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름수련회 신명기강해 제 9강 : 유령성 - 이 근호 목사
마지막 시간 하겠습니다. 신명기 34장 5절에 모세가 죽게 되는데,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부한 게 있습니다.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한다. 건너가지 못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바라보기만 하게 했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 모든 지평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첫째 시간에 언급한 ‘한계’입니다.
모세라는 몸이 있는데 이 몸은 죽는 몸입니다. 죽는 몸인데 이 죽는 몸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유령성을 갖고 있어요. 유령성. both and neither-nor. 서로 반대되는 것같이 함께 있는 것.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몸에 같이 있는 것. 이것이 인간세계에 없는 순수사건인데 흐르지 않는, 역사와 함께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 남는 그런 순수사건이에요.
이것은 안에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 한계를 볼 줄 아는 몸으로 달라지는 거예요. 인간의 육신이 갖고 있는 그 한계, 그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맞아, 그게 한계야.’ 라고 볼 줄 아는 그러한 몸은 이 안에 순수사건을 지니고 있는 몸, 유령성을 지닌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시려면 출애굽기 33장을 보셔야 돼요.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왜 모세 다음에 차기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여호수아가 되느냐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왜 갈렙은 안되고 왜 여호수아가 되느냐? 그 이유가 출애굽기 33장 11절에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갈렙과 여호수아에서 왜 갈렙은 탈락하고 여호수아가 되느냐? 그게 모세가 지닌 유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렇게 쭉 이야기하면서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하는데, 이것이 마치 하나님이 친구한테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화를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그게 있을 수 없죠. 왜? 죽으니까.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데 18절에,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목격할 수 있는 자가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천사나 가능하죠. 천사나 죄가 없는 상태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모세는 죄인이에요. 죄인인데 죄인의 반대말이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몸에 같이(both) 있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몸에 공존하고 있고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모세의 진척과정, 인생의 진척과정을 통해서 두 가지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가지 현실.
두 가지의 현실이 이제 펼쳐집니다. 한 가지 현실은 언약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현실이에요. 또 다른 한 가지는 뭐냐? 전쟁을 하면서 언약의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데 새로운 현실중 하나는 ■외부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현실, ■이 지상에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유령성을 지니는 집단의 등장.
유령성을 지니는 집단의 등장이에요. 모세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같은 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새로운 신체들이 등장하게 되는 현실이에요. 이 새로운 신체들의 등장에 대해서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구체적인 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나오는데, 첫째 사망-둘째 사망 이렇게 짝을 지우던 것이 언약에 의한 현실 속에 투입됨으로써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이 조합을 이루고 일치를 이루면서 유령성을 지닌 모세 같은 새로운 몸이 등장하는데 이 몸이 뭐냐? 안에 언약이 만들어낸 현실이 삽입되어 있는 성도에요, 성도.
성도의 자기 정체성, 주체성 자체가 이중성을 띄고 있는 겁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윤선도의 시조 있죠. 나무야, 풀이야? 정체를 밝혀라. 아니,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뭐야? 너 죽은 거야, 산 거야? 바이러스 같아요. 가만있으면 단백질 덩어리인데 RNA, DNA 들어가면 이게 움직여요. 생명이 아니고 유기물질 같은데 뭔가 숙주를 만나면 이게 살아나고 숙주가 없으면 다시 유기물질, 그냥 생명 없는 물질로 변하는 그 경계선. 이것을 달리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유령 같은 존재죠.
이것이 기존의 현실, 인간의 눈에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현실 속에 언약의 현실을 가진 성도가 같이 섞여서 살게 하는 이 환경. 바로 천국은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천국은. 유령성을 지니고. 그것의 시초, 스타트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성령으로 잉태된 몸인데 어떻게 육신과 만납니까? 죄 있는 육신이 어떻게 거룩한 성령과 만나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현실인지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단독으로 죽었고 부활할 때 사흘 만에 단독으로 본인만 부활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언약 안에서 이걸 어떻게 확장시키느냐 하면, 예수님 죽을 때 너도 죽었고 예수님 부활할 때 너도 부활했다는 거예요. 언제? 우리가 언제 부활했는데요? 부활한 꼬라지하고는. 이게 부활한 몸이에요? 이게 부활한 몸입니까? 맨날 병원에 가고 아프고 아토피 있는데, 이게 부활한 몸이에요?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웃는 거야 우는 거야, 도대체? 성도의 특징은 본인이 본인을 종잡을 수 없다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종잡을 수 없어요. 본인의 앞길도 종잡을 수가 없고.
