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8a 부산강의 : [시편]67(51:4)-율법과의 불일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51편 할 차례입니다.
[다윗의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왜 선지자를 죄 짓고 난 뒤에 보내지요? 죄 짓기 전에 선지자를 보내면 되는데. 미리 이야기했으면 죄 안 지었을 건데 왜 선지자를 죄 지은 후에 보내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상대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죄와 상대해요. 인간을 어떻게 다독거리고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인간세계에서 ‘꼼짝마라’하는 게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죄입니다. 이걸 로마서 5장에서 죄의 왕 노릇이라고 해요. 인간에게는 왕이 있는데 그 왕이 뭐다? 죄가 돼요. 인간이 인간의 왕이 아니고, 왕이란 너 말고 신하 너 말고, 인간 위에 따로 보이지 않는 왕이 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이에요.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가 왕인 줄 알았어요. 왕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자기가 짐승이 돼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해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뭔가 빠뜨린 게 있어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나를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나에게 왕 같은 존재가 따로 있었고, 하나님은 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는 잡히지 않는 그 요소를 하나님은 경유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에 있어서 꿈은 고통이었어요. 괴로움이었습니다. 신나는 게 아니에요. 참을 수 없는 고통, 왕이지만 딴 건 다 해결해도 자기 내부세계를 해결을 못하는 거예요. 자기 내부세계에서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왕이 아니었고 졸개였던 겁니다. 꿈속에서. 그래서 부탁을 하는 거예요. 제발 내 꿈을 좀 해몽해 달라. 해몽해서 뭐 할 건데?
꿈을 해몽해 달라는 것은 이미 꿈은 꿨어요. 앞으로 어떤 꿈을 꿀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꿔버린 꿈이에요. 덮쳐진 사건이에요. 마치 대만의 지진처럼. 수습이 안 돼, 자기가. 수습이 안 되면 그냥 놔두면 될 것 아니냐? 안 돼요. 그게 되질 않아요. 그게 나보다 더 센 게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했을 때에 자기는 뭘 하고 싶냐 하면, 느부갓네살은 해석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동안 느부갓네살이 해석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바벨론 제국에 대해서 해석권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세계, 땅의 제국 말고 더 위에 있는 것까지 합쳐서 뭘 하고 싶단 말입니까? 해석을 하고 싶은 거예요. 자, 해석을 왜 하려고 해요? 해석하면 꿈을 이깁니까? 해석을 돼버리면 지금까지는 ‘나는 왕이다’ 그게 자기 해석이에요. 그리고 자기는 이 바벨론의 왕이기 때문에 자기 자리는 왕 자리로 확고했지요. 이 자리 말고 나를 괴롭게 하던 다른 자리가 있는 겁니다. 그 양쪽을 합했을 때에 새로운 추가적인 해석 안에서 배정받은 나의 자리가 뭐냐?
졸개가 되던 간부가 되던 그건 나중 문제고 인간은 자기 자리를 알 수 없으면 이건 불안합니다. 있을 자리가 내가 있지 못하면 불안한 거예요. 이게 이런 뜻이냐 하면, 어떤 자리를 배정받는 자리에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나에게 이렇게 자리를 배정하는 이 체계, 이 구조를 알게 되면 전체의 일부로서 전체와 일부로서의 그 관계가 우리에게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겁니다. 약간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또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됩니다. 다시 한다고 해서 다시 하는 게 아니에요. 추가적인 게 계속 나옵니다.
시편 51편에서 나오게 된 것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선지자가 찾아온 말씀이죠. 질문이 뭐냐 하면 왜 죄 짓기 전에 나단 선지자를 안 보내고 죄 짓고 난 뒤에 선지자를 보냈느냐, 그런 이야기했지요.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먼저 오신 분들은 답변을 들었어요. 답변해보세요. 왜 선지자를 죄 짓고 난 뒤에 보내려고 했지요?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고 죄와 상대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인간이 죄를 지어버리면 구원받을 수 없지요. 인간은 죄를 짓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건 잘못된 거예요.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죄가 되어야 돼요. 인간이 죄가 되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자체가 죄와 상관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을 다윗을 죄와 일치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선지자를 보내서.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죄를 지어버리면 나는 원래 죄 안 짓는 존재인데 이번에 잘못됐다, 실수했다. 비로소 죄 짓는 걸로 여기고 있어요. 이런 오해들이 조금 세상을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신체로 돼 있어요. 인간이 있다는 것은, 신체가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게 출생입니다. 출생이 사건이에요. 무슨 사건? 신체가 나타난 사건이 출생이죠. 신체가 나타났지만 여기는 뭐가 없느냐 하면 자아, 나는 없어요. 그냥 신체만 있을 뿐이에요. 출생했다는 것은 신체가 나타난 사건이지 내가 나타난 사건은 아닙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나는 신체가 죄의 세계 안에 살아가면서 무럭무럭 숙성되는 것이 나에요. 그러면 우리가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것을, 방금 한 이야기가 이해되려면 죄 없는 것을 제가 모델로 뭐가 죄 없는가? 물어봅시다. 고양이가 죄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양이가 자기 신체가 있지요. 죄 있어요, 없어요? 고양이는 죄가 없지요. 죄가 없는데 고양이가 어떻게 사느냐? 그르렁그르렁, 야옹 이래 살지요.
고양이가 이렇게 사는 것과 인간이 평소에 하는 행동과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둘 다 신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신체로는 고양이와 똑같은데 자아가 생기면서 자기 신체를 건방지게 자아가 관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마치 건전한 사람처럼, 마치 괜찮은 사람처럼, 고양이와 차별되는 사람처럼 그렇게 위세를 떠는데 허위적인 의식을 떠는데 그것이 뭐냐? 그게 이미 죄의 속에서 발현되는 거예요.
자아에게 뭐가 나오느냐? 의식이 나와요. 자아에서 의식이 나오는데 신체는 뭘 주느냐? 신체는 의식이 나오는 게 아니고 뭐냐? 무의식이 나오는 거예요. 아무리 재벌이고 수 조원을 다루는 재벌회사라도 한 방에 전부 다 나쁜 사람한테 돈 빼앗기면 용두리에 와서, 용두리 모르지요. ‘아침에 나 탄수화물 안 먹어요, 칼국수 안 먹어요’ 하다가 갑자기 과수원에서 일하고 난 뒤에는 눈치도 없이 비빔밥 막 퍼먹는다고요.
이게 고양이야, 개야 구분도 안 돼요. 인간의 본모습은 신체지 자아가 아닙니다. 자아는 지가 재벌 행세하면서 이 죄악 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아가 그렇게 형성된 거예요. <눈물의 여왕> 보세요. 강남강의에선 그걸 여왕의 눈물이라 했는데 사실은 눈물의 여왕, 거기 보면 다 나옵니다. 의식을 갖고 있지만 이거는 허위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죄 짓고 난 뒤에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 너는 죄를 지으면 안 돼요. 죄와 일치되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는 그 다룸 속에 포함이 될 때 비로소 죄에서 의가 되는 과정 속에서 자기 백성을 솎아내듯이 구원을 받아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시편 51편에서 진짜 성경 가운데 어려운 대목 중에 하나인데요. 4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스톱, 거기까지.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거예요.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이 말은 사람 같은 사람이 없단 말이죠. 인간 같은 인간이 없고. 너 나한테 죄 지었잖아, 라고 반항할 자격 있는 존재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게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나옵니다. Stop regarding man, whose breath [of life] is in his nostrils; For why should he be esteemed?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람에게 어떤 해를 가해도 그건 죄로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갑자기 막 기쁜 소식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전세사기를 백날 쳐도 그건 죄가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왜 인간을 상대하기 때문에. 나는 사기 당했어, 라는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고양이인데, 개인데, 무당벌레인데.
