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일치
2024년 7월 17일 본문 말씀: 말라기 2:7-9
(2: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2: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와 같은 존재로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천사하는 일은 일체 인간을 배려하고 이해해주는 일이 아닙니다. 냉정하고 냉혹하고 일을 처리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하나님의 벌리시는 일 앞에서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요 살아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이미 고장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런 쓸모 짝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대상도 아니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확고한 기준으로 볼 때에 인간은 전혀 가치없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인간에게 해주게 되면 그들은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나는 그 어떤 기준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거야. 언약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런 것은 내가 다 치워버릴 거야”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여도 인간들은 단호하게 얼굴을 돌려버립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세상 사는 기준은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말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기준이라는 것도 자신이 정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꾸만 수치성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곧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바가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내쳐도 인간은 밖에 외출할 때 옷을 입고 나섭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3:7에 부합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내리는 조치입니다.
이 조치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산다’가 아닙니다. 하지만 왜 인간은 타인 앞에서 수치를 느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결함없는 자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백성들 앞에서 내세우시는 이유는, 제사장들이 하는 제시 행위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제사 행위의 원형은 창세기 3:21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인간이 자기에게 내린 조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조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조치 앞에서 한결같이 하찮은 존재요 결함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가죽옷을 입히셨던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는 특별한 복장을 입히십니다. 그 복장에는 12지파의 명단이 몸에 걸쳐있습니다. 이는 제사장과 백성 사이에 거룩으로 관련지으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흔히 ‘거룩하라’고 한다면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거룩은 ‘제물이 희생되는 제사 취지’가 빠져 있는 거룩입니다.
제대로 된 거룩이 아니지요. 거룩이란 제사에서 불에 의해 과감히 소실되는 희생물의 사멸을 핵심내용으로 담겨 있는 거룩입니다. 즉 제사장들이 매일같이 실시하는 그 제사의 취지가 이스라엘 전체에 확산되는 바로 그 거룩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거룩의 일관성을 제사장들이 보여주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은 인간적인 감정에 휩싸이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편을 드는 식으로 행동했다는 겁니다. 언약과 일치성을 갖출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비-일치성으로 근거로 하나님께서 거룩과 비-거룩을 나누신 겁니다. 다윗이 소년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 민족과 대규모 전쟁을 벌렸습니다.
거기에 개입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에 나서면서 딱 한 가지를 외쳤습니다. 할례없는 자와 할례 있는 자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할례 있는 쪽에 승리를 안겨다 준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해서 사울왕 및 기성 군사들은 골리앗이라는 상대 장군의 덩치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기죽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울왕 쪽이 언약과의 일치성이 없었던 겁니다. 형식적으로는 몸에 할례를 행했지만 실제로 언약이 전쟁성패로 이어지는 현실성을 낳는다는 사실은 인정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단순히 골리앗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라 사울왕과도 싸운 셈이 됩니다. 이는 곧 레위지파와 인간이 결국 합치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의식과 기억과 신체는 영구히 변치 않는 ‘나’라는 이미지를 갖출 근거가 없습니다. 늘 변하고 매일같이 변합니다. 율법의 내용과 합치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노력한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고 영구히 동일인으로 고정화시키고자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시간 따라 소멸되는 하찮은 것이라는 점을 못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을 못받아들이는 이유는 영원히 나 자신을 규정해주는 절대적 기준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기준을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요? 이를 위해 레위언약이 도입됩니다. 