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711a 요한일서 2장 28절(주 안의 세계)-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28절부터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여기서 이러한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 안. 27절 끝에 “주 안에 거하라”, 28절에 “그 안에 거하라”. ‘예수 안에 거하라’라는 조건 하에 주께서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건짐을 받고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예수님의 의가 나타나는 그러한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대상체로서 우리가 사용되어진다는 거예요.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 안에 거한다는 거예요.
‘예수 안’ 이것이 사실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라면 여러 가지로 구분되지만 특히 무엇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느냐 하면, ‘의가 뭐냐?’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같은 말로 ‘죄가 뭐냐?’ 하는 거예요. ‘의가 뭐냐’는 같은 말이니까 지우고요. ‘무엇이 죄냐?’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무엇이 죄냐. 어떤 것이 죄지? 이게 나 혼자 있을 때에 나타나는 죄, 나 혼자 있을 때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 안에 있을 때 죄의 개념이 달라요. 나 혼자 있을 때 죄의 개념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죄라고 간주합니다. 인간이 홀로 있을 때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이 죄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가 판단의 대상이 돼요. 이게 죄냐, 의냐. 자기가 판단할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자책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나는 장래에 죽었어, 죽었어. 나 이제 끝났어, 끝났어.’ 뭐 이런 식으로 좌절하기도 하고. ‘나는 이제 천국 다 갔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천국은 말이 안돼.’ 이런 이야기할 때 주위 사람들이 ‘왜 그러는데? 왜? 왜?’ ‘나는 이런 잘못을 저질렀어. 난 끝났어. 나 20년 동안 교회 다녔는데 이제 다 소용없어. 나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 홀로 있을 때 내가 한 행위로 그 결과가 나에게로 온다.’ 나 홀로 있을 때, 행위의 주체가 나 혼자였을 때는 내 행동에 대한 그 결과가 나에게로 돌아오죠.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 어떤 결과든지 원인은 나에게로 오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 결과는 예수님께로 가죠. 예수님께로 가는 거예요.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은 어떤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게 주어진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나 자격이 우리 자신에게 없어요.
사다리 타기 있잖아요. 사다리 5개 중에 만약 맨 끝이 50만원 짜리고, 나머지는 꽝, 꽝 꽝 꽝, 이렇게 있다면, 사다리 타기에서 항상 첫 번째가 수학적으로 제일 유리하다는 말이 있어요. 확률상. 제일 왼쪽이. 이때 혼자 사다리 타기하게 되면 꽝 나와도 내 책임이고 50만원 타도 내가 잘 나와서 한 거고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주와 함께 있을 경우에 뭘 못하느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꽝이 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50만원 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결과는 내 행위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졌거든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이 평소에 자기가 잘한 걸 했습니까? 잘한 걸 믿었습니까? 내 아내가 임신 못해. 나 임신시킬 거야, 뭐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아브라함이 제시한 것, 나타나는 것은 뭐냐? 얼토당토 안한, 내가 상상도 못한 그 결과에 대해서 자기가 추후에 고백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인 거예요. 자기가 개입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약간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십자가 지신 분은 처음에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리에 계시다가 십자가 지시면서 십자가 증거하는 자리를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내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응애응애 태어날 때부터 ‘아빠, 십자가 줘. 십자가 갖고 놀래.’ 이랬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까지 모든 공생애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이에요. 십자가를 소개하고 증거하고. 나 십자가 지러 간다. 아직까지 십자가 지진 않았어요. 그 가운데서 베드로하고 반대 의견 있었고 뭐 여러 가지 있었잖아요. 제자들하고도.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분입니다. 지신 분이지만 그 전에는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스스로 증거하는 분으로 접근해 들어갔어요. 바로 이 상태를 예수님은 ‘아버지 안’이라 했어요. 아버지 안. 그러니까 ‘안’은 뭐냐? 영어로 하면 in이죠. in. '안‘의 내용은 뭐냐? 내용은 딱 두 가지에요. 십자가 지신 분과 그것을 증거하는 자, 이 두 가지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이 뭐에요?” 물으면, 가만있어. 안쪽 평 수가 몇 평이더라. 보통 안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바깥과 관련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안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은 하나마나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함께 있겠죠. 그거는 동어반복, 말 하나마나에요. 아무 추가적인 의미가 없어요.
이래야죠. “안에서는 무슨 특이사항이 벌어지는가?” 이렇게 물어야죠. 안에서는 무슨 특이사항이 벌어집니까? 정답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거기서 배제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배제되는 공간,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과 아버지만 주인공이 되어야 되고 그 두 분 사이에 언약만 실(實)내용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빠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예수 안’이 많이 나오죠.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8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와, 이거 진짜 미칩니다. 미쳐. 물론 교회 50년 다녀도 이 정도 안 미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정죄함이 없는 결과는 내가 관여해서 된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정죄함이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믿음이란 내가 빠진 상태에 대한 고백이 믿음이거든요. 그 현장에서 빠져있단 말이죠. 내가 원인제공자가 아니다 이 말이죠.
아까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인간이 혼자 있을 때 ‘죄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내가 똑바로 행동하지 않은 것. 내가 탐심을 낸 것. 또는 어디서 뭐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신학교 물 좀 먹었는지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과녁에서 어긋났다. 빗나갔다. 슈슈슉~ 화살 쏘는데 어긋나서 죄 지었다. 어디 뭐 양궁 합니까.
문제는 ‘죄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해서 증인으로 살고 있다는 거예요. 나의 행동이 올바르냐 그르냐 하는 감시체제 속에 인간은 살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데. 분명히 나는 나밖에 없다는데 웬 공포심? 웬 두려움? 웬 불안? 네 안에 너밖에 없다며? 없는데 네가 왜 걱정하고 염려하느냐 이 말이죠. 누구 있지? 너 누구 있지?
그런데 내 안에는 나만 있다는 것, 그걸 분명히 알면서도 내가 미쳐 찾아낼 수 없는 다른 게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물증은 없는데 심증이 가는 거예요. 뭔가 후달리고 있어요. 매 삶이 후달리는 삶, 쫓기는 삶이에요. 매일 삶이. 그게 잘 나타나는 게 수사 드라마. 수사 드라마의 주제가 돈가스 집에 가서 돈가스 잘 구웠는지 보는 그게 주제입니까? 아니죠. 돈가스 먹어가면서도 겁이 나요. 돈가스 먹어가면서도.
돈가스 먹어가면서도 겁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이냐? 드라마나 영화가 옛날에는 내러티브(narrative, 서사) 위주였죠. 이야기 전개 위주였어요. 그걸 가지고 ‘운동-이미지’라 합니다. 운동-이미지라 하는 것은 옛날 영화에요. 옛날식의 초창기 영화는 이게 정지화면이거든요. 정지화면을 계속 돌리면 막 움직이잖아요. 정지되어 있는데 이미지상은 운동으로 되어있다.