여기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수에 칠 가치가 없다. 가치가 없는 거예요. 가치를 담은 것을 의미라 하는 겁니다. 가치가 없으면 뭐가 되겠어요?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의미 없어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흙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냥 흙이지요. 의미라 하는 것은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그 관계, 거기에 작용하는 것, 작동하는 게 의미가 있지 흙 자체는 어떤 의미가 없어요.
지금 이것만 이야기해도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 살면서 그동안 안 속으려고 하니까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똑똑한 척하려 하다가 계속 마귀에 농락당하는 겁니다. 의미가 있고 나는 가치가 있고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모든 것을 본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사야 2장 22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겁니다.
기쁜 소식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벌써. 뭐 복음은 십자가가 기쁜 소식, 아니 그 이전부터 뭐냐 하면 내가 있으나마나한 고양이나 개, 돼지와 동일시될 때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개, 돼지한테 전세사기 같은 게 성립 안 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해석, 느부갓네살 이야기했잖아요. 느부갓네살이 어디에 시달렸다 했습니까? 자기 자신한테 시달렸어요, 자기 꿈한테 시달렸어요? 꿈에게 시달린 거예요. 자기는 왕이거든요. 자기가 권력으로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인간세계에서. 그런데 자기가 사람에게 시달리는 법은 없어요. 왜? 제국의 통치자니까. 그런데 자기 내면에 시달리는 겁니다. 꿈속에서. 꿈이 자기를 미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괜히 죄 없는 부하들 닦달내고 죽여 버린다 하고.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의식적으론 왕이지만 무의식에선 무의식의 졸개란 뜻이에요. 종이 돼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무의식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포착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하여 자아가 생겨서 자아가 의식세계로서 그걸 지켜내기 때문에 자기가 무의식에 대해서는 없다고 여깁니다. 없다고 여기는데 밤에 의식이 잠시 느슨해질 때 무의식이 와버리니까 식은땀이 나면서 이게 생시야, 꿈이야? ‘목사님, 해몽 좀 해주세요. 꿈이 뭡니까?’
꿈을 해몽한다는 것은 자아에서 신체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해몽이란 자아에서 자아로 돌아가는 다시 무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내가 잘나가던 의식세계를 유지시켜달라는 요청이, 꿈의 해몽이 뭡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꿈이라는 것은, 내가 나의 신체를 마저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방귀 뀌는 것, 이런 것 내 마음대로 못하잖아요. 뭔가 신체적으로 문제 있어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이걸 못하잖아요. 못하고 난 뒤에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자아 때문에.
부끄럽다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웠어요. 드디어 무의식세계에서 뭐로 돌아옵니까? 의식세계로 돌아온 거예요. 그게 성경에서는 뭐냐? 그들이 눈이 밝아졌다 하는 거예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보시면 될 문제를 자기가 기어이 자기를 평가하겠데. 자기가 자기를 보니까 부끄럽다는 거예요.
부끄럽다는 것은 처음의 창조와 지금의 내 모습과 이미 간격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벌어졌기 때문에 원래 나로 돌아갈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돌아가는 데서 오는 그 부끄러움, 다른 말로 하면 아토피, 가려움증. 신적인 가려움증. 어떻게 해도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발언을 해도 내부의 결핍을 느끼면서 오는 수치감, 부끄러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나름 의식적으로 자아가 대체하는 방법은 뭐냐? 창세기 3장에 옷을 입는 거죠.
그 옷이 무슨 체제냐? 방어체제. 내 안에 뭐가 있다? 내가 보기에도 창피스러운 것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나만 알고 타인에게는 안 들키란다, 라는 방어체제. 이 방어체제가 로마서 10장에 보면 ‘자기 의’라는 거예요.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 날카로운 이야기를 하죠.
내가 오기 전까지는 전부 다 괜찮은 옷 입고 멀쩡한 인간인 것처럼 행세했지? 예수님이 와서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그들의 무엇을 건드린 거예요? 방어체제가 뚫린 거죠. 뚫리니까 방어체제를 마련하고 부끄러움 이 자체가 이미 인간은 죄, 다시 말해서 악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악마가 하는 일은 하늘의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거예요. 패배했다는 그것 때문에.
악마는 자기가 패배자라는 트라우마, 그러한 수치스러움이 있어서 그걸 감추기 위해서 누굴 죽이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지요.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넘깁니까? 왜 팔아먹습니까?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이 들킨 데에 대한 전쟁이죠, 보응이고, 싸움이고, 투쟁이죠. 그래서 인간은 방어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방어체제가 전쟁용어잖아요.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전쟁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방패시오, 이게 뭐냐? 이게 무슨 용어에요, 전부 다? 전쟁용어에요.
이스라엘 나라 만드는 것이 뭘 지키고 공격하느냐 하면 바로 어린양의 취지를 방어하고 지키고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공격적입니까, 방어적입니까?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이 공격했잖아요. 이스라엘은 공격적이에요, 방어적이에요? 공격적이죠.
악마는 공격적입니까, 수비적입니까? 수비적이죠. 왜? 인간세계를 이미 장악했으니까. 쳐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근데 기생 라합 보세요. 믿음을 보세요. 기생 라합이 방어적인 것이 너무나 인간으로 당연한데 어느 편에 서버렸느냐 하면 나를 공격하는 이스라엘 편으로 이미 망명을 시도해버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나를 공격해주옵소서. 이게 기생 라합의 믿음입니다. ‘저를 짓밟아주옵소서. 저를 파괴시켜주옵소서.’ 내 힘으로 내가 파괴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파괴됩니다. 이 자아가 이 죄악 된 세계에서 형성된 자아는 마귀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내 힘으로 파괴되지 않아요. 가룟 유다가 아무리 자살해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파괴하는 방법은 언약밖에 없어요. 언약만으로 파괴됩니다.
그래서 현재 시편 51편은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에요. 느부갓네살 바벨론 왕이 아니고 이스라엘 왕이거든요. 이스라엘 왕이 진짜 이스라엘이란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시작점을 왕부터 이스라엘 왕 되는 다윗부터 시작한 겁니다. 시편 51편 18절에 보면,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공동체지요.
이스라엘의 왕의 사적인 개별적인 변화가 공동체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전체 변화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다윗은 왕이거든요. 왕이란 기름 부은 자지요. 메시아잖아요, 그 당시에. 예수님 한분에 일어났던 변화가 그걸 백성들로 같이 하나님의 의로운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그런 뜻이잖아요. 그중에 뭔가 과정이 빠졌지요. 어떻게 한 사람이 알던 정보가 다수에서 어떤 식으로 전달되느냐? 그 과정은 제가 말한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훌륭하다. 그래서 백성들이 훌륭하다.’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예수님 참 대단한 분이다. 그래서 천국 백성도 대단하다.’ 중간에 뭐가 있어서 대단한데? 몰라. 이러면 곤란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다윗언약이라는 거예요. 다윗 관계,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성이 다윗과 백성의 관계성으로 이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성이 오늘날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신약이잖아요. 신약인데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은 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언약을 주었던 그 구약세대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과정이 알려집니다. 그 과정이 알려지려면 언약을 받았던 다윗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돼요.
