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하나님의 탈장

아빠와 함께 2024. 8. 29. 19:13

하나님의 탈장 

2024년 8월 28일              본문 말씀: 말라기 3:7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인간들이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오늘날의 자기 삶을 영위해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조성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은혜를 내리시는 그 자리에 설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유대 민족에게 주신 이유는 그들이 도통 하나님께 돌아갈 마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다른 데 쏠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육신을 계속 살려내는데 온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이 세상은 각자 살아남는 일에 치열합니다. 경쟁합니다. 밀리면 자신은 못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과의 견해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견해는 율법 자체에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에 율법대로 살 수 없다면 인간을 무가치하게 여겨 저주를 내리시겠답니다.

즉 저주가 떨어질 수 있는 대상이 곧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챙긴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가치가 율법 여부로 파악하시겠다는 겁니다. 시편 3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성취가 되려면, 일단 인간이 내세우고 싶은 일체의 가치나 자랑거리는 없어야 하고 온통 허물과 죄 뿐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복의 시작은 허물뿐인 존재, 죄 뿐인 죄에 대해서 하나님쪽에서 가리움과 사함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 32:1의 취지가 하나님 내부에 계속 살아있게 됩니다. 이미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생명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율법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따라서 인간쪽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이미 죄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뭔가 살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죄가 되고 저주거리가 됩니다. 마치 자신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접선을 시도하는 것도 죄에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죽이십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참으로 자신이 구원받은 자들은 특정 공간이나 건물이나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온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음은 모든 인간을 이미 죽은 존재로 전제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방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친히 마련하신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마치 탈장하듯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그 하늘나라를 버리고 이 죄뿐인 세상에 들어오심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빠져 나간 그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곳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본문에서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음’을 유념합시다.

즉 어떤 인간도 구원될 가치가 없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경로에 따릅니다. 하늘을 버리고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짊어진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눅 24:7)

일단 예수님은 죽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손에 죽으셔야 합니다. 이들의 권세는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심성을 대변한데서 집대성된 권세입니다. 따라서 죽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방법이라는 예수님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22-
23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인하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 만만하게 보이겠지만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시기에 인간들 입장에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본심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히 베드로의 의견을 거절했습니다.(요 13:36-38) 이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은 계속 거절, 거절입니다. 그것은 인간쪽에서 보내는 신호들이 실은 인간들이 자신의 시도를 통해서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의욕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자신을 따라서 죽으라는 말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결국 인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방식은 자신을 죽이시는 그 복음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사도 바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묻습니다.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6-17) 인간은 자기 죽음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마땅하고 당연한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이요 이들만이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무가치를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게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3강-말라기 3장 7절(하나님의 탈장) 24082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아멘.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는가?’ 이 질문은 인간 입장에서 정당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계속 주시기만 했기 때문에, 받는 입장에서 받기만 했기 때문에 주시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떠한 통로나 길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쟁취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발굴해서 얻어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는 무작정 주셨거든요. 무작정 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무작정 주셨어요. 근데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받게 되게 되면, 그거는 받는 쪽에서 그 사랑과 긍휼을 주신 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끊어져 있어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은 알아서 잘 찾아오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돌아올 마음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육신 자체가 치열하게 자기의 삶을 살아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거기다가 쏟아붓지 아니하면 남들에게 좋은 자리를 다 빼앗기기 때문에 경쟁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오로지 자기 살길에 열중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갈 때 세상이 무서워서 도로 자기 집안으로 빠꾸하죠. 무서워서, 세상에 나가기가 무서운 거에요. 자기가 가정에서 받던 그 가치와 그러한 보살핌은 사회에서는 이거는 일체 없습니다. 자기가 그걸 자기 살길을 자기가 만들어야 되는데, 만들면서 생긴 관점이 뭐냐? 공간개념이에요.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는 공간개념이 형성되다 보니까 “돌아오라”라는 말을 할 때 어디로 돌아온다는 말인지가 여기서 뒤에 더 필요한 것처럼 생각이 들죠. 어디로 돌아가야 돼요?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 그중에 어느 게 해당되는지를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첫째, 돌아간다. 어떤 공간으로 돌아간다. 둘째, 어떤 건물 안으로 돌아간다. 셋째, 어떤 인물 속으로 돌아간다. 어떤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성지순례하면 되겠죠. 예수님 태어난 곳에. 그러면 그 성지순례 하면 그것 주님께 돌아온 게 됩니까? 지금 이란하고 전쟁 중인데. 180명 괜히 갔다가 또 국민들이 걱정을 하게 되죠.

