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로 심판
2024년 6월 26일 본문 말씀: 말라기 1:11-14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적하실 때, 인간의 태도는 명백합니다. “싫으면 나 안 하는 수가 있어요?” 이게 인간의 본심입니다. 인간은 호기심으로 잠시 하나님이나 성경이나 교회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요지부동 한결같은 고집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그냥 나이고 싶다”
“나는 내가 원하는 나이고 싶다” 이것 외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에 그 어떤 요란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꿈쩍도 않고 일관성을 보이는 것은 끝까지 자기로 사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태도를 갖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 14절에, “제사 드리는 이 일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하면서 짜증을 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 인간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규정은 간단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이렇듯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 구실 탈락한 것도 모르고 끝까지 자신이 사람인 줄 압니다. 요한복음 3:6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고 했습니다.
육이 있어야 육이 영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스스로 만드신 ‘내부환경’의 원칙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을 만들어 이 세상에 개입하셨습니다. 외부환경이란 ‘불’ 안 쪽에 존재하는 생명나무가 외부환경이요 하나님만이 계시는 곳입니다. 반면에 ‘내부 환경’이란 선악의 세계를 자기 내부로 들여서 조성한 환경입니다.
선악과 지식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악마와 인간이 훼손해도 그 선악과의 취지는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즉 선악과 훼손된 악 속에서 선을 이끌어내는 환경입니다. 이 예가 창세기 8:20에 나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 정결한 짐승과 새는 홍수 심판을 견뎌낸 제물입니다. 정결하기에 버텨낼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깨끗한 것을 왜 노아는 불에 다 태워 제물로 바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예 안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즉 인간의 악한 마음과 차별되는 다른 정결한 제물을 하나님게서 기쁘게 흠향하셨다는 것은 스스로 제물이 되시는 주님의 내부환경을 하나님께서 기꺼이 인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생명이면서도 선악과로 인해 발생된 죄와 저주의 속에서 희생제물이 되시어 악에서 선을 일구어내신 겁니다.
이렇듯 제사의 원형은 심판이라는 바깥 환경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특히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곧 선악과의 세계와 생명나무의 세계를 구분지어 그 무서운 불의 심판을 전제가 된 환경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물의 심판 속에서 시작된 정결한 제물의 희생 제사는 불에 다 태우는 번제의 형식을 근본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이 세상의 불바다 되는 환경을 전제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2:49-50에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려고 오신 겁니다. 도시든 들판이든 모조리 불길이 하늘까지 쏟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당연히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육에 불과하는 사람에게는 감격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불의 세계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그만큼 주님의 취지는 확고합니다. 제사에서 번제 위에 놓인 모든 제물은 예외에서 다 사정없이 불태워지듯이 이 세상 전체가 신약 시대가 되면 모조리 불판 위에 이미 올려져 있는 형편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경우는 ‘인간의 일’은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일을 일으키신 적도 없고 일어난 적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레위 언약, 곧 전체 제사를 위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아무리 제사가 귀찮고 싫어서 도망치고 싶더라도 그들은 제사가 주는 저주에서 못벗어나버린 처지인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신약이 되면 모든 이방민족도 하나님의 제사 취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말은 곧 신약 시대에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장례절차에 돌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통째로 장례식장입니다. 이 미래의 구조를 오늘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주어졌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꼬치꼬치 지적하면,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마음으로 “나를 기분 나쁘게 하면 아예 제사 안 드리는 수가 있어”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격이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징후는 그당시 유대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원제로 수컷를 드려야 하는데 그들은 제사 형식을 무시하고 이것을 지키지 않고 사기를 치면서 다른 것을 드렸다고 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레 22:19)
하지만 이것마저 귀찮아서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전적으로 자신이 망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마가복음 5:25-27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는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진정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이 여인은 자신과 비교해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정신은 제사 정신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자아와 그런 이 세상에서 오신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과 대조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도들의 그림자라도 자신을 덮기를 바라는 (행 5:14-16) 마음은 오로지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해야 마땅함을 받아들이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민족으로 통해서 성취되는 제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가치를 기꺼이 십자가 앞에서 내던지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강-말라기 1장 11-14절(제사로 심판) 24062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말라기 1장 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오늘 이 본문가운데서 구약의 범위와 신약의 범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는데 말라기 1장 11절,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방민족, “율법을 모르는 이방민족에게도 나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깨끗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미래에다가 준비해두셨습니다. 근데 그 깨끗한 제물과 대비해서 현재 이스라엘이 끝장나는 막장, 끝물에 해당되는 이스라엘의 역사 끝에는 그들이 제사드릴 때 더러운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 왔습니다. 이 제사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레위기 22장에서 그렇게 하지말라고 분명히 당부를 했습니다. 레위기 22장 22절에 보면,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너희는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단 위에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라고 되어있어요.
