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족
2024년 7월 31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3-14
(2: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2: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이스라엘 아내와 혼인한 자가 그 여자를 버리고 이방 여인과 혼인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의 혼인은 사적인 인생의 행복을 얻고자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이 우선이 되면 안되고 하나님의 언약이 작렬하는 그 현실성을 드러내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 여자는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 없다는 말은 개인적인 행복 추구보다 앞서서 존재하는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언약이 있다는 말은 개인의 인생이 개인의 의사 결정으로 결정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언약이 없는 혼인을 하게되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 의사를 표출한 바가 됩니다.
말라기 2: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한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가정 형식’으로 기획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기존의 인간들의 가정을 하늘나라에서는 그 자체로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 가정을 버리고 가족 형식으로 구성된 그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혼인에 대한 의지는 인간 육신의 본능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즉 혈육적 근성이 가족을 낳는 겁니다. 인간 본성은 감히 인간의 의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육신이 품고 있는 성적인 요구는 자아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천국 구성 요건은 단호합니다. 마태복음 19:12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여기서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가 있다는 말은 천국은 ‘고자들만 받는 세계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의 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혼인은 참으로 인간들의 마땅한 권리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권리’가 아니라 ‘악을 품은 본성’입니다. 마태복음 12:46-50에 보면, 제자들의 견해와 예수님의 견해가 평소에 얼마나 차이나는 지를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천국 가족의 구성원의 본질’을 알려주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늘나라의 요구에 충족시킬 자들이 있을까요? 기존 가정을 파탄낼까요?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완전한 가정’을 갖추려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내면에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음행에 대한 충동이 누구나 다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바로 인간 내면의 실체를 사회적으로 드러낸 제도입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 7:1-3)
말라기에서 이미 유대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대상체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내면적 음행은 다름이 아니라 언약의 중요성보다 자기 육신의 본능에 충실하는 그 자체입니다. 즉 언약의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적 행복에 대한 추구가 최우선적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유대민족의 혼인 문제를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레위언약이란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그 실내용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란 쉬지 않고 희생제물의 죽음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의 살려주심과 용서하심이 주어지는 제도입니다.
이 일을 직접 관여해서 담당해야 하는 레위지파나 제사장들은 그 제물의 죽음 속으로 합류하기에 자신들은 이미 죽은 자로 여겨서 그 제사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입니다. 봉사는 더는 자신의 사적인 기대나 욕망을 위하여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들에게 하나님의 본 뜻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레위언약 안의 내용입니다. 사람의 근본 마음가짐은,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려내려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기본에요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덧붙이기 위해서 타인으로부터 보호와 관심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이점이 레위지파가 갖추어 될 마음 가짐과 대치됩니다. 전도서 7:1-2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언약의 권능이 천국 갈 사람들의 마음을 고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일이 언약의 지적을 통해서 ‘나의 본심은 하나님을 가리는 짓을 하게 되는구나’를 알게 만드시는 겁니다. 혼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7:25, 26에 보면, “처녀는 …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38-40에 보면,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하나 하지 않으나 상관없이 사적인 행복 추구보다 언약의 지적이 우선이 되어서 모든 성도는 ‘천국을 위한 고자’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 성공보다 언약 작용이 진정한 성공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말라기 2장 13-14절(하나님의 가족) 240731 -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3절에서 14절 까지입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아멘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아내와 이혼하고 믿지 않는 여자, 이방 여자와 혼인한 것에 대해서 지금 하나님께서 문제 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문제를 자신이 얼마나 결혼 생활이 행복해질 것인가, 내 남은 인생이 얼마나 즐거워질 것인가를 기준으로 두고 사람들은 혼인에 대해 생각했던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뒷전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내가 선택한 사항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정한 것인 데에 비해서, 내 결혼 문제는 나의 행복과 직결되어서 행복한 결혼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내 마음에 드는 가정, 내 마음에 드는 아내를 골라서 내 나름대로 혼인 생활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내면에 있는 자기 행복 위주의 미래 계획까지 들추어내는 식으로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 그것을 그 당시 유대민족은 미처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뭐 별 탈 없으면 안 지켜도 된다는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말로 이해했느냐 하면은 남들이 나한테, 다른 사람이 나한테 잔소리하는 그러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가 남이 나한테 잔소리하거나 지적할 때 꼭 다 들을 필요는 없잖아요. 마음이 약해 가지고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직장에서 그렇게 할 필요 없잖아요. 자칫하면 본인이 못 견딜 수가 있단 말이죠. 힘들 수가 있고요.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은 어디서 찾아요? 안 되겠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한테 뭔가 요구하고, 기대하더라도 최종 판단은 내 쪽에서 내가 책임지고 내리겠다는 생각이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행복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내 결정이 가미되는 조건 하에 나는 행복해질 것이라는 거예요.
