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우리로
2024년 9월 4일 본문 말씀: 말라기 3:8-9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8. "Will a man rob God? Yet you are robbing Me! But you say, 'How have we robbed Thee?' In tithes and offerings.
9. "You are cursed with a curse, for you are robbing Me, the whole nation [of you]!
애초부터 인간의 도둑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과 인간은 우리로 살았고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도 ‘너’ ‘나’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을 부추겨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는 순간,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도 다들 독자적인 자아로 무장된 채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도적질에서 살인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이 도적질한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사이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마감하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전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단정짓습니다.
일종의 욕설입니다. 왜냐하면 욕설이란 개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대의 본질을 지적하고 규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즉 ‘결과가 이미 나왔다’는 겁니다. 무슨 결과 말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하더라도 도둑이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논리상 이런 겁니다. “누가 내 것을 도적질했어?”라고 묻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도적질 안했습니다”로 인간들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왜 너희들은 너희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왜 하지 않느냐?”고 따지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니까 너는 너희들이 안 하고 싶은 것을 놓쳤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묻지요. “하나님 그제 뭡니까?” 하나님의 답은 이러합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잔소리하는 분의 말을 더는 굳이 찾아서 들을 필요없다” 이것이 인간의 독자적인 본성입니다. 그동안 이러한 독자성을 숨긴 채 계속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노력을 해왔던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라는 관계가 깨어져버린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일상의 삶을 살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도둑’이라는 겁니다.
이런 도둑의 본성에 발휘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를 해버리는 일’입니다. 즉 ‘십일조를 하는 것이 곧 도적질’로 이어지는 행동을 보이는 겁니다. 아무리 도적질을 한다 할지라도 ‘나’의 관계에서 ‘우리의 관계’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다음과 같이 자기 행위를 자랑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말라기 내용을 익히 아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십일조를 정성스럽게 드리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다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칭찬받은 세리는 율법적으로 전혀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을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레위 언약에 준한 제사법은 그 원형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우리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관계는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우리’ 관계를 성립시키게 됩니다. 골로새서 2: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법의 취지에 준한 ‘우리 관계’는 십일조 드리는 쪽이 죄인이 되는 신분으로 가담되게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는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드린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는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취지가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성취된 겁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린 분이 분명 예수님 한 분이시지만 실은 거기에 죄인을 함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나’ 중심의 독자성에서 벗어나 오로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성취에서 진행된 하나님의 레위언약 성취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 ‘나’는 제거되어야 될 ‘나’이고 영원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그 위에서 죽고 살아난 ‘나’입니다. 이것이 ‘우리 관계’의 성립입니다.
기존의 인간 독자성 시선에서 보면, 인간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유유히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탁류에 몸을 담근 채 떠내려가고 있는 중심입니다. 이는 인간이 ‘독자성’을 토대로 하기에 자신의 자아성을 자기에게 빼낼 수가 없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영원’과 접촉되지 아니하면 구원으로부터 탈락하는 겁니다.
그 영원성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13:9-10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드론처럼 단체로 꼼짝 못하게 지옥으로 떠내려가고 그 중에서는 공중에 드론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사랑이라는 영원성과 접촉하지 못할까요?
이문세라는 가수가 부른 [사랑이 지나가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좋아합니다. 따라서 인간 상태에서 뭘 해도 ‘우리 관계’를 훼손하는 도적질이 됩니다. 요한복음 16:4에 보면,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이 오시면 벌써 다 이루어진 ‘우리’관계가 사랑으로 주입되어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육신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적이 주어지는 그 자체가 이제는 영원한 사랑임을 아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의 확정된 결과임을 라고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위의 죄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십일조의 완성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말라기 3장 8-9절(나에게서 우리로)24090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말라기 3장 8-9절입니다.