그러면 어떤 건물에 돌아오면 돌아온 걸까요? 예를 들면 교회 나오는 것. 그러면 주님께 돌아오는 겁니까? 셋째, 어떤 인물에게 돌아가는 것. 인물에게 돌아갈 수가 있어요? 뭐 딱 붙어살면 돌아가는 겁니까? 몸체가 다른데 어떻게 돌아가요? 그래서 오늘 설교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으로 돌아오는거에요. 복음으로. 말라기가 구약의 끝입니다. 말라기 다음에는 한 장만 넘기면 마태복음 나오죠. 마태가 전한 복음, 마태복음입니다. “돌아오라”가 성립이 될 것 같으면 복음이 주질 않았습니다. “돌아오라”가 실패하기 때문에, “돌아오라”가 성사될 수 없기 때문에 한 장만 넘기면 나오는 마태복음이 나와요. 복음이 나옵니다. 복음으로 돌아오라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만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 시대가 마태복음이라면, 말라기는 아직 마태복음이 아니에요. 신약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갑니까?”라고 이야기한거에요. 이 질문 자체가 구약적이에요. “어떻게 하여야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근데 구약은 율법 시대에요. 율법은 못 들어오게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겁니다. 돌아오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에요. 마치 생명나무 가는 길을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이 오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화염검으로 두루 봉쇄하는 것처럼 그 율법도 천사에 의해서 주어진 겁니다, 시내 산에서.

천사가 주어졌다는 말은 “돌아오라”가 아니라 “너희들이 왜 못 돌아 오느냐”를 지적하기 위해서 천사를 통해서 이 율법을 주신 거에요. 그러면 인간들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문제 있다는 겁니다. 문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견해와 인간이 자기를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는 것은 너희들 힘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에 의하면 죽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니가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말씀을 줘 놓고 그 말씀과 그 말씀을 대하는 인간들의 위치 사이에 격차, 단절된 차이 그것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단절되어, 끊어져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신거에요. 따라서 이 말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면, 인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금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단촐하게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시편 32편 1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허물의 사함을 얻고, 용서함을 얻는다. “허물의 용서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복이라는 것은 출발점이 뭐냐? 허물이 있어야 되고요. 복이 되려면 그 죄가 있어야 돼요. 허물이 있어야 되고 허물이 가득 차야 되고 죄가 가득 차 있어 줘야 돼요. 왜냐하면 복이라는 게 성립이 되려면 허물에 대해서 용서가 주어질 때 복이고 죄에 대해서 가리움을 받는게 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 32편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는 사람.” 복된 사람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허물을 허물이라고 지적하고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통해서 꾸준히 해 오신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는데 쉬지 않았어요. 놀지 않았습니다. 무관심하지 않았어요.

끝까지 인간들의 허물과 죄를 발췌해 내는데 굉장히 하나님께서는 열심을 내었던 겁니다. 쉬지 않고 그 작업을 해 왔던거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죄와 허물을 발굴하는 데 열심인데 우리는 반대로 나의 죄와 허물을 발굴하는 데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살고싶어 하고요, 내가 산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강도가 만약 여러분 보고 “돈 내지 않으면 죽인다”하면 여러분 죽겠습니까, 돈 내겠습니까? 돈 주죠. 왜 강도가 요구하는 대로 목숨을 안 내놓습니까? 아직까지 내 목숨은 가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하는 질문에 여러분 한번 답변해보세요. “당신의 가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있습니까? 그렇게 죽기 싫어하고 유지하고 싶은 당신의 가치, 무엇으로 구성되어있죠?” 하나님은 정답을 알고 있어요. “인간은 가치 없다.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다.” 이게 하나님의 정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가치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지를 몰라요. 그냥 가치 있을 거라고 함부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아까 제가 복음으로 돌아온다 하잖아요. 복음으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선행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거는 인간의 가치가 아예 애초부터 전무하다. 아예 없음을 분명히 하는 그 일을 신약에서 하게 되는겁니다.

