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사건
2024년 6월 2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4:12-13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천국은 사건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 사건을 일어나고 난 후에 말씀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나타남은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이 남기는 말씀과 대결구조를 형성합니다. 인간들도 나름대로 말과 언어를 양산합니다. 이는 인간 자신의 존재이 이유와 정당성을 문서로 남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담는 반면에 인간의 언어 속에는 인간의 높아짐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자리까지 높아지기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1장에 나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창 11:3-6)
언어의 분산은 곧 하나님에 의해 강제로 인간 세계를 낮추는 일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벌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당연히 하나님의 성경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의 충돌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해석한다는 그 사건을 밖으로 풀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경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 사건으로 국가가 만들어진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바를 요구 받게 됩니다. 더나아가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미 확정적입니다.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레 26:28-32)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맞이할 미래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건이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낮아짐이지만 이스라엘 외부에서는 잔혹한 진멸 전쟁으로 발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말씀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젖먹이와 어린 아이로 인해서도 적들을 물리치는 힘이 나오게 하신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힘에 대한 말씀 사건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이처럼 인간의 모든 결집을 능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미 선악과 과실을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無)’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불’에서 나온 말씀으로 그들과 동행케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신 4:36)
성경 말씀은 결코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인간 배후를 장악한 악마를 겨냥해서 주신 겁니다. 성경 말씀은 주님과 악마의 비밀통화 내역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을 앞장 세워 자꾸 그 말씀을 지키라고 부추깁니다. 교회라는 것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말씀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말씀은 인간 대 인간의 모임에 불과한 교회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집단을 피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부터는 외부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 전쟁으로 돌입됩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구했는데 이는 자체적인 집단 체계를 갖추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집안의 어른을 찾듯이 단체나 국가의 어른을 찾았습니다. 그 안에서 안정감을 얻고자 했습니다. 다그렇게 해서 주어진 왕이 사울왕입니다. 이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과 대립되는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말씀 이외의 권위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 외의 권위자 곧 왕을 선지자들을 보내어 파괴하십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 왕 제도를 파괴하는 선지자는 하늘에서 파견한 수사요원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을 범죄자들이고 그들이 빠져 나갈 곳에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지자의 끝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외치는 바에 의해서 모든 의미와 가치를 무로 돌리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이것이 ‘물 세례’입니다.
하지만 그런다 할지라도 인간들은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말씀을 자신이 담당하셔서 예수님은 이번에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는 바로 십자가 안에서 자기 백성을 집어넣으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더는 ‘자기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구원의 증인이나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천국 백성은 ‘예수님의 증인, 혹은 예수님의 구원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천국 백성은 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십자가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같이 죽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저주받아야 될 대상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저주가 주어져야 합당하는데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의미나 가치, 자기 행복과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기를 시도한 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이 망해야 하는 대상으로 해리되고 해체되는 것이 말씀의 활동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주 전체가 망해야 하고 오로지 주님의 나라만이 영원해야 함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히브리서 4장 12-13절(천국 사건)240623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4장 12-13절입니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 말씀이라 하는 것은 사물에 사건이 입혀지게 되면 그게 바로 말씀이 되는 겁니다. 흙이라는 곳에 하나님의 입김이 더하니까, 사건이죠, 흙이라는 물체에 하나님의 입김, 사건, 하나님의 개입이 들어가니까 그것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아담이라고 하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 안에서 우리가 아는 인간이 아니고 거기서 주님의 사건을 뽑아내야 할 필요가 있죠. 그래야 해석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놋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이라는 게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사건이 개입됩니다. 뱀이 인간에게 달려들어서, 공격해서 물어 죽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물려 죽은 사람을 치료하고 낫게하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게 했죠.
놋뱀이라는 그 하나의 말씀, 단어 안에서 놋뱀의 의미를 뽑아내려면 하나님의 사건을 뽑아내야 돼요. 사건을 뽑아내서 현재 있는 사물, ‘있음’이죠, 이 존재를 뭘로 푸느냐? 사건으로 풀어줘야 해요. 그러면 이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입김이 주어졌다고 했는데 그건 창세기 2장이고 3장, 4장,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건이 인간 속에 붙여지고, 투입되고, 침입하고, 개입하고, 이랬단 말이죠.
그렇다면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뭐냐? 주께서 투여한 그 사건 하나하나를 인간을 두고서 다 뽑아내는 거예요. 다 뽑아내게 되면 비로소 거기서 벌거벗은 것 같이, 하나라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이 다 드러난다는 거죠. 주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이 집어넣은 사건을 자신이 회수하는 그 과정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 여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무슨 의미로 이 나라는 것이 태어났고 여기 사느냐, 이렇게 질문을 해야지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풀어져야 된다니까요. 풀어져야 돼요, 실을 풀듯이. 옛날에 신기라는 게 있잖아요. 도시락 반찬 할 때 뭉쳐있으면 안 되잖아요. 뭉쳐진 것을 다 떼어내잖아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풀어지는 게 아니고 주의 사건을 통해 하나하나 뜯어보게 되면 그 하나하나에 주님의 사건이 개입되지 않는 부분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의 사건을 차단해버리고 나라는 이 덩어리, 이 덩어리를 딱 쥐면서 “천국 보내 줄 거요, 말 거요?” 이런 협박성으로, 공갈성으로 나와 버리면 “너 어디서 나왔지?” 이 질문에 답변할 길이 없습니다. 구원받겠다고 욕심내는 너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를 묻는 거예요.
오늘 같은 본문에 “하나님 말씀은……” 이렇게 나오잖아요. 말씀, 하니까 사람들은 단어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 그런데 그 단어가 살았다니까 여기서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이 왜 살아 있지? 책에 이렇게 활자로 박혀있는데 이게 어떻게 살아 있지?’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지 말씀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벌써 이게 엉터리죠. 말씀은 우리 인간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말씀은 하나님이 마귀보고 이야기 한 거예요. 우리는 패스에요 그냥. 우리는 빠지고 하나님께서 마귀보고 준 말이에요. 하나님과 악마의 비밀 통화 내역이 바로 성경책이에요.
