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 끊는 멜기세덱
2024년 7월 1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5:5-10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멜기세덱는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왜 이런 사람이 필요한가요? 그것은 모든 인간의 기본 족보는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고 시작한 날이 있고 생명의 끝이 있는 자,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시작이 있다는 말은 이는 곧 인간에게 죽음이 필연적이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처음부터 인간들은 잘못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 수정이 불가능한 처지에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더 나아가서 인간은 아예 자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 버립니다.
그것은 인간은 육신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자기에게 식량을 주는 자에게 철저하게 의존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망으로 형상된 사회가 현실입니다. 이것이 ‘신체의 보존 본능’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식량을 큰 집단이 무엇일까요? 국가입니다. 국가란 개인들의 집체화입니다.
따라서 국가 밑에서 개인은 진정하고 영구적인 자기 삶이란 성립되지 아니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동안 개인을 위해 살아온 지난날은 다 잊어야 합니다. 소용없습니다. 이처럼 신체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국가에 종속됩니다. 국가란 소소한 악들을 처리하기 위해 더 큰 악으로 등장된 단체임니다.
국가는 자처합니다. 정의를 구현하고 성스러운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들 끼리의 주장이고 옆의 국가에게는 통하지 않는 주장일 뿐입니다. 전쟁을 벌리는 이유는, 자기 정당성 때문입니다. 지상에 살아남아 마땅할 정도로 옳고 정의로운 단체이기에 이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인간 국가는 전쟁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인간 세계를 형성하는 환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거대 국가에 대들었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5-37)
이 대듦으로 인해 졸지에 이 세상 나라들은 예수님이 하실 일에 말려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이 구약의 말씀은 오늘 히브리서 5장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의 족보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 있어 멜기세덱 족보로의 이전이 되어야 구원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아담의 족보의 문제점이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모든 인간들은 신체를 갖고 있으며 이 신체들은 그 전의 죄의 속성을 반영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방식입니다. 여성성이 먼저이고 그 여성성을 구체화하고 현실화된 것이 여자입니다. 여자가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 여성성이 여성이라는 신체로 구현한 겁니다.
시편 110편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원수’는 아담의 족보에서는 미처 드러나지 않고 감추게 됩니다. 즉 모든 인간 대 인간들의 대화들을 결국 돌고 돌다가 “그래서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데?”로 마감됩니다. 자신을 좋게 보고 자신이 이 세상에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확인해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확인이 되었으면 말로 그치지 말고 식량 내지는 돈을 달라는 요구성이 밑에 깔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신체성으로 터져나오는 죄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성도, 곧 멜기세덱 반열에 속하게 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남은 인생으로 자신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라는 겁니다.
멜기세덱 반열 안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그동안 인간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반열입니다. 아담의 반열에는 이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아담의 반열에 속한 자를 멜기세덱의 반열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 자신부터 죄있는 육신의 끈덕짐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을 함몰시키기를 원했던 겁니다. 인간들의 육신은 뭘 지켜내고 악한 것을 피해 갈 수 없는 성격의 육신이 아닙니다. 죄를 지적하는 성경에 대해서 도리어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혈통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혈통을 배제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혹은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5-17)
모든 육체를 통제하는 최고 기관인 국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드시므로서 남겨진 것이 바로 ‘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피가 죄를 씻는 보배로운 피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멜기세덱의 존재는 아브라함의 혈통 보존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하늘이 제사장을 위한 전쟁이었기에 아브라함는 결고 자기 구원을 위한 전쟁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존재 노선 자체를 드러내고 거덜내는 전쟁, 이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의 현재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긍휼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런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히브리서 5장 5-10절(혈육 끊는 멜기세덱)240714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5장 5-10절입니다.