하나님은 가치 없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 허물을 덮어주시고, 가리워 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복음의 가치를 실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오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준비한 유일한 돌아오는 방식이에요. 다른 방식은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가? 다른 방식은 없다는 것. 일체 없다는 것. 인간이 말씀 지키고 이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게 일체 없고 오직 하나님 쪽에서만 손을 써야 되는 그것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이 바로 그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어요. 로마서에서는 내어줌을 당한다고 되어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되어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서 이쪽 인간세계로 오신거에요. 하나님의 영광됨을 버리시고 자진해서 죽기까지 복종했어요. 빌립보서 2장에 의하면.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죄에 있는 육신의 몸을 입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함께 있던 예수님이 떨어져 나가면서 여기서 탈장이 생기죠. 탈장. 떨어져 나가는 거에요. 그럼 탈장 생기면 거기에 빈자리가 생겨요. 그 빈자리가 아버지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돼요.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여자분들은 잘 모르지만 남자들은 알 거에요. 축구할 때 상대방 골키퍼를 몇 미터 앞두고 프리킥을 찹니다. 공 놓고 차는 것을 프리킥이라고 해요. 아시죠 그 정도는. 그러면 상대방에서 스크린을 딱 하죠. 상대방이 공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스크린을 하는데 그때 공 차는 쪽의 선수 하나가 상대방의 스크린 짜는 쪽에 중간에 떡 끼어 들어가는 거에요. 그건 반칙 아니에요. 노란색 유니폼에 빨간색이 떡 들어가서 자기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손흥민이 공 찰 때 그 때 싹 빠져주는거에요. 있다가 싹 빠져주는 것, 탈장이죠.

싹 빠져주면 거기에 빈 공간이 생기죠. 그 사이로 손흥민이 슛 골인 시키는 겁니다.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한 거에요. 생명 나무에 못 갑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일체 생명 나무에 못 갑니다. 길이 없어요. 천사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냥 저주해버려요. 불로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꽉 차 있는 그 공간에 빈 자리를 만들기로 아버지하고 창세 전에 합의를 봤어요. 봐가지고 주님께서 있던 주님의 자리에다가 자기 자리를 빼는 거에요. 비워놓으면 그 예수님 자리가 생기죠. 그걸 신약 성경에 뭐라고 하냐면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 안, 성령 안, 예수님 안, 다 같은 말이에요.

빈자리가 생기죠.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만이 길이요, 나만이 진리요, 나만이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이걸 줄여버리면 “없다.” 약간 늘이면, “천국 갈 사람 없다.”가 돼요. 꽉 막혔습니다. 손흥민이 아니라 누가 와도 골이 안 들어갑니다.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탈장해서 떨어져 나가서 예수님이 인간 쪽에 왔습니다. 그러면 방금 제가 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머리를 써서 예수님 자리가 빠져있으니까 예수님이 이미 빠져있으니까 자기는 예수님을 피해서 그 빠진 자리에 본인이 쑥 들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원래 인간은 생명 나무에 막혀있다는 그것이 예수님이 빠졌다고 해서 그게 빈자리가 인간에게 노출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빠진 자리가, 맨홀 뚜껑이 계속 인간에게 다가오게 되면 인간은 두꺼운 맨홀 뚜껑을 피해서 뒤쪽으로 가서 천국 가는 코스로 갈 수가 없고 항상 맨홀 뚜껑과 맞서야 돼요. 맞이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없다가 돼요. 마태복음. 역시 마태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 보게 되면 천국 간 사람, 천국 갈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을 시인하면 되게 돼있죠.

문제는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는 능력이나 그러한 지혜나 그러한 마음의 자질이나 마음의 태도가 갖춘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을 듣고 기분 나빠서 예수 시인 안 합니다. 예수님을 몰랐으면 하나님, 하나님 찾겠지만, 예수님을 정면에 딱 맞닥뜨리면 기분 더러워서 예수 안 믿어요. 그 예수 말고 가짜 예수는 믿을 수 있어도 진짜 예수는 못 믿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가치를 모독하기 때문에 그래요. “니는 인간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나서기 때문에, “하이고 고맙습니다.”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시인하면 구원받는데 시인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까요.

