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끊쳐짐

아빠와 함께 2024. 7. 24. 22:29

끊쳐짐 

2024년 7월 24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0-12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2:11)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2: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여러 민족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민족인 이스라엘 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언약 노선을 지켜내어야 할 유일한 민족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유대 민족이 이방신의 딸과 혼인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의 조치는 단호하십니다. ‘야곱의 장막에서 끊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중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어낼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전부 완벽하게 구원시켜 주셔서 끊어냄의 비극이 안 생기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끊어냄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연결점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겁니다. 잘려내고 또 잘려내고 또 잘려내면서 점차 도대체 어떤 경우에만 끊어짐이 되지 않고 한결같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즉 이방민족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을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집어넣으시고 그 집어넣으신 그 율법의 의미를 받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중에 끊어지고 끊어짐이 연속적으로 생기더라도 그 끊어진 자들이 “율법에 의해서 나는 마땅히 끊어져야 함”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방민족과의 차이나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의 특징이 됩니다.

이로 보건대 추가적으로 주어진 율법과 그 상황은 끝내 유일한 연결점을 드러낼 때까지 끊어짐의 환경 조성은 멈추지 않고 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끊어짐이 참으로 당연하고 마땅함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연결됨이란 끊어짐의 연속성으로 구성되는 겁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백성들로부터 끊어지는 경우에 해당되는 율법들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4)-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2)“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무릇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나 무릇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라”(출 30:32-33) -제사장만 바르는 관유를 바르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3)“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출 30:37-38)
(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출 31:14)
(5)“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아무 물건이든지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7:20-21)
(6)“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희생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7:25)
(7)“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17:4)
(8)“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5-6)
(9)“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레 20:18)
(10)“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22:3)
(11)“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레 23:29-30)
(12)“그러나 사람이 정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니 이런 사람은 그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였은즉 그 죄를 당할지며”(민 9:13)
(13)“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 3:22-23)

이 구절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물의 피‘와 관련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연결점은 모든 인간의 육신적 혈통 출신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를 통해서 흘려진 피가 언약의 피입니다. “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출 4:24-26)
유일한 연결점 되시는 예수님만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입니다. 그 외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은 죽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아예 받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죽을 능력까지 없습니다. 인간은 살아 있다고 여기나 그것마저 ‘주님의 죽음으로 확대된 환경’ 속에서 그냥 심판의 저주 안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연결점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 연결점이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5:17-18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모든 심판을 예수님에게 맡겼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그 심판주되시는 분이 이 세상에서 죽음을 당하므로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 입장에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예수님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성령의 효과로 인해 피해자가 가해자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이 살아나는 겁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따라서 영원히 하나님과 연결된 자는 주님의 대신 피흘심 앞에서 자신의 모든 가치가 당연히 소멸됨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오셔서 예수님의 희생 피릐 효력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말라기 2장 10-12절(끊쳐짐) 24072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0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아멘.

“하나님이 한분이다”라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하나의 뜻을 내려보냈다는겁니다. 그것이 한 언약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조에 내려줬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려줬던 그 언약은 항상 하나님 한분의 취지가 계속해서 줄곧 이스라엘 역사속에 내려오면서 하나같이 하나를 고수해 줘야되는데 여기에 지금 말라기 당시에는 유대인이거든요. 유대민족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 유대가 하나가 와야되는데 이방신의 딸과 혼인 함으로써 하나가 둘이되고 말았던거에요. 하나를 유지해야 되는데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게 또 이방신의 요소가 유다한테 오니까 유다가 지녀야할 그 하나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이렇게 된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됨을 어떻게 고수하시는가 하면 이렇게 고수하십니다. 12절 끝에.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야곱의 장막에서 끊어버린다. 그러면 이 말은 야곱의 장막은 오직 하나의 언약, 하나의 원칙에 속한 사람은 야곱의 장막에 있을 거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야곱의 장막에서 다 끊어낸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이제 듣게 되면 애초부터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순수한 하나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여러분 들겁니다. 왜? 끊어지는 것들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됨을 고수하면서 “너 나가. 너 아니야. 너 끊어낼거야.” 자꾸 끊어내는거에요.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됨을 하나님께서 유지시켜주면 끊어낼 것도 없으니까 처음도 하나요 끝도 하나니까 일이 더 깔끔하게 될 것이 아닌가? 더 간편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끊어냄이 없으면 연결점이 안보인다는거에요. 단 하나의 연결점이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끊어냄의 연속을 통해서 “끊어짐이 어디지? 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하나로 연결된 그 연결점은 도대체 뭐지?” 라는 것을 좌우로 막 끊어져 나가면서 그것을 파악하게 되어있다는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거에요.

