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저주하심
2024년 7월 3일 본문 말씀: 말라기 2:1-3
(2:1)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은 인류를 대표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약 받음에서 파악된 것은 언약이 살아 있는 것보다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을 우선시하면서 평소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존재하고 있고 살아 있음을 가장 확실한 현실이라고 여겼습니다.
실은 그들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참다운 현실은 ‘언약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언약이 살아 있음을 보이는 재료요 증거물에 불과한 겁니다.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유대민족은 소박하나마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제사가 지속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는 증거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언약이 스스로 사시는 방식을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실시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도리어 언약은 인간들의 언약 준수에 시비를 거십니다. 말라기 선지자 당시의 제사장들의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단호하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저주하기로 작정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 안에서 복/저주 다 같이 들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언약의 살아 있음은 복도 살아 있고 저주도 살아있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유대민족이 복을 받고 있다는 의식 자체를 선지자를 보내어 공격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복을 이미 저주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언약 살아남’이 ‘인간 살아남’보다 우선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저주한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언약 안에서 복이 되기 위해서는 필히 저주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사 현장에 제일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언약궤의 취지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현장에서 듣고 있노라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현대인들은 이미 자존, 자립, 자율 정신으로 철저하게 교육받고 무장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복이나 행운을 바라는 것은 현대인답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노력한 만큼 얻는 소득으로 살 생각입니다. 공부만 잘하면 나중에 사회에서 복이나 저주를 따지는 것보다 확률상 더 잘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서 하나님 믿어 행운을 잡아라는 미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감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저주받은 공갈에는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구호는 이것입니다. “복준다고 현혹말고 저주받는다고 겁박말라”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무슨 소리를 하던 그들은 경청할 필요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까지 합니다. “복을 고대하는 심보가 참으로 더욱 더러운 공짜 심보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복을 받아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너희는 저주받고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언약적으로 볼 때 복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이점을 이스라엘을 공략했던 모압 나라의 선지자 발람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방 나라 선지자 발람 선지자를 예언과 발언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고 장악하셨습니다.
이미 이방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정복당한 상태입니다. 이방 나라 선지자의 계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몸소 체험한 발람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통해서 발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편에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선지자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나귀가 먼저 발견해서 천사의 칼을 맞지 않게 한 겁니다. 따라서 발람은 여호와 앞에서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합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왕, 곧 메시야(별)가 출현한다는 겁니다.(민 24:17)
이 사실은 곧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라 언약 위주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다면 이방민족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이 망하기를 바라는 모압왕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하는 왕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하면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붕괴하게 되는 겁니다.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바알제사에 참여 시킵니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이로서 이스라엘 내에 죽은 자가 24,000명이 되었습니다. (민 25:9) 신약에 들어와서 언약을 이루는 방법은 하나님의 저주를 온몸으로 자진해서 받아내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따라서 유일하게 언약 안에서 저주에서 복으로 옮겨진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과 같이 저주로 들어서면 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과 더불어 저주 속으로 들어서게 하는 겁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바로 이 언약적 작업이 다음과 같은 일관된 원칙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존재가 현실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언약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임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말라기 2장 1-3절(복을 저주함) 2407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미 저주하셨다고 이야기하고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고 하지만 여기있는 유대민족, 제사장들... 우리가 어디에서 저주 받았는지를 감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게되면 자기가 하는 모든 이 상황이 건전한 것이고 하자가 없는, 별 탈이 없을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등장하는가? 말라기라는 선지자가 등장했어요. “내가 이미 너희를 저주했다. 너희가 복이라고 여기는 그 복을 나는 저주로 바꾸었다. 너희들이 드리는 그 희생의 똥을 너의 얼굴에다가 쳐바를 것이다.” 그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들은 이미 짤렸어. 버림받았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의 이 발언은요, 너희들이 망하기 전에 더러운 추억을 쌓아라는 이야기죠. ‘건전하고 자랑스러운 그런 추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똥발림을 당한 그런 저주스러운 추억에 너희는 참여하라.’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저주함으로써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기능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까지 언약이 담고 있고 발휘하고 있는 그 기능을 너희를 통해서 드러나게된다는겁니다. 그 기능이 뭐냐? 복과 저주가 함께 언약안에 둘다가 들어있는겁니다. 복도 들어있고 저주도 들어있는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 복과 저주가 들어있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 하면, “복만 주시고 저주는 우리에게 안주셨으면 참 고맙겠습니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저주의 기능을 너를 통해서 보여주겠다.”라고 하나님께서 언급을 하게 되면,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저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식으로 하나님에게 반발하게되어있어요. 그저 “우리는 복만 받는걸 좋아합니다.” 라고 되는거에요.
