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정성
2024년 6월 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4:1-3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1. Therefore, let us fear lest, while a promise remains of entering His rest, any one of you should seem to have come short of it.
2. For indeed we have had good news preached to us, just as they also; but the word they heard did not profit them, because it was not united by faith in those who heard.
3. For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He has said, " AS I SWORE IN MY WRATH,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although His works were finished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시편 95: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이 말씀은 인간 세계에서 필히 구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에 다 해당되어야 말씀이 성취됩니다. 이 말씀이 성취되어야 하나님의 안식, 곧 하나님의 자기 만족이 달성됩니다.
이런 안목은 성경을 인간이 자기쪽을 향하여 보면 결코 보이지 않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쪽으로 돌려주어야 비로소 파악되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이 성경 내용은 인간들은 스스로 그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할지라도 그 모든 행위는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안식을 목표로 움직이는 시스템 안에서 결정된 사실임을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바로 이 내용은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라는 내용입니다. 즉 그들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해야 비로소 창조의 취지가 살아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창세때부터 정해진 안식을 떠안게 하신 바가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는 안식할 수 있는 겁니다. 이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 내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하나님께서 창안 하시고 그 부정적인 요소에 하나님 자신도 참여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으므로서 하나님의 자기만족을 충족케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신 분이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중보자’란 ‘매개자’라는 뜻입니다. 매개자란 간격과 떨어진 거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매개가 없는 경우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 물건은 내 것이다, 혹은 저 아들은 내 아들이다’이럴 경우에 내게 속한 물은 매개가 필요없는 전적으로 나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이 궁해졌다고 봅시다. 그러면 자동차라든지, 반려견도 중고 개 시장에서 내다 팔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자동차와 나의 개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가 놓여 있음을 압니다. 분명히 나랑 너랑 하나라도 여겼는데 가난해져서 물건을 시장에 처분하면서 나은 세상의 뭐든지 돈을 ‘매개’로해서 살아가고 있음이 들통난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순수를 원합니다. 순수한 신앙이란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신앙입니다. 하지만 광야에 들어서게 되자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집단적으로 외쳤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 이 돌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 얼마나 합리적으로 합당한 결정입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의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항은 없습니다. 애굽이라는 땅은 줄곧 그들의 몸으로 온갖 것을 체득한 세계입니다. 반면에 모세가 언급하는 약속의 땅은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람들은 나름대로 평생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본인들이 무슨 판단을 그동안 해왔고 어떤 결정을 해왔는지 너무 잘 압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여태 살아있는 겁니다.
하지만 모세를 따를려고 하니 이는 과거 삶의 방식에 견주어보면 자진해서 ‘죽는 길’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세와 결별하자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 대신 한 장관을 내세워(민 14:4) 도로 애굽으로 가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틀자고 충동질합니다.
이들과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척은 해보되 항시 도로 하나님 안 믿는 상황으로 돌아갈 채비를 늘 차리고 사는 겁니다. 인간이 자진해서 사는 길 놔두고 죽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부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의 선지자 발람을 등장시켜 이스라엘 역사에 관여토록 합니다. 그는 모압 왕의 부탁을 받고 광야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외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도록 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케 합니다.
답답한 것은 고객인 모압왕 뿐만 아니라 발람 선지자 당사자입니다. 몇 번이고 저주를 퍼붓기를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발람 선지자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은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창조했다는 사실과 그 창조한 집단에 하나님 자신이 동참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람 선지자가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서 이미 축복으로 확정된 대상을 저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사람 중 일부는 모압의 종교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 24,000명이 죽습니다. 이 땅에서 들소같이 암사자같이 거칠게 없었던 이스라엘이 내부적으로 와해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민 24:8/25:8)
이는 발람 선지자가 발견한 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전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되심이 의해 복이 요지부동 변치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이,‘내가 원하는 신을 나는 믿겠다’는 우상숭배적 발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의 매개에 비-언약적 신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망하기 싫어서 신을 믿는 겁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매개자되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분입니다. 이 버림받음으로 인해 창세 전부터 확정난 하나님의 자기 만족 달성은 조금도 차질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된 자는, 이 예수님의 버림받은 사건으로 자신이 바꿔치기 당한 자를 말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곧 인격화 어린양으로 희생했음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위한 나’와 ‘하나님을 위한 나를 믿는 나’라는 딜레마에 십자가 사건이 매개가 개입해 버리면 이는 곧 이미 분명히 터져버린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 위한 그런 나를 믿는 나’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주님처럼 버림을 받는 겁니다. 이는 곧 말씀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로 바로 우리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즐겁게 인정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십자가 사건 안에서 새롭게 생산된 참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말씀대로 환경이 십자가로 쏠릴 때, 같이 합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히브리서 4장 1-3절(하나님의 부정성)240602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4장 1-3절입니다.