우리는 이 성경을 풀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벌써 마귀의 수하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이 성경 말씀을 풀 수가 없어요. ‘어떻게, 성경 풀어서 이용 한번 해 볼까? 복 받는 데 써먹어 볼까?’ 이거 다 헛소리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해주지도 않고요, 우리를 복 받게 하지도 않고요, “제발 너 성경에서 패스, 손 좀 떼라.” 하나님이 악마와 상대할 거고 주님이 악마하고 상대할 거예요.
우리는 성경 지키지도 못하고요, 지킬 수도 없고요. 이거 지켜서 사전에 오는 재앙을 사수할 생각 하지 마세요. 성경 자체가 살아서 뭘 하느냐? 우리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를 겨냥해서 이 모든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악마 쪽에서 가만있겠어요?
가만있지 않죠. 악마 쪽에서 주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극구, 아주 필사적으로 거부합니다. “인간이 성경 해석하도록 좀 내버려 둬요. 하나님께서 말씀 줬으면 그걸로 끝내고 그다음에 인간들이 열심히 성경 쓰고, 지키고, Q.T하고…, 이런 거 해서 복 받을 사람 복 받고 천국 갈 사람 천국 가고, 좀 인간에게 맡겨놔 줘요.” 이게 바로 우리 배후의 악마가 우리에게 시키는 일이에요.
그러면 인간들은 뭘 하느냐?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위주의 자기가 잘 되는 쪽으로 사건을 만들어내요. 어떻게 하느냐? 언어를 사용하고, 말을 사용하고, 글자를 사용해서 자기 세계를 만듭니다. 자기 삶의 세계를 만들어요. 딱 구축해 놓고 이 성경 말씀을 자기 삶 속에 집어넣어요.
집어넣어서 말씀이 풍성한 삶이 얼마나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 가게 하는가를 본인이 그걸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자기는 언어를 안다는 거예요. 헬라어 히브리어 알고 언어를 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말을 안다고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누구하고 상대하는가? 같은 사람하고 상대해요. 여러분들이 24시간 누구와 상대하는가? 같은 사람하고 상대합니다.
같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그 장소를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교회는 말씀과 상극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상극이에요. 말씀이 직접 우리를 해체하고 분해하는 것을 인간들은 못내 그걸 반발하고 거부해서 교회를 만들어 가지고 바른 교회, 완전한 교회, 올바른 교회에서 우리 이 교회에 참석한 사람은 몽땅 집단적으로 천국 갈 수 있도록 완벽에 완벽을 가하는 그러한 단체를 만들죠, 인간이! 교회가 그렇고, 성당도 그렇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고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그런 짓을 하는 걸 어떻게 방치하느냐, 그걸 그냥 내버려 둬? 내버려 둔 적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인 그 집단, 집합체를 통해서 말씀은 사건이니까 계속 사건을 일으키는 거예요. 계속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말씀 하나 추가요~”, 또 “말씀하나 추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 구약, 신약 전체는 사건화되어 있고 그 사건이 뭉쳐져서 말씀이 된 거예요. 주께서 주신 그 사건 하나가 말씀으로 전환되고 또 전환되고, 그렇게 만들었어요. 인간은 그 말씀을 내가 지켜서 주께서 시킨 대로 하면 나는 지금 복 받고 나중에도 복 받는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성경을 대처하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성경 해석, 말씀 잘 푼다는 사람에게 찾아가고요, 원어까지 들어가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경을 만드는 사건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나님 자기의 낮아지심이 거기에 섞여서 사건화가 돼요. 인간들의 교만과, 자만심과, 높아짐, 그것을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마중을 나와 여기서 사건을 일으켜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니까 나중에 말씀이 되겠죠.
이 말씀의 해석을 이제는 두 가지로 뽑아내야 해요. 인간의 교만함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이 두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한 그 이후에 주께서는 말씀을 줘버려요.
주께서는 인간에 의해 쉽게 따먹혔어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안 돼, 안 돼! 어딜!”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따먹히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인간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유는 그동안 인간이 내내 하나님에 대해 승리해 왔다는 증거에요. 한 번도 하나님이 인간을 이긴 적이 없어요. 항상 인간이 하나님을 이겼어요. 재림할 때까지, 재림할 때까지.
이 말은 달리 말해서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한 번도 인간은 자기가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왜? 늘 승리하니까. 늘 승리해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있었고 아벨이 있었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받았던 아벨을 형 가인이 때려죽였습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가?
죽은 아벨은 그냥 죽은 채로 갔고 살인한 가인은 안 죽고 살았어요. 이게 뭐냐? 인간의 승리입니다. 계속 승리해요, 인간은. 계속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은 점점 더 인간과 반대 방향으로, 낮은 자리로 갑니다. 그래서 말씀 해석이라는 것은 이런 거예요. 내가 천국 가려고 말씀을 봤는데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뒤돌아 가기’를 만들어요.
분명히 천국 가려고 열심히 교회 나와서 성경 설교 듣고 말씀 봤는데 나중에 와보니까 지옥이에요. 도대체 뭘 놓쳤는지, ‘도대체 뭘 놓쳤을까, 내가?’ 50년 교회 다니고, 60년 교회 다니고, 목사 집사 장로 뭐 다 됐는데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놓쳤길래 지금 내가 천국 가는 길이라고 자부를 하고 장담을 하고 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지옥 가는 길이었어요.
어디를 놓쳤을까? 성경 말씀 그냥 다 외우는데, 모르는 게 없는데. 겸손 하라고 하면 겸손하고, 거룩하라면 거룩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면 착하게 살고 다 했는데 어디서 놓쳤어요? 그건 주님의 안목, 그동안 사건 속에 있는 주님의 안목으로 변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그러한 욕망, 욕심으로 가득 찬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그 교회가 말씀과 상극이고, 교회가 말씀의 적이라는 사실을 생각도 못 하는 거예요. 상상도 못 한 거예요.