그러니까 끊어짐이 없으면 연결점도 파악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은 끊어진 자 만이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또 되는거에요. 안 끊어질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의 연결점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하나의 연결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식으로 환경을 조성해 나가시는겁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하나의 연결점이 스스로 자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 연결점 때문에 주변에 계속해서 끊어지는 자들을 발생시킵니다.

그 끊어지는 자들을 발생시키는 그 원리원칙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율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율법. 그래서 하나님의 그 법, 하나님의 계명, 계명 속에 끊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는 경우들이 어떤 경우가 있는지를 시간관계상 다는 못찾지만 중요한 것을 제가 여러분한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끊어진다. 창세기 17장 14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 안했다고 끊어내버리는거에요. 우리 인간생각은 이래요. 아예 할례 법을 안줬으면 끊어지는 자도 발생되지 않을건데 애초부터 할례조항을 안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할례 언약을 해서 끊어지는 경우를 발생시켜서 도대체 이래도 안끊어지고 저래도 안끊어지는 연결되는 그 하나가 무엇인가를 서서히 밝혀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례 행한 사람은 일단은 “어휴, 살았다.” 싶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잘립니다.

두 번째, 출애굽기 30장 34절에 보면 제사장들만 바르는 거룩한 기름을 제사장도 아닌게 바를 경우에 하나님께서 백성에서 끊어지게 되어있어요. 출애굽기 30장 33절에 보면, “무릇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나 무릇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라” 그다음 연이어 나오는게 뭐냐하면, 향을 만드는데 향을 자기를 위하여 향을 만드는 사람. 향수니까 자기를 위하여 향을 만드는 사람은 백성에서 끊어짐이라. 출애굽기 30장 38절에, “너를 위해서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다음에, 그러니까 할례행해도 끊어져요. 그러면 그 관유를 안만들고 향을 안만드는 사람은, “후, 일단은 버텼구나. 살았구나”싶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짤려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돼요. 출애굽기 31장 14절에 안식일 나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안식일에 일하는사람. 출애굽기 31장 14절.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할례 행하고 기름 안만들고 향 안만들어도 안식일날 친구만나가지고 까페에서 까불다가 죽어요.

다섯 번째. 이것 뭐 13가지 되니까요. 속도좀 빨리하겠습니다. 레위기 7장 20절 21절에보면 부정한자가 화목제 제물을 먹으면 백성에서 끊어집니다. 부정한자라 하는 것은 살다보면 더러운 것 만질 수 있잖아요. 만졌으면, “아 더러운 것 만졌구나.”하고 의식을 통해서 깨끗하게 해야 되는데 정결하게하는 그게 귀찮아서 그걸 생략하고 “뭐 어때서” 사람 살다가 부정한 것 죽은 동물이나 죽은사람 시체나 또는 죽은자의 장례물건 이런 것 만지는 경우. 그릇을 만지는 경우, 일반인이 하나님의 성구, 하나님의 제사그릇을 만지는 경우. 이런건 더러운것이거든요. 인간자체가 더러운거에요. 인간자체가 더러워서 늘 이렇게 저녁마다 기초화장하든지 아침에 뭐 이렇게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귀찮아서 안했을 경우에는 이거는 그런사람이 화목제 제물 먹으면 백성에서 끊어집니다.

