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참 선지자

아빠와 함께 2024. 9. 15. 20:16

참 선지자

2024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7:8-11

(28:8)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28: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28: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28:11)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 거짓 선지자를 판명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일러주시면 우리들은 그것을 참고해서 거짓선지자를 가려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가려낼 수 있을까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예수님의 이 규정을 의할 것같으면 참된 선지자는 ‘노략질 하는 옷을 입고 속에는 양이 들어 있는 경우’를 말할까요? 아닙니다. 참된 선지자나 거짓된 선지자를 우리 힘으로 가려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절단면’이 있음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이 ‘기름부음’을 주어지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이 주어진다는 것은 기름부음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절단면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할 일은 하늘과 땅 사이의 절단면을 소개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인간의 한계입니다’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해당되는 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욥입니다. 욥에 있어 욥 편에 선 사람은 욥 본인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네 번째 친구마저 욥을 위로하지 않고 욥을 질책합니다. 그러니까 욥은 본인의 존재 자체가 하늘과 땅 사이의 절단면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끝 대목에서 그런 욥이 기도하므로서 비로소 욥의 친구들이 죄 사함을 받는 경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는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나 참된 선지자 모두가 다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차이납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을 상대로 합니다.

자신있게 외치고 말하면서 뭔가 사람들 있어 보이게 합니다. 때로 분노하고 화내고 나무라면서 남들보다 더 월등한 지식을 가져서 타인을 대하고 함부로 대하고 가르칠만한 능력자라도 되는 양 자신의 권위 관리를 합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권세이 대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4-5)

즉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서 분노 하지만 정작 본인이 하나님을 대할 때는 그야말로 ‘경악’입니다. 더는 자신의 위상과 가치를 그 어떤 근거가 없음을 압니다. 곧 절단면을 압니다. 내쪽에서 하나님쪽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더나아가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망적인 것을 마찬가지라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된 겁니다.

이때 선지자에게 제단에 있는 숯불이 날아와서 이사야 선지자 신체(=입술)에 달라붙습니다. 이렇게 되면 선지자의 신체는 변형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절단면을 장착한 신체가 됩니다. 즉 자체적으로 인간의 한계성을 지니는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이사야는 말씀 자체가 주는 실현성에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즉 ‘분노→경악→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 현실에 대한 정면으로 마주하는 겁니다. 퀸이라는 영국 가수가 부른 [보헤미안 렙소디]이라는 노래 있습니다. 초반의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그의 머리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어요 그는 죽었어요
엄마, 삶이 이제야 시작되었는데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내 던져 버렸어요

엄마, 살아가세요 살아가세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너무 늦었어 내 차례가 와 버렸는걸
등골이 오싹해
몸이 계속 아파와

안녕히 모두들
난 가야만 해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진실과 마주해야 해

엄마 죽고 싶지 않아요
가끔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래요”

이 가사에는 “모든 것을 뒤로 하여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참된 선지자는 이처럼 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벌리시는 모든 진실은 절단면을 어떻게 죄인이 통과해서 천국이 이르게 되었느냐와 관련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보면 이러합니다.

역대상 21:1에, “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악마가 다윗과 이스라엘을 격동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분노와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즉 그동안 ‘나’라는 것을 구성해왔던 대단한 것들을 그들은 계수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계수했던 숫자에서 7만 명을 사흘만이 제거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숫자들입니다. 남은 숫자들은 앞서 죽은 7만 명 희생으로 사죄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망대가 무너져 18명 죽었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그들만 죄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눅 13:4)