히브리서 4:1-3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1절부터 3절 중반까지, ‘약속이 복음이고 복음이 약속인데, 옛날 구약에는 약속이 있었는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과 믿음을 일치시키지 못해서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제는 복음으로 완성되었는데 우리도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한 것처럼 복음의 믿음에 화합지 않는 자가 되지 않도록 믿음을 가져야 된다.’라는 이야기를 1절부터 3절 중반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만 들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고 복음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화합하면,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복음을 믿으면 안식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뒤엎어집니다. 3절 끝에 보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너희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 창조할 때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1절부터 3절까지는 “잘해봐라. 내가 천국 넣어줄게.”라고 어떤 기회를 주는 것 같지만 3절 끝에서는 “해봐라. 안 될걸? 너희는 들어가지 못해.” 다시 말해 “이 복음에 대해 믿음으로 합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야.”라고 한 거예요. “아무도 그 믿음에 합하는 사람이 없게 되는 그 현상이 너 자신한테는 좀 실망스럽겠지만, 그러나 어떡하지? 이미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이미 그렇게 정해놓은 일을? 너희들은 복음을 못 받아들여. 왜? 내가 창세 전부터 그걸 정했으니까.” 그 이야기에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요, 이건 뭐 구약 이야기를 왜 했어요? “그들은 광야에서 그렇게 말씀을 줬지만 안 받아들여서 약속의 땅에 가지 못했다, 그런 것을 전철로 삼아 정신 차려서 너는 꼭 들어가라.”라고 격려 차원에서 주는 말씀처럼 여겼는데 그게 아니고 “그들 실패했지? 너희들도 똑같아.”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을 해석할 때, 3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이미 믿는 우리들은. 그러니 믿음에 화합할 것도 없어요. 이미 너희는 믿는 자, 믿는 자에게는 뭐가 적용이 되느냐?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하는 그 구약 성경 시편 구절을 이렇게 언급하신 이유가, 이미 믿는 자들은 내 믿음으로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채 우리는 그 안식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무슨 말인지 여러분, 상당히 난해하죠? 성경을 내 쪽으로 잡아당겨 해석하면 안 된단 말이죠. 성경을 거꾸로 주님 쪽으로 돌려드리고 그 결과를 우리가 받아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내게 유리하다고 잡아당기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성경 안그래도 찢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찢어져 버리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누구든지 구원을 시킵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요. 그걸 분명히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무엇을 결정했는지 우리가 놓칠 수밖에 없어요. 창세 전에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 내 속에 있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다. 천국 가는 사람 아니에요.
내가 새삼스럽게 뭘 설쳐서 뭘 했다, 가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결정한 바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저처럼 쉽게 하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 광야 때 실패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되고, 더 나아가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 지나고 애굽 지나서 그냥 스무스하게 약속의 땅에 넣어주면 되는 데 왜 일부러 광야를 통과케 하셨느냐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아주 괴롭히려고 작심을 하셨는지 왜 그 광야의 험난한 길을 걷게 하셨을까. 그 내용이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4장 3절에서 4절까지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주님께서 광야로 자기 백성을 몰아넣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튀어나오도록, 외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거예요.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조치한 환경 속에서 애굽과 그리고 약속의 땅, 천국이죠, 그 사이에서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반드시 나와야 될 요소가 뭐냐?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살던 대로 살자, 살던 데로 가자, 에요.
이것은 그 당시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하고도 똑같아요. 안식의 땅은 미지의 세계에요. ‘미지’라 하는 것은 없는 세계입니다. 있을지 없을지 그것은 장담을 못 해요. 우리는 미지의 세계, 안식의 세계에 대해 모호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뭐냐? 애굽의 땅은 확실해요.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애굽에서 살았었으니까요. 확실한 것을 놔두고 미쳤다고 모호한 것에 자신의 운명을 겁니까? 애굽에서 모세 따라 나왔던 사람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다짐의 다짐, 점검의 점검, 확인의 확인을 하루도 쉬지 않고 했을 거예요. ‘과연 이게 맞나? 이렇게 가는 것이 맞을까? 그래. 한번 믿어보자. 모세 믿어보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 믿고 한번 따라 가보자는 그 인내성에 결국 한계에 도달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너, 나 할 것 없이 자동적으로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게 했느냐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다른 말로 하면, 애굽만이 확실하게 믿을만한 선택지고 결정이라는 거예요.
이 땅에 살면서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도록, 드러내도록 주께서 아직까지 우리 목숨을 뺏어가지 않고 계속 유지시켜 줍니다. 확실한 것에 대한 이 믿음이 분명히 있는데 성경 좀 봤다고 뭐 자신감도 없고 모호해요. 믿을 것도 안 되는데 그걸 억지로 믿으려고 하니까 억지의 한계,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거예요. 아니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그 살았던 원칙이 구축되어 있잖아요. 그게 사는 길이에요. 사는 방식, 그것만 익혔고 그것만 알고 있어요.