더 함축해서 말하면, 나의 행복의 요소 중 하나가 ‘어떤 일이든 최종 결정은 내가 내린다.’ 이게 내가 존재 하고 있다는 행복의 필수 토대가 되는 겁니다. 남들과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내가 나한테 가치가 있고, 아직 살 만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최종 결정을 내가 내리기 때문에 나의 가치는 유효하고, 나는 그것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살맛이 난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인간들끼리의 이러한 버릇, 습관이 누구와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할 때도 자기 본성을 그대로 다 노출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좋지요. 하지만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내가 결정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결정 할 때 결정하는 근거는 뭐냐?
내가 저 여자와 혼인하게 되면, 저 여자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흔히 말해서 “저 여자 없이는 나 못 살겠다.” “나는 저 여자 만나고 난 뒤에 인생이 달라졌어.” 그게 앞서 버리면,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복음을 알든 모르든 그것은 내 행복에 중차대한 필수 조건은 안되는 걸로 되는 거예요.
여기서 참고로 말해서 교회 다니는 여자가 언약을 아는 여자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그 점은 명심해주셔야 됩니다. 교회에 충성한다고 복음을 아는 여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여인,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레위 언약을 아는 여인을 두고 이야기 합니다. 레위 언약.
계속 말라기에서 레위 언약을 위주로 나가니까요. 레위 언약을 안다는 말은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지? 제사 지내는 일과 자기의 현 존재와 자기의 장래와 미래까지 절대로 끊어지면 안 되고, 모든 결정은 레위인들이 드리는 그 제사에 의해서 나의 미래는 확정된다. 그러한 관련성의 노선에 서 있어야 우리가 레위 언약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약간 더 보충해서 말씀드린다면, 이스라엘 약속의 땅에 열 세 지파가 들어가는데, 그 열 세 지파에서 한 지파, 레위 지파는 독특하게 어떤 초월성을 갖게 돼요. 초월성을 갖는 대신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자기만의 소유의 땅은 허락받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개간해서 사는 땅은 허락받지를 못해요.
그들이 허락받는 땅은 하나님의 제사와 관련된 도피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열 두 지파와 다릅니다. 상속될 기업의 땅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땅 없이는 못 살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흙에서 나왔거든요. 흙에서 나온 것이 흙에서 노동해서, 힘들지만 노동해서 어떤 수확물이 있어야 밥이라도 먹고 산다 이 말이죠.