주께서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가 뭔데요? 그 교회는요, 인간밖에 없어요. 만나도 목사 만나고, 만나도 집사 만나고 그냥 사람과 사람의 만남 끝이에요, 그게. 그게 끝이라고요. 뭐 고상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고, 경건한 사람이 모이면 뭔가 내가 신자인 것처럼 느껴지겠죠. 목사한테 신앙 상담받으면 새사람 된 것 같죠? 그런 건 없어요. 도대체 새사람 되겠다는 이게 주님의 선악과 사건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얼마나 시건방진 일이에요.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거.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욕망으로 만들어 낸 거예요. 왜 하늘나라에 인간이 기어들어 갑니까, 거기에? 말도 안 돼요. 인간은 지옥이 적절해요. 천국은요, 천사와 하나님께 적절해요. 구원 준다는 그 혹함, 이 세상에 가장 큰 유혹은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가장 큰 유혹입니다.
뒤에서 마귀는 신났어요.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망해가고 있으니까. 자기 치장, 자기 메이크업, 자기 위선, 거기에 아주 환장을 했기 때문에 마귀는 그냥 뒤에서 웃고만 있으면 돼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죽으심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마음을 낮추자.”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죠.
자,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건이거든요. 그러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대로 하면 그 사건은 이미 말씀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각은 못 하고 ‘예수님이 한때 죽었대. 2000년 전에 돌아가셨대. 그 죽음 사건이 우리를 구원한대.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대.’ 이렇게 생각해요. 아주 신났죠. “그 피를 믿습니다.” 하면 죄 사함받고 천당 가는 거예요.
그게 좀 찜찜해요. 찜찜하면 ‘그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에 보니까 그거 말고 다른 말씀도 많은데 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것만 주장하느냐? 역시 성도라면 성령에 입각해서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믿음이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까 믿는 것도 필요하지만 믿는 것 플러스, 행함이 들어가야 해.’ 이거는 더 미친 인간이에요. 그건 더 미친 인간이에요.
계속해서 자기가 존재하는 게 사건이거든요. 다시 지금 두 번째 이야기합니다. 내가 존재하는 게 사건이라면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 주님은 낮아지는데 우리는 높아지는 그것과 상극, 마주쳐 충돌된 사건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그 죽음 사건이 우리 안에서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자극을 시켜요.
자극을 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목사님, 남한테 미움받고는 못 살겠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에요. “목사님 저는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세 번째 “내가 옆의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이거. 이것은 집에 돈이 있고, 수입이 있고, 부동산 있고, 자식들 공부 잘해도 이 세 가지에 걸려버리면 남는 것은 자살 밖에 안 남아요.
못 외웠으면 다시 가겠습니다. 남한테 미움받고는 못 살겠다. 여러분 가정과 직장 생각해 보세요. 교회 생각해 보세요. ‘미움받고는 못 살아.’ 두 번째, ‘억울해서 못 살아.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네가 왜 수군대면서 뒷담화하고 그래,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네가 나를 알아?’ 뭐 이런 식으로. 옆에 칼, 정지 칼, 부엌칼 있으면 죽이고 싶어요. ‘네가 내 사정을 알아? 왜 함부로 이야기해, 남의 사정을.’
세 번째, ‘왜 아무도 나를 인정 안 해? 뭐 보람이 있어야죠, 사는 데 보람이. 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놀고 나를 인정을 안 해줘? 나 이러고는 못 살아. 이러고는 못 산다고.’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인정을 안 해줘. 내가 다시 시집을 가나 봐라.’ 이런 거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현실의 삶 속에서 이미 사건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온 그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십자가 지신 주님과 대비되는 식으로 우리의 몸이 그대로 발현되고 있고 발산되고 있는가를 봐야 해요. 성경 내용보다도, 성경 잘 외우고 예배 잘 드려봤자 세상에 나와서 남한테 인정 못 받고 모함당하고 미움받아 보세요. 은혜받은 거 다 날아갑니다. 소용없어요. 나를 주도하는 것은 악마의 마음이지 결코 복음의 성경 내용이 아니에요. 듣고 나면 그만이지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사람들과 사람들의 만남에서 본심들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데 인간들의 본심은 딱 이겁니다. ‘성경은 듣지 말아야 될 내용이다’ 성경은 봐서는 안 되는 내용이에요. 성경은 보면 안 됩니다. 보면 위선자 돼요. 성경 보지 마시고 여러분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살아 있는 말씀 가지고 여러분의 마음을 호작질을 하는지 그걸 체험해야 해요. 속을 뒤집어 놓는지.
진짜 더러워서 못 살고, 성질나서 못 살고, 뿔따구 나서 못 살고, 굳이 이렇게 더 살아야 하나…, 도대체 세상과 미래가 무서워서 못 살아요, 무서워서. 그 무섭다는 것을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미지의 X라고 해요. 내 두뇌 천장에 뭔가 쥐새끼가 사는 것 같아요. 뭐가 아무리 좋은 일 생기고 아무리 성공해도 아직도 뭔가 미지의 것이 남아있어요.
이걸 잡으려고 백날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 미지의 X, 그걸 손에 쥐지 않는 한 사는 게 의미가 없어요, 사는 게 의미가 없다니까요. 남들 보기에 이거 다 이루고, 또 교회 나가 집사까지 되고 다 했는데 이상하게 성에 차지를 않아요. 이 미지의 X, 이 쥐새끼가 자꾸 들락날락거려서.
주께서 말씀이 사건이 되어 뭘 뜯어내는가? 이 미지의 X를 뜯어내요. 그거 뜯어내면 공백이에요. 빈자리,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은 원래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음이 인간의 있음을 이깁니다. 살다가 결국 아무것도 없이 죽어요. 화장터에서. 아무것도 없음이 그 강압적으로 평생을 우리를 지배해왔던 거예요. 그 아무것도 없음에 뭘 집어넣는가? 주님께서는 불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심판의 불을 집어넣어요.
그게 바로 신명기 4장 3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불 가운데서 나오는 말씀을 듣게 합니다. 이 말은 뭐냐면, 사람들이 교회 나오면 창세기를 보잖아요. 창세기를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어떻게? 없는 데서 있게 했다.”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없는 데서 있게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불 속에서 만들었어요.