히브리서 5:5-10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그 결과가 멜기세덱의 반열을 쫓은 제사장, 이런 결론으로, 열매로 딱 맺어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따르고 구원받는 성도는 지금의 우리가 육체로 받았던 족보에서 벗어나 멜기세덱의 족보에 들어가면 구원이 확정된 겁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 인간의 죄 된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멜기세덱의 반열에, 그 족보에 올라갔는가, 그 과정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심으로서 구원받은 자도 그 경로를 따라서 멜기세덱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가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열이라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5장, 6장, 7장, 계속해서 꼭 알아야 된다, 라고 이야기한 것이 12절에 나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초보와 장성한 자의 차이점이 뭐냐? 멜기세덱의 반열이 뭔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이 된다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반열, 족보가 뭐냐? 그건 혈통이 없는 거예요. 멜기세덱은 가족이 없고 혈통이 없습니다. 기존의 신체에서 신체로 연결되는 그 족보 노선에서 벗어난 족보가 멜기세덱의 족보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가 기대해서 ‘나 이제는 이 씨 족보 버리고, 권 씨 족보 버리고 나는 멜기세덱의 족보에 따를래.’ 만약에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기의 족보, 자기의 혈통, 자기의 육신을 무슨 수로 버릴 겁니까? 버리는 어떤 재주가 있습니까?
인간은 육신을 못 버리게 되어있어요. 그것은 인간의 육신의 본성이 나의 결심보다 더 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자는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여성성이 여자를 배태한다, 형성한다, 영글어 낸다, 만들어내는 거예요. 남성이 남성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남성성이 남자라는 구체화 된 그런 신체를 영글어 내요. 만들어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여성다움 때문에 여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남성다움 때문에 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속성이 먼저고 그다음에 인간은 그 속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이 땅에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체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 신체를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자꾸 생각하지 말고 이 신체는 신체 이전에 어떤 속성을 위하여 우리가 이 신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걸 생각을 해야 돼요. 이 성경은 거기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너는 네 족보에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아담의 속성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창세기 5장에서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람이라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냥 육체, 신체란 말이죠. 신체하고 사람하고 차이점은 뭐냐?
신체란 자기에게 식량을 주는 사람에게 의존적이에요. 개 한 번 보세요, 개. 개라는 신체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누가 나에게 사료를 주는가? 꼬리 흔들면서 따라가게 되어있어요. 그럼 개에서 약간 발전해서 어린 자식들 생각해보세요. 어린 아들과 딸, 걔들의 어릴 때의 사고방식은 온통 누가 자기에게 과자를 사주나, 누가 내 입맛에 맞는 밥을 해주는가, 철저하게 의존적입니다.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누가 나에게 월급을 주느냐, 누가 나에게 돈을 갖다 주느냐, 철저하게 의존적이죠. 그 의존적인 관계망으로 형성된 세상에서 우리는 못 빠져나오는 게 아니고, 아예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지요. 왜? 이 신체가 이미 물들었는데 신체는 자기 보전 행위에 물들어버렸어요, 내 신체 보전 행위에.
그러니까 이런 신체가 자기를 보전하는 행위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에게 식량 주고, 밥 주고, 돈 주는 사람을 추종하고 따라가게 되어있어요. 오늘 본문 5장 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순종한다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이 혈통과 신체는 자기에게 양식 주는 사람에게 순종하게 되어있어요. 이미 그거는 굳어졌어요.
그러니까 멜기세덱의 반열에 들어가려면 아담의 노선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아담의 노선에 속한 신체는 자기를 먹여 살리는 사람에게 자진해서 고개 숙이고, 거기 얽매이고 싶어 환장한 그 신체가 어떻게 자기 신체를 포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순종이라는 건 이미 굳어졌어요. ‘내 신체를 보전하는 자에게 순종하겠노라’ 끝났어요. 그 신체로 굳어졌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벗어났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환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 인간의 신체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환경이 있어요. 그 환경에 대해서 우리는 그동안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환경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 되는데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아는 방법 중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홍상수 감독이라는 영화감독이 있어요. 지금까지 한 이십몇 편의 영화가 있는데 그 사람 영화를 보면, 돈을 억수로 들이지 않았어요. 그냥 테이블 놓고 술 마셔가면서 또는 담배 피워가면서 자기 영화판에서 노는 사람들 그 이야기 하면 영화 끝나요.
그러니까 홍상수 감독 영화가 흑백 영화도 많은데 그 많은 영화들 가운데서 <강원도의 힘>이라든지 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보게 되면 모든 이야기가 대화로 시작해서 대화로 끝나요. 그런데 그 많은 주제들, 대화가 돌고 돌면서 결국 어디로 돌아가느냐면 이겁니다.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과 사람의 대화는 이걸로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이걸로 끝나요.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대화를 시도해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저 어떻게 생각해요?’ 좋게 생각해달라 이 말이에요. ‘나쁘게 생각하면 당신하고 안 놀 거야. 말도 안 할 거야.’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신체에서 내뿜어내는 그 모든 생각하는 주제가 다시 나 굳히기로 도로 돌아오는 대화로 모든 게 마감이 되는 겁니다.