레위 언약의 도입으로 인해 구약 이스라엘 제사장은 언약적 제사의 취지와 일치되지 못하는 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죄는 그냥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신약에 오실 예수님의 ‘죄된 몸’에 부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죄 없는 분이 저주를 받는’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서 신약의 예수님은 제대로 언약과 일치되는 몸을 구현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이 ‘새언약과의 일치성’을 보여주게 될 몸을 위하여 새언약에서 능력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새언약 앞에서, 곧 십자가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 완성과 불일치를 나타내는 몸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더는 자신의 몸을 기대하지 않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몸을 주목하게 됩니다. 늘 달라지고 늘 변하는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 되시는 주님의 몸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언약 앞에서 불일치를 보이는 수치스러운 몸이 담겨 있습니다. 그 저주스러운 불일치 몸이 예수님 몸으로 인하여 언약과 일치되는 거룩한 몸이 됩니다. 이는 바로 구약의 대제사장 복장에 부착된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지는 제사장의 언약과 합치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저 제사드리는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희생물이 되시므로서 언약의 합치를 달성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담긴 의의입니다. 이그 그 누구도 그 십자가 앞에서 옛 자아와 몸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희생적 몸과 자신의 언약 불일치성 몸과의 간격을 통해서 영구한 거룩히 증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옷으로 몸으로 여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말라기 2장 7-9절(언약의 일치) 2407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7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 제사장, 레위지파에 속하죠. 이 제사장은 무엇과 같아야 되느냐 하면 7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야 된다”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죠. 천사의 특징은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없다는 그 표현을 9절에서는 레위 언약에 속한 제사장들은 편벽되지 않아야 하는데 한쪽편을 들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은 한쪽 편을 들었으므로 나는 너희들을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했다. 그렇게 하찮게 여기게 만들겠다 라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 제사장은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야 된다.” 딱 하나님께서 지정을 해줬죠. 그러면 천사는 천사지만 천사같은 인간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천사의 기능과 인간의 제사장의 기능이 결국은 합치되어야 된다는 것을 의도하고 하나님께선 이 레위언약을 주셨습니다. “인간아 너희들만큼은 천사같이 움직여야 된다”는거죠. 그런데 오늘 말라기에 보면 그것에 실패했다는거에요. 천사처럼 제대로 하나님의 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기울어져버리고 거기서 이탈했으니까 나도 너희들을 그 제사장 레위 언약의 노선에서 이탈하게 만들겠다는거에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제사장, 사람이죠. 제사장, 사람인데 그 사람의 레위언약이라는 그 자리, 그 자리와 사람이 결합된 것이 바로 제사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냥 사람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야, 너 자리가 어떤 자린 줄 알아?” 자리를 정해놓고 그 자리에 근거해서 “너 이 자리에 일치 되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줘야 되잖아. 그래서 니가 제사장 된거야. 그래서 니가 레위 언약에 속한거야.” 라고 하나님께선 지금 말씀하고있습니다.
이것이 옛날 제사장한테 해당되는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한테 해당돼요. 똑같은 원칙을 우리한테 적용시켰습니다. “너 새언약 자리에 있어. 새언약을 보여주는 자리가 성도의 자리야. 그 역할을 너는 이제 해야돼.”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말라기에서 제사장보고 이야기하는 것 하고 같은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옛날 제사장 참 타락했구나.” 남 이야기 하듯이 하면 안되고, 오늘날 이 말씀이 우리의 자리는 새언약의 자리에요. 제사장 자리는 레위언약의 자리. 지금 우리의 자리는 레위언약이 완성된 자리.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의 자리는 천사의 일과 합치되는 일이 오늘날 인간인 우리를 통해서 이게 바깥으로 나와줘야 된다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요. 뭐냐하면,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되면, “나 근원적으로 레위언약이라는 것 인정안해. 근원적으로 이스라엘도 인정 안해. 나 제사장, 대제사장 이것도 인정안해. 그냥 사람이 태어나서 그냥열심히 돈벌고 밥먹고 살고 딱 그것만 인정하겠어.” 다른사람이, 거의 전부죠. 우리가 누구한테 이야기 할 때 “너가 이래야 되는데 왜 이렇게 했어? 그러니까 너 잘못이야.” 라고 이야기하면, 듣는사람이 “니가 내세우는 그 기준있잖아? 내가 애시당초 너는 인정하는데 나는 그거 인정 못해. 가져가. 너는 그 기준에 비해서 이래야 되는데 왜 그렇게 사냐고 꾸중하려 들지만 나는 니가 세운 기준 자체를 나는 인정하지 않아. 나 그거 인정 안해.” 이렇게 나올때는 어떻게 합니까?
“군인이 군인 다워야지 행동이 그게 뭐야?” “나 제대했어. 지난 월요일날 제대했어. 그러니까 나보고 군인답게 행동하라 하지마. 나 그딴 것 하고 안놀아. 딱 싫어. 나는 나 자체로서 그냥 살래. 자꾸 딴소리 성경들고 나한테 달려오지마, 나 성경 몰라. 하나님 그런 것 생각 안해. 나는 내식대로 살거야.”끝.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실컷 성경보고 공부많이 해놨는데 받는사람이 애시당초 초를 쳐버리는거에요. “성경자체를 나 인정안해. 하나님 뭐라해도 나는 관심없어.”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도대체 당신이 관심있다는게 뭐냐? 당신이 관심있다는게 뭐냐?” 그런 질문을 해보는거에요.
