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그리스도의 옷

아빠와 함께 2024. 8. 8. 10:14

그리스도의 옷 

2024년 8월 7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5-17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피조물 주제에 감히 토 달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일상 태도들을 보면, 모조리 ‘자기를 위하여’ 움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지만 자신의 생활 태도에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딴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가 ‘하나님을 위해서’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자를 ‘경건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경건한 자’에 관한 규정마저 결코 인간들이 ‘자기를 위해서’ 설정되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곧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삶’이 경건인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뜻입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했을 때는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아담 한 사람만 만들고 ‘한 몸’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걸까요? 말라기 2: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 ‘한 아버지’의 뜻은 경건한 두 몸이 아니라 경건한 ‘한 몸’입니다. ‘경건’이라는 요건과 ‘한 몸’이라는 요건을 다 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요건을 달성하는데 있어 하나님깨서 아담 한 육체가 아니라 ‘여자’라는 육체를 만드셔서 그 둘을 합쳐서 한 몸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 몸이 바로 한 아버지의 취지에 합당한 경건한 한 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건한 한 몸을 통해서 경건한 자녀가 계속 나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경건한 몸이 고질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이 밝아져서 ‘자기를 위해’ 사는 병입니다. 이 병을 못 고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 들어서 다시 창세기 2장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밝아진 처지에 어떻게 도로 눈이 어두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출생부터가 경건치 못하는 자로 태어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아버지에 합당한 한 몸은 포기될 수 없는 사항입니다. 벌써 부부에게는 하나님께서 내린 저주의 징벌이 함께 합니다. 이는 부부관계 속에 두 번 다시 원래 부부로 돌아갈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학대로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등장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남편의 학대가 인류 역사상 처음은 아닐 겁니다.

애초부터 줄 곧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학대 성향조차 범죄한 첫 부부에게 내린 징벌의 연속입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 개인적 신체에 내리는 징벌은 아기 낳을 때 고생이 극심한 겁니다. 가정적으로 징벌로서저주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남편을 사모하되 그 사모한 남편으로부터 평생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조화로 이어집니다. 즉 남편이라는 자가 아내를 다스리는 방식이 폭력적이라면 그 폭력이 전적으로 남편의 잘못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학대로 옷 입힌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학대를 옷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는 옷이나 입으라”는 것을 “너는 나의 학대를 옷처럼 여기고 입고 다녀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아내는 여자가 먼저 선악과 따 먹은 현장이 가정 내의 징벌의 상황으로 연속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상황을 잊지 않습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도로 창세기 2장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국 가정 폭력을 통해 그 여파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징벌이 주어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출생을 통한 경건은 타락이라는 고질병으로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인간들은 경건을 획득하기 위해서 하는 방법이 누구를 추종하는 겁니다. 경건해 보이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따라하며 그 스승의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얾겨보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12제자들입니다. 하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눈이 이미 밝은 상태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를 폐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위기 때, 제자들은 누구도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육신은 자기 지키는 것이 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건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겁니까? 출생으로도 안 되고 추종으로도 안 된다면 말입니다.

비밀은 옷에 있습니다. 창세기 3:21에 나오는 가죽옷은 창세기 3:7에 나오는 인간들의 옷 만들기를 전제로 해서 나온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눈이 밝아진 인간들은 그 밝아진 눈으로 지신의 시치성을 발견한 겁니다. 옷을 만들어 하체를 가리는 임시방편조치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몰랐던’ 창세기 2장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해 입혀셨는데 그 최종 결과가 갈라디아서 3:27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성령의 세례는 곧 부활의 능력을 뜻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십자가의 온전한 성과에 대한 효력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란 의인되시는 주님께서 죄인과 함께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경건이란 예수님의 몸, 그것으로 한 몸이 아니라 예수님+ 성도로서 한 몸을 달성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아내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한 몸인 경건한 자가 성령에 의해서 탄생한 겁니다. 이 몸은 이미 죽은 몸이기에 더는 ‘자기를 위해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눈이 밝다고 인간들이 자부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고 자부하기에 정작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열왕기하 6장에서 엘리사 사환이 자기 성을 포위한 아람군대는 보면서 엘리사 선지자와 함께 있는 천군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라면 천군천사보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엘리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홀로 있는 것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피의 고귀함을 안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피만으로 충분함을 간직하며 살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서 사는 바로 그 태도가 고질병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말라기 2장 15-17절(그리스도의 옷) 24080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5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아멘.