이게 낯선 사람, 모르는 사람끼리 그냥 술잔 나누며 하는 대화도 마찬가지지만 결혼해서 수십 년 지난 소위 나이가 70, 80 넘어가면서…, 팔십 되면 거의 대화도 안 해요. 대화도 안 하는데 가정에서 부부가 50년 동안, 60년 동안 살면서 대화하는 그 대화의 주제가 딱 하나에요. ‘그래서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아직도 나를 사람 대우하는 거야, 지금?’ 이 이야기에요.
성경 시편 110편에 보면 거기 멜기세덱 반열이 나옵니다. 이 멜기세덱 족보라는 것이 뭐하는 족보인지를 구약에서 미리 알려줬어요. 거기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하시면서 4절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담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모르는 게 있는데 혈통과 혈통, 신체와 신체의 노선, 인간들은 그것만 알아요. 그 족보만 안다고요. 아담에서 줄곧 내려오는 족보만 알고 있지 그 외의 족보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면서 그 족보 말고 다른 족보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멜기세덱의 족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멜기세덱의 족보라는 것에 들어가려면 먼저 우리가 우리에 속한 혈통적 족보가 어떤 환경 속에 있는데 그 환경이 시편 110편 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로 인하여 접수당한 환경, 이게 바로 아담의 세계, 현재 우리 혈통의 족보를 둘러싼 환경입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 보면, 12절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아, 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너는 환경의 자식이다. 여성성이 여자를 만들고 남성성이 남자를 만든 것처럼 죄성이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요, 나의 죄성이 자식들에게, 손자에게, 손녀에게 계속 대물림이 되는 거예요.
이 환경은 못 벗어납니다. 환경을 벗어날 수 없어요. 환경은 벗어날 수 없지만 그 환경의 내용은, 그 모습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건 알 수 있잖아요. 누굴 만나도 ‘나 어떻게 생각해? 나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나 이 땅에 살 가치가 있다고 그런 이야기 좀 해 줘, 좀 제발! 내가 술 사줄게.’ 이런 식으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그만큼 의미 있다는 걸 이야기해 줘! 안 그러면 나 대화 안 할 거야. 친구 안 할 거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서로 격려해주잖아.’
부부 좋다는 게 뭡니까? 바가지 긁으려고 부부 합니까? “당신 참 훌륭해. 좋은 사람이야.” 그런 이야기 좀 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 당신 괜찮은 사람이야.” ‘그걸 말로 끝내면 안 되지. 나한테 식량을 줘야지. 나한테 배급표를, 돈을 줘야지. 나 취직 시켜줘. 돈 빌려줘.’
이 모든 인간의 대화는 뭘 모르고 있냐면, 하나님의 원수가 장악된 환경 속에 우리에게 나올 것은 죄 밖에 없다는 것, 죄만 나온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자꾸 피해가려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1장에 보면 1장 28절에서 32절까지, 좀 길기 때문에 후딱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무 지루하면 또 주무실 수가 있기 때문에 후딱 가겠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자기도 행하고 그 행한자도 옳다고 한다.
자, 이게 로마서 1장에 딱 나오게 되면 사람들은 이 로마서 1장을 보면서 ‘주님, 저 이 많은 죄에서 어떻게 제가 피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봐요. 이 성경은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를 묻지 말고 ‘왜 나는 못 피합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해요.
나오는 이 죄의 항목에서 안 걸릴 인간이 없고, 나는 이 항목에 걸리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피할 수가 없어요. 피하겠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에게 자기가 훌륭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훌륭함도 없어요. 여러분,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요, 세상이 어떻게, 악마가 어떤 식으로 인간을 혼란케 하고, 전부 다 정신병자로 만들었고, 세상이 어떻게 인간을 미친 자들의 집단으로 만들었는지를 여러분 뉴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범대학의 21살 먹은 여자가 대장암 말기에 걸렸어요. 자연치료 한다고 내팽개쳤다가 결국 21살에 죽었습니다. 죽고 자기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다 떼어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과 많은 주위 사람들이 “참 젊은 나이에, 세상에, 안타깝다. 참 안 됐다.” 이렇게 하잖아요.