병든 것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는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병든 것을 제사를 드릴수 없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도 그거는뭐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이렇게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데, 제사의 원형이 있어요. 제사의 원형은 정결한 제물을 드리는걸로 되어있습니다. 물론 우리 생각에 뭐 깨끗한 것 드리는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는데 단순히 문제가 ‘깨끗한 제물 드리면 받는다’ 그런뜻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가인도 나름대로의 정성들여서 제사 했는데 하나님 안받았다 이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사의 원형에서 제물을 받을때에는 그 주변에 어떤 환경, 새로운 환경 조성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제사드리겠습니다.” “어, 제사 받는다.” 이렇게 끝나는게 아니라, 제사를 드리므로써 그 제사 중심으로 새로운 인간의 세계의 외부 환경이 새롭게 전개가 돼요. 제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 8장 22절에 보면, “노아가”, 홍수가 끝난 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아,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인간이 드리는 것 가운데 깨끗한 것은 받는구나.”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런뜻이 아닙니다, 이 제사가. 그럼 다른 이방 제사하고 우상제사하고 똑같이 돼요. 뭐냐하면, 전제가 있어요. 전제가 뭐냐하면, 정결한 것은 받되 인간의 것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말씀 드립니다. 정결한 짐승과 새는 받되, 제물은 받되 인간의 것은 받지않는다는 것.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그 정결한 짐승이든 새든 바칠 때 인간이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그 제물을 드리는 자가 인간이잖아.”라고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하고 싶은데 창세기 3장에 그 인간에 대해서 주께서 이렇게 단정을 내렸어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하여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창세기 8장 21절에나온 말씀입니다.
정결한 짐승을 받되 인간의 마음은 받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어릴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안받는다는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정결한 짐승 따로 인간의 마음 따로가 되고 정결한 짐승을 드렸다는 말은, “더러운 내마음을 받지마시고 더러운 내마음 대신 더럽기 짝이없는 내마음과 달리 전혀 더러운 내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물만을 하나님 받으소서.” 이것이 제사의 원형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손때가 묻지않은 제물이 어디있단 말인가? 모든 제물은 인간이 드리는거니까 인간이 개입해서 드린 것이 아니냐? 그렇게 또 생각하게 되는데 창세기 8장에서 이 정결한 짐승은 어디에서 나온 정결한 짐승이냐하면, 방주 안에 있던 정결한 짐승이에요. 방주안에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충분히 감당해 내고 그것을 견뎠던, 견딜만한 가치가 있던 제물이다.’ 그런뜻이에요. 심판 속에서 나온 제물이다. 그런뜻입니다.
악에 대해서 심판하는데 그 악과 상관없이 나왔던 의로운 정결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정결한 짐승을 받기 위해서는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하면 ‘심판중에 있다는 것을 확정하는 가운데서 인간은 심판받아 마땅한데 그중에 인간과 더불어 심판받지 않아야될 그 무엇, 그 정결한 무엇은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이것이 제사의 원형입니다.
그러면 이 원칙에 의하면, 이 원칙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제사한다면 여러분 전제가 먼저 어떻게 되야하냐면, 마음가짐이. “하나님 어떻게하면 내가 인간이 안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른 인간이 아니라는걸, 어떤 짓을 해도 바른인간이 될수 없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내가 인정할 수 있습니까?” 세상사람들은 지가 대단한 인간 되고싶어서 아주 환장을 하잖아요.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그걸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그냥 나는 나이고싶다.”
여러분이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지 않죠. 궁금해 본적도 없죠. 사람은 각자 어떻게 사는가? 그냥 나이고싶어요. 그냥 나는 내가 되고싶은거에요. 내가 내가되고싶다는데 더는 묻지말라는겁니다. 사람들이 지난날 자기 살아온 인생을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슬프고 온갖 굴곡을 겪으면서 죽을 둥 살 둥 살아왔죠. 살아왔지만 그러한 과거의 힘들었던 과거지만 돌아보면 다 아름다워요. 참 아름다워요 그게. 힘들고 고생한 그것. 만약 이 중에 일곱 살 아이 없는데, 일곱 살 아이도 자기의 과거는 아름다워요.