그런데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 중에서 저주를 왜 유대민족에게 주시는가? 그 주시는 이유가 뭐냐? 복을 받는 조건과 저주를 받는 조건이 달라서 그래요. 언약안에는 둘다 포함이 되어있는데요. 복을 받는 조건은 언약이 우리를 통해서 언약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복을 받는 조건이라면 저주 받는 조건은 내가 복을 받아야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저주의 조건이 돼요. “내가 하나님을 알았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복줄거야.”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 하나님의 언약에서 그 생각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언약이 살아나야한다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가 복받고 잘살아야 되고 행복해야 된다는 것이 언약을 제끼고 먼저 앞장서서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만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의 마지막이 이렇게 멸망으로 저주로 끝나는 이유는 이스라엘 역사 내내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뜻과 이렇게 일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끝까지 가면서 계속 그것이 그 차이남이 드러나는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도 자기가 복받는것에 급급해서 언약보다도 언약이 사는 것 보다 내가 우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갖는 그것은 이스라엘 뿐만아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런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 나빠서가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이거는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가 된다 이말이죠. 우리는 이스라엘 이 역사를 통해서 복을 원했건만 정작 주어진 것은 저주밖에 없다는 이 말라기를 통한 이 이스라엘 역사의 증언을 나에대한 정확한 하나님의 지적으로, 평가로 받아들여야 돼요. 하나님은 언약을 알리길 원했지만 우리는 내가 행복하고 싶다는 이 욕심이 언약을 제끼고 이게 먼저나오는거에요.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언약이 주어졌을때에 이스라엘 역사는 초반부터 그렇게 오해를 했었습니다. 그게 민수기 22장, 23장, 24장에 나오는 발람 선지자가 있는데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선지자 아닙니다. 이방나라 모압의 선지자에요. 저주 받아야 될 나라의 선지자입니다. 이 저주 받아야 될 나라. 저주스러운 이방나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이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축복케하셔요. 이스라엘 내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데 이방나라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한다는 것은 이것은 누가 관여했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강제로 이방나라 선지자에 관여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 말은 이방민족의 선지자라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하는 일을 그들은 결코 방해할 수가 없다 이말입니다. 여호와가 이방나라 선지자까지 통치하고 지배하는거에요. 이스라엘은 물론 지배하고 통치하고요. 그러면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하고 똑같은게 아니냐? 같지 않아요. 둘다 이방나라 이스라엘 다 통치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이방나라에게는 돌아갈 자비가 없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왜그렇지?”하는 그 사실을 이방나라 발람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상대하게 했습니다.
그 발람 선지자가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에다가 열어서 담아주는 내용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대한 계획을 이방나라 선지자 발람을 통해서 이렇게 나타나도록 조치를 했는데 그 내용이 뭐냐?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옵니다. “내가 보니까 그 이스라엘 내에 한 별이 있다”는거에요. 한 별.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내에 메시아라고하는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이걸 발람 선지자가 이야기를 해요.
그것을 이야기 하면서 발람선지자가 어떠한 생각을 갖느냐 하면 발람은 모압선지자거든요. 모압 왕은 발람 자기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망하도록 어떻게 조치를 하라고 뇌물을 주고 압력을 가했던겁니다. 발람선지자가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아요. 자기나라 모압편에 선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발람선지자의 모든 언어를 장악해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현재나 미래에 그 복받은 상태에 대해서 계시를, 예언을 해버린거에요. 발람선지자가 예언을 했다 이말이죠.