말라기 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오늘 말씀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욕설을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 잘 해라.” 할 것 같으면 어떤 희망 같은 걸 주는데 하나님께서 아예 도적질 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결과가 나왔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 너희들에게 어떤 기대도 걸지 않는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모르지만 나는 너희를 아는데 너희는 도적질 했어.” 그리고 이미 내가 그것을 너에게 통보하는 겁니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했다.”고. “앞으로 잘 해라.” 이게 아니고 “너희들은 도적질 한 거야. 너희는 도둑이야.” 하고 단정 짓는 겁니다. 너희가 어떻게 하든 네가 도둑이라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사람 쪽에서 굉장히 당황하거나 “그러면 어떻게, 대책이 뭡니까?” 하고 쫄거나 주눅 들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잔소리를 듣기 싫어해요. 인간의 잔소리도 듣기 싫은데 하나님의 잔소리를 굳이 찾아서 들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의 대처는 이겁니다. ‘그러면, 성경 자체를, 도적질 했든 뭐든 아예 이 성경을 덮으면 그만이지 뭐.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살면 그만이지. 우리보고 뭐 욕 하세요. 우리는 아예 안 들을 테니까.’ 이게 인간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할 본심 자체가 인간 속에 없어요. ‘어찌할까?’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누가 아느냐?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아예 욕설 수준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 도둑질 했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그것까지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을 도둑으로 모는 이유는 이거에요. “너희들 내가 싫잖아. 그런데 하나님 말씀 지키려고 그렇게 유난 떨지 마. 나 너희들 다 알아.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면 됩니까, 그렇게 입에 발린 소리 좀 하지 마. 아예 너는 내가 싫은 거야. 그걸 내 입에서 먼저 이야기 할게. 너 도둑놈이야”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 거예요. 그게 말라기입니다.
말라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끝이에요. 선지서의 끝입니다. 그 다음에 신약에 넘어가요. 어떤 기대나 희망 같은 건 아예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8절에 보면 이렇게 해요. 선지자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습니까?”라고 인간들이 대꾸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렇게 대꾸할 때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 도적질을 해 놓고도 도적질 한 것도 모르고 “어떻게 우리가 도적질을 했습니까? 억울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는데요?” 그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야, 우리 제대로 하자.’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들은 들킨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분명하게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누구야? 내 것을 훔친 게 누구야?” 하면 인간은 “나 아임미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범죄도시 장이수가 이야기 한 거죠. 이 말은 뭐냐면 “또 못 살게 구네~!” 이런거에요. 성경 말씀은 우리끼리 잘 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특히 그 말라기에서. 하나님 쪽에서 단정을 내린 거예요. “너희들은 나를 싫어한다. 너는 그걸 감추려고 해도 소용없어. 내가 너희들 마음 미리 다 간파했어. 너희들 나 싫지? 그래서 내가 먼저 너희에게 선방 날릴게. 너희는 도둑놈이야.”
이것을 약간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왜 너는 하지 못하는 것을 안 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네가 하지 못하는 것을 왜 안 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도적질 했습니까?” 이렇게 나왔죠. 그걸 풀이하면 ‘저희들은 안 해야 될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해야 될 일만 하고 안 해야 될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가 언제 도적질 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선 ‘그러니까 네가 하지 못할 일을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하지 못할 일을 놓치고 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못할 일이 뭡니까?” 이렇게 하겠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도둑으로 몰리는 일을 못하고 있다.”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신다면 무엇도 이해해야 되느냐? 십일조 하는 것이 도적질이라는 사실까지 나가야 돼요, 십일조 하는 것이.
오늘 말라기 3장 보면 “네가 내 것을 도적질 했다.” “제가 언제 도적질 했습니까?” 9절에 “너희가 십일조와 헌물을 하지 않음으로 도적질을 했다.” 순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 인간이 하지 못한 일을 놓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빼먹으면 어떤 생각을 하냐면 ‘하면 되지 뭐. 십일조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십일조 안 했다고 도적질 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문제 해결 간단하네요? 십일조 하면 되잖아요.’ “그게 도둑놈이라니까!” 십일조 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거예요.