왜냐면 없는 데서 있다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불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에서 추방된 입장에서 자기 존재를 생각을 못 하고, 자기한테 하자 없고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창세기 1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지!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데서 천지를 만드신 걸 믿습니다. 하나님 믿으니까 저 신자 맞죠? 구원받은 거 맞죠?” 이렇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성경 말씀을 보면서 없는 데서 있게 했다는 그 언어, 그 문자, 그 발언, 그거 본인이 본인을 지키려고 하는 수작이에요. “나 성경 말씀대로 해.” 말씀대로 지키는 게 그 수작이라니까요. 지키려면 불속에서 나오는 말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왜 말씀이 불속에서 나오는가, 없는 데서 나오지 않고 불속에서 나오는가? 뭔가 겨냥하고 있다는 거예요. 뭘? 말씀이 나를 겨냥하는 거예요, 나를.
나를 겨냥했을 때 우리의 처지는 어떠냐? 레위기 26장 29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이거 뭐 염소고기 아닙니다. 소고기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율법에 위반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확정했다는 거예요. 이미 결정 났다는 거예요. 너희가 아들의 고기와 딸의 고기를 먹는다. “너는 먹어야 돼. 그래야 해. 그게 네 미래상이야. 그게 네 모습이야.” 이 불에서 나오는 율법의 입장에서 그런 거예요.
또 불에서 나오는 율법의 내용을 또 하나 말씀드릴게요. 신명기 21장 19절에서 21절, 저는 이 대목 보면서 그렇게 신이 나요. 성질이 좀 이상한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신바람 납니다. 18절부터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질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혹시 아들이나 따님 계십니까? 부모 말 안 들을 때 혹시 이중에 이런 부모 계십니까? ‘아, 이때를 위함이다. 그렇지. 이때 말씀을 말씀대로 들을 수 있는 찬스가 왔구나.’ “아들아, 잠시 시간 있나?” “왜요?” “저 앞에 로터리 있지? 로터리 가면 사람들 모여 있을 거야, 아마. 손에 벽돌 한 장씩 쥐고 있을 거야. 너 가서 말씀 듣고 피 터지도록 맞아 죽어라. 이번 일에 대해 엄마는 모르는 일로 하겠다.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렇게 해서 불에서 나온 이 신명기 말씀을 우리가 성취하자.”
그런 부모가 있습니까? 교회 내에 없죠. 그러니까 교회는 엉터리입니다. 교회는 전부 다 엉터리예요. 위선자들이에요. 왜 내 자식은 돌에 맞아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도 되는데 왜 내 자식은 안 되는데요? 그 이유를 한 번 봅시다.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어야 되고 따라서 나한테 손해 보게 하면 나쁜 하나님, 내 고민을 들어주면 좋은 하나님, 하나님은 그래야 해. 왜? 그래야 나는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어.’ 이게 바로 인간들이 제조한, 조작한 가짜 하나님이에요, 이게.
인간들이 성경에서 이해하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성경은 인간이 이해하는 말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배후에 있어서 모든 성경 말씀을 인간들이 이해하는, 납득되는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해 버렸어요. 실컷 교회 다니고 나중에 도착해 보니까 지옥이에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너무 절망적이잖아.” 절망이라는 단어도 보세요. 인간은 절망이라는 단어를 만들 자격이 없어요. 존재하는 자체가 절망이에요. 절망다워야 하고 낙담해야 해요. 그런데 배후에서 악마가 ‘너는 절망하면 안 돼. 너는 희망을 가져야 하고 불행하면 안 돼. 늘 행복해야 해.’ 이걸 악마가 평소에 군불 때듯이 계속 사주를 해 왔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그게 정의롭고 그게 올바른 해석이라고 같은 인간들끼리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이게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 그 자체가 허무해야 된다는 것, 이게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1장 10절에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보면 마치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주님의 영존과 대비시킬 때 주님의 영존을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멸망해야 되고 망해야 되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요. 따라서 여기서 결론은 뭐냐? 성경은 주님을 위해서 난 책이에요. 요한복음 5장 39절,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지 인간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게 아닙니다. 멸망할 거 왜 증거 해요?
따라서 구원은 주님의 구원뿐입니다.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주의 구원의 증인을 성도라고 해요. 성도는 구원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에요. 누구의 증인, 다시 말해서 나의 증인은 끝났어요. 나의 증인은 끝났어요. 나 예수 믿어서 천당 간다? 그건 나의 증인이에요. 우리 그러지 맙시다. 그러면 안 돼요. 정말 말리고 싶어요. “목사님 저 구원 받았어요.” 제발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성경은 당신 구원 증인 하라고 성경 준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나의 증인.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증인에서 꿈쩍도 안 해요. 엉덩이가 무서워서 꿈쩍도 안 해요. 아무리 복음에 대해서 설명해 줘도 자기 증인 됨을 포기할 생각을 안 합니다.
자 이 문제를, 이 격차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줄이는가? 계속해서 사건을 투입하면서 격차를 줄였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폭탄이에요. 이스라엘이 언제 이스라엘로 그 가치가 드러나냐면, 그 내부에서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런데 이방 민족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의 가치가 확 드러납니다.
숫자 얼마 되지도 않아요. 저쪽이 숫자가 많아요. 누가 봐도 이스라엘의 패배입니다. 그런데 전쟁하면 이스라엘이 이겨요. 심지어 어디까지 이야기하냐면 시편 8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편 8편 1절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해놓고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절에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무슨 칼질을 하고 그들이 무슨 활을 쏩니까? 하나님의 전쟁 방식은 전혀 힘이 없는, 도대체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 배후에 악마가 사주하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거는 백 프로 못 이긴다.’라는 그것을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앞장세워 다 이겨버렸어요.