다윗은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중첩, 요즘 자주 쓰는 중첩. 다윗은 죄인과 의인의 두 요소를 다 갖고 있어요. 어제 낮 설교에 아브라함이 그렇잖아요. 아브라함은 복과 저주를 두 개, 서로 이질적인데 서로 같이 할 수 없는데 두 개를 다 포함한 인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아담은 어떻게 됩니까? 아담에겐 두 개 다 주어졌어요, 안 주어졌어요? 주어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추방되었으니까. 아담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두 개를 포함하지 못해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추방되고 뭐는 보호돼요? 생명나무를 따로 떨어져있어요. 그냥 아담은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서 언약이 주어져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중첩된 현상이 언약을 받은 인물 속에 그게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죄와 일치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죄와 일치하는 데 성공했을까요, 실패했을까요?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죄는 지었지만 죄와 일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여기 51편 8절,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언약계통을 따라서 언약경로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는데 그 죄를 짓는 가운데서 다윗은 나는 이스라엘 왕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니까 백성 되게 할 거라고 여겼는데 거기에 하나님과 다윗 말고 제3의 요소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게 뭐냐? 주께서 꺾으신 뼈가 또 들어가는 거예요. 나 말고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있다, 없다? 없어요. 제3의 요소가 내 인생에 그냥 허락 없이 끼어들어야 돼요. 근데 그 제3의 요소가 모습이 어떠냐? 꺾으신, 그다음에 뭐라 돼 있어요? 뼈지요, 뼈. 꺾으신 뼈. 그러니까 고양이나 개, 돼지보다 더 근원적인 토대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래서 죽음에 세 가지 죽음이 등장했어요. 하나는 보편적 죽음, 또 하나는 개별적 죽음, 또 하나는 특이한 죽음. 개별적 죽음은 여러분 아시죠. 개인적으로 죽는 것, 나이 들어 죽는 것. 보편적 죽음은 모든 사람이 죽으니까 나도 죽는다는 거예요. 첫 번째, 모든 사람은 죽는다. 두 번째,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것, 인간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진리, 인간의 참된 지혜를 계속하려면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계속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리 같은 것, 그것부터 출발해서 이 세상을 해석하고, 아까 해석 나왔지요. 해석하고 해명해보고자 시작한 것이 철학이거든요. 옛날엔 철학이 과학 속에 포함돼 있어요. 철학이고 철학에서 나온 것이 과학이고, 과학이 모든 철학까지도 도로 덮쳐버렸어요. 과학 아닌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과학 아니면 미신이 돼요.
그런데 시편 51편과 관련하면 진리는 인간이 생각하면 나온다고 본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죽는다. 대부분 사람은 죽잖아요. 그런데 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죽으니까 나도 당연히 따라서 같이 그들의 가는 길을 가는 것, 이게 인간사회에선 뭐로 봅니까? 상식이고 당연한 것이고 진리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시편 51편에선 뭐냐 하면 그 진리가 막힐 때가 진리라는 거예요. 거짓된 진리거든요. 거짓된 진리에 막힐 때에 진짜 진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보편적 죽음과 개별적 죽음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어쨌든 보편적 죽음도 죽음이 아니고 개별적 죽음도 죽음이 아니고 이 둘에 의해서 이게 진리라고 우기는 그 진리성에 막혀있고 충돌될 때 충돌에서 나오는 죽음이 뭐냐? 특이한 죽음, 이게 죽음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인간은 죽어도 죽음이 아닙니다. 개별적 죽음이고, 모든 사람이 죽는 죽음이지 특별한 죽음은, 진짜 죽음의 의미다운 죽음은, 가치 있는 죽음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죽음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다윗에게 꺾으신 뼈가 자기 인생에 들어옵니다. 꺾으신 뼈, 죽음이 삽입돼 들어온, 다윗 인생에.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다윗이 부하직원의 아내를 건드렸습니다. 그때 그 남편 된 부하직원을 죽일 마음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그 남편이 충신이고 휴가까지 보내줬지만 그 우리야 장군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내가 전쟁을 하더라도 진짜 전쟁은 언약궤에서 이뤄진다고 믿는 믿음이에요. 이스라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자아들의 전쟁이 아니라 보편적 전쟁이 아니라 특이한 전쟁으로 보는 겁니다. 따라서 언약궤 휴가 안 받았는데 내가 왜 휴가를 가, 이게 우리야 장군의 특징이었어요.
이렇게 특이한 믿음 속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다윗의 죄가 끼어들었지요. “글쎄 내가 강제로 휴가 보내면 아내와 같이 있으란 말이야.” “싫어요.” “아니 아내와 같이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하룻밤 보내라고?” “안 보내요.” 하고 지는 친구들과 술 먹고 그날 밤 그냥 보냈거든요. 그게 우리야 장군이 죽게 된 이유에요. 다윗의 알리바이가 성립이 안 돼버린 거예요. 자기 아내와 하룻밤 안 보내서.
다윗이 자기 방어기제를 통해서 자기 죄를 덮으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덮기는커녕 더욱 더 관련된 인사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왕이 죽어야 돼요, 신하가 죽어야 돼요? 나라가 되려면? 아무리 충신이지만 신하가 죽어야 돼요. 내 가는 길에 방해되면 그건 벌레 같아서 차로 밟고 더 죽여 버려야 돼. 왜 감히 내 앞길을 막아? 네가 뭔데 자아를 막아?
그런데 자아는 존재하지 않아요. 고양이 같은 신체만 있지 자아는 없는 거거든요. 그럼 자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자아는, 우리가 태어날 때 있었던 이미 보편적 사회에서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사회 안에서 출생한다고요. 그 사회는 자아들의 군집이에요. 교육과 모든 언어와 지식과 지혜로 가득 차있는 사회에요.
그 사회는 고양이 사회, 개 사회 아닙니다. 원숭이 사회 아니에요. 그거는 인간들의 사회에요. 인간들이니까 여기 아까 시편 2편 22절에 보니까 인간들은 수에 칠 가치가 없잖아요.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것들이 수에 칠 가치가 있다고 만든 게 인간사회잖아요. 그럼 그 인간사회 배후에 누가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가 작동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 대신 따로 우리나라 만들자는 거예요.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하나님 나라 말고 우리 인간들의 나라, 인간들의 가치 있는 나라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미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관심사는 죄를 구체화시키는 거예요. 아벨이 죽었잖아요. 아벨이 죽고 난 뒤에 가인을 죽입니까, 안 죽입니까? 안 죽여요. 살려주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그다음에 뭡니까? 죽으리라, 했잖아요. 안 죽었어요. 왜? 가인이 태어나야 되니까.
그리고 마귀가 자기 얼굴을 정체를 드러내야 되니까. 아직 십자가 사건 터지지 않았으니까. 죽는 날, 언제 죽어요? 십자가 사건 때 예수님이 죽을 때 죽는 날이 돼요. 왜? 그게 유일한 진리다운 죽음이고, 유일한 죽음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죽음 근처도 안 가는 거고.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근처도 아니에요.
우리야 장군 이야기해봅시다. 우리야 장군이 그렇게 할 때 다윗이 간음죄에다 플러스 살인죄까지 슬슬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정신 좀 바짝 차려요. 지금부터 어려워요. 다윗은 존재를 통해서 뭐가 나왔느냐? 간음죄 나왔고 살인죄 나왔지요. 그러면 다윗은 간음죄 처리하는 방법이 간음 안 한 걸로 처리하는 방법이 살인죄로 간음죄를 덮는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나단 선지자라고 칩시다. 이런 다윗의 죄를 안다면 여러분들이 다윗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습니까? 줄거리를 만들어보세요. 일반적인 선지자 같으면, ‘너 간음했지, 살인했지. 똑바로 안 해? 회개하면 하나님이 살려줄 거야’ 이렇게 하겠지요. 오늘날 목사들처럼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니까 목사들이 거짓 선지자에요. 지금 나단 선지자 입장에서 다윗을 옛날처럼 회개시켜서 다시 괜찮은 인간, 간음죄 짓기 전의 인간, 살인죄 짓기 전의 인간으로 돌이킨다면 나단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에요.