누가복음 18장 12절 예수님한테 그 본색을 들킨 바리새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단 말이죠. 왜? 말라기를 아니까요. 말라기 이 본문을 아니까. 십일조 안 해서 도적질을 하는 거라면 문제는 간단해요. 십일조를 드리면 되는 거예요.
내가 도둑놈이라는 최종 결과, 주님의 선언에 대해서 그것을 십일조라는 돈으로 때워서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걸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으로 규정짓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18장에서 주님한테 칭찬받은 세리는 어떻게 했는가? 십일조 했습니까? 한 푼도 안 했어요. 십일조 안 했는데 의인 소리 들었어요. “너는 도둑이 아니야.”
이러한 역전, 이런 반전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게 아니고 ‘우리’의 것을 도둑질 했어요. ‘우리’의 것. 말라기는 레위지파, 레위언약이거든요. 레위언약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들은 어린 양 제물이 되어 죽어야 되고요, 아버지는 그 어린 양을 받음으로서 모든 언약 창조를 다 완성 하는 계약이 레위 제사 언약이에요. 아버지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쳐야 되고 이삭은 죽어줘야 돼요. 아버지와 이삭 사이가 개인이 성립되지 않고 ‘우리’가 성립되는 거예요,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우리’가 성립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같이 합해서 나, 너가 아니라 ‘우리’가 돼요. 우리 속에서는 나, 너가 없어지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의 것을 도둑질 하려면 방법이 딱 하나입니다. 내 것을 따로 떼서 ‘나’가 되면 돼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도둑놈으로 보는 이유가 창세기 3장 6절입니다. 선악과 과실을 인간들이 따먹었어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악과 과실은 따먹지 말라, 고 했어요. ‘이것은 내 거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네가 현재 낙원에서 살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 된 우리의 거야.’ 하나님과 아담, 너와 합해서 ‘우리’가 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우리’가 함께 사는 조건 중에 하나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에요.
그런데 선악과 과실을 마귀가 들어와서 따먹게 했잖아요. 따먹게 하고 난 결과가 뭐냐? 인간이 ‘나’가 된 거예요, 자아가. 나 따로 사는 거예요. ‘나 따로’의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된 겁니다. 따로 되어 버리면 ‘우리’라는 관계가 깨져 버린 거예요. 더 핵심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남들 보기에 혼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보이십니까?
골로새서 2장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에 혼자 돌아가신 걸로 되어 있지만 골로새서 2장 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함께’에요. ‘우리’에요, 우리.
십자가 볼 때 예수님이 혼자 외롭게 달려 있는 것으로 보지만 그 예수님의 혼자 속에서 나를 발견해야 돼요. 나는 혼자인 것을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우리 오늘 인간 세상은 어떻습니까? 전부다 혼자 살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혼자 사는 것을 인정해 준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성경 보는 것도 우리가 될 생각이 없어요. 내가 구원 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나’가 나에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어요. “아, 십자가.” 이러고 있다고요. 나를 위해서 십자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나를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어떻게 단독적으로 구원 받나.’ 생각하는 나를 주님께서 “이리 와, 이리 와.” 그 인간을 주님께서 옆에 두고 같이 죽여 버리는 거예요.
십자가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지 마시고요, 예수님 안에서 함께 죽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천국 끝이에요. 천국, 끝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나가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라는 관계 속에 있는 ‘나’가 제대로 된 나에요.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이미 범죄 해서 혼자 살고 있는데 혼자 살고 있는 내가 예수님과 더블어함께 ‘우리’ 그 속에 어떤 식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건 욕설 외에는 없어요. 제가 말하는 욕설이라는 것은 상스러운 소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최종 결정 결과가 나와 버린 선언, “너는 도둑놈이다.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도둑놈이고, 너는 십일조 해도 도둑놈이야.” 이게 신약 넘어가기 직전의 말라기입니다. 주님께서 말라기 마지막에서 “이미 너는 내 것을 도둑질 했다.” 그래서 앞으로 잘 해, 가 아니라 이미 너는 도둑질을 했다고 아주 단정 짓는 이유가, 마치 손자 저녁먹이는 거랑 똑같아요.