그건 뭐냐? 이스라엘에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증인이 됐다는 조건 하에 이겨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 불속에서 나온 그 말씀이 이 세상에 퍼져 나가면서, 확장되면서 말씀이 있는 쪽, 그걸 언약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언약이 있는 쪽 이스라엘과 언약이 없는 쪽, 비 언약, 이방 나라, 우상 그쪽과 어느 쪽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고 없는지를 구분하는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이방 나라가 나름대로 소박하게 잘 살죠. 인간 대 인간의 마음으로 잘 사는데 막상 이스라엘과 붙어보니까 그들은 의미 있음이 아니라 의미없음으로 완전히 들통나는 겁니다, 이방 나라가. 문제는요, 사건은 터졌는데 이스라엘이 이 사건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분명히 유월절 피로서 애굽에서 나오게 했거든요? 분명히 하나님이 피 발라라, 해서 피 발라서 나왔는데 나와 놓고 그들이 애굽인 됐어요. 왜? 피는 발랐는데 자기 내부에는 이 사건의 의미가 스며들 수가 없었어요. ‘아, 하나님 참 고맙네. 감사하네. 하나님 덕분에 살았네. 앞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참 이 나라가 나중에 왕의 나라가 되겠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그쳐요.
“예수님의 피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믿습니다, 했는데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질 않아요. ‘참 고맙네. 나 같이 죄 많은 인간,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해주니까 내가 이 은혜를 평생동안 다 갚으리오.’
주께서는 “갚지 마, 갚지 마. 너는 갚을 잽도 못 돼.” 네가 지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냐를 증거 한 게 아니고 주님 덕분에 나 천당 가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증거 하는 거예요. 이런 꼼수? 안 통합니다.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끼리는 통하죠. 교회끼리 통하는데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어딜, 누구를 이용하려고요? 어디 예수님 이용하려고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내부 전쟁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처럼 내부 전쟁에 들어가는데 내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세웠던 것은, 사무엘 상 8장에 보면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5) 드디어 자기의 악마적 본심이 슬슬 기어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왕이라 하는 것은 심적인 아버지를 이야기합니다. 국가의 아버지, 어버이, 아버지. 아버지를 달라는 것은 나는 권위가 있어야 그 권위 밑에서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큰 교회 가는 게 안정감이 있어요, 개척교회 가는 게 안정감이 있습니까? 어느 교회 당회장이 아버지 같아요?
교인 한 열댓 명 있는 교회 아버지하고, 5천 명 교인의 아버지하고 어느 것이 더 아버지다워요?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원했습니다. 정신적인 아버지를 원했어요. 왕을 원했습니다. 저 이방 민족이 우리보다 더 강대하고 더 잘사는 것은 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있기에 그렇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줄 수 있는 것, 꽉 잡아줄 수 있는 것은 어른이 어른다울 때 그게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사람은 힘 있는 곳에 기대고 의지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왕이 뭐냐? 사울 왕이었습니다. 왕을 달라는 그 순간부터 드디어 인간 나라와 말씀은 갈라지기 시작해요. 분리됩니다. 그다음부터 인간들은 왕을 보면 우리가 왕 하나로 단합하고 협력해서 우리도 굳건함을 보이자, 이런 식으로 나간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래요.
우리는 다른 나라 못지않게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이 나라를 꽉 잡아야 돼요. ‘요새 국민의 힘 히마리가 없어. 지금 민주당은 단일체제로 꽉 잡고 있는데 국민 힘이 뭐 하는지 몰라.’ 꽉 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살기 좋은 나라의 일원으로서 좀 마음으로라도 안정감을 얻고 내 후손에게 이 나라를 물려줄 수 있는 그런 희망찬 사회를 원합니다.
그럴 때 등장한 것이 뭐다? 선지자예요. 호세아 13장 11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즉 ‘정신적인 지주? 주도권을 가진 영웅? 나보다 더 위대한 사람 밑에서 줄서기? 그래서 네가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갈라지면서 다윗언약을 통해서 주님 주신 지도자가 있어요.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을 보내신 거예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그것이 사기인 것을, 사기라는 사실을 사전에 먼저 언급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낸 예수와 인간들이 자기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 자기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 믿는 예수하고 완전히 상극이고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믿고 싶어서 골라잡는 예수, 그 예수는 마귀가 만든 예수에요. 가짜 예수입니다. 교회가 지어낸 것이 가짜 예수밖에 뭐가 있어요. 다 인간들만 모였는데 인간들이 모인 곳에 가짜만 나오지 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 위로받고 싶습니까, 생활의 안정을 원하십니까?” 뭐 이런 것. “가정에 우환이 있습니까?” 여기까지 가면 이제 점장이 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왜 원했는가? 자기커버용이에요.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왕,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왕이 있으면 우리가 부족해도 그게 커버가 되잖아요. 그런데 나를 커버해서 뭐할건데요? 선지자는 수사요원입니다. ‘보자, 보자. 악마가 어디서 활동을 하는가?’
하늘에서 파견근무 하는 수사요원은 우리의 일상생활, 이스라엘의 일생생활 세세한 곳에 파고 들어와서 악마가 어디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다 끄집어내는 그 일을, 악마의 행적을 찾아내는 일을 바로 선지자가 했던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는 욕 직사하게 얻어먹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가 그 사명을 멈출 수가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너희는 이미 도망칠 데 없는 범인이다. 도망칠 데가 없다는 거예요.
이거 하나 믿었어요, 선지자는. 백날 피해봤자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16절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이게 가려집니까? 가려지지 않아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어떤 것도 두꺼운 바위산으로도 가리지를 못합니다. 17절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게 예수님의 재림이지요. 재림할 때까지 계속 인간세계는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이기는 방법은 뭐냐? 성경을 안 보면 되잖아요, 성경을. 성경 안 보면 되는 거예요. 교회는 나오되 성경 안 보는 거예요.
예레미야 36장 21-23절에 보면 여호와김 왕이 이런 짓을 했어요.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예레미야가 서기관 바룩을 시켜서 기록한 두루마리를 왕이 여후디라는 관원을 시켜서 읽게 한 거예요.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고 읽으니까 22절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을 주게 되면 “그래? 그랬어? 칼 가져오세요.” 해서 칼로 죽 재서 화로에 던지면서 또 “그래?” 또 죽 잘라서 휙! “신명기? 신명기도 가져와” 해서 불에다 휙 집어넣습니다. 레위기, 집어 넣어버려요. 내 앞에서 성경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 여호야김 왕이 약간 미쳐서 그랬다고 하지만 우리는 안 미쳤어요? 우리도 왕을 섬기지 않아요. 내가 왕이 못되니까 왕한테 의지하는 척을 하지 내가 권력과 돈이 있으면 내가 왕이 되지요. 우리는 작은 왕들이에요 전부다! 어떻게 내 앞에 감히, 신 자기가 뭔데 감히 나에게 지적질을 하느냐, 그 말이지요, 나에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는데. 교회 오든 말든.