예언을 하면서 발람 선지자가 두가지를 알았어요 하나는 뭐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이방나라를 죽인다는 사실, 멸망시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그거는 바로 나귀타고 가다가 여호와의 사자한테 죽을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선지자 오는 것을 보고 죽이려고 했어요. 나귀가 조치를 해가지고 발람선지자가 안죽었어요. 안죽고 완전히 발람선지자가 쫄아가지고 자기 민족이고 뭐고 모압이고 치우고 하나님 여호와가 담은 대로 그냥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안 것은 뭐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방나라에 대해서 저주한다, 심판한다는 사실, 그 하나님인걸 알았어요. 두 번째 안 것은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왕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게된겁니다.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렇다면, 발람선지자 입장에서 이스라엘 망하게 하는 방법이 생각이 난거죠.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나라가 자기 왕에게 관심을 두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저절로 내부적으로 저주받고 분개하는거에요. 그 이유가 뭐냐하면 이방나라는 여호와라는 왕이 없어요.
따라서 필히 저주 받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있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자기 속에 있는 왕에게 관심이 없으면 돼요. 거기에 관심 두지 않고 관심을 자기자신에게 돌리면 되는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되 내가 행복하고 복받기위해서 여호와를 믿으면 이것은 바로 왕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망하게 되어있다 이말이죠.
그 방법을 발람선지자가 사용을 한거에요. 그게 바로 민수기 25장에 보면 발람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모압여자와 음행하고 다시 말해서 그 당시에 모압의 우상섬기는 방식, 제도에 그 신들에 제사하는 거기에 참여한거에요. 바알신인데요. 그 바알신에 참여하게 만들었어요. 바알 신은 무슨신이냐 하면 우리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고 내가 잘되는게 바알신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살리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언약. 또는 메시아 별. 그분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이 언약을 준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는 마땅히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복이 오는줄 알았어요. 복이 오는 줄 알았는데 발람 선지자가 개입해가지고 이방 그 바알신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니까 그게 상당히 음란한 제도에요. 모든 순서가 성적으로 음란하게 진행되는데, 여성들이 신에게 제사할 때 거기에 같이 참여했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어쨌든간에 거기에 참여한 자로 인하여 8절에 보면, 죽은 사람이 9절에,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2만 4천명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행복 하고싶다는게 진짜 현실인가, 아니면 언약을 살리겠다는 것이 진짜 현실인가를 하나님께서 똑똑히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거에요. 사람들이 교회 올 때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들을 때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게 현실이에요.
그런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복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세운 그 언약만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참여시켰다. 언약 살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 듣고 자기 행복, 자기 건강, 자기에 대한 형편에 대해서 그것을 현실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가로막는 장애로 여길거에요. “내가 행복해야지 성공해야지 건강해야지. 잘먹고 잘 살아야지.” 이게 바로 진짜 현실, 하나님이 시작한 현실을 훼방하는 짓이라는 그것을 알거에요.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올 때 관심사가 내한테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있습니까? 말씀에 있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행복을 원했던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적 제도, 레위 언약, 다른말로 해서 제사죠. 제사를 정기적으로 그냥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복주시고 복주시고 계속 복준다고 생각한겁니다. 그랬던 그들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2장을 보니까, “내가 너희들이 복을 원해? 내가 이미 너희를 저주로 돌렸어. 너희들은 뭘 모르냐 하면 언약 안에 복만 있는게 아니고 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너희가 놓쳤다” 이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복이 안되고 저주가 되는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말입니다. 그게 현실이다 이말이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게아니고 원치 않는 저주를 나에게 주신분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자신의 생존에 이게 현실이 아니니까요. 이건 하나의 내가 꾸는 꿈에 불과한거죠. 그래서 다시오늘 본문에 돌아와 봅시다. 말라기에 만약에 이 강단에 서서 말라기 선지자가 이와같은 설교를 했다고 칩시다. 오늘 본문대로. “너희가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서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아니 이미 저주 했어. 너희들의 모든 것을 내가 똥으로 바꿔서 너의 얼굴에다가 때기칠거야. 똥칠할거야.”라고 여기 말라기라는 선지자가 여기서 설교한다면 그걸 듣고 있던 현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걸 듣고 있던 현대인들은.
