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거짓 동행

아빠와 함께 2024. 7. 11. 15:46

거짓 동행         

2024년 7월 10일                  본문 말씀: 말라기 2:4-6

(2: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2: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2:6)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야곱, 즉 이스라엘 나라에게 주신 언약을 압축하면 레위언약이 됩니다. 레위 언약은 13지파 가운데서 특별한 한 지파에게 ‘이스라엘의 운명’을 맡기는 언약입니다. ‘운명을 맡긴다’는 말은 하나님 약속 안에 있는 복과 저주를 경험케 하는 겁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복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는 저주가 아닌 진짜 복과 저주를 경험케 하는 겁니다.

이 방식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레위지파와 언약을 맺습니다. 왜 하필이면 레위지파 일까요? 야곱에게 12 아들이 있지만 이 12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의 진수를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저주성을 적절하게 잘 보여주는 일을 이 레위지파가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이동생 디나가 현지인 추장 아들에게 겁탈당한 일과 관련있습니다.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 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창 34:24-27)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평가는 곧 ‘저주’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즉 레위지파는 더는 ‘자기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자기 땅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지파 땅 안에 분산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저주를 꾸준히 이어지는 가운데 출애굽기 2: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출 2:2-1)

레위지파의 저주성을 실은 인물, 곧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인 율법을 주십니다. 이것이 ‘레위언약’입니다. 이 율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부는 내부적으로 저주가 일어나게 됩니다. 분명 겉으로는 복받은 나라이지만 그 복된 나라의 내부가 저주로 채워집니다. 율법에 의한 내부 총질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6-29)

이 문장에 끝에 ‘헌신’이라는 말이 나오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언약적 저주를 품은 지파로서 하나님께서 야곱 언약의 중심부로 키워주시겠다는 겁니다. 그 중심부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로 하여금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언약궤 주변을 방어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접근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민 3:10)

특히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만을 두고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천명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민 3:12-13)

이 레위지파의 존재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내부에 참된 저주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바가 됩니다. 만약에 이 레위지파가 잘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레위지파의 잘못을 용서할 제물은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 3:13-14)

이렇게 막중한 소임을 하는 것이 제사장이고 레위지파이지만 그들에게 자기 소유의 땅은 없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8-9)

따라서 레위지파의 생계는 다른 지파에게 주는 십일조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4-26)

문제는 저주를 품은 이 레위언약은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방나라의 생활에 현혹되어 그들을 따라 사는 삶으로 바뀌므로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위언약을 지닌 저주성이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복된 나라로 인식되던 나라인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 언약의 실효성 내부에 진정한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동행이란 더는 자기 자신(혹은 자신의 것)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몸을 던진 상태를 말합니다. 에녹같은 사람은 사람과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동행하는 사람은 이미 언약의 종말이 곧 진짜 저주를 뿜어내고 있음을 알고 그 언약의 실제성에 몸을 던져넣은 사람입니다. 이로서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마치 레위지파가 사람들에게 의존해서는 아니되듯이 오늘날 성도도 암담한 이 세상의 변화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말하는 복이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안에서 진짜 저주와 진짜 복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십자가만 생각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말라기 2장 4-6절(거짓 동행) 24071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4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아멘.

여기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세웠다, 하나님께서 세운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의 상대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거기에 열두지파가운데 레위지파와 언약을 맺었다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언약을 맺은걸로 알고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바뀌어지면 이스라엘이죠. 그러니까 전체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약속을 맺은걸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열두 지파가운데서 한 지파에 불과한 레위와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고 그 언약은 영원하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언약을 영원하다고 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 내부로 다시 생각해야될 그러한 언질을 우리에게 내린게 돼요. 이스라엘은 다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다. 이게 인간들은 편하게 생각하면 그래요. 전체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언약을 맺었다. 근데 오늘 본문에서는 레위와 언약을 맺었다. 이거는 왜 전체 언약은 뭐며 그중에서 특별하게 레위언약을 맺었다고 이렇게 언명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점에 대해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셔야 됩니다.

레위언약은 여기 2장 2절에 지난번에 나왔습니다.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언약은 뭐냐하면 어떤경우에 복을 받고 어떤 경우에 저주받는가 하나의 샘플로서 복과 저주, 이게 복이고 이게 저주라고 보여주는 하나의 계기판 역할로서 하나님께서는 열두지파가운데서 레위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주목해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를 끌고 가십니다.