‘나에게는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있고 윤리 도덕이 있으니까 내가 알아서 바르게 살아서 진짜 천국 가면 하나님하고 한판 할 거야. 바르게 살았다고. 나는 이런 주의야. 내가 이런 주의자야. 그런데 내 앞에서 성경을 논해?’
교황이 며칠 전에 선포를 했습니다. 모든 세계의 각 교회 신부들에게 명령을 했어요. 설교(강론) 8분을 넘기지 말라고. 뻔히 다 아는 것 뭐한다고 50 여분씩 설교를 하느냐. 8분을 넘기지 말라. 윤리 도덕적으로 해서 7분만 하라는 거예요. 인간은 선하니까, 인간은 착하니까 낌새만 줘도 알아서 잘 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바로 악마에 의해서 하나님도 아닌 것을 하나님, 예수도 아닌 것을 예수님, 성령도 아닌 것을 성령, 복음도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유포를 하는 이유가 뭐냐? 그래야 교회가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돼요. 교회는 고객들이 마음이 편치 못해서 왔어요. 그리고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보험 들어놓듯이, 무슨 생명 보험 들어놓듯이 온 거예요, 그냥. 관심 없어요. 자기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 고객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무슨 교회가 남아있겠어요.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또 너무 교회에 태만할까 싶어서 행함을 집어 넣어가지고 ‘봉사하면 상급 줍니다’ 이렇게 붙들어 매서 봉사하게 하고 교회 키우고 그 짓 하는 것이 교회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짓을 이미 이스라엘이 다 했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다 했어요.
인간들은 알아요. 교회가 되든, 재벌이 되든, 회사가 되든, 어떤 직장이 되든, 학교가 되든, 어떤 단체든 꽉 잡을 지도자가 있어야 이 단체가 유지된다는 그것을 상식적으로 압니다. 어떤 영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큰바위얼굴. 자식이 자기 잘못한 것은 모르고 아버지를 탓하고 있어요, 아버지 탓. 아버지가 나 어릴 때부터 행패를 부려서 내 인생은 이렇게 조졌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탓을 하면 아버지 탓, 왕 탓, 아버지 같은 어떤 권위자, 잘되면 자기 탓이고 잘못되면 권위자 탓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천국 백성은 어떻게 만드는가? 모든 인간이 성경 볼 가치도 없고, 성경 봐도 못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 뜻에 반대하는 것만 튕겨져 나오는 그런 인간들은 주께서는 천국 백성 어떻게 만드는가? 에베소서 2장 12, 13절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시작을 언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언약.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이스라엘 속에만 유일하게 선지자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폭탄입니다. 미리 세상을 폭파시키는 폭탄이에요. 수사요원들입니다. 그 수사요원들이 와서 이스라엘 자체를 폭파시켜 버렸어요. 멸망시켰습니다. 멸망시킴으로써 남는 게 뭐냐? 언약이 남았어요. 그동안 언약이 보여주는 것과 이스라엘이 구원받으려 하는 그것과 상극이 되어서 이게 충돌을 일으키니까 바깥에 있는 껍질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그 선지자 중의 마지막 선지자가 누구냐?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특징은 자기가 메시아를 소개하는 게 아니고 메시아가 먼저 자기를 소개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 시대는 이 땅에 구원자와 선지자가 같이 와서 선지자는 눈에 보이고 메시아는 나중에 뒤에 와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요 1:30)고 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와서 뭘 하느냐? 모든 것이 평탄케 해요. 평탄케. 어느 정도로 평탄케 하느냐? 물속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물세례입니다. “들어가!” 풍덩! 다시 말해서 언약으로 죽은 자만이 언약을 방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언약으로 죽은 자만이. 세례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언약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진즉에 죽은 자에요. 우리의 진짜본성, 불심판 받아 마땅함을 세례요한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보여주는 것은 뭐냐? 그냥 기껏 물속이에요. 물속에 집어넣습니다.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선지자인 동시에 구원자입니다. “세례요한! 물에 집어넣었어?” “예” “어떻게 집어넣었어?” “죽으라고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다 죽겠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십자가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습니다. 그게 강도예요. 십자가에 집어넣어서 “너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해.” 그 속에 집어넣고 그다음에 성령을 통해서 그걸 살려주지요. 왜? 왜 집어넣습니까? 나는 끝까지 나 잘남의 증인 되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것은 물속에 집어넣는 정도 가지고 해결이 안 돼요. 심판을 받아야 돼요.
십자가에 죽고 그다음에 다시 살려주니까 그다음부터는 뭐냐? 예수님의 증인 된 거예요. 이걸 누가 먼저 했는가? 제자들이 그 코스를 밟았어요. 예수님 믿고 천당 가려고 생각하다가 다 도망갔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어요,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가 제자들 입장에서는 뭐냐? 제자들로서는 나를 죽이는 사건이었어요. 화들짝 놀라고 다 도망갔어요. 3년 동안 따라다녔어도 소용없습니다. ‘나 살래. 나 살고 싶어요. 이대로 죽기는 싫어요.’
다 도망갔지요. 도망가서 숨어 있을 때 주님 찾아옵니다. 성령과 더불어 찾아와서 성령 받아라, 하시면서 “내가 이야기했지? 이야기했어, 안 했어? 선지자의 말대로 내가 살아난다고 했어, 안 했어?” 다그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서 비로소 선지자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지요.