여기 여호와라는 말이 15절부터 처음 등장해서 시작되지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통해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제시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 인생의 의미를 담는 것을 전부 다 거절하시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이죠. 하나님께서 거절까지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딱 주어지게 되면 이것부터 생각하면 돼요. 이 시작은 하나님부터 시작된 거다.

근데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그 시작점이 하나님이 아니고 나부터 시작된 것이 나의 욕구와 욕망을 통해서 우리의 행동으로 나오는 겁니다. 시작점이 서로 다르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뜻과 나로부터 출발한 뜻이 항상 상충하게 우리 안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이럴 때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 뭐 물어볼 필요도 없죠. “하나님의 뜻을 안다”라는 것은 내 뜻을 포기하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내 뜻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라는 뜻이에요.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올라가고 난 뒤에 산 밑에서 사람들이 여호와를 나름대로의 여호와를 찾았어요. 그런데 시내산 올라갔다가 내려온 모세의 평가에 의하면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는 진짜 여호와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어요. 뭐냐? 자기를 위한 여호와에요. 자기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위했다는 것은 그거는 자체가 우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일은 창조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이게 이론상 너무나 당연한 거에요. 이론상 뿐만 아니고 진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진리죠. 이것을 진리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봐주소.” 이러면 곤란한 거에요. “진리인줄 알지만 봐주세요.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하더라도 봐주세요.” 문제는 그거에요. 누굴 위해서 봐주는 겁니까? 누굴 위해서?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이 존재가 있는 이상은 하나님 한 번만 봐주세요. 뭐 어쩔 수 없습니다. 바쁘다 보니까 온갖 소리가 나오면서 그 나오는 온갖 소리를 이렇게 묶어보면 딱 그것뿐이에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매 순간 나를 위하여. 그것을 신약의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그걸 환자라고 합니다. 환자. 간단한 표현이에요 그냥. 환자에요. 고질병. 환자. 환자는 스스로 못 고치죠. 스스로 못 고칩니다.

고칠 수도 없고 고칠 능력도 없는 환자. 이 환자가 “나는 환자다” 이러면 되는데 “내가 아는 것은 다 엉터리다” 이러면 되는데 차마 그런 발언도 안 해요. 왜? 이상하게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환자 맞는데요.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위해서 하는 잘못된 것 알겠는데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나를 위해서가 없잖아요.” 마지막에 그게 남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으면서도 앞, 뒤가 이게 전부 다 모순 덩어리에요. “그게 나쁜 건 아는데요.” “알면 안 하면 되잖아.” “그러면 나를 위한 몫이 없잖아요.” 그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이게 너무 어려워서... ““나를 위해서 내 몫이 없잖아요.”라는 이것이 나쁘고 환자가 나올 발언인 것을 아는데요. 그걸 나쁘다고 하면 내 몫이 없잖아요.”

아, 이것 참 독해도 병이 독해도 보통 독한 병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 요즘 말씀 좀 생각하고 말씀에 관심 있습니까?” 이러면, 부딪혀서 오는 답변이 뭐냐? “그러면 내 몫이 없잖아요.” “나를 위한 시간이 없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깜빡깜빡 꺼지는 나라가 망하는 입장에 있던 시절에 있던 그 당시 유대인이나 지금 오늘날이나 똑같기 때문에 주께서 이 말씀을 주신거에요. 우리가 뭐 아예 관계없다고 하면 이 말씀, 말라기라는게 있을 수도 없어요. 우리가 똑같이 말라기에 나오는 그 당시 사람들, 지적받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 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출발이 여호와부터 출발해요. 출발을... 뭐 말씀이 어렵다고 하지마세요. 그냥 출발이 여호와에요.