그러면 뭐라하느냐 하면, “나? 나 관심있는거? 나는 누구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지 않아. 나는 당당하고 싶어.” 이렇게 이야기하는거에요. 그러면 “너 딱걸렸어”하고 창세기 3장 7절에 그말씀이 나와요. 창세기 3장 7절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야 너 옷입었어 옷안입었어?” “옷입었어.” “너 태어날 때 옷 있었어 없었어?” “없었어.” “근데 지금 왜 옷을 입지?” “부끄럽잖아.” “왜 부끄러울까?” “나는 나대로 살고싶다.” “그래 너는 너대로 살아. 너대로 사는데 옷은 왜입어?”
“그냥 너대로 살면 옷도 무거운데 여름에 더운데 옷 벗고다니지 옷은 왜입는데?” “부끄럽잖아”라고 답변하죠. “너대로 산다며. 너 목욕탕에 갈 때 혼자 있을때도 그렇게 옷 다 챙겨입냐?” 혼자있을때는 부끄러움을 안느껴요. 부끄럽다는 것. 당당하고싶다는 것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타인을 의식해서 나오는 행동이에요. 말로는 나는 내식대로 살고싶다 하는데 인간은 자기 식대로 사는게 아니고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거에요. 남의 의식에 매여서 살아가요. 얽매여서. 이것이 바로 인간은 벌써 문제가 난겁니다.
자, 레위지파, 다시 레위언약, 레위지파 제사장, 레위언약으로 돌아와서 이야기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나오는 중요한거니까 잘 유념해야돼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사자, 만군의 하나님의 사자 다른말로해서 천사같이 되어야 된다는거에요. 천사같이 된다는 말은 일체 융통성이 하나도 없는거에요. 이것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해줘서는 안된다는겁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서 인간들은 실패합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고 인생을 살아도 남을 의식해요. 그러나 천사는 인간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하나님만 의식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사는 하나님만 의식합니다. 이걸 다른말로 하면 천사같은 존재는 남을 배려하거나 이해할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천사앞에 인간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 7절에서 아담이 뭔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안에 뭔가 큰 불길한 변화가 생겼어요.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옷을 입지 않았는데 아담과 하와가 후다닥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자기를 위한 행동을 하기시작합니다. 그게 제일먼저 한게 뭐냐?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옷을 만드는 그짓을 한거에요. 이거는 인간 자체가 결함이 생겼다는 말이에요. 문제가 생긴거에요.
자기 자체가 문제가있어요. 자기 자체가. 이거는 원래 인간하고 지금 자기 인간하고 일치되지 않습니다. 결함이 생겼습니다. 결함이 생기니까 그 결함이 생겼다는 것을 옷을 입히는 것으로 조치를 했는데 그 자기가 자기에게 조치를 내린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는 ‘나는 문제있다.’를 폭로하는 행위가 되버린거에요. 자기한테 문제가 있는겁니다. 결함이 있는겁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어떤 물건이 고장이 났을때는 여러분들이 쓰십니까 아니면 갖다 버립니까? 개가 비실비실 아프다. 그러면 안락사 시키든지 버리든지 해야죠. 고장난 것은 계속 쓸수가 없습니다. 청소기 고장나면 계속 씁니까? 한구석에 이렇게 쳐놓죠.
왜 인간은 자기자신을 한구석에 못밀어넣죠? 이게 문제가되는겁니다. 다시말해서 왜 인간은 자기가 결함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인간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간주하지 않을려고 애를씁니까? 아무것도 아닌 고장난채로 그냥 버려져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왜 인간은 못하는겁니까? 그것은 바로 진짜 나가 뭐냐를 기준점이 없어서 그래요. 진짜 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하나님의 천사와같이 등장해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점으로 자리를 가진자들이 누구냐? 레위 언약에 속한 제사장들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제사장이 하는 제사행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게 아니고 내가 감추고 있었던, 내가 억지를 부리면서 ‘나 잘났다, 나는 훌륭해’라는 그 모든 억지스러움이 그 제사하는, 그냥 불에 태워지는 제사 제물에 그 절차와 운명을 바라보면서 “정말 나는 하찮은 존재고 하나님께서 나같은 것 배려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것을 제사를 보면서 확정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둔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제사장들은 레위 언약의 그 냉혹함. 냉정함과 일치되어야 돼요. 레위 언약에. 그 제사하는 제물을 갖다바치는 아주 퉁명스럽고 앞뒤 보지않고 곧이곧대로 움직이는 그 움직임에 일치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돼요. 누가? 제사장들이. 무서운 불에 태워지는 그 일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어야 되고 단호해야 됩니다. 마치 누구와 같이? 천사와 같이. 냉정하고 냉혹한 천사와 같이요. 아무 감정도 없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천사와 같이. 제사장은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그렇게 냉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제사장에게 뭘 입혔는가? 옷을 입혔어요.