그동안 주님께서 나를 태어나게 하셨고, 주님께서 나를 말씀으로 지적해 오셨군요, 라는 것을 소급해서, 소급해서 알아요, 소급해서. 알고 이제부터는 나의 증인이 되어라.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차마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고 “주께서 아시잖아요.”라고 합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5-18)
“이제부터는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밟았던 전철을 똑같이 네 양도 밟게 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찾아와서, 십자가로 찾아와서 너로 하여금 이제는 너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 되게 하시는 그 일,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진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고 증명하는 것, 이게 성경 말씀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이 모든 것 때문에 그게 유혹거리가 되었고, 그것이 나를 도리어 망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 시간 스스로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말씀이 예수님을 위해서 증거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40624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나타남입니다. 그전까지는 눈으로 안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 재림의 취지는, 그동안 줄곧 인간이 승리했다는 겁니다. 인간이 주님에게 계속 승리해온 겁니다.
승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였던 취지를 인간들이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필요치 않은 존재에요, 인간세계에서. 인간 자기 생활에서. 예수님은 그다지 소중한 분이 아니고 없어도 되는 분이라는 취지를 끝까지 지속해나가게 되어 있어요. 누가? 인간들이. 인간들이 그러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말씀 안에는 원천이 들어있어요. 처음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이야기. 인간 쪽에서는 다 잊어버렸죠. 과거지사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 해가지고 지나가니까 잊어버렸는데 주님 쪽에서 안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고 하는 그것을 주님 쪽에서 잊어버리지 않았죠.
주님께서는 원천을 이야기하면서, 악마가 인간세계에 개입했잖아요. 이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인데요. 악마가 개입했던 그 사실에 대해서, 악마도 놀지 않고 쉬지도 않고 악마는 주무시지도 않아요.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해나가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해나가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한번 악마의 마음이 젖어들었는데 악마 자기가 자기 마음을 취소할 리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이미 자기 사람 된 걸 포기한다든지, 써먹을 대로 써먹었으니까 나는 이제 그만 써먹을래, 이게 아니다 이 말이죠. 악마가 계속해서 자기 취지를 밀어붙이니까 하나님도 거기에 따라서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이는데 하나님이 악마가 하는 것에 그냥 방치하고 밀어붙인다는 유일한 증거가 뭐냐 하면 어제 낮 설교에서 첫 번째 나왔던 핵심적 부분인 ‘이스라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아주 특이한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이.
그래서 이스라엘 언급하면서 제가 언급한 게 시편 8편 2절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 힘으로 이긴다는 것. 지금 이 세상에선 마귀가 이겼어요. 마귀가 이겼으니까 인간은 절대로 주님한테 지질 않아요. 항상 이겨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럼 누가 패배한 거예요? 하나님이 패배한 거예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어 어 어? 안 돼, 안 돼. 아악~ 안 돼! 그거 따먹으면 안 되는데…하고, 인간은 으싸! 헤헤거리고 했죠.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한 그 과실을 따먹었다는 말은 잔소리를 따먹은 거예요. 잔소리를. 어디서 우리한테 지적질이야? 그 지적질 자체를 따먹어가지고 이제는 지적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없어진 거예요. 그게 승리에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애들한테 잔소리를 하니까 애들이 두루마리 휴지로 선생님 입을 확 막아버렸다. ‘입 다물라 했죠?’ 하고 입을 막을 때 이건 누가 승리한 거예요? 아동들이 선생님한테 승리한 거죠. 이긴 거예요. 그런데 배후에서 누가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악마가 그런 짓을 시킨 거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게 등장했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시편 8편에 의하면 어린아이와 젖먹이임으로 이겼다고 되어있거든요. 권능을 행사해서 이긴 거예요. 대적을 이긴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신이…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무슨 힘이 있어요?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겐 누가 달려들어도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이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상황이 드디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나요. 적들하고 마주치니까 적들이 이상하게 패배해요. 이스라엘한테 이방민족들이 패배하는 겁니다. 숫자도 적고 무기도 변변치 않은데 왜 이스라엘이 이기고 적들은 그렇게 패배하느냐?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체가 오해를 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줬기 때문에 우리를 승리케 했다는 거예요. 이 승리가 주님의 승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로 자꾸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죠. 들어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이란 말씀 덩어리. 이스라엘의 특징은 주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지를 이 이스라엘 덩어리 자체가 두 개를 다 함유하고 포함하고 있다는 거예요.
두 개를 다 포함하고 있어서, 그들은 분명히 승리했으니까-애굽에서 나온 게 승리고 홍해 건넌 게 승리고 적들에게 이겨서 승리죠- 복을 받았잖아요. 이 복이 점차 뭐로 전환되겠습니까? 내부적으로 저주로 전환되는 거예요. 저주로. 그게 제가 언급한 레위기 26장 28절, 29절 보면 앞으로 너희 아버지는 너희 어머니는 너희 자식을 먹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든다. 필히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저주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말씀 안에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전체 인류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민족으로 등장한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을 직접 대면했던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저주받는다는 말은 곧 인간들이 저주받는다는 뜻이에요.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을 하죠. 멸망하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둘로 나뉘어져요. 이걸 다윗 언약이라 했는데 다윗 언약이 되면서 나라, 국가죠, 국가와 말씀과 이게 갈라선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건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거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주신 저주와 하나님에 대한 구원이 예수님 안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이 먼저 앞장서서 보여준 거예요.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공통점은 둘 다 언약이 있다는 거예요. 다른 이방민족은 언약이 없어요. 그들은 언약이 없으니까 복이 뭔지 저주가 뭔지 그런 것은 없어요.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잘되고 게으르면 못되고 그뿐이에요.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복이 오고 무조건 저주가 온다는 그 특이성은 이스라엘만이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만이.
