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주의 날의 이해

아빠와 함께 2024. 8. 15. 09:16

주의 날 이해 

2024년 8월 14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3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하나님의 오심에 절차가 있다는 것은 인간들은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의 내용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란 바로 구원된 자 당사자만이 구원을 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절차는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이스라엘에게서 계속 발생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이스라엘에게 발생된다는 말은 곧 모든 인간들이 이미 이런 오해를 품고 살아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오해라는 것은 이 땅에 인간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마땅히 살아있을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인간은 ‘산 인간’ 맞습니까?

아닙니다. 인간들은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언약을 통해서만 밝혀지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필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런 기정 사실을 하나님께서 레위언약에 담아서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에게 주어졌던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언약의 주’가 오신다는 말은 그동안 언약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사는지 새삼스레 점검하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확정된 ‘죽은 존재’라는 사실에 합당한 조치를 내리려 오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상대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작 주님이 상대한 대상은 그동안 인간들을 꼼짝 못하고 묶어놓고 다루어 온 악마입니다. 즉 창세기 3장,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는 그 현장에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그 악마가 심어놓은 사고방식으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잘못 생각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산 사람이라고 여기고 자연세계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해가 떠 있으니 빛의 세계라고 여기고 밤에는 해가 졌으니 어둡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이해를 가진 인간 세계에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날을 미리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암 5:2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욜 2:30-31)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를 방문하는 날은 깜깜한 어두움의 날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해서 구약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오시면 밝은 날도 해가 어두워지고 깜깜할테니 그 어두운 현상을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메시야 오시기를 대비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인간들 본인이 아직도 안 죽고 있는 존재며 자신은 구원받을 가능성을 있는 대상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도저히 알아먹지 못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3-4)

즉 예수님께서는 마리다의 오빠 나사로 ‘죽을 병’이 아니라고 분명히 사전에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다르십니다. 산 자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죽은 자가 그냥 죽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나사로가 안 죽는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요한복음 11:9-10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에 함께 있으면, 죽어도 살아 있는 자가 되고 살아서 결코 죽지 않는 자인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옛적부터 깜깜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깜깜함을 하나님 입장에서 어떤 실제적 깜깜함을 제대로 알려주시려 오는 겁니다. 훤한 대낮이라고 하나님 보시기에 깜깜함입니다. 이러한 지적의 근거는 언약에 있습니다. 특히 레위언약을 통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채로 태어남을 말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단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제물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은 제단 밑에서 올라오는 ‘언약에 준한 불길’에 저주의 불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이처럼 레위언약대로 현실이 주님이 오시면서 개방되고 다 드러난다는 것은 곧 레위언약 제물이 품고 있는 그 저주성을 현실로 다 드러내는 분에 해당됩니다.

즉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그 제단에서 내리는 레위언약의 저주를 구현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주대상일 리가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잠시 오해했습니다.(마 11:2-3)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의 대상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만큼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면서 산 사람인 양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레위언약을 자기에게 다 퍼부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모습 자체가 저주의 극한을 다 보여주신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정말 오실 메시야인지 의심하는 세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의미있는 바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4-6)

즉 소경된자, 문둥병자, 귀머거리, 가난한 자는 모든 인간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징후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무상으로 고침을 받는 것은 바로 십자가로 바로 저주 안에 있는 자만이 표백, 즉 죄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불로 저주받음이 마땅함을 아는 자가 곧 피로 죄사함 받은 자입니다.

성도는 이미 천국생활을 시작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가진 것으로 공급받고 인간 세계에 없는 것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신 분 안에서 새롭게 잉태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강-말라기 3장 1-3절(주의 날의 이해) 24081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 말라기 3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아멘.

오늘 본문 내용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어떤 절차가 나오는데 첫 번째 절차는 하나님의 만군의 여호와가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가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장차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행위, 하나님의 길을 터놓는 행위를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겁니다. 길이 없었는데 주께서 나타날 길이 그 사자로 인하여 앞서 보내는 주의 자신의 종으로 인하여 그 길이 트이고 생긴다는 겁니다.