자, 여기서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쭉 있는데, 백성에서 끊어진다는게 무슨말인지를 우선 설명하게 되면 이런 뜻입니다. 백성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율법이 없는 다른 민족에게는 일체 이방민족은 일체 하나님이 받을것이 전혀없어요. 이점이 중요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인들이 어떻게 살든 안받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 태도 뭘해도 안받아요. 왜? 율법을 줘서 율법에 실려서 와야 받는데 율법을 준적이 없는 자가 자기나름대로의 정결하고 깨끗하고 깨끗한걸 하나님께 바친다? 안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는 거에요. 니가 백성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사람하고 상대할 생각보다 먼저 너희에게 주어진 율법이, 율법이 뭘 요구하고 하나님이 뭘 요구하느냐 그거부터 먼저 챙기라는 이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이방민족, 이방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거에요. 그들은 하나님께 갈게 없어요. 갈게없어. 하나님께 드릴게 안나옵 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세상 복음 모르는 사람하고 대화하니까 그런 것 여러분들이 절실하게 느끼죠? 뭐 카톡을 하든 문자를 보내든 쭉 이야기 해보면 하나님께 드릴게 나오던가요? “김건희 가방 받았나 안받았나?” 그 받았든 안받았든 그게 하나님께 무슨상관이 있어요 그게?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끊어진다. 그러면 끊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상이 된다는 말은 연결점을 너희에게는 알려줬다는이야깁니다. 알려주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끊어짐으로 구성되는 민족. 이게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자진해서 “나 하나님 안믿을래.” 이런 인간은 이스라엘중에서 없잖아요. 그러니깐 율법을 줘서 니가 자진해서 이스라엘에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독촉해서 “너 나가. 너 잘렸어. You’re fired. 너 해고야.” 이런식으로 주님쪽에서 선빵 때려서 쫓겨난 자 만이 연결점을 새삼스럽게 생각토록 해주는거에요. 얼마나 고마운게 율법입니까?

여섯 번째, 제물에 기름을 먹는사람. 이것 백성에서 끊어집니다. 레위기 7장 25절. 그리고 레위기 17장 4절에서 9절에 보면, 고기가 어떤 짐승을 잡을 때, 회막문으로 일단 가져와서 의식 치루고 그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먹어야 되는데, 회막문에 가져오지 않는 자는 않는채로 자기집에서 잡아서 피를땅에 흘린자는 백성에서 끊어진다라고 되어있어요. “니는 이스라엘 백성 아니야, 나가.”

여덟 번째, 우상을 섬기는자는 물론 끊어지고요. 옆에 우상 섬기는 자를 보고도 말리지 않거나 신고 안하는 자도 백성에서 끊어져요. 신고 정신이 아주 특출나야돼요. 레위기 20장 5절에서 6절.

그다음에 아홉 번째, 이거는 월경중의 여인과 관계했을 때 백성에서 끊어진다 했습니다. 레위기 20장 18절.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 제사 일상생활로 펼쳐지면서 이거는 은밀한 사생활 까지 어디가 개입한다? 율법이 개입해서 감시체계로 들어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민족하고 달리 “나 이래서 잘렸어.”그게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래서 잘렸어. 나 이것 때문에 잘렸어”했을 때 “니 잘린게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 너를 잘라내던데?” “율법이 나를 잘라내더라.” “그렇지.” 그 율법이 잘라낸다는 그것을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만 그걸 받기를 원하는거에요.

그리고 열 번째, 부정한 몸으로 성물을 가까이 하는자.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끊어집니다. 레위기 22장 3절.

여기 죽는다하고 백성에서 끊어진다 하고 달라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이점은 인간은 죽을 능력이 없다는거에요. 인간에게는 죽을 능력이 없어요. 본인이 본인을 죽일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 산채로 죽음속으로 끌어 당기는거에요. 그렇게 해서 율법이 가미된 민족과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의 사고의, 생각의 한계를 차이를 두게 하시는거에요. “살다 힘들면 죽으면 되지.” 인간은 못 죽어요. 죽을 수가 없어요. 죽을 능력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 살아있는게 죽은거니까. 뭘 새삼스럽게 죽어요. 인간은 죽으면서 죽음이 뭔지 몰라요. 자기 몸이 자기몸을 해치면, 목숨끊으면 죽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거는 이방민족이 생각하는 죽음이고 진짜 죽음은 백성에서 끊어지는게 죽음이에요. 율법이 있어 줘야 죽음을 알지 율법 없으면 죽음도 몰라요. 죽어도 안죽고요. 살아도 죽은거에요. 그냥 마음편하게 사세요. 어차피 살 길은 없습니다. 율법이 가만두질 않아요.

