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거짓 선지자

아빠와 함께 2024. 9. 22. 21:15

거짓 선지자
 

2024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7:15-18

(27: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며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리라 하셨나이다

(27:16)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집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27:17) 너희는 그들을 듣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으로 황무지가 되게 하겠느냐

(27:18)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진대 그들이 여호와의 집에와 유다 왕의 집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가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거짓 선지자의 등장은 인간 세계에서 필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일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의 등장 바탕과 모든 인간의 바탕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 편에서 서서 사람들의 격려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활동을 합니다. 인간은 자체적으로 자아의 모순점을 알지 못합니다.

자아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매진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껍질은 결국 소실되고 맙니다. 껍질이 사라지니 그 채워진 욕망의 내용물들을 도로 끌어당길 시도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자아 자체가 텅빈 공백이요 그것을 채우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채우겠다는 욕망은 여전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바로 인간들의 보편적인 욕망 달성에 들어붙습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는 존재’가 되라고 힘을 보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의 유포를 통해서 그 어느 인간도 구원될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9-12)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을 유혹하십니다. 조금이라도 구원에 희망을 갖고 있는 자라면 모조리 거짓 선지자가 쳐놓은 걸리는 구조를 가동시키십니다. 곧 멸망받아야 하는 자들로 거짓 선지자와 한 통속이 되게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에서 못 빠져나오게 하십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우리 자신이 이미 거짓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를 뿌리 채 뽑고 보면, 그 드러난 바탕은 여느 일반인들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소개하는 거짓 선지자를 뽑힌 후의 상황은 그 약속의 땅에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원래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즉 하늘 쪽에서 그 어떤 조치가 없더라도 인간에게는 마땅한 조치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하늘 쪽에서 어떤 조치에 대해서 인간은 극렬하게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 바울도 이 점을 익히 압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3-5)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어 지혜의 말로서 사람을 설득시켜 소위 ‘구원’에 이르게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거짓 선지자는 믿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사도 바울의 다음 생각과 결국 충돌이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5-27)

아무리 하나님께서 각종 조치를 취해도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주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인간 세상을 질책하십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8-30) 인간들은 식물을 대하면 관상용과 약재용을 염두에 둡니다.

즉 인간 자신을 문제삼지는 않고 주변에 모든 자연물을 자신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재료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찮은 들풀과 하나님 자신과 관련짓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로 자신의 행위와 연결짓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께서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설사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3-14)

이 피조세계에서는 누구나 이름을 갖고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해서 타인과의 연결에서 나의 허락과 점검을 거쳐서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즉 나의 나됨을 계속 굳건하게 유지되는 겁니다. 이는 곧 자아를 부정하시는 주님으로서는 이 세상 모든 이로부터 배척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척은 곧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멸망 대상으로 확정나게 합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 3:22-23)