두 번째가 되면 그렇게 사자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언약의 사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하나님 자신이 두 번째 다음에 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때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와야 되고 두 번째, 직접 하나님이 오셔야 될 그 이유가 뭐냐?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주께서 임하는 날을 아무도 당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들어닥칠 때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을 반긴다든지 “아, 우리 오실 하나님 맞습니다.”하고 낌새를 알아차릴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길이 먼저 예비 되고 길이 먼저 예비 되면 주님을 영접하는데 있어서 바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길에 들어서서 그다음에 주님을 영접하는 코스가 잡혀야된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실 주님이 주님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게 2절에 보면 그분이 하는 일이 나와 있는데 그분은 금을 연단 하는 자의 불과, ‘불’. 벌건 불이죠. 불이 주어지고 그다음에 주어지는 게 뭐냐? 표백하는 양잿물이 주어져요.

그러니까 이것은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그것은 3절에 나오는데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거에요. 레위 자손. 그럼 레위 자손은 어떤 자손인가 하면, 하나님의 레위 언약을 사모하는 사람. 레위 언약의 혜택을 입는 사람. 레위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기 위해서 주님의 사자 보내고 언약의 주님이 또 오시고 그리고 각자 맡은 일을 이 지상에서 해내신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다시 한번 잡으면 주의 사자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불과 잿물을 가지고 레위 언약에 속한 자기 백성을 깨끗게 하는 작업이 그 뒤에 이렇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이 순서를 알았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특히 세례요한은 오늘 말라기에 보면,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한다.” 그렇게 되어있거든요. 주님 앞에서 길을 예비하는 것, 그것은 마가복음 1장 1절과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해놓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세례요한이 닦은 그 길 따라서 주님이 길을 잡고 닦아 놓은 그 길을 통해서 주님이 오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 안 오셨다를 어떤 식으로 알아야 되느냐 하면, 세례 요한이 먼저 길 닦아 놓으면, 불도저로 닦든지 뭘 하든지 하여튼 세례요한이 길을 닦아 놓게 되면 그 세례요한의 길 위에 선 사람만이 주께서 그 길따라 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그렇게 주님께서는 코스를 잡았습니다. 이 코스를 아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근데 그 코스를 아는 세례요한이 마태복음 11장 2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상하죠? 자기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길을 닦으러 간다 해놓고는 막상 옥에 갇혀서 예수님에 대한 들리는 소문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세례 요한이 판단을 해보니까 자기가 생각했던 그 코스대로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은 거에요, 세례요한이 보기에. 그래서 하는 말이 “당신이 이미 오신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당신을 제끼고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됩니까?”라고 한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세례요한 본인 자체가 분명히 주님 앞에 먼저 와서 길을 닦는 당사자가 맞는데, 내가 일을 제대로 했는데, 왜 내가 하는 일 코스와 거기에 딱 아귀 맞춰서 오실 그 주님이 틀이 안 맞냐 이 말이죠.

자신이 예상했던 그 주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그렇게 나오시니까 다른 사람은 뭐 할 말도 없죠.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딜 봐야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왜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오해를 잠시나마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거는 세례요한이 메시아 오는 순서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해놓고, 세례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다는 것은, 능력이 많다는 것은 내가 알겠는데 확실히 그분이 그분이라는 것은 두 가지 요소를 일을 해야 나는 확실하게 그분이 내 길에 따라서 오시는 하나님 맞다.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다는 거에요.

두 가지 일이 뭐냐 하면, 그분은 성령과 불로서 너희에게 세례를 주는 거에요. 성령과 불로서.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이 일을 하실 때 “맞습니다. 바로 당신이 내가 길을 닦은 대로 오실 하나님 맞습니다.” 내가 단정 짓겠다는 거에요.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심판하세요. 길은 다 닦아놨고 남은 것은 이제 심판 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자기 해석에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는지, 바리새인이 왔을 때 도끼 이야기를 끄집어내었어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도끼 이야기하고 불 이야기 했다. 도끼와 불을 여러분들이 한번 같이 그 둘 다를 연결시켜 보세요. 도끼 가지고 나무를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찍으면 이게 무슨 소용 있어요? 도끼를 찍는다는 것은 찍힌 나무가 바로 옆에 어디로 가야 돼요? 불로 던져져야 되는 거에요. 자기는 도끼질하면 그 옆에 불 들고 와서 불로 타작마당을 해서 알곡은 성령 줘서 깨끗하게 하고, 가라지는 그냥 불에 집어넣고. 이게 죽이 잘 맞잖아요. 착, 착.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 이야기를 합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가 왔다는 거에요. 가까이 왔다는 말은 왔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늘나라가 당장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란이 이스라엘 지금 공습할 준비 다 되었다는 거에요. 가까이 왔다는 거에요. 가까이 왔다 해놓고 벌써 사흘째 아무 소식도 없어요, 지금.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습할 거. 벌써 이야기 한지 사흘째 되었어요. 세계 모든 사람은 그 멋진 뉴스 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소식 없어요. 올림픽도 끝났겠다 이제 그것만... 전쟁이, 남의 싸움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다고요. 자기나라 안 싸우니까. 아무 소식이 없어요. 쫄았는가?