나단 선지자는 간음 안 했고 살인 안 했어요.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도덕적으로 약한 자에게 충고를 해서 ‘니 나처럼 되란 말이야’ 이렇게 한다면 이거는 백 퍼센트 나단 선지자는 무슨 선지자냐? 가짜 거짓 선지자에요. 하나님이 안 보냈어요. 그냥 인간세계의 고상함과 자기 의, 수치를 막는 괜찮은 의를 풍족한 누적된 의가 사소한 죄를 눈 감고 봐주는 식으로 유지되고 그렇게 견지되는 그렇게 흘러가는 그런 죄악 된 세계가 되겠지요.
나단 선지자가 충고하는 대목이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양 이야기해요. 양 한 마리 이야기한다고요. 그럴 때 다윗의 간음죄, 살인죄 일체 언급을 안 합니다. 당신이 왕이라면 당신 나라에 이스라엘 나라에 손님이 왔는데 자기 양을 잡아야 되는데 사랑하는 양 한 마리밖에 없는 종의 양을 잡은 사람을 왕이라면 어떻게 재판하겠습니까, 하니까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에 그런 나쁜 놈이 있어? 보자, 율법을 볼까? 율법 쭉 보더니만 ‘이거는 네 배나 갚아야 되겠네.’
그럼 어떻게 돼요? 지금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든 것이 사람을 잃은 거예요, 양을 잃은 거예요?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버린 거예요. 사람은 그냥 있고 양 하나 없어진 거죠. 나단 선지자는 사람을 뭐로 전환, 대체시켰느냐 하면 양으로 대체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을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양과 사람은 관련성을 갖고 있어요. 어떤 관련성? 사랑의 관련성, 친밀한 관련성. 하나밖에 없는 양 없으면 본인도 살 의욕이 없어지는. 양이 곧 나요, 양이 곧 나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고양이라 했습니다. 고양이인데 인간이 갑자기 자아를 형성하는 거예요. 자아를 형성할 때 문제가 뭐냐? 자아와 동일시되는 양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아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율법이 뭐냐? 인간은 아무리 해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왜? 율법이 되려면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그냥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수준이 돼야 그다음부터 율법과 우리가 일치가 되는 겁니다. 율법의 취지와. 그런데 내가 율법을 지킬만한 위치에 있다는 인간으로 자부한다면 이거는 아무리 율법을 달달 외우고 지킨다 해도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됐기 때문에 율법과 일치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양을 잃어버렸어요. 그 기분이 어떻겠어요, 라고 다윗에게 묻는 겁니다. 율법적으로 네 배나 갚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네 배 갚으면 잃어버린 그 상실감이 회복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다윗 입에서 나온 게 뭐냐? 그 사람 죽여 버려라, 했어요. 출생이 뭐라 했습니까? 신체의 출생이 사건이죠. 신체 자체가 사건이니까. 출생이 사건이라면 그 출생된 몸이 죽는 이 죽음도 뭐가 돼야 돼요? 사건이 되어야 제대로 된 죽음이 되는 거예요. 사건화 되어야.
그러면 사건화 되려면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인간이 율법과 일치되어야 이것이 죄를 알고 되는데, 인간이 율법과 일치될 수가 없어요. 중간에 뭐가 끼어들어서? 엉뚱한 자아가 끼어든 거예요. 자아라는 것은 나는 모든 가치가 나한테 최종적 궁극적으로 나의 가치로 되돌려오는 그 있다는 게 자아거든요.
나는 수에 칠 가치가 있다, 나는 원, 투, 쓰리에서 원이야. 너는 투, 너는 쓰리. 수에 칠 수에 해당될 때 제일 먼저 나부터 헤아리는 것, 그걸 정신분석학에선 ‘주인기표’ master signifier 라 해요. 누가 뭐래도 내가 주인이다. 나는 남한테 주인이다가 아니라 주인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이 말을 누가 하느냐? 대외적으로 해요. 제가 강의 어렵다 했지요.
이게 어려워요. 대외적으로 남이 있을 때 갑자기 주인 행세하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주인인가? 개인적으론 알아요. 내가 수치스러운 것이 내 주인이다. 나의 부끄러움이 진정한 실제적인 나의 주인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남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남들 앞에 행동할 때는 마치 독자적인 가치가 있는 그러한 존엄성, 인간적인 존엄성이라고 그걸 남한테 내세웁니다.
그 존엄성, 용두리 내려가면 다 깨지고요. 재벌이 촌집으로 쫓겨나면 다 터지고 전쟁 일어나면 그 존엄성 찾을 길이 없습니다. 가자 지역의 주민들, 하마스에게 표 던졌던 하마스 네가 우리나라 통치해라 투표했던 투표권자 가자 지역 주민들, UN한테 구호품 받을 때 존엄성 있습니까? 없지요. 뭐 거지라는 것도 존엄성을 많이 준 거예요. 그냥 개, 돼지입니다. 그냥 개에요. 인간의 본능 다 나옵니다. 또 당연해야 되고요. 그렇게 해야 되고.
전쟁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본래 자아가 빠진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전쟁이 그것 한 거예요. 미디안 군사들, 아말렉 군사들 어떻게 했습니까? 다 죽여 버려라. 애는요? 갓난애도 죽여 버려라. 왜 갓난애를 죽일까요? 그게 인문학이나 철학에서 윤리도덕에서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갓난애도 죽여야 될 이유가 시편 51편 5절에 나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난 지 일주일이 됐던 한 시간 됐던 그건 뭐냐 하면 죄가 대롱으로 훅 분 게 갓난아이에요. 죄란 게 마귀에요. 죄가 이 세상에 상주하고 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또 하나의 죄의 가현체, 죄의 구체적인 인간처럼 생긴 것을 훅 불어서 출생하면 그게 죄의 열매, 죄의 덩어리, 죄가 부풀어진 것, 이걸 가지고 갓난아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 인간의 세계에서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하지요? 10분 쉽시다.
20240408b 부산강의 : [시편]67(51:4)-율법과의 불일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죄를 짓는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에요. 죄를 지어보면서 진짜 죄와 내 지은 죄와 불일치, 불합치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죄 속에 있는 나와 그리고 진짜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분 사이에 지금 내 인생에 제3의 요소, 꺾어진 뼈가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죄와 죽음과 의와 천국, 모든 성신, 성령, 율법 개념, 어떤 개념이라도 인간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멍청한 거죠.
그 점에 대해서 약간 더 설명을 가미한다면 인간의 자아가 아까 했지만 상세하게 하면, 자아가 뭘 만드느냐? 의식세계를 만들어요. 의식세계는 진짜 세계를 억압을 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무의식을 억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허투루 티내는 것, 멋있어 보이는 것, 그 의식세계의 순환구조 안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다가 세월 다 보냄. 그 의식세계의 순환구조에요, 흐름을 따라가는 거예요. 유행 따라 남들 가는 식으로 세월 다 보내는 거예요. 의식세계에서 ~인 체하는 그렇고 그런 세계.
이 의식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바로 의미 세계거든요. 의미가 있다. 진짜는 억압, 꽉 눌러놓고 가짜들의 세계, 망상 세계.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선 이걸 망상이라 하지 않고, 상징이라 하죠. 가짜, 허위다 말이죠. 태극기가 우리나라 아니잖아요. 그러나 태극기는 무엇을 상징한다? 우리나라를 상징하잖아요. 고 상징.
