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답변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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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사님 삼위일체론과 양태론... 
이근호   2003-08-21 10:54:03, 조회 : 323, 추천 : 39

 

삼위일체 뿐만아니라 모든사고(思考)가 다 그러하듯이, 성령을 받은 성도가 표현하는 하나님과 비성도가 표현하는 하나님이 다릅니다. 또 달라야 마땅합니다.

 

이점을 감안하지 않고 불신자까지 논리상 설득을 하기 위해 각종 용어들을 동원하면 안됩니다.

 

우선 불신자의 논리 전개의 경우, 자신의 논리적 한계성을 유감없이 노출시키면서 신론을 전개시킵니다. 

 

즉  인간의 논리 구조에서는 1에서는 1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2에서는 출발하는 논리는 충실하고 합리적으로 합당한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2로 결론 짓게 되어 있습니다. 동양 철학이 그러합니다.
3에서는 3만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1→2가 되는 논리라든지, 1→3이 되는 논리라든지, 3→1이 되는 논리를 전개시켰다면 그 와중에서 반드시 논리적인 트릭과 불연속적인 비약과 위반이 있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찾아보면 반드시 찾아집니다.

 

그러면 1에서 1되는 논리 따로, 3에서 3되는 논리 따로 만들어 이 둘을 나란히 놓고 "신이다!"라고 외치는 방식은 어떨까요?

 

그것은 두 신에 대한 표현방식이 결합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받아 두종류의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것이 되며, 이런 식의 논리는 남들에게는 안들키겠지만 각 개인의 마음  속에서는 반드시 둘 중의 하나가 우위에 서겠다고 경쟁을 벌이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불신자의 신론은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어반복(同語反覆)'이라는 추가적인 내용이 없이 그냥 다른 개념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너네집 어디있어?" "미장원 왼쪽에 있어" "미장원은 어디 있는데?" "우리집 오른쪽에 있지"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경우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신자는 그리스도 이미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논리를 하나, 밥을 먹으나 잠을 자나 일을 하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움직이게끔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본인이 그렇게 노력치 않더라도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따라서 방금 언급한 이런 마음 자세 안에서 하나님을 설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관련성 속에서 신(神)을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적인 표상 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언약 속에서 하나님과 관련맺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본인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으로 말마암아 영으로 보냄을 입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해서 신론이 전개됩니다. "존재론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역사 안에서  인간의 죄를 고려하고 고백된 사항을 다시 존재론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적 죄성과 거기에 대한 부정성을 그 안에 탐고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달라 말씀드려서 예수님을 중심으로한 이러한 정리는 구속사적인 전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진 것이기에 이것은 다시 존재적으로 재정리 해서 새삼스럽게 우리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인간을 자칭 신으로 군림하겠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존재론적인 신은 우리 인간의 언어가 감당을 못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전에 소개했던 삼일위체의 관한 내용을 다시 실어드리갰습니다.

 

"수박, 바나나, 딸기가 한 개입니까?"라고 작물학자에게 물으면, 그 사람이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 '같은 한 종류가 맞습니까' 라는 식으로 물으시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물음은, 질의에 따라 답변이 달라지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도 참 하나님이시기고 성령님도 참 하나님이십니까?" 물으신다면, 성경은 그렇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 분입니까?"라고 물으면 성경은, "한 분이다"고 답변합니다.(요 8:41/약 2:19)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접근하고 물음을 던지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사고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헤아림을 하나님 나라 세계까지 확대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밝혀진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밖의 대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實體論的(실체론적)으로 파악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自充的(자충적인-스스로 충족된 독립된) 실체로 간주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세요. 우리가 얼마든지 파악해 낼테니까요"하고 덤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자충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파악하십니다. 즉 우리 인간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겁니다.
즉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네 배후에 세력에 의한 관계에 의해서  나온 것인줄을 네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활동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은 성령의 관계에 속한 사람과 악령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 이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자충적인 실체자가 아닙니다.

 

만약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행위와 활동만이 자충적인 것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0-31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죄사함에 있어 더 이상 미흡함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악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러한 자충적인 행위와는 별도로 추가적으로 독자적이라고 믿는 인간의 행위를 가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소나마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9에 보면,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악령이 노리는 바는, 예수님의 공로에 흠집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자신을 계시하는 이유는, 인간이 사고하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배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세력과 연계되어 있음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번지는 그 논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불신(不信)성(그리스도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입각해서 신을 포착해 내려는 자아 중심성)의 실체를 새삼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신론에 대한 이해를 증거하면서 성도라고 자처하고 싶어하고 싶어하는 그 불신성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결국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삼위일체론 가지고 측정해서는 아니됩니다. 삼위일체론 주장하는 이단들이 이단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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