출발이 여호와고 오늘 본문 내용에 보면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뭐다? ‘경건한 자손, 경건한 자가 있기를 원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뜻은 요지부동이죠. 수정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경건 못했습니다, 저렇게 해서 경건 못했습니다” 그런 군소리 달면 안 돼요. 그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이지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변명할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뜻이 이 인간 현실 속에서 어떤 식으로 어떤 현상들을 남겼는지. 하나님과 인간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심으로써 다른 민족은 모르겠고 이스라엘 내부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식으로 지적을 받는지. 지적받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돼요. 하나님께서 대쉬를 하니까 지적을 받는거에요. 그게 하나님 살아계신 겁니다.

하나님은 양궁선수요, 우리는 가만히 서 있는 표적지에요. 저기서 화살을 팍팍 쏘아대는 거에요. 말씀의 화살. 엑스 텐, 정식으로 꽂히는 겁니다. 계속. 양궁 로봇같아. 10점을 놓치지 않아요. 우리의 그 지적받을 지점을 정확하게 아시고 계속 말씀으로 꽂아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남 앞에 내세울 것은 화살이 수북하게 꽂히는 표적지 그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내비치면 되는겁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 참 교회 잘 다니니까 경건하지, 그지?”하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이 꽂힌 화살 좀 봐라. 니가 보기에 이게 경건해 보이냐?” 화살이 경건하다. 경건치 않음을 향하여 쏘아대는 주님의 말씀이 경건하다. 그 말씀 안에 경건이 들은거에요.

따라서 “나는 경건 못 하니까 말씀 안 볼란다” 하지 말고, 그 경건치 않음을 향하여 쏘아대는 그 경건한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그것을 증거하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늘 “쏘세요.” 하고 있으면 되고요. 그러면 이 경건한 자손을 얻는다고 운을 떼시면서 그다음은 뭐냐 하면 경건치 않은 예를 여기다가 들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먼저 하나님부터 출발한다고 했어요. 모든 의미가.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라고 되어있어요. 우리 가슴에 박힌 하나님의 경건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옷이 나옵니다. 그 옷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이혼하는 것과” 여러분 그게 무슨 뜻인지 하시죠?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이게 무슨 뜻이냐는 거에요.

“자기 남편이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서 그걸 미워하시지?” 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남편이 폭력으로 아내를 막 학대하고 때린다. 근데 하나님이 그걸 왜 미워하지?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을 때요. “당연히 미워할 만하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있던 윤리 도덕적 관점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허락도 없이 마구 이게 섞이는 경우가 있어요. “남편 돼서 아내를 사랑하지 때리면 안 돼.”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하고 관계없어요. 없고 인간 대 인간의 상식에 속하는 겁니다. “소위 남편이 배웠다는 사람이 여자가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때리면 돼? 안되지.” 아니 XY염색체를 가진 남자가 XX염색체를 가진 여자를 권투란 이름으로 패면 됩니까? 이거 죽는 수가 있어요.