7년밖에 안살았지만 아름다운거에요. 왜 이렇게 인간은 자기의 지난 인생이 힘들더라도 아름답게 보는 이유가 뭐냐? 이게 현재의 자기자신을 검증하기 위해서 그 과거가지고 이야기를 엮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그래서 누가 뭐라해도 항상 이런 이야기하죠. “내 이야기 하면 소설책 10권나온다.” 소설책 10권이 뭐냐? 이야기 엮기에요. 과거의 이야기가 엮인거에요. 군대는 3년인데 군대이야기는 3년이 넘었어요. 그거 희한하죠. 3년 기간보다 이야기 엮는 기간이 더 길어져요. 왜? 지금의 자기가 자기이고싶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근데 성경에서 제사를 언급하면서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떻게하면 내가 인간 아닐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내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까? 내가 심판 받아야 마땅한 인간일 수 있습니까? 아, 하나님이 절 심판하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조치입니다. 그런 인간이고 싶습니다”라고 자기자신을 주님앞에 심판 받아야될 사람으로 그걸 생애 목표로 삼는사람 봤습니까? 그것 본적있어요? 성경은 창세기 6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내가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선언하기를 사람들과 함께있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우리가 진짜 진정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수긍을하고 인정을 한다면, 그 누구나 되고싶은 그 사람. 나는 나이고싶은 사람. 나 같은 사람. 사람 되고싶은 것을 포기할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목표가 되어야 돼요. 만약에, 지금은 다 대학생 되었습니다만 지금 만약 고등학생 중학생이다. 선생님께서 숙제내길, “너희집에 가훈을 적어오라.”라고 숙제를 냈다면, “아빠, 선생님이 가훈적어내라하는데 우리가정 가훈은 뭡니까?” “사람이 되지말자. 우리는 짐승보다 못하다.” 뭐 이런거요.
그걸 가훈으로 하는 집안을 봤어요? 어떻게하든 사람다워야지. 이런 것을 가르치잖아요. 이제부턴 다같이 우리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자. 이런거요. 그럼 사람은 뭐냐? 성경대로하면 그냥 육이에요. 육. “육으로난 것은 육이요.” 어제가 뭐 6.25인가? “육으로난 것은 육이요” 요한복음 3장 6절 8절 나오잖아요. 육으로나온 것은 육이다 이말이죠. 육이 될 때 영이 될 수 있어요. 육이 있어야 영이되니까요. 하나님께서 제사를 준비한 취지를 아시겠죠. 이미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런 취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나는 나이고 싶다는 거에요. “하나님이든 누가 와도 그냥 나한테 말하지말라, 나는 나이고 싶다. 그 기준에 맞춰서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고 과거에 고생했지만 지금은 돌아보면 다 아름답다.” 이게 왜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과 사이가 틀어졌는가? 그것은 오늘 말라기에보면 말라기 11절에,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라고 되어있죠. 그런데 여기에 14절에보면,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사기친다는 말이에요.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하면 제사 형식, 레위 언약입니다. 제사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럴 경우에는 암컷을 드리고 이럴경우에는 수컷을 드리고 이럴 경우에는 암컷 수컷 다 드려야 된다”라는 말을 레위 언약. 언약입니다. 레위언약, 제사 드리는 그 환경 내에 그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규정을 해줬어요. 그게 뭐냐? 구약이었다 이말이죠.
