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예언
2024년 8월 25일 예레미야 26:8-9
(26: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26: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선지자의 말에 백성들은 ‘죽인다’는 위협으로 보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조성되는 새로운 현실이 나타날 때, 어떤 식이 되느냐를 보여주신 바됩니다. 곧 말씀을 전하는 자의 등장과 그 등장된 자의 죽음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현실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이점을 미리 알아서 예레미야를 영접해서 계속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지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예레미야의 말씀 안에 최종적인 결말이 벌써 확정되는 양 전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의 태도 여부에 따라 사정이 달라질 여지가 없음을 알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실로’라는 지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먼저 ‘실로’라는 지명을 언급했습니다. 악지(惡地) 중의 악지로 알려진 실로는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 철저하게 황폐하게 될 고을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하고는 다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미 일찍이 하늘에게 유황불이 내려와서 최종 멸망당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가보면 그 멸망 후의 모습을 실제로 눈으로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굳이 믿으라고 할 필요조차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실로라는 고을은 이스라엘 지역과 차별나게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마음 먹으면 다시 회생 시킬 가능성이 있는 고을입니다.
선지자가 이 실로를 언급하는 것은 실로에 대한 따로 특별하게 오랫동안 주어져 왔는데 그 예언의 내용은 도시의 파멸보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는 도시로 언급되어 왔다는 데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49:10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The scepter shall not depart from Judah, Nor the ruler's staff from between his feet, Until Shiloh comes, And to him [shall be] the obedience of the peoples.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내린 미래의 복에 대한 언급입니다. 유다의 후손에서 왕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듣는 유다는 매우 기분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왕의 세력이 ‘실로가 오면 끝난다’는 겁니다. 실로에서 누가 오는 것이 아니라 ‘실로’라는 고을 자체가 인격화될 때 일어나는 기능에 의해서 유다의 왕위는 마감이 된다는 겁니다.
즉 유다의 왕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기 위한 왕위로서 유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망하는 방식은 파멸되어야 될 실로 도시의 운명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왜 멀쩡한 도시가 멸망하느냐입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내용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혹은 왕이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실로와 관련된 예언을 따라가면 이렇게 됩니다. 우선 사무엘상 2:31-33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그런데 이 예언은 엘리제사장 가문의 몰락에 관한 겁니다. 바로 이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왕상 2:27) 실로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지기 전에 언약궤가 있었던 곳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황폐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중심이 레위지파 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레위지파가 아닌 다윗이 속해 있는 유다지파로 바뀐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상 11:29에 이런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을 가져다 준 자가 바로 실로에서 나온 예언자입니다.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왕상 11:29-33)
역시 이것도 예언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을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진 그 결과를 믿고 싶은 겁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겨냥한 예언의 내용에 대해서 미리 대비해서 자기 몸을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들에게 최종적인 예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 되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 오리무중의 최종 예언이 십자가를 통해서 마감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맞은 죽은 겁니다. 이로서 인간 역사는 더 이상 새로운 가치와 의미는 성립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뭘 해도 하나님의 비극적 죽으심이 변경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그냥 예레미야라는 선지자 한 인간의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죽음만이 진정 최종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역대하 10:15에 보면,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큰 낭패가 일어나야 예언이 예언대로 진행됨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최종 예언 성취, 즉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확정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는 자기를 방어하거나 대비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남은 역사를 해명하는 안목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나는 무슨 예언을 붙잡아야 되는가’가 아니라 ‘이미 죽은 나에게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는가’ 차원에서 예언을 증거되고 십자가가 증거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완성된 예언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7강-예레미야 26장 8~9절(실로 예언)2408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8~9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예레미야가 말하지 않았으면, 예레미야가 죽을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고 전하라고 하는 순간 예레미야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인간에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같이 못살고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헤어짐이고 이별이고 갈라서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은.