여기서부터 이제 좀 난해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까 그 무화과 나무는 인간이 자기한테 손질하는거에요. 인간이. 본인의 결함과 문제점이 드러나니까 이건 뭐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기 수치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었잖아요. 이거는 본인이 본인의 결함을 감추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에요. 그만큼 인간은 벌써 문제가 발생된겁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인간은 결함이 있어요. 고장난 청소기입니다. 고장난거에요. 인간은. 물론 그끝은 죽음이죠.
이미 고장난게 고장난 자기를 수리합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고장난 것은 고장나지 않은 분이 수리해야지 고장난 본인이 어떻게 자기를 고칩니까? 그 불신자들 보세요. 다 옷입고 돌아댕기잖아요.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벗깁니다. 니가 만든옷, 니가 만든 옷을 벗겨내고 친히 하나님이 만든 옷을 그 무화과 나무 치마 있던 위치에다가 옷을 입힙니다. 그게 가죽옷이에요. 가죽옷의 특징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셔서 친히 입혔다는거. 인간이 만든 무화과나무잎은 인간이 본인이 어설프게 자신의 약점을 결함을 감추기 위해서 어떤 추가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 그 차이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에게 옷입혀놓고 일한다는 그 원칙하나가 수립된거에요. 하나님은 대제사장에게 복장을, 옷을 입혔습니다. 옷을 입혔어요. 뭐하라고? 천사처럼 굴라고. 천사처럼 하나님편에서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융통성없이 곧이곧대로 백성들에게 백성들이 얼마나 죄가 많으며 얼마나 결함이 많으며 하찭은 존재인지를 명쾌하게 기준점을 세워라고 하나님이 옷을 입혔습니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옷이 주는 그 중압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옷이 주는 중압감. 제사장은 옷이 유별나요. 뭐 롯데백화점에 팔지 않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히듯이 친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뭔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연관지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할 것을 관련해서 미리 제사장에게 그 일과 관련된 일을 줄줄이 거기다가 제사장옷에다가 복장에다가 그걸 장식을 해버린거에요. 저는 그 북한의 뉴스를 보게되면 김정은이 말고 김정은이 옆에 섰던 군인들, 할아버지 군인들. 최소한 80넘은 것 같아요. 할아버지 군인들의 옷 복장보세요. 훈장 달다 달다 걸칠데가 없어 옷이 막 내려갈려고 해요. 훈장을 너무 많이 달아서.
제사장에 걸쳐 있는 모든 복장과 디자인은 어떤게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제사장과 더불어 거기에 있는 앞에있는 열두 지파의 이름, 그리고 견장, 여섯지파 여섯지파 앞쪽에는 열두지파 보석으로 딱 박아놨는데 이 모든 것은 열두 지파를 책임지라는거에요. 열두지파를. 누가? 그런 복장을 한 제사장 너가. 너가하는 행위가 너의 구원에 그치는게 아니고 니몸에 부착된 열두지파의 몽땅다 책임지는 그러한 기능을 제사장 니가 지금 하고있는중이라는거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 본문에 말라기 2장에 뭐냐? 너희들은 만군의 하나님의 사자처럼 되어서 사람들에게 뭘 하느냐? 율법을 가르치는거에요. 레위기 10장 11절에 보면, 그 제사장에게 했습니다. 10절에,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라.
