 내가 만든 게 아니죠. 부여받은 거죠. 그 육신에 무얼 입히는가? 자아를 입혀버려요. 그럼 자아는 누가 만든 거죠? 자아는 마귀가 만든 거죠. 자아를 마귀가 만든 거예요. 창세기 2장 죄 짓기 이전에 무슨 자아가 있었어요? 그때는 ‘우리’밖에 없어요. 나와 나가 합쳐서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우리가 돼요, 우리가.
참 이런 게 어려운데, 1에서 시작한 것은 하나님 나라고 세상은 2에서부터 시작해요. 2에서 시작하면서 만남이 성사되고 사랑이 성사되고 소망이 성사되고 믿음이 성사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2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2(two)에서 시작해서 하나(1)로 나아가자 (2→1)’ 이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인간이 범죄하기 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의 취지에요.
인간을 만든 취지가, 둘인데 하나가 되는 거예요. 처음에 만들 때 아담 하나를 만들었잖아요. 아담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하나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를 더 만들었어요. 여자를 만든 거예요. 여자를 만들었으니까 2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를 만들었으니까 그 둘 자체가 1의 내용의 풍성함. 1의 내용의 포괄적인 것, 1의 내용이 더 깊어지고 세밀해지는 것.
그러면 둘 되지 말고 100명이 되면? 100을 통해서 1의 취지가 더 풍성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십사만 사천. 십사만 사천을 통해서 1이 되는 거예요. 많은 숫자가 있더라도 전부다 그건 하나에 속하죠. 하나에. 전부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니까 하나에 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취지이고, 이미 범죄한 이후에는 백이면 백 가지가 되고 천이면 천 가지가 되고 둘이면 2가 돼요. 이 세상 인간들은 만남 자체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만날 능력도 없고 만날 수도 없어요. 인간은 누구하고 만나냐면, 본인하고 만나요. 본인하고. 본인하고 만난다고요. 본인은~ 노태우가 했잖아요. 본인은. 인간은 본인하고 만나요.
예를 들어볼까요? 친구야, 우리 한번 만나자. 이거 만남 같죠? 뭐 중국집에서 만나자. ‘여기 탕수육하고요, 짬뽕 두 그릇 주시고요. 소주 한 병 주세요.’ 소주를 왜 거기 갖다 놓습니까? 친구 만나는데 소주가 왜 있는 거예요? 소주 없으면 만남이 안돼요. 술이 없으면.
술이 없으면 만남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만들어낸 네 모습과 나는 술 한잔 하면서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너하고 만나는 게 아니고, 내가 생각한 너와 만난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너와. 그 프로그램이 ‘솔로’라는 거예요. 아무도 안 만나요. 사흘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자기 자신하고 만나요. 갈아입을 옷 넣은 큰 가방 세 개나 가져와서는 자기하고 만나요. 자기 썰을 푸는 거예요, 이제. 가만있어 봐요, 내 이야기 들어봐요, 이런 식이라.
그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서로 각자 자기 이야기해요. 꼭 부부사이 같아. 부부인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애 낳으니까 애도 자기하고 놀아. ‘엄마, 이야기 좀 해봐.’ 전부 자기 이야기만 하죠. ‘너 빨리 이 공부하고 수학해야지.’ ‘싫어, 싫어. 나는 이거하고 놀 거야.’ 그럼 그 이야기를 왜 엄마 앞에서 하느냐? 엄마 없으면 이야기할 대상이 없으니까.
인간은 그 누구와 만난 적도 없고요. 남과 만날 재주도 없고 그럴 능력이 없어요. 군중 속에 고독입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에요. 식구가 뭐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4대째 사는데 외로워. 외로워요. 뭐 아침부터 우당탕탕 바빠. 그런데 만나는 것은 뭐냐 하면 TV하고 만나죠. ‘슈퍼윙스’ 한다고 전부다 앉아있어요. 슈퍼윙스. 난 뭐 그런 게 있는지 몰랐는데… 슈퍼윙스 등장인물 다 외워요.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면서 그건 다 외워요. 슈퍼윙스.
드라마는 드라마 속에 각자 인물들, 본인의 모델들을 거기다 제시해서 평소에 자기 내부와 이야기하는 것을 끄집어내서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거예요. 몰입하게 만들어서 그 드라마 보면서 같은 부부나 가족끼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너무 나쁘다.’ ‘저 사람은 괜찮은데, 왜?’ ‘아, 이 드라마 전개 이렇게 해야 돼.’ 이런 거.
결국 인간은 서로 마주보고 만날 수 없어요. 술잔 보고 만나고 드라마 보고 만나지, 정면으로 마주볼 수가 없어요. 정면으로 보면 그건 내가 아니니까. 인간이 이처럼 자기와 만나고 자기 외에는 못 만난다는 그 점을 전제로 해서 인간은 타인과 만나기 위해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치마라 하는 것은 타인에게 자기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언어와 같은데, 그 치마 속에서 드디어 인간은 만남은 없고 소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네 치마가 예쁘냐, 내 치마가 예쁘냐. 비로소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는 거예요. 역시 만나지는 않아요. 경쟁관계로서 소통할 뿐이죠. 나 너보다 낫고 싶어. 너보다 뛰어나고 싶어. 그런 조건 하나 거는 거예요.
그럼 그 옷이라 하는 것은 누구의 매개입니까? 공동의 매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의 매개가 옷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인간이 만든 옷, 남과 소통하기 위해서 만든 옷. 한쪽은 옷 입었는데 다른 한쪽은 벗으면 못 만나잖아요, 부끄러워서. 그러니까 서로 만남이 가능하도록 만든 매개, 치마 대신에 그 자리에다 뭘 입히느냐? 가죽옷을 입히죠. 하나님의 개입으로 가죽옷을 입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하는 겁니다.
그럼 가죽옷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다는 것이 아니고, 그 가죽옷 안에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과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회로, 절차, 과정이 그 가죽옷 안에 함축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해서 친히 인간의 옷을 만들어줬다는 말은, 나는 앞으로 일을 할 때 인간 속에서 일을 하겠다는 의사표시에요. 의사표시입니다.