그렇게 되게되면 어떤 생각을 해야되느냐 하면, “레위지파는 참 좋겠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언약 상대자가 되었으니까. 아, 레위지파 너희들 복받아서 참 좋겠네.” 라고 생각하기 참 쉬운데요. 하나님께 레위지파 언약을 맺음으로서 복을 줄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 저주 받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지파와 언약을 맺은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하고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복이 뭐냐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고, 저주가 뭐라는 것을 우리한테 체험하게 하기위해서 언약을 맺은거에요.

“너는 저주 안으로 속히 들어오라. 속히 들어와. 그냥 멀뚱하게 니혼자 살지말고 저주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 저주 속으로 들어와.” 그게 바로 언약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거에요. 근데 사람들은 머뭇 머뭇 하면서 이 약속, 이 언약이 내한테 저주를 줄까 복을 줄까 그걸 먼저 따지고 싶은거에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레위언약이에요. 레위지파를 저주케했던 그 레위 언약이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으면 생명과 평강이 주어진다는 거에요.

생명과 평강을 얻을려면 레위언약이 맺었던 그 저주속에 들어가야돼요. 나는 너희의 복을 저주로 바꾸겠다.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시행에 대해서 거기에 몸을 풍덩 뛰어 들어야 돼요. 거기에 던져버려야 돼요. 하나님의 복을 저주로 바꾸는 그 작업에 뛰어 들 수 있어야 돼요. 누가 뛰어듭니까? 아무도 안뛰어들죠. 그냥 고만고만 사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다 저주까지 덤태기로 뒤집어 씌울일 있습니까?

그거는 싫은거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거에요. “니가 그러니까 언약 밖에 있으니까 니가 이야기하는 심판은 거짓심판이고 니가 생각하는 저주는 거짓 저주고 심판도 거짓이고 저주도 거짓이라면 니가 생각하는 천국과 구원도 거짓이고 생명도 거짓이고 모조리다 거짓이”되는거에요. 만약에 이것을 제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은 태도가 어떻겠습니까? 초등학교때 학원도 없이 마치고 골목에서 막 놀잖아요. 숨바꼭질하고 뭐 온갖것 하고 노는데 한 저녁 6시쯤 돼서 엄마가 부릅니다. “얘들아 저녁먹으러 와. 동생 손씻고 저녁먹으러 와” 부르죠. 엄마가 부른다고요. 엄마의 언약속으로.

저녁해놨다고 부르면 누가 싫다고합니까? 누가 마다합니까? 소꿉놀이 다 때려 치우고 꽃잎 돌가지고 해놓은거 다 치워버리고 그냥 저녁 먹으러 오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합니다. “언약속으로 들어와. 이 저주속으로.” 안갑니다. 안가고 뭐냐하면 분노를 유발하죠. 분노를. “나 저주 안받을렵니다.”하고 분노를 유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아직도 너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냐?” 너 원래 가치 없어 그런데 니가 뭘 판정을 내리고 “나는 복을 원하지 저주를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그런 발언을 평소에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언제까지 머뭇거리면서 자기가 구상한 자기 세계속에서 빼꼼히 얼굴도 안내밀고 빠져나갈 생각도 안하고 있어요.

언약속으로 들어올 생각을 안해요. “뭐 영생의 언약 같으면 들어가죠.” 아니요. 레위언약에 들어와야죠. 레위언약에 들어와야 돼요. 왜? 그게 생명과 평안이니까요. 따라서 이 레위 언약은 미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 잘 아시고 자진해서 들어오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언약이 바로 레위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 언약의 그 진수, 핵심을 레위언약에다가 이렇게부터 시작을 해요. 나중에 그 핵심은 유다, 다윗언약에서 핵심이 나오지만, 그 시발점, 들어가는 그 입구, 관문은 레위언약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레위지파 언약 끝나고 난 뒤에 유다지파언약이 시작돼요. 이게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나옵니다. 레위 언약에게 모세에게 준 율법은 레위언약. 그다음에 다윗에게 준 것은 유다언약. 그런데 순서상 레위언약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그 열두지파 가운데서 왜 다른지파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레위지파한테 하나님께서 언약을 야곱의 열두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레위 언약을 했는가? 창세기 34장 25절 26절에 보면, 거기에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여동생 확률이 13대 1입니다. 12명이 아들이고 한명이 딸이에요. 그 딸이름이 디나에요. 디나. 영어로하면 다이아나. 디나가 강간당했어요. 당했는데 자기 여동생이 이방민족에게 강간당했을 때에 거기에 오빠들 중에서 그 분노를 참지 못해서 여동생하는 것에 대해서 그 강간한 남자 뿐만아니고 그 집안을 다 작살내기로 작정한 지파가 두지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레위지파고 하나는 시므온지파입니다.