영화 초창기에 나왔을 때에 ‘움직이지도 않는데 사진 찰칵찰칵 찍어서 연결하니까 마치,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는 가짜다. 진짜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영화가 등장하고 난 뒤에 이 영화 필름이 진짜를 보여줘서 진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운동으로 보면 그것도 의미 있는 진짜라고 보는 거예요. 영화라는 게.
중요한 것은 운동-이미지, 정지화면이 연결되면서 거기서 이야기가 전개되죠. 이야기가 전개돼요. 초창기 영화에서는. 그냥 관객들이 이야기 전개대로 보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운동-이미지에서 나중에 시간-이미지로 이게 바뀌면서 이야기 전개가 그냥 앉아있으면 순서대로 차분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장면 보여줬다가 과거 장면 보여줬다가 왔다갔다 한다 이 말이죠. 현재 장면 보여줬다가 과거에 임순이가 누구냐. 낮에는 뭐 아줌마 됐다가 밤에는 아가씨 됐다 하는.
이게 뭐냐 하면 관객들의 영향력이 이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에 관여하도록 드라마를 짜는 거예요. 관여하도록. 안 그러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그냥 구경하고 지나가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더냐?’ 하면 나중에 찔찔 울면서 박수치고 이게 아니고, ‘도대체 범인이 몇 명이야?’ 이런 식으로. 누가 범인이야? 장재경이가 범인이야, 누가 범인이야? 자꾸 관객들이 거기에 관심 끌게 만드는 거예요. 관심 끌게 만든다고요.
그렇게 되면 등장인물+관객의 의견까지 고려해서 드라마가 진행되는 겁니다. 제가 단순히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지금 성경의 내러티브, 성경의 줄거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의 줄거리 전개과정을 운동-이미지로 보지 말고, 시간-이미지로. 시간-이미지란 말이 너무 어렵죠? 그럼 이걸 ‘관객이 참여한 전개과정’이라 하고 운동-이미지는 기계. ‘기계적 스토리’.
율법 줬다. 지켜라. 못 지켰나? 못 지켰으니까 너는 죄인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율법을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못 지켰다. 그래서 벌 받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해석해버리면 안 되죠. 뭘 해야 되느냐? 참여. 인물 참여를 해야 돼요. ‘왜 그들은 율법을 못 지켰지?’ 성경은 그걸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적으니까. 일부러 율법을 위반하도록 율법을 줘버리고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요.
이 세상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일하실 때 우리는 팔짱 끼고 하나님 혼자 하시면 우리는 박수나 치지, 이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일한다는 자체가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기 일에 끌어당긴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무슨 민족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자, ‘이스라엘 민족은 왜 율법을 못 지켰습니까?’ 라는 질문의 답변을 단편적으로 보면 뭡니까? 그들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못 지켰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왜 우상을 섬깁니까?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죄를 지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기계적인 스토리가 돼서 성경해석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럼 등장인물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언약의 역사 속에, 말씀의 역사 속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느냐?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율법을 왜 어기느냐?’에 대한 답변은, ‘왜 율법을 굳이 지켜야 되지?’하고 되묻는 거예요. 왜 율법을 지키지? 거기서 뭐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그걸 왜 지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그냥 관객 입장이 되지 말고 거기에 하나의 역할을 맡은 걸로 하게 되어버리면, ‘아, 그래. 율법을 저렇게 어기면 봐. 벌 받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지키자.’가 아니라 그 역할에 들어가 버리면, 율법을 우리가…아니, 율법이라는 걸 왜 지켜야 되냐 이 말이죠.
이 문제부터 되는 거예요. 왜?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그럼 하나님은 나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남이잖아요. 하나님은 내가 아니잖아요. 왜 내가 남 말을 들어야 돼요, 그래? 왜 내가 남의 말 들어야 돼요? 오늘 참석 안하잖아요. 보세요. 왜 들어야 돼?
‘돈은 없어도 하나님은 있다’ 그거하고 ‘돈은 있는데 하나님 모른다’ 둘 중에 어느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 어느 인생을 살고 싶냐고 묻는 게 잘못이에요. 그냥 살아요, 돈만. 하나님은 뒷전이고. 그런 게 우리 인간인데 누굴 욕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율법을 어길까?’ 너라면 지키겠나, 너라면? 너라면 지키겠냐 이 말이죠.
백날 뭐 수십 년 복음 듣고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그동안 계속해서 교회, 말씀 구경하러 온 거예요. 본인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거예요. 본인의 이야기로. ‘이스라엘 백성들 참. 이런 복을 받아놓고도 율법을 안 지키다니.’ 너 해봐라. 너는 지키겠나? 너 본인도 안 지키면서!
아니, 율법을 왜 지켜야 돼요? 하나님을 믿어야지. 아니, 하나님을 왜 믿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데 왜 믿어야 돼요. 하나님은 필수 과목이 아니고 선택 과목이잖아요.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믿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왜 믿어야 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 믿어서 저주 받았다. 아니, 저주를 받는다고 해서 믿습니까? 저주 받으면 그냥 저주 받는 것이지, 저주 받았다고 믿어지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질문을 해볼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오늘, 어차피 모르는 거 모르는 것만 계속 할 거예요. ‘인간은 왜 울지요? 왜 웃지요? 혼자서?’ 고양인가? 고양이는 혼자서 웃대요. 왜 웃는지 모르겠어. 고양이들. 눈 동그라니 해가지고. 인간은 왜 웃습니까? 인간은 혼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혼자 있지 않으니까 때로는 빙그레 웃기도 하고 또는 울기도 하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과 함께 있는 괴물은 누구냐, 너? 누가 너를 웃게 하고 누가 너를 울게 했더냐.
분명히 하나님은 아니에요. 분명히 예수님도 아니에요. 왜? 인간은 내가 하는 것으로서 모든 일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이 혼자서 웃고 혼자서 운다는 그것은 분명히 인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다는 거예요. 평생 살아도 그 괴물이 누군지도 모르고 웃고 울고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인간이 웃고 우는 이유는 역시나 나는 혼자임을 우는 것으로 웃는 것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기 증명이에요. 인간의 자기 증명. 인간의 자기 확인이에요. 내가 여기 혼자 있다는 것을 늘 증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증명하죠?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이런 자기 증명을 하느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식으로 자기 증명합니다. 나 중심으로 내 중심으로 나의 안과 밖을 구획하는 나누는 그게 인간 평생의 모든 생각과 태도와 행위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여기까지는 네 거고 여기부터는 내 거다. (저건) 너의 것이고 (이건) 나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전체 물음을 한꺼번에 답변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함께 사는가? 인간은 자기 소유물과 더불어 살아요. 소유물, 내 것과 살아요. 인간은 내 것과 산다고요. 내 것이 있음으로써 웃고 내 것이 있음으로써 울고. 내 것이 불안하면 울고 내 것이 예상 밖에 좋게 되면 웃고 그런 거예요. 나는 내 것으로 사는 거예요, 내 것으로.