그다음 열한번째, 레위기 23장 29절에서 30절에, 속죄일날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는 자 백성에서 끊어진다. 속죄일날. 7월 10일날. 일년에 한번씩. 그러고 주님께서 이 속죄일날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마땅함을 깨닫지 못하면 그건 백성에서 끊어지는데, 이 말은 뭐냐? 니가 우선이아니고 율법이 우선이라는 뜻이에요. 너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왜요?” “너는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채로 이땅에 출생했으니까.”

열두 번째, 민수기9:13절, “그러나 사람이 정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니 이런 사람은 그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였은즉 그 죄를 당할지며”

그러면 열세번째, 열세번째는 신약에 나오는데요. 여기 말라기 다음에, 말라기가 바로 구약의 끝자락이고 신약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입니다. 이 신약에서 사도행전 3장 23절에보면, 베드로가 한 설교가 나오는데, 그 설교에 상당히 그당시 사람 유대인이 들으면 도발적인 설교를 했어요. 이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라고 하면서 모세 뒤에 오실 모세같은 선지자, 단 하나의 선지자를 베드로는 누굴 이야기하느냐,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선 굉장히 도발적이라는 말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하나님 천국에서 끊어진다는 이야기 조로 지금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백성들이, 유대인들이 뭐라고 반발했느냐 하면, “그렇게 중요한 선지자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 메시아, 그 예수란 분을, 예수라는 분이 진짜 메시아라면 하나님께서 왜 자기 아들 그 메시아를 죽도록 방치한 이유가 뭐냐? 이게 앞뒤가 안맞잖아.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모세같은 선지자를 마지막 선지자가 과연 베드로 니말대로 예수님이라면 그 예수님은 멀쩡해야 되고 안다쳐야되고 안죽어야 되고 백성같으면 누구라도 믿을 만한 믿을 수 있는 분으로 오셔야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아니한가?”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달려들만 하죠? 논리적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도 갖고있을 수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행전 4장에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해서 말하기를, “버린돌이 아니면 모퉁이 돌이 될 수 없다.”는 거에요. 사도행전 4장 11절, “버린 돌이 아니면 모퉁이 돌이 될 수 없다”는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아까 계속 이야기 한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끊어내는데 끊어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요. 누가요? 하나님께서. 뭘 가지고? 율법을가지고. 하나님이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이 만들어낸 율법의 의도적으로 어떤 현실을 하나님께서 자꾸 조성해 나가시는데 그 율법에 의해서 조성된 현실은 결국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자리에서 다 사라지게 만드는 식으로 환경을, 현실을 그런식으로 만들어가셔요.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율법안에서 그냥 다 사라져버려. 그게 너한테나 하나님한테나 속 시원한거란 말이죠. “괜히 니 자신에게 미련갖지마. “나 구원될 수 있을건데.”하고 미련가지면 니가 골치가 아파.” 그런 이야기입니다. 기준을 자꾸 니가 니를 살리는 기준을 니가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기준을 만드는데 그 율법이 200년전 300년전 그 율법으로 스톱되는게 아니고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그 율법이 스스로 자꾸 무슨 분위기를 조성하느냐 하면 인간중에서 율법의 완성자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의도적으로 끌고가신거에요.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 자를 한명도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전부다 백성에서 끊어지게 만드는거에요.