공정게임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거는 인간들도 알 수 있는 겁니다. “아 이런 주먹은 처음이었다.” 이래 가지고... 여자 게임이냐 남자 게임이냐. 여기서 우리는 뻔히 인간들 간에 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동의한다면 이거는 100% 엉터리입니다. 윤리 도덕이고 잘못된 거에요. 윤리 도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거에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바르게 살면 인간이 좀 더 행복해질 것인가. 목적이 인간의 행복에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적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받을 때는요, 소위 우리가 “이거는 착하겠지 이거는 하나님, 누가 와도 옳은 이야기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그것조차도 우리는 근원적으로 지적받아야 돼요.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데 그게 왜 하나님께 미움받을 일입니까?” 하면, “때리면 안 되지. 어떻게 약한 자를 때리나.” 이렇게 설명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인간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미워하는거에요. 얻어맞는 아내가 얻어맞는 게 아파서 “이거는 나쁘다”라고 이렇게 판단 내리면 안 돼요. “내가 아프니까 나쁜 것이고 내 마음에 흡족하면 좋은 남편이다.” 이거는 여자 본인 생각이지 인간의 여자가 자기 행복을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을 때나 나올 결론이지 하나님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되어야 돼요. 남편이 여자한테 “나는 당신을 사랑해”하면 “정신 똑바로 차려. 나 사랑하지 말고 주님부터 사랑해야지.”라고 화를 막 내야 됩니다. “당신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주님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는 그 하나님께 밉상 받는 짓을 왜 함부로 하십니까?” 혹시 그런 아내 보셨습니까? 자기 입장에서 성경 말씀 해석하면 안 돼요. 자기를 부인하고 해석해야 돼요. 자, 그러면 그런 근거를 대겠습니다. 근거가 어디에 나오느냐? 15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이게 무슨 말인지 현대한국어를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를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한 몸을 만들었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럼 그 의도가 어디에 나오는가? 2장 10절에 나옵니다. 말라기 2장 10절,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하나님께서 나왔다는 그 요소를 인간의 속에 거기다 심어둔 식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게 말라기 2장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를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한 몸을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시고 있느냐 하면, 인간 쪽에서 보면 부부는 한 몸이 아니에요. 두 몸입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우기고 인간은 가정에, 부부는 두 사람이라고 우기고. 자, 인간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관점이 벌써 부부를 두고도 이미 관점이 틀어지는 거에요.

근데 관계가 엇갈리는 이것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상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너 위주로 너를 위하여 네 관점에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내가 용납 못 한다.”라는 점을 고려해서 한 아버지께서 두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한 몸이라고 하는거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요. 한 아버지께서 아담 혼자 만들고 “이거는 한 몸이다. 내 아들이다.”하실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조금 어려워지지요. 하나님께서 여자 만들고 남자 하나를 만들어도 그 한 아버지의 한 아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있는데 의도적으로 그게 뭐냐? 영이 유여하다는 말은 뭐냐? 여유가 있는거에요. 유여 거꾸로 하면 여유에요. 하나님께서 다른 가능성을 충분히 할 수도 있지만 의도를 가지고 두 사람을 만들 되 그걸 두 몸이라 하지 않고 한 몸이라고 한 아버지의 취지를 담아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거에요.

자, 그렇게 결정한 그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냐는 거에요. 의도가 무엇이냐. 창세기 2장 24절 25절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되어있어요.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면 그게 한 몸입니까? 아니거든요. 이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려고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은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그 절차나 과정에 대해서 인간은 이제는 더 이상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분석 불가합니다.

왜 두 육체가 한 몸이 되는지 거기에 대해선 알 길이 없어요. 왜냐?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개입이 안됩니다. 그 논리에 대해서. 그냥 그 한 몸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즐기는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람이 콧잔등에 종기가 안 생기면요, 종기 없는 콧잔등이 정상인 줄 알아요. 근데 모기한테 물려서 콧잔등에 종기 생기면 무엇이 그리운고 하면 종기 없을 때가 굉장히 그리워지는 거에요. “하, 이것만 없었으면 살만한데, 종기.” 처음에 눈 아파서 안경 쓸때에 정말 “내 팔자가 왜 이러냐. 그냥 콱 죽고 싶다.” 왜? 내 눈은 계속 좋아져야 돼요. 내 눈은 계속 좋아져야 된다고요. 사람이 누가 남한테 잘해주면요, 사람 그 사람 그게 권리인 줄 알고 있어요. 안 아픈게 어떤 권리인 줄 알고 있다고요.