따라서 예레미야가 속한 세계, 그 말씀의 세계가 인간에게 도달되게 되면 인간세계는 지진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에 대해서 아주 단출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이해하시려면 이렇게 이해하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인간세계 전체를 하나의 담요라고 여기시고, 담요의 끝을 붙잡고 흔드는 거예요. 담요의 끝부분을 붙잡고 흔들어 버리면 그 흔드는 에너지의 파동이 끝까지 오기 전까지의 모든 인간 역사를 물결치게 만들겠지요.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고. 꼭 무슨 환율 같아요. 주식 하듯이, 비트코인 가격 오르듯이, 금리 인상 인하같이. 계속 흔들기, 흔들기, 흔들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제를 보고 세상을 보면서, 어지럼증을 느껴요. 좀 조용하게 가면 안 되냐.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또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야, 올해는 풍년이다. 올해 회사 매출 많이 올랐다’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전쟁이 일어난다든지, 코로나가 재확산이 된다든지, 태풍이 분다든지, 그렇게 되게 되면 갑자기 화가 치밀죠. ‘하나님, 나를 좀 가만히 놔두면 안 됩니까? 왜 자꾸 이렇게 내 인생을 흔드십니까?’라고 될 겁니다. 흔드는 그 지점, 인류의 모든 역사를 흔들어 버릴 수 있는 그런 권한, 그런 능력을 지니신 분은 바로 이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만들었기 때문에 흔들죠. 그런데 흔든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서 어떤 인간도 마치 ‘천국이다’라고 생각하며 영원히 있는 세상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 흔들기를 해버려요. 왜 이 세상은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 못 되는가. 그것은 바로 마지막 역사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분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누구의 죽음이 있는가. 하나님의 죽음이 있어요. 인간 죽음은 우리가 흔히 접하고 장례식장도 많이 가지만,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죠. 어떻게 하나님이 죽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어도 하나님은 멀쩡하게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고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흔들기를 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너희들은 꾸준히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흔들기를 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도 죽었는데, 너는 왜 버티냐?”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땅은 하나님도 죽이는 인간세계인데, 네가 그 땅에서 안 죽으려고 하는 그게 네 인생에 맞다고 생각하냐, 안 그러면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냐?”라고 그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죽어버린 그 담요 위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주께서 흔들기를 해버리는 겁니다. 흔들기를 할 때 이것은 뜻이 되느냐면, 내가 스스로 도를 닦는다고 하든지, 착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담요 위에서는 다 튕겨 나가서 아무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처럼 나도 많이 낮아지고 내려놓고, 늘 겸손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이렇게 낮춰서 살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내려놔도 소용없어요. 그 사람은 아직 끝을 못 봤습니다. 내 쪽에서 내려놓고 낮추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온하게 살게 해주겠지.
이러한 꼼수를 쓰시는데, 그 꼼수는 꼼수일 뿐입니다.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경우라도,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더라도 안전지역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안전하게 보존되는 적이 없고 그런 환경을 하나님께서 조성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어떤 문제도 해결책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에게 어떤 해결책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백 독을 해도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그들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아주 중요한 말이 오늘 본문 9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라고 여기 ‘실로’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실로 근처에도 살지 않는 우리에게는 이 실로라는 지명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다가오죠.
실로라는 것은 베들레헴 위에 예루살렘, 예루살렘 위에 벧엘, 벧엘 위에 실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 위에 세겜, 이렇게 지도에 나와 있어요. 그 실로라는 지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6절에서 예레미야가 이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와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그쪽 사람들 속에 서로 소통하고, 동일하게 알고 있는 개념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실로같이 되면 안 된다’라는 겁니다. 실로 같이 안 된다는 말이 뭐냐 하면 실로라는 도성이 하나님 예언의 말씀 안에서 어떤 식으로 부각 된 도성이냐 하면 완전히 망해버린 도성, 하나님에게 벌 받아서 완전히 망해버린 도성의 이름이 바로 실로입니다.
폭격 맞아서 완전히 망해버린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고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된 도시가 실로입니다. 그러면 실로라는 도시가 완전히 망했는가. 그렇지 않아요. 성경에서 완전히 망한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건 이미 망했어요. 소돔과 고모라는 사람들이 볼 때 과거지사로 봅니다. 그쪽에 찾아가면 완전히 황폐해요. 아~, 그 도시는 끝났구나.
그런데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 난해한 것이 뭐냐 하면 완전히 망한 도시가 아니고, 망할 것이라고 예언된 도시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재수가 없는 거죠. 그야말로 이건 악지(惡地) 중에 악지, 재수 옴 붙은 지역이 실로입니다. 그런데 아직 망하지는 않았어요. 이게 인간에게 엄청난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악지가 아니고 약점이 되는 거예요.