밥에다가 케첩을 범벅으로 해 놓고 과자를 들고 돌아다닌단 말이죠. 그러면 할머니가 뭐라고 합니까? “먹기 싫으면 치워라. 다 범벅을 해놓고 먹지는 않으면서 돌아다니고 그래.” “하나님,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제사 드립니다. 하나님, 예배 참석하겠습니다.” “치워라, 하기 싫으면! 그거 한다고 믿음의 명맥이 이어질 줄 아느냐? 끝났어. 너 도둑놈이야.” ‘우리’라는 틀을 깼다는 거예요. “네가 ‘우리’라는 틀을 깨고 있다는 걸 몰라?”
말라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너는 죄인이고 나는 너를 용서하는 그 제사 시스템에 너와 나, 함께 관여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건 뭐 ‘제사 아이디어 내가 지어냈나? 하나님 자기가 지어내놓고. 뭐 해 드리자.’ 애가 밥에다 케첩 범벅이하는, 그런 식인 거예요. 그래서 그걸 어디서 주님께서 트집과 빌미를 잡느냐 하면 십일조를 안 냈다는 거예요.
자, 십일조를 안 내면 제사가 중지 됩니다. 제사가 멈춰져요. 이유가 민수기 18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8장 21절 31절 굉장히 깁니다마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이 십일조인데 그 십일조를 누구에게 주느냐? 제사장에게 주어져요. 그것도 끝물 말고 제일 좋은 맏물을, 십일조로 드려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가 제공 된다는 말은 아무것도 먹을 것도 없는 제사장들이 계속 제사 기능에 전념할 수 있는, 제사 언약을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제사의 효과를 얻을 자들이 계속 제공하는 거예요. 제일 좋은 십분의 일을 계속 줌으로서. 그러면 십일조에 대해서 제일 좋은 것을 드리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안 주거나, 혹은 줘도 형식적으로 ‘가져가소!’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뭐냐?
제사장은 죄를 용서 하는 거고 거기에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뭐다? 죄인이죠. 죄인이 십일조 낸다고 의인 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죄인입니다.’ 하는 식으로 하는 게 십일조에요. 그러니까 십일조를 한다는 말은 ‘나에게는 제일 좋은 것은 취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하는 뜻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우리’라는 것은 죄인이 필요하고 또 우리 속에는 그 죄인을 용서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제사 제도에요. 그런데 그 제사 제도의 원형이 뭐냐? 아버지와 아들이에요. 신약 세계에 와서 밝혀집니다.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됨으로서 제사 제도에 대해 나는 기어이 완성 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열의와 결심이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되어야 돼요, ‘우리’가!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꾸 뭐로 나가냐면 ‘나’로 나가는 거예요, 나, 계속 나로 나가는 거예요. ‘우리’에서 ‘나’가 따로 나가면 그게 도둑놈이에요. 왜? ‘우리’라는 것으로 해야 될 그 일을 망쳤으니까 이건 ‘우리’의 것을 도둑질 한 거예요, 우리의 것을.
그러니 이걸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들이 보면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평생 동안 남의 물건에 손 댄 적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도둑으로 몰아버리신다?’ 여러분, 평생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는 사람 같으면요, 오늘 말라기 3장 8절과 9절 말씀은 해당이 안 돼요. 따박따박 십일조 정밀하게 계산해서 십의 일조를, 십분의 1, 2도 아니고 3도 아니고 십분의 일을 딱 드린다는 것은 뭘 뜻하는 겁니까?