그게 매개인데요. 중매, 매개, 중개인데요. 그 매개가 있음으로서 인간은 우리 쪽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이제는 영원히 없다는 것을 매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간은 이런 거예요. ‘나는 나다.’ 여기서 뭐 새삼스럽게 의미가 나올 수 없죠. 나는 누구? 나다. 이 뒤에 나가 누군데? 앞의 나야. 앞의 나는 누군데? 앞의 ‘나’가 설명했잖아. 나는 나라고.
그러면 이 ‘나는 나’라는 말은, ‘나 그리고 나’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뭘 고백하느냐 하면, 나는 내가 의미를 지정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나는 내가 나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나뿐이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거죠.
불교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 자체가 이미 불자(佛子)라는 사실이에요. 새삼스럽게 불자 되는 건 없고 있는 그 자체가 인간이면 다 불자, 성불한 부처다 이 말입니다. 다만 인간들이 바쁘다 보니까 이걸 인식 못하고 있는데 우리 중들이 와서 도와줄게. 당신 부처입니다. 당신은 나로 이미 모든 의미가 종결됩니다. 그걸 새삼스럽게 알려줄 테니까 시주나 하라는 뜻이죠. 종교치고는 참 편하죠. 그런데 왜 머리는 깎느냐? 머리를 깎아야 정식 중인 줄 알고 돈을 내기 때문에 그렇죠.
‘나는 나다’ 이건 누가 이야기해야 돼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나 스스로 있는 자라 했죠. 하나님이. 이 말은 뭐냐? ‘하나님만이 자아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뿐이에요. 우리가 말하는 나는 악마가 하나님 흉내내가지고 먼저 선수 친 겁니다.
우리는 육신이에요. 우리는 흙이 될 육신이지, ‘나’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우리 중에서 나를 따로 뽑아내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도 흙이고 나도 흙이니까 독보적으로 나라는 것을 뽑아낼 의미가 없는 거예요. 흙 중에 흙을 왜 뽑아내요? 말이 안 되죠. 흙도 괜찮은 흙, 좋은 흙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까 젊은 사람들은 소주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듯이… 자, 이제부터 나는 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지 소주 놓고 썰을 푸는 거예요. 그럼 좀 잘 사는 아줌마 같으면 소주 대신에 가방 놓고 시작하는 거죠. 썰을 푸는 거죠. 이 가방의 전설과 내력, 이 가방을 얻게 된 이유. 남편이 사업차 여행 다녀오면서 사준 가방. 이게 프랑스제 가방인데 본토박이 가방이다, 이야기하면 벌써 한 시간 반 지났죠. 저녁 하러 나 가야된다.
그럼 그게 만남이에요? 이거 나 스스로 있는 자잖아요. 본인만 있었잖아요. 본인만. 본인만 있었단 말이죠. 제가 신명기 수련회할 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이야기할 때 쾌감중추가 제일 크게 작용한다고. 나라는 단어를 쓸 때 가장 쾌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는 말을 들어줄 자가 없을 때 사람은 스트레스 받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아이고, 영감.’ 내 허락도 없이 왜 먼저 죽냐 이 말이에요. ‘아이고, 영감, 영감. 왜 죽노. 계속 살아서 내 이야기, 내 썰을 들어줘야 되는데 먼저 죽어버렸어. 암에 걸려서.’ 그걸 가지고 외롭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대는 내 이야기를 들을 나의 소유물인데 그게 사라지니 허해진 거죠.
사람은 남과 만날 재주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데 왜 만나는가? 나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러니까 상봉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상봉이 되려면 둘이 되어야 되는데 인간은 자아가 생겨서요. 자아는 최종적인 하나거든요. 자아가 있기 때문에 둘이 될 수가 없어요. 어디 가도, 미국 가나 어디 가나, 나이가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나 세 살이나 항상 1이란 사실을 꾸준히 느끼고 있습니다.
둘이 되어야 둘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라는 게 성립되는데 본인 이야기하고 본인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매개가 필요 있어요, 없어요? 필요 없죠. 매개는 2가 되어야 매개가 돼요, 2가 되어야. 너 있고 나 있을 때 사랑이란 매개가 성립되잖아요. 믿음도 성립되고 소망도 성립되는데, 처음부터 나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믿음, 소망, 사랑이 있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왜 입혔느냐? 가죽옷 입혔다고 인간이 인간되는 거 아닌데 왜 입혔느냐? 가죽옷을 입힘으로써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지상에 2가 하나가 되는 역사, 그 과정을,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제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니까, 자기밖에 모르는데 언약 줬다 하니까 신났어. ‘그래, 나는 이 말씀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기 때문에.’ 동행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지 혼자 가면서 무슨 동행이 돼요? 자기뿐인데 무슨 동행이 됩니까?
주님이 동행했다 해서 출애굽할 때 신났죠. 그런데 광야에 접어들고 난 뒤에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뭡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 자, 애굽으로 돌아가면 뭐가 없을 때에요? 누가 안 찾아왔을 때에요? 매개자, 중보자가 안 찾아왔을 때가 애굽 시절이죠.
애굽 생활이 친숙하고 친근하고 거부감이 없는 이유는 모두가 각자 나, 자아죠, 자아만 챙긴다는 그 동질성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 생활, 오늘날 지금 현대 생활하고 똑같이 보면 돼요. 애굽 생활이 뭐냐 하면, 내 욕망, 욕구대로 본성대로… 본성이 뭐냐? 육신+자아니까, 마귀가 집어넣은 자아니까 자아는 숫자가 1입니까, 2입니까? 하나죠. 나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나만. 비굴하게 빌든 살려 달라 하든 어쨌든 간에 마귀가 나한테 집어넣어준 그 자아를 그냥 죽기 살기로 지키면 되니까요.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는 곧 있으면 목숨이 끊어지죠. 목숨은 잃어도 무엇은 남는다? 육신은 날아가도 무엇은 남아요? 자아는 남잖아요. 자아가 남으니까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매개자라 하는 것은 2가 되어야 돼요, 2가. 원래 나는 1이 아니고 2였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거기에 매개자가 필요한데, 인간은 범죄한 자로서 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모두 태어나자마자 매개자가 필요치 않은 그러한 육신과 그러한 자아로 태어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매개자가 필요 없어요. 무슨 중보자가 필요해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면 되는데 무슨 중보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내가 상대하고 싶다 이 말이죠. 일대 일로. 뭐 오케이 목장의 결투니까. 하나님 너 하나, 나 하나. 잘난 체하면 죽어서 천국 보내줄 수도 있고 한데 중보자가 왜 와야 되냐고요? 중보자가 필요치 않다니까요. 중보자가.