다만 both and neither-nor, 뭔가 이질적인 것이 한 육체에 있으면서 같이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본인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하고요. 언약으로 설명하는데 자기에 대해서 언약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뭐냐?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언약의 완성된 레벨에서 자기를 다시 한 번 파악하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너는 착하냐?”고 물으시면 답변은 뭐냐? 나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그 한계를 유일하게 아는 자가 성도기 때문에 “나는 뭘 해도 죄가 됩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뭘 해도.
한계. 선악을 먹어서 선과 악 중에서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이 한계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생명나무가 같이 동반하니까, 생명나무 입장에서는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나빠요. 윤리, 도덕을 따지는 그 자체가 죄에요. 바르게 살면 안 되냐. 착하게 살면 안 되냐. 이 자체가 악이에요. 그게 선악 마인드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래서 유령화 된 몸에서 이 한계와 더불어서 한계를 벗어난 시선을 같이 이야기해줘야 복음이 전파되는 거예요. 언약의 완성이 전파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킬과 하이드처럼 로마서 7장에 보면 그 두 가지 다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나는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악이 선수 쳐서 그걸 하지 못하게 하고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하고 있다. 그게 바로 나다. 그런데 이 나의 한계 아래 놓여있는 나, 선악과를 따먹어서 항상 선하게 하고 싶어도 악 쪽으로 치우치는 이상한 시스템이 내 안에서 가동되고 있다.
내가 선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그것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기 때문에 선악 조절에 대해서 내가 감당이 안 되고 내 안의 선악 자체가 내 스스로 통제 안 되는 그것이 바로 나의 한계라는 겁니다. 한계.
세상의 모든 윤리, 도덕과 철학과 종교가 맨날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바르게 사세요. 바르게 살아야 당신도 살고 이웃도 살고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맨날 하는 이야기가 이거에요. 정의롭게 살고 남을 해코지하지 말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고 공중도덕과 질서를 지키고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내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서 남한테 혹시나 피해가 가지 않을까를 늘 생각하세요.
문 앞에 신발 벗고 갈 때는 신발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서 신발 사이를 좁혀놔야 다른 손님들이 그 식당에 신발 벗고 들어올 때 다른 손님이 신발 놓을 자리가 있으니까 이게 교양 있는 현대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들어오면서 신발 휙 벗어서 세 바퀴 돌고 던져지면 주인이 짜증내면서, ‘이거 보면 가정교육 다 드러난다니까.’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그리고 끝나고 난 뒤에 다시 평가하라. 이 3항이 한 조가 되어 있잖아요. 사람이 돈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평생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나로 인하여 남이 피해입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 아니에요? 인간의 인간 됨,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 아닙니까?
그런데, 그래서? 그래서 뭐?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게 뭔데? 그래서 뭘 기대하는 거야?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뭘 기대하는 거야?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평생을 살았다. 끝에 마지막 부를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던 'My Way'. 인생의 마지막 커튼이 내려오고 나는 지금껏 my way, 내 방식대로 나는 내 삶에 충실했다. 욕하지 마라. 갑자기 트롯트 쪽으로 막 나가는데… 누가 나를 욕해?
그런데 그 선악과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인 시선으로, 생명나무에 이미 들어온 새로운 자아 정체성으로 그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교재 제일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p.9【Ⅲ 결론】밑에서 5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삐-삐- 주의하라. 주의하라. 삐-삐- 정신 차려.”하는 경고. 선악지식을 아는 한계 안에 있는 경고죠.【“주의하라.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말씀을 대하라.】건성입니다. 진성이 아니고 건성으로.【진리라고 여기는 경솔한 짓은 하지 말라. 다 지나간 에피소드에 불과하다.】성경의 모든 내용이.【심심하거든 보라. 굳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다.”】이게 우리가 우리한테 계속해서 설득시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아주 손쉽게 이 설득에 넘어갑니다.