오늘 11절은 이제 이게 이방민족까지 확산돼서 신약에는 전 이방민족 까지 적용이 돼요.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제사 형식에 대해서 그 제물을 어디서 태우는가? 번제에서 태웁니다. 태울려면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불이 있어야 되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게 어려우면 쉽게 말씀드려서 이것만 생각하세요. 이 말이 더 어려울 순 있는데... 이 세상에 이스라엘에서 제사 언약, 또는 레위언약이 주어진 이스라엘 내에서 인간의 모든 인간의 일은, 사람의 일은 있지도 않았고 일어난 적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인간의 일은 일어난 적이 없어요.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사람이 인간의 일이 일어나고 자기 자신의 일이 일어나야 그다음에 뭐 불안하든지 걱정을 하든지 염려를 하든지 하는데 레위 언약에서 제사 형식에서 모든 제사 규칙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다 지정된 환경이에요. 지정된 환경에서는 사람의 일은 하나님께서 일어난 적도 없고 일으킨 적도 없고 인간의 일은 있을수도 없어요. 그런데 그 레위 언약이 없는 구약당시 이방민족은 뭐냐? 이방민족의 모든 인간들은 그냥 나는 나이고싶어요. 그냥 쉬워요. “나? 내가 원하는 내인생 사는 것. 끝.” 그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뭐냐? 자기와 관련된 일이라고 여기는거에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 자기와 관련된 일이에요. 제가 굳이 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교회 와서 말씀 듣고, “아, 교회에서 하나님 이런이런 일을 하는구나. 오케이. 됐고.” 그다음부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세상에 나가서는, “내 일 해야지, 나의 일. 나의 일 해야지”하는데, 사람이 나의 일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하면, 나는 그냥 나이고 싶다를 견지하는게 돼요. 그걸 그냥 유지하는게 돼요.
성도가 세상에 나가서 일어나는 일은, 나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언약이 규정된대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면, 처음에 이 레위기에 나와있는 제사가 시작을 어떻게해서 시작이 되었는가를 생각을 해봐야 돼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것 여러분 다 아시죠? 선악과 따먹었는데 이 선악과가 소유주가 누구냐하면, 하나님이 소유주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었다고해서 하나님의 자기 선악과 소유주에 그 주인됨을 포기할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 선을 통해서 악을 생산하므로 선악과를 자체적으로 완성시키는 일에 하나님이 개입 합니다. 그런데 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선에서 악을, 그 선악과 지식가지고 선을 못이뤄요. 이뤄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게 아니니까. 선악과는 주인이 따로있고 하나님이 주인이니까 마귀도 안되고 인간도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생명 나무는 보존되어있거든요. 그 레위기에서 제물을 받을 때 불로, 불타는 제단 위에서 제물을 홀라당 다 태우게 되어있어요. 그게 불이 개입되어있습니다. 불이 개입되었다는 말은, 생명나무 위치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과 위치가 어떤 위치냐? 중간에 뭐가 가로놓여있냐하면 불이 가로놓여서 어떤인간도 그 생명나무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되어있었어요. 창세기 3장 24절에.
그러면 제물을 태울 때 불이 들어온다는 말은 이것은 선악과 취지를 완성하기 위해서 누가 나섰는가? 생명나무 되시는분이 그 불을 앞장세워서 선악과 따먹은 자기 백성 속에 친히 삽입된거에요. 개입하신거에요. 희생제물,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희생제물은 심판이 있을경우에만 발생되는게 희생제물이에요. 이 말은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육체가 됨이라.” 그자체가 이미 심판이에요. 그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견디는게 뭐냐? 선악과의 저주를,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 관련된 저주를 이기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아까 정화된, 정결한 짐승은 노아 홍수를 통해서도 살아남았잖아요. 그 정결한 짐승을 드릴 때 아까 제가 이야기한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안받는거에요.
받지를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결부되지 않는 제물,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마음이 끼어들지 않는 제물. 그 제물은 어디서 개입되었느냐? 생명나무와 관련된 제물. 생명나무의 취지가 살아있는 제물은 받으셔서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가족에게 심판가운데서도 살아남는 생명을 주신거에요.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생명으로 갈수 있는 그것을 가지고 두자로 언약이라고합니다. 언약. 그게 노아 언약이에요. 노아언약 안에 실 내용이 뭐냐? 정결한 짐승을 불로 태우는거에요. 불로 태우니까 창세기 8장에 그 연기를 흠향하시고 기뻐하신거에요. 그 연기를. 제물을 태우는 연기를 보고 기뻐하신거에요. 불이 있어야 태우죠?
그러니까 제가 지금 누가복음 12장 49절을 소개해 드릴텐데요. 이 누가복음 12장 49절을 들으시고 여러분들이 속이 시원해야됩니다. 속이 시원해야돼요. 어떻게 시원한 말씀인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이땅에 불지르러 왔는데 불이 몽땅 다 탔으면 내가 이렇게 답답하지 않는다 이말이죠. 예수님 하신 말씀이. 불을 지르러 왔는데 불이 다 안탄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다가 불을 질르러 온거에요.