이게 중요한거에요. 현대인들은 뭐를 현실로 여기고 현실감을 느끼느냐 이말이죠. “아이고 말라기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 했다. 우리는 죽었어. 회개해야돼. 이래 나올줄 알았지롱?” 현대인들은 그렇게 만만치않아요. 현대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같은거 말라기 필요없어요. 말라기 예언 필요없고 계시도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복같은거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우리의 소득만 챙기면 족합니다.” 이게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현대인들은 말합니다. “행운을 잡으라고요? 교회와서 복받으라고요? 안받으면 저주받는다고요? 우리는 그런 공갈에 넘어갈 현대인들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저주, 그딴 것 없어도” 공부만 잘하면 확률상, 통계상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거에요. 공부만 잘하면. 요새 애들 교회에 안보내잖아요. 애들 교회에 안보내죠. 특히 고3. 현대인은 말합니다. “복? 저주? 그딴거 우리는 안휘둘립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자립 자존 자율이에요.
이걸 모토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무슨 복과 저주가 먹힐까요.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준다고 현혹말고 저주받는다고 겁박말라.” 불 난 뒤에 후회말고 꺼진불도 다시보자. 이 비슷한 표어같이. 교회 안가도 건강하고 행복하고 여유있게 살면되잖아요. 심지어 이렇게합니다. “복을 기대한만큼 복을 욕심내는게 그게 더 더러운 심보 아니에요?” 이렇게 반박합니다. 시편 73편 4절에서 6절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여기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다.”이렇게 되어있어요. 교만이. 교만이 목걸이처럼 달려있다는거죠.
아까제가 말한 가운데서 그 표어중에서 다시한번 강조한 표어가 있어요. 이 표어 여러분 잊지 말라고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복준다고 현혹말고 저주받는다고 겁박말라.” 우리 현대인들은 그렇게 심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 말이 무슨말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해요. 성경이 뭘 이야기 하는지. 성경은 복받아라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성경은 이미 너희들은 저주 받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언약을 줬다는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받아라고 주는게 아니고 “너 저주야.” 그것 알려주기 위해서 주신거에요. 그게. 성경을 보면서 말귀를 못알아 들어요. 아마 대부분은 목사가 교인들 좋게 하려고 복을 강조해서 심방할 때 맨날 복들고가서 그런거에요. 저주를 들고가서 저주를 이야기안하고 자꾸 복을 앞장세워서 이야기하는거에요. 어디 뭐 도를 아십니까? 천도제 할까요? “천도제 지내면 복받고 안지내면 저주받습니다. 도를아십니까?” 그거나 교회 목사 설교 차이점이 뭐에요. “당신 이렇게 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당신 이렇게 하면 행복 합니다 하는 그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그게 언약 위주가 아니고 내가 존재하는걸 유일한 현실감을 갖고있는거에요. 언약이 살아있다는게 현실감으로 보지않고.
내가 저주받았다는 것이 현실로 보지않는거에요. 그래서 이 말라기에서 저주 이야기하는걸 그들은 이걸 복으로 여겨야 돼요. 내한테 저주가 이렇게 외치거든 너는 지금 언약안에 있는 줄을 알아라. 알아라는거에요. 알아라. 도무지 니 중심으로 엉뚱하게 해석하지 말고. 어떤 초등학교 선생이 학부모한테 통보를 했어요. 애들 편에. “우천시에서는 다른지역에서 행사합니다.” 이렇게하니까 그 학부모중에 한사람이 해가지고, “아, 이번 행사는 우천시 안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하는데 우리나라에 우천시가 어디있습니까?” 비올 때 이야기에요. 여러분 아시죠?