【그렇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한번 적어볼게요. ‘그렇다.’ 성경, 이 신명기는 나랑 상관없어요. 그렇다. 오케이.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 하면 ‘아멘’이죠. 할렐루야, 아멘. 그렇다. 성경은 다 지나간 이야기다. 선택과목은 될 수 있어도 필수는 되지 않는다.
‘나랑 상관없다.’ 여기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한계 안에 있는 ‘나’가 등장합니다. 한계 안에 있는 나의 특징은 나의 의미가 다치지 않으면서 한계 너머에 새로운 지식을 확보하여 후닥닥 다시 내 쪽으로 그것을 가져옴으로써 나의 질적인 발전과 도모를 시도하는 게 기존의 나에요.
인간의 능력은 결국 측정하는 게 나라는 현실, 기존의 현실, 하나밖에 없는 단일 현실이에요. 언약의 현실을 느끼지 못하고 단일 현실에 있으면 단일 현실은 항상 지평선을 바라보는 시선을 내 쪽에서 ‘쏘세요’ 하면서 쏘는 거예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한 발짝 다가서면 두 발짝 멀어지는 거예요. 뭔가 측정하고 관찰하고 상대를 장악해서 내 소유화시키고 파악하려면 저쪽 지평선, 저쪽 대상은 또 달아나고 있어요.
도대체 어디까지 공부해야 되고 어디까지 연구를 해야 내가 진리로 인하여 내 심적인 동요가 멈추겠는가? 그 이야기를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쌓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탐구했고 많은 여성을 만났고 집의 정원을 꾸몄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됨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솔로몬만 그렇게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시편 90편 한 번 보겠습니다. 여기 시편 90편에 보면 본격적으로 내용 들어가기 전에 앞에 표제, 제목이 있죠. 제목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모세의 기도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4절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천 년이 하루 같다 이 말이죠. 모세는 유령성을 갖고 있거든요.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그땐 신났죠. 한창 꽃이 필 때 나이가 얼마냐 하면 30대에요. 30대를 정점으로 해서 그다음부터 포물선 그리면서 이제 꼴아 박습니다. 그래서 30 지나고 난 뒤에 어떤 노래를 불러야 돼요? ‘서른 즈음에’ 이런 거.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래서 가수 김광석이 예수님 나이에 돌아가셨잖아요. 점점 더 멀어져간다. 도대체 정점으로부터 포물선 곡선이 점점 더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꿈을 꾸게 되면 거기 나오는 여러분들의 모습은 30대에요. 전혀 아픈 것이 없는 30대. 또는 20대의 군대생활. 이게 꿈에 막 나타나요.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저녁이 되니까 아침에 꽃 핀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한계 있죠.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 손을 타지 않은 생명나무 입장에서 한계의 진솔한 면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왜 죄냐가 이 앞에서 다 드러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것이 왜 죄입니까? 그냥 죄라고 하니 죄에요. 선악과 따먹을 때 뭐 경솔하게 따먹었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죄니까 죄인 거예요.
인간은 그냥 죄를 말하기 위해서 인간 앞에 선악과를 두었고 따먹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죄를 바리새인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죄가 뭐냐? 죄는 바로 자기 의에요. 자기 의. 자기 의입니다.
시편 90편 조금 이따 다시 보고요. 신명기 31장입니다. 신명기 31장 26절에,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너희가 목이 곧고 패역하다는 사실을,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동할 때 그 언약궤 옆에 같이, 너는 이러한 이러한 반항과 반발을 심하게 했다는 사실을 적어서 그 책을 언약궤와 함께 이동시켜라. 이동시킬 때 도착하는 곳, 그 나라가 천국이고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그곳이 천국이에요. 내 모든 죄가 그대로 가야 그 천국이 수치스러운 나의 과거를 인정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수치스러움을 우리 주님이 어떻게 해결했는가 주님만 영광을 받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남은 생애는 죄만 지으라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걸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직시하라.’ 내면의 소리를 늘 들어야 돼요. ‘성경 공부했냐? 그거 다 소설이야.’ 이런 소리를 늘 들어야 돼요. 이런 소리를. 다른 사람 봐. 성경 보는 사람 없잖아. 네가 왜 유별나? 너 안 해도 되는 짓을 왜 하는 거야? 그냥 조용하니 살아. 조용하게 살다 죽어, 그냥. 아무도 몰라. 천국? 성경에 나오지, 아무도 천국 있는 걸 본 사람도 없어.