그런데 레위 지파에게 땅이 없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특별히 이 지상에서 이미 죽은 존재로 지정해 놓은 거예요. 죽은 존재로 지정했는데, 그들이 안 죽어요. 안 죽는 이유가 제사를 드렸다는 그 일 때문에, 다른 열 두 지파가 ‘계속 제사가 끊어지지 않고 있게 해주세요.’ 라고 해서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해서 그들의 양식을 대줬기 때문에 그들은 제사직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레위 언약을 추진하는 거기에 종사하는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게 하고, 이어져 나가게 하는 하나의 모터, 엔진, 에너지,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위치에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레위 언약을 안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내 직장이나 내 업무에 아무리 열심히 종사해서 그걸 직장에서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내게는 말씀이 실제로 생명을 생성시키고, 생명을 생산하는 그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아도 생명 없는, 지옥 가는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될 존재다.” 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에요. 레위 지파의 언약을 아는 사람은.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내가 아무리 오래 산들 그것은 저줏거리만 계속 더욱 확산시킬 뿐인데,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주는 그 작업과 우리가 한 이스라엘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점이 너무 고마워.” 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레위 언약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나는 죽었고,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걸 전제로 해서 제사에서 나오는 그 피의 권능, 죄 사함의 피를 자기와 연관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뭐가 행복이고, 뭐가 축복이고 뭐가 소중하냐 하면은, “내가 이쁜 아내, 내 마음에 드는 여자와 혼인해서 나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래.” 이것은 레위 언약에 준해서 실시되는 레위 지파의 행함 앞에서는 무의미가 된다는 거예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언약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제사장들도 이건 뭐 형식적으로 되었고, 제사장이 형식적으로 됐다면, 나머지 열 두 지파, 유다 지파지만, 베냐민 지파, 유다 지파 있지만, 또 다른 지파들도 많이 섞여 있어요.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유다 민족이 건성건성으로 그냥 이제는 말씀도 안 고맙고, 레위 지파의 제사도 제사장부터가 안 고마워해요.
그러니까 뭐 다른 지파는 “제사장 그딴 게 뭐 필요한대? 나 혼자 땅에서 밥 먹고 살면 그걸로 족해. 그래도 아무 탈 없어, 사는 데 지장 없어.” 이렇게 하니까 말라기 3장에서 다른 지파에서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내지를 않았던 거예요. 답답한 게 없으니까. 십일조 내지 않는 과정을 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처음에는 수입의 십일조를 내다가 좀 부대낀다 싶으면 15분의 1을 내다가, 또 부대낀다 싶으면 20분의 1로 내다가, 좀 부대낀다 싶으면 한 100분의 1 내다가, 좀 부대낀다 싶으면 천 원만 내는 거예요, 점심값만 내는 거예요. 그것도 부대낀다 싶으면 교회 안 나와요. 왜냐하면 아쉬운 게 없으니까요.
십일조 한 덕분에 밥 먹고 산다는 생각은 한참 순진무구한, 진짜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교회 오래 다니면 깨닫게 되는 거예요. 내가 돈 벌어 밥 먹고 사는 것하고,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것하고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 십일조 내는 족족 그건 허비되는 돈이라는 인식,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십일조 할 때는 믿음이 좋았느냐?
십일조 하는 믿음이 더 얍삽한 믿음이에요. 제가 힘들여 일해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십일조 해서 ‘돈 놓고 돈 먹기’. 십일조는 만원 했는데, 성경에 보니까 30배, 60배, 100배, 뭐 로또 아파트 당첨입니까? 만원 십일조 했는데 30배? 계산 딱 나오잖아요. 30만원. 60배? 만원 헌금했는데 60만원, 100배? 만원 헌금했는데 100만원, 직장 생활보다 훨씬, 보너스보다 훨씬 좋거든요.
그렇게 기대하고 해 보다가, 만원 헌금 했는데 100만원이 안 들어오네요? 만원만 날렸어요. 만원만 날리는 게 아니죠. 집에 더 우환이 생겨서 마이너스 100만원 됐을 때에 화딱지 나가지고 “에이, 나 만원도 안 한다.” 이렇게 됩니다. 역시 사는 것은 내 힘으로 내가 알아서, 내 돈 관리 내가 알아서 해야 되지, 재정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아주 현명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고마워 해야돼요. 왜냐 하면, 구약의 율법은, 십일조를 비롯해서 구약의 레위 지파가 드린 제사법은 우리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지적 없이는 언약 세계 속에 못 들어와요, 지적이 없이는.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면서 본인이 돈을 하나님의 언약보다, 하나님의 용서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남 보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그렇게 조작하면서, 연출하면서 살아가요.
