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에게 다음 두 가지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성경 귀절은 언제 어디서는 그 문장, 그 단어로 되어 있지만 어떤 때는 감격과 감동으로 다가오가다도 어떤 때는 별 관심을 주지 못하는 귀절로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소리를 과거에 많이 했더라도, 복음의 능력이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초점을 어디에다 맞추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2. 성도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이란 성도의 지식이나 고백을 긍정하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확보나 소유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통보하면서, 자신의 과거의 지식이나 고백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 죄를 지적하면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일어나는 법이 없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와 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 자체를 신학이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설사 부정하더하고 반성하더라도, 그 부정의 추궁하는 기반을 신학 외부에서 작동하는 십자가 자체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신학 내부에 작동하는 신학 자체의 생동력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은, 기어이 자기 신학을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자기 의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아무리해도 그 지식을 소지하고 그런 고백했음을 소지하고 기억한다고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은 지금도 십자가 능력 안에서 함께 살아계신 예수님으로만 구원받는 겁니다.
비유를 들자면,
옆에 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꼬마가 "이 분은 우리 어머니야"라는 말을 아무리해도 꼬마 친구가 대꾸하기를, "너는 어떤 방법으로 너의 어머니 인 줄을 알았으냐?, 기껏 네의 지식이나 꾸며낸 고백일 수도 있잖아 "라고 따지면 그 꼬마로서는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 때 그 아주머니가 그 꼬마를 뒷퉁수를 때리면서, "이 꼬마는 내 아들이야"하면서 확인될 뿐이지요. 이 뒷퉁수 때릴 때, 친 아들인 꼬마는 "아얏!"라고 비명을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주님)께서는 항상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의 뒷퉁수를 때리기에, 우리는 십자가 복음 앞에서 죄인임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안 맞아도 된다는 자는 성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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