전에는 노아는 뭘로 덮었다? 물로덮었잖아요. 이제는 뭘로? 불로덮은거에요. 불로 덮었으니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뭐 밖에 없는거에요? 정결한 제물밖에 감당할게 없는거에요. 정결한 제물. 인간들이 갖다내는 그 마음가짐. 그 태도. 그 태도로 제물을 드리는 그것은 말라기에서 그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여기 말라기에서 유대민족이거든요. 유대민족에게 말라기라는 선지자가 이렇게 지적을 한다는 것은 곧 전체 인류를 대표해서 지적받는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이렇게 유대인들이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유대인들이 이런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지적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런 의미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언약 밖으로 빠져나갈 어떤 피난처 피할 곳은 없다.” 이런뜻이에요. 선지자의 언약가지고 말라기를 통해서 “니가 이렇게 더러운 제물을 드렸구나.”라고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은 뭘 생각해야되냐면, “이야기 안들으면 되지. 우리도 이방민족처럼 하자. 굳이 제사 드려야 돼? 다른사람들은 제사 없이도, 이방민족은 잘만 행복하던데? 제물 드리는데 이러쿵저러쿵 말이많아? 그러면 뭐 드리지 말지 뭐. 그러면 안드리면 되잖아. 꼭 이렇게 잔소리 들어가면서 제물 드려야돼? 야, 말라기 선지자가 우리한테 잔소리 한단다. 뭐 하나님말씀으로. 야 듣지마 이제부터 제사 끝났다. 제사 귀찮아 죽겠는데.”
귀찮다는 이야기가 어디나오느냐 하면 여기나와요. 13절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얼마나 짜증나고 얼마나 귀찮은 일이냐? 우리가 그래도 여호와를 약간은 인정해주고 그래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니까 우리민족이라서 이 제사 드리고 하지 다른민족같으면 드리지도 않아. 우리니까 드리잖아.”라는 식으로 자기들은 이 제사를 드리는데 억지로 드리고있는거에요. 이걸 CCTV로 다 보고있는거에요. 주님께서.
그래서 주님께서 말라기를 보내서 딱 이말하는거에요. “너희들은 제사언약, 제사 약속 빼놓고 달리 달아날 곳은 없다. 왜? 모든 것이 언약이 너희들의 미래를 결정지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너희들은 이 제사의 율법에 저촉되어야 돼. 달리 말해서 너희는 너희 자신의 일은 나는 만들지도 않고 생겨나게 하지도 않았다.” 그말입니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다 제사 언약과 관련된겁니다. 가족끼리 캠핑가는 것, 또는 당구장에 당구치는 것, 탁구치는 것 또 낮잠 자는 것. 그 어떤일도 하나님의 제사언약과 관련되어서 일어난 일이 되는거에요.
나의 일은 없습니다. 이 유대인들에게. 나의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유대민족이 망하고 난 뒤에 전 인류에게 확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아까 누가복음 12장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이땅에 온 것은 이땅에 불을 질르러 왔다.” 12장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 들풀. 도시와 들녘에 모조리 다 산불난걸 한번 상상해보세요. 신나지 않습니까? 온 천지가 뭐 LA산불도 산불이지만, 온 천지가 벌겋게 불바다가 되는, 맨날 김정은이가 하는소리에요. 온천지가 불바다가 되는 그 작업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거에요.
뭐 뜨겁습니다, 아픕니다. 내가 그동안 이룬게 다 타버리네 어쩌나. 그런소리 하지말라는거에요. 왜? 애초부터 사람은 없었으니까. 인간은 육체뿐이지 사람은 없습니다. 왜 목표를 내가 사람아니고싶다에다가 왜 인생목표를 안걸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뭐냐? 육은 주님 보시기에 쓰레기인거에요. 그런데 지금 말라기에서 유대인들이 그 하나님 드리는 제단에다가 쓰레기를 갖다바친거에요. 쓰레기를...