그럴 때에 하나님의 제사, 레위 언약이 우리에게 깊숙이 치고 들어옵니다. “너는 언약 싫지, 그치? 너는 말씀이 싫지, 그치? 말씀이 안 좋지, 그치? 신명기 8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라는 그 말이 시큰둥하지, 그치? ‘나는 내 돈보다 말씀을 사랑합니다.’ 라는 결심, 항상 결심은 내가 하니까, 그렇게 결심을 했건만, 나오는 그 결과가 기대한 결과가 안 나오니까 삐졌지, 그치?“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삐지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삐지게 하기 위해서. 오늘 말라기 시대는 한참 삐졌어요. “내가 원하는, 내가 살고 싶은 여자와 혼인해야 되지, 그게 일차적인 요건이지, 그 언약이 뭐라고, 언약까지 고려해가지고 장가 언제 가고, 시집 언제 가는대요? 나이 60 넘어서 시집 갈까요? 80 넘어서 장가갈까요? 세월만 가는데요.”
그렇게 대꾸하는 자에게 주께서 준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겁니다. “고자 되어라!” 주의 말씀은 정말 단호해요. 네가 고자 될 의사 없지, 그치? 고자 되어라. 이것은 마태복음 19장 12절의 말씀이거든요.“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11)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12)”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 다시 말해서 고자 된 자가 천국 간다는 말은 천국은 고자 된 자만 찾는다는 뜻이에요.
고자라는 것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사도바울의 편지 속에 확대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1절, 2절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사도바울이 혼인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중요한 말을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 속에는 음행에 대한 소질을,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고자가 되라고 하는데 아무리 고자 되라는 명령을, 잔소리를, 지적을 해도 우리는 고자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속에 있는 음행에 대한 본성이 우리가 고자 되기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성적 욕망은 있고, 주님은 고자 되기를 원하고, 이건 뭐 결국은 우리의 욕망은 내 자아가 못 이겨요.
못 이기니까 주님께서 고자를 만드는 방법은 혼인을 시켜서 고자를 만드는 겁니다. 애 낳을 거 다 낳고, 거기다 쌍둥이까지 낳고, 고자를 만들어요. 애 일곱 낳고 고자를 만들어 버려요. 애 일곱 낳았는데 그게 어떻게 고자가 되느냐? 그게 바로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12장 46절에서 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예수님의 가족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따로 있고요, 인간이 추구하는 가족도 따로 있는데, 인간이 추구하는 가족과 예수님의 가족 사이에 레위 언약이 작동하는 거예요, 레위 언약이. 레위 언약이 작동해야 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 속에는 성적인 욕망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뛰어넘어 더 강하게 작렬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말라기에 나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지적하게 되는 겁니다.
지적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율법이, 언약이 찾아와서 ‘드르륵’ 드릴로 마음에 신앙인 것처럼 되는 것, 종교인 것처럼 되는 것, 말씀 다 지킨다고 여기는 그 가짜 껍데기, 껍질 부분을 다 뜯어내요. 다 뜯어내면 남는 게 뭐냐? 너는 여자를 볼 때, 언약을 아냐, 모르느냐 그런 것은 솔직하게 말해서 관심도 없고 첫째도 이쁘고, 둘째도 이쁘고, 셋째도 이쁜 것, 여자 같으면, 첫째도 잘 생기고, 둘째도 잘 생기고, 셋째도 잘 생기고, 멋있고, 그걸 매력이라 합니다.
뭐, 제 눈에 잘 생겼죠. 하지만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눈에 빨려들어가는 매력 덩어리, 이것은 내 속의 욕망이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고린도전서까지 오게 되면, 결혼이 뭐냐? 하나님께서 고자 만들기 위해서 주신 새로운 환경이 결혼입니다, 결혼식입니다. 이제 결혼 해놓고 또 복음의 지적은 본격적으로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고린도전서 7장 25, 26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리고 38절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의 가족, 예수님의 패밀리,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천국을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족이라는, 가족 구성이라는 그 기획, 새로운 가족 만들기의 기획을 천국이라고 간주했을 때, 무엇이 천국 입성을 가로막는지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욕에 대한 욕망을 충만케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과 성욕이 충만한 우리 자체를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는 거예요, 만남이.