젊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젊으면 피할 수 있어요? 참, 아니 3살, 4살 애는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지니고 태어났는데 뭘 죽음을 피해요. 또 어떤 사람은 20대인데 차를 몰고 가다가 무단 횡단하는 사람 있어서 그걸 피한다고 차를 몰다 보니 상가로 돌진해서 일하던 아줌마가 그 차에 치여 죽었어요.
죽음이 지배하고, 죽음이 가득 차 있는 세계에서 죽음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없죠.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 성으로 남자 만들고 여자 만드는 이유는 딱 하나에요. 살아생전에 우리가 내 죽음을 설명하라고 살게 하는 거예요. 내 죽음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도 같이 설명하라고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내가 죽어야 마땅함을 설명하라는 거예요, 교회 와서. 살려고 하지 말고. 안 죽는 게 이상하고 남 안 죽이는 게 이상해요. 나이 칠십 넘어 아직까지 엑셀 안 밟고 브레이크 밟는 게 아주 신기해야 돼요. 칠십 넘어서! 아직 70아 안 됐거든 노여워하지 마시고 칠십 넘어서 남 안 죽인 게 신기하다니까요. 언제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죽음을 설명하는 방식은 우리가 하늘나라까지 올라갈 필요 없어요. 왜? 주님이 이 땅에 먼저 오셔서 멜기세덱의 족보에 속한 분이 아담에 속한 분과 어떤 큰 차이가 나는지를 미리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봅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벌써 육체가 나오죠. 인간은 육체에서 육체로 전달되는 겁니다. 인간은 육체에서 육체의 본능 살고 싶은 자기 보전 본능에서 못 벗어나요. 그걸 염두에 두세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우리 같으면 ‘어차피 죽어봐야 부활시킬 건데 뭐 만만하게 편하게 살지.’ 이렇게 살면 되는데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린 그 이유가, 도대체 그 내력이 뭐냐는 거예요. 그건 바로 예수님이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인간은 육신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가, 육체의 본능에서? 심지어 그 육신의 본능에 대해서 예수님도 그 육신, 우리가 갖고 있는 똑같은 육신을 지니고 있을 때 육신, 육신에서 벗어날 때 심한 통곡과, 아픔과, 고난과, 하나님께 소원을 드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끈적끈적함, 그런 하나님의 원수, 악마가 잡아당김, 이게 만만치 않은 거예요.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성공으로 여기십니까? 예수님께 성공이라는 게 뭐냐?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는 게 성공이에요. 자기의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 쉽게 말해서 ‘집사님, 저 어떻게 생각해요?’ 거기서부터 벗어나는 거, 그 욕망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너 나한테 뭐 줄 거야, 말 거야? 안 줄 것 같으면 가 버려.’라는 데서 벗어나는 것, 자기신체, 존재의 보전 본능에서 벗어나는 것.
이게 그냥 수월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 마저 끈적끈적 한 거예요. 어떻게 고체 자아가 액체 자아가 되겠습니까? 자기신체와 결부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나 복음 안다, 나 자유다’ 그런데 배고픈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이게 생각만으로 쉽게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들이 생각할 때 여러분, 뭘 성공이라고 간주하고 뭘 실패라고 간주해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이 수십억 생기고, 가정이 화목하고, 온 가족이 다 건강하고, 자식들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고, 교회 잘 나오고 할 때 “아, 또 실패했어.” 이런 사람 봤습니까?
‘나 왜 자꾸 실패만 하는 거야? 왜 나한테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필요하지 않은 거야? 왜 나는 그게 안 나오지? 도대체 나는 어디서 실패한 거야? 아직도 나는 내 존재가 보전되는 거에서 자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만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이 육체를 언제쯤 버릴 거야? 이 육체를 언제 구겨서 갖다 버릴 거야?’ 그거 갖다 버리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거든요, 주님 입장에서 볼 때.
이거 백날 이렇게 생각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린 여전히 자기 육체에서 못 벗어나요. 벗어나는 데서 실패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환경이 중요합니다, 환경. 예수님께서 주신 환경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데 성도한테 해당됩니다.