어제 수요 설교에서도 했지만, 착하게 살면 구원받아요? 수요 설교에서 했잖아요. 착하다, 악하다 하는 것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자아 모습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고집하는 게, 착하다. 착하면 네가 착해요, 저 사람이 착해요? 누가 착해요? 착함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착하잖아요. 내가 착하니까 천국 가도 누가 가야 돼요? 내가 가야 되는 거예요. 내가 착하니까.
무슨 중보자가 필요합니까? 착하기만 하면 되고 착한 데다가 예수까지 믿어주면 더 착해지죠. 이렇게 살면 되지, 무슨 중보자가 필요하냔 말이죠. 왜 누굴 만나야 돼요? 나 혼자 도 닦으면 되지, 왜 누굴 만나야 되느냔 말이죠.
애굽 생활에서 동질성이 형성돼요, 동질성. 이질성이 아니고 동질성이에요. 모두가 각자 지 팔 지가 흔들면서 자기만을 위해 산다는 점에 대해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혹시 여기서 중보자 계십니까?’하고 찾을 필요가 없는, 그런 소리할 필요 없는 세상이 무슨 세상? 애굽 (세상의) 생활이에요, 애굽 생활.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왔을 때 히브리인들이 요구한 것은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닙니다. 아니고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 ‘애굽에 살기는 사는데, 덜 고통스럽게 살게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모실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요구한 건 그거였어요. 나가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고 모세 뜻이고 아론 뜻이지, 히브리인들이 의견 모아서 ‘나가자’ 이런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나갈 생각이 없어요. 그들은 세상이고 싶어요. 세상에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다 같은 인간이니까 뻔하다 이 말이죠. 인간 사는 거. 돈 있으면 잘 살고 돈 없으면 못 살고. 인생 뭐 있어요? 그거죠. 지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 아무 문제없어요. 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게 문제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야, 좀 만나자. 내가 너와 동행할게.” 동행할 때 이때부터 사달난 거예요. 문제가 된 겁니다. 그냥 집에, 그냥 하늘에 계시지. 오시기는 왜 와가지고 왜 이렇게 우리를 매사에 힘들게 합니까? 모든 게 낯설고 모든 것이 이상스럽고 그렇다 이 말이죠.
이 매개자, 중보자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파견자, 동행자로 파견시켜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게 만들었어요.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율법이죠. 율법을 줬죠.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겁니까, 모세가 준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 모세가 줬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 해요. 모세가 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일 때 실제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우리는 비현실주의자로 낙인찍힐 수가 있다는 거죠. 너희들은 그런 희한한 생각을 하느냐? 눈에 보이는 인간 이야기해. 인간 이야기.
그러니까 애굽 생활에서는 뭐만 상대하면 돼요? 인간 대 인간만 만나고 상대하는 것, 이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애굽 생활에서 법적으로 너희는 천사를 한 달에 두 번 만나라, 이런 거 있습니까? 하나님 만나라, 이런 거 있어요? 없죠. 하나님 만나라는 것은 성경 속에서나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특수한 천국 백성이니까 늘 하나님과 만나야 된다.’ 이 이야기는 성경 속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자가, 사람 만나는 것만 익숙한 자가 천사를 만난다든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그리고 세례 요한, 마리아,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다들 누굴 만났어요? 사도 바울이 누굴 만난 겁니까? 주님 만났잖아요, 주님. 주님 만나고 천사 만났잖아요. 광야의 목자가 누구 만났습니까? 양 주인 만났어요, 누구 만났어요? 갑자기 하늘 조명발이 확 포근하게 있으면서 목자들에게 소리가 막 들렸단 말이죠. 누굴 만난 거죠? 천군 천사를 만났잖아요. 그게 만남이란 말이죠.
그 천군 천사가 왜 만났습니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 만난 거예요. 하나님이 개입된 중보자, 매개자 중심으로 중보자가 매개할 때만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인간을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더러운 인간을. 안 더러운 인간이 어디 있어요. 더러운 인간인데,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를 2로 보지 않고 1로 보고 나는 나라고 우기는 인간에게 중보자가 나설 때 비로소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그걸 성령 받은 사람이라 하고 그걸 성도(聖徒)라 하고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 보면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라 되어 있어요. 성도라 부르심, 족집게로 집어서 ‘이리 와’ 하고 부르심을 입은 자. 죄인인데 매개가 동원되니까 졸지에 거룩한 자가 된 거예요. 거룩한 꼬라지하고는, 정말… 성경에서는 거룩한 자인데 무슨 거룩한 자가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고요. 세상살이를 제대로 다 못했다고 한 맺혀있으니까요.
이거 진짜 성경에서 성도라 하는 규정상 우리가 해당되는지 안 되는지 그게 늘 의심스럽고 굉장히 모호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마다 말씀을 들어야 되고 말씀을 보면 되잖아요. 성경책 이거 저쪽으로 치워버리고, 좀 그냥 내버려 둬. 내 사는 식으로 살게. 중보자, 매개자 좀 그만, 그만, 그만!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매개는 피입니다. 피를 매개로 해요. 요한일서 1장부터 새로 안 봐도 되죠? 우리가 피 가운데 사귐이 있다 했습니다. 사귐을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어요. 피 안에서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또 같은 성도들끼리를 매개하는 것은 요한일서 1장 7절,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래서 이런 상태가 아니면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두다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세상은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2가 아니고 자기 1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궁시렁 궁시렁 뒷말 붙일 필요 없어요. 그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범죄하고 난 뒤부터 우리 시작하자’ 그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우리 육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아가 억지 부리면서 그걸 덮고 있는 거예요.