왜? 끊어진 자만이 연결점이 따로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자신이 끊어진 것도 모르는 자만이 진짜 끝까지 끊어진자에요. 자기가 끊어진 것도 모르는 자. 끝까지 끊어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이렇게 율법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끊어내느냐 하면, 아까 한 열두가지 예수님 빼놓고, 넣어도 마찬가지에요. 열세가지나 되는 이 끊어진 예를 통해서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레위기 17장에 보면, 끊어지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짐승을 잡을 때, 너희가 소를 잡는다, 집안끼리 소를 잡는다 할 때 그냥 너희 집에서 잡지 말고 일단 회막 문앞까지 와서 제사지내고 그냥 잡아라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는거에요. 피는 생명이니까 그 대목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거는 본문을 읽어드려야 그다음에 말이 돼요. 레위기 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에 두종류의 피가 나옵니다. 하나는 인간이 짐승잡으면서 흘린 피, 자기의 식용으로 먹는 피, 고기 먹기 위해서 피도 같이 먹는 그 피, 그 피는 먹지말라고 금지시켜놨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목숨부지하기 위해서 피를 먹는게 아니고, 그거는 생명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고 피가 너희에게 주는, 너희에게 주는 그 피를 하나님 방식으로 먹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 생명의 피는 제단을 통해서 흘러내려오게 되어있어요. 제단을 통해서. 제단을 통해서 흘러내려오게 되어있고, 그 제단의 피를 제일 먼저 접하는 사람이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의 제사 효과를 의지하는 자만이 피의 생명에 혜택을 입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게 백성이 끊어진다가 제일 먼저 나오는게 창세기 17장 14절 할례거든요. 이 할례를 행함으로써, 할례는 뭐냐하면, 인간이 자식나을 때 꼭 필요한 신체 부위가 바로 생식긴데 바로 생식기 끝을 부정해버리는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육신계통으로 생산된 어떤 인간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언약의 나라에서는 안받는다는 겁니다. 일단 끊자. 육신을 끊어버리자. 육신을 끊기 위해서 할례언약을 행하게 되면, 출애굽기 4장에 가서 보면, 거기서 반드시 뭐가나오느냐 하면 피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4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서 그를 죽이려고 할 때에 부인 십보라가 얼른 차돌을 취해가지고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 발앞에 던지매 비로소 모세는 살아났어요.

그 발앞에 던지면서 십보라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할례 언약은 여자가 하는게 아니에요. 남자가 해요. 남자가 할례를 행함으로써 아내 입장에서 아내는 자기가 여자잖아요. 아내의 남자는 남편이잖아요. 남편에게, 할례를 행한 남편은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함으로 나올 수 있는 피가 나와요. 따라서 육신적 남편 붙들고 지가 같이 언약된 아내라고 우길 수 없는거에요. 남편의 어느부분을 봐야 되는가? 남편의 할례라는 언약, 다시 말해서 피흘리기 까지 했던 그 할례 언약의 남편을 남편이라고 이해하는 한 그 아내는 할례 언약하지 않더라도 그 남편의 아내가 되기 때문에 같이 구원받는 여자가 되는거에요.

오늘 본문 말라기에서 바로 이방, 유다가 이방 딸과 혼인을 하면안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방 딸과 이방신의 딸과 혼인해버리면 뭐가 누락이 되어버리느냐 하면 할례 언약이 누락이 돼요. 할례 언약이 누락이 되어버리면 언약의 피가 없어요. 그냥 남자라는 몸뚱아리하고 결혼한게 돼요. 할례라는 것은 육신의 계통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육신 출생의 사람은 이 하늘나라에서 안 받습니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그것 때문에 제가 아까 그런말 했죠. 이방인 한테는요 하나님이 기대하는게 안나와요. 이방인한테는. 아무리 이방인이 착하고 훌륭하고 돈많고 어질고 남한테 구제 많이하고 도와줘도 그거는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만 받아요. 언약 하나의 계통을 하나님이 고집하는데 그 하나의 계통이 뭐냐? 백성을 끊어지리라고 했던 그 구절들의 공통점은 뭐냐? 그게 다 피중심 이에요. “피앞에서 모든자는 사라져라.” 이 말이에요. 피앞에서. 생명의 피앞에서. 생명의 피는 누가 흐르느냐? 희생 제물만이 생명의 피를 흐르고 그 피가 곧 생명입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육신 몸을 가지고 그걸 생명이라고 고집하지 말라는거에요. 그래서 끊어지리라, 끊어지리라 함으로써 인간은 그 피 없이는 자체적으로 살다 죽는게 아니고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었고 주님께선 하나, 하나의 하나님이 하나의 언약은 뭐냐? 그 피, 그 죽는 피흘려 죽는 희생. 그 하나로 자기 백성을 끌어당기려고 하는겁니다.