구약 지나고 신약이 되면, 말라기 지나고 신약시대되면 모든인간은 장례절차에 들어갑니다. 뭐 부조 받을 일도 없어요. 본인이 죽는데 무슨 부조를 받아요. 모든 인간은 다 죽어요.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다 죽은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 혹독한 외부환경. 불을 던지는 외부환경은 바로 선악에서 선악따먹은것에서 선을 끄집어내는 내부환경. 그 불바다 되는 외부환경은 생명나무가 이땅에 들어오므로 발생된 하나님 자체적인 자체의 내부환경으로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그 내부환경은 뭐냐?
그 선악과 따먹은데서 그 악에서 선을 끄집어내는거에요. 그리고 끄집어낸 선이 기준이 되어서 그 기준에 준해서 새로운 악이 거기서 또 창출되는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외부 환경과, 예수님의 외부환경은 생명나무죠. 내부환경은 이 죄많은 곳에 와서 악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내부환경. 하나님의 외부환경과 내부환경이 신약 어디로 확산되는가? 신약시대에 확산되어버리면 그 확산되는 그 방식이 바로 먼저 유대나라에게 실시되었던 제사제도라는거에요. 그 제사제도를 통해서 인간도 아닌 그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제도에 대신죽으신 희생덕분에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는거에요. 그게 죄악에서 끄집어낸 하나님의 의요, 선이 되는겁니다. 그게 레위언약이에요.
레위 언약을 어렵다고 생각하지마세요 그냥 노아의 방주가 보다 더 구체화되었다고 보면됩니다. 노아 방주안에는 불편한게 없었잖아요. 그런데 방주 나오고 난 뒤에 방주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노아 방주를 통해서 외부환경은 물의 심판이죠. 그럼 내부 환경은 뭐냐? 정결한 짐승과 더불어 살기가 되는거에요. 그 짐승과 더불어 살기가 바깥으로 나가게 된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창세기 8장에 그 노아가 드린 첫 번째 정결한 번제에요. 번제. 불로 태우는 것.
“그러면 그 제사가 모세까지 레위지파한테 연결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연결 되기는 되는데 중간 과정이 하나 있어요. 뭐냐? 창세기 15장에보면, 아브라함이 있어서 하나님의 제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가 선악과 생명나무가 선악과에 있는 인간세계에 들어와서 그 죄많은 인간세계를 언약이라는,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주의 이름의 내부환경으로 삼으므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 될 자에게 영생과 생명이 주어지는 그 시스템, 그 장치가 제사입니다. 그 제사가 노아의 방주와 정결한 짐승 받는 것으로 제사가 되었거든요.
그렇게 발전되다가 창세기 그다음에 노아 다음에 아브라함이거든요. 아브라함 때는 창세기 15장 9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대 나를 위하여 3년 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아브라함의 제사에 와서는 무엇이 새로운 요소가 밝혀지는가 하면, 암컷과 수컷의 차별되는 제사로 구별됩니다.
오늘 말라기 14절을 보게 되면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아브라함에서 차이나는 암컷과 수컷이 모세 제사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다양하게 이게 확장이되는겁니다. 이럴 때는 수컷, 이럴때는 암컷드려라고 구분되어있어요. 수컷 드리는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바로 번제, 속죄제, 속건제는 수컷 드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암컷을 드리는 것은 레위기, 이시간에 레위기 뭐 다 할 순 없잖아요. 할순 없는데 레위기 1장부터 번제있고 그다음에 화목제 나오고 속죄제 나오고 속건제나오고 이 4가지 나와요. 소제는 이제 식물성이기 때문에 식물성은 들어가면 5개인데요. 번제는 다태우는거죠. 다태워요. 수컷드려요. 속죄제 속건제는 수컷드립니다. 근데 속죄제에서 등급이 낮은 것, 소 말고 염소 말고 양쪽에서는 암양을 또 드릴수가 있어요. 그러면 화목제는 어떻게되는가? 화목제는 암컷 수컷 다 드려도 돼요. 그러니까 “수컷드려라” 하다가 화목제에서는 암컷 수컷 다 드려도 되었어요. 이게 뭐냐? 화합의 차원이니까 마무리 차원이니까 암컷 수컷 구분이 최종 종합이 되는거에요.