그러니까 여기 고린도전서 7장 1, 2절에서는 (혼인한)본인을 두고 이야기했는데, 2절에서 음행의 연고로 혼인은 했습니다. 혼인을 했으면 누가 나오죠? 자식이 나오지요. 자식이 나오면 가정이 이루어지거든요. 부부도 가정이지만, 자식이 나오면 가정이 더욱더 풍성해지잖아요. 그럴 때 딸 자식, 아들도 마찬가지고, 딸 자식을 시집을 보낼까, 말까에 대해서 부모인 네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라면, 네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구성하는 가정은 어떤 식으로 구성할 것인가를 네가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거예요, 네가.
말라기 2장 10절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이렇게 해서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가정 단위를 unit, 가정 unit를 제시하면서 언약의 나라를 그런 식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계시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고, 자식이라는 것은 말라기 2장 15절에 나옵니다.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경건한 자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획된 뜻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모방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도 가정을 꾸미게 하는 거예요.
가정을 꾸미게 하면서 그 가정을 꾸민 상태에서 레위 언약의 지적을 지속적으로 가정 단위로, 내 가정, 내 행복한 내 가정, 내 뜻대로 만드는 가정, 가정을 향하여 계속해서 말씀이 포격을 가하고 거기다가 집중 지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차피 성욕은 이길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결혼했다는 것은 잘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도 결혼해 보니까 잘한 게 아니지, 그치?” 이렇게 묻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가정이 없으면, 우리는 내 행복을 위해서 가정을 이룬 것을 참 잘한 일이고, 결정이라고 생각할텐데, 지금 예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침투해가지고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이냐? 너희 육신의 아버지, 대대로 이어오는 아버지 그 가정 말고, 그 가정 노선 말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 있고, 나(예수님) 아들 있는 내 가정을 따로 꾸릴 계획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 안 들어올래?” 이러시는 거예요.
“그 천국 싫어? 거기 들어오기 싫어? 그냥 네가 결정한 이 세상적인 가정, 그걸로 인생 승부 걸래? 쇼부 걸거야?”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이 가정 버리고 어떻게 고자 되어 가지고 천국의 가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한탄하면서 물으면, “기다려봐, 레위 언약이 침투할 거니까.” 레위 언약이 침투한다는 거예요. 경건한 자식을 위해서.
그럼 레위 언약이 도대체 뭔데 그것이 침투해서 우리가 내 가정 위주로 살다가,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천국을 위해서 고자 된 자가 바로 성도 자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깨닫게 되는가? 그것은 레위 언약에 종사하는 레위인들이 봉사직입니다, 봉사직. 섬기는 직이에요. 봉사직의 특징은 뭐냐 이미 자신이 죽음의 세계에 놓여있음을 알 때, 그 때 순수한 봉사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챙길 내가 없기 때문에. 챙길 내가 없어요. 내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가 하는 일 내가 안 받을 거야.”라고 작정하시고 확정된 그 자리와 신분을 내가 기꺼이 수용하는 상태가 죽음의 상태예요. 죽었는데 왜 살았습니까? 봉사하라고요, 봉사.
그러면 이 레위 언약 안에 있는 제사장들이 먼저 시범을 보이고 있는데 그러면 일반 사람들, 레위 언약과 멀어진 일반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뭐냐? 그들이 원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고, 위로받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인간은 숨을 쉬는 한 뭔가를 해요. 뭔가를 한다고요.
잠을 자든, 놀든, 일을 하든, 농사를 짓든, 스포츠 관람을 하든, 시청을 하든 하여튼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않고 뭔가를 해요. 가만히 있어도 상상을 해요. 뭔가를 해요. 그런데 인간이 내뱉는 모든 일이 이상하게 자기를 지우는 일이 아니에요.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해요. 자꾸 무언가를 한다고요.