구원이란 이처럼 참된 선지자 되시는 예수님의 죽음을 바탕으로 할 때만 성립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되어져 버린 상황을 애써 부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1강-예레미야 27장 15~18절(거짓 선지자)2409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7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9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며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리라 하셨나이다,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집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너희는 그들을 듣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으로 황무지가 되게 하겠느냐,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찐대 그들이 여호와의 집에와 유다 왕의 집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가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이 내용에서 거짓 선지자가 나옵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불편해하고, 그런 인간들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타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은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인데, 거짓 선지자를 발생시키시고 유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 속에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거짓 선지자의 바탕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자신의 출생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뽑아낼 때, 뿌리인 무를 뿌리째 뽑아내 보자는 거죠. 뭔가 식물을 대할 때, 줄기만 뜯지 말고, 열매만 따 먹지 말고, 뿌리째 그것을 뽑아내 보면 뻥 하니 구멍이 뚫릴 것이고, 그 구멍 속에서 거짓 선지자는 거짓 예언만 할 수밖에 없는지 그 바탕이, 그 바닥이 나올 겁니다. 그 바닥이 현재 거짓 선지자 보고 불평을 하고 있는 우리의 바닥과 똑같은 바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고맙다. 거짓 선지자야’ 우리는 위선으로 살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가 하는 것에 대해서 가만히 들어보면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 같아요. 하는 말 자체가 서로 동일한 바탕을 이루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것이 뭔가 고객 만족과 같은 노림수가 있는데, 그 노림수가 우리 자신이 선망했고, 우리 자신이 차마 말로 못 했던 우리 욕망 달성에 그들이 뭔가 노골적으로 그것을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내칠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목사님이라고 간주하고 우리의 사정을 익히 알아서 우리를 위로 잘해주는 그런 목사님이라고 환영할 것이 뻔한 겁니다. 한국 교회가 교인 수가 유지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아요. 도대체 한국 교회가 뭘 전했길래 아직도 교회를 다니냐는 거죠.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데살로니가후서 때문에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유혹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혹하도록 조치하셔서 그들 가운데서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그들 속에 투입시키는 겁니다. 누가요? 하나님이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것은 9~10절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정말 고마우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구원을 받지 못하는 조치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도 성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교훈 받으세요’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구원받지 마세요’라는 말을 왜 교회가 하지 않느냐는 거죠. 십자가 지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기피 했다는 말이거든요. 지금 사도바울이 뭘 내세우느냐 하면 십자가를 내세웁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기피 했다는 증거이고, 그 증거를 사도바울이 앞장세웠다는 말은 “믿지 마세요. 여러분 못 믿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28:26)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성령이 임해서 설교하는 이유는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설교를 한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3~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내가 전하면서 벌벌 떨었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신나게 사람 꼬셔서 구원받게 하려고 떤 것이 아니고, 행여나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상대방에게 좋게 인식되어서 내 전도함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까, 그런 실수를 내가 할까, 그래서 무섭고 떨린다고 한 거예요. ‘사도님, 이제 이해됩니다.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논리가 그런 논리군요’라고 그런 소리 들을 때,

사도는 ‘주여, 제가 잘못하였나이다.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나이다. 제가 쓸데없이 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또 했습니까’라는 경우가 생길까 두렵고 떨리는 거예요. 구원은 선택된 자만 구원되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 안 되는 것도 ‘교만해서, 자만심 때문에’라는 그런 현상도 있지만 주께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안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복음 전파는 간단한 거예요.

제발, 제발 선택된 자만 좀 알고 믿어라. 선택된 자만. 그리고 이 전하는 말로 인해, 제발 선택되지 않은 현상도 더불어 같이 일어나기를 사도바울은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출현, 그들의 활동, 우리는 박수쳐야 합니다.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거짓 선지자를 뿌리째, 무째 뽑았다고 칩시다. 자, 그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

제가 구멍이라고 했지만, 오늘 본문에는 구멍이라고 하지 않고 황무지라고 했습니다. 이겁니다.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들춰내서 거짓 선지자를 추방하게 되면 애초부터 인간은 하늘에서 아무도 오지 않아도 그들은 할 말이 없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누구 구원하러 아무에게도 오지 않아도, 그게 딱 맞아요.

아무도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 게 합당해요. 그게 바로 황무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대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원래대로가 뭐냐. “성전이 있었느냐? 아니, 성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해. 없어야 해. 성전 기구가 있어? 아니, 없어야 해. 그거? 침략자가 다 가져갈 거야”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거. 아무것도 없을 때 과연 인간은 뭐가 드러나느냐.

아무것도 없을 때 인간은 어떤 마음이냐. ‘그래. 인간은 원래 아무것도 없었고, 이 땅에서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는 거야. 딱 인간은 그거야’라는 마음으로 확정 짓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뭐 출생하다 보니 장로 집안, 목사 집안, 기독교 집안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딱 맞는 것은 아예 기독교 냄새도 나지 않는, 그냥 불도가 심하다든지 아예 무교인 종교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그때 그들의 마음가짐과 행동과 태도, 그게 딱인 거예요. 본 모습에 딱인 거예요.