원래 신체가 진짠데 자아는 신체에서 연관돼 있는 상징물로서 자아란 나. 나는 신체가 아닌데 신체를 대신해서 나라고 신체가 내 거라고 우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너, 왜 나 기분 나쁘게 해?’ 이 전부 다 가짜와 가짜의 대화에요. 만남이고 거기서 해석들이 오고가는 겁니다. ‘너, 나한테 섭섭하게 하면 안 되지’ 이런 거요.
나단 선지자 같은 경우에 ‘앞으로 그런 짓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똑바로 살아’ 이걸 나단 선지자가 하는 게 아니고, 나단 선지자는 진짜 선지자기 때문에 율법이 뭐냐?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불일치하고 있느냐, 율법의 근처도 안 가고 있다는 것을 까발리는 간격과 차이를 드러내는 일을 선지자가 하고 있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하는 애지중지 아끼고 있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3절에,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일치성을 가져요, 일치성.
주인과 양은 일치성을 갖는데 다윗 너는 율법과 일치성을 갖고 있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너는 지금 율법 따로, 너의 욕망 따로 벌어져있다는 겁니다. 그게 다윗이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라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로 율법의 취지를 모르고 율법과 벌어진 상태에서 이 자아와 의식세계에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죄악 된 세계에서. 그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게 진짜 선지자는 나단 선지자요.
그러면 나단 선지자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다윗이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면 성신을 언급해요. 그렇게 되면 율법에서 다윗과 일치가 된다, 안 된다? 안 돼지요. 다윗의 조치는 죽여 버려라. 그러면 다윗은 내 나라에 그런 못된 인간이 있어? 죽여 버려라. 그러면 그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죽는 죽음이어야 되죠.
율법에 네 배나 갚는 것은 네 배 갚으면 그만이에요. 어떤 부자가 자기는 양이 많은데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잡았다. 그럼 율법대로 네 배나 갚아주면 되지 뭐. 고급차, 외제 스포츠카 타고 막 달리다 걸리면 어떻게 해요? ‘벌금 내면 되잖아.’ 그거는 인간관계에서 아까 보편적과 개별성은 서로 소통이 돼요. 전체 안에 개인이 있고, 개개인이 모여서 보편적이라는 상위집단, 상위개념을 형성했기 때문에 둘 다 호환이 돼요. 주고받는 게 돼요.
그러나 특이성은 그야말로 특이해서 이 안의 호환성에서 특이성이 안 나옵니다. 따로 있어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문장을 쓸 테니까 이 문장에서 뭐가 특이성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목사와 중이 내기 골프를 해요. 진 사람이 개종하기. 이 중에서 특이성이 어디서 나옵니까? 어디에 매여 있는지 보란 말이죠. 내기 골프지요. 둘 다 내기 골프에 미쳐있는 거예요. 내기 골프가 얼마나 최우선적이냐 하면 그까짓 것 종교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바둑 내기, 화투치는 것, 전부 다 내기에 있지요. 내기하는 것은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내기를 왜 해요? 그냥 골프 치면 되지 내기를 왜 합니까? 자기가 수에 칠 가치가 없기에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골프는 잘 치잖아. 바둑은 잘 두잖아. 주식은 잘 하잖아. 비트코인은 잘 하잖아.’
어떤 내 행위를 통해서 수치스러운 내 존재가 아닌 그다음 뭐가 된다? 자아, 나. 나에 매여 있는 거예요. ‘내가 비록 돈은 없지만 자식 하난 잘 키웠잖아. 내가 비록 비리비리하고 몸은 아파도 우리 아들 서울대학 갔다.’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내가 이혼녀지만 자식 하나 이번에 카이스트 들어갔다.’ 그 이야기 왜 하는 거예요. 세상을 뭐로 보는 거예요. 내기하는 세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보편성과 개별성, 다시 말해서 인간 속에 끼어있는 상징적 세계, 이 세계에서 누구만이 특이하다? 제발 나만이 가치를 초월할 대단한 가치 있는 자로 좀 나를 알아 달라. 그것을 흔히 쓰는 말로 이렇게 해요. 위로. 이게 위로에요. <우정의 무대>에서 저 뒤에 계신 어머니의 아들인 사람 뛰어나오라 하면, 엄마는 하난데 아들이 열댓 명 뛰어나오는 거예요. ‘저 뒤에 계신 분이 우리 엄마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엄마, 나 여기 있어.’
이 세상이 무대라면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은 그런 보편성에 묻히지 않고 내가 나로 그 가운데서도 기어이 버티고 살아남은 이 개별성의 끈질김, 내 존재의 끈질김을 드러내는 식으로 인간은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행동합니다.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내가 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특이성 얼마나 숨어있냐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은 뭘 알았습니까? 내가 일치되지 않는다. 무엇과? 율법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일치 안 되는데도 주께서는 일치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뭐로? 내가 ‘간음+살인=꺾어진 뼈’에요. 뼈가 나왔다는 이 말은 다윗은 완전히 나에 의한 해석, 나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의 일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게 시편 51편의 핵심입니다. 나의 일은 하나님의 일에 보조적이라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태어났다’ 이건 거짓말이에요. 이거는 태어났는데 마귀가 나한테 그렇게 현혹한 거고, 내가 태어난 것은 죄를 짓기 위함이 아니라 죄가 되기 위해서, 내가 죄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죄를 짓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죄가 되기 위해서. 이게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와 결국은 연결되는 연결 관계에요.
다윗이니까 다윗에게는 뭐가 돼요? 자아의 일이죠. 그래서 다윗이 나는 아니고 하나님 일이라고 다윗이 말을 못해요. 다윗이 말을 못하니까 다윗이 결과가 되려면 간음하고 살인해서 꺾어진 뼈라 했잖아요. 이 공식(간음+살인=꺾어진 뼈)이 무슨 일이 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이 공식 속에 자기가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 들어가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51편 17절, 다 같이 읽어볼까요? “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아하 참 감격스럽지요. 16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율법과 일치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내가 죄 지으면 안 돼요. 내가 죄와 하나가 돼야 돼요. 그래야 이 방정식이 무슨 방정식입니까? 나의 일의 방정식이 아니고, 누구 일? 하나님 일의 방정식이에요. 주님께서 살인케 하셨고, 주님께서 간음케 하셨고, 주께서 스스로 뭐가 됐다? 꺾어진 뼈가 되는 이 방정식에 다윗은 끼어들 수가 없어요.
끼어들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누굴 보내느냐 하면, 하나님이 뭐 이쁘다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느냐 말이죠. 이 뼈, 자아 없는 상태, 자아 이전의 상태, 자아의 근원적인 진짜 토대, 그냥 꺾어져도 아무 소리 못하는 상태, 되어진 모든 상황과 모든 변수들이 나로 하여금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누가 이것을 다윗에게 보여줬습니까?
말이 있어도 자기 죽음에 대해서 반항 못하고, 저항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는 그 세계를 누가 보여줬습니까? 우리야 장군이죠. 우리야 장군은 충실했어요. 우리야 장군이 전쟁에 나갈 때에 요압이 일부러 우리야 장군을 쪼다 만들어놓고 ‘빠져, 빠져’ 작전상 후퇴해놓고, ‘우리야 장군에게만 이야기하지 마’ 자기들은 다 빠지고 우리야 장군만 덜렁 있으니까 성에서 쏘는, 사무엘하 11장 암몬 자손들이 이건 뭐 표적이 있네. 양궁에서 10점 만점 표적 같은. 막 쏘는 거예요. 쏘니까 화살이 집중하지요. 그러니까 죽은 거예요.