자기를 지우지 않으니까, 인간이 뭔가를 하는 그 일이 주께서 쉬지 않고 뭔가 하는 그 일을 교묘하게 계속 흐릿하게 가리게 되는 겁니다. 가려 버려요. 전도서 7장 1장에서 4절까지 보면, “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 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잔치집은 결혼식, 돌잔치 이런 거죠.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거기다가 마음 둬 봐라 이 말이죠.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파티하는 집에 있느니라(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하하 웃고 술 따르고 즐기는 거기에 있느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전도서 말씀이고, 이게 언약 안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이번 수련회 첫 번째 강의에도 얘기했지만, 하는 모든 일이 의미를 생산하고, 그 의미를 자기한테 회수하기 위해서, 회수하는 그 재미로 사람들은 뭔가를 해요. “사람들아, 보라. 내가 어떻게 성공하는지, 내가 어떻게 승리하는지 보라.” 이게 인간들의 생각이고요.
레위 언약에 충실한 레위 지파가 해야 될 일은, 제사장들이 해야 될 일은 이렇습니다. “열 두 지파여, 우리 하나님 믿는 모든 백성들이여, 우리를 보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건전해서 내가 내 하는 일이 어떻게 내 자신에게서 나온 일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서 주님의 성공만 표현하게 되는 지를 보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 이 고자라는 것이 인간의 생식기 기능의 장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인간 자아 자체가 천국에서 이미 끊어진 자아라는 것을 늘 새삼스럽게 새로이 새롭게 새롭게 느끼게 하는, 느끼는 그 즐거움, 내 자신을 제대로 “내 자신이 고자라도 마땅해.” 라는 그 자신을 아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천국을 위해서 고자 된 사람이에요.
그 끊어진 자리에 뭐가 들어가느냐? 언약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간단한 공식이 나와요. 마음 속에 성욕이 있다고? 음욕을 못 참겠다고? 저기 여자가 있다고? 저기 남자가 있다고? 이렇게 보잖아요. 아니, 저기 여자가 있는 게 아니고, 여기 남자가 있는 게 아니에요. 저기 흙이 있죠. 여자처럼 생겼는데 흙이에요. 저건 남자처럼 생겼는데 흙이에요.
흙의 특징은 언약에서 끊어진 겁니다. 언약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성욕이나 음행은 언약 버리고 “야, 흙이다, 나도 흙인데 우리 둘이 결혼해서 흙 가정 만드세. 저주의 가정 만들어 봅세. 그렇게 하세.” 이게 결혼식이에요, 이게 결혼식입니다. 남자같이 생긴 흙과 여자 같이 생긴 흙이 둘이 만나서 또 하나의 흙이라는 자식을 낳고, 흙집에 살면서 흙이라는 땅 위에서 천년 만년 살겠다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이러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언약이 빠져버린 저주받은 인간의 본모습이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돌아가는 현실은 레위 언약 그대로입니다. 레위 언약, 다시 말해서 어린 양의 죽음의 제사의 효력과 관련 없이 살아가는 이 지옥을 너희들이 목격하고, 그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왜 제사, 왜 근원적인 죄 자체를 해결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피가 제사라는 형식으로 왜 굳이 꼭 필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불신자와 더불어 같이 사는 겁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추구하는 게 뭐냐? 가정의 행복이죠. 가족입니다. 가족은 혈통 근성의 확장이에요. 육신 근성의, 도무지 멈출 수 없는, 멈추지 못하는 육신 근성의 확산과 그 구체화가 가정입니다.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7장 38절 다시 읽으면,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잘했다는 말은 훌륭하게 했다는 말이 아니고 시집을 가봐야 아, 결혼 자체가 예수 믿는 것을 훼방하는 그런 한 환경이구나 라는 것을 지적받는 식으로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잘했지만, 차라리 그것보다도 “시집가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애 안 낳으면 이 국가의 장래는? 0.74명 한 명도 안 되는 출산률 가지고 아, 대한민국의 장래는? 전 국민이 신자화 되어서 애를 안 낳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천국을 위하여 고자 된 자는 이건 인간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레위 언약의 침투에 의해서 생긴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레위 언약이 오늘날 침투하게 되면 우리는 봉사하게 되는 거죠.