좀 복잡하죠. 좀 복잡합니다. 끊어지게 된다는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 자체 내에 끊어진다 끊어진다 끊어진다 하면서, 그거는 하나님과 연결된게 뭐냐? 연결됨을 보여주고자 하는거에요. 어디까지 끌고가서? 신약때 까지 끌고가서요. 베드로가 아까 설교한 것처럼 버림받지 아니하면 새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버림받는가? 사람한테 버림받죠. 사람한테. 누가? 메시아가요.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 되시는 분이 사람에게 버림받는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지적한 하나는 오직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거에요. 예수님이 하나에요. 그 한 하나님의 한분입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해서 자신의 일의 토대를 아버지의 일하심에다가 두고 자신의 일을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데 그게 뭐냐?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와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와 하나님을 동등으로 삼았던 것을 분노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거에요. 그래서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은요, 자꾸 유도해요. 하나님이 현실을 자꾸 유도해서 인간이 연결점은 되지 못하고 연결점은 따로 한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자들로부터 예수님이 버림받는 경우들을 자꾸 발생시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 내용을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뭐냐? 일단 내가 여기 하나의 한 몸이 있다고 여기고 이것이 유일하게 내 자아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육체라고 보는겁니다. 육체가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보고 두 번째는 뭐냐? 내가 살아있다는거에요. 내 육체가 하나라는 것과 두 번째는 내가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다는 거에요. 세 번째, 그러니까 살아 있는 나에 대해서 내가 나에게 충성을 다해야 된다는거에요. 그 생각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데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생각이 나오셔야 되는데요? “저는 죽었고요 제 안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이러한 생각? 느낌같은 느낌? 이게 나와야 되는데요? 하나님께서 그거 나오기 위해서 지금 이 시대, 이 시간대에 우리를 이땅에 태어나서 살게하시는, 이 환경속에 살게 하시는겁니다.

여기에 요한복음 좀더 제가 그점을 설명을 더 깊게 해드리면, 요한복음 5장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답니다. “좋으내. 참 좋다.”하잖아요. 근데 그 말씀을 마저 들어야돼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는 거에요. 심판을 하나님이 하실줄 알고 하나님 쳐다보는데 하나님이 심판 안한대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한몸이고,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내가지금 살아 있으니까 이 살아 있는 육체를 잘 단도리하고 관리해가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내 라는 생각을 하실수가 있잖아요. 왜? 평소에 내가 나를 사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걸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겼다는거에요. 아들에게 맡겼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 아버지 보시기에 아들은 되고 너는 안된다는거에요. 심판을 반은 예수님께 맡기고 반은 내 양심에게 맡기고 이게 아니고, 몽땅 다 아들에게 맡겼다는거에요. 그러면 아들이 어떻게 심판하느냐?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뭐 양심이고 뭐고 도덕이고 뭐 끄집어낼게 없어요.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 가해자가 되어버렸어요. 예수님이 심판 반 하고 우리가 50퍼센트 우리 양심대로 하고 이게 안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인간들로부터 살해당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가해자가 돼요.

살인자가 된겁니다. 졸지에. 왜? 주님께서 선빵해서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사람들은 예수님당시에 십자가 주변에 있던 그 십자가 죽이라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우리는 안죽였단 말이에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개념에 준해서 예수님을 죽인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은 죽을때면 모든 인간이 심판 주 자체를 죽여버린거에요. 인간이 심판주를 죽였다는 말은 내가 스스로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천국에 가고자 하는 그것이 무슨 결과를 야기시키느냐 하면 예수님을 죽게한 결과로 야기한 거에요. 따라서 인간은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한 채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을 뭐냐? 모든 인간은 죽은것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보는거에요.

더 이상 뭐 어떻게 쉽게 설명합니까? 죽음 개념이 다르다니까요 죽음 개념이. “저 예수 우리가 십자가로 죽이자.” 그러면 예수님 죽고 자기는 “와 우리는 안죽고 살아있다.” 강도 둘하고 세명 죽였으니까 우리는 여전히 그다음날 여전히 맛있게 밥먹으면서 살아있다고하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인간이 생각한 죽음이고 예수님 생각한 죽음은 뭐냐? 죽음이 아니고 저주요 심판이다 이말이죠. 끊어지는거에요. 하나님 앞에 끊어지는걸 의미하는겁니다. 하나님과 연결돼 있는 유일한 연결자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도외시 했을 때 나머지 모든 인간은 예수님께 끊어진 자가 되고 끊어졌다는 말은 새삼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저주와 심판속에 저주 속에 있는데 그것을 뭐냐? 산채로 저주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새로운 개념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거에요.