지금 세례 요한은 불구경하고 싶은 거에요, 불구경. 작살나는 구경하고 싶은 겁니다. 근데 아무 소식, 예수님한테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오실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은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서 세례요한한테 이렇게 이야기해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한다해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듣는 세례요한 입장에서는 이게 납득 되기 곤란해요. 소경이 왜 봐야 되죠? 앉은뱅이가 왜 걸어야 돼요? 그냥 앉은뱅이로 살지 왜 걸어야 되죠?

문둥병이가 문둥병 걸려가지고 알곡이냐 가라지냐 그것만 판정하면 되지 왜 깨끗함을 받는 과정이 왜 필요하냐 이 말이죠. 귀머거리는 그냥 귀머거리 살면 되는데 왜 들어야 되고 죽은자가 왜 살아나냐 이 말이죠. 뭔가 내가 놓친 틈이, 내가 뭐를 놓쳤느냐? 내가 어떤 걸 놓쳤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은 구약 사람이라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있어요. 구약 사람들은 시간을 볼 때 과거에서 차근차근 미래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구약 사람들의 자기 일상의 시간 개념이고 말씀에 대한 시간 태도도 그래요. 하나님이 말라기를 보면서 주의 사자가 앞에 먼저 오고 그다음에 직접 여호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 그 순서를 이렇게 된다고 생각했죠.

세례요한은 구약 사람이다. 말라기의 말씀을 구약적 안목을 가지고 해석한 겁니다. “내가 왔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예수님 심판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인간치고 그렇게 생각 안 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면 세례요한이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들도 구약을 보면서 세례요한의 해석의 범위, 해석의 한계에 그대로 노출되고 그 안에 갇힐수 밖에 없어요.

자, 세례요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세례요한은 “나는 내 할 일 다 했으니까 주님이여, 이제는 하나님께서 조지기만 하시면 됩니다. 심판하시면 됩니다.” 이거였던 거에요. 나는 떡이나 먹으면 되니까. 이게 바로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재림을 생각하는 사람이 세례요한과 똑같은 사고방식, 똑같은 시간 의식을 가지고 이 성경과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거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말라기를 보면서 세례요한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한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모스 5장 20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와요. 여호와의 날. 여기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되어있잖아요. 바로 그날이에요. 그리고 말라기 4장,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놓고 “그날이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른다.” 그날, 여호와의 날이 말라기에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근데 아모스 5장 20절에,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의 날이 깜깜한 날이에요, 깜깜한 날.

자, 깜깜한 날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는 인간치고 누가봐도 해가 없는 날이에요. 해가 그동안 깜깜하지 않은 이유가 해가 있기 때문에 안 깜깜한 거에요. 그러면 해가 져버리면 이건 깜깜한 날이거든요. 하나님이 오시는 날은 깜깜한 날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 날 기다리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밤에만 오기 때문에. 왜? 낮에는 올 리가 없다 에요. 그럼 주님 기다리는 방식 중에서 하루 날을 반 토막 일단 떼고 갑시다. 왜? 해 뜨는 날은 무조건 안 와요.

밤중에 오시기 때문에. 그런데 요엘 2장 3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해가 없어서 깜깜한 게 아니고 해가 져서 해가 없고 달만 있어서 깜깜한 날이 아니라, 여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라고 되어있어요. 해는 있는데 햇빛이 빛이 날아가요. 빛이 없어져요. 그날이 여호와의 날이에요. “그날이 되거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다 알지를 못했던 그 세례요한이 무엇을 빠뜨렸는가? 하나님이 언약을 줄 때 어떤 자를 인간을 어떻게 규정해서 언약을 줬는가를 생각하는 것을 세례요한이나 이 구약 사람들은 빠뜨린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창세기 3장에 인간은 이미 파멸된 자, 흙으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마땅한 자에요. 흙으로 돌아가는게 마땅한데, 주님께서 이 세상은 애초부터 심판받아 마땅함을 이미 창세기부터 딱 정해 놓고 말라기의 이 말씀은요, 그때 그 실상을, 처음 창세기 3장 때 인간의 실상 그때 그 실상을 이제야 제대로 드러낼 그 순간을 고대하신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한 거에요.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 믿는 사람들 심판하는가 내 구경 좀 합시다.” 지금 이런 자세를 하면 안 돼요. “왜 그동안 하나님께서 무던히도 참았다.” 이렇게 돼야 돼요. 벌써 예수님 오시기 전에 2천 년 전 아브라함 때 심판 해도 아무 이상할 것도 없고 소돔과 고모라 불 심판 내릴 때 소돔과 고모라 말고 다른데 불 심판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요. 왜? 심판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측정할 게 없다니까요. 시간 측정할 게 없어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부터 먼저 오시고 그다음에 어떻게 오십니까?” 그걸 니가 물을 쨉이 안되는데요. 그걸 하나님한테 왜 물어요.