내 것으로 살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내 것에 대한 믿음이 나의 믿음의 전부에요. 다른 것은 씨도 안 먹힙니다. 내 것을 내가 갖는 그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씨도 안 먹혀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모든 신경을 내 것에, 내 가진 것에 신경 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를 따라잡아서 누구 것 만드는 겁니까? 내 것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예수 믿는 자로 자기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뭐 알고 싶지도 않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굳이 뭐 알고 싶지도 않죠.
그러면 인간은 내 안과 내 바깥이 있는데 내 안은 내 것과 살죠. 그 내 것 가지고 뭐 하느냐? 나를 증거하는 자리죠. 내가 이렇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에요. 그 밑천이 있어야 되는데 밑천이 나의 것이에요.
치매 걸린 노인네들 보면, 혼자 사는 치매 걸린 사람들 이웃집에서 냄새 난다 하죠. 그럼 구청에서 와보면 어떻습니까? 그 동네 온갖 쓰레기는 다 모아놨죠. 여러분도 치매 한번 걸려볼래요? 온 쓰레기를 다 모아놔요. 어떤 젊은 여자 분은 택배 신청해서 뜯어보지도 않고 택배 박스만 가득 쌓아놓고 있어요. 정신병자죠. 뜯어보지도 않을 걸 왜 그렇게 쌓아놓느냐? 흐뭇하잖아요. 포만감에.
나는 내 것과 대화하는 거예요. 내 것은 나의 세계 부하들이에요. 나의 신하들이고 나를 추종하는 신도들이에요. 그게 택배 물건이든 고양이든. 개도 마찬가지고요. 자기 것 가지고… 왈왈, 그러면 ‘그래, 엄마다, 엄마.’ 흐뭇하죠. ‘엄마가 밥 줄까?’ 그런데 바깥에서 또는 이웃집에서 ‘자꾸 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 그 아줌마는 ‘물어. 물어! 슉슉, 물어!’ 왜? 나의 적이니까. 내 것에 대한 범위를 침범했으니까. 만약에 내 것이 손상되면 그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나의 존재의 재료들이 존재의 토대가 무너지죠. 내 존재를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내 존재의 재료들.
제가 자꾸 미쳤다, 미쳤다 하는데요. 이게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에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식 세 명 낳고 자기 부인하고 저녁상할 때마다 “야, 큰 아들 오늘 학교 가서 뭐 배웠지?” 이렇게 묻잖아요. 물을 때 그 태도 자체가 자기 휘하에 부하들이에요. 자기는 해병대 사단장이고. 자기 부인은 중령이고. 막내한테 “야, 너 물 범람하는데 들어가면 안 된다. 이 해병대야.” 이런 식으로. 자기 사단을 구성하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가스 라이팅 당하는 것.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든 행동에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에 나서는 것.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준 건 뭐냐? 완전히 약을 올리는 거예요. 율법 줘도 소용없어요. 처음에는 율법을 왜 지키려 했는가? 자기한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해서 지키려 했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주변에 율법 없는데 잘 사는 민족들을 강성케 해버렸어요. 율법 없는데 잘 살고 율법은 모르는데 언약도 모르는데 군사력이 강해. 무기가 세요. 할례 받지 않았는데 키가 3미터 넘어. 골리앗이. 사울 왕 및 그 신하들은 음메, 기죽어. 다 기죽어 있습니다. 골리앗은 쿵 쿵, 창으로 땅을 치면서 방패 큰 거 해가지고. 덩치가 크니 구강 구조도 울림통도 클 게 아니겠습니까. ‘이리 오너라~! 비겁하게… 우리 일대 일로 붙자. 나한테 지면 너희들 다 나의 노예 되고. 됐냐? 뭐 하냐? 남자끼리 비겁하게 숨지 말고 사울 왕 이리 나와! 붙자. 너 왕이잖아. 나도 왕이야. 한 판 붙자.’
도대체 골리앗은 뭘 믿고 그렇게 큰 소리 쳤습니까? 자기 자신의 가진 것이죠. 가진 것. 자기 소유입니다. 소유가 있는데 자기 바깥으로 안 나가죠. 소유를 지킬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는데. 그 소유 중에서 아버지의 이름도 포함되죠. 우리 집안의 가오와 가문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내 것 있는데 내 것 있는데 율법을 왜 지키나? 우리 가정의 가문부터 중요하죠.
아들이 교회 가니까 아버지가 “야, 이리 와. 너 고3이잖아. 고3이 이렇게… 네가 배가 불렀구나. 네가 교회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오답카드 끄집어내가지고… 지금 며칠 남았는데? 백 일 약간 더 남았는데 바짝 해가지고 네가 의대를 가야 우리 가문에 영광을 돌릴 거 아니야? 너 누구 식구야? 너는 내 식구야. 너희 엄마 봐. 돈 벌어가지고 나하고 네 엄마하고 너한테 밑천 들여 맨날 학원 보내고 밤늦게까지 기다리고…이게 무슨 짓이고. 너 하나 잘 키울라고 그 모진 비바람 다 맞아가면서…” 이럴 때 엄마는 또 그냥 있으면 안돼요. 찔찔 또 울어요. 아버지는 고함지르고 엄마는 울고. 네가 이렇게 날 배신할 줄 몰랐다. 너 때문에 손 다 텄다. 봐라. 동정심에 호소하든지 강압하든지.
우리는 내 것 속에 네가 다 구성요소잖아요. 내 것 속에. 이미 우리는 예수 안 이전에 안이 있었어요. 나갈 생각이 없어요. 왜 나가요? 그 안 세계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바깥에 왜 튀어나옵니까. 그냥 교회 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냥 간 보죠. 간을 보는 거지, 내 것에서 가출할 일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것을 믿고 자기와 동행하기 때문에 자기 것 외에 일체 믿지 않습니다. 율법? 안 지킵니다. 그 본색을 드러낸 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내 안에 갇혀있는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시는 하나님’이에요. 내 안에 갇혀있는 나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그걸 주목해야 그게 하나님의 기능을 아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믿으라 하니까 믿죠. 좋다는데 왜 안 믿어요? 끌어 모으죠. 마치 온 동네 쓰레기 끌어 모으듯이 다 끌어 모아요. 그 동네 교회 전도지 다 끌어 모으듯이. 교회 행사하면서 주는 거 다 끌어 모아가지고 실컷 하니 뭐합니까. 그 자리가 예수 안이 아니고, 나의 안인데!
나의 존재의 안이고 나의 존재의 안은 내가 끌어 모은 것으로 내 존재 증명하고 그걸 확인해주고. 그걸 의롭다고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그 영역 속에 하나님마저 강제로 끄잡아 당겼단 말이죠. 애완견도 아니고. 강아지처럼 끌어당긴 거예요. 자기가 주체고 주인공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이미지. 인간을 관여해요. 인간을 관여시킨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이를 뭐로 바꾸느냐? 운동-이미지, 기계 이미지로 바꿉니다. 운동-이미지, 기계 이미지는 사실은 정지되어 있는 단편적인 것인데 이걸 빨리 돌리다 보니까 마치 우리가 운동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간세계에서 그렇게 조장을 한 거예요. 모든 게 환상인데. 진짜 세계는 인간의 활동력에 있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실은 인간은 모두 다 자기 바깥으로 못 빠져나오는 가운데 있는데. 그렇잖아요. 못 빠져나와요.