그 가르치는 내용이 뭘까요? 제사장이 되어서 이스라엘 열두지파, 자기몸에 부착된 열두지파를 향하여 지시하고 명령하고 해서 관계를 이루어야 돼요. 율법적 가르침으로써 가르침을 받은자와 가르치는 자 둘다 연관을 해야 되는데 그 연관하는 그 가르치는 내용이 뭘까요? 수학일까요? 과학일까요? 국어일까요? 덧셈일까요? 뺄셈일까요? 그게 뭘까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다 하면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는겁니다. 그게 제사행위와 제물을 태우는 제사행위와 관련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그게 거룩입니다.
“그럼 거룩이뭔데?” 거룩. 거룩을 가르치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아하, 거룩 잘 알지요. 착하게 사는거잖아요.” 대번이런 반응을 나타내요. 그런데 그것은요. 거룩이라는 것은 착한일 하는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어떤점에서 잘못됐느냐 하면, 희생제물이 불에태워서 희생해야 된다는 그 제사행위의 취지가 없어요. 그게 빠져버렸어요. 제물 다 태워서 죽여서 다 태운다는 그 취지와 결부된 거룩이어야 돼요.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제물이 다 죽어야 한다는 그 내용이 결부된 거룩은 뭐냐? 주님께서 거룩이란 다른 이방민족과의 차이남이에요. 차이남. 이방 민족은 윤리와 도덕을 거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과 차이나는 거룩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행위와 결부해서 더불어서 제사장은 가르치는거에요. 제사를 희생제물 잡는 제사하는 그 제사장이 율법을 가르친다는 말은 그 율법 안에 모든 율법안에 제사가 왜 희생제물이 죽어야 마땅하냐 하는 내용을 이렇게 집어넣는거에요. 이야기 복잡할게 아니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거룩은 뭐냐? “너 말고 너가 되어라. 지금의 너 말고. 다른 너가 되어라.” 이게 거룩입니다. “너가 생각하는 너와 주께서 희생 제사로 주신 너와의 그 차이를 알면 니가 거룩을 아는 사람이다.” 현재 있는 나를 구원 할 생각하지 말고, 희생제물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나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바꿔치기 하는 그것이 바로 제사행위의 핵심이다 이말입니다.
이게 어려워요. “하나님이여 멀쩡한 저를 왜 바꾸실려하십니까?”하면, “니가 제사행위 앞에서 너는 하찮은거야. 고장난거야. 그거 하늘나라 안받아줘. 그 고물 안받아준다고. 받아 줄려면 제사 행위하는 거기서 구성된 나와 지금 니가 지키고자하는 너하고 이걸 교체를 해줘야 한다”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구두집에가서 가게에서 구두를 신어봤어요. 그 구두가 내발에 딱 맞아요. 구두가 딱 맞는다고요. 그런데 구두 주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구두를 집에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 구두와 치수가 똑같은 것을 집에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온거에요.
그래서 무심코 생각해가지고 치수가 똑같으니까 치수가 똑같은 구두가 왔다 이말이죠. 그러면 그냥 구둣가게에서 신은 구두하고 똑같은거니까 맞겠지 하고 그냥 넣어놓으면 돼요 안돼요? 안되죠. 치수 똑같은데 똑같은 구두가 아니에요. 내가 신었던 구두는 지금도 구둣방 가게에 진열되어있습니다. 내가 신은 것은 내가 다시한번 신어봐야돼요. 치수가 같다고 같은 구두가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구두로 칩니다. 치수가 같다는 이유 때문에. 이게 뭘 의미 하느냐 하면, 거기서 구두이야기를 좀더 해보면, 구두집에서 신었던 나 있잖아요? 내가 지금 배달된 구두신은 나와 동일한 나가 아니에요. 벌써 몇일 지났어. 똑같은 내가 아니에요.
그래서 나는 항상 교체되고 있습니다. 교체되고 교체되고 늘 매일같이 우리는 세포가 늙어요. 세포는 100일마다 부위마다 다르지만 보통 세포는 100일마다 재분열해요. 다시 교체가 돼요. 그러면 한 70년 살았으면, 태어날 때 세포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어릴 때 나 하고 지금 나하고 동일한 나일까요? 같은 나 입니까? 다 바뀌었는데요? 테세우스의 배라고 하는 논리거든요. 테세우스라는 배가 있는데 그 배를 나중에 후대 사람들이 그 배를 낡아서 널빤지 다 고쳤어요. 다 고쳤어요. 다고쳐놓고 과연 그 배가 그배냐? 이말이죠.