그냥 possible, 어떤 가능성? 일단 보험 들어놓으면 없어도 보험금 그다지 손해 안 보고. 그래서 요즘 교인들은 헌금 안 해요. 그다지 손해 안 보려고. 몰빵하다가 돈 다 날리는 수가 있어요. 어차피 있는지 없는지 긴가 민가 하는데 거기다가 무슨 자기 목숨을 바칩니까. 간이나 보죠. 발만 살짝 담갔다가 언제든지 뺄 준비를 하는 거예요. 큰 교회 다니면서 뒷자리에 앉아가지고 점심값만 천 원씩 내고 점심 먹고 가다가 나중에 교회에서 시설이 노후 돼서 교육관 새로 짓는다고 하면 후딱 빼고 다른 교회 가면 되잖아요. 어차피 몰빵할 거 아닌데 뭐요.
그래서 교재 제일 끝에 뭡니까?【그렇다.】아멘이죠.【그렇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지금 수련회하는 모든 게 나와 상관없어요. 그냥 지식나부랭이 이거 듣는 거죠. 그런데 그다음 보세요. 마지막 결론까지 봐야 돼요.【내가 나에 대해서 남이 되는 자들에게만 진리다.】내가 나에 대해서 남이 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도 하나의 취미고 성경은 그냥 봐도 되고 안 봐도 된다고 여겼던 그 나. 그 나가, 생명나무 시선에서 ‘누구세요?’. 두 개의 나, 생명나무 속에 있는 나와 선악과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나, 이 두 개의 나가 로마서 7장에서는 함께 있는 겁니다. both and neither-nor. 서로가 다른, 서로 다른 정도가 아니죠, 서로 반대되는 것이 내 몸 안에 하나로 두신 이유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한 성령의 기막힌 작전이고 전략인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이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노릇하라고 성령이 오신 거예요.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용당한 거예요, 하나님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편인 줄 알았어요. 그럴 줄 알았지롱?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피조물을 영원히 피조물 자기 자리로 고정시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 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이고요. 우리는 피조물인데 주님만 증거하는 피조물입니다.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나오잖아요. 천국 가서 면류관도 집어던져요. 집어던져도 괜찮아요. 미쳤어. 내가 이걸 왜 써? 이 면류관을 내가 왜 써. 뭐했다고 써? 주께서 성령께서 다 하셨는데. 이걸 주님 발 앞에 던지죠.
예수님 발 앞에 향수 던지고 눈물로써 주여, 드디어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군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뭐에요? 내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잖아요. 내 지평선밖에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이, 지평선 너머까지 오신 그 유령성에 의해서 언약의 세계라는 새로운 현실에 접합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 여인은 뭐 행실 나쁘다고? 뭐 수군수군 소문 나쁘다고? 이야기하라 해. 나 소문 나쁘다 해. 너는 단일 현실밖에 모르지?
언약에 두 개의 현실이 있는 거예요. 그 단일 현실에서는 제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인간의 자기 의를 지키는 것에 모든 걸 다 바쳤어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욕 얻어먹지 않는 인생, 이만하면 선방한 인생, 완벽하진 않지만 선방한 인생. 이 유령성이 어디서 생산되는가? 바로 광야와 약속의 땅 그 사이에서 유령성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서 친구처럼 지내고 하나님의 영광까지 봤어요. 봤으면 굳이 이 땅에 다시 올 이유 없습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자기는 이미 구원에 온전하게 되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니 아니야. 그게 온전한 게 아니야. 네가 백성들 속에 가서 장차 예수님이 얻어먹을 욕을 네가 다 얻어먹는 그것이 너의 온전함이야.”
그게 너의 온전함이에요. 질적인 일의(一意), 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의미가 내 속까지 파고들어서 나를 완전히 덮쳐버릴 때 모세는 오늘 신명기 33장의 말씀처럼 내(여호와) 종이에요. 나와 연관성이 있는 종이 되는 겁니다.
이 유령성을 곁에서 누가 봤는가? 여호수아가 봤습니다. 여호수아야, 많이 기다렸지? 너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래? 하나님께서는 아주 사소한 것을 빌미잡아 나로 약속의 땅에 못 가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이 유령성이 작동하는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에 너를 집어넣게 해서 너도 나처럼 유령성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께서 너에게 맡겼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서 제일 먼저 만난 존재가 누구입니까? 사람을 만났어요, 누구를 만났어요? 군대 장관, 천사를 만났어요. 너 언제까지 인간일래? 언제까지 네가 인간일래? 너는 유령이 되어야 되지, 언제까지 인간일래.