마치 심판을 안 받을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마음가짐을 가지면서 왜 그런 마음 자세가 잘못되었다 이 말이죠, 그런 마음 자세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이야기했어요. 문둥병, 귀머거리, 앉은뱅이, 죽은자. 그들은 심판받을 필요도 없이 이미 그들은 죽음의 흔적을 징후를 증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그러니까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이가 낫고 소경이 눈을 뜬다? 차라리 그 사람들이 심판 그 이후에 주님께서 표백, 그 죄를 씻어주고 그 죄를 깨끗하게 만드는 그 작업을 보여주는 그 징후를 주님께서는 앉은뱅이, 죽은 자, 문둥병자, 소경된 자를 통해서 보여준거에요.

세례요한은 옥에 갇혀 가지고 “한번 보자, 얼마나 작살 하는가 보자.” 이러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 작살 하나 안 하나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 심판이에요. 인간이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왜 없냐 이 말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세례요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깐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열두 제자한테 말을 해도 열두 제자들이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어요.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4절, 여기 열두 제자도 나오지만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가정도 나오거든요. 열두 제자 열 두명이죠. 거기다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3명 합하면 12 더하기 3 하면 15명.

15명이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요. 그럼 우리는 알아듣는가? 제가 요한복음 11장 3절 4절 말씀드릴 테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를 한번 여러분 알아듣는가 스스로 한번 보세요.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마르다 마리아죠. 자기 오빠가 시름시름 앓아가니까.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마르다 마리아가 통보받은 것은 뭐냐? 오빠가 안 죽는다는 식으로 통보받는 거에요. 죽을 병이 아니니까. 죽을 병이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이 이야기 한 거에요.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모르고 그 여동생과 제자들은 죽을 병이 아니니까 안 죽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뭐냐 하면, 이미 너희들은 죽어 있다는 거에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짓는가? 그것이 요한복음 11장 9절에서 10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다시 말해서 밤낮에 대해서 예수님께선 새로운 기준, 새로운 해석을 내립니다. 내가 빛으로 왔는데 내가 있으면 이거는 밤이든 낮이든 해가 있든 달이 뜨든 관계없이 그거는 낮이 되고 내가 없으면 그리고 내가 있더라도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면, 거기에 해가 뜨든 지든 그거는 밤에 있고 밤에 있는 자는 이미 죽은 자에요. 그래서 너희들이 정말 낮이 되는 빛이 되는 내 안에 있으면, 그 사람만이 산자가 돼요. 죽지 않아요. 죽을 병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다시 창세기 3장에 봅시다. 창세기 3장에서, 해가 뜨든 달이 뜨든 관계없이 인간은 이미 죽은 자에요. 그거는 흙으로 와서 흙으로 갔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고 인간치고 산자는 없어요. 그런데 그 죽은 세상에, 어두운 세상이거든요. 어두운 세상에 주께서 나타나게 되면 주께서 안 나타날 때는 “야, 낮이다. 우리는 살았다.” 하는데 주께서 세례요한을 따라서 나타나게 되면 분명히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 ‘우리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살아있다’는 개념. 해가 있으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라는 그 개념이 뭔가 점차 진짜 빛 되신 분이 접근하면 할수록 이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개념이 등장하는 거에요.