현재 일본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일주일 전부터 했어요. 아무 소식 없습니다. 지금 일본 안 일어났어요. 이란이 이스라엘 친다는 것은 벌써 일주일도 훨씬 넘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일본 동쪽 해안에 큰 지진이 온다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궁금해서 일본 정부에 묻습니다. ‘지진 일어난다더니 안 일어나네?’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하는 말이 60%~80%의 확률로 조만간 온다는 겁니다.
이건 뭐 세례요한도 아니고, 가까이 온다고 해놓고 아무 일도 없고,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놀러 갑니다. 이번 추석에 난리 아니에요. 일본으로 놀러 가려고. 제사도 없겠다, 뭐 놀러나 가면 되죠. 그런데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믿을 것인가를 두고, 말씀을 믿자는 쪽이 예레미야 쪽이고, 백날 그 말은 구라고 거짓말이다. 도대체 그런 협박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그 협박 안 통한다. 언제까지 그 말씀이 진실이 되겠느냐는 거죠.
이건 뭐 양치기 소년도 아니고 늑대가 온다고, 온다고 했는데 안 오고. 진짜 늑대 오니까 안 믿어서 양 다 잡아 먹히고.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참~ 어려운 게요,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면 좀 겁이라도 나겠는데, 노아 때는 물 심판 온다고 하고, 지금은 불 심판 온다고 하고. 확률은? 백 프로!! 그럼 언제 오는데?
그래서 서양 사회에서 불 심판 날짜를 사람들이 계산했어요. 자꾸 뭉그적거리기만 하고, 불 심판이 안 오니까. 언제 온다고 하냐면 ‘9’자 돌림에 온다는 겁니다. ‘999년에 온다’라고 했다고 1000년 지나도 안 오니까, 1999년에 온다고 하고 또 안 왔죠. 하여튼 ‘9’자 달릴 때마다 계속 계산했어요. 1499년에 온다고 하고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프랑스, 1503년 ~ 1566년, 의사, 점성가)같은 인간은 1599년에 온다고 했는데 안 왔잖아요.
1999년은 9가 3개나 겹쳤어요. 이건 확률이 확 높아지는 느낌 들지요. 지금 기후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기후가 인류 역사를 12시 땡으로 본다면 이건 23시간 59분에 온다는 거예요. 지구 환경문제 곧 망한다는 겁니다. 망한다는 것이 벌써 100년이 넘었어요.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또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 3000년 지났으니까, 이틀 되었네요. 그럼 기다려야지. 또 안 와요.
예수님 재림한다는 것이 날짜를 계산해 봐야, 날짜는 계속 지금 수정하고 또 수정해요. 수정을 너무해서 이제 지겨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날짜 계산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레미야는 이렇습니다. ‘내가 실로처럼 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해야 너희들이 내 멱살을 쥘 것이 아니냐?’라는 겁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멱살 쥐고 죽여버린다고 해서 실제로 물 없는 구덩이에 집어넣어 버렸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넘어섰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세상 역사는 끝났어요. 이미 끝났습니다. 세상 역사 더 진행해 봐야,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다는 이 사실은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아요. 예레미야는 죽을 뻔했지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미 죽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은 인간 손에 죽었다 치고, 이제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을 죽인 인간에 대한 모든 저주와 징벌은 예언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는 어떻게 한다? 말씀에 있는 예언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 죽이는 쪽으로 번져갔는지 그것만 찾아보면 되겠죠.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에 누가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실로’ 자체가 올 때까지, 실로라는 것은 어떤 마을 이름이에요. 마을이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마을이 어떻게 움직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예언되기는 실로 자체가 오기까지 유다는 이 땅에서 왕이 된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숙제를 준 거예요. 유다가 왕이 되는데 어디까지냐. 실로라는 그 공간, 실로라는 공간이 유다가 왕이 되어있는 그때를 공격할 때까지 주께서 오신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너희들이 해석하라. 우리에게 이 시간 숙제를 주신 거예요. 숙제를 주셨으면 숙제를 풀어야죠. 이렇게 됩니다.