나머지 사람들도 똑같은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다윗이 제사장으로 나서게 됩니다. 즉 악마에 의해서 충동받은 바로 그 당사자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의 절단면의 존재를 소개해줍니다. 다윗의 자손이 바로 이 절단면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다윗의 자손’의 혜택을 입은 자들은 어떤 고백을 하게 될까요?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또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바로 이런 자가 오늘날 참 선지자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절단면을 지닌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0강-예레미야 27장 8~11절(참 선지자)2409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7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너희 복술이나 너희 꿈꾸는 자나 너희 술사나 너희 요술객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서 너희로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나로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하게 하느니라, 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지를 주시는데요, “망할래, 고생할래?”라는 이건 선택지가 아니죠. 왜냐 하면 망해도 망한 것이고, 고생해도 망한 것이고, 다른 여지의 선택지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실패하는 쪽, 망하는 쪽으로만 선택하고, 다른 외의 선택을 주지 않는가. 그건 절단면을 찾지 아니하면 하늘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스스로 절단면이 있음을 신약에서 알려줬어요. 아무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14:6) 그러면 여기 이 문장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아무도 아버지에게로 갈 수가 없습니다. 끝! 끊어졌습니다. 절단되어 있습니다.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타난 것은 바로 내가 절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 그리고 동시에 그 절단면을 찾아가는 자에게만 비로소 천국 가는 길에, 그 노선에 접어든 하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절단면은 무엇인가. 우리를 지켜줄 줄로 믿었던 그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겁니다. 제자들에게서 사라지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거짓 선지자를 골라내라. 거짓 선지자를 알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거짓 선지자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제 바짝 긴장되죠.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기회가 왔다. 그래, 이제는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알아내야지. 이렇게 마음 단단히 먹고 있는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런 식으로 거짓 선지자 아닌지를 분간한다면 이것은 우리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 진짜 선지자는 어떻게 되는가. 이 말씀을 그대로 해보겠습니다. 양의 옷을 입었는데, 속은 노략질 하는 이리이다. 그러면 참된 선지자는 노략질하는 옷을 입고 속은 양이 들어있다는 거죠. 기껏 인간들이 생각하는 한계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에 대해서 이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예요. 절단면에 대해서 인간은 파악할 길이 없는데,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 가지고 말장난하고 싶은 생각이 확 드는 겁니다.

그 말장난 하는 이유가, 그런 노략질 하는 선지자가 참된 선지자냐. 이런 말장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서, 알아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내가 되고 싶은 그러한 본심을 우리가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절단되었으면, 예수님의 절단이 우리에게 밀려오면, 내가 나에게도 절단되어야 해요. 끊어져야 해요.

내가 파악하는 모든 것들은, 이것은 지옥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구별하느냐. 답답하다. 어떻게 하는지 그걸 이야기해 줘야지’라고 한다면 간단합니다. 참된 선지자가 어떤 길로 갔느냐를 보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참된 선지자도 보내줬어요. 그러니까 참된 선지자와 거짓된 선지자의 말발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그들의 말하는 것은 차이가 나지 않아요. 어디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가지고 ‘아, 저 사람은 거짓되다. 참되다’라고 구분은 못 합니다. 그러면 말을 빼야죠. 말을 뺄 때 참된 선지자의 모습은 뭐냐. 그리고 거짓된 선지자의 모습은 뭐냐. 첫째는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현 상황에 대해서 분노한다는 거. 참된 선지자도 거짓 선지자도 화를 내고 있어요.

내가 그러지 말자고 했지? 그건 신앙이 아니라고 내가 했잖아. 이건 참된 말도 거짓말도 전부 다 책망하면서 다가옵니다. 그러면 책망받은 사람은 ‘아, 저 사람은 뭔가 아는가 보다. 나는 저 사람에게 매달릴 거야. 난 저 사람 말만 들을래’라고 하면서 인간은 뭔가 알기에 자신만만하게 책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그런데 참된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 안 해요.

이게 결정적입니다. 좀 받아 적으세요. 참된 선지자는 사람과 상대 안 해요. 지금 자기 자신의 팔자도 감당이 안 돼요. 거짓 선지자는 사람을 구슬리면 돼요. 협박했다가, 공갈했다가, ‘내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라고 이건 언제든지 사람들을 쥐락펴락 갖고 놀 수가 있는 겁니다. 속으로는 이거예요. ‘나는 당신 없으면 굶어 죽어’라는 이게 거짓 선지자예요. 당신 없으면 나 굶어 죽어.

‘그러니까 나에게 가스라이팅(Gas lighting) 당하든지 그루밍(Grooming) 당하든지 좀 놀아나. 제발 내 말에 좀 놀아나. 돈이나 좀 가져오고’라는 이런 방식은 모든 선지자에게 감춰져 있기 때문에 이건 몰라요. 어떤 때는 잘해줬다가, 어떤 때는 고함쳤다가, 쥐었다가 폈다가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참된 선지자의 특징은 남 탓을 하지 않아요. 대표적인 사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욥’입니다.

욥은 자기편이 아무도 없어요. 외로움의 극치죠. 그리고 자기 인생도 다 날아갔어요.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 끼리예요. 계(契) 모임하고 신났어요. 신났어. 욥이라는 인간 짓밟는데 한마음이 되었죠.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누구 뒷담화하는 거 아주 신나죠. 요새는 뒷담화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서 앞담화까지 합니다. 앞에서 대 놓고 욕을 하죠.