주님께서 인간 어떤경우라도 이미 고장났기 때문에 날마다 같은 나가 일치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일치점은 누가 준비해야 되느냐? 거룩을, 니가 어떤인간이 되든 한결같이 거룩하다는 그 요소는 어디쪽에서 준비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쪽에서 준비해야돼요. 이게 뭐냐? 언약은 변하는 언약을 변하지 않는 언약으로 신약시대까지 오셔야 돼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구약때 제사장이 제사드려봤자 제사드리는 본인도 달라지고요 제물도 달라지고요, 매사가 일치되는게 없어요. 제사 대하는 태도도 어제다르고 오늘 달라요. 뭐 한달전에 제사할 때는 천부여... 울면서 하다가 한달 뒤에는 다리꼬고 앉아서 다리꼬지 말라고 그렇게 해도 다리꼬아서 노래 뭐 실실 쪼개면서 웃으면서 찬송부르고. 왜? 동일한 찬송간데 그때는 은혜되고 왜 은혜가 안되느냐? 그때는 틀리고 오늘은 맞습니까?
그때는 틀리고 오늘은 맞아도 내일되면 오늘 틀려져요. 인간은 애초부터 고장난겁니다. 주님께서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혔을때에는 가죽옷과 아담과 하와가 괴리현상, 벌어지는 현상을 유발하는겁니다. 그 벌어짐 사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갑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을 붙잡을 수가 없을정도로 고장났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예수믿는다고요? 어제 믿은거 오늘믿은거 다 달라요. 내가 달라지니까. 나중에 치매걸리면 완전히 다 날라가요.
내쪽에서 치마를 입혔는거 벗겼잖아요. 근데 내쪽에서 치마 이거 벗긴 것을 왜 치마를 입힙니까? 나를 변하지 않는 나를 원상복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거에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원상이란게 없어요. 이게 물러져가지고 퍼석퍼석해가지고 다 이게 해체되어야 돼요.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사람 말합니다. 처음 교회 나올 때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뭐 열심히 안하니까 제가 어디가 문제가 있습니까? 저는 답변합니다.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전에는 전에 처음 믿을때는 내가 하찮은, 천하의 죄인이며 하찮은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저는 하찮은 존재고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한 나는 이제부터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고 괜찮은 존재인줄 착각을 한거에요.
내가 그 고백을 했기 때문에. 그 고백은 내가 나한테 치마입히는 것 하고 똑같은 거에요. 주님이 주시는게 있어야지 내가 고백한 내가 괜찮게 고백한 그 고백을 자기의 수치를 가리는 치마로 떡 입고 있다고요. 치마로. 나중에 치마하고 몸하고 맞지도 않아서 헐렁헐렁 해요. 헐렁하다고요. 아, 이거 맞지도 않은 것 어쩌면 좋겠어요? 우리 대책이 있습니까? 아무리 믿어도 내 몸이 완전히 부서져 가는데. 뭐 은혜로 믿었습니다. 성령으로 믿었습니다. 백날 해 봐야 나는 점점더 하나님의 말씀과 간격이 발생돼요. 틈이생겨버려요. 일치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의 나가 아니고, 그때의 나가 아닌게 아니라 도대체 나라는게 없어요. 확정된 내가. 한결같은 나라는 것이 아예 그 자체가 없고 한결같은 나를 찾는 것 자체가 이게 마귀시험입니다. 나를 나에게 찾지 마세요. 나는 소멸되고 있는 중이고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자, 이런 사태를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하시는데 오늘 말라기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말라기로 하여금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뭐라고 단정하느냐 하면, “내가 분명히 백성들에게 천사같이 그렇게 일관되게 하라 했어 안했어? 했지? 그러나 너희들은 어떻게 했느냐? 언약을 파했느니라.” 레위 언약을 파했다는거에요.
그러면 말라기를 통해서 우리가 뭐를 뽑아낼 수 있느냐 하면, ‘말라기에 나오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주신 한결같은 레위 언약을 파기시켰다. 깨버렸다’ 라는 요소를 끄집어 낼 수가 있어요. 잘들으셔야 돼요. “그 제사장 레위인들. 그것 실패했어. 실패했대. 그럼 아니야.” 아니야가 아니고 실패케 하신분이 그 실패를 끄집어내는거에요. 실패를 성과로 보는거에요. 언약을 주신 이유가 인간은 언약에 실패했다는 그 사실을 그릇에 담는거에요. 그 그릇에 담아서 그 그릇을 주께서는 계속 이어가는거에요. 실패했는데. 죄지었는데. 그 죄지은 것을 가지고 와요. 죄 지은 것을.