덮으면서 만들어진 게 뭐라고 했습니까? 치마. 옷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나를 나답게 치장시키고 가치를 높이는 그 액세서리, 장식품, 주렁주렁 매다는 장식품을 계속해서 나한테 자꾸 덧입히고 덧입히는 것, 그게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세상살이죠. 세상살이고 살림살이고 뭐 그런 거죠. 치마 두께가 벌써 20cm 넘는지, 엄청난 치마를 입어요.
그래서 에스겔 16장에 보면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옷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라. 네가 벌거벗은 피투성이였잖아. 네 옷을 누가 해 입혔는데? 내가 해 입혔잖아. 그런데 옷 입었다고 네가 그걸 누구한테 자랑질 하느냐? 바로 음부. 옷을 해준 사람은 제켜버리고 옷 입은 것만 대따 자랑하면서 ‘나 예쁘지? 그치?’하고 남북 둘로 갈라진 나라의 그 자매 간에 앗수르, 바벨론 모든 이방민족과 하나 되고 싶어 했죠. 출애굽을 거부한 거예요. 빠져나옴을 거부하고 ‘나 넣어주세요. 나도 그쪽 편이에요. 나도 세상 쪽입니다. 같이 놀아요.’라고 끼어든다고 에스겔에서 그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자, 과연 만남은 어떻게 성사되는가?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서울강의20240912b 요한일서 3장 1절(세상)-이 근호 목사
인간 쪽에서는 못 만납니다. 인간은 왜 못 만나는가? 인간은 이미 악마에 빙의되어 있어요. 악마에 빙의.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악마.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악마에요. 이걸 현대 용어로 바꾸면 ‘기계’입니다. 인간은 없고 기계뿐이에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에요.
기계이기 때문에 이 기계가 작동하는 이 공간을 ‘환경’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환경을 신약 성경에서는 ‘이 세대’,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할 때에, ‘이 세대가 우리를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해도 되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해도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환경을 둘로 나누는 겁니다. 한쪽은 악마에 빙의된 환경이 있는 반면 그 반대말이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기름 부음이.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뭐냐? 바로 매개죠, 매개. 성령. 예수님이 기름 부은 자입니다.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거든요. 그러면 예수님만 성령 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께 해당되는 사람들도 기름 부음1, 기름 부음2, 기름 부음3, 기름 부음4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럼 ‘우리’가 되겠죠. 매개가 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1번 타자로 죽은 데서 부활하잖아요. 그다음에 2번 타자, 3번 타자,…. 예수님이 샘플이 되어 그게 표본이 되어서 계속 그 뒤에는 예수님께 일어나는 현상이 그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 이건 성령에 빙의된 사람들이죠. 기계죠.
이 성령의 기계들을 로마서 6장에서는 ‘의의 노예’라 해요. 의의 노예. 그런데 악마에 빙의된 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노예’라 합니다. 노예는 자율권 갖는 게 없어요. 그냥 기계라니까요. 노예는 기계입니다. 자기 의사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그게 주인과 노예 관계에요.
인간의 주인은 악마에요. 빙의되어 있죠. 이런 것을 전제로 해서 주의 매개가 작용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러니까 쉽게 하면 무슨 뜻이냐? 모든 성경을 볼 때에 악마의 매개되었을 때 나오는 성경 해석부터 시작하자는 거예요. ‘마귀가 성경을 보고 마귀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아이고, 마귀가 성경을 해석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까? 있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3종 세트 아닙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바리새인적 해석, 사두개인적 해석, 서기관적 해석.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믿음, 소망, 사랑은 없어요. 없고 착함이 있잖아요. 착함은 있는데 매개가 없어요. 여러분 어느 것 할래요? 착하시렵니까, 안 그러면 매개와 더불어 있을래요? 좀 더 잡숴야 되나? 빵 더 잡숴야 답변이 나오는가. 착함으로 구원받으렵니까, 아니면 매개로 구원받을 겁니까? 중보로 구원받을 겁니까?
그러면 뭘 포기해요? 진짜 중보로 구원받는다면 뭘 포기해야 됩니까? 착함을 포기해야죠. 그 착함이 어디서 나온 착함이냐? 착함, 악함이란 인식을 누가 심어준 거예요? 하나님이 심어줬습니까? 하나님이 네가 바르게 살라고 했습니까? 아니죠. 착함, 악함 그런 건 알 필요조차 없게 했어요, 하나님께서! 왜? 기계여야 하니까. 자기가 독자적으로 알아서 뭐 할 건데? 뭐 에덴동산 수리할 거예요? 제가 에덴동산 관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뭐 할 거예요? 그냥 누려! 그냥 누려. 그냥 살아. 뭔 짓 하지 말고 그냥 살아.
그런데 뭔 짓 한 게 뭐냐? 악마가 뭔 짓 하게 만들었잖아요. 모든 걸 해야 되는데 하나가 결핍될 때 여기서 살짝, 모든 걸 가졌다는 것보다 더 센 유혹으로 다가오죠. 모든 걸 가졌다는 여유보다도 하나를 놓쳤다는 이것이 더 짜증나게 만드는 거죠. ‘그것마저 알면 드디어 신으로 승격되는데 고게 빠져서 신으로 승격 못되니까 네가 따먹으면 신 된다? 이제부터 너는 독립해서 살 수 있어. 독자적으로 될 수 있어.’
그 독자적인 걸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뭐다? 나는 나다. 더 이상 붙일 필요 없어요. 나는 아름다운 나다. ‘아름다운’ 빼도 괜찮아요. 나는 대단한 나다. ‘대단한’ 빼도 괜찮아요. 그냥 나는 나에요. 부처 말대로 석가모니 말대로 나는 그냥 신이에요. 그걸 꼭 문장으로 불교로 이야기해야 됩니까? 태어나면서 다 그런데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잖아요. 모든 인간은 악마에 빙의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 해석하면서 ‘나는 하나님 맞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성경 해석하는 거, 이거는 그렇게 해석 안하는 사람이 이상하죠. 모든 인간은 그렇게 해석하죠. 그게 스타트입니다. 출발점이에요, 모든 해석의.