고의가 아닌 척하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했을 때에 우리야 장군 입장에서는 내가 왜 죽어야 되는지, 왜 다윗이 내게 휴가를 보냈는지 온통 우리야 장군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전쟁에 이스라엘은 할례 없는 민족을 할례 있는 우리가 이겨야 된다는 그 생각이 인간들 보기에는 쪼다 같고 바보 같은 생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형적인 모델, 샘플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요령이 있어야지’ 이게 인간세계잖아요. 그런데 우리야 장군은. ‘내가 다윗에 맞아죽어야지. 다윗에게 내 아내 빼앗겨야지’ 그런 생각이 없어요. 나에게 이런 상황이 주어질 때까지 그 변수는 그걸 아는 게 자기 소관 아니에요. 자기는 그냥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만이에요. 누가 사용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우리야 장군을 집어넣은 거예요. 사용한 거예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죽은 거예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내를 빼앗긴 거예요.
자기 생각 이전에 아내 빼앗겼고, 그 사태의 연속적인 여파가 자기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적들이 나를 죽였다, 적의 화살이 나를 죽였다? 아니요. 다윗이 죽인 겁니다. 다윗이 죽였다? 아니요. 누가 죽인 겁니까? 하나님이 죽인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언어 이전에 세계, 다시 말해서 우리야 장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한 이유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야는 없는 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똑같아요. 없는 데서 태어나고 죽은 데서 잠시 사는 거니까. 없는 데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야는 없음과 자기 죽음을 통해서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죽은 것이 아니고 진짜 인간세계에 없는 분, 진짜 인간세계의 특이한 죽음, 이 둘을 합치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걸 합쳐버리면 로마서 4장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야의 만두 속이 되고 우리야는 뭐냐? 만두 피가 되는 겁니다. 이걸 기념해서 다음에 만두 만들어볼까요? 속을 적당하게? 아니요. 꽉꽉 피가 터져버릴 정도로 속을 집어넣어야.
이 꺾어진 우리야와 관련된 것을 여기 우슬초라 돼 있지요. 시편 51편 7절. 우슬초에 대해서 우슬초가 전체 율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지금부터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슬초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출애굽기 12장 22절에 나옵니다. 유월절이에요. 유월절 날 유월절 양으로 잡고, 아까 공부한 것도 다시 기억되지요.
유월절 양 할 때 사람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니까 천사들이 그냥 통과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상당히 고맙다고 여기지요. 고마우면 안 돼요. 고맙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아가 있다는 거예요. 그 양에 본인이 합치돼야 돼요. 양 덕분에 살면 안 돼요. 그건 종교입니다. 그건 지식이에요. 내가 그 양 속에 들어가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양 속에.
그래서 22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우슬초의 기능이 역할이 뭐냐? 피를 적셔서 페인트칠하는 역할이에요. 페인트칠하면 피막이죠. 이 인간세계, 인간들의 사회, 인간들의 공동체, 또는 보편적 의미의 세계에 피막을 형성하는 거예요. 표면을 형성하는 겁니다. 여기에 우슬초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럼 우슬초의 존재는 율법 안에 있는 거예요, 인간세계 안에 있는 겁니까? 어느 쪽에 있어요? 율법 안에 있는 우슬초죠. 율법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니까. 피만 내선 안 되고 피를 바를 때 손가락으로 바르면 안 되고, 우슬초까지 동원해서 피를 발라야 된다. 피를 바르니까 그 죽음이 찾아오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죽음을 실행에 옮겨야 될 천사들이 그 피막 때문에 그걸 그냥 넘어간 거예요.
그 말은 율법이 완성이 돼 버리면 의가 되고, 의가 있는 곳에는 축복이 있어요. 저주하면 저주 건더기가 있어야 되는데 저주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이 완성할 경우에는 심판이나 저주가 있을 리가 없다니까요.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 공동체라고 제가 표현한 이유는 여기서 출생하기 때문에 그래요. 공동체가 인간의 언어로 소통되는 그 관계성을 이야기하거든요. 인간이 여기서 태어났다 하면 그 들려오는 신체는 갖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왕왕거리는 언어들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잡소리가 많아요. 잡음이 많아요. 야옹야옹 하는 다른 잡소리가 많아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욥이 말이 많아. 1장부터 42장까지 욥이 그렇게 말이 많아요. 잡소리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말한 내용은 뭐냐 하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 신체가 왜 아픕니까? 자아가 말로서 자기 신체를 지켜보려고 방어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까 했지요. 하나님은 수비적이다, 공격적이다? 공격적입니다. 하나님은 공격적인데 뭘 앞장세워서? 율법을 앞장세우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한 것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율법 내놓아봐라. 율법과 네가 합치되어서 완성했다는 것을 내놔봐라. 인간은 못 내놓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양을 대신 잡아서 피를 내게 되면 이게 율법의 완성으로 해서 죽음의 천사가, ‘이 집은 끝났다, 가자. 이 집은 아니래, 가자.’ 그걸 passover 그냥 패스하는 거예요. 건너뛰는 것,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냥 안 보고 뛰는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 보지도 않아요. 네 똑바로 안 해, 멱살 쥐고 이것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에 있기 때문에 죄에 예속돼 있기 때문에 우두머리 되는 죄만 하나님과 문제 해결됐으면 네가 어디서 뭐하면 어떻게 살든지, 희미한 등불 아래 하다가 지금은 치매 걸려 있지만, 옥경이.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치매 걸렸는지 뭐하는지, 여러분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나를 문제 삼는 것은 나에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여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쳐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니까요.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게 뭐냐 하면 수요일에 하는 총선 투표. ‘저 어때요? 저 어떻습니까? 표 주세요.’ 왜 줘야 되는데? 네가 뭔데? 고양이학 고양이한테 투표하고. 그 세계 속에 인간은 태어났다니까요. 어릴 때 학생회장하려고, ‘제가 된다면 학급에 꽃꽂이를 해놓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떡볶이 파티를 열겠습니다.’ 이래서 애들부터 벌써 운동권 시켜서….
율법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자체적으로 자기는 이 정도하면 착하다는 반열에 속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일치성에 관심조차 없는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잘난 척하다가 율법까지 알았으니까 말씀 알았으니까 더 기고만장하겠지요. 여기 우슬초라 하는 것은 반드시 꺾어진 뼈와 연관되어야, 피 흘린 쪽이 연관되어야 우슬초도 같이 일치성으로 완성이 된다고요.
그다음에 아까 출애굽기 12장 22절 봤지요. 그다음에 레위기 14장 7절. 점점 율법이 추가가 돼요. 추가가 되면서 율법의 내용의 진보와 발전이 이뤄집니다. 어디까지 가겠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가도록 계속 흐름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자체적으로 흐름이 발생돼 있어요. 그 흐름에 뛰어들게 이끌림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고요. 율법이 십자가를 향하여 자체적으로 달려갈 때 거기에 걸려든 자들이 누구냐?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추가적인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참 힘들겠다,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남의 이야기하지 마세요. 성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혹시 행여나 구원될까 싶어서 가지요. 성도는 이미 다 이루었다, 구원된 상태에서 율법의 진척과정을 그대로 구원된 우리에게 적용시켜버려요. 그래야 왜 피를 흘려야 했지, 왜 내가 천국을 가게 됐지? 그 이유를 살아가면서 그걸 계속해서 발생시킵니다. 다윗처럼 중첩된 상태에서. 죄와 의, 완성된 죄, 완성된 의가 함께 하면서 죄와 의 사이에서 우리들이 끼어있는 거예요. 우리의 자아가.