멜기세덱의 반열에 있는 사람인 성도는 인생 자체가 실패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주님의 성공작으로 간주하게 돼요. 내 실패의 연속은 주께서 손대고 있다는 그 흔적으로 생각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깁니다. 자꾸 내 신체의 본능에 실패하니까 이것은 ‘네 신체 속에 있는 아담의 속성에 대해 이제는 믿음 두지 말라’는 뜻이에요.
신체와 결합된 이 죄에 대한 아담의 속성, 그걸 한꺼번에 일거에 갖다버릴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주님께서 조성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게 반갑고 부럽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면, 감사가 모든 의심을 이깁니다. 내 인생 자체를 문제화시켜서 자꾸 끙끙 앓다 보면 뭘 더 해야 되고…, ‘이것도 모자라. 이걸 더 해? 저걸 더 해?’ 자꾸 어떻게 조몰락조몰락하는, 계속해서 내 인생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개선해 보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수리하는 정비공이거든요. 자기 자신을 개선하고 수리하는 정비공이에요. 내가 손 안 대면 손댈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조몰락거려 보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감사를 제공해버리면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하는 이 의심, 의심 자체가 새로운 족보 멜기세덱의 족보에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해당 사항이 없어요. 왜냐하면 멜기세덱 족보는 아담에게서 내려오는 혈통을 절단시켜 끊어버렸으니까.
히브리서 7장 3절을 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이 히브리서 5장인데 방금 7장을 본다고 했잖아요. 중간에 6장을 뛰어넘었어요. 6장에 뭐가 있냐면 초보자들은 멜기세덱을 모르고 장성한 자만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안다고 했으니 제가 여러분들을 장성한 자들로 치고 7장으로 바로 넘깁니다. 이해 안 되거든 다시 5장 오시면 되니까.
7장 3절에 보면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게 멜기세덱입니다. 7장 1절의 멜기세덱.
그러면 여러분 보기에 ‘왜 족보가 없어야 되지? 왜 아비가 굳이 없어야 되지? 어미가 왜 없어야 되지? 어떤 신체가 가족이 없고 조상이 없는 것과 내가 죄가 없어지는 것과 무슨 관련성이 있지?’ 이걸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그분의 계열, 그분의 족보에 들어가야 왜 우리가 구원을 얻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초보들은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어요, 예수를 믿으면.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해서 멜기세덱을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이 있느니라’ 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내용은 멜기세덱과 관련된 내용까지가 마감이에요. 멜기세덱과 같은 분이라는 것까지 연관해서 생각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게 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모르고 “나 예수 알아. 예수 믿을 거야. 구원받을 거야.” “예수님이 누구신데?” “몰라.” 그럴 수는 없는 거죠. 뜸 들일 것 없죠. 뜸 들이면 안 되죠. 멜기세덱의 족보는 뭐냐? 일체 우리의 모든 혈통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족보가 멜기세덱의 족보입니다. 이걸 ‘대표자 개념’이라고 하는 거죠.
대표자를, 머리 부분을 바꿔버리는 거예요. 아담의 머리 자리를 다른 마지막 아담, 예수님 머리로 바꾸는데 그 바꾸는 절차 가운데 예수님이라는 그 머리 바꿈의 실내용을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으로 채워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멜기세덱 그 제사장은 뭐하는 사람이냐?
이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전쟁에 관여하시는 분이에요. 인간의 전쟁은 육체와 육체의 전쟁입니다. 인간은 신체가 있기 때문에 자기 존재, 자기 보전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의 관계망,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자기 살고 싶어 하는 데 이상하게 이 세상은 소박하게 그냥 나 하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냥 가만두지 않는 세상이에요.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집체화 작업’이라는 거예요. 뭔가 개별적으로 있는 것을 하나의 집체, 단체로 결집시키는 작업이 일어납니다. 어디에? 국가 안에서 일어나요. 그게 바로 전쟁이에요. 인간의 모든 전쟁은 지금까지 개인이 쌓아놓은 업적을 미사일 한 방, 대포 한 방에 다 날려 버립니다.
끈끈한 가족 관계? 전쟁 일어나게 되면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 전부 다 군대 보내야 돼요. 이제는 애도 안 낳고 하니까 여자도 군대 가야 돼요. 뭐 빠지는 거 없어요. 전쟁 가면 죽은 목숨입니다. 국가 밑에서 나의 삶이라는 것은 최종적으로 보장 안 됩니다. 나의 삶이라는 것은 국가의 지배하에서는 영원히 보장되지 않아요.