네가 아는 현실, 그 현실 바깥에 인간이 측정해서 아는 현실, 일상생활에서 눈으로 늘 목격하고 있는 해. 그런데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그 해가 한계 바깥에 있는 언약에 의해서 멈췄어요. 중지했어요.(10:12-13) 놀랐어요. 놀랐어요. 따라서 해가 멈췄다는 것은, 해라는 장막 뚫고 저쪽 한계 바깥에서 안에 있는 언약적 백성에게 유령성을 제공하기 위해서 해까지 주께서는 다루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해 멈춘 것 가지고요. 또 과학자들은 그때 천체의 캘린더를 찾아서 그때 천체 배열이 어떻게 돼서 해가 멈췄는가? 동방박사가 별의 움직임 따라갔다는데, 그 별은 무슨 별인가? 그것은 또 도망치는, 지평선을 따라가겠다는, 자기 의를 포기 못하는 행동이에요.
성경 전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기도하기를 오직 하나만 기도했어요. 하나님이여, 저 성도들이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3:18-19) 인간이 기존에 아는 사랑, 나를 지켜주는 사랑 말고 주님을 증거하는 데에 필요한 그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인간 사랑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백지영 가수가 잘 이야기해줬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는 거예요. 결혼해서 내 거라고 여겼는데 결혼하니까 남이었어요. 발 빼려 했는데 애가 생겼네. “네가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애는 책임져야지.” “그래!” 자기 의가 있으니까 “그거 책임진다. 나도 인간이거든.”
육에서 난 자가 육의 한계를 못 벗어나서 나이 많아지고 나중에 요양병원에 갈 때 기껏 하는 소리가 “그래도 나는 자식 네 명 낳고 내가 다 대학 보내고, 어? 결혼시키고 시집보내고 다 했어! 뭐 나 자식들한테 부끄러울 것 없어.” 전화해서 “돈 보내라. 이번에 언제 내려올 건데?”
이것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전화 안 할 거예요? 자식한테. 마찬가지인데 성도의 그 자기 의, 목이 곧은 것, 교만한 것, 그게 놀랍게도 성도는 언약궤 옆에 나란히 같이 비치되어 있다는 거예요. 못난 자, 자기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 자기에 미쳐 사는 인간, 그것을 천국까지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언약궤가 그것을 이끄십니다.
그때 그 언약궤는 서슴없이 요단강을 건너가요. 보통 요단강은 강물이 무릎까지 와서 바지 올리고 건너가면 되는데, 딱 건너갈 타이밍에 갑자기 장마가 일어나서 한 시간당 100mm 내려서 물이 위쪽에서 밀려오고 있었던 겁니다. 들어가면 죽어요.
그런데 여기 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여호수아의 지시를 받고 “언약궤 앞장세워라! 이 홍수 오는 타이밍과 언약궤 메고 우리가 들어가는 타이밍이 하나님에 의해 언약적으로 일치했다.” 왜? 모세 때 약속에 의하면 언약궤가 앞장서고 백성은 언약궤 따라 뒤따라가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여리고성 갈 때도 뭐를 앞장세웠는가? 언약궤를 앞장세웠어요. 아니, 언약궤 안에 뭐가 있는데? 언약궤 안에는 우리가 범죄한 증거들만 있어요. 범죄한 증거들이 있는데 어떻게 여리고성이 무너집니까? 보이지 않는 유령성에 의해서 우리 죄인을, 먼저 용서받은 쪽이 하나님의 언약의 죄 사함의 혜택이 없는 자를 전쟁이라는 현실을 새로운 현실로서 언약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기 부재(不在)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재 증명. 이 말 한번 보세요. 예수님의 부재 증명이니까 예수님은 여기 없죠. 영구 없~다. 영구 없다고 발언하는 그 영구는 있어요, 없어요? 내가 있으니까 내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왜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가? 인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한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과 죄인인 주님과의 차이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불신자들이 성도들보고 “예수님 어디 있나? 있으면 내가 믿을게.” “예수님 없어.” “넌 예수님 봤어?” “안 봤어. 없어.” “없는데 그 없는 하나님, 없는 예수를 네가 왜 믿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다는 존재로서 계십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뭐냐? 주의 이름이 계시죠. 주의 이름은 없어요. 안 보여요. 다만 주의 이름은 자기 백성이 얼마나 교만하고 자만하고 잘난 체하는 그것만 증거로 수집할 뿐이에요.
