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 강 창비(서울:2016)
( 내용 )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그 개의 꼬리털을 태워 종아리의 상처에 붙이고, 그 위로 붕대를 친친 담고, 아홉 살의 나는 대문간에 나가 서 있어”
아홉 살 때 개에게 물린 기억이 있는 주인집 딸인 영혜는 성년이 되고 결혼 5년 차에 될 때부터 피투성이가 된 고깃덩어리가 주체로 등장하는 잔인한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이 삽이나 칼을 들고 동물의 살해하고 피를 흘리는 이상한 짓을 하는 꿈을 자주 꾼다.
아마 아홉 살 그 당시에, 자신을 물었던 개에 대한 아버지 참혹한 보복을 끝까지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이 잠복된 체험이 성인이 되어 꿈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아버지는 개를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 패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달리다 죽은 개다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고서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동네를 일곱 바퀴를 달려 기어이 개 거품 물고 죽게 한다.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 넣었지. 아니, 사실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살벌한 꿈은 영혜로 하여금 불면증에 시달리게 했고, 자가 치료로서 영혜는 죽은 동물에게 속죄라도 하는 양, 일체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거부한다.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무용수처럼 비쩍 마르는가 싶더니 종내에는 환자처럼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되지 못함을 감지한 남편이 처가 쪽에 연락을 한다. 장인, 장모, 처의 언니까지 다 모인 자리에서 파월 군인 출신인 장인이 자기 딸에게 강압적인 조치를 꺼내든다.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내의 입술에 장인은 탕수육을 짓이겼다. 억센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열었으나 악물린 이빨을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 번 더 아내의 뺨을 때렸다.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 넣었다.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 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그러고 난 뒤 영혜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을 하나씩 응시하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과도를 치켜들고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동물 편에 선 자신이 인간 편에 선 자신에게 과감하게 복수할 타이밍이 되었다고 감지되었던 것이다.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흰 접시 위로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결국 영혜는 쓰려지고 다급하게 병원응급실로 실려 간다.
영혜는 병원에서 또 꿈을 꾼다.
명치에 뭔가 결려 있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먹었던 동물들의 목숨이었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주제)
일상 속에서 번져 나오는 인간의 폭력성은 사회질서의 근간이 되는 인간미 넘치는 가족애로서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주체 못할 동물적 성향을 보이면서 가족 관계마저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가족 간의 유대성이 끈질기게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잠복된 폭력성은 어떤 형태로도 희생자를 낳기 마련이다. 비록 채식만 하면서 스스로 자책하며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나무로 동화하고 싶어 하지만 덩달아 주변 사람들마저 이 거역할 수없는 퇴행의 횡포에 피해자가 된다.
기존의 사회 체계가 한 개인이 뿜어내는 자연 친화적 폭력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현실적 취약성을 향하여 작가는 고발하는 질문을 던진다.
(복음적인 평)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살벌함과 참혹함은 어느 정도 심도 있는 예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덜 참혹스럽다. 아무리 폭력이 활개 쳐서 감당키 힘들다 하지만 미리 단단히 각오하면 견딜만한 정신력은 배양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폭력 행사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6-29)
이런 지경에서 인간들이 망했다고 여기거나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호강에 바친 소리다. 현재 인간 세계는 이런 처절함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아무리 실패해도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에게 들이닥친 어떤 파멸의 사태조차도 복에 겨운 감사거리다.
이런 면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의 심각한 내면적 폭력 수준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를 욕보이는 낙서 같은 것이다.
댓글
이근호
문학은 오락, 인간의 내면을 탐색해서 타인들이 동의를 구하는 오락. 사람들은 노벨상으로 이 동의에 호응했다. 사람의 속을 탐색해서 뒤집어 보인다고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외부 환경이나 내부 환경이나 모두 악마의 세계다. 어차피 이런 지경에서 하루하루 견디는 것은 오로지 오락 뿐이다. 그래서 문학이 장려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