또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이야기해서 수학여행가서는 중식을 제공합니다. 하니까, “우리 애는요 중국식 안좋아하고 한식주세요.” 중식이라는 것은 점심을 이야기하는거에요. 학교 졸업한 애들한테 이제 학교 통보를 해줬어요. “교과서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반납하세요.” 이렇게 하니까 세상에 학부모가 그 교과서를 새로 사가지고 선생님한테 반납한거에요. 교과서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에게 반납하라 했는데, 교과서를 돈주고 새로 사가지고 선생님에게 반납한거에요. 사서가 무슨뜻인지 모르는거에요.
성경에서 복과 언약, 언약 축복 나와도 이게 무슨뜻인지를 몰라요.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살리기 위함이지 저주받은 너희를 살리기 위함이, 현실이 아니라는겁니다. 사서 선생님한테 책사가지고 진짜...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하게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내한테 저주가 주어지거든 너희는 계속 언약안에 있는 줄 알아라 이말입니다. 여기에 적당한 노래가 있어요.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줄 아세요’ 저주가 주어졌거든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온 줄 아세요. “나 구원 받아야 되는데, 나 복받아야 되는데.” 그게 바로 언약을 가리는 저주거리에요. 그게바로 저주야라고 지적하거든 그게 바로 하나님이 언약으로 너를 찾아오는 중이다는 것을 기뻐해야 된다 이말입니다. 너에게 저주하는 것을. 감사해야된다 이말이죠. 저주하는 것을.
“낙엽이 지면 내가 떠난줄 아세요.” 이노래는 ‘찬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면 내가 떠난줄 아세요 떨어지는 낙엽위에 추억만이 남아있겠죠.” 저주만이 남아있을 때, “아, 내가 복을 언급할 쨉이 못된다는 것. 그런 자격조차 안된다는 것.”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나로하여금 저주부터 일을 시작해 나가신다는 것을 감사해야됩니다. 그게 바로 레위 언약안에 그게 탑재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레위언약. 그 제사안에 탑재 되어있어요. 왜, 이유가 뭐냐? 제사는 그 중심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언약궤 앞에서 제사하거든요. 그러면 언약궤 안에는 뭐가 탑재되어있는가? 이미 인간은 창세기 3장때 복을 떠나 보내고 복이 저주가 되어서 저주받은 땅에서 평생을 땀 찔찔 흘리면서 고생하고 여자들은 애기놓는 고통 속에 있으면서 남자한테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 이 모든 내용이 “너는 이미 저주야” 라고 통보하는거에요. 그게 바로 언약궤 안에 내용이 있고 거기에다가 피발라서 희생의 피를 가지고 제사하고 있잖아요. 도대체 이 감을 못잡아. 사람들이, 감을. 하나님의 언약 중심에 감을 못잡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저주밖에 없다면 그러면 우리는 저주받은 이 입장에서 무엇이 복인가를 생각해야되죠. 복과 저주는 언약 조건이 안맞았기 때문에 복이 나와야 될 레위 언약에서 저주가 나왔다 이말이죠. 그러면 그 조건을 복이 나온 조건으로 바뀌면 돼요. 바뀌면. 복을 조건을 제대로 충족해서 레위언약을 준수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이 말라기에 나오는 언약 사람들,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받았던 그 저주를 예수님은 자기 몸에다가 그 저주를 인수인계했습니다.
야, 정말 이거는 예수님외에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이런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다시말씀드리면서 무엇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인가를 제가 짚어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되는 거에요.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나를. 예수님 자신을 좇아가야돼요. 혼자 십자가 지고 고난받는다 이러면 안돼요. 예수님을 좇아가야 된다 이말이죠.