창세기 34장 25절에보면, “거짓말로 할례 받아야 혼인한다고 딱 거짓말 해놓고 한창 고통이 심했을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강간한 남자뿐만 아니고 그집안 사람들은 다죽였어요. 강간한 사람은 세겜 추장의 아들 하몰이었습니다. 그것도 물론 죽었고요. 이렇게 했을 때 야곱이 말합니다. “도대체 니가 그렇게 과격한 행동으로 우리가 이땅에서 소문나서 살 곳이 없다.” 라고 그냥 책망하죠. 책망하는데 그 책망으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레위지파를 어떻게 저주했느냐 하면 창세기 49장 5절에서 7절에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그 다음의 말이 뭐냐? “저주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시므온과 레위지파한테 저주를 내렸고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저주가 또나옵니다. 그러면 저주 받은 양태가. 저주 받았다는 그러한 어떤 결과가 주어지느냐?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나중에 열두지파가 약속의 땅에서 땅 차지 할 때에 너희 땅들은 전부다 너희땅은 같이 상속분이 있는게 아니고 각 지파에게 조금씩 떨어져서 그들중에 섞여살게 하겠다는거에요. 그게 저주에요. 그럼 이거는 무슨뜻이냐하면은요, 자기땅이 없고 각 지파에게 예속해서 사니까 이거는 빌어먹는겁니다. 이삭의 아들가운데 에서가 있었고 야곱이 있었잖아요. 에서에 내린 저주가 딱 그거에요. “니는 빌어먹어라”에요. 노아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노아에게도 함이 있거든요. 가나안과 함은 셈과 야벳에게 빌어먹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기것이 없어요. 종으로사는거에요. 주인이 아니라.

이게 하나님이 내린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라기에서 그 된통으로 저주를 때린 그 레위지파하고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맺은거에요. 왜? 왜, 그 많은 열두지파가운데 저주받은 지파가 시므온 지파와 레위지파 두 지파밖에 없어요. 그들이 옛날에 자기 여동생 강간 사건에 그때 그 처리하는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축복의 모습과는 딴판이어서 하나님이 특별히 담당이 뭐냐? “니는 저주가 무엇인 것을 혹독히 경험할 그것 담당”하는거에요. 언약에는 복과 저주가 두 개다 있으니까. 니는 저주담당이다.

그런데 왜 그들과 언약을 맺었느냐 하는거에요. 출애굽기 2장 1절에보면,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되어있어요. 누구냐하면 그 아들이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 레위지파. 저주받은 지파, 레위지파 모세를 통해서 레위 언약을 성립시키려고 하고있습니다. 이걸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다시말해 야곱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은 복받은 민족이에요.

근데 그 복의 내용을 뭘로 채우느냐 하면 주께서는 저주로 채울려고 하는거에요. 저주로 채움으로써 복이 되게 하는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생각해주신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뭐냐? 그걸 내부총질이라하는거에요. 내부총질. 국민의 힘 내부 총질한 사람... 복받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줬다고 여기고 있는 그 이스라엘 내부에 저주받은 지파와 언약을 맺어버립니다. 율법을 줘서. 그래서 그 모세라는 레위지파, 그리고 아론 그들이 가서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는데 그래서 이제 그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왔잖아요? 빠져나왔는데 그 하나님의 율법의 내부총질로 인하여 출애굽기 32장 26절 29절에 보면, 몇 명이 죽느냐 하면 3천명이 죽습니다.

그냥 뭐 인간들 감정싸움으로 3천명 죽는게 아니에요. 무엇이 개입되니까 3천명 작살나는거에요. 무엇이 개입되었는가? 시내산에서 율법이 개입되니까 3천명 작살난거에요. 자, 3천명 작살난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그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거에요. 출애굽기 32장 26절부터 보게되면,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내부총질이에요. 두두두두. 같은 형제고 친구고 친지고 가족이고 없이 다죽여버렸습니다.