우리를 너무나 속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그런 가치도 없다는 말은, 우린 죽었다는 말은 천국 갈 가치도 없다는 뜻이에요. 더 심하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난할 가치조차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반성할 가치도 없고 비난할 가치도 없고, “내가 나빠, 나빠” 그런 짓도 소용없어요. 내보고 나쁘다는 소리를 할 그럴 가치조차 안 되는게 우리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 이기 때문에 죽을 뻔한 자, 잘하면 살 수 있는 자 같으면 스스로 자기를 때려서 “난 못났어, 나는 못난이, 못난이였어.” 혹시 그 겸손 보고 살릴 수도 있는데 아예 그 죽을 뻔한 것도 아니고 아예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나의 욕설이라든지 타인의 욕설도 우리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우리보고 “니 가치없다”고 욕설하는 그게 복음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제가 제 목숨 바쳐서 주님 따라갑니다.”할 때 “니는 니 목숨 바친다고 갈수 있는 곳이 아니야. 오지마.”라고 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아무리 스승님이지만 진짜 사람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죠. 그 이야기를 들었던 가룟 유다는 복수하듯이 예수님을 팔아먹었잖아요. 평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제자들의 그 모습 보면 모릅니까? 도대체 제자들이 알던 예수님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듣는 예수하고 이거는 뭐 판이하죠. 둘 중의 하나는 가짜에요. 예수님을 떠나게 했던 그 예수님이 진짜에요.

모든 걸 바쳤지만 결국 실망스럽게 만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에요. 다른 예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드라마의 대사 중에 하나인데요. “11년 전에 날 죽인 것이 바로 당신이죠?”라고 어떤 문자를 어떤 사람에게 보냈어요. 드라마 보면 나와요. 드라마 제목은 백설 공주를 죽인 뭐 그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문장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1년전에 날 죽인 것이 당신이죠.”가 성립되려면 다섯 가지인데, 첫 번째, 일단 죽어야 됩니다. 두 번째, 살아나야 돼요. 세 번째, 상대가 날 죽여야 돼요. 상대가. 엉뚱한 사람보고 메시지 보내면 안 되니까. 당신이, 상대가 바로 날 죽였던거에요.

네 번째, 상대로 인하여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야 돼요. 다섯 번째, 나는 살고 싶은데 당신이 살기 위해서 나를 죽였다. 이 다섯 가지. 일단 죽어야 되고, 일단 살아나야 되고, 상대가 나를 죽였다는 점과, 상대는 아직 늙어 죽으면 안돼요. 상대는 아직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상대가 나를 죽였다는 것과 그 상대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 것과 그리고 그때 나도 살고 싶었는데 당신만 살기 위해서 나를 죽였다. 이 다섯 가지를 함축하게 되면, “11년 전에 날 죽인 것이 당신이죠.”라고 되는 거에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찾아오신 것은 이거는 2천 년 전에 우리 모두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인간이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죽은 자가 되는 거죠. 율법을 왜, 율법대로 왜 못살았는가?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겨서, 자기 사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게 자기 일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남는 게 자기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남는 게 내 일이냐, 아니면 내가 죽어도 괜찮으니까 주께 돌아가는 게 내 일이냐? 둘 중에 어느걸 할 거냐? “내 살아남는거 할래. 내 살아 남는거.”

주님의 뜻은 “니 살아있는 게 급선무가 아니고 죽든 살든 넌 나한테 돌아와야 돼”하는 것이 율법을 통해서 말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주님의 요청, 요구사항이에요. 그런데 그 뒤에는 뭐냐? 산채로는 그냥 돌아올 수 없다는 것. 왜? 산채로 돌아오게 되면, 그다음에 나오는 신약 성경이 소용이 없어요. 신약 성경은 인간은 죽은 자를 죄로 인하여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살려서 돌아오게 하는 방식이 유일한 방식이에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가? 주님으로부터 탈장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7절에, 성경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로 성경을 처음 본다고 생각하시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다시 읽습니다. “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이 방식, 이 방식만이 돌아오는 방식이에요. 그 이외에 방식은 아닙니다.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마저 죄인 손에 넘기워야 돼요. 인간 손에 넘겨서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야 돼요. 그 방식 외에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이 방법 아시고 오늘 본문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3장 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주님께서 어떻게 돌아가는 방식을 언급을 해야될 텐데 그 언급을 하는 돌아오는 방식 자체가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더욱더 인간의 죄와 허물을 발굴해 내는 율법적 방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다는 말은, 그 율법으로 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왜 우리가 저주받아 합당한가를, 왜 우리는 죄인인가를 알기 위해서 샘플로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거에요.

