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게 재밌는 게 9절에 보면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했어요. 이게 왜 희한하냐 하면, 주님의 지시, 하나님의 지시를 전달받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주님의 지시가 주어지고 선지자가 지시에 대해서 지시가 이루어진 상황, 환경 속에서 선지자는 반드시 실패를 해야 돼요.
■“주의해. 그러면 안돼. 그러면 너는 안돼.” ‘안돼’ 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됩니까? 정신 차려서 우리는 안하려고 하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나 율법이나 계명은 반드시 계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계명을 받은 자가 위반자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다이렉트로 연결돼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직접 연결되면서 중간에 인간은 위반자로 위반하고 빠지는 겁니다. 빼야 돼요.
물도 마시고 떡도 먹고 가라는(물도 마시지 말고 떡도 먹지 말고 가라는?) 말을 주님이 먼저 선지자한테 했는데, 그 말을 누가 합니까? 여로보암 왕이 하는 거예요. 여로보암 왕이. 선지자 입장에서는 미리 예상도 못했죠.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에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했다 하면서 10절에,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10절까지 보면 이 선지자는 제대로 말씀을 지킨 거예요, 안 지킨 거예요? 지켰죠. 그러면 선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아닌 거예요. 이 선지자는 자기 자신이 말씀 지킨 나와 말씀 안 지킨 나 사이에서 본성의 차이를 모르고 정도의 차이만 알고 있는 겁니다.
이렇습니다. 말씀은 위반을 통해서 내어놓아야 됩니다. 그래야 이게 말씀이에요. 말씀이 왔잖아요. 위반하는 나를 통해서 내 입으로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 잡다한 말씀들을 끌어 모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수요일 말씀처럼. 잡다한 죄인들이 모아져야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내(예수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지시가 먼저 있고, 지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려고 했지만 위반자로 드러나요. 지시를 지키려고 한 건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모른 상태에서 그러는 거예요. 반드시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은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해도 괜찮아요. 왜?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요. 뭐 장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가는데 여기에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해요. 늙었다는 말은 뭡니까? 아까 첫째 강의에 의하면 인간은 뭐로 산다? 인간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경험으로 산다. 체험, 경험한 게 기억이 되니까요. 경험 많은 선지자가 이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듣고 와서 아들한테 가서 “야, 빨리 그 사람 쫓아가라.” 쫓아가서 만났어요.
만나서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말이 17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했어요. 하나님께서 진짜 선지자,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 만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 만나지 말라. 사람 만나지 않는 조건 하에 너는 내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사람 만나지 말라’하는 말은 어떻게 해야 돼요? 지켜야 돼요, 위반되어야 돼요? 위반해야 돼요. 왜? 상황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몰아넣었으니까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8절, 야, 18절 이거 정말 감동적이에요. 어디가 감동적이냐 하면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가 제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이거!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뭐함이라? “속임이라” 아니, 속인다고 속느냐? 예.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속인다고 속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아는 사람은 본성의 차이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속임수에요. 인간은 속임수 외에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속였고 또 속이기를 기다리고 있고 속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드디어 속임을 당하고. 이게 인간입니다.
결정적인 게 아직 남아있어요. 이것가지고 놀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물 실컷 마시고 밥 먹고 해서 갔다 이 말이죠. 22절 보세요. 하나하나가 지금 어려워요. 22절,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던진 벌이 뭐냐 하면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열조의 묘실, 선지자 계열의 그 특수한 공동묘지에 너는 못 묻힌다 이 말했거든요.
그리고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가니까 거기에 lion, 갑자기 짐승이 나타나서, 거기에 숲이 많은 모양이라, 짐승이 나타나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사자가 보통 고기가 탐나서 죽였으면 시체를 뜯어 먹어야 되는데 뜯어먹지 않고 그냥 그 시체 곁에 서 있어요.
버린바 된 시체를 누가 거두느냐 하면 29절에,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했어요. 그리고 나서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31절,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한 거예요.
자, 이 말은 뭐냐? 늙은 선지자의 희망은 뭡니까? 말씀이 임한 자의 죽음 앞에 자기가 붙어 있을 때, 나는 진짜로 말씀이 임한 자를 내가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죽도록 누가 유도했죠? 본인이 유도했죠. 그럼 여기서 정도의 차이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죄인 맞습니다’로 본성의 차이, 본질의 차이로 이 늙은 선지자가 여기에 들어온 거예요. 정도의 차이에서 본질의 차이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 여로보암에게 찾아온 이 하나님의 선지자는 누구를 구원함이었습니까? 여로보암을 구원함이에요, 아니면 선지자 같지도 않은, 속임수만 쓰는 늙은 선지자를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진짜 선지자 죽어서 그 죽음으로 인하여 늙어 죽은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이 뭐에요? 정도의 차이에서 말씀에 입각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 나는 그동안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 죄의 사주를 받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럴 때 왜 예수님이 죽어야 되고 예수님이 왜 자꾸 우리보고 너는 내 죽음에 합류하라고 했는지 비로소 그 내막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나 스스로 잘나고 멋있어 보이게 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냈던 입법기능을 뭐로 바꾼 거예요? 이미 계약 완성,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로 바꿔치기한 겁니다. 교체되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 바로 이러한 정도의 차이와 본성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여로보암 왕은 33절에 보세요.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되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