왜 우상을 섬기는가? 그냥 못넘어간다. 자 그렇게 하니까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 지파가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가 그렇게 총질해서 삼천명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걸 헌신이라고 표현했고요. 그 댓가가 복을 받게 된다는거에요. 복이라하는 말은 성경에서 팽창을 의미하는겁니다. 소실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고 팽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키우겠다는거에요. 키우겠다.

보통 그 드라마 보면 재벌이 훌륭한 직원에게 잘하면 어깨 퉁퉁 치면서 뭐라고합니까? “내 키워 줄게.” 그게 복주는거에요. 하나님이 레위지파를 키워주는겁니다. 그런데 키워주면서 레위지파를 키워준다는 것은 레위지파는 저주받은 지파고 또 그 저주받은 지파가 각지파의 전부다 흩어져서 자기소유의 기업이 없어요.

신명기 10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땅이없어요. 약속의 땅에 자기 땅이 없어요. 신명기 10장에 보면 땅이 없어요. 그러면 땅이 없다면 이 레위 지파는 뭐먹고 사느냐? 신명기 12장 18, 19절에 보면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찌니라”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다른 열두 지파에게, 그때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졌으니까 열 세지파가 된거에요. 나머지 열두지파에게 빌어먹더라도 같이 해 줘라 이말입니다. 내치지 말고 같이 해줘라. 그러면 레위지파는 뭐먹고 사느냐? 그게 민수기 18장 21절과 26절에 나옵니다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21절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되어있어요.

다른 열두지파앞에서 십일조를 거두어서 레위지파한테 먹여 살리는거에요. 제가 국민학교때 나라에서 그때 가난한 애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문교부 시책이 뭐냐하면 애들이 도시락을 못싸는 애들이 있어요. 가난해서.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시책이 각선생님보고 그 도시락가운데서 그 도시락 못싼아이 한테 뚜껑을 이렇게 줘요. 본토발음은 벤또. 벤또 뚜껑을 주게되면 벤또 뚜껑에 이렇게 가요. 가게되면 애들이 밥도 좀 주고 반찬도 좀 주고 그렇게 해서 점심때 십일조를 그 못사는 아이한테 십일조를 줘가지고 그 아이도 점심때 안 굶게 만들었어요.

요새같으면 아동 인권해가지고 문교부장관 모가지 날라갑니다. 그때는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였죠. 다른아이는 막 부러워했다고요. 왜 부러워 한줄 알아요? 잘사는 아이들, 그때 잘사는 아이가 도가, 술도가하고 과수원하고 그때 대구에 있었으니까 방직공장 아들이 소세지를 싸온다니까요. 우리집은 뭐 소세지도 없고 그 아이는 거진데 거지한테 소세지가 주어지니까 나도 한번은 거지하고싶다. 그렇게 빌어먹고 살아야되는게 레위지파입니다.

민수기 18장 25절에 보게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그러니까 십일조, 열두 지파가 준 십일조 중에서 그 모아놨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요.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은 공중에 훅 던지는게 아니고 제사장에게 드리는거에요. 제사장의 십일조가 하나님께 제단으로 들어가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빌어먹기는 빌어먹는데 철저하게 다른지파에게 예속되는데 복과 저주, 생명의 권한은 누가 쥐고있는가? 레위 지파가 쥐고있어요. 그게 바로 레위언약입니다. 레위 언약 당사자는 빌어먹어요. 얻어먹어요.

그쪽이 십일조 안주면 다 굶어죽어요. 결국은 나중에 그들은 십일조 안줍니다. 지 먹을 것도 없는데 주지도 않아요. 그래서 레위지파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거에요. 사람이 자기 소유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신신당부, 하나님께서 레위지파 밀어줘라 십일조줘라 해도 사람들이 내먹을것부터 먼저 챙기고 주기 때문에 그 약속 믿다가는 결국 레위지파가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결국 무너집니다. 자기것이 없으니까. 결국 여기서 뭐냐? 레위지파는 열두지파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요. 가까운 위치에 있는데 얻어 먹어요. 어느것 하렵니까? 하나님과 가까이 할래요 얻어먹을래요? 가까이하는 대가로 얻어먹을래요. 아니면 얻어먹지않고 내것가지고 좀 하나님을 멀리할래요?