이것은 로마서에 3장 8절, 9절, 10절 계속 나오는 이야기에요.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율법을 주신 것은 입을 막고 저주 아래에 있게 함이라.” 갈라디아 3장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너희가 저주 아래에 있다.” 저주 아래에 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이 말라기란 말씀을 주신 거에요. 말라기를 말씀을 줬기 때문에 그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말라기에 구약 성경 없이 신약 성경으로 바로 사람을 구원하면 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구약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왜 굳이 우리한테 했는가? 다 지나간 이야기인데. 실패는 실패 한거고, 새로 신약 줘가지고 예수님 오셔가지고 우릴 구원하면 깔끔하잖아”라는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거든요.

그 이유가 왜 그러냐 하면, 구약을 주고 신약에 십자가 있어 줘야 우리가 애초부터 구원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의 대상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그러면 구원받겠다는 것은 뭐냐? 이게 저주 값을 하고 있는거에요, 지금. 자기 주제를 모르니까. 아직도 자기한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구원받고자 하는거에요. “목사님, 구원해주세요. 천국 보내주세요.” “당신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아직 살아있잖아요. 살아 있는거 맞잖아요.” “죽었는데요?” 주님이 죄로 죽었다는 말은,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한 가치 뿐이다는 뜻이에요. 죄로 인하여 죽어야 된다는 것은 꼭 죽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죄인이란 뜻인데, 죄인이기 때문에 죽였는데, 죄인 주제에 “살려주세요”? 이게 앞뒤가 안 맞죠. “살려주세요”라는 것은, “아주 죄인은 아니잖아요.” 이런 경우는 가능하겠는데, “잘 못 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때리면 아프다는 거에요. 지금 애들이. 엄마 때리지 마세요. 아파요. 아프라고 때리는거잖아요. 산수 수학 못 한다고 고함을 지르고 손녀는 찔찔찔 울고 고함을 질러야 내가 수학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대충 죽어서는 구원이 안 돼요. 완전히 죽어야 돼요. 아내 역할은 남편을 죽이고 그 틈에 2kg 몸무게 빼는 거죠. 속을 완전히 다 깨끗하게 죽여놓고 살리는 거죠. 죽여놓고.

주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완전히 죽는 방법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2천 년 전에 죽인 것이 당신이잖아요” 할 때 드라마에서는 “복수할 거야.” 이렇게 나오지만, 실제로서는 고맙습니다. 이래야 돼요. 고맙습니다. 내가 이 율법이 없었으면, 구약이 없었으면, 내가 십자가가 없었으면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을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말라기 3장 7절의 말씀, “돌아오라” 이 말씀은, 신약에 오게 되면 이렇게 달라집니다.

“이미 돌아왔다.”가 되어버려요. “이미 돌아왔다.” 사도행전 14장 15절에 보면,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식이 복음뿐이라는 것은, 이미 돌아온 사람에게만 복음뿐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게 돼요. 나의 가치가 아니고, 더 이상 나의 가치가 아니고 복음의 가치가 내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 이미 돌아온 사람에게 한합니다. 이미 복음 안에 사는 사람이요,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이요, 예수 안에 사는 사람만, 이 사도행전 말씀이 현실화 되어있는거에요.

이미 돌아왔을 때 우리는 이 세상과 나 자신과 세상과 성경은 어떤 세계를 이루고 있는가, 돌아온 사람에게만 이게 훤히 보이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 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데 이 자리에 사도바울이 섰다고 치고 여러분한테 이렇게 질문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 여러분 속으로 한번 답변해보세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이게 무슨 뜻으로 여러분 생각됩니까?