이것을 캡슐로 해봅시다. 사람이 세 사람 만났다. 이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거죠. 실은 각자 캡슐을 뒤집어쓴 거예요. 나는 내 안을 가지고 나의 것을 가지고 타인을 만나고 A도 그렇고 B도 그렇고 C도 그렇고 전부 다 이렇게 만나는 거예요. 가족이란? 가족도 마찬가지죠.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또는 전통적으로 시간적으로 식사를 같이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니까 우리는 한 가족, 한 패밀리인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각자 따로 자기 방을 갖고 있고 자기 생각과 기대가 다 따로 있어요. 전부 다 따로따로에요.
이게 들통나는 시기가 언제냐? ‘안은 일체 외부에 명령과 지시를 일단 차단시키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선별, 채택한다.’ 이게 이 안에서 하는 활동입니다. 아빠, 엄마의 모든 명령을 일단 안 들어요. 안 듣되 내게 어느 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가지고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그 환경 속에서 여전히 내가 원인을 제공했고 결과는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순환구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사가 환자한테 말하기를, ‘이거 하루 세 번 식후 30분에 먹으세요.’ 남들 보기에는 정지화면이 아니고 연결된 운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환자 본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내가 이 약을 먹지 말고 그냥 판콜 에이나 먹고 때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가만있어보자. 판콜 에이가 싸거든. 10개에 3천원 하니까 싼데 약 지어주는 건 의료보험이 되니까 의료보험 되면 약국 가면 노인은 65세 이상 1500원밖에 안 내.’ 뭐 온갖 생각하면서 ‘예. 따르겠습니다.’ 따르기는 뭘 따라요?
그런데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 할 사람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안이 죄가 되려면 자기 존재 증명 자체가 원천적으로 이건 실패로 끝났다는 걸, 끝났다는 판정을 내려줘야 그게 죄인 되니까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의인될 가능성 전무하고 나는 죄만 짓는다는 판정을 내릴 때나 내가 죄인 되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아무도 없죠, 결국. 결국 아무도 없는 거예요. 주님께 부응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열두 제자 중에 아무도 없어요. 자기 주장들을 내세우면서 그냥 해버리죠. 그러니까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따라잡아서 내 것 만드는 목표로 간 거예요. 따라잡아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해요. ‘목사님의 복음은 언제 따라잡습니까?’ 따라잡아서 뭐해요? 따라잡는 게 문제가 아니고, 따라잡았던 그 결과를 어느 아지트로 가져가느냔 말이죠. 나의 아지트라 하잖아요. 나의 아지트. 얼추 따라잡았다고. 그게 바로 예수님이 생각하는 ‘안’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안’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에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원인으로 들어가서는 결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어요. 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십자가 이후에 마태복음 9장을 다시 보면서 성령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할 때 그때 성령오고 난 뒤에 이게 무슨 뜻인지를 그때 아는 거예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거 썼던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마태도 마찬가지고.
‘예수 안’ 이전에 ‘나의 안’이 우선이에요. 나의 안이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필히 나의 안은 예수님에 대해서 요모조모 따져보고 내린 결론이 ‘없애자. 죽이자’에요. 죽이자. 이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만의 결정이겠어요? 아니겠죠. 제자들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죽이자’까지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피하자’까지는 되겠죠. 근처 가지 말자.
이처럼 인간은 캡슐 안의 존재에요. 아직까지 본론을 제가 이야기 안 했어요. 서론만 이야기했어요. 본론은 뭐냐? 아까 언급은 했죠. 본론은 ‘안 되는데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방식은 뭐냐?’ 자폐적으로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을 주님께서는 구원해내십니다.
구원해내고 난 뒤에 요한복음이나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마구마구 쏘아대는 구원, 의, 영생, 천국 이 모든 것에 조건이 다 붙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 ‘예수 안’에서의 영생, ‘예수 안’에서의 믿음, ‘예수 안’에서의 소망. 모조리 다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예수 안이 붙어있다고요. 예수 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린도전서 1장. 아까 로마서 8장 이야기했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느니. 정죄함이 없다는 거기에 눈독 들이지 말고,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정죄함이 없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말씀 자체가 나를 증거하는 내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건 뭐 그림 속의 떡이에요. 우리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우리 자체가 내 안에 갇혀 있는데 예수 안으로 나아갈 수 없고, 예수 안으로 못 나갔다면 그건 끝난 거죠 뭐.
힌트는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까 시간-이미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의 죄로 태어났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뭔가 사건 안에 끌어당겨요. 사건 안으로 자꾸 잡아당긴다고요. 당겨봐야 그들은 뭐 안 믿고 돌아서면 또 헤헤거리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어쨌든 간에 자꾸 끌어당기는 것은 언약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나 언약이 그 불신자 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경유하도록 조치를 해버려요. 경유하도록.
골리앗 이야기 나왔으니까, 아까 골리앗 앞에 누가 등장해야 되죠? 다윗이 아니라 소년 다윗이 등장하죠. 소년 다윗. 소년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 장면은 관객들이 많았어요. 이것은 하나의 하나님이 만든 드라마에요. 관객들이 많은 거예요. 거기서 도박자들이 도박을 건다고 해봅시다. 다윗에게 판돈 걸래요, 안 그러면 골리앗에게 걸래요? 일대 일로 붙었는데. 어디에 걸겠습니까?
첫째 시간 마치면서 찝찝하게 마치면 제가 예의가 또 아니잖아요. 정답을 암시하고 첫째 시간 끝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한도초과’. 다윗은 자기 한도를 초과했습니다. 골리앗은 자기가 아는 한도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흔히 말하는 자기 안에서 벗어나니까 자기 안에서 벗어난 그 곳에 ‘내 안에서 벗어났다’가 아니라 다른 안이 대기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나 안이라는 작은 원 밖으로 나가니까 여기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큰 원이 있어요, 큰 원. 큰 안이 있어요. 큰 안.
이것은 바로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엘리사의 사환이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저기 보세요. 얼마나 군사들이 많습니까?” 하니까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줬죠. 그러니까 어땠습니까? 이쪽 엘리사 편의 천군천사가 저쪽보다 더 많아요.
그럼 게하시는 왜 우리는 둘밖에 없고 저들은 많다고 했습니까? 자기 안에서 못 나와서 그래요. 그럼 게하시는 왜 자기 안에서 못 나옵니까? 내 것의 효용, 내 것의 효력을 끝까지, 보잘 것도 없지만 끝까지 그것만을 믿습니다, 하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끝까지.