유다의 자손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의 공간 역할이 되게 되면, 실로라는 유다 나라에는 일개 지명에 지나지 않는 그 공간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공간이 예수님같이 인격화되는 순간에 이 세상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심판 주로 오실 때, 그때 실로로 오신 그분이 심판 주 기능으로 행사하면서 유다 자손과 연결 되어있는 예언을 창세기 49장 10절에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예언입니다. 복잡하죠. 복잡해요.
“유다야, 너를 통해서 예언할게”
“말씀하옵소서”
“네게 왕이 나타날 것이다”
“아우~기분 좋아. 아버지, 기분 좋아요. 제 후손이 왕이 된다니”
“기분 좋지? 그 왕? 그 왕이 이스라엘을 작살내는 왕이다. 됐냐?”
“그때가 언제인데요?”
“그분이, 실로가 오는, 실로가 파멸되는 기능을 행사하는 분으로 오실 것이다”
“누구에게요?”
“너의 족보에게. 너의 후손이 그렇게 될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예언이, 이 예언이 과연 그런지, 증명되는 사건이 군데군데 터져야겠죠. 왜냐 하면 담요를 쥐신 분이, 인간에게 죽었던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인간에게 죽었잖아요. 그 죽으신 분이 역사를 털어버리기 위해서 담요를 쥐고 흔들면,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 흔적이 털리게 되는데 그 사건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군데군데 그게 생겨난다는 이 말입니다.
사무엘상 2장 27~2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거든요. 엘리 제사장이 족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 자식을 더 귀히 여겨서 네 집안은 영원히 멸망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건 어린 사무엘이 한 것이 아니고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했던 그 예언이 열왕기상 2장, 열왕기상 11장, 역대하 10장 15절에 나오는데, 역대하 10장 15절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실로 사람 아히야가 어디에 등장하는가. 그 전에 열왕기상 11장 29~32절에 등장합니다. “그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라고 예언했어요.
그 예언이 성취가 된 겁니다. 그러면 아까 말한 사무엘상 27장의 예언은 어디 등장하는가. 열왕기상 2장 27절에 등장합니다. 거기에 실로가 등장해요.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도대체가 담요를 흔들 때, 처음에 어린 사무엘과 같이 살았던 엘리 제사장이 망한다는 그 예언도, 바로 엘리 제사장이 있는 그 동네가 실로예요,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그걸 징검다리로 해서 그다음에 실로와 관련된 유다자손에 왕이 등장한다는 것을 배신하고 ‘싫어. 우리는 우리끼리 왕 만들 거야’라고 했던 북쪽 여로보암이 있던 그 나라에서 시도할 때, 실로에 있던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지적하면서 예언대로 그들은 멸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실로라는 이 지명이, 실제로는 이 도성이 멀쩡해요. 멀쩡하니까 인간들이 자신만만해요. 그런데 뭘 봐야 하는가. 실로의 말씀이 징검다리를 통통 뛰어서, 마지막에 도달한 것이 뭐냐. 실로라는 예언을 남기신 그 하나님이 그 실로의 예언을 자기가 떠안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유다민족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실로의 멸망 예언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의 죽음과 그 이상인 메시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처지는 뭐냐. 크리스마스트리에 보면 반짝반짝거리는 전구들 있지요. 깜빡 깜빡거리는 전구들이 나무 전체에 장식되어 있지요. 그 전구 장식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하면 크리스마스트리에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을 다 이루면 오늘날 저와 여러분과 같은 성도,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러분 같은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어 있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전구예요. 늘 켜져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말씀에 관심 없으면 이게 꺼져요. 그런데 성령께서 켜면, 우리가 말씀 위주로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켜진다고요. 그런데 또 돌아서면 꺼져요.
어쨌거나 붙어 있는 그곳이 어디냐. 크리스마스트리이고 십자가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세상 살다 보면 짜증이 나잖아요. 짜증 나면 뭐라고 한풀이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낙서를 해버려요. ‘나는 십자가 믿는다’라고 끄적끄적하면서 ‘됐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는 거죠.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나라와 함께 실로라는 예언을 알면서도, 실로 예언을 직접 이야기한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그 이유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결심대로 못삽니다. 그러나 깜빡깜빡하게 하는 그 능력이, 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서 나왔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결심대로 사는 줄 알았습니다. 야무지게 믿음 있으면 그걸로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 능력에 걸쳐있음을, 거기에 얹혀있음을, 이게 얼마나 큰 영광스러운 자리인 것을 이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