“요새 왜 성경 안 봅니까?” “뭐 알만큼 아니까.” 알만큼 안대. 많이 먹었다 이거죠. 알만큼 안다 이 말이죠. 알만큼 아니까 나오는 고백이 뭡니까? 나는 나다. 악마에 빙의되었네. 빙의. 병신인지 빙의인지 모르겠지만. 악마에 빙의되었어요. 뭐 꼭 작두 올라타야 그게 귀신 들린 겁니까? 뭐 흔들어야 귀신입니까? ‘나만 편하면 되지.’ 여기서 뭐가 빠졌어요? 매개 빠졌죠. 중보자 다 빠졌죠. 동행 다 빠졌죠. 성경 말씀 전부 다가 빠진 거예요.
성경 해석을 할 때, 아까 후딱 이야기했는데 다시 하면, 중요하기 때문에 적어보겠습니다. 진짜 이걸 신학교에서 이야기해야 되는데… 물론 그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겠죠. 마귀에 빙의되어 있으니까 반발할 수밖에 없죠. ‘모든 성경 해석은 필히 피를 경유하고 나와야 한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사귐은 피 아래서 사귀죠. 피가 매개죠. 매개를 경유해서 나오는 해석이어야 한다. 이게 사도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성령은 누구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 이야기하고 있죠. 그래야 피 가운데 사귐이 되니까. 아버지와 자기 백성과 예수님과 사귐이 되니까.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피만이 매개가 되고 모든 이 세상의 해석이나 모든 활동은 피를 경유해서 나와야 된다. 이건 뭐 짐승 피 말고 누구 피요? 예수님. 하나님의 피.
피 흘렸다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고 하나님은 죽었다, 이렇게 되죠.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문제는 어디서 죽었느냐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죽은 거죠. 인간들이 그토록 떠나지 않으려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마저 죽었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희망이 있어요, 없어요? 이 세상에 희망이 없죠. 그게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죠. 그게 사랑이고. 이 세상에 믿음이 없죠. 그래서 그게 믿음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악마에 빙의된 우리를 향하여 믿음 없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겁니다. 믿음 없이. 누구 믿음? 이 자아의 믿음 없이, 자아의 소망 없이, 자아의 사랑 없이 구원하기를 작정하신 거예요. 그게 바로 매개자이고 그 매개에서 만남이 성사됩니다.
매개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필히 믿음이 없어야 되고 필히 소망이 없어야 되고 필히 사랑이 없어야 돼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전제로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뭡니까?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요구할 것은 일체 모든 것이 거부당한다는 뜻이에요. ‘저 구원해주세요.’ 그런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까? 안되죠.
사도행전 2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되어 있죠. ‘누구든지’라는 말을 한 것은 피를 경유했을 때 인간들의 다양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동질한 존재이고, 동질한 존재로 본다는 겁니다. 각자 개성이 있어서 나는 너하고 다르고 나는 너하고 달라. 다르다는 모든 것을 일체 묵살해버리는 겁니다.
누구든지, 똑같은 인간들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뭡니까? 피 흘린 매개자잖아요. 매개자 없이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됩니까? 악마에 빙의되었으니까 안 되죠. 악마는 매개자를 가려버려요. 매개자를 가린 상태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풍성하게 착함으로 영글어내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이야기는 이거에요. ‘인간이 인간되었으면 인간답게 살아야지.’ 이게 악마의 호소입니다. ‘이거 뭐 짐승도 아니고 사람다워야지. 짐승도 그런 짓 안하겠다. 인간답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이런 거. ‘어떻게 어미가 되어서 자식을 내버리냐? 짐승도 그런 짓 안한다. 그러니까 어미가 되었으면 자식을 잘 돌봐야지.’ 지금 이 주장, 뭐를 경유 안했습니까? 매개를 경유 안한 거예요. 매개를.
너라는 1부터 시작해서 너라는 1로 계속 살다가 그 1로 너한테 돌아오라, 이걸 지금 악마가 인간에게 시킨 거예요. 인간은 1로부터 시작한 자기가 만든 치마를 자기가 꼭 쥐고 거기다 온갖 훈장들을 달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자기 목숨이 없어지는 순간까지라도 자신은 자기 자아를 지켰죠.
자아를 지키면서 그 인간이 목숨 끊어지는 순간까지 날린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언어라는 거예요. 말. 평생 동안 사용했던 그 말이 자아와 함께 운명을 끝냅니다. 이 말은 인간은 살아있는 한 자기 말, 자기 썰만 내뱉으면서 자기 말만 하면서 그것으로 인간이 자아 됨을 본인이 증명해온 거예요.
그 말 속에 매개를 경유한 말은 안 나옵니다. 악마의 강력한 방해공작에 의해서 매개 위주, 예수님 피 위주의 이야기가 안 나와요. 피의 해석으로 완결된 해석이 안 온다니까요. 예수 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악마가 그 이야기는 얼마든지 하게 하죠. 매개를 훼방한다면 어떤 신학적 용어도 다 동원시키는 것이 악마의 이야기인데요. 예수 피로 내가 구원 받는다,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요! 우리 자아를 왜 구원합니까? 우리 주님은 매개에 대해서 우리를 죽이는 거죠. ‘나랑 죽자.’ 이거지, ‘너 살려줄게.’가 아닙니다. 나랑 죽자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는, 혼자 죽으세요. 왜 멀쩡한 나를 죽입니까?
자, 예수님이 죽자 할 때, 주께서 오늘 밤에 죽자는 거예요, 내일 죽자는 겁니까? 언제까지 죽자는 겁니까? 우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죽자는 거예요. 우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99세까지. 99세에 죽을 때 누가 죽이는 거예요? 주님이 죽이는 거예요. 99세 죽는 사람은 98세에 죽으면 안돼요. 못 죽어요. 주께서 죽도록 놔두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죽일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죽이십니다. 왜 죽이십니까? 뭐 개뿔도 없으니까.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동렬이도 없고 아무도 없어. 뭐 없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손흥민도 없고 이강인도 없고 무슨 축구를 합니까? 김민재도 없으면 축구 뭘 해요?