어쨌든 인간의 모든 대화 내용은 뒷담화입니다. 타인을 상대하고 남을 상대하는 내용이 온종일 전화통 붙들고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고 대화입니다. 그런데 참된 선지자는 남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그게 바로 욥이고 또 하나가 이사야입니다. 경악스러워요. 세상에 하나님이 그렇게 곱게 나의 본색을 감추고 다녔는데, 성전에 갔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순간 이스라엘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게 경악입니다. 경악. 사람이 뭐라 하고 하는 거,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지적했다는 거. 그걸로 충분해요. 다른 지적 필요 없습니다. “너는 죽어야 해. 너는 망하는 백성과 함께 망해야 해” 주께서 그걸 거룩하게 알려주시고, “따라 해봐. 자, 따라 해봐”라고 하니까 이사야가 따라 하잖아요. ‘주여, 저는 망하는 백성과 함께 망해야 합니다’

그때, ‘슝~~~’하고 뭔가 날아와요. 자기는 이제 끝났어요. 나는 망해야 한다. 이건 거룩한 나라에서 볼 때, 추잡하고 더러워서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한다. 끝났어. 끝!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날아왔어요. 제단에서 나온 숯불 하나가 날아오는데, 이건 숯불 갈비집도 아니고 ‘불판 들어갑니다’라는 식으로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을 지져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에게는 죄가 있었는데, 그 죄는 네가 못 다루는데, 네가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제단의 숯불과의 만남에서 너는 입술이 불탄 이사야, 불탄 존재로 너는 변형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평소에 살면서 자기 입술이 불탔다는 거, 제단의 불꽃이 자기 신체의 일부로 융합 되어있다는 사실, 같이 결합 되어있다는 사실을 이사야가 평생 살면서 그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죽은 거죠. 그냥 죽었는데, 제단의 취지가 살아있으니까, 꾸역꾸역 지금 이사야는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참된 선지자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이유도 없이 그냥 고난받아요. 그래서 욥이 고난받으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뭉그적거리면서 안나타나요. 하나님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욥은 위로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친구마저 욥을 위로하지 않고 질책합니다.

질책하니까 욥은 속에 있는 분노가 분노대로 다 일어나죠. ‘잘못한 것이 있어야 뭘 해결하지. 뭐? 내가 뭐 어때서?’라고 그러고 난 뒤에 마지막에 결국 욥은 나는 내 편이고 나는 나로 더불어 산다는 것을 확정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은 결국 재를 뒤집어쓰죠. 이사야와 욥은 공통점은,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메시아적 기능, 기름 부음의 기능이 인간에게 임할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분노 – 경악 – 기쁨’

항상 출발은 분노예요. 자기 인생에 대한 분노, 하나님 만나서 경악, 범사에 기쁨과 감사, 이게 참된 선지자의 공통점입니다. 그게 기름 부음이에요. 그러면 그 기름 부음의 예를 하나 더 들게 되면 다윗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이게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라 조심스럽게 읽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악마가 일어나서 다윗을 격동했다고 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기름 부은 자, 참된 선지자 노릇을 하도록, 전에는 선지자에게 그냥 당했죠. 나단 선지자에게 그냥 질책받았습니다. 그래서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그 정도로 끝났어요. 그런데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윗으로 하여금 선지자 만드는 작업에 사탄이 반드시 개입합니다.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죠. 사탄이 고맙다고. 왜 고마운가. 사탄으로 하여금 우리 본 자리, 나의 처음 자리를 자꾸 일깨워 줘요. 사람은 처음 자리에 가지 아니하면 나라는 자아가 계속 유지가 된다고요. 그러나 처음 자리를 갔다가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고 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 자리는 무슨 자리이냐. 악마와 결합 된 자리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해요. 이스라엘과 다윗을 격동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숫자를 개수한 거예요. 계속 숫자를 센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전체에 이중성이 있는데, 하나는 뭐냐. 이스라엘 전체는 뱀의 후손들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전체가. 그 뱀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으로 바꾸는 작업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단절면, 그 절단면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출발을 뱀의 후손부터 출발해서 여자의 후손 노선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주께서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절단된 면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 주기 위해서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시편 84편 10절의 말씀.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게 결론이에요. 논리가 어렵게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던지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게 결론이에요. 문지기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냥 문지기예요. 문 지키는 사람.

그것만 해도 이런 호강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었다가 문지기인 것만도 좋은 게 되려면 그 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그 변화는 사탄이 와서 우리 원래 자리로, 우리 원래 자리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해요. 원래 자리가 뭐냐. 바로 숫자 계산하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죠.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히지 않고 ‘우리는 성공한다.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라고 하는 거, 우리 자신은 대단하다는 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악마의 일에 충성해서 봉사하는 것은 뭐냐. 사람의 숫자니까, 내 사람, 내 소유물, 나 알아주는 사람을 많이 끌어모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미련과 애착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악마로 하여금 그들에게 찾아가서 다윗과 이스라엘이 격동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리게 했습니다. 했는데, 그 숫자를 다 헤아리고 난 뒤에 그 숫자가 쭉 나와 있어요. 쭉 있는데 그 아까운 숫자를 주님께서는 징벌을 통해서 죽여버립니다. 몇 명 죽였는가. 7만 명을 그냥 없애버립니다.