거기에 액세서리처럼 기독교 문화, 풍습, 이런 여러 가지 걸쳐놔 봐야, 주께서 말씀으로 다 뜯어갑니다. 다 뜯어내 가면 역시 인간은 뭐?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죠. 그렇게 보시고 마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무도 안 왔어요. 구원이라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냥 살다가 죽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는 데서 백합이 피어나고 들풀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 28~29절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우리는 생각 안 합니다. 왜 생각을 못 하느냐 하면 이유가 있어요. 인간에게 식물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관상용이고 하나는 약효 때문에 식물을 바라봅니다. 인간이 이미 자기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저 식물에서 류마티스관절염에 특효약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것을 뽑아내는 것과 ‘참, 이쁘네. 꺾어다가 꽃병에 꽂아 놓고 볼까?’라는 관상용, 이 두 가지예요.

뭘 못 보느냐 하면 백합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는 눈이 인간에게는 가려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거짓 선지자만 있는 게 정상이에요. 왜냐 하면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만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들풀을 봅시다. 들풀을 누가 주목합니까? 그냥 피었다가 지는 것이 들풀이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을 보고 불쌍하다고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궁이에 왜 집어넣는가. 그것은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서 들풀을 잘라서 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라는 거예요. 보면 뭐가 보입니까? 그리고 앞에 나오는, “공중의 참새를 보라”(26절) 공중의 새를 왜 봅니까. 지가 알아서 잘 날아다니겠죠. 머리에 똥만 안 싸면 돼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를 끄집어낼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게 없어요. 그러니까 십자가 없으면 천국 못 가고, 인간이 세상을 보면서 십자가는 끄집어낼 재주가 없고. 그러니까 인간이 구원 못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 들풀, 백합, 그다음에 새 이야기했는데, 제가 곁들여서 원숭이 이야기하나 추가 해드릴게요.

원숭이 2마리를 철장 안에 놓고 실험하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돌을 줘요. 돌을 주니까 원숭이가 돌을 받아요. 원래 주는 것은 다 받잖아요. 그렇게 주고 다시 돌을 달라고 해요. 그렇게 사람이 원숭이에게 돌을 달라고 하니까 돌을 다시 줍니다. 주니까 돌을 받은 사람이 오이를 줘요. 원숭이는 기분 좋아서 맛있게 먹는 거예요.

또 실험하려고 사람이 원숭이에게 돌을 줘요. 얼른 받습니다. 방금 줘놓고 다시 돌라고 하니까 원숭이가 돌려줍니다. 돌려주니까 그 사람이 원숭이에게 오이를 또 줘요. 그 원숭이는 아주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원숭이에게 똑같이 돌을 줘요. 그리고 사람이 두 번째 원숭이에게 달라고 하니까 다시 줘요.

그다음에 뭘 주느냐면 포도를 줘요. 포도를 먹고 좋다고 끽끽거리죠. 그렇게 처음 원숭이와 똑같이 반복했습니다. 옆에서 오이 먹던 원숭이가 가만히 보니까 옆에 있던 원숭이는 포도를 먹고 있거든요. 원숭이는 오이보다 포도를 10배나 좋아해요. 그걸 딱 보고 난 뒤에 사람이 다시 첫 번째 원숭이에게 돌을 주고 다시 돌려달라고 하니까 돌을 안 줘요. 삐졌어요.