이거는 뭐 뻔하죠. 내것가지고 하나님 좀 멀더라도 내것가지는게 더 안전빵이죠. 사람이 믿음이라는게 원래 그런겁니다. 하나님 안믿습니다. 내 소유를 믿어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래요. 내 소유를 믿어요. 하나님 안믿습니다. 나는 내가 안지키면 지킬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너를 지켜준다. 고맙기는 하지만 전혀 미덥지가 않아요. 실제로 인생을 살아보니 내 가진게 나를 지켰지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지킨적이 없다는 것은 교회 오래다니고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절실하게 그걸 알게 되어요. 그러면 레위지파가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게 무슨뜻이냐?

민수기 8장 18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선물로 주어서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에게 저주가 임할 수 밖에 없는 어떤 특정 물건을 가까이해서 모시고 있는 지파가 레위지파에요. 그게 언약궤에요.

민수기 3장에 보면, 언약궤 접근하는자는 죽어버려요. 그정도로 저주스러워요. 저주를 뿜어내는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 근처에 못오도록 레위 지파로 하여금 그걸 포위해서 다치지 않게 다른지파가 다치지 않게 지켜주는거에요. 일종의 하나님 지키는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있는겁니다. 월급은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월급은 누가주느냐? 다른지파가 줘요. 레위지파가 이상한 구조죠? 하나님의 보디가드 같으면 하나님이 줘야되는데 하나님이 안주고 다른 지파, 다른지파가 월급을 주는데 만약에 다른 지파가 십일조를 안낸다, 월급을 안준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아이, 나도 때려치울래. 나도안해.”

그러면 땅은 없는데 나도 안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잖아요. 제사장이 철저하게 권력이 있을 때 끌어모으는거에요. 끌어모아가지고 백성들에게 뭐라고 가르쳐주느냐 하면, “너 하나님 없이는 너 못산다. 내놔.” 이게 먹힐때까지 빼먹는거에요. 먹힐때까지 빼먹는겁니다. 근데 이게 언제까지 통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른민족을 본거에요. 옛날에 우리나라가 외화 아끼기 위해서 비자 안내주고요, 해외 유학가는게 그렇게 힘들고 비행기타는것도 힘들었어요. 왜? 달러가 막 소비되니까. 달러를 보호하기 위해서 외화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깥에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어요. 유학가는것도 너무나 힘들고 그래서 유학비를 줘야 갈 정도로, 그렇게 실제로 있었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박정희 큰통령 시대때. 그런데 해외 여행이 개방되고 난 뒤에 어딜 가느냐 하면 유럽을 갔다해요. 유럽을 가니까 뭐 이런 세상이 다있어? 자유롭고 뭐 남녀 연애하는것부터 해서 잘 사는것부터 해서 미국가니까 이거는 뭐 별세계에요. 대단한세계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간 뒤에 비로소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어느 한계가 있고 정말 제대로 주위의 선진국처럼 될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그들의 국가 경영체제를 받아들여야 된다. 그게 뭐냐?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었어요.

외국에서 원하는 그런 작물을 집단 농장화 시켜서 수출해야 우리가 다른나라 잘사는거에요. 뭐 그런 기술이 있습니까? 없죠. 없으니까 외국에서 기술자 수입해야죠. 기술자 수입하고 또 판로 없죠? 판로 아는 외국 상사, 외국의 유명한 유통업체를 수입해야죠. 수입하면 뭐도같이 수입됩니까? 이방종교도 같이 수입되는거에요.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의 나라를 통치할 때 그냥 통치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도 함 잘살아보자. 언제까지 우물안에 개구리 될 수 없잖아. 그깟 종교가 뭔데 여호와 종교 바알종교 그거는 여러분 취향대로 믿으세요. 중요한 것은 외국에 투자처가 있어야 우리가 밥먹고사는 것.”