이럴 때 중요해요. 그러면 다윗이 이스라엘 왕입니다. 기름 부은 자예요. 그리고 앞으로 선지자가 될 사람이에요. 몸 자체가 예언할 사람이에요. 신체 자체가 예언 용도로 적용될 사람이에요. 여기서 다윗이 뭘 하는가.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제사를 드려요. 누구를 살리는 제사장이냐 하면 7만 명 없어지고 남아있는 백성을 대신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현재 남아있는 백성은, 이건 숫자는 있지만 그 숫자는 계속해서 사탄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격동케 할 수 있는 그런 자료로써 남아있는 숫자예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희망을 갖고 미련을 갖게 만드는 숫자가 7만 명 죽고 남아있는 백성들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7만 명 죽었으니까 나머지는 괜찮지가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7만 명 죽고 난 뒤에, 망대 무너져 18명 죽고 난 뒤에, 나머지 제자들을 주께서 살리듯이, 7만 명 죽이고, 그건 본 때로 죽이고 나머지도 죽은 7만 명과 똑같은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해요. 그게 뭐냐. 절단면이죠. 제사라는 절단면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제는 어떻게 통과하는가. 다윗이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오르난 타작마당에, 이스라엘 내부에, 네가 드리는 그 모리아(산) 자리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반복해서 드릴 제사의 장소로 정해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윗이 행했던 것을 똑같이 행할 다윗의 후손이 나오는데, 그 다윗의 후손이 뱀의 후손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절단면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후손이 등장한다는 것을, 그 선지자 기능에다가 다윗을 집어넣은 겁니다.

난해하죠. 어렵지만 여러분이 들으면 여러분 정도는 무슨 뜻인지 다 압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상대하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사람을 상대해 온 거예요. 그러면 거짓 선지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 거짓 선지자예요. 다윗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 다윗이 참된 선지자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7만 명을 죽이고, 자기 위치와 자기 한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상태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일을, 사단을 통해서 벌이시는 겁니다.

하나님 못 만났다고요? 그러면 사단을 만나면 돼요. 이것 만나나 저것 만나나 똑같은 이야기예요. 주님이 단선이잖아요. 사탄을 만나서 내가 어디에 집착해 있는지, 도대체 어디에 애착 되어있는지,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뭘로 구성되어 있는지, 나는 이걸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거, 그거 자체가 주께서 일하시는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성질이 급해서 자기 자존심 챙긴다고 사람을 죽였던 모양이에요. 사람을 죽이고 그걸 가사로 만들었는데, 읽어볼게요.

엄마,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고, 그는 이제 죽었어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딱 들으면 ‘아~이 노래~’라고 생각나시죠. 계속 더 볼게요. 퀸이라는 영국 가수가 부른 '보헤미안 렙소디'라는 노래입니다. 계속 볼게요.

엄마, 내 삶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난 내 삶을 내팽개쳐 버린 거예요

엄마, 당신을 울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가 이번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앞으로도 엄마나 잘 사세요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요

이젠 너무 늦었어요

때가 되니,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끼쳐오고

몸이 계속 아파요

모두들 안녕 이제 가야 해요

모두를 뒤로 하고 진실을 마주해야 해요

엄마, 전 죽고 싶지 않아요

때론 차라리 제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기도 해요

-Bohemian Rhapsody(제목) – Queen(가수)

진실, 참된 선지자, 예수님의 십자가, 그 외에 무슨 진실이 있습니까. 우리는 악마와 노닥거리면서 악마가 ‘너 잘 되고 있는 거야. 이게 너야. 이만큼 잘 끌어모은 거야’ 그런 우리가 절단면 안에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귀를 보내서 분노를 유발합니다. 분노하면서 경악하며 십자가를 마주 보게 하고 가끔은 거기서 기쁨을 누리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곧 이 땅에 선지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하늘에 먼저 간 장로들이 우리에게 물어요. “너 누구냐?”라고 묻죠. 요한계시록 7장에 13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하니 그 뒤에 14절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말하는 이런 선지자가 오늘날 성도이고, 성도만큼 참된 선지자는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사는 게 진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였습니다. 거짓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서서 볼 때, 주께 활용당하고 주님을 증거 하는 그 성도가 참된 선지자요, 진실을 아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사오니, 항상 경악 가운데서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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