그럼 국가 없애면 되지 않느냐, 국가 없는 데로 가면 되지 않느냐? 국가라고 하는 것은 왜 생겼느냐? 악을 징벌하기 위해 더 큰 악이 힘을 가질 때 나오는 게 국가입니다. 사소한, 소소한 악들, 옆 동네 깡패들, 정신병자들, 이것 때문에 힘들 때 경찰 부르잖아요.
그러니까 작은 악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더 큰 권력을 가진 악이 등장하는 이 내부적인 모순이 있는 거예요. 집에 불 날 때 바가지로 물 퍼부어도 안 꺼져요. 소방차 불러야 되잖아요. 그게 국가 기관이잖아요. ‘국가는 너를 지켜줄 테니까 국가가 필요할 때 너는 무조건 가정을 버리고 따라와야 돼’ 이런 거래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 아담에 속한 환경의 특징입니다. 아담에 속한 이 세상 환경의 특징은 국가별로 되어 있고, 그 모든 국가가 악을 지향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었고, 그 이스라엘 국가, 모든 이방 국가, 언약이 없는 국가를 징벌하기 위해 태어난 민족과 국가가 이스라엘이에요.
그 이스라엘 안에 있는 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를 치기 위해, 원수와 전쟁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앞장세워 전쟁을 벌려 나가는 거예요. 지금껏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태어나면 일단 가정환경이지요, 여기서 조금만 넘어가면 사회 환경이죠, 사회환경에서 조금 더 넘어가면 국가 환경이에요. 국가의 말을 들어야 소박하게나마 우리의 삶이 보장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했는가? 그 국가한테 대항했습니다. 누가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요. 국가를 들이 받아버렸어요. 요한복음 18장 35절 36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5장 9절에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 곧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라고 되어있죠.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라면 예수님이 먼저 어디에 받아버렸느냐를 알아야겠죠. 그 당시 국가에 정면으로 받아버렸어요. 국가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국가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은, 국가가 권력인데 거기에 머리를 박아 버리면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거든요. 베드로전서 1장 18-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절에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국가에 머리 들고 쳐서 박아 버려야 거기서 보배로운 피가 나오지요, 보배로운 피가! 국가한테 정면으로 들이 받아버려야 피가 쏟아지고 그 피, 바로 우리 죄사함을 해주는 보혈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보배 같은 피입니다, 보배 같은 피.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의 피 뿌림, 거대국가를 들이받아서 …, 본디오 빌라도가 어디 소속이냐 하면 로마 소속이에요. 다니엘에 의하면 마지막 짐승 소속입니다. 네 번째 짐승 나라의 소속이에요. 그 로마에 대해서 유대인들도 꼼짝 못 했습니다. 대들 것을 대들어야지 어디 거대 국가에게 대듭니까?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대들어야 피가 생기지, 대들어야.”보배로운 피가 생기지요. 이게 뭐냐?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는 눈이에요. 예수님은 심장이 두 개예요. 한 심장은 꺼져버렸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또 하나의 심장은 하늘나라 가면서 작동되었습니다. 다시 뛰었습니다. 두 개의 심장이 있다는 말은 두 개로 교감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백성과 상대할 때 죽는 심장 가지고 교감하고, 꺼지지 않는 심장 가지고 또 교감하고.
나를 따르는 자는 그 두 번째 심장이 네 속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 여성성이 여성을 만들고 남성성이 남성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속성이 오늘날 성도를 만들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피의 속성이. 그래서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성도된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증명하고, 증명이라고 보다는 설명하는 것,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나의 죽음도 덩달아 같이 설명해야 돼요. 나의 죽음. 나는 왜 육신이냐, 나는 왜 육신이냐? 로마서 5장 입장에서 우리가 설명을 해 봅시다.
로마서 5장 보실 때 여러분이 그냥 듣지 마시고 혹시 아는 사람이나 우연히 만난 사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뭐하러 오신 분이냐?” 혹시, 그런 사람은 없지만 혹시 묻거들랑은 로마서 5장을 압축한 복음으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뭐냐? 대표자 개념이에요. 대표자 개념이라는 것은 기차로 말하면 기관차가 교체되는 겁니다. 기관차 있고 객실이 있잖아요. 기관차가 맨 뒤로 가는 거예요. 기관차가 뒤에서 당겨버리면 첫 번째 심장을 가진 예수님이 기관차로 당겨버리면 예수님의 세계는 그 통곡과 아픔으로 자기 육체를, 육신을 자기 생애에서 버리는 거예요.