인간은 자기에게 살만한 동력을 주는, 살만한 요건을 제공하는 그것을 자기 치마에다 계속해서 장식해놓는 거예요. 옷은 뭐냐? 내 자아의 표상입니다. 내 자아의 휘날리는 깃발이 뭐냐? 그것이 성경에는 옷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옷.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면서 아주 확연하게 율법 없는, 매개자가 없는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을 차등화 시켰어요. 애굽에서부터 같이 살지 말고 강제로 나오게 하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열 가지 재앙을 준 이유가 뭐냐? ‘앞으로 내 백성 건드리지 마라’ 이것 때문에 준 게 아니고, ‘같이 살 사람 아닌데 바로 네가 왜 붙들고 있냐? 이젠 좀 놔줘라.’ 그것 때문에 열 가지 재앙 준 거예요.
이 말은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애굽 사람들은. 다시 말해서 어린 양의 피가 묻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건 인간도 아니고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거예요. 없는 존재로. 심판대에서 출석부를 때 “김광수, 누구, 누구, 누구” “저는 왜 안 부르는데요?” “너는 피가 없잖아. 건너뛰고.” “저 착한데요?” 착함보고 주는 게 아니고 피보고 매개보고 그냥 출석체크해서 천국 보내는 거예요. 피보고.
천국 가니까 거기에 선배들, 고참들이 있죠. 장로들이. “어디서 왔는고?” 이렇게 묻는 거예요, 요한 계시록에 보면. “어디서 왔는고?” “이 세상에 살다 왔습니다.” “어째 이렇게 왔는고? 옷이 왜 이렇게 희어졌지? 왜 이렇게 하얀 거야?” “어린 양의 피로 하얘졌습니다.” “아이고, 우리 편이다. 어서 들어와!” 이럴 때 드루와,에요. 드루와, 드루와. 이리 들어와.
이게 무슨 깊은 신학이 필요하고, 여기에 무슨 헬라어, 히브리어가 왜 필요합니까? 이게 왜 필요하죠, 세상 학문이? 세상 학문은 이미 어린아이처럼 그 피를 알고 난 뒤에 세상 학문이 필요해요. 공부를 해야 돼요. 무엇 때문에? 내 육신은 악마에 빙의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육신을 악마가 다루도록 허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욥기에요. 욥이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죠. 욥은 선지자에요. 신약에 보면 욥을 거론하고 있어요. 선지자에요.
선지자인데 사는 꼬라지하고는… 욥기 대부분의 이야기가 하나님하고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저한테 왜 그래요? 때리는 것은 좋은데 이유나 알고 맞읍시다. 이유나 알고 맞읍시다.’ 하나님은 때리기만 하고 침묵하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요. 침묵해요. 욥이 이야기하도록 시간을 허락해요. 욥이 내뱉는 이 모든 이야기는 매개를 거치지 않을 때 육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지혜에요. 그것이 욥을 통해서 다 나옵니다.
그 지혜의 본질은 선악체계였어요. ‘내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까지 기도하면서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뱉어요. 매개, 매개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조져놨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다 나오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내뱉으면서 욥이 서서히 메시아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억울한 희생물이 이러한 원망을 거쳐서, 어느 날 친구를 위해서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중보자 입장으로 욥이 그 자리에 자기가 놓여있음을 하나님께서 규정해버렸어요. “내가 욥을 보고 저 친구들 용서해줄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을 보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동행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늘 찬양하고 감사한다고 동행이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대들고 하는 것, 그게 동행의 모습이에요.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21장. 뭐 우리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워낙 사람들이 점잖아가지고 내가 도대체 하나님께 원망한 기억이 없어. 나는 시키는 대로 범사에 감사하니까. 속에는 분노가 끓고 있으면서, ‘차라리 죽여 주옵소서’ 이러고 있으면서, 남들 보기에는 아닌 척 밝은 조커의 미소를 활짝 띠고 있죠.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19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걸로 베드로하고 예수님 이야기는 마감이 되어야 돼요. “나 너 죽일게. 그런데 너 죽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야.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말고. 내가 죽일 때 그건 네가 원하지 않는 죽음이야.”
이 말은 베드로의 자존심과 자긍심은 일체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피를 매개로 하면 그건 당연한 조치죠. 베드로의 자아까지 높여주면서 일을 시킬 수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제 양을 치는 목자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양이 아닙니다. 목자입니다. 목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양이 새롭게 등장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목자가 새로 등장하면 그 나타난 목자에게 합당한, 걸맞는 양도 따로 나와야 돼요. 그래야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알고. 그 목자에게서 그 양을 악마의 권세라도 빼앗기지 않는 단속과 든든함이 제공됩니다.
양으로 하여금 목자를 믿게 만들면 안돼요. 믿음, 소망, 사랑 있으면 안돼요. 왜? 그러면 나중에 어려울 때 다 목자 배신하고 도망가 버리거든요. 목자 쪽에서 시작을 해야 돼요. 목자가 선물로 준 사랑, 목자가 선물로 준 믿음과 목자가 선물로 준 소망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양으로 하여금 자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나는 어디까지나 양이라는 것을 감사케 하는 거예요. 양은 목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양이 있지, 양 드러내기 위해서 양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목자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계속 하는 거예요. 김 양, 최 양, 박 양 전부 다 목자를 드러내는 거예요. 목자를.
그럼 우리 상식으로는 이야기가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을 죽을 때 짜증내지 말고 ‘아, 이것도 주의 예언대로 합당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라.”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20절에 왜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갑자기 질문을 누가 던지느냐 하면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질문을 왜 하느냔 말이죠. 이게 아직 베드로가 죽기 전이라는 뜻이거든요. 뭐가 살아있어요? 악마에 빙의된, 악마한테 허락된 육신이 그대로 살아있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원치 않는 죽음을 죽지만 저 제자도 나처럼 원치 않는 죽음을 죽는 겁니까?” 질문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래, 그도 너처럼 원치 않는 죽음을 죽는다.” 하면 베드로가 얼마나 기분 좋을까요. ‘됐어. 그러면 나 죽어.’ 이렇게 되는데, 답변이 그게 아니고 주님 하신 말씀이 아주 냉철합니다. “너는 네 일이나 신경 써! 네가 무슨 상관있어? 어떻게 죽든지.” 그래서 주님께서 약을 올리듯 이야기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안 죽어. 됐냐? 이제 속 시원해?”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사도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님 오신대. 예수님 죽음을 보지 않고 주와 함께 하늘로 가는 모양이다.’ 또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닙니까.