그 어디에 써먹을려고. 더러운 죄 지은건데. 그 레위 제사장에서 제대로 못하고 편벽되이 편을하고 말이죠. 다수의 의견을 좇아가지고 지 권리를 찾는 그 더러운 죄, 쓸데 어디가 있다고 그걸 하느냐? 버리지. 아, 버리면 안돼요. 그걸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가지고 와서, 자 레위 언약, 레위지파 레위언약은 실패했습니다. 이제 레위 언약 레위지파한테 묻지도 않아요. 그걸 어디다 묻느냐 하면 유다지파한테 가져와요. 유다지파한테. 유다지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라해요. 다윗의 자손.
이 점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습니다. 자 다윗이 소년일 때 전쟁이 하나 있었어요. 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에서 소년 다윗은 골리앗하고 전쟁한 것 여러분 아시죠? 거인 골리앗. 3m되는 거인 골리앗하고 1:1로 다윗이 붙은 것 여러분 기억하시죠? 그 골리앗 옆에 골리앗 하고 싸웠다 보지마시고 골리앗 옆에 그당시 이스라엘왕 사울왕을 같이 하나의 묶음으로. 마트에서 세일할 때 1:1 묶어주잖아요. 골리앗 더하기 사울. 이렇게 묶으시길 바랍니다. 묶어서 소년다윗이 싸운거에요. 그럴 때 형들도 말렸고 어른 싸움에 애들이 끼면 니만 희생된다고 말렸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당시 하나님의 언약, 할례언약입니다. 이스라엘 할례언약.
하나님의 할례언약을 실제적인 전쟁 승리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를 알리기 위해서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전쟁에 참전케 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소년다윗이 골리앗 싸울 때 말한게 있어요. 그게 뭐냐? 이렇게했어요. 골리앗이 덩치큰 것 맞고 거인인 것 맞는데 결정적인게 뭐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거에요. 그런데 내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할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다 이말이죠. 그러면 내가 그 골리앗 앞에 나설 때, 너 없는 것 나 있다. 이렇게 나서는거에요. “너에게 없는 것 나 있다.” 자, 아까 설교 다시해봅시다. 지금 인간이 스스로 치마를 입혔잖아요. 그거는 소용없어요. 주께서 입혀주는 가죽옷의 취지가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언약이에요. 그 언약과 일치성이 있느냐는거에요. 말라기에서 제사장은 지금 레위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치성을 못봐서 파기당했다는 지금 그런 규정을 받았어요. 그러면 소년 다윗같은 경우는 뭐냐하면, 소년 다윗이 할례언약을 주신 하나님과 일치되었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느냐? 전쟁을 이겼잖아요? 전쟁을 이겼어요. 골리앗을 이겼을 뿐만아니라 누구한테 이겼느냐? 사울왕한테 이겼어요. 사울왕은 말만 이스라엘 왕이지 율법과 일치성이 없어요. 그러나 소년 다윗은 할례있는자가 할례 없는자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합치되는 결과물로서의 전쟁승리라는거에요.
그러면 그 가운데 소년 다윗은 뭐냐? 희생물이 된겁니다. 무슨 희생물? 바로 하나님의 제사의 희생물이 된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을수가 있어요. “제사 드리는 자가 제사되는 희생물이 될 때 레위 언약은 합치되고 일치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로서 예수님만 보낸 것이 아니고 제사 드릴 때 필요한 세상죄를 지고가는 희생물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보내신거에요.
언약과의 딱 붙어있는, 언약과 떨어질 수 없는 새로운 희생물의 등장이에요. 레위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게 거룩이에요. 하나님께서 준비된 새로운 우리의 자아, 우리의 신체, 우리의 천국에 살만한 몸입니다. 이걸이제 사도바울에서는 대신하신다. 주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신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라기에서 인간의 인간 제사장들은 레위 언약을 합치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거에요. “실패했으니까 예수님이 하신다” 이게 아니고 실패 함으로써 언약이 생산된게 뭐냐? “어떤인간도 언약앞에서 하찮은 죄인일 수 밖에 없다.” 그 죄를 종지기라든지 그 죄를 담아오는거에요. 그 죄를 어디다가 주님께서는 인간의 그 죄의 몸에서 일치되지 못한 그 죄를 자기 몸에다가 샤워해요. 뒤집어 씌우는거에요. 언약의 일관성 때문에.