‘세금, 줄 거 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준 거예요, 하나님, 내가! 세금을 준 나의 가치를 내가 인정했고 이제는 하나님이 십일조 드린 나의 가치를 알아줘야 됩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리’라는 게 파괴되어 버리죠. 신명기 14장 29절에 보면 십일조가 또 어떤 용도냐? 제사장 주는 것은 제사의 기능 때문에 그렇고, 29절에 보면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이게 뭐냐면 22절에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삼 년 끝에 드리는 십일조는 바로 땅이 없는 레위인과 성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복지기금으로서 제공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내가 가진 재산이 수 백, 수십억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나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여전히 죄인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미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깨어져 버렸고요, 그리고 하나님이 건들지 말라, 하는 그것이 이미 내 쪽으로 넘어와 버렸다는 그 말이죠. 선악에 대해서 이미 내 쪽으로 넘어와 버렸거든요. 내 쪽으로 넘어왔으니까 이미 선악을 아는 나를 ‘난 선악에 대해서 모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선악이 넘어옴으로서 선악을 아는 ‘나’가 되어버리면 나의 이 개인주의 의식은 ‘나’에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절망적이에요. 이미 우리는 ‘우리’라는 관계를 깨뜨린 도둑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우리가 말라기를 안 보고, 성경을 아예 모른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자기 위주로 살아가죠. 자기 위주로 살아간다는 말은 뭐냐? 이미 자기에게 넘어온 선악 지식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뜻이죠. 그게 무슨 뜻인가? 아까 했던 말을 또 해드리겠습니다. 평생 남의 물건을 손 댄 적이 없으면 그 사람은 도둑이다, 도둑이 아니다? 도둑이 아니죠. 도둑질 한 적이 없기 때문에요. ‘난 남의 것은 냄새나서 아예 만지지도 않고 갖다 버린다’ 할 정도의 사람을 하나님이 도둑으로 몰아버리면 참을 수 없죠. “제가 왜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가겠죠. 자, 여기서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기 갈 길을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유유히 지옥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탁류에 몸을 잠근 채 그냥 무의미하게 휩쓸려 가는 식이에요, 세월 따라서. ‘나는 도둑질 한 적 없다. 나는 착하게 살았다. 나는 반듯하게 살았다. 내가 어려운 사람들 도와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계속 붙는 것이 뭐냐? ‘나는, 나는, 나는…’ 그 ‘나’라는 탁류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영원과 접촉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요. ‘영원함과 접촉이 되지 않았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나는 반듯하게 살았다, 하면서 두둥실 두둥실 떠가는 거예요. 두둥실 떠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지옥으로 두둥실 떠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물에 잠긴 채 두둥실 떠가는 거예요. 더러운 똥물에 잠긴 채.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에서 ‘나’가 떨어져 나왔으니까 네가 평소에 하는 모든 일상생활 자체가 도둑이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23장에 그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24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렸어요. 정밀하게 측정해서 드렸습니다. 왜일까요? 말라기 3장을 잊을 수가 없죠. 십일조를 안 한 것이 하나님께 도둑질을 한 거라면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이라는 소리를 들을 리가 없다는 것이 바로 개인주의적, 자기 단도리 하는 인간들의 자기를 놓치지 않는 한계입니다.
‘나’에서 ‘우리’로 갈 수가 없어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는데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분명히 예수님은 혼자인데 성령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있다는 거죠. 함께 있는 자가 누구냐?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예수님 옆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 옆에. 그것도 죄인으로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영원함과 접촉이 된 순간입니다, 영원함과.
탁류에 흘러가도 괜찮아요. 이 육신은 다 심판받고 먼지가 되어 다 날아갈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십자가 옆에 죄인으로 붙어있어서 주께서 “다 이루었다. 네 죄는 내가 함께 해서 다 이루었어. 나는 너를 부활시켰다.” 하는 그 사실을 간파 했다면, 그것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남들 보기에 이 세월 따라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영원함으로 건짐을 받은 사람이에요.