23절에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이야기하는데 자꾸 사도 요한을 끼워 넣으니까 사도 요한은 빼고 상관없이 빼고, 끝까지 주님은 베드로보고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말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3장 2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뭘 기억하고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 24절에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여기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 12분의 1이에요. 이거 뭐 찍기 해도 잘 몰라요, 12분의 1이니까. 뭐 둘 중의 하나 같으면 잘 찍으면 찍히는데, 수능 같으면 다섯 개 중에 찍는데 이건 열두 명이라.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판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이 무슨 생각합니까? 나? 나? 나? 예수님 품에 있는 저 사람? 사람들이 ‘나는 일단 아닐 거고 그럼 나 아니면 내 라이벌 저 사람인가? 사도 요한인가?’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예수님을 팔 자가 한 명도 없어요. 아무도 예수님을 팔 자가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제는 팔 자를 만들어요. 어떻게 하느냐? 떡을 하나 가지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뭡니까?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빵 하나 주세요. 여기 가룟 유다가 있다고 하면 이제 예수님께서 팔 자를 정하는 거예요. 나 자신을 팔 자를 예수님이 정하는데, 빵을 팔 자에게 건네주려다 안 주면 옆에 있는 사탄이 들어가려다 못 들어가죠. “맞춰. 보조 맞춰. 타이밍 잘 맞춰. 응? 왜 급해?” 역시 악마도 예수님의 종이에요. 주는 척하고 빼니까 악마도 들어가려다 움찔하는 거예요. 줘버리니까 악마가 쏙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모든 세상은 세상의 모든 권세자는, 악마까지 모든 권세자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0) 이걸 누가 아느냐? 육신은 몰라요. 육신은 이미 자기 한계에 갇혀서 몰라요. 육신은 악마에 빙의되었기 때문에 나는 나다, 하는 식으로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악마에게서 누굴 놓아주고 누굴 풀어주고 악마에 계속 갇히게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바로 매개자에게 있어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매개자, 예수님의 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악마를 이긴다고요? 악마를 이긴 내가 구원받아요? 아니죠. 악마를 이긴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 자체가 악마의 생각이죠. 왜? 무엇을 경유 안했어요? 피를 경유하지 않은 이해에요. 자기 구원에 미쳐가지고, 뭐 하면 구원받습니까? 예수 피 믿으면 됩니까? 이것은 악마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를 이용한 것밖에 안돼요.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다. 모든 것이 주의 권세 안에 있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셨다.’ 이 말은 이런 뜻이에요. 방금 제가 첫 번째 이야기한 게 뭐에요? 1.구원의 권한은 중보자, 예수님한테 있다 이 말이죠. 두 번째는 2.이점이 취소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다.
요한복음 10장 봅시다. 그러니까 요한일서 하면서 요한복음 자주 볼 수밖에 없어요. 같은 거니까.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유보다 크시다는 말을 하면서 같이 연결해서 나오는 것이 빼앗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되죠. 빼앗기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내 소유물 되면 안 되죠. 우리는 이 더러운 육신, 이 육신을 누구한테 맡겨야 돼요? 그냥 주님의 손에 맡겨야 돼요.
더러운 죄 있는 육신과 피의 만남. 그래서 그렇게 맡긴 자는 특징이 뭐냐 하면 매개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피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못 맡긴 사람은 결국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내가 피 믿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피가 나를 장악해야 되는데 내가 피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매개자를 이용한 것밖에 더 됩니까? 이용은 마귀의 주특기니까.
피를 위해서 오늘은 밥을 먹었고 빵을 먹은 거예요. 피를 위해서. 피 때문에 애 키우고 예수님의 피, 그 매개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매개 때문에. 무엇을 탈락시키기 위해서? 나의 착함을 탈락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악함도 의미 없어요. 나의 악함도 의미 없고 착함도 의미 없고. 선악은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착함도 의미 없고 악함도 의미 없어요.
욥기에 나온 욥의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저 친구는 나보다 악한데 왜 내가 벌을 받습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악한데 더 착한 내가 벌을 받느냐 이 말이죠. 그걸 세상 사람한테 이야기해보란 말이에요. 어떤 대답이 돌아옵니까? 세상은 악마에 빙의되어 있죠. 그럼 답변이 뭐라고 돌아오겠어요?
‘네가 모르는 죄가 있을 거다.’ 이게 바로 욥의 친구들이 이야기했던 거예요. 네가 모르는 죄. 그러니까 회개를 좀 깊이 해봐라. 건성으로 회개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회개해봐라. 새벽 기도할 때 5분 기도하고 일어서지 말고 적어도 50분은 해봐라. 비로소 네 죄를 알거다. 그 다음 날 50분 했겠죠. 그 다음 날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50분에 50번을 해야지.
그러면 결국 불교잖아요. 백팔 번뇌. 백팔 가지고 안 되죠. 천 번을 해야 돼요. 천 번해도 안돼요. 이천 번 해야 되죠. 루터는 무릎으로 베드로 성당 계단 다 올라갔잖아요. 관절 다 나갔죠 뭐. 관절 나가도 천국만 간다면 그까짓 관절이 문제겠습니까. 문제는 관절 나가도 나를 부정 못하니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를 없앨 수는 없어요. 그러나 피가 나를 부정케 하거든요. 피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하나님이 죽었거든요. 사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그리고 죽은 분을 인간이 ‘아저씨, 일어나세요.’ 예수님보고 아저씨,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난 게 아니에요. 마리아가 살려준 게 아니고 누가 살렸습니까? 살린 분이 누구죠? 아버지가 살렸죠.