근데 이 아담과 하와에게 마귀가 달려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써 과연 모든 하나님의 계획, 두 사람이 한 몸되는 계획이 파탄 났느냐? 하나님은 “그건 아니다”라는 거에요. 두 육체가 한 몸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오히려 파탄 나는 것, 두 육체가 다시 두 몸으로 파탄 나는 그것으로 인하여 정말 두 육체가 한 몸 되는 궁극적인 이유를 그 안에서 이제는 두 번 다시 두 몸이 되지 않는 완벽한 체제가 인간이 두 부부 사이에 파탄 남으로써 확고히 되는 겁니다.

그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자체가 한 몸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자기 교회와 더불어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남자 몸 있다고 해서 한 몸이 아니에요. 예수님 몸조차도 교회가 신부가 되어야 하나님의 온전한 한 몸이 되고 그걸 그리스도의 몸이라,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해요.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몸이라.” 이게 결론 부분이에요. 그러면 피조물 주제에 내가 내 자체가 결론되면, 안되죠. 피조물 주제에. 피조물의 완결된 의미는 숨어있는 하나님. 예수님을 말합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이 주가 될 때 완결되는 거에요.

인간이 아담과 합체해서 범죄할 때에 준비된 주님이 인간세계에 들어오게 돼요. 여자의 후손으로서. 여자의 후손으로 들어온다고요. 여자의 후손 들어온다고 해서 인간의 부부관계가 원활하게 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은 창세기 3장에 넘어오면 인간은 어떤 수를 해도 창세기 2장으로 못 들어와요. 결혼식 해서 “우리 둘은 한 몸이다” 백날 해도 그것은 안 통합니다. “우리는 한 몸이지. 헤어지지 말자.” 헤어지지 말려면, “어젯밤에 무슨 꿈 꿨냐?” “이런 꿈.” “그게 바로 나도 똑같이 꿨어. 우리 신기하지.” 이런 부부는 없어요. 동상이몽입니다.

같이 잠자도 꿈은 다 달라요. 다른 몸이에요. 그 다른 몸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한 몸인데 왜 너희들은 헤어지는가? 내가 한 몸되게 하는 것은 경건한 자녀를 한 몸이라는 입장에서 내가 태어나게 해서 출생이라는 방식으로. 경건한 자식을 출산 방식으로 경건한 자리에 놓는 것이 내 율법적인 취지인데, 너희들은 왜 너희들의 자식이 경건하지 않는가? 그 책임, 그 문제가 바로 너희들 부부한테 있잖아.”라고 계속해서 추궁하고 따질 수 있는 그런 현상들이 유대 민족 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일어날 때마다 슛슛슛하고 주의 말씀, 창세기의 원론적인 말씀이 계속 쏘아대는 거에요.

말라기 2장 다시 본문에 와서, “내가 한 몸 되게 한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다.” 이 말이죠. 경건한 자손. 부부가 한 몸이 될 때, 그 한 몸의 취지가 하나님의 부부를 한 몸되게 한 취지가 한 몸으로 유지될 때만 그 밑에 나오는 출산 된 자식도 경건한 자식이 된다는 그 원리를 생각해서 나는 아담과 하와를 한 몸되게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이 16절에 보면 남편이 아내를 패는 거죠. 뭐 팬다는 말은 안 하지만, 악으로 학대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말라기에 들어서 최초로 부부싸움 있었습니까? 그전에는 부부싸움 없었습니까? 그전에는 아내에 대한 학대가 없었습니까?

그럼 그전에는 학대가 있었다 그 말이죠. 그러면 그전에 학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만 생식하고 “내 인간은 볼일 다 봤다. 다 죽여버릴 거야. 노아 홍수로 다 죽일거야. 나 인간한테 기대 안 한다. 끝.” 왜 하나님께선 인간을 멸종시키지 않고 왜 아직도 경건, 경건, 경건에 기대를 거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계속 혈육적으로 자녀 생산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옷 때문에 그래요. 옷. 16절에, 학대하는 남편이 아내를 패면서 뭐로 패느냐? 그것을 학대를 아내를 가리는 옷으로 사용한다 이 말이죠. 학대 그 자체가 “니는 이옷으로 입고 댕기라”해서 매일같이 술 먹고 들어와서 패는 거에요.