“그러면 저 레위지파는?” “레위지파는 밥먹고 살든 말든 모르겠고. 그거는 중요한건 그게 아니거든.” 그들에게 십일조 낼 돈도 없는데 뭐 돈을 벌어야 십일조를 주죠. 헌급을 하지. 잘먹고 잘 살아야 되지. 그 다음부터 레위지파는 떠돌이 생활 하기 시작한거에요. 이게 수입이 다 끊어진거에요. 그런데 레위지파가 몰랐던게 있어요. 뭐냐? 레위지파가 그들의 레위지파의 기능이 얼마나 엄중하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3장 14절에 이런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집은 알아요. 하나님보다 자기자식의 미래를 생각한 아버지에요. 왜냐하면 엘리제사장이 재산 꽤나 있었으니까, 권력 꽤나 있어서 그걸 자식한테 물려줄려고 밀어붙이는거에요. 자식은 시건방져가지고. 지가 재벌 자제분이니까 이건 뭐 권력도 있고 돈도 있겠다 행동하는 것이 아주 거만하기 짝이없는거에요.

그래서 13절에,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이게 바로 저주입니다. 레위지파는 진짜 저주에요. 진짜 저주가 뭐냐를 레위지파를 통해서 보여주는 그 역할을 내부적으로 내재적으로 잠재되어있었던 거에요.

“뭐 남이 어떻고 하지말고 너는 니 할 일 똑바로 해. 만약에 니가 이 성막의 취지 성소의 취 지를 니가 만약에 우습게 본다면, 진짜 제대로된 저주는 네 집안부터 시작할줄 알아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게 레위언약이었어요. 남이 도와주고 십일조 주고, 남 핑계대지말고 니는 니할일이나 똑바로 해라 이말이죠. 레위지파는요 하나님의 언약에 몸을 던져야 돼요. 그게 소용돌이라할지라도, 저주의 소용돌이라 할지라도 몸을 던져야 돼요. 어떻게 무서운 하나님과 동행 하는게 됩니까? 몸을 던져야 할 수 있어요. 그 희생제물에 모든걸 바쳐야 돼요.

그런데 엘리에게는 자식이 생기니까 흔히 세상 하는말로 “자식을 누가이기지?” 자식을 누가이기냐는 말은 같은 말로 나는 나를 못이긴다. 나는 나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이런뜻이에요. 오늘 말라기에 2장을 보면, 2장 6절에 이런말씀이 있습니다.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나와 동행한다는 말이 있어요. 성경에서 동행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것 또는 자기자신과 동행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을 말합니다. 자기의 것, 자기가 모아놓은 것. 자기의 과거 인생. 지금까지 인생을 동행하지 않은걸 동행이라고 하는거에요.

이게 왜그러느냐 하면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녹은 사람과 동행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동행하지 않았어요. 이웃과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에녹은 누구와 동행하는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이렇게되어있어요.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 표현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그를 하나님이 데려갔다”라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다시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에녹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기의 몰빵한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에다가 몰빵한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에다가 다 던져넣었기 때문에. 남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남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가에 대해서 전혀 자기와 상관이 없어요. 남들처럼 살지 않았다는거에요. 그럼 누구처럼 살았는가? 하나님처럼 살았죠. 에녹과 동행한 하나님, 또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동행의 원형이라면, 동행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 원형은 이땅에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예수님의 그 이후에 성도와 더불어서 에녹의 동행을 그대로 보여주고있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끝은 동행인데요. 같은 말로 언약의 끝은 종말이에요. 모든 언약의 끝은 종말입니다. 전선보면 전선이, 이 구리가 고무로 피복되어있잖아요. 근데 끝부분을 칼로 이렇게 벗겨내면 여기에 숭숭숭숭 구리선들이 보이죠. 치직 해서 불길이 일어난다고요. 마지막에는 복이라는 피복이 벗겨지면 그 나오는 속 뿌리는 뭐냐하면 저주에요 저주. 언약의 끝은 저주가 나와요. 레위언약도 저주가 나와요. 원래부터 저주받은 자이기 때문에 동행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 안하는 이유가 그 저주 받을 나에 대해서 신경 뚝,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나만 신경썼다하면 저주가 되니까.

여러분들이 하루 24시간 종일 살아가면서 어떤때 걱정근심되고 불안하고 염려되고 공포스럽던가요? 누구생각할때입니까? 바이든생각할때에요? 트럼프 생각할때입니까? 누구생각할 때 그렇게 무서워요? 누구생각할때입니까? 자기생각할 때 제일 걱정되고 불안하죠. 자기생각할 때. 이거는 자기와 동행하는 겁니다. 자기 또는 자기것, 또는 내새끼 내손자. 자기와 관련된 것.