그것을 함몰시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이 세상은 예수님 몸을 버리는데 딱 적합한 환경입니다. 어떤 환경도 쓸모짝이 없는 환경은 하나도 없어요. 육신으로 태어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라는 환경은 여러분을 버리기에 딱 좋은 환경입니다. 나 자신을 개차반 만들 수 있는 멋진 찬스예요.
남이 나를 욕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고 내가 남보고 욕해서 괴로운 거예요, 내가 남을 보고 욕을 해서. 내가 남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환장해서 그래서 내가 망해야 돼요. ‘네가 어딜 내 자존심을 건드려?’ 보통 부부싸움 그렇게 하잖아요. “50년 동안 잔소리했으면 되었지 60이 되어도 잔소리를 하느냐! 고만해라. 많이 묵었다.”
아주 멋진 환경이에요. 내가 남에게 해코지를 당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남을 망하게 하는 환경이에요, 내가 남을 망하게 하는. 나 살겠다고, 내 의미 살겠다고 남을 밟아버리는 그 환경에서 “주여, 언제 저 데려갈 거예요?” 통곡과 간구와 함께 “언제까지 제가 이렇게 죄를 지어야 합니까?”
이 세상 전쟁은 어벤저스의 전쟁입니다. 힘과 그리고 고도의 기술로 장착된 영웅들의 세계지요. 그 영웅들의 세계에서 예수님, 멜기세덱의 반열에 계신 분의 육체는 뭐냐? 그 영웅들 잘났다, 하고 거기다가 자기 몸을 훼손시키는 겁니다. ‘가져가라, 가져가’ 그럴 때 그들은 좋~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죽일 때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뭐냐? ‘이게 바로 의다, 의, 외로움이다. 이게 바로 거룩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거였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스데반 집사 죽이는 현장의 책임자로 있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열심히고 그게 하나님의 의였던 거예요. 그런데 아까 본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나오지요.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에요. 이 세상 모든 왕들은 힘으로 군림합니다. 힘으로 통치하는 세계가 바로 왕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뭐냐? 제사로, 희생으로서 통치하는 왕, 그게 거룩의 왕, 의의 왕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을 통해서 지상의 민족들의 전쟁에 관여했다는 것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17, 18절 죽 나오지요. 17절에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는 했는데 뭐가 찝찝해요. 이상해. 이길 전쟁이 아니거든요. 개인적인 사병 318명과 약간의 동맹자들과 합해서 이겼는데 이것은 도저히 승리할 것이 아닌데 승리를 한 거예요. 조카 롯을 구출해 냈지요. 구출해서 돌아오는데 누가 나오느냐? 18절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 성경을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은 실존인물이고 실존인물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거예요.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라고 물을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 7장 3절에서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하느냐, 에요.
‘뭐야? 유령이야, 귀신이야? 뭐야? 누구야 너? 너 누군데?’ 실존인물입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의 소재지도 밝혀졌어요. 살렘, 예루살렘이지요. 살렘왕 멜기세덱이에요.
여기서 분명히 아버지도 어미도 있으니까 멜기세덱이 생겼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해야 돼요. 아브라함이 본인이 전쟁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전쟁을 할 때 어떤 기능으로 전쟁을 함으로써 전쟁하는 그 방식이, 아브라함이 전쟁했던 세상적인 방식, 힘 가진 자가 연합해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전쟁방식과 전혀 별개의 다른 방식의 인물인 살렘 왕 제사장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마중나오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은 이름만 멜기세덱이에요, 이름만. 멜기세덱에게 이름만 줬다는 말은 그 사람의 아비가 누구고 어미가 누구며,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 그것을 알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제사장이 다른 어떤 힘이 있겠지, 라는 오해를 하게 돼요.
방금 아브라함이 전쟁할 때는 힘과 힘의 마주침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힘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승리할 때 ‘누가 나를 도와줬다’고 생각할 거예요. 도와줬다, 할 때 인간은 필히 ‘내가 모르는 어떤 힘이 있어서 나를 도와줬다’라는 식으로 또 기존의 힘과 또 다른 힘으로 이렇게 연관해서 생각하는 그런 환경을 생각해요.