레위기 14장 7절은 이런 이야기에요. 문둥병 환자 나옵니다. 문둥병 환자는 저주의 구체화, 저주의 가현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제일 기피하고 싶은 인물 문둥병. 문둥병의 특징은 인간의 신체성에서 인간다움이 무너지는 양상을 노골적으로 다 노출돼 있다는 특징이 있어요. 내부의 병이 아니고 외부로 드러난 질병이 문둥병입니다. ‘어딜 봐서 사람이야? 괴물이야 사람이야’ 이게 문둥병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신체는 저주를 못 이긴다. 저주의 궁극적인 모습은 문둥병을 통해서 너희들이 직접 경험해라, 해서 이스라엘에 문둥병이 발생하도록 했어요. 진짜 인간 모습은 문둥병이 진짜 네 모습이다. 그러면 문둥병이 최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냐? 모세입니다. 모세가 멀쩡한 손을 자기 품속에 들어갔다 나왔지요. 자기 내부에서 외부로 손을 이동시킵니다.
손이라 하는 것은 외부적 요소지만 일단은 네 내부로 들어갔다 나와 봐라. 네 품속으로. 품속은 외부에서 안 보이는 곳이고, 은밀한 곳이고, 자기 본질이 있는 곳이죠. 모세는 주님 시키는 대로 간단하게 넣었다 뺐는데 손이 허옇게 되었어요. 문둥병이 되었습니다. 현실입니다. 모세한테는 현실이에요. ‘이거는 가짜야. 이거는 그냥 시범 보이는 거야.’ 이게 아니에요. 진짜로 문둥병 된 거예요.
‘아아, 나 끝났구나.’ 드디어 모세의 자아로서는 끝난 거예요. 모세의 자아는 문둥병이 모세다. 나는 ~에서, 나는 문둥병이다,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인생 소풍하듯이 가야 되겠네. 귀천 갈까,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명령합니다. ‘다시 넣어봐라.’ 다시 넣어보니 멀쩡했어요.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모세 내부가 멀쩡합니까, 아니면 문둥병입니까? 문둥병이죠. 그게 바로 십자가로 구원받은 자의 자세가 이래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로 의인 되었다는 게 아니라 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는 관계에서 의고, 진짜 나는 여전히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 이걸 유지해줘야 이게 하나님의 일이 돼요.
아까 처음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다윗의 일이 뭐로 변한다? 하나님의 일로 드디어 드러나는 것이 시편 51편의 핵심이라 했지요. 다윗의 일은 하나님의 일의 일부가 된 거예요. 다윗은 기존의 이스라엘의 일부가 아니고 하나님이 생각한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모세니까 모세가 문둥병자니까 이스라엘은 다 모조리 문둥병자고, 그 문둥병자가 피 흘림으로 치료되면서 등장하는 도구가 뭐다? 우슬초에요.
우슬초가 어디에 등장하는가? 제사장이 진찰해보니까 다 나았어요. 다 나았을 때 이게 율법이 없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그래 내가 한 때는 참 더러운 인간이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깨끗케 되었어’ 이렇데 돼버리죠. 이거는 자아에 대한 자기 자랑이죠. 율법의 완성을 드러내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이거는 신체도 아니고 자아에요. 건방진 자아. 물론 한 때 다윗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내가 이스라엘 왕이다. 내가 없으면 전쟁이 안 돼.’
그런데 다윗이 자기가 간음죄와 살인죄 하게 된 것도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전쟁 때문에 그렇잖아요. 암몬과의 전쟁. 부하인 우리야 장군이 다윗이 성 안에서 어슬렁거릴 때 진정한 다윗의 기능을 다윗이 못하고 우리야 장군이 수행을 한 거예요. 요압은 한 패고 우리야 장군이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야 장군이 아주 다윗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적절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다윗을 교체할 수 있는 꺾어진 뼈로서 우리야 장군만한 자가 그 시대는 없었다. 그 시대의 예수님, 그 시대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야 장군이에요. 물론 우리야 장군이 예수님이란 뜻은 아니에요. 왜냐? 우리야 장군의 육적인 요소와 주님의 영적인 요소가 중첩돼 있으니까. 자기는 이유도 모르고 뜻도 모르고 죽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야 장군을 그 시대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사람으로 사용했을 뿐이에요.
레위기에 나오는 우슬초라 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은 항시 문둥병자 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들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왜? 역시 그들도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용하고 활용했을 뿐이에요. 오늘날 여러분 같은 성도는, 이 말을 함부로 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십자가 덕분에 나는 만두피인데 내 속에 십자가 들었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성령을 통해서 구원해주신 거예요.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오후 설교 때 기도할 때 이런 기도했어요. 복음이 안 나오면 사람이 아니라고. 내 아들 서울대학,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고. 내 아들 삼순데 또 떨어졌다. 그런데 복음 나오더라. 물론 그런 걸 자랑, 삼수한 걸 자랑 굳이 해야 되는지 약간 문제됩니다만 세 번 떨어졌는데 복음이 나오더라, 그걸 대외적으로 자랑할 엄마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대구강의에 의하면 엄마가 믿음 없는 거예요. 그 엄마에게 세 번 떨어진 자식을 줬느냐? 엄마 믿음 없는 걸 티내기 위해서 그 자식 준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산과 자식을 줬느냐?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지 티내기 위해서 재산과 여러 가지를 내 거다, 이런 식으로 주신 거예요. 그것도 감사하세요. 집에 다들 25억 있지요. 감사하세요. 부동산 한 십만 평 있잖아요. 빌딩 서너 채 있지요. 다 감사하세요. 내가 얼마나 죄인이면서도 죄와 일치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다음에 한 군데 더 본다면 민수기 19장 18절입니다. “정한 자가 우슬초를 취하여 그 물을 찍어서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아까 모조리 문둥병자라고 그렇게 했다 했지요. 여기 민수기 19장 18절은 한 수 더 나갑니다. 모든 인간들이 더러운 인간, 문둥병이든 멀쩡하든. ‘멀쩡해? 더러워. 문둥병보다 더 못한 저주받은 더러운 거야.’ 더러운 것을 만졌을 때는 여기 우슬초 동원됩니다. 흐르는 물과 함께 찍어라.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민수기 19장, 레위기 14장 이런 이야기가 그 토대가 뭐냐? 출애굽기 12장 22절 이야기에요. 유월절 이야기에서 파생된 거죠. 네가 양을 잡지 말고 네가 너를 잡아라. 너를 양이라 하고 잡아버려라. 양 자체가 중복돼 있으니까. 양 자체는 동물이잖아요. 동물이니까 육이죠. 흙에서 만든 육이죠. 양 자체가 중복돼 있어요. 하늘의 요소와 땅의 육적 요소가 중첩되듯이 너 이스라엘이냐, 너 성도야? 그럼 너도 중첩된 거예요. 나는 육신이고, 나는 영이고 중첩된 겁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어떻게 돼요? 육신만 있을 뿐이에요. 죄가 다스리는 육신. 물론 영적 요소도 있지만 그건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거룩한 영이 아니지요.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누굴 언급하느냐 하면 성신을 언급해요. 성신은 뭐냐? 신은 신인데 어떤 신? 성스러운 신, 거룩한 영이에요. 거룩한 영이 등장합니다.