지금 이 뜻이 유의미, 의미있게 여러분에게 다가 오려면, 지금 우리가 평소에 내가 치열하게 밥 먹고 사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그것을 전제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성경에 어떤 내용이 있을까? 내가 공부해야지”, 이래가지고는 이게 따갑게 뜨끈뜨끈하게 다가오질 않아요. 우리는 평소대로 내가 내 몸뚱아리 사는데 거기에 치중하고 열중하고 거기에 몰입하고 있을 때 훅하면서 옆에서 이 복음이 “만일 사는 것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는 말이 이게 의미있게 다가오게 돼요. 왜냐하면, “도대체 나는 그동안 내가 죽었다가 사는데 목표를 둬야지, 내가 안 죽으려고 설치는 자체가 이게 주께서 살려줌을 완전히 모독하는 게 되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실제적으로 인간 편하게, 교회 말고 세상에서 편하게 사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런 예는 어쩔수 없이 이런 예를 들게 되어서 저도 시간 좀, 헛 시간 아닌가 생각하는데 한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총각이 어떤 아가씨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었어요. 이름은 모르죠. “어여쁘신 이쁜씨.” 이름은 모르니까, 무조건 편지. “어여쁘신 이쁜씨. 저는 학교에 오고 가며 길에서 만나 뵀던 최명길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쁜씨를 처음 만나 뵀던 날부터 잊혀지지 않던 이쁜씨의 모습을 그리며 안타까운 이 심정을 누를 길이 없어 이 글을 보내오니 다음에 만나 뵐 때는 아는 척이라도 하시고 마음 내키시면 답장이라도 주시기 바라고 있겠습니다. 이만.”이라고 해서 그 아가씨가 들어갔던 아가씨 집에다가 이런 편지 던지고 헤어졌어요. 지금 우리가 성경 보고 복음 듣는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 금요일 목요일 날 이런 편지를 딱 받으면, 관심사가 어디 쏠립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지?” 관심이 이렇진 않죠. 갑자기 여기에 푹 빠지죠. 이 아주 순진한 편지를 1960년도에 나왔던 “로맨스 빠빠”라는 그 영화에 엄앵란이 나왔던 그 대사 가운데 하나에요.

상당히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순수해 보이고. 그러니까 오늘 말라기에서, 또는 성경에서 우리는 무가치하다고 하는데 만약에 어떤 최명길이라는 남자가 여러분에게 편지를 던지면서 이름도 모르니깐 어여쁘신 이쁜씨, 준다면, 갑자기 살만한 가치가 확 올라오죠. 살 만한 가치가.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얼마나 치열하게 복음 가지고 싸우고 투쟁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느껴야 돼요. 사람들의 관심사 전혀 1도 없는 관심사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약 성경에 나오는 그 중요한 많은 말씀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여놓고 살리는 쪽에 해당되는 구절들을 주신 거에요.

이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몇몇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여기서도 역시 다시 태어나야 된다. 다시 태어나야 돼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죽여놓고 다시 태어나는 거에요. 율법으로 죽여놓고 십자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 복음으로 태어나는 거에요. 그 방법만이 주께 돌아오는 방법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유명한 말씀이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까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자, “내가 산 것이 아니요”와 “어여쁘신 이쁜씨”, 학교 오고가는데 만나서 편지하는 것. 그 두 개를 연결을 한번 시켜보자 이말이죠. 그러면 이 엄앵란씨가 1960년도의 엄앵란씨가 성령으로 거듭났는데,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미 죽은 자인데, 그 최명길이란 사람이 와서 그런 연애편지를 주고 갔다. 그러면 이미 십자가 안에 못 박힌 입장인데 그 연애편지를, 어떤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될까요? 어떠한 태도를?

뭐 간단하죠. 최명길이라는 사람이 주신 편지 하나라도 내가 죽어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서 주께서 그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러면 딩동댕. 맞는 말이죠. 이러면 맞는 말이죠. 왜 그런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이것 때문에.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제 나는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최명길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가지고 어여쁘신 이쁜씨라고 이름도 모른 채 나한테 편지를 줬을 때, 그것마저 주께서 나를 주님이 빠져나와서 돌아가는 그 부활의 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을 그쪽으로 이끄시는 방법 중의 한가 나한테 연애편지 날아오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 이런 방법이 아닌 식으로 바로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설쳐대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데 자꾸 말씀 들이대면서 이걸 지키면 들어간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그것조차도 이미 십자가에 내가 죽었고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신 분에게는 그것조차도 주께서 이미 우리가 주안에 돌아간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주변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신약에 와서 문제는 해결됐어요. 해결 끝났어요. 뭐 연애편지를 받든, 위가 뭐 복통이 일어나든, 그 모든 것이 주께서 그런것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고, 그것 가지고 니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이 세상에 니가 신경 쓸 일체의 문제를 남겨둔 적이 없다고 너의 가치는 이미 십자가로서 죄 사함을 받은 걸로 이미 종결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그런 세월만, 그런 남은 여생만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고 내가 성경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것도 성립될 수 없는 가짜인 것을 깨달아서 이미 구원되었기에 비로소 성경뿐만 아니고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일뿐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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