인간은 뭐했습니까? 뭐했다고 천국을 가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잘 죽었는지 아닌지 그 뒤에나 삼인조 마리아가 가서 들여다봤지, 부활은 주님에 의해 부활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부활된다는, 성령에 의해서 부활된다는 그걸 왜 인간은 고백 못합니까? 악마가 다 컷트해서 고백 못하는 거예요. ‘쪼다같이 네 힘 가지고 해. 자꾸 누구 의지할 생각 말고.’ 이런 식이라. 내 속에 마귀가 수시로 자꾸 우리한테 그걸 독촉해요.
지금 우리가 마귀한테 꼼짝 마라 붙잡힌 이유가 이 구원 문제 때문에 그래요. ‘천국 가야 되는데.’ 천국 가야 되는데. ‘뭐 갔겠지.’ 이러고 있다고요. 구원 받았으면 ‘피로 끝났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인데요.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이게 요한일서 이야기잖아요.
내 믿음으로 구원 안 되죠. 내 소망으로 구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내 사랑으로 구원 안돼요. 그러면 앞에 ‘나’를 지웁시다. 믿음으로 구원 안 되죠. 소망으로 구원 안 됩니다. 사랑으로 구원 안 됩니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육신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에요. 우린 이미 범죄했기 때문에. 범죄한 그 자리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런데 주께서는 만남이에요. 만남은 뭐로 만납니까? 매개를 통해서 만나요. 그 매개가 뭐에요? 사도 요한에 의하면 ‘피’로 만나요. 피.
다시 요한일서 돌아옵시다.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피가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5장 6절 봅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물과 피로 임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자, 물과 피는 예수님의 육신에 관한 문제죠. 예수님이 물과 피를 흘린 것은 마귀 때문에 흘린 거죠.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필히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와야 돼요.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실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천사가 아니고 모호한 유령도 아니고 실제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실제로 물이 있고 피가 있다는 말은 실제로 이 땅의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보통 죄인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동질성을 유지했다는 겁니다. 동질성을 유지한 분이 구원을 받았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천국에 간 거예요. 인간이 아는 천국 말고.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르는 그 나라에 주님께서 가신 거예요.
그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피 흘리게 해서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천국은 이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마귀한테 되돌려주는 거죠. 마귀야, 네가 수고했다. 천국도 아닌 걸 천국이라 하느라 수고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은 일단 예수님만 가신 곳이에요. 부활의 첫 열매니까. 부활의 첫 열매에요. 그전에 에녹같이 안 죽은 경우도 있지만, 부활의 첫 열매는 그전에 에녹이고 엘리야고 가지 못한 세계에요. 그들은 음부에 갔지, 천국에 간 게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님이 최초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이름이 예수의 나라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야, 하나님 우편에 앉아야 비로소 생기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지금 성도가 가는 곳이 인간이 아는 천국에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의 나라에 가요, 예수의 나라. 예수의 나라는 인간 세계와 절단된 거예요. 끊어졌어요. 끊어졌으니까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물론 거기에만 영생이 있어요.
그러면 매개라는 것은 결국 들여보낼 자만 들여보내고 나머지는 못 들여보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피에 있습니다. 일단 어떻게 되느냐? 피를 흘린 이유를 대죠. 피를 흘린 이유가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 인간들을 사도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쉽게 말해서 ‘너희들 가운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손 들어봐라.’ 이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땅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죠.
그런데 말이 되든 안 되든 하나님 쪽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물과 피를 흘렸다는 말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뜻이거든요.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끊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너희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그건 모르겠고 무조건 끊어진 것은 확실하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결국 무슨 이야기냐? 이미 끊어진 저쪽 세계에서 뭔가 와야 돼요. 그게 뭐냐? 성령의 기름 부음이에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와야 돼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해도 ‘우리’에 속해요. 우리. 오늘 본문 3장 1절.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끼리의 세계.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들의 모임을 ‘우리’라 하거든요. 우리. 우리끼리 아는 이야기는 절대로 세상은 모르는 이야기만 우리끼리는 주고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귐이고 만남의 뜻입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되느냐? 바로 세상에서 하고 있는 악마에 빙의된 이야기를 우리가 다 알고 있죠.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착하면 천국 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어떻고 이야기하죠.
그것과 반대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뭘 하고 내가 뭘 하고 내가 뭘 하고를 전부다 반대로 하면 뭡니까? 주님이 뭘 하고 주님이 뭘 하고 주님이 뭘 하셨고 이렇게 되죠. 나의 믿음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 나의 소망 아니고 주님의 소망, 나의 사랑 아니고 주님의 사랑.
이런 말로 서슴없이 우리 입에서 나올 때 그건 내가 한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지속적인 예수님의 활동 차원에서 우리를 통해 말하게 하죠. 왜? 우리는 기계니까. 우리는 주님의 의의 종이니까 기계니까 노예니까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만큼 이야기했으니까 실제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응용문제 내니까 제가 질문할 때 여러분들이 답변 한번 해보세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렇게 나오죠.
자, 질문합니다. 천국 문은 있어요, 없어요? 천국 문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 천국 문 나오니까 있죠. 천국 문 있죠. 율법이 천국 문이니까 있죠. 있는데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는 일이 뭡니까? 천국 문에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들도 못 가게 막죠.
이제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사고방식이 뭡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천국 문을 가로막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50분씩 100분 동안 했어요. 그들이 천국 문을 가로막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객관식으로 해야 되는데 주관식으로 해서….
뭐를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끝까지 쥐고 있으려 했던 게 뭡니까? 자아죠. 자존심이죠. 자긍심. 아, 마귀가 집어넣어준 것, 인간의 힘으로 못 뺍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자아를 피로 경유해버리면 ‘저 때문에 예수님 죽었습니다.’는 피 이야기가 나오죠.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신. 나밖에 모르는 육신, 나만 챙기는 육신, 나만 배부르고 나만 인정받고 행복하면 그만인 육신, 이 육신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육신을 통해서 왜 피라는 매개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가를 더욱 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