다시 시편 51편 돌아가 봅시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8절) 8. Make me to hear joy and gladness, Let the bones which Thou hast broken rejoice. 8. 내게 기쁘고 즐거운 소리를 듣게 하소서. 주께서 부러뜨리신 뼈들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8.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7절에,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처바르는 거예요. 내게다가 우슬초로. 뭘 발라서? 피 발라서. 피로 페인트칠하는 겁니다. 007영화에 첫 번째 나온 영화가 <골드핑거>에요. 그 영화에서 여자에다 죽일 때 황금 페인트칠해서 세포 숨 막혀 죽이는 장면 있다고요. 주께선 골드핑거가 아니고 블러드(blood)핑거, 우슬초로 피를 발라버리는 거예요. 우리 육신의 피막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되게 만들어요.
우리는 피의 가현체, 불신자는 악마의 가현체. 그래서 우린 그걸 즐거워하는 거예요. 피라는 것은 예수님을 말하는 게 아니고 죽은 예수님이죠. 아기 예수가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에요. 고생하신 예수님이 아니고 고난 받는 예수님이에요. 고생하신 예수님은 남들에게 밉상 받은 예수님이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것은 고난의 예수님이에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거예요, 아들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독생자거든요. 사랑하는 독생자가 버림받은 것은 아버지가 자체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내버린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의 간격, 차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차이에서 주님이 나옵니다. 그러면 거기서 주님만 나올 뿐만 아니라 뭐냐? 성신도 성령도 나와요. 버렸으니까 다시 찾는 거죠. 이것은 새 창조. 새 창조가 언급돼 있습니다. 이 점을 설명해줘야 되겠어요.
아까 창조에 대해서 창조란 죄를 짓기 위해서 창조된 게 아니고 죄가 되기 위해서 창조했다. 그러면 이 창조 행위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창조되잖아요. 만물을 새롭게 하는 근거가 뭐냐?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새롭게 하는 자체적인 작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신이 새롭게 되는 그 여파가 세계 창조에요. 재편하는 거죠. 개편하는 것.
어제 주일 낮 설교에서 성도가 인간의 자리에서 어느 자리까지 올라간다 했습니까? 주의 자리까지 올라가죠. 왜 인간이 건방지게 주의 자리까지 올라가죠? 왜 올라가야 돼요? 그걸 시도한 존재가 있었어요. 누가? 사탄이. 그게 떨어졌으니까. 원래 천사는 결속력으로 움직여요. 여럿인데 하나 같이 움직여요.
그게 에스겔 1장에 보면 천사들의 그룹이, 그룹이란 이름의 그룹이 있어요. 이름 자체가 그룹인데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집단의 특징이 하나 같이 움직여요. 발에 바퀴가 있어요. 그처럼 천사의 반란이 있으면 안 돼요. 천사의 반란이 있었잖아요. 사탄이.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떻게 돼요? 재편돼야 되고 개편돼야 돼요.
다시 재편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주의 자리에 올려 보내서 이제부터는 천사들이 주님의 독생자를 섬기는 그런 천사 그룹으로 재편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 사탄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부분이 뭐냐? 인간이 범죄하게 됐잖아요. 범죄한 그 부분도 재편돼요. 범죄하지 않고 의롭게 되는 사람들을 그 천사가 섬기는 주의 자리에다 합류시켜버려요.
합류시킬 때 그 성도의 특징은 뭐냐? 천사들이 하나 같이 결속돼 있잖아요. 그 결속성을 보여줘야 돼요. 새로운 성도들의 집합은. 성도는 전체지만 뭐 같이 움직인다? 하나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 같이 움직이려면 나라는 개성은 날아가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가면 가고 오면 오나이다, 하는 천사들이 지시와 동일한 지시로 움직이는 그 세계가 재편된 하늘나라입니다.
그게 시편 51편에서는 이렇게 예언돼 있지요. 18절에 보면,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주민들이 있더라도 예루살렘 성에 하나밖에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신약에 보면 하나의 성전을 위해서 여러 명이 여러 성도들이 하나의 성전을 이룹니다. 성도가 열 명이라고 성전이 열 개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성전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여러 곳이라도 진짜 계신 곳은 주의 이름 그 자체에 있지요.
그럼 다른 건 뭐냐? 시편 84편에 나는 성전의 문지기로 있어도 좋사오니. 참새도 제 집을 짓고. 참새가 성전에서 제 집 짓는다고 참새 집입니까? 주의 이름이죠. 성도가 성전에 하늘나라 간다고 자기 집입니까? 그런 참새는 뺨 맞아요. ‘나가!’ 제비도 새끼줄 보금자리를 얻나이다. 보금자리 얻더라도 그건 주의 집이죠. 내 집이 아니고 주의 집이에요. 이름 바꾸기 해야 돼요.
인간의 신체, 인간의 자아가 없다가 아니라 있어요. 있는데 인간의 신체는 인간의 자아는 인간의 신체에 결합된 누적된 과거가 집대성되어 자아를 형성해요. 인간의 자아는 자기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감각들이 다 뭉쳐져 있어요. 이게 자아에요. 인간의 일이에요. 다윗이죠. 하나님은 다윗의 일을 뭐로 바꿨어요? 하나님의 일로 바꿨지요.
그러면 내가 살아오면서 겪는 고초, 각가지 경험들, 많은 변수들 인생, 누구 집에서 태어나고 어디서 살고 용두리에서 살고 모든 일이 천국에서 보면 다 누구 일입니까? 주께서 뜻이 있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구약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내가 엄마 잉태할 때부터 출발했다는 거예요. 예레미야 1장에 나와요. 1장 5절,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현실세계와 그 바깥의 세계 경계선에 선택이 있지요. 하나님의 택한 작용이 현실세계에 나오면서 비로소 구체화되고 알려지는 겁니다. 성도는 신약에 가면 이것보다 더 길어요. 아예 창세전이에요. 창세전부터 우리가 구원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계신 분이기 때문에. 계획 잡은 것이. 이게 언약이거든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전부터 이미 계획 잡힌 게 있는데 그 계획 잡힌 것 중에 사랑하기로 작정된 자도 창세전부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라 하는 것은 사실은 아버지에서 예수님의 자아, 그 자아성 안에 그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그러한 경험들, 감각들, 과거의 체험들, 이런 것을 주님만을 섬기기 위한 필요한 인생살이를 우리 성도가 태어나면서 지금도 체험하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멸치 해먹으면서 주께서 이것도 주셨네, 뭐 이런 식으로 하게 하지요.
그래서 시편 51편은 다 끝난 거예요. 그래서 성신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바꿔치기해 달라. 창조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가 내 죄 많은 마음에 새로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창조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게 성신 담당입니다. 성신은 율법이 완성될 때 성신이 활동하거든요. 더 이상 나는 율법에 대해서 불일치입니다. 일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일치하시는 분이 나로 하여금 그 일치했던 능력, 창조의 능력을 내 안에서 발휘하옵소서. 다만 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더럽고 상한 심령, 문둥병자 더러운 것을 만진 시체를 만진 시체와 일치되는 이 마음밖에 없으니까 주께서 창조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왕으로서 이스라엘이 했던 거거든요.
요구해서 벌어진 것이 하나님 일이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을 위해서 이스라엘 만든 게 아니고 이스라엘 위해서 왕이 있기 때문에 나한테 일어난 일을 나와 똑같은 경우를 복제를 해서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소서. 꺾어진 뼈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되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시편 51편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시작은 내 자아를 내 개인적인 자기 방어기제, 잘난 척으로 시작하다가 성령이 거기 안에 제3의 요소로 꺾어진 뼈로 뛰어들어서 그것마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창세전의 일에 대상이 되어서 관여하게 되어서 그 벌어진 실제적인 현상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 내 일만 나오게 하지 마시고 주께서 다 이루심이 계속해서 매사에 튀어나오는 언약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