아무도 안갔어요. 제자들 아무도 안갔습니다. 좇아가기는커녕 도망치기 바빴어요. 어떻게 저주속으로 어떻게 기어들어갑니까? 이게 인간의 한계지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좋아합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믿습니다.” 도대체 그러한 발언들을 하는 이유가 자기가 복받기 위해서 하는것이지 저주를 감수하려고 하는 발언들은 아닌거에요. 주일날 교회나오고 수요일날 교회나오고, 새벽기도 나오고... 자, 교회나와서 하나님 경배하겠다. 경배하는 그 의도가 뭐냐 도대체? 의도가 뭐냐? 마이크 대고. “잠시 인터뷰하겠습니다. 교회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존재하는게 현실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가장 현실은 뭐냐? 내가 살아있다는 것. 주님은 말합니다. “니 현실? 니 저주 받아. 늙어죽는게 현실이다. 니는 지금 안죽으니까 살아있는걸 현실로 보는데, 나는 살았다. 살아있다 하다가 진짜 시청앞에서 한번 차에 깔려가 죽어 봐야, 야, 이게 살아있다고 사는게 아니구나.” 살아있다고 사는게 아니에요. 운전 미숙으로, 순간적인 운전미숙으로 깔려봐야 야, 이거 내목숨이 내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죠. 무엇이 현실이에요? 진작에 죽는게 현실이에요. 저주 받아야 되기에 저주받는게 현실입니다. 다른 건 현실이 아니에요. 그거는 가상이고 망상입니다.
제가 강남강의에 갔는데 강의 전에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송재원씨가 잠이안온다는거에요. 잠이안와서 참 힘들다는겁니다. 또 어떤 권사님은 잠이안온다. 잠이 안오고... 그걸 복음적으로 관련해서 제가 설명을 해 드려야 되죠. 몸이 아프다. 몸이 아픈건 문제가 아니에요. 몸이 아픈걸 안아프게 하겠다는건 그건 잘못이에요. 몸이 아픈 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내가 죽는 것 보다 더 좋은게 있으면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이게 문제거리가 안돼요. 몸이 아프다고 짜증나고. 뭐 짜증낸건 아니지만, 잠이 안온다고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사는것보다도 더 좋은게 없을 경우에 그런 티를 내는거죠. 재원씨가 그렇다는건 아니고, 재원씨도 복음으로 기뻐한다고 했어요. 갑자기 여기서 변호해야하는데...
사람이 몸이아프다, 돈이없다. 돈이 없을수도 있고 몸이 아플수도 있고 치매걸릴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픈 것, 내가 가난한 것 보다도 내가 죽는다는 이것이 언약이라면, 죽여주옵소서 하는 그 기쁨. 그 기쁨이 뭐냐? 아버지의 뜻을 반영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졌던 그 저주사건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어요. 저주받았다고요. 왜? 그게 아버지의 계시는것에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죄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저주 받는 것이 너무나 지극하고 당연한 겁니다. 왜 굳이 예수님만 그래야 돼요? 우리는 왜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돼요? 우리는 그만한 자격과 권리같은게 있습니까? 우리가 저주 안받을 만한 그러한 당당한 권리같은게 있어요? 없어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죠. 마땅히.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져라는 거에요. 십자가로 무너지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진짜 현실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다는 것. 다시말해서 커튼이 구멍나 찢어지듯이 떨어져나가야 되겠죠.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살기위해서 온갖 행위를 다하는거에요. 우리가 내가 행한 것, 행위.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있는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행위가 나에게 구원으로 주어진다는 어떤 결과. 자꾸 행위를 의지할 때 주께서 주시는 것은 오늘 본문 주시는 것은 뭐냐? 똥이에요. “똥이나 발라라.” 똥을 쳐바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믿는 사람들.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다 똥에 쳐발릴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는가? 벌써 시작부터가 잘못된거에요. 시작부터가.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저주받는자가 복이 있나니. 저주 받는자가 복이 있나니. 성경에 그런 말씀 없는데요? 있어요. 있는데 제가 단어 하나를 의도적으로 빠뜨렸어요. 예수님과 함께 저주받는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복이에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걸 우리들이 인간인 이상, 주님이 아니고 인간인 이상 그걸 어떻게 해내냐 이말이죠. 자진해서 저주받을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해 내냐? 로마서 5장 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중에 이제 말라기도 집어넣읍시다. 말라기 2장에 가입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야, 주님께서는 저주를 통해서 다시 언약의 완성을 봐버리는거에요. 저주 받아야될 우리를 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서 언약의 완성을 보는거에요. 언약이 완성된 상태가 복입니다. 이 처음부터 우리는 복을 탐내면 이게 바알종교에요. 하나님종교가 바알종교 되버려요. 그런데 모든인간은 바알 숭배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가지고 뭐를 주느냐 하면, 이 성경 말씀을 율법적 기능을 행하는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줘버립니다. 성경말씀이 쑥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욱하고 성경말씀 앞에서 우리는 무너지죠. “내가 뭔가 현실을 오해하고 나에대해서 크게 곡해하고있었구나. 하나님 덕볼려고 했구나. 얍삽하게.”