하, 이게 주님이 오실 때 어두운 게 아니고 이미 어두움에 우리가 놓여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구나라는 거에요, 어둠 속에 살고 있구나.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야기해요. “레위 언약이 있잖아. 레위 언약.” 레위 언약에서 양은, 흠없는 양이 죽었다는 말은 그만큼 이 세상이 처음부터 완전히 뒤집어졌고 거꾸로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죽은 인간이 살아있는 척하고 정말 죽을 이유도 없는 어린양은 죽고. 그런데 그것을 다른 민족은 몰라도 레위 언약을 받은 너희들 이스라엘만큼은 그걸 진작에 알았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걸 누가 알아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삼스럽게 뭘 하는 게 아니고, 이미 인간은 죽었고, 그 죽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레위 언약 안에 살아야 될 사람에게만 그 이야기를 통보하고 그들에게만 죄 사함을 주시는 거에요. 그들에게만. 레위 언약이 유효하도록. 레위 언약의 완성이 적용되도록. 그들에게만 알려줘요. 근데 뭐 세례요한도 못 알아 들었는데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몰라요. 근원적으로 내가 산 게 아니고 죽어있다는 것을 아는거에요. 죽어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거에요.

“아이고, 나는 산게 아니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거는 제대로 죽은 게 아닙니다. 언약의 입장에서 봐서 죽은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위 언약을 줬으면 레위 언약의 목표는 ‘그 레위 언약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 이게 목표가 아니고,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죽어야 될 우리가, 우리가 죽어야 돼. 누구처럼? 어린 양처럼. 이게 순서에요. 우리는 뭘 해도 우리의 행한 것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닌 것을 레위 언약의 어린 양의 죽음 속에서 그걸 발견했었어야 된다 이 말이죠. 뭘 해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천국 생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공급받는 생활이 천국 생활이에요.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되려면, 예수님 자신이 레위 언약을 뒤집어쓴 샘플이 되어야 돼요. 시범자가 돼야 돼요. 아무도 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천국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 없는 것으로 사는 생활이 천국 생활입니다. 다들 여러분 그렇게 살고 있죠? 여러분 돈으로 삽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에 있는 의와 인과 거룩으로 사는 겁니까? 웃지 마시고요.

이 세상에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 시장에서, 코스트코에서 팔지 않는 것. 육개장 그런 것 말고. 이 땅에 돈 주고 구입 안 하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내가 매일같이 살게 되는 그것. 그걸 성령이 주신 힘으로 산다는 거에요. 성령의 힘으로. 그럼 성령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성령은 예수님에게 나오죠. 예수님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레위 언약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나오는 거에요. 레위 언약과 예수님의 만남은 아무도 지킬 수 없는 레위 언약을 예수님이 지킴으로 그걸 가지고 십자가라 해요, 십자가. 십자가에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은 저주는 뭐냐? 지옥에서 받은 저주를 주님이 받았어요.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지옥가서 받을 그 저주를 예수님은 다 받았어요. 그래서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요. 저주부터 먼저 받고 난 뒤에 그다음에 죄 씻음이 있어요. 세례요한의 순서와 어떤 차이가 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례요한은 뭐냐? 세례요한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니까, 세례 요한 같이 그 길에 드는 사람은 일단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면제되겠지.” 이게 세례요한의 생각이었던 거에요. 친절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는데, 바리새인들은 엉터리로 기다리고, 우리는 기다리는데 주께서 오실 때 어떤 방법으로 오는가를 우리는 학수고대하면서 그걸 익혀가지고 그 식대로 우리가 기다린다. 이게 세례요한 방식이에요.

근데 세례요한 하나님의 방식이 뭐냐? “물세례 받아라” 이거였거든요. 그래서 “옳지. 물세례 받는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면제가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누가? 세례요한과 세례요한 물세례 받은 전부가. 우리만 구원 된다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만. 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물세례 받았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뭐냐? 물세례 받은 사람 말고 나머지 작살 내는 것.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작살 내는 것. 이게 이래야 세례요한 본인과 메시아가 죽이 맞다 이 말이죠.

아무 소식이 없어요. 아무 소식이 없다고요. 문둥병은 나았고, 왜 나아요? 문둥병은 세례요한 물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앉은뱅이가 낫고. 그러니까 물세례 받은 것은 이것은 헛 짓한 거에요? 세례요한이 자기 물세례에 예수님이 같이 뛰어든 사실에 그 의미를 지금 세례요한이 함께 고려하지 않고 있어요. 세례요한의 물세례에 주님이 뛰어들었거든요. 들었을 때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고 이렇게 했어요. 세례요한 하는 말이, “주님은 여기에 뛰어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빼 드릴게요. 특별히 빼 드릴게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죄 많은 우리나 들어 가지 주님은 죄도 없는데 왜 들어왔습니까?” 이게 아직도 시간적 순서를 그렇게 세례요한은 먼저 내가 길 잡고 그 다음에 심판 작살 낸다. 이런 순서를 한 거에요.