구약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스토리에 인간들을 집어넣어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40711b 요한일서 2장 28절(주 안의 세계)-이 근호 목사
다윗이 대결했던 그 골리앗. 다윗이 대결했던 골리앗 이전에 골리앗이 대결했던 것은 인간들. 인간들 가운데서도 아주 연소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모든 완력이 성숙하지 못한 소년 다윗의 등장. 하나님께서는 골리앗과 인간을 한통속으로 묶어버리죠.
골리앗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 사울이 사실은 이미 골리앗한테 정복된 상태라고 보는 거예요. 못 이겼으니까. 아무도 골리앗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아무도 골리앗을 못 이긴다는 말은, 인간의 한도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 속에 인간을 개입시키느냐? 이길 수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내가 원인이 되어봤자 아무런 결과가 없는 일을 주께서는 발생시켜버리죠. 내가 개입해봤자 아무런 성과가 없는 일을 발생시키고 그 앞에서 개인적인 인간의 ‘나의 안’은 더 큰 ‘안’ 속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골리앗 안에 이미 사울 왕과 이스라엘이 갇혀 있는 거예요. 내 안인데 내 안으로 그냥 내가 나한테 명령하고 싶은데, 골리앗은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시합을 걸어왔잖아요. 이걸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모자라니까 지시와 명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죠. 꼼짝 못하고 있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인간이 소박하게 내 안에서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그걸 그냥 용납하지 않고 더 큰 권력 안에 놓이게 만들어서 흡수 통합당하게 만드는 거예요. 잠식당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 세상 권력에. 나는 나로 인하여 소박하게 못 살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오십니까, 요한복음에서? 난 아버지와 함께 있죠. 예수님과 아버지가 서로 사귐이 있다 했어요. 요한일서 1장에 나옵니다. 사귐이 있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1:3)
사귐이 있으니까 아버지에 의해서 보내진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권세에서 나온 지시와 명령을 차단시켜버려요. 절단시켜버립니다. 그들이 어떤 해석을 해도 안 듣습니다. 그들이 어떤 지시를 해도 안 듣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버려요. 요한복음 5장에서. 유대인들의 속이 확 뒤집어지죠.
유대인들 속이 왜 뒤집어집니까? 예수님이 병자보고 네가 담요 들고 나가라고 한 그것이 그들 속이 뒤집어질 일입니까? 그들 속이 왜 뒤집어질 일입니까? 그들은 이미 기존에 있는 율법 해석이라는 권세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 권세에 예수님이 합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성질난 거예요. “너 뭐야? 다들 동의하는 율법해석을 너는 왜 거부하는 거야? 안식일에는 노동하지 말라고 했잖아.” 라고 이야기할 때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어.”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가 오늘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 있다고 먼저 성급하게 그런 상황을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께 아버지 안이라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가 먼저 성사되어야 돼요. 성립되어야 돼요. 그게 굳어져 있어야 돼요. ㉯예수님은 아버지 말과 지시 외에 모든 것을 다 차단시켰다. 거부했다. 그럼 거부한 결과는 뭐냐? 참혹한 죽음이죠. 참혹한 죽음이었어요. 십자가 죽음이었어요. 거부한 결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쪽에서 본디오 빌라도 쪽에서 여러 가지로 기회를 줬습니다. 심지어 본디오 빌라도는 어쨌든 간에 예수님 한번 살려보겠다고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채찍을 때려서, “거 봐. 채찍 맞는 모습 봐. 아무것도 아니잖아. 때려도 군소리 않고 맞잖아.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헛소리에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 없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런데 이상하게 유대인들은 그래도 죽이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본디오 빌라도가 그 당시 가장 흉악한 살인자를 내세워가지고 “둘 중에 하나 골라. 너희들 사회에 어느 것이 해를 끼치는지 너희가 한번 판단해봐. 강도 맞지? 이 살인강도 또 살인할 거야. 맞지?” 이렇게 힌트를 줘도 유대인들은 “차라리 예수를 죽여라.”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 입장에서는 이거 미치는 거예요. “왜? 예수를 왜 죽여야 되는데? 왜?” 이유를 대라 하니까 사람들 소리가 더 많아져가지고, “그냥 죽여.” 그냥 죽여. 그것은 유대인들이 본디오 빌라도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딴딴한 믿음이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가 자기 안, 율법해석에 대한 자기 안이 따로 딱 굳어져 있었어요. 씨도 안 먹히죠. 무조건 죽여. 무조건. 이유 없어. 무조건 죽여.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인간이 뭔가 개인적으로 결정을 하고 싶어도 그 인간에게 작동하는 더 센 권력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죠. 특히 베드로 같은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잡힐 때 눈치 보고 슬금슬금 뒤로 뺐잖아요. 예수님 권력은 그들의 권력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들, 제자들 앞에서. 권력이 중요하지, 예수님은 그냥 한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끝나버리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고 이게 우리 모습이에요. 뭐 구원요? 천국? 바랄 걸 바라야죠.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마태복음 1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 1장 6절까지가 14대거든요. 1절부터 6절까지 14대를 구축하는, 14대의 형태를 갖추게 하는 그 동력이 뭐냐? 그것은 바로 율법을 모르는 네 여인의 개입입니다. 율법을 몰라요. 율법을 모르는 네 명이 나오는데 그 네 명의 이름 뒤에 ‘~에게서’가 붙습니다. 에게서.
첫 번째 나온 ‘~에게서’가 뭐냐? 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죠. 그다음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또요. 그다음 “보아스는 룻에게서” 나오죠. 마지막 6절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이라는 그것을 형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은 율법이 없는 자를 집어넣어서 노선변경을 시도하는 거예요. 노선변경. 이렇게 해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여러분 전혀 모를 거예요. 창세기 6장 한번 봅시다. 창세기 6장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했죠.
창세기 6장 1절, 2절 읽어보세요.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사람에게서 딸들이 나니.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아내를 삼았죠.
그냥 아내만 삼았습니까? 자식이 나왔습니까? 자식이 나왔죠. 4절에,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그다음 뭡니까? “용사라” 변종이 나온 거예요. 변종. 변종인데 부정적 변종. 질이 나쁜 변종이 나왔죠. 이종(異種) 간에 번식한 거예요. 이종 간에. 질적으로 전혀 다른 노선 간에 별종이 나온 겁니다.
똑같은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율법을 아는 민족에다가 전혀 율법을 모르는 민족을 의도적으로 개입시켜서 자식을 낳게 만들었어요. 자식을 낳게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간 족보가 생겨나는 거예요. 율법 없이 태어나는 족보. 율법 없이.
지금 이걸 하나하나 생각해봅시다. 일단은 율법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여기 마태복음 1장 족보 1장 2절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죠. 그냥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리브가를 통해서 야곱을 낳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그들은 이방민족이 아니에요. 전부 다 같은 혈육에 속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쭉 나갔단 말이죠. 사람들은 이걸 율법에 대한 정상적인 족보라 생각했겠죠.