그러면 이스라엘은 율법 지키면 될 게 아니냐? 우리 편하게 생각하기를, ‘아니 그들이 율법 지키면 복 받는다며? 그럼 복 받기 위해서 율법 왜 안 지켰어?’ 했는데 그 율법 자체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에요. 율법을 지키려면 어떻게 지키느냐? 관점이 하나님 관점으로 바뀌어져야 지켜져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 자기가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거예요. 나 잘되기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실컷 율법 지켰는데 와보니까 저주라. 어디서 잘못되었어요, 도대체? 그래서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이 누적되면서 그게 말씀 덩어리로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되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되돌아가고 선악과로 되돌아가서, 분명히 말씀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기대했고 천국을 기대했더니만 결국 지옥을 가게 되는 이 사태, 이 사태가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된 건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가 그걸 발견할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기가 자기 구원을 대처하려고 했던 그것이 잘못이었던 겁니다. 내 구원을 내가 대처해서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이 시도. 내가 말씀 지키면 구원 받겠지. 그럼 말씀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 믿으면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것도 포함되어 있겠죠. 어쨌든 간에 말씀은 주어졌고 지키고 안 지키고는 누구 손에 달렸다? 내가 결정하기에 달렸다는 것이 이스라엘 통해서 이미 그것이 실패로 끝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실패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예수님 안에 저주도 있지만 여기에 뭐도 함축되어 있어요? 복도 함축되어 있어요, 복이. 복이 함축되어 있다고요.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에게 준 언약,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공통점이 언약이라 했죠, 언약의 성취자 주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보내서 성취케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성취하실 때는 인간하고 상대하신 게 아닙니다.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악마와 상대해서 언약을 이뤘던 겁니다.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따라서 악마와 상대하기 때문에 인간들 너희는 여기서 손 떼라. 패스. 너희는 건드리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서 누굴 겨냥하는가? 인간을 통하되 겨냥하는 것은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를 겨냥해서 말씀을 줘버리는 거예요.
악마는 또 비겁해가지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누굴 앞장세우느냐? 인간을 앞장세워버려요. 인간을. 말씀을 주니까 지켜야 된다. 지키면 지킬수록 너는 잘된다. 그런 단체를 제가 뭐라고 했어요? 그런 단체를? 교회. 교회의 특징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에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교회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드러내요. 남한테 미움 받기는 싫어요. 그리고 남으로 인해 억울함 당하는 것도 싫어요. 그리고 남한테 인정 못 받는 것도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를 누가 다 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혼자 다 겪었어요.
이게 싫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나를 지켜줘야 좋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인데 나를 안 지켜준다는 것은 나쁜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을 난 선택하지 않겠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테니까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걸 지켜 달라. 이런 주고받는 거래가 형성되는 곳이 교회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악마를 겨냥하는 거예요. 악마를 겨냥하기 때문에 악마를 겨냥할 땐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을 다시 봅시다.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여기서 인간들이 주저 없이 내세우는 게 뭐냐? 우리에게 왕을 달라. 왕을 달라. 이방나라에 다 왕이 있듯이 우리에게 왕을 달라.
왕이라 하는 것은 권위성이에요. 권위성. 하나의 권위성 아래 마음을 하나로 할 때 우리는 힘을 집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안정적인 이스라엘 되고 그 속에서 우리 정서도 마음도 안정을 얻겠다는 거예요.
그럼 이 왕, 왕을 원할 때 이미 하나님 언약과는 헤어졌어요. 헤어지면서 이 왕을 공격하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누굽니까? 선지자. 선지자 등장하면 똑같은 원칙이 작용돼요. 선지자가 이기겠어요, 그 당시 왕이 이기겠습니까? 왕. 왕이 이겨요. 선지자는 죽어요. (선지자는) 계속 죽어나가면서 (인간은) 계속 이겨나가요. 인간에게 희망을 걸고 계속 나갑니다.
쭉쭉 계속 나가면서 그들은 희망적인 메시아까지 나가요. 희망적인 메시아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을 좌절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좌절시켰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에,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이 예수님의 발언이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어요.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예수님 앞에 등장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속성이라 하는 것은 이미 악마가 넣어줬기 때문에 내 속성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마귀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냥 가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을 죽이고 선지자 죽이고 사도 바울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어디까지 죽이는가?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계속 그들은 승리하고 또 승리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재림을 주신 이유가, 너희들이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줬건만 왜 실패를 안 하나 이 말입니다. 하나님 뜻은. 그 많은 실패의 기회를 줬잖아. 그러니까 성도들한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실패의 기회를 성도한텐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도 인간이기 때문에 눈만 뜨면 이걸 생각해요. 목표, 목적, 기대, 희망, 소망.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계속 이거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이걸 좌절시킨다고요. 이걸 좌절시키니까, 자신들은 목표, 목적이 있어야 자신들은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데, 이 세상 자체가 승리자 그룹이 되어야 되거든요,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데 좌절시키니까 결국 인간에게서 나오는 말은 뭐냐 하면 ‘이러려면 나 성경 안 볼래.’
그럴 때 주의 뜻은 뭡니까? 박수 짝짝짝. 그 마음이 바로 본래 네 마음이다 이 말이죠. 네 마음. 그 마음이에요. 여기서 요약 끝내도 괜찮겠죠? 그 마음이에요. 말씀을 주는 것은 사람들이 절대로 말씀을 안 본다는 것을 발각시키고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지킨다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죠. 말씀이 와서 우리를 전부다 해리시켜요. 그래서 경상도 사람 외에는 못 알아듣는 말을 했죠. 신기. 신기 알아요? 신기? 도시락 반찬에 해초 있잖아요, 해초. 짭쪼름해서 실 같은 해초. 파래. 옛날엔 파래를 도시락 반찬으로 썼다니까요. 이걸 하나하나 째는 거예요. 찢어서 밥하고 같이 먹어요. 짭쪼름해서. 옛날엔 돈이 없어서 그런 거 먹었어요. 이걸 하나하나씩 찢는 거예요. 쥐포 찢듯이 해리시키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죠. 추억의 책장을 넘기고 거기다 책갈피해서 낙엽 다 집어넣는 거. 말씀이 뭐냐? 뒤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째는 겁니다. 이런 것도 네가 선악과 따먹은 결과야. 이것도 선악과 따먹은 결과야. 말씀은 원천이니까 그걸 하나하나 다 째는 겁니다.
째버리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해리, 해체시키면서 우리가 예수의 증인돼요. 나의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어제 결론이었습니다. 나의 구원의 증인,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 구원의 증인.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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