피 이외에는 다사라져야돼요. 왜?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자, 그러면 남은 문제 하나. 죽은 것 그렇게 쳤다 하고. 그러면 천국가는사람은 어떻게 천국가느냐? 또 슬슬 탐이나죠? 목감기 심하게 들릴 때 병원에 가서 링거맞고, 그다음에 약을 지어줘요. 약을 빨간약 이렇게 목을 넘기는 약을 주게 되면 어떤 약물 효과가 있느냐? 강제로 콧물이 가래로 변하는 효과가 있어요. 강제입니다. 약물효과죠.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죄가 주님의 대속의 율법을 완성한 가래덩어리, 복음덩어리로 엉겨붙는 효과를 줘요. 성령의 효과입니다. 약을 먹고 난 뒤에 “나는 가래 안끌어야지” 할 수가 없어요. 왜? 약물효과니까. 약물 들어갔으니까 약물이 우세해요.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결심보다도 우세하다고요.

성령이 들어가게 되면 내가 저주 받고 심판받는 것 다 좋은데 이것 마저 하나님이 대속해서 이루었던 하나님의 의와 백성만드는데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이 와야 알 수 있는거에요. 비오는날 장날에 갔더니만 파장 분위기죠. 고추튀김을 팔고 있는데 고추튀김을 보니까 한집밖에 없어가지고 제가 가던집이아니고 다른집에 한번 가봤어요. 길죽하니 튀김옷 참하게 입혔어요. “자, 한 개 1500원입니다. 사가세요. 맛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맛있게요.” 하면서 하는거에요. 그래서 전에 갔던 고추튀김집이랑 같은 고추튀김인줄 알고 그걸 샀어요. 사서 먹어보니까 세상에 그 안에 돼지고기가 하나도 안들어갔어요.

감미료 섞어서 당면 덩어리만 집어넣어놨어요. 안에 돼지고기 다진게 들어가야 고추튀김이잖아요. 성경공부 백날하고 교회와서 매번 수련회 참석하고 하면 뭐합니까? 돼지고기가 없는데. 돼지고기가. 그냥 겉만 고추튀김이라. 안에 당면덩어리. 껍데기만. 그냥 말씀이 우리 속까지 들어가질 않았어요. 예수님의 속까지 들어가는 것을 성령이라고 해요. 고린도전서 2장에. 하나님의 속까지 들어갔던 그 성령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거든요. 그 성령이 너희의 속까지, 우리의 속까지 들어와요. 그거 하고 난 뒤에 사기당해서 그거 먹는다고 다 먹었어요. 내 죄 벌이다 싶어서 억지로 먹고난 뒤에 그다음에 돼지고기 넣은 그집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는것도 모르고... 그냥 장사면 다 장산줄 알고 다 돼지고기 들은 줄 알고.” 물론 장날이 좀더 아직 남아있으니까 가진 않았습니다만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찾아갈 거에요.

껍데기 보면 몰라요. 뚝 뿌셔볼 수도 없고. 나옵니다. 복음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복음이. 바로 내가 구원한게 아니고 주께서 다이루신, 율법대로 이루신 하나밖에 없는 그 심판주 되시는 분이 대신 죽으심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대신 죽으심을 증거하는 자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사실. 이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성령의 약물효과에요. 강제로 그런 증거가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에요. 언약이 하나로 완성된 겁니다. 이제 말라기 끝나면 신약이 오죠. 바로 신약의 성도가 말라기에 이런 것 다 끊어지리라, 끊어지리라를 다해서 다 끊어지는데 주께서 주님이 우리들의 생명의 피를 흘려줌으로써 이제는 내 육체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피흘리신 주님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천국가게 된 겁니다. 이것을 늘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냥 남들하고 비교하면서 남하고 의견들으면서 그게 진리인줄 알고 그냥 무심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하나님께 바칠 것도 나오지도 않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저희들. 우리의 속까지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들추어 내시고 그 들추어진 그 속에서 주님의 생명의 죄사함의 능력까지 주셨던 주님의 희생의 능력을 이제는 늘 감격하면서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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