그런데 이렇게 이것이 정상적이라면, 정말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 다말은 여자거든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에게서’라는 말을 굳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말은 며느리에요. 자기 아내 아닙니다. 이상하게 틀어지죠. 족보가 정상적인 남녀관계가 아니고 틀어지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 인간세계로부터 튕겨져 나와서 인간은 인간세계, 하나님은 하나님 세계로 완전히 결별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걸 복음의 내용으로 삼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은 인간이 끼어들지 않는 족보 만들기에 나선 겁니다. 인간의 혈통이 끼어들지 않는. 인간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 말고,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을 개입시켜 나온 결과물로 그들만 구원받기를 원하고 천국 백성 만들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끼어들 수가 없죠.
다말? 다말 생각하면 자꾸 다말은 착하다. 다말이 착합니까? 아까 첫째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뭐를 죄라고 합니까? 인간은 뭐가 죄냐? 내가 나쁜 짓한 게 죄고. 뭐가 의냐? 내가 착한 짓한 게 의라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죄고 예수 믿으면 의가 돼요. 제가 이 말을 쉽게 못하는 이유가 이 말을 해봤자 예수 믿는 그 착한 일을 했으니까 의다, 예수 믿음에다가 착한 일을 같이 결합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인간으로부터 추방된 자기 때문에 예수 믿을 수가 없어요. 왜? 자기들이 착하니까. 아니, 착한 사람 되고 싶으니까. 착한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 하니까. 그게 자기 세계니까요. 그래서 자꾸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기 구원받는 일에 자기가 끼어들기를 쉬지 않아요. 자꾸만 끼어들어요.
죄가 뭐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나쁜 게 죄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관계없이 내가 느낌으로, 느낌 아니까, 평소에 내 느낌으로 죄는 나쁜 짓한 거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뭔가 실수했다 싶으면 그다음부터 불안감이 찾아와요. 내가 벌 받아야 속이 시원하지, 벌 안 받고 그냥 찝찝하니 못 지나가겠다. 내가 나쁜 짓했으니까 숨어서 목사 욕했으니까 내가 다음 주일에 헌금 만원 더 보탠다.
아까 안양 강의에서도 했잖아요. 수련회에서 다윗을 본받고 싶어요, 이런 사람은 있는데 아나니아, 삽비라 본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했잖아요. 아나니아, 삽비라는 뭐했습니까? 헌금 반만 내다가 하루에 다 죽은 사람들이잖아요. 같은 말씀인데 왜 그거는 본 안 받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보고, “너 시집가서 누구 본받고 싶어?” “한나!” 한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리아!” 마리아 말고. 누구? 다말. 시아버지하고 관계 맺은 다말. 그거 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내가 나의 안을 유지하는 차원에서는 나는 내가 깨어지는, 내 안이 아무 무가치하게 쓸모짝 없는 존재로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존재로 주의 일에 끼어들기를 우리는 싫어합니다. 나의 안이, 나는 내 것이니까 내가 용납 안 해요. 우리는 멋있게 살고 싶어요. 성경대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싶어요. 시아버지하고 놀아나는 그런 며느리는 싫어요. 잠시나마 창녀 짓하는 그런 여자는 싫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말을 족보에 집어넣습니다. 그건 뭐냐?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다 다말 같은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 족보에 어느 한 순간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대표하니까요. 저주받은 자의 대표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는 기존의 잘났다 하는 유대 족보를 틀어지게 만들었어요. 그 잘남의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렇다면 천국의 족보라 하는 것은 잘난 체하고 자기가 의롭다 여기는 그들과 정반대되는 자들을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끌어당겨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다음에 5절 봅시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기생 라합이죠. 기생 라합은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자기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에요. 고소한 사람이에요. 저쪽에서는 배신한 거지만. 부탁했어요. 내가 당신들 정탐꾼들 숨겨준 것을 당신 나라에서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우리의 혈육을 저는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자기 안이라는 것을 포기한 거죠. 왜 포기했는가? 기생 라합은 들은 풍월이 있어요. 모압이나 어떤 민족도 현재 이스라엘을 태풍처럼 끌고 오시는, 허리케인처럼 몰고 오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당할 민족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그 앞에 자기 안을 그냥 자폭해버린 거예요.
자기를 공격하는 쪽에 미리 항복해버린 거예요, 기생 라합이. 자기를 침범하고 공격하고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그들에게 미리 알아서 자기가 없어지는 거예요. 다만 정탐꾼과의 관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리죠.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그만두겠습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근사한 결과를 끄집어내는 것, 내 쪽에서 나는 중지하겠습니다. 이제 그런 짓 그만 할랍니다.’ 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나오는 족보, 14대-14대-14대니까 끝에 예수님 나오는 족보에 이들 중 라합이 끼어듭니다. 이거는 거꾸로 생각해서 오실 예수님의 능력이 기생 라합에게 미리 작용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미리 작용했다.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자가 누굽니까? 이방인이죠. 율법에 의하면 율법이 없는 자는 저주받을 자에요. 그런데 율법이 없는 저주받을 자를 예수님 족보에 하나님이 왜 끼어들게 하십니까? 왜 끼어들죠? 율법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자기 자신의 행함과 율법을 지켰다는 원인자로서 거기에 자기 자신이 끼어들게 되어 있죠. 그러나 이방인 같은 경우에는 개코도 뭐 내세울 게 없어요. 율법을 알아야 내세우죠. 그냥 접수당하고 그냥 점령당하고 침범당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이. 여지없이.
아까 나왔던 유다의 며느리 다말. 시아버지가 다말을 그렇게 천대해가지고 ‘너 때문에 우리 집안 거덜 났다. 나가라.’ 하면 그냥 곱게 나가면 되잖아요. 왜 안 나가죠? 어디 복수하려고? 시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출장일자 계산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까? 그런 겁니까? 다말은 이미 이 언약 안에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자기 안의 세계를 만들지 않아요.
시아버지가 이 언약을 이용해서 자기 안이라는 걸 따로 만들었던 거예요. 따로. 다말 보기에는 이게 언약에 위배된 걸로 보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자기 남편 죽었거든요. 그리고 그 시동생 오난도 죽었잖아요. 다말 보기에 이건 뭔 뜻입니까? 의도적으로 이 유다 집안의 대를 저주로 끊어버리는 거예요.
다말은 이 사실을 알고 언약 해석에 대해서 (유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세계가 만들어지는 건데 유다는 언약을 이용해서 자기 집안을 존속하려 하고 자기 집안을 건사하려는 데에 언약을 이용한 거예요.
그럴 때 다말은, 나 하나 욕 얻어먹지. 하고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었잖아요. 결국 유다 입에서 뭐를 끄집어냅니까? 당신이 옳았다.(창 38:26) 당신이 옳았다. 다말아, 네가 옳았다. 너 아니었으면 새로운 언약의 베레스와 세라가 안 생길 뻔 했죠.