그게 학대라는 이름의 원피스. 학대라는 이름의 투피스. 쓰리 피스까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맨날 때림으로써 남자는 은연중에 무엇을 지금 실연, 실제로 연기하는 것, 실연되는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6절에 그게 나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그것은 여자가 자녀 놓을 때 하는 개인적인 거죠.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저주가 여자한테 한 개가 아니고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뭐냐? 자식 놓으면서 고통하는 것. 두 번째 저주는 뭐냐?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린다는 것. 동등관계가 깨어지고 너를 다스리면서도 여자는 그 다스리는 남편을 흠모하고 사모한다는, 흠모까지는 아니지만, 사모한다. 다스려도 좋으니까 나는 남자가 필요해요. 뭐 이래 나오는데, 그게 정상적인게 아니고 정상적인 것에서 틀어진 비정상적인 저주에 대한 징벌에 해당되는 사항이라는거에요.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게. 물론 여자가 남자를 사모할 때 “나 줘 패주세요.” 이런 여자는 없어요. “나는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요.” 그건 철딱서니 없는 이야기고요. “나는 나쁜 남자가 멋있어요.” 그런 것. 그거는 실없는 소리고요. 이 남편이 이미 범죄 했거든요. 남편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 이 말이죠. 따먹었는데 이게 전적으로 남편이 나한테 학대하는 것이 꼭 남편 책임으로 돌릴만한 이야긴가 아니면 원인 제공이 어디 있는가를 나를 학대하는 남편을 통해서 창세기 3장에 있었던 선악과 따먹는 사건으로 여자를 돌려보냅니다.

그럼 여자는 뭐냐? 두 팔 가지고 가슴을 치죠. “다 내 탓이요.”다 내 탓이요. 거기서 나온 노래가 ‘여자의 일생’.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그 여자의 일생 가사에 보면, “참아야 하느니라.” 왜? 이게 여자의 팔자니까. 들어보면 옛날 그 할머니 시대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자는 그게 미덕이라고 남자가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의 윤리 체제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던 거에요. 참아야 하느니라. 그게 여자의 덕행이라고 남자체제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에요. 남자체제에서. 열녀상 만들어 가지고.

무엇을 빠뜨리느냐? 그 자체가 바로 악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인간의 처음 한 조치가 옷이었고요, 그 옷을 보고 내린 하나님의 조치도 옷이었어요. 이게 처음에 창세기 3장 7절에,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이렇게 되어있어요. 눈이 밝아. 눈이 밝은 것도, 눈이 밝아졌다는 것도 이거는 총괄적인 저주입니다. 인간에게. 왜 이게 저주이냐 하면, 2장으로 못 돌아가기 때문에. 창세기 2장, 하나님이 그때 만드신 그때의 그 인간. 남녀가 합해서 두 육체가 한 몸이 되는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라. 그리워도 소용없어요. 못 돌아가요. 못 돌아가니까 이건 뭐냐? 아까 이야기한 환자입니다. 병을 못 고치는 환자에요. 고칠 수가 없어요.

이 눈이 밝음에 대해서 열왕기하 6장 14절 18절에 구약에 좋은 예가 있어서 제가 소개해드립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때문에 자기가 북이스라엘을 장악하지 못한다고 엘리사부터 찾아서 죽이자. 그러면 나머지는 북이스라엘 정도는 우리가 이긴다.”라고 한거에요. 그래서 이제 직접 아람 군대가 엘리사 사는 그쪽을 향하여 포위해서 침범했는데 엘리사 사는 동네가 역시 북이스라엘 동네니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민이 된거죠. 왕도 고민이 되고. 게하시죠. 게하시가 엘리사 사환이죠. 사환이 가서 보니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싼거에요. 엘리사가 있는 성을. 가득하게 에워싼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하,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 이제 우리는 죽었다 이 말입니다.