구약의 언약의 일관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잘난인간들로 하여금 천하의 죄인으로 만들었잖아요. 그 죄인이 되었다는 그 생산물을 버리지 않고 주님께서는 그걸 죄의 몸이니까 자기몸에다가 뒤집어씌우는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들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뭘 받았습니까? 저주를 받은거에요. 그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십자가의 새언약과 합치되는 사람으로 천국갑니다. 그렇게 천국가는거에요. 새언약과 합치되는거에요. 내가 십자가 앞에서 영원히 하찮은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발각되는 이 즐거움과 자유함으로 살아가는거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나이가 이제 한 50가까이 돼서 탈모가 심한 아버지가 있었어요. 머리가 다 까졌어요. 훤하니. 나이는 50인데 나이가 60도 넘어 보이는... 있는데 그 고등학교 나온 딸이 요새 아가씨들, 여고생들 TV 케이팝 스타들 춤추잖아요. “아빠 나 저 춤 배우고 싶어. 소풍가서 내 주특기 자랑하고 싶어. 근데 춤을 못추니까 학원댕겨서 춤배우고 싶어.” 춤을 배우겠다고 그렇게 졸라대는거에요. 그래서 아빠가, “그래, 니가 뭐 공부도 별 소질 없고 춤이나 배워서 그방면에 니가 가든지 해” 해서 끊어줬습니다. 춤배우라고 끊어줬는데 끊어주고 난뒤에 그 딸이 뭐 맹장이 갑자기 아파서 맹장을 수술해가지고 학원을 못다니게 되었어요.
춤도 하나도 못배우고. 수술 끝나야 돼요. 그래서 돈이 비싸니까, 머리 허연 아버지가 학원 원장한테 가서 “돈 돌려주세요.” 하니까 학원 원장이, 안그래도 장사안되는데, “아, 이거 환불 안됩니다.” 환불안되니까 이렇게 하고난 뒤에, 돈을 이제 날리게 생겼죠. 근데 아버지가 여기서 멋진 아이디어를 냅니다. 뭐라고 하느냐? 딸은 아파서 못하고 아버지가 애들 같은 13살 14살 먹은 학원에 가가지고 그 춤을 다 따라해요. 그게 동영상으로 나왔습니다. 머리 허옇게 나고, 잘 따라해요. 또 너무 소홀히하면 나가라 할까 싶어서 딸이 하던 그 몸집을 그대로 해요.
그러니까 아버지 몸속에 누가있냐하면, 맹장수술한 딸이 들어있는거에요. 이미 성령이 옴으로써 예수님 내가 한 것이 니가한것이라고 일치시키는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떨어짐이 없어요. 이제는 내 행함의 여부에 있어서 구원되고 구원안되고가 없어요 이제는. 어차피 우리는 하찮은 존재고 흉내내고 먹히지도 않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동일하지 않아요. 그걸 누가아느냐? 미리 다 알았어요. 주께서 미리 아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말라기를 성취시키는겁니다. 백날 니가 지켜봐야 니는 죄밖에 안나와 하지만 죄밖에 안나오는 그죄 주께서 미리 십자가에서 처리를 다 하신거에요. 단,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니는 내 딸이고 니는 내 아버지고 니는 내 자식이고 나는 니 아버지고. 학원에서 요구하는 것 아버지가 대신 다해줄게. 그래서 졸업하게. 춤 졸업할게. 걱정하지마, 내가 졸업할게.
주께서 십자가 치르시고 졸업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합격통지서를 우리에게 통보하는데 그 통보를 성령이라고 해요. “합격. 천국 패스” “나는 하지도 않았는데?” 보니까 십자가에요. 그래서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모든 성경해석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성경을 해석하니까 이것은 우리는 이땅에서 내 가치는 애시당초 갖다버리는 자유함과 가벼움과 존재의 가벼움과 평안함으로 주께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사처럼 완벽한 그 하나님의 언약앞에 참으로 우리는 내 사정 들어달라는 그러한 건방진 말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고 다 이루신것만 증거할 수 있는 그 일에 쓰여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