인간이 원인으로 집어 들어간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이 없을 뻔 했죠. 누구 아니었으면? 다말 아니었으면. 정작 다말은 자기를 언약의 사람으로 생각했지, 자기 안에서 따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5절, “보아스는 룻에게서” 아, 참. 룻은 이방여인이에요. 그래서 나오미가 룻보고 “네가 우리 집안에 있어봤자 넌 낙이 없어.” 라고 시어머니가 룻에게 너 나이도 젊은데 그냥 새로 팔자 고치고 시집가라고 떠밀 때, 그 모습 속에서 나오미가 율법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왜냐하면 율법이 자기 남편과 자기 시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거예요. 자기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임으로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짜 본모습이 노골적으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세상에 이런 발상이! 이런 발상이 다 있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내가 구성해놓은 나만의 것, 내 소유로 만드는 나의 영원한 그것을 박살내고 그것이 바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하실 일인 거예요. 하실 일. 정작 율법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나오미는 그걸 몰랐어요. 그저 이스라엘 백성이니까 내 집안 하나, 율법으로 하나님의 복 받아 건사하려고 했지 그 율법이 살아서 나를 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 덕분에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 왕을 낳았잖아요. 왕이 등장했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안에서 못 벗어나요. 안 벗어납니다. 안 벗어나는 그 인간에게 자기를 깨뜨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너 저주받기 싫어, 좋아?” “싫어요!” 그럼 내가 저주받으면 되잖아. 저주받은 분이 와서 저주 안에서 주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나의 세계가 와장창 산산조각 나 깨져버립니다. 침범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침범, 말씀의 침범. 십자가의 침범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전에 나의 안이 실패를 한 자에게만 예수 안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질문을 이렇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건 흔히 불신자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한번 답변해보세요.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지금까지 강의한 것 가지고 이 응용문제 한번 풀어보세요.
친구들이 맨날 교회 간다 하니까 물어보는 질문인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노? 어디 있는 줄 알면 나도 하나님 믿을게.”라고 했을 때 여러분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 그거는 무당들도 하는 얘기죠. 그거는 무당들, 절에 가도 하는 이야기에요. 부처님은 우리 마음속에 어디가도 다 있다. 무소부재하시고. 그런 이야기.
주님은 나를 깨뜨리는 그곳에 계시죠. 내 안을 깨뜨리는 그곳. 나의 존재가치, 나의 모든 의미를 깨뜨리죠. 깨뜨리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항상 원인자로 끼어들기 때문에.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그 결과를 내 쪽으로 가져오는 그것을 우리는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걸 깨뜨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십자가 안에 있다고 했어요. 십자가 안에. 사건 안에 있다고 한 거예요.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하면 또 십자가가 어디 있나? 예루살렘까지… 지금 전쟁 중인데 거기 가지 마세요.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이 터져버리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럼 십자가 사건은 뭐냐? 예수님이 저주받은 사건이죠. 인간에게 내침을 당하는 사건. 그래서 인간들이 제자들한테는 배신당하고 사람들에게는 권력으로 내침을 당해서 살해당하는 그 사건. 그 사건 속에 비로소 예수님은 얼굴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핍박사건이 벌어진 그곳에 예수님이 계셔요. 핍박사건.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얼마나 핍박했겠어요? ‘이 율법도 모르는 것, 율법도 없는 것들. 개와 같아서 너희는 저주나 받아라.’고 한 그 이방여인을 남성 위주의 유대인 족보에다 네 명이나 끼워 넣으면서 예수님 족보의 원판은 14대로 이미 마련되어 있어요. 완료가 되었어요. 14대, 14대, 14대. 14대에서 완료된 것이 다윗 이후에 무너지고 다시 14대가 원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실 때 그 예수님이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자, 저주받은 자라는 그러한 평판을 받죠. 예수님이 저주받은 자라고 평판을 받는 이유는, 나중에 예수님에게 구원받을 자는 네가 뭘 알아서 그것이 너의 구원의 바탕이 되는 게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저주받음으로 인하여 너는 그냥 구원을 받은 거예요. 영생을 얻은 거예요.
그렇다면 내 안이라는 것의 의미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내 안이란 나의 가진 것 가지고 지금 자랑질 하려고 내 안을 만들어놨는데 주님은 어처구니없이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버리면 그동안 구축한 내 안은 아무 쓸모없는 것을 그동안 애써서 평생 동안 모아놓은 거예요. 자기 잘난 척하려고. 나 이렇게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았다는 그 자랑질 하기 위해서.
예수 안 믿는 게 죄에요. 예수 안 믿는 게 죄인데, 예수님 믿고 싶어도 예수님은 나를 공격하는 예수라서 내 안을 유지하는 한 믿을 수 없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내 믿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실망해야 돼요. 실망하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한테 실망하는 즐거움. 나는 뭘 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 되는 일이 없어. 박수 짝짝짝.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절단되고 단절되는 것,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되겠죠.
그다음에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에게서’가 네 명이죠.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모든 ~에게서에 끝이 어디 나오느냐? 16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럼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낳습니까, 요셉에게서 낳습니까? 이건 너무 쉬운데. 마리아에게서 낳죠. 요셉에게서 난 게 아니에요. 요셉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온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죠.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에요. 남자 없으면 일이 안 된다는 게 유대인의 의식이잖아요. 율법도 그렇게 되어 있고. 그런데 그걸 주께서는 피합니다.
‘마리아에게서’니까 마리아가 평소에 결혼도 안하면서 임신하고 싶어 환장한 여자에요? 이쯤 임신해야 될 건데. 조사해볼까, 줄 2개 나오는가? 이런 거 안 했죠. 그냥 성령이 와서 그냥 임신했어요. 그냥. 마리아가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오늘날 성도는 뭡니까?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성령이 임신해서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그냥.
그때부터 내 안은 없어졌고 어디 안? 예수 안이 된 거예요.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고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 영생이 있고 예수 안에 천국이 있고 예수 안에 모든 소망, 사랑이 다 있고 은사가 다 있고. 그래서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에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에요. 성도라고 해줘요, 라고 자꾸 떼쓰지 말고 너부터 예수 안에 있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으면 된다 하니까 자꾸 묻기를, “하나님은 어디 계신데요?” “왜? 따라잡을라고?” “예. 따라잡을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 잡아서 내 소유 만드는 거예요. 철야해서. 철야기도하면서. 하다하다 이제는 주님마저 소유하려고 달려드는 것. 덤벼드는 이 본성. 악마의 본성. 어쩔 거예요, 이 본성을.
‘예수 안’이란… 예수 안의 반대말이 있어요. 예수 바깥도 될 수 있지만 실(實)내용을 보면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나의 것이 없는 거예요. 나의 것이 없는 것. 나도 내 것이 아니니까요.
요한복음 15장 봅시다. 예수 안을 주님께서 설명하는데 분명히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너무나 못 알아듣기 때문에 정말 알기 쉽게 알기 쉽게 알아듣기 쉽게 하시려고 예를 든 게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해볼게요.