자, 이럴 때 엘리사 사환이 눈이 밝은 거에요. 눈이 밝은 게 저주에요. 눈이 밝으니까 그 눈 밝았던 효과가 뭐냐? 무섭다, 두렵다, 겁난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 이게 눈이 밝아서 그래요. 눈이 밝아서. 그럴 때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엘리사가 기도하고 난 뒤에 눈을 뜨게 해주니까 저쪽에 아람 군대 포위된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의 천군 천사가 불 말과 불 병거 산에 그득하게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엘리사가 뭐라고 기도하느냐? “하나님이여, 저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멀게 하옵소서.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어둡게 하니까 그들이 눈이 어두우니까 다 장님이 된거죠. 그래서 몽땅 사마리아 성에다가 전부 다 포로로 잡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이 꼭 필요해요. 왜 하나님께서는 진작에 게하시, 이 사환에게 처음부터 엘리사 쪽에 천군 천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왜 사환한테는 처음부터 그걸 보여주지 않았는가 하는거에요.

지금 게하시가 저쪽에 아람 군대 숫자가 많다, 그런데 여기는 엘리사하고 자기하고 몇 몇되지도 않는 북이스라엘 소수의 지킬 수 없는, 저 많은 숫자를 견딜 수 없는 숫자밖에 없다. 라고 하는 이 이야기가 다 게하시가 나름대로의 세상을 관찰하고 측정하니까 나름대로의 눈이 밝다고 생각하니까 나온거에요. 자기 생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게 하니까 천군 천사가 있다. 그러면 게하시가 “야, 우리는 살았구나.”하면 안 돼요. 그건 눈이 어두운거에요. 역시. 뭐냐? 도대체 엘리사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기는 엘리사를 봐야 돼요. 엘리사를.

왜 같은 인간인데, 엘리사는 보는 것을 왜 나는 못 보는가? 이 경우가요. 이런 경우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관계하고 똑같은 거에요.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다니면서 추종하면서 했잖아요. 왜 추종했습니까? 인간은 말라기에 의하면 출생 자체가 경건이 안 돼요. 이미 범죄했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들이 출생 자체가 경건이 안된다면, 어떤 훌륭한 스승님, 훌륭한 선지자, 그런 것을 추종하고 따름으로써 거기에 한 수 배우고 두 수 배우고 어떤 성경 공부 해가지고 복음을 배움으로써 나도 경건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그러한 대안을 가지고 따라다녔어요. 누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를? 예수님을. 따라다니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 짝도 소용없죠. 왜? 다 도망갔는데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다 도망갔잖아요.

추종한다고 경건한 사람 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게 그 훌륭한 스승님 만나서 그 말씀 들으면서 스승님, 스승님 해가면서 추종하는 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러면 출생도 안 돼, 경건 안 돼, 추종해도 안 돼.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가죠? 안되는데요. 뭐 어디 경건치 않은 인간을 천국에 넣어줄 리가 없고. 여기 옷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 옷이 뭐냐? 바로 가죽옷이에요. 가죽옷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지 않았다라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게하시, 엘리사 사환에게 처음부터 천군 천사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해도 경건치 않은 그런 존재로 태어났음을 인식하는거에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의 고질병은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명심토록 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부끄럽다고 수치스럽다고 옷부터 만들었잖아요. 그 만든 행위를 먼저 지켜보시고 그 만든 부위에다가 주님께서는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가죽옷을. 그러면 아담과 범죄한 인간은 범죄한 입장에서 가죽옷을 대해야 돼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범죄했다는 것은 무슨뜻이냐?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범죄했다 하는 것인가? “자기를 위하여.” 눈이 뜨여지기 전에는 자기를 위해서가 없어요. 그러나 선악과 따먹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가 된거에요. 자기를 위해서 말씀 지키고 자기를 위해서 예수 믿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것. 다 죄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결혼하고 자신의 경건됨을 위해서 사는 것, 100% 죄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경건할 수 없는 병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경우로 인간은 경건될 수 없고 경건할 수 없으면 천국은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팩트입니다. 자꾸 여기서 더 나가서 어떻게 뭐 하나님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섬겨서 내가 구원한다.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에요. 그것도 이미 눈뜬 상태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설교 끝나고 이제 집에 가실까요? 설교 끝나면 안 되는데요. 자, 가죽옷이 인간은 폭력으로 연약한 아내를 때립니다. 아이고 뭐 우리 남편은 제가 결혼생활 20년 30년 40년 50년 되었는데 나를 때린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 함부로 단정 짓지 마세요.