오이 말고 옆에 원숭이가 먹은 포도를 달라는 말이에요. 그게 동영상에 다 나와 있거든요. 그래도 혹시 해서 돌을 돌려주니까 사람이 오이를 줘요. 원숭이 진짜 삐져서 오이를 던져버렸어요. ‘원숭이를 보라. 그게 너의 모습이다’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거짓 선지자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거예요. 같은 우리의 뿌리를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가 요청했고 우리가 요구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합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지금껏 모든 선지자는 가짜였다. 그리고 22절에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여기서 나 같은 선지자는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세를 보고 하는 말이에요. 신명기 18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모세에게 주면서, 모세 같은 자를 세워줄 거라고 한 거죠. 그러면 모세에게 뭘 줬느냐 하면, 돌을 준 것이 아니고, 율법을 줬잖아요. 모세가 율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율법을 도로 빠꾸(backward)시킨 거예요. 모세를 빠꾸시켰어요. 율법을 빠꾸시키고 율법을 거부하고, 바알 종교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거짓 사도를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분명히 율법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율법을 거절하고 율법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선지자, 아세라 바알 선지자 850명, 엘리야 시대 때 그랬어요. 그때 죽은 사람이 바알 선지자는 다 죽었고 아세라 선지자들은 남아있었어요. 450명은 죽고 400명 남아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같은 사람인데 우리의 본성을, 이스라엘 전체가 거짓 선지자 역할을 톡톡히 해서, 이스라엘 욕할 거 없이, 이스라엘 본성이나, 우리 본성이나, 동일한 아담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지금 우리도 똑같다는 거예요. 그걸 베드로가 설교하기를, 이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주께서 세우셨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 3장 23절에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그러니까 모세같이 올 딱 한 명의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라고 합니다. 참, 베드로가 설교를 과격하게 하죠.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부정을 두 번이나 했어요. ‘다른 이름’이라고 부정하고 ‘주신 일이 없다’라는 부정을 또 했어요.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지자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 포진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게 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들어야 하느냐면 훌륭한 목사님 이야기 듣지 말고 누구 이야기 들어야 하느냐면 먼저 거짓 선지자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그러면 거짓 선지자를 찾아서 가야 하느냐. 찾을 거 없어요. 찾을 거 없어요. 내 이야기 듣는 것이 거짓 선지자 이야기예요. 내 이야기. 내 욕망 이야기. 남에게 지지 않고 남에게 기죽지 않는 내 이야기. 한평생 살고서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을 얻고자 하는 내 이야기 있잖아요. 그 자기 이야기가 거짓 선지자 이야기예요. ‘주님 뭐 하십니까? 성의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맨날 기도하면서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나 참된 선지자 된 주님은 말합니다. “뭣이 중한디?” 곡성 영화의 대사입니다. “뭣이 중한디?” 너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약간 어렵지만 오늘 이 이야기하고 빨리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지 않았다”라고 하셨거든요. 이게 참 어려워요. 상당히 어려운데, 내 이름을 도용해서,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 이름을 도용했다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해요.

출애굽기 3장에 보면 간단 간단히 넘어갑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름이 뭔지를 물었어요, 이름을 갖고 있으면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이실 때, 이 땅에 그냥 오지 못하고 이름을 가지고 와야 해요. 이름을 갖고 온다는 말은 인간에게 이름을 부를 대상체가 된 채, 온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이 그 이름을 가진 하나님을 부르면서 판단을 누구 쪽에 맡기느냐 하면, 인간 쪽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왜? 모든 인간은 만날 때, ‘이름이 뭡니까?’라고 묻잖아요. 전부 다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 자리에 스톱(stop), 다가오지 말고 스톱, 내가 당신을 파악해서 나에게 한 발짝 더 들어오라고 할 경우만 들어오세요’라는 이게 바로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관계입니다. 왜냐 하면 나는 내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쪽 이름이 내 이름을 훼손하면 안 되니까, 흠집 내면 안 되니까, 나는 내 이름을 지켜야 하니까.

그런데 거기에 누가 끼어드는가. 하나님이 끼어들었어요. 그러면 내 이름이 있고 너의 이름이 있는 관계를 나와 타인 관계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나는 타인 관계예요. 타인 관계라는 것은 내가 다가서서 점검해 보고 필요하면 그 이름을 불러서 내 사람 만들겠다는 작업을 내가 계속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의 이름은 인간에게 배척받습니다. 배척받는 이름이에요. 그 이름이 환영받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내 이름을 다치게 하면 인간은 참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약성경에 모든 말씀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으되, 너희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나를 차버렸다.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나를 배척했다”라는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와서 강제로 그 인간을 덮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내막에 대해서 알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멸망합니다. 그러면 그 외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혹당해서 거짓 선지자와 같이 얼씨구나 놀아나는 자들이에요. 따라서 교회 와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이건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친히 선택할 자격자가 저를 선택해서 저로 하여금 내가 내 바탕이 죄인이라는 거, 내가 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까발려 주시는 그 기쁨과 고마움을 주셨으니, 어찌 우리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때부터 성도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거짓 선지자이면서,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모순되고, 잘못된 것이고, 황당한 것인지, 십자가를 다시 한번 마주하면서, ‘주여, 죄인 여기 있습니다’라고 할 때, “네가 바로 의인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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