그 주의 이름이 신약에 오면 뭐가 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드디어 주의 이름이 하나의 보통 사람으로 출현하게 되죠. 그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도 그 언약성의 혜택을 입고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여기서 다시 시편 90편으로 돌아옵시다.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다른 사람하고 죄 논하지 마세요. 그것은 소용없습니다. 자꾸 멀어지는 또 하나의 지평선 논쟁밖에 안돼요. 시대가 변하면서 기준점이 자꾸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대 철학에서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윤리 도덕이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 아나운서가 반바지입고 아나운서 하는 게 어디 있어요. 요새는 아나운서가 반바지입고 하고 이런다고요. 카메라는 위에 비추니까. 신입사원들이 뭐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끼리 비교하는 것은… 자꾸 세대차이 난다, 기성세대하고 MZ세대하고 차이나는 겁니다. 자꾸 차이의 핑계를 대는데 둘다 절대적인 게 없어요. ‘나 때는…’, 맨날 나 때 이야기하거든요.
누가 주의 얼굴빛 앞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보이는 예수님이, 예수님 자기 육신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기준점이 뭐냐? 아버지가 어떻게 되는 기준점을 고수했어요. 그게 예수님이 갖고 있는 유령성입니다. 두 개의 현실이 다 공존하고 있어요.
그 상황이 오늘날 성도가 처한 똑같은 상황이 되는 거예요. 성도가 죄를 지어도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이미 처리하고 청산한 십자가 앞에서 죄 아닌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3장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이 끌려가고 있다, 또는 빨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세탁기 안에 집어넣으면 통 안에 빨려가잖아요. 지금 언약의 중력에 사도 바울이 끌려가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도록 끌어가는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도 바울은 지금 만끽하고 있어요.
주여, 제 육체 언제 거두어 가실 건데요? 그게 사도 바울의 자기 개인적인 마지막 욕망 아닙니까. 자기 개인적인 마지막 욕망은 이 땅에서 빨리 죽는 겁니다. 그 배출구에 욕실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빨려 들어가는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그 끝에 뭐가 있느냐? 영생이 있는 거예요. 좁은 길이고 그 끝에 생명이 여기 있다는 겁니다.
다시 시편 90편에 와서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뭐 아주 우린 즐겁죠. 주의 분노를 우리가 알다니. 한계 밖을 알다니.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70, 80 평생을 손바닥에 길게 그려보지만 손바닥을 좁히면 이게 제로가 돼요. 순간이 되죠. 없죠.
그래서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아예 “날아가나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을 디뎠다, 이 땅에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는 말조차 할 자격과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날아가는 거예요. 주님을 향하여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누구의 기도라고요? 이게 바로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의 기도.
이제 남은 시간을 아까 남겨둔 이야기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20장 한번 봅시다. 이게 정말 신기해요. 첫째 사망과 짝을 이뤄 한 조를 이루는 것이 첫째 부활이에요.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이 함께 있다는 것, 사람 안 믿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지. 네 안에 뭐 별난 게 있다고 첫째 부활이 있어?
이걸 증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도의 목을 날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죠. 목 베인 영혼들(“…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 20:4). 짐승과 결별하면서 그 짐승에 의해서 목 베인 영혼들. 이게 첫째 부활이에요.
자, 여기가 공산주의 사회 북한이다. 여러분들이 몰래 성경공부 하다가 걸렸다. 그래서 목 베인다 합시다. 시범조로 김정은이 총살하듯이 대포로 쏘듯이 “너는 시범조로 당해야 돼. 그래야 예수를 안 믿지.”하고 당했다. 목을 쳤다.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목을 칠 때, 1번-간지럽다, 2번-아프다, 몇 번입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초대교회에 전설에 의하면 사자가 있는 경기장에 가둬놓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일 때,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난리 났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먼저 먹잇감이 되겠다고. 번호표 뽑아라. 줄 서라. 뭐 난리 났어요. 아, 물론 전설이겠습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생각이에요. ‘내가 죽는 것은 주를 만나서 말씀대로 너무 기쁘긴 기쁜데, 아직 딸내미가 시집을 안 갔네. 아직까지 애가 어려. 손자가 아직 유치원 다니고 있어요.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데.’ 꼬리가 길어요. 우리의 기억의 꼬리가 길어요.