그러면 그 말씀이 들어와서, 오늘 말라기 2장이 들어와서 “나는 너를 저주로 바꾸었다.”라고 했을 때 그래 나는 저주 받아야지.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살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저주가 되고 근데 그 저주가 어떤 저주냐. 고마운 저주에요. 왜냐하면 언약 안에 있다는 저주에요. 언약 안에있는 저주이기 때문에 같이 언약안에 있는 복으로 예수님의 사하심으로 이게 전환이 되어버리는겁니다.
이게 언약안에 있는, 성전도 마찬가지고 언약궤도 마찬가지고, 언약궤, 피발린 것, 언약궤 피발린곳이 성전이죠. 성전은 복과 저주가 중첩된겁니다. 중첩.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보좌에 윗층과 아래층이 있어요. 위층은 복이에요. 아래층은 심판입니다. 복과 저주가 같이 보좌를 중심으로해서 같이 함께있어요. 밑에는 천둥번개 치고 불심판 떨어지고 위에는 무지개가 편안한 평화로움이 있어요.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에는 복과 저주가 예수님안에 함께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음으로 말씀을 다 이룬 것이 되어서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절차를 똑같이 우리에게 해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이 말씀을 말라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겁니다. 그러면 말라기는 더 이상 율법이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예수님이 말라기 말씀을 완성했다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거에요. 복음으로.
그러면 복음이 현실이에요. 내가 살아있는게 현실이 아니고. 복음을 위하여 내가 그동안 살아 온 거죠. 죄지으면서. 저주스러운 모습을 띄면서. 저주 받는자가 복이있다 하는 그, 앞에 말 떼고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그 흔히 말하는 8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있나니....” 그 복이 있나니 할 때 그 복의 마지막 대목의 복은 어떤거냐 하면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핍박이야기 나오죠. 그걸 또 11절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여기서 나는 누구냐 하면, 우리 나를 말하는게 아니에요. 누굴 말하느냐?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현실이고, 그 예수님만이 현실이라는 것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참여된 자가 되었어요.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서 같이 핍박받고 같이 욕을 얻어먹을 때 그게 바로 복이 있는거에요. 그게 복이에요.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동안 우리가 이 마태복음 8복을 보면서, 8복을 본사람이 제가 일부러 생각하기에는, 75억 4천만명정도 안되겠어요? 그만큼 팔복을 듣거나 보거나 한사람이 그만큼 많아요. 그만큼 많아도 이 팔복을 전부다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복받지?”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저주받지?”라는 식으로 이 팔복을 이해를 못한거에요. 교과서 사가지고 선생님한테 드려라.
말귀를 못알아먹어요 말귀를. 뭐 한식달라? 중식제공하니까 우리 애는 한식을 좋아한다고... 진짜 우천시로 한번 보내볼까...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거에요. 지금 보이지 않는 예수님만이 현실이고 나는 겉절이, 그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서 그냥 갖다 붙어있는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걸 다 이루었고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기뻐하고 그 기뻐하는 것을 세상에 나가서 우리는 언약안에 있고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 이게 큰 복인 것을 증거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과 저주, 그 기본조차 몰랐던 저희들. 저주 받는다면 불쾌하게 여겼던 그 심보가 바로 마귀 심보고 더러운 심보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런 한계를 지닌 저희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주셔서 죄가 더한곳에 은혜를 넘치게 주신 이 은혜를 늘 감사하고 주님만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