글쎄 우리는 그렇게 되고 싶은데 그렇게 되는 방법이 뭐냐는 거예요. 그걸 제가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그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3장에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어떻게 십일조를 했는지 보라는 말이지요.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고 있는데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게 뭐냐? 자기를 믿는 거예요. 자기를 신봉하고 자기의를 꼭 쥐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예수님 옆에 달린 죄인인 나는 굳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미 확정된 죄인으로 매달렸다는 그것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내가 나름대로의 평소 생활에서 반듯하게 살면, 십일조 드릴 것 드리고 그러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뭘 했습니까? 십일조를 했지요. 뭘로? 자기 의와 자기를 믿는 믿음과 자기의 착함으로, 자기 사랑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묻지요. “인간아! 내가 좋아, 네가 좋아?” 묻습니다. “나 예수가 좋아, 네가 좋아?” 하고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누가 답변할 수 있습니까? 뻔히 아시고 하는 질문인데. “너 도둑질 했다”와 똑같은 맥락이에요. “너는 너를 보고 있느냐, 아니면 나를 보고 있느냐?” 이 질문은요, 답변을 들을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맨날 우리 자신만 쳐다보고 살아요. 그게 나의 의와 나의 신과 나의 인이에요.
그거 없이 십일조 해왔던 겁니다. ‘십일조를 해 왔던 겁니다’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요? 요즘 십일조 누가 하는데요? 아무도 안하는데요. ‘십일조 하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한다면 아예 안하면 되겠네요.’ 계산이 막 나오지요. 머리가 막 돌아가잖아요. 이점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 전에 아까 나열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릴게요.
“왜 너는 하지 못하는 것을 안 하고 있느냐?” 인간들이 말하기를 “저희들은 안해야 될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문제에요.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한 그것이 문제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히 함으로써 내가 못할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빠트리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지적하는 것은 인간이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범죄 한 입장에서는 빠트린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 안할 일을 네가 해야 되는데 네가 못할 일, 그것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더욱 의아해 하지요. “우리가 못할 그 일이 뭡니까?” 할 때 제가 마지막 답변한 것이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도둑으로 몰리는 그 일이다.” 그러면 그 뒤 다섯 번째는 답을 안했지만 그 다섯 번째는 이렇게 되겠지요. “에이 씨! 이럴 것 같으면 하나님 안 믿어.”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래, 믿지 마!”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하나님 믿는 흉내는 내는데 진심은 아니에요. 왜? 하나님 보기 싫어요. 나는 나를 보면서 그냥 세월 따라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요. 누구 보고 싶은 사람 따로 없어요. 나만 있으면 돼요. 나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해야 돼요. 왜냐? 바리새인들도 기껏 이것까지는 했거든요. 십일조까지는 했는데 그것마저 아니라면,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라고 했는데 우리보다 더 열심히 했던 바리새인이 커트라인에서 탈락이라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자, 남은 문제는 딱 하나에요. 딴 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죄용서가 끝났어요.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살려 놨다, 그 말이지요. 어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대목을 이야기해야 해요. 죄사함부터 이미 결정해놓고 그다음에 그 죄 사함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십자가로 데려간다고요.
십자가 믿어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죄사함 받아놓고 “엉뚱하게 내가 왜 죄사함 받았습니까? 나 죄 많은데?” “이유를 설명해줄까?” “예” “네가 거기에 있거든?” “어디에요?” “네가 놓친 ‘우리’라는 시스템에 벌써 네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나 혼자이고 싶어하지만 주님께서 그걸 용납하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라는 그 관계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걸 이루신 거예요.
골로새서 2장의 말씀처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11-15).
여기 있는 나는 가짜고요. 진짜 나는 주님 옆에 있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그 나가 진짜 나라니까요. ‘글쎄 그 나를 어떻게 아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게 궁금한데 왜 자꾸 뜸을 들이느냐는 거지요. 이야기를 하려거든 빨리 하시든지. 그게 로마서 13장에 나옵니다. 8-9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십일조도 여기에 포함되겠지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 없는 사랑을 어떻게 합니까? 나는 내 사랑에 미쳐 있는데 무슨 주님을 사랑합니까? 그것은 이렇게 됩니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이 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우리 입장이 그래요. 왜냐하면 나는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기억이 없으니까 그분이 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 상태는 어떤 상태냐? 이문세에 의하면 “사랑이 지나가면”의 상태입니다. 사랑이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탁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게 지옥이에요. 넓은 길이니까.