어떤 봉사? 제사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가 결혼해서 애 낳고 직장 생활하는 이 모든 것이 그걸 하지 말라가 아니라, 결혼도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고, 결혼하면서 내가 지워지는 찬스,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부정당해야 마땅한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어도 마땅함을 지적받고 발견하는 하루하루, 그러한 생애를 보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과 결별되는, 나 자신과도 결별되는 고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패밀리, 주님의 나라에 합류하도록 주께서 능력을 우리에게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결심해서 구원 못 받아요. 볼펜을 써보면, 저만 발견한 게 아닌데, 제가 유독 그걸 느껴요. 볼펜을 종이에다가 쓰면 글씨가 오래 가요. 그런데 볼펜 쓰다가 손에다가 쓰게 되면, 손에 쓴 글씨는 제가 걱정을 안해요. 세포가 늘 분열하면서 바뀌게 되니까, 그 세포가 죽으면서 그 위에 있는 볼펜 자국도 같이 죽어요. 이게 생명입니다.
생명 있는 자는 그 위에 하나님의 언약 작용에 의해서 자기가 지었던 죄가 자기가 지워지면서 같이 지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이 침투되지 않고 흙으로 된 사람은 본인 자체가 언약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자기 기억, 자기 결정, 자기 결단, 여기에 자기 과거의 행적이 안 사라지고 남아 있으니까 맨날 뭐냐 하면 “내가 너를 잘못 만났어. 너하고 결혼한 게 일생일대의 실수였어.” 자기 기억이 계속 자기라는 종이에 남아 있어요. 남 탓하고 있다고요, 남 탓.
이 말은 뭐냐 하면, “끝까지 내 인생 안 다치게, 실패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를 지킬거야. 나를 지킬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자기를 어떻게 지울까를 생각 안하고, 굳이 “꼭 성공할거야. 나 지키는데 성공할거야. 그 일환으로 주의 말씀 들을래.” 그게 뭡니까? 주님의 지적이 없으니까 자기 마음 속에 내가 나 지키는 것이 멀쩡해놓고 그냥 폼 내는 식으로 종이에 볼펜으로 쓰듯이 자기 위에다가 말씀 걸친다고 해서 그게 말씀의 위력입니까? 아니지요.
우선순위가 자기 행복 지키는 건대요, 내 것 지키는 건대요. 그러니까 뭐가 없습니까? 봉사가 없는 거예요. 십일조고 뭐고, 전부 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 내는 건데, 그런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내 행복, 내 몸 편한 게 최고거든요. 가족들의 특징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끼리 모이는 것이 그렇게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히브리서 10장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더욱 자주자주 모이자. 어떤 사람에게 되느냐? 자기가 이미 죽었고 자기는 봉사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 그 봉사는 자기가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와서 십자가의 그 살과 피, 새언약이 와서 우리를 항상 부정하는 식으로 ‘너 자신을 위해서 지킬 게 이제는 없다, 너는 이미 죽은 자다.’ 하는 것을 늘 되새길 때 내가 나를 못 지우니까 나를 지울 수 있는 그 말씀이 있는 곳으로 자주 듣기를 원하고, 모이기를 힘쓰자는 그런 뜻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주님과 혼인한, 우리 전체가 언약이 있기에 언약 있는 남편, 주님과 결혼한 언약 있는 신부로서 주께서 친히 말씀과 언약으로 우리를 지금도 살려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삶의 기쁨과 감사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내 자신이 멀쩡하고 근사할 때 기뻐하는 우리, 그렇게 해서 십자가의 희생을 가려 버리는 그 짓을 주께서 세세히 살피사 그때마다 말씀으로 지적해주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과 한 가족 되었음을 기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