안 때렸다는 것은 그 동안 얻어맞았다는 뜻이겠지요. 힘이 약해서, 기가 약해서. 사람이 꼭 때려야 때린거고 때려야 학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결국 서로가 서로를 학대하는 관계로 보이지 않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연애 할때는 총각때는 “내 한테 시집오면, 어? 내 진짜 너를 위해서 다 해줄게.”라고 여자한테 잘 보일 때 그런 소리 할 때, 어떤 여자를 만나야 되느냐 하면, “나한테 잘하지 말고 주님한테 잘하세요.” 그런 아가씨 있기는 있습니까? 예. “왜 자꾸 나를 위해서라는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그 죄를 자꾸 반복합니까?” 뭐 이런 아가씨가 있으면 참 좋겠네.

인간은 안 됩니다. 이거는 어디 성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태어난 자체가 경건치 않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고질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가죽옷 자체가 발전을 해요. 인간의 폭력 위. 그 옷 위에다가 가죽옷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인간의 모든 폭력을 잠재우는 식의 처방이 의사이신 주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의 옷이 뭘로 만든 옷이냐 하면, 부활의 영으로 만든 옷이에요. 성령세례니까. 그럼 부활은 어디서 나왔는가? 십자가에서 이미 너는 나와 더불어 죽었다라는 것을 명시화 시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따라서 이미 죽은 자를 부활의 영으로 덮는 것이 바로 가죽옷의 완성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왜 우리가 굳이 꼭 죽어야 되는가? 우리는요, 고질병이 있어서 아무리 하나님께 잘해줘도 나를 위해서를, 나를 위해서 그 자체를 어떻게 잠재울 수가 없어요. 근데 성령의 능력, 부활의 권능이 우리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나올 때 마다 슛슛슛하고 말씀으로 계속 지적해버립니다. 그것도 경건이냐? 내가 보기에는 나를 위해서를 지금 위장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서 정말 성령의 영이 임하면요, 그 죄사함이 예수님의 피에서 나왔잖아요. 예수님의 피. 피 빼놓고 나머지 다 버립니다. 물론 한 0.5초. 숫자가 자꾸 줄어드는데, 옛날에 3초했는데. 이건 넉넉하게 줄입시다. 0.3초동안에. “피만 있으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라는 그 순간이 찾아오죠. 불현듯. 성령의 역사로.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일상생활 자체가 고질병에 시달리면서 하기 때문에 자꾸 내것을 가지려고 하는데 내 것을 가진다는 그 자체가 피 앞에서 그것보다 더 위험한 짓이 없어요. 내것을 가지면 나를 위해서 자동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자꾸 예수님의 공로, 가죽옷을 가리는 짓을 하는거에요. 그렇다면 주께서 거기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라기 말씀, 갈라디아서 말씀가지고 슛슛슛 계속해서 쏘아대죠. “모든 것을 그 나라 의를 위함이냐? 아니면 너를 위함이냐?” 계속해서 말씀 안에 그걸 담고 쏘아댈 때 진정한 기쁨과 감사는 바로 지적받는 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왜?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천국의 백성이 이미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말씀 자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얼마나 죄인인가도 있고, 쏘아대는 말씀과 함께 겸하여 있는 움직이는 말씀 판이 되어서 주께서 일으키는 일이 주님께서 스스로 완성함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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