“너희들 포도나무 알지?” “예.” “나무에 둥치만 있어, 가지도 있어?” “가지도 있어요.” “그래? 만약인데 가지가 그 나무 몸체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열매 없어요. 죽어요.” “죽겠지. 그러면 그 가지가 포도나무 몸체하고 붙어있다면 끝에 뭐가 나오지?” “열매에요.” “열매가 어떻게 나오지? 가지를 막 흔들어서 나와?” “아니에요. 절로 맺히죠. 절로.”
절로 과실이 맺힙니다. 4절에 나와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절로 네가 나의 열매를 맺을 거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이야기에요. 주님께서는 최대한도로 쉽게 이야기했어요.
문제는 본인 자체가 둥치가 되어서 누구의 가지가 되길 싫어해요, 인간은. ‘내가 어디 쪼다야? 내가 네 시다바리인줄 아나?’ 이러고 있다고요. ‘멀쩡한 내 인생 놔두고 왜 누구 가지밖에 안 돼? 나는 내 인생 따로 해서 앞으로 자영업할 거야. 나 회사 취직 안 할 거야. 나는 내 사업할 거고 내 인생 내가 살 거고. 나는 내가 한 노력만큼 나의 영광을 위해서 성과를 얻을 거야.’
이게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해줘도 이 이야기 들은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도망갔어요. 아, 말을 친절하게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소용없어요. 그러면 주께서 또 어떻게 하시는가? 요한복음 16장. 왜 지금 요한복음을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를 사도 요한이 썼기 때문에, 그 안이라는 개념을 먼저 요한복음에서 친절하게 다 해줬기 때문에 그래요.
16장 7절, 예수님이 떠나갈 때 어디로 가는지 묻지는 않고 그들이 근심이 딱 드는 거예요. 이 대목을 한번 설명해봅시다. 주님 떠나시는데 왜 제자들이 근심을 합니까? 그 이유가 뭐냐? 그동안 주님을 자기 소유화시킨 거예요. 나는 괜찮은 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괜찮은 분.
안의 반대말은 어차피 만남이에요. 같이 들어오는 게 아니고 그냥 만났다가 헤어지는 거예요.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헤어지지 않을 때는 만남을 같이 안에 함께 있다고 생각해요. 만남을 만남으로 보지 않고 ‘함께’로 이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헤어지고 나니까 그냥 한때 만남이었던 것을 알게 돼요. 모든 대중가요 노래 가사가 전부 이겁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사람은 함께 있을 때는 마치 하나처럼 여깁니다. 왜냐하면 헤어지기 직전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게 주님의 안과 달라요. 주님 안은 헤어짐이 없기 때문에 그냥 둘이 되는 경우가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였으면 계속 하나로 가는 겁니다.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자기가 관리해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했어요. 아버지와 예수님의 한 뜻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요, 예수님의 뜻이고 그것은 한결같이 실현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5년 전에 교회 가서 한때 알았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해요. 그 사람은 예수님 만난 적도 없고 하나 된 적도 없고 그냥 지식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호기심을 냈을 뿐이고 그거 끝나고 난 뒤에는 시큰둥하니까 다시 도로 자기 쪽으로 1이 된 거예요. 자기를 떠나지 않았어요. 자기를 못 떠난 상태에서 예수님한테 관심 있으니까 후딱 언제든지 자기 쪽으로 돌아올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 좋아하다가 고난이 닥치니까 원망하잖아요.
16절 한번 봅시다.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한 거예요. 예수님과 자기가 만났는데 예수님이 떠나니까 이제 누가 남았어요? 본인들만 남았으니까 나 우째 사나, 이렇게 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살아. 잊지 말고.’ 이게 아니고 7절 봅시다. “내가 가게 되면 실은 너희에게 유익이다. 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내가 성령을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낼 테니 성령을 보내게 되면 나는 주님을 떠나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킬 것이라는 거예요. 그걸 알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성령 받은 사람은 비로소 상대를 내가 고른 게 아니고 상대가 나를 골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잘못 걸린 거예요. 소년 다윗처럼. 골리앗 전쟁은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우연히 주께서 그 전쟁에 소년 다윗이 끼어들게 한 거예요. 비겁하게 어른들은 뒤에서 다 빠지고 보잘 것 없는 자기 하나 딱 앞장세워서 어떤 흥밋거리로 삼은 거예요. 판돈 걸어, 판돈. 난 골리앗한테 건다. 이런 식으로. 그중에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다윗과 한 가정에 있는 형들도 동생의 그 철딱서니 없는 것에 대해서 나무랐습니다. 떽! 집에 가서 숙제나 해라. 어디 어른 하는데.
다윗은 어린아이 목소리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이 할례 받지 못한 것. 하나님의 돌을 받아라.” 할례 받지 못한 것.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서도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데. 무슨 뜻입니까? ‘우리한테는 약속 있어.’라는 뜻이에요. 우리나라는 약속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인데 너희들은 약속이 없으니까 너를 위해서 존재하잖아.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할 때 복음만 설교해야죠. 골리앗 같은 사람 좀 나가도록. 자기를 위해서 복음 이용하는 사람 좀 나가시도록. 어차피 하나 된 적 없어요. 자기에게 이익 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한 건데요.
그럼 8절을 봅시다. 그렇게 와서 성령이 하는 일은 뭐냐? 야, 무서운 일하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그다음에 뭡니까? “책망” 책망하는 일을 누가 하십니까? 보혜사가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킨 그걸 담보로 그걸 근거로 나는 너희를 구원하겠다는 뜻이에요.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은 적 없다는 걸 근거로 너를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지 않음으로 구원 받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은 적이 없는 걸로 구원받게 해주겠다. 나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함을 장착한 자로 구원해주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성경해석의 한계를 넘어선 거예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한도초과에요, 한도초과. 한도초과라는 이 단어는 아까 식사하다가 얻어걸렸어요.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 카드 긁는데 한도초과라고. 바로 저거다. 한도초과. 우리는 자꾸 한도 내에서 함으로써 내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 그 아저씨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우리가 내 구원을 생각 못하는데 구원된 거예요. 그때 성령이 함께 있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 예수 안, 주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다시 한번 봅시다. 2장 27절,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다.” 이제 이해되시죠? 내 안이 아니란 말이에요. 배우고 지키고 이게 아니라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모든 지시와 명령은 다 끊어지는 거죠.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당연하죠. 약속이니까. 내가 생각해서 내가 믿는 약속이 아니고 주님이 준비한 약속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게 되어 있고 그다음에 주 안에서 우리는 의가 나오는데 그 의를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인정하는 의. 그것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오죠.
포도나무에 박힌 가지에서 말릴 새도 없이 계속해서 열매가 맺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열매로 주님 자신의 결과물로 삼습니다. 그 관계가 바로 예수 안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에 대해서 예수 안에 대해서 주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함께 있음에 대해서 다시금 성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저주받아 마땅함을 통해서 예수님 증인의 자리에 있게 한 그것이 구원의 자리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