세례요한 머릿속에 구원자가 먼저 저주받는다는 개념이 없는 거에요, 구원자가. 저주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을 해요. 왜?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받은 그 저주를 우리에게 줄 때 그게 복이고 그게 구원이에요. 왜?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제대로 죽는 이유를 안 적이 없어요. 그걸 우리는 모르고 있는 거에요.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를 모르는 거에요. 예수님이 물세례 받을 때에 차별화된 현상이 일어났어요. 예수님만 받고 다른 사람은 세례요한도 못 받은게 있어요. 그게 뭐냐? 성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아버지께서 왜 예수님께만 성령을 줬는가?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강조해요. 선악과 따먹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망했다. 그런데 뭐를 빼 먹으면 안 되는가? 그 현장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인간보다 센 악마가 그 현장에 있었어요, 악마가. 악마가 그 현장에 있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하고 상대하겠습니까? 악마하고 상대하겠습니까? 이미 인간은 악마한테 매여있어요. 따라서 인간의 어떤 행위, 어떤 노력도 주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상대할 대상도 아닙니다. 레위 언약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마침내 인간이 꼼짝 못 하는 그 시대가 온다는 거에요. 인간이 꼼짝 못 하는 시대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도 인간은 마귀한테 잡혀서 꼼짝 못 해요. 근데 그 꼼짝 못 하는데 꼼짝 못 하게 된 그 연유, 그런 구조, 그런 조건, 시스템, 그 실상, 그렇게 꼼짝 못 하는 그 이유, 어떤 조건으로 우리가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못살고, 왜 자꾸 못살고 어둠에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가? 문제는 악마였어요. 악마가 우리를 쥐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악마를 상대할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홀로 이미 레위 언약이 주어지는 그 저주를 홀로 다 뒤집어 쓴거에요,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뒤집어 쓰면서 뒤집어썼던 그 결과에 대해서 세례요한에게 뒤집어썼다는 차원에서 다시 보니까 문둥병이가 낫고 앉은뱅이가 걷는 거에요. 귀머거리가 듣는 거에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 우리 같이 마지막 심판을 화려하게 장식합시다.” 이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하고 상대 안 해. 이 언약의 완성은 아버지가 직접 나하고 상대하는 거야.”라고 해서, 인간이 언약을 지킨다든지 인간이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그 노선 있지요. 그 노선에서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이탈 해버린거에요. 인간이 뭘 기다려? 뭘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자기 인생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 사는데 뭘 기다려요?

주께서 심판을 받은 그것으로 완성을 했거든요. 다윗 언약을 하시고 그다음에, 심판과 심판의 일종이 뭐냐? 표백이에요. 표백이라는 것은 탈색, 우리의 옷을 벗겨내는,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를 상실시키는 겁니다. “뭔가 내 쪽에서 뭐를 하면 되겠지”라는 것을 그걸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 내는거에요. 허물을 벗기는 거에요. 살았다는 허물을 벗겨버리면, 우리 안에 흙 들어 있습니다. 흙이 뭘 할 수 있어요, 흙이. 손님이 왔으면 뭘 좀 치우든지 해야 되는데 손님 와도 치우지도 않아요. 누구 들어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손님 와도 안 치워요.

시아버지가 와도 시어머니가 와도 치우지도 않아요. 그러려니 하고, 치워 본들 뭐. 누가 와도 안 치운다는 말은 그만큼 평소에 자기가 상실되었다는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성령 받은 모습을 보인다는 이런 뜻이에요. 치우지 않는 집구석에 그냥 눕든지 자든지 마음대로 해요. 어떤 70 된 할아버지가 수박을 한 덩어리 사서 집에 갔다 이 말이죠. 수박을 딱 집에서 먹어보니까 이게 덜 익었어요. 맛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수박 사러 간 그 상인한테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따졌습니다. “내 수박 물어내.”라고. 그래서 상인은 말하길 “제가 판 수박 아닙니다.” “니가 수박 이만큼 많은데 니가 니 수박 어떻게 아냐? 거짓말하지 마라.” “아닙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장사도 못하고 그 노인하고 시달렸거든요.