대구에 비와서 자동차가 떠내려갔다. 막 걱정되고 눈물이 막쏟아집니까? 안쏟아지죠? 내것아닌데 뭐? 내차는 멀쩡하잖아요. 그러면 됐죠. 내것이 있다는 것은 나는 나와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언약에 대해서 이 언약에 언급하게 되면 우리는 그 언약이 갖고있는 저주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를 유발합니다. 언약은 분노유발책이에요. 나는 아직도 나한테 가치가있는데, 이 언약은 우리보고 묻는 것이 너는 아직도 너가 가치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다그칩니다. 그걸 이스라엘 내내 레위지파를 통해서 주께서 다른지파한테 질문을 던진거에요.

“아직도 니가 가치있냐? 아니면 니가 십일조 바치는 레위지파한테 가치있냐? 어느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었는가?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딱 들어선 순간 레위언약 빠이빠이했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한번 풍족하게 살아보자.” 이런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드디어 언약이 지니고 있는 레위지파도 실패하지만 레위지파는 실패하지만 레위 언약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레위 언약이 갖고있는 속 구리선, 마지막 끝에는 구리선. 마지막 종말 때 그 저주가 저주에서 불꽃이 나오기 시작하는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중에 하나가 말라기에요. 얼굴에다 똥칠한다 이말이에요. 니 복을 저주로 만들어버리겠다. 이게 왜그러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가 점점 신약에 가까이 올수록 말라기가 신약에 제일 가까운 구약이잖아요. 구약 끝에 오면서 말씀이 점점더 분노를 유발할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말씀이 막 터져나와요. 그거는 왜그러냐하면 그만큼 이스라엘 역사가 그당시의 언약이 없는 세상, 언약은 여호와한테 있고 그 외에는 언약이 없잖아요. 약속이고 뭐고 없잖아요. 약속이고 언약이고 그건 뒷전이고 밥이나 먹고 사는게 우선이에요. 쉽게하면 이렇습니다. 20mm 비가 왔을때하고 50mm비가 왔을 때하고 시험을 해봤어요.

20mm 비올때를 생각해서 와이퍼를 하니까 와이퍼가 맹렬하게 하면서도 앞이 보이긴 보여요. 비 쏟아지만 쓸어내고 하는데, 50mm 시간당 50mm가 오게되면 와이퍼가 아무리 쓸어내도 빗줄기는 곧장 그걸 빗물로 덮어서 앞이 보이질 않는거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끝부분에 오게되면 세속적인 것이 너무나 짙게 주어져가지고 말씀으로, 선지자가 말씀으로 와이퍼 역할을 해도 앞이 안보여요. 앞이 안보이니까, 이렇게 브레이크를 지금 밟는다는데 엑셀을 밟아가지고 9명을 죽여버렸어요. “이게 브레이크가 왜 안듣지?” 엑셀을 밟았으니까 안듣지.

교회다니면 다닐수록 점점더 지옥으로 가속이되는거에요. 지옥가속페달. 오늘 제목을 지옥가속페달. 지옥가속페달을 밟아요 왜냐하면 예배드리고 후딱 세상에나가서 “나도좀 살아보자 나도 남들처럼 좀 살아보자. 사람사는것같이 살아보자.” 신경 거기다 쏟는거에요. 나는 내것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내것과 동행하고싶어. 내것과. 동행없습니다. 언약에 몰빵할 생각 없어요. 나는 내 가진것에 몰빵합니다. 펀드에다가 다 집어넣고. 오늘날 이시대가 그만큼 동행이니 언약이니 하나도 없는 시대에요. 그 마지막 시대를 말라기가 이렇게 예언하고있는거에요.

저주, 저주가 기다린다. 진짜 저주가 기다리는 그속에 할 때 너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있다. 왜? 레위 언약을 다이루신 그 저주를 홀로 받으신 그 주님의 십자가가 진짜 저주고 그 저주 속이 바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그 소용돌이 속입니다. 분노하지 마시고 이왕 사는 것 언약속에 휩쓸려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말씀으로 봐야되는데 내것 잘되기 위해서 말씀을 땡겨보게되면 모든게 가짜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하옵소서. 진짜는 우리가 죽어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한게 진짠데 아직도 우리에게 미련있고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것이 화근이 된 것을 이것이 가짜인 것을 저희들 절실하게 느끼면서 십자가로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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