그런데 오늘 보면 수컷이라 되어있단말이죠. 수컷인데 여기 서원제라고 되어있어요. 서원제. 수컷의 서원제에 대해서는 여기 레위기 22장 19절에보면, “열납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찌니,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서원제라고 하는게 뭐냐하면 다섯가지 제사에 포함되지 않는데 화목제 가운데서 화목제가 전체 드릴때는 수컷 암컷 드리는데 특별히 서원제 해야됐을 때는 “수컷으로 드리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여기 오늘 말라기 14절에 보면,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드렸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거한번 생각해보세요. 굳이 굳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사드릴 때 이런 지시를 하는 것, 이런 지시를 할 때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아, 자꾸 저렇게 따지면 내 안드리는 수가 있어요.” “이것 저것 하면 내 교회 안나오는 수가 있어요.”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하나님 안 믿는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인간들이 배짱을 부립니까?
나는 나다운 사람이 되고싶어요. 그냥 사람이 되고싶어요. 그러니까 이 성경에서 우리가 성경에서 말라기를 보든 아브라함 이야기든 노아 이야기하든 이거는 그딴 소리는요 내가 나다운 태도를 견지하는 이상 그건 아무짝도 소용없는거에요. 이 성경전체가.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되고싶다는데에는 요지부동이에요. “구약에는 제물 제사드려서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에서는 우리 예수님이 희생제물 되셔서 어린양이 되어서 우리는 구원받는다.” 백날 그런 소리해도 지금 기본 마음자세가요, 우리가 꽁꽁 숨겨놓은 기본 마음자세가 “나는 제대로된 사람이고싶다.” 이게 유지되는한 이 성경 신약이든 구약이든 다 소용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 30절, 여기 혈루병걸린 여인이 자체적으로 뭔가 조치는 없어요. 몰래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구원을 받았어요. 그때 뭐라고 하느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능력이 그사람에게 갔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능력이 그사람에게 갔다. 이것은 바로 신약에서 모든 이방 민족가운데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신을 더 이상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그러면 사람은 누구냐? 예수님밖에없어요. 하나님 인정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어서 그 하나님이 인정하는 예수님의 몸도 감히 부끄러워서 못보고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그 능력이 나에게 오지 않느냐고 생각을 한거에요.
여인의 이런 태도는 뭐냐?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여인이 지금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무는게 아니고 여인이 자기가 정상이 아니면 자살을 하든지 그러면 혼자 죽든지 해야되는데 왜 예수님을 왜 찾아가서 옷자락을 만졌는가? 예수님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만 온전하고 나는 거기에 비해서 사람도 아니다라는 것을 대조하면서 인정한거에요. 이 정신은 뭐냐? 구약의 제사정신이 뭐냐? 정결한 짐승과 거기에 상대되는 제물을 드리는 나는 너무나 더럽다는 것을 제사 속에서 그걸 대비를 뚜렷하게 부각시켜야 돼요. 그게 바로 제사의 자세입니다.
“저 제물 아니면 우리는 죽었어.”라는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돼요. 그정도로 우리 마음은 볼껏도 없어요. 썩었어요. 쓰레긴데 그걸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제사였는데 말라기와서 그게 다 날라가버린거에요. “귀찮아죽겠다. 예배도 번거롭다.” 사도행전 19장 보겠습니다. 19장 11절 12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되어있어요. 사도행전 5장 14에서 16절에보면,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얼마나 자기 처지를 사람 이하로 보기에 그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지나가면서 그림자라도 혹시 덮일까 하는 그런 마음 자세. 그게 바로 예수님만이 온전한 제물이고 온전한 사람인 것을 그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사람들은 그걸 인정 한거에요. 그게 초대교회 이런 현상이 일어난겁니다. 나는 나대로 사람답게 살면되지, 이런 것 없어요. 그런게 어디있어요 그런게. 천국에 그런사람이 들어갈 수가 있어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구약이 끝나고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정결한 희생물로 드리게 되면 모든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라고 되어있어요. 바로 중요한 것은 그런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기대해서는 안되는 존재인 것을 그걸 목표로 우리는 살아가야돼요. 내가 절대로 인간일 수 없다는 것, 오직 주님만 쳐다보고 사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시고 하나의 은혜로 여기시고 이걸 알게 된 것을 어떤것보다 귀한 가치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감히 우리가 어떻게 그걸 이용하려는 생각을 갖겠습니까? 이 세상이 다 심판 속에 있고 불로 싸지를 쓰레기에 불과한데 아직도 우리가 우리의 주제 파악을 못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이용해볼까 하는 생각. 이제는 멈추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그 제물 속으로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유일한 기쁨과 감사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