그렇게 지옥으로 가는데 위에서 갑자기 독수리처럼 뭐가 스쳐 지나가느냐 하면, 사랑이 스쳐지나 가는 거예요. 사랑이 스쳐지나 가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 너 알거든!” “뭐라는 거야?” 보니까 벌써 스쳐지나갔어요. 그러니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평상시 우리는 내 문제만 생각하면 만사 오케이 라고 생각하는 이 좁은 데에 영원이 접촉하면서 사랑이 오게 되면…, 십자가 사랑이죠.
이미 나 죽을 때 너도 같이 죽고 나 살아날 때 너도 같이 살아났다는 그 사랑, 그래서 ‘너는 네 문제를 네가 해결하지만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는 해결 다 됐어. 그게 레위언약이고 제사법이야’라는 그 내용이 사랑으로 다 이루어졌어요. 율법을 다 이루었으니까 그 사랑이 온다 그 말입니다.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거기서 뭐가 쏟아지느냐? 우리에 대한 욕설이 나오는 거예요.
“너는 간음자야! 너는 살인자야! 너는 도둑놈이야!” 아까 본 로마서 13장에 다 나오지요. “너는 탐냈어!” 십계명부터 다 쏟아지고요, 산상설교에 나오는 계명이 우리에게 다 쏟아져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32). 그런 것은 지옥 가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이게 다 쏟아져요.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29-30, 42).
왜 산상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까? 나 위주로 사는 인간에게서는 예수님이 하는 그 어떤 말씀도 이룰 수가 없어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시스템이 이미 깨진 상태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말씀을 지켜도 천국에 못가는 이유가 자기 중심이거든요.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요.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욕설’입니다.
산상설교에서 그냥 욕설을 해대요. 산상설교가 끝나는 데가 마태복음 7장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넘어가면 어떤 저주받은 문둥병자가 그냥 깨끗함을 얻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깨끗함을 얻었을 때 “야! 깨끗해졌다.” 하고 그냥은 집에 못 가게 했어요. 어떻게 했느냐? 문둥병자였던 그 사람에게 제사법을 안겨줍니다. 마태복음 8장 4절에서, 문둥병자가 나은 뒤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나 나았다고 아무에게나 떠벌이지 말고, 그것은 개인주의니까요,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우리’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우리’ 그리고 인간이 범죄 하기 전의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그 ‘우리’ 그 ‘우리’시스템이 온전하게 된 거예요
마태복음 9장 12-13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인 부르시는 예수님 한 분과 그리고…, 여기서 나, 나는 끝났어요.
내가 죄인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는 아니고 ‘우리’라는 주님 시스템 안에서 나는 죄인으로 같이 결합이 될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랑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한테 모든 말씀으로 욕설을 할 때, 사랑이 이제는 나에게 덮쳐버리면 주께서 하시는 그 욕설이 “너 혼자 살지 말고 우리 같이 살아. 내가 십자가에서 다 해결해 줄게”라는 사랑의 음성이었던 겁니다.
인간은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우리’가 되지 아담 따로 하와 따로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든 적이 없습니다. 항상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주신 거예요. 왜?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증인되라고, 그래서 ‘우리’의 증인되라고 하신 거예요.
사랑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마시고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 기억할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신 것을 기억케 함이라. 요한복음 16장에서 이게 성령의 일이에요.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4)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을 기억하지 말고 주님 하신 일의 결과로만 우리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미 단정 내렸는데 우리는 ‘가봐야 안다, 더 살아봐야 알 것이다’ 뭉그적거리는 우리의 나 중심적 자세, 이제는 주여 사랑을 알아서, 이미 우리가 사랑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나’로 살지 말고 ‘우리’로 함께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