근데 그 근처에서 하필 CCTV가 있었어요, CCTV가. CCTV가 있어서 경찰을 불러서 CCTV 까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치매 끼가 있는지 다른 집에서 수박 사놓고 그 집에가서 한 시간 반 동안 시비를 걸었으니까 한 시간 반 동안 장사 못한 손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할아버지는 자기 상실이 안 됐어요. 자기 상실이 안 됐습니다. 수박을, 기어이 내 돈 주고 산 수박을 내가 사야 내 인생에서 편하고 불편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왜 이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내 인생이 불편할 때 성경 보겠다는 거에요, 불편할 때.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왜? 나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내가 판단하니까. 나는 누가 메시아고 누가 메시아가 아닌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지켰다 안 지켰다를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내 나름대로의 성경 보는데 지장이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다 피해가는 거에요. 죽은 인간이 그런 소리하는 것 주께서 인정 안해줍니다. 뭐 마지막 재림할 때 깜깜하다고? 지금이 깜깜해요, 지금이. 실제로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께선 먼저 모든 요엘서나 아모스에 깜깜함, 그것을 일시적이나마 자연현상을 통해 보여줬어요. 마태복음 27장 45절에 보면,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주께서 십자가 질 때 어둠이 임했어요. 그 십자가 사건은 모든 말씀이 거기에 응축되면서 인간이 해내지 못한 것, 악마를 상대로 주님만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저주를 받음으로써 해낸다는 거에요.

어느 인간이 저주를 받아내고 저주에서 벗어날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지 잘난 체만 하죠. 거기 또 51절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그런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주의 날에, 구약에서 예언했던 주의 날에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난 거에요. 따라서 그렇게 해서 주께서 불로 심판한다는 말은 이 불은 저주거든요. 그 저주를 예수님이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입니다. 잘 들으세요. 예수님이 받았기 때문에 레위 언약대로 다 이룬거에요.

그 불의 저주, 레위 언약에 보면 재단에 불붙잖아요. 희생제물에 불붙잖아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에요. 그 밑에 불이 있어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어요. 언약대로 저주를 받았다 이 말이죠. 받았으면 그다음에 그것이 또 하나의 인간이 생각하는 노선 말고 다른 노선이 따로 생성돼요, 따로.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지가 스스로 자기를 제작하는데, 주님은 제작이 아니고 창조에요. 언약이 자궁이고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이 자궁이고 거기서 새로운 피조물을 잉태하는 거에요. 없는 것을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있는 내가 성경 보고 표백하고 성경 보고 회개하고 이렇게 해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 아닙니다.

새롭게 만들어내요, 성령이 와서. 만들어낸다고요. 만들어내게 되면 언약에 의해서 불로서 만들어낸 그 언약 완성을 그다음부터는 피로서 우리의 죄를 표백해줘요. 예수님의 피로서. 불로서 심판하고 피로서 표백하고. 그래서 거기서 피가 묻힌 새로운 피조물이 예수님의 레위 언약의 완성자 안에서 새롭게 잉태되어 탄생합니다. 이 땅에서 교인들이 성경 보고 연구해서 자기 자신을 갈고 닦고 성화하고 이게 아니에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요.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냐 어떻게 아느냐? 세례요한 같은 그런 오해하지 마시고 십자가에서 다시 생각하는거에요, 십자가에서.

그 열두 제자, 나사로, 죽고 난 뒤에 새로 알았잖아요. 열두 제자가 십자가 지고 성령 받고 난 뒤에 다시 십자가의 의미가,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뭔지를 그제서야 아는 거에요. 다 이룬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니까 그게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는 것을 드러내니까 그다음부터는 뭐냐? 그다음부터는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없는 그 용서와 사랑, 믿음과 소망, 주께서 선물로 주고 주께서 공급하시는 그 성령의 은사로 살아가는 사람, 이게 이미 시작된 천국 생활이에요. 손님이 오든 말든, “내가 집을 왜 치워?”

나는 그저 용서받은 기쁨으로 모든 걸 용납받은 기쁨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 해놓으신 그 선물 안에서 이미 천국 생활은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한테, 다른 노선에 속한 사람한테는 뭐가 되느냐? 심판이 돼요. 불같은 심판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십자가의 영으로 다시 새롭게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아무것도 예상치도 못하고 해내지 못한 것을 주께서 레위 언약을 다 이루어서 그 흘린 피로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시니 이것으로 충분함을 깨닫는 기쁨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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