딸 결혼할 때 아빠 없이 멀뚱한 것보다도 아빠 손잡고 들어가면 “저 집 자식들 참 잘 키웠다. 부모도 멀쩡하네.” 다들 멀쩡해요, 하여튼. ‘멀쩡하네.’ 하고 오만 오천 원짜리 식사 또 맛있게 하고 “아, 결혼식 괜찮다. 부럽더라.” 집에 가서 그런 소리하기를 기대하는 것, 이게 뭡니까? 자기 의죠. 자기 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은 주께서 아예 목을 그냥 날리는 거죠.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상황(첫째 부활)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그래서 짐승의 밥 되기를 먼저 다투었다는 그것은 신앙에 하등 도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앙을 막아요. 왜냐하면 평소에 그런 일이 없더라도 이미 우리는 유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20억? 쳇,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이 지옥에서 20억 가지고 더 살란 말인가, 크루즈 여행하면서? 그런데 가고는 싶네? 아빠, 나 변호사 됐어. 변호사? 그게 뭐가 중요하냐? 예수 믿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데 촌 동네에 누구 둘째 아들 변호사 됐다 하면, 기분은 좋네? 내가 키운 보람 있다.
이건 일상이에요. 일상. 우리가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 안하나 주께서 그렇게 언약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이룸의 한 요소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일어난 어떤 사건 같은 것은 내 안에 있는 순수사건, 인간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예상할 수 없는 순수사건을 위해서 일상의 많은 사건들이 순수사건과 연관해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쯤 내 목숨 갑니까? 뭐 순교할까요? 그것도 욕심이에요. 탐욕이에요. 시험 드는 이야기에요. 괜히 죽을 때 외제차 받쳐 죽으려고. 그냥 트럭에 받쳐 죽으면 되지. 자기가 폼 나려고. 이거 자기 의입니다.
첫째 부활, 이것은 한 몸이 부활됨으로써 상관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있는 일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고 어떤 특검법이 통과되고 그런 것들은 성도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런 것들과는 격리가 되고요. 이 몸은 이미 유령성으로 예수 안에 합세되었기 때문에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에 관계없는데요.
그다음 둘째 부활과 둘째 사망. 서로의 다른 현실성이 노골적으로 다 정리정돈, 마감되는 거예요. 둘째 부활, 천국의 영광 속에 둘째 부활. 주님이 마련한 둘째 부활이죠. 여기 둘째 사망은 지옥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라 할 때,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끝으로 이겁니다. 첫째 부활-첫째 사망이 한 몸으로 같이 있다면, 그것이 확정됨으로써 동시에 무엇도 확정되느냐? 천국과 지옥도 확정됩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보고 “천국 있으면 보여줘. 있으면 내가 믿을게.” 할 때,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나를 봐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거든.” 끝. 끝이에요. “나는 죄밖에 지을 게 없거든.” 끝.
나에게 일어난 그 언약적 고정성이 결국은 모든 인간이 죽어도 천국과 부활로 다시 살아나서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으로 갈라짐을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유령적인 시간성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이미 마음껏 시간의 끝, 역사의 끝까지 여러분의 작은 몸으로 다 표현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세기 때문에 모세는 구경만 하고 다시 도로 주님 품으로 갑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시체 찾는 것은 인간의 단일 현실에서 찾지, 모세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고 신명기 18장에 보면 같은 말이 나오는데 그것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같이 적용되어 있는데 신명기 18장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선지자 되었고 오실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 이후에 우리가 오늘날 이 시대,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로서 모세 같은 유령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마음껏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허락하신 대로 두 개의 현실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의 세계에 갇혀 있다가 말씀의 세계, 한계 밖의 세계를 성령님의 은혜로서 알게 되니 감사합니다. 이 주님의 참빛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하나님의 의가 없게 된 것을 이제사 발견한 그 기쁨으로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 남은 생애를 다 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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