따라서 이참에 아브라함은 아예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환경 자체로부터 거덜나야 돼요. 이게 거덜나야 된다고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믿을 사람들이 아니지요. 로마서 5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전부 다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죄가 왔는데 이제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께서 대표자 예수님을 보내서 예수님의 의 한 사람의 의로서 이제는 죄 있는 우리를 은혜로,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의의 사람이 되게 했다. 끝!’ ‘그래서 뭐?’ ‘그래서 내가 구원받았다. 끝!’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족보를 못 버리는 게 돼요. 자기 육신에 대한 미련을 유지하게 되는 거예요. ‘아, 내 육신은 이런 식으로 구원되는구나.’ 아직도 자기 육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이제 구원받았으니 이 육신 가지고 뭘 해야 되는데 뭘 하지?’ 또 육신 가지고 어떤 활용도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설명이 여러분에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경은 전체가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되어있어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다. 왜? 사람은 육체기 때문에 자기 육체의 뜻이 개입되는 구원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이 개입되는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은 자가 없어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하는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즉 “이걸 알게 한 것은 네 혈통이나 육신의 어미나 아비가 아니다. 노선 바꾸자. 너의 노선으로 된 것이 아니다. 너의 노선은 끝났어, 끝났어. 그것은 잘린 거야.”
그것은 배제되는 거예요. 네 아버지 말고 내 아버지가 네게 알게 했다는 거예요, 내 아버지가.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나의 구원에 대한 기대, 욕망, 이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 중에 하나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게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내 아버지, 네 아버지 말고 내 아버지, 네가 모르는 내 아버지, 나만 아는 내 아버지가 너를 구원했다는 겁니다. 아까 한 말씀 다시 드리면, 성경은요, 내가 무엇을 피하면 구원되겠습니까, 가 아닙니다. 성경은, ‘도대체 나는 어떤 생각을 해도 왜 하나님의 원수, 구원되지 못한 자의 생각만 내뿜어집니까.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그 생각마저 하나님께 배제될 수밖에 없는 생각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고난을 받고, 통곡하고, 기도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예수님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 까불지 말라는 식으로 전달되지요. 너 입 안 다물래, 하는 식으로 전달되지요.
야고보서 2장 12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는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다시 말해서 ‘율법은 어느 인간이 쥐고 쥐락펴락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율법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서 나름대로 고유한 자유를 갖고 있다. 그 자유에 의해서 너는 이미 그 고유한 율법을 쥐지 못하는 자이기에 이미 심판의 대상이고 심판받았다.’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이미 심판받은 것처럼, 받은 것처럼, 이 아니라 이미 심판받은 자로서 살아라, 이미 심판받은 자로서.’ “제가 뭘 할까요?”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도 율법의 자유에 속해서 율법 지켜서 우리가 보상을 받는 게 아니에요. 긍휼도 긍휼을 주는 자기 임의대로 하는 거예요. 여자가 되어서 ‘나는 남자로 만들어주세요’ 하지 마세요. 여성성이 여자를 결정지은 겁니다. 남자가 되어서 여자가 되려고 하지도 마세요. 남성성이 남자를 만들었어요. 주님의 긍휼성이 긍휼의 대상을 만들고 주님의 심판성이 지옥 갈 사람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자유하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속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택할 것이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선택할 것이 없어요. 머리부분만 바뀌면 돼요, 머리부분만. 이 머리 잘라내고 머리부분만 멜기세덱의 반차로 해버리면 우리는 멜기세덱이라는 그 실존인물이 사실은 하나님의 제사, 예수님의 제사장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름만 빌려온 겁니다.
그처럼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배로운 피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우리는 긍휼을 입은, 긍휼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성경말씀은 결과를 가지고 설명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어라, 가 아니라 네가 이런 결과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하는데 네 행함을 원인으로 집어넣지 마.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그게 바로 악마의 생각이다.” 그냥 이미 결과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어딜 건방지게 거기에 끼어들려고 했습니까? 주께 순종하면 구원받습니까, 주께서 시키는대로 우리도 울면서 기도하면 구원받겠습니까, 하는 그런 아이디어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 마귀의 생각인 것을, 아직도 자기신체에 미련 두고 자기가 원하는 구원을 달성하려는 시도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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