써먹으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그 방식을 써먹어야 확실하게 사는 방식인데 사는 길 놔두고 굳이 실패한 길로 나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당시에 광야에 있는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참다 참다 못해 터져 나온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정말 이건 미친 거야. 이거 말도 안 돼. 지금이라도 바른 선택하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돌아갈 때 모세 집어치우고 우리가 한 장관을 세워서 가자.” 이렇게 나섰습니다.
민수기 20장 5절에 보면 보다 구체적으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유가 나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바보가 아닌 이상 꾸역꾸역 죽을 자리로 간다는 게 이게 뭔가 귀신에게 홀리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정신 바짝 차려서 제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수습해보자, 모세 믿지 말고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이게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던 이야기입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요소가 이미 내포된 채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까짓 게 어딜 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믿음에 화합지 못한 요소가 작동하고 있는데 뭐 건방지게 허풍선이처럼 성경 좀 봤다고 ‘믿습니다.’ 이러고 따라가요?
그러니까 “좀 솔직 안 할래?” 이런 식이죠. “솔직히 네 내부를 쳐다봐. 네 내부는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게 네 진심이야. 그 외에는 없어.” 천국이고 지옥이고 뭐 지금 죽을 판인데 무화과도 그렇고 석류 뭐 안 먹어도 되지만 마실 물도 없는데, 그리고 앞으로 이게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성경을 대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성경 보면서 이건 미치지 않고서야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에요. 온 천지가 물에 빠졌고 방주 제작했다는 이야기, 이거 제정신으로는 못 믿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 양 피 발랐더니 저쪽 피 없는 집은 맏이가 죽었고 이쪽 집은 죽음의 천사가 그냥 넘어갔다.
네가 죽음의 천사를 본 적이 있어? 이게 지금 말이 돼요? 홍해 바다가 갈라졌어요. 남자와 동침한 적도 없는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계속 나와요. 모세라는 사람은 화산 속에 들어가서 돌판 만들어 가지고 내려왔어요. 요셉 자기 부인이, 정혼했으니 이미 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임신을 했단 말이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건 굳이 요셉이 마리아에게 어떻게 임신을 했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요셉이 결정한 건 그거에요. “너를 임신케 한 그 남자에게 보내줄게. 우리 여기서 그만 조용히 관계 끊자.” 이게 요셉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신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조용히 관계를 끊는 거예요. 그게 요셉입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고요.
하나님이 기어코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를 당황스럽지 않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후나 항상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정서를 유지할 조건하에 주께서는 우리를 천국 보낼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쪽에서 어떤 정신 나간 짓을 안 해도 되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본심은 모르죠. 모르는데 성경에서는 광야에 자기 백성을 이끄니까, 우리 선배죠, 우리 보다 앞장서서 우리를 대신해 외치는 것이 “모세야. 우리 그만하자.”에요. 여기도 그만하고 집에 간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그만하자. 많이 들었고 많이 알았다. 기적도 보고 다 했는데 우리 그만하자. 내가 더는 힘들어서 하나님 못 믿겠다.”
하나님을 안 믿으려고 가 아니고, 천국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솔직함이요. ‘하나님 저 그만하렵니다.’ 하는 생각을 그동안 억지로 억눌렀었는데 남들이 “믿음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하는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 억지로 눌렀는데 이제는 이 스프링이 한계에 이른 거예요. “우리 그냥 애굽으로, 우리가 살던 방식으로 평범하게 살자.”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게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안식할 때 그 내용이 필수 요건으로 튀어나오면서 하나님은 자기만족을 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자기 안식과 만족을 떠안게 된 거예요. 몸에 맞지도 않는걸. 하나님의 만족, 그것이 자기만족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만족을 떠안았는데 이제는 그 틈에 간격이 생기고 벌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부터 먼저 챙길 입장이 못 됩니다. 나는 내 만족 챙기는 데 급급합니다. 난 행복하고 싶어요. 난 불행하기 싫어요. 나는 내 만족을 따로 챙기고 싶습니다.” 하고 사이가 벌어지는 거예요. 이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이미 예정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에베소서 1장에 ‘예수 안에서’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중보자에요. 중보라고 하는 것은 매개입니다. 매개라는 말이 안 쓰는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제가 쉽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어떤 물건을 가질 때 그 물건을 내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 차가 있으면 그 차는 내 것이고, 개를 키우면 그 개는 나의 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곧 나의 일부고 그리고 내 것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매개라는 게 없어요. 중보라는 것도 필요 없어요. 내 것인데 무슨 중보가 필요하고 매개가 필요합니까? 연결 고리가 왜 필요해요? 내 건데요.
그런데 생활이 궁해졌습니다. 이제는 물건을 팔아야 밥이라도 먹고 살겠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이 차를 팔아요. ‘이 차는 중고 시장에서 얼마나 받을까?’ 하면서 내놓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알아요. 나와 내 것 사이에 매개가 있었던 거예요. 그 매개가 돈이라는 매개입니다. 그 세계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거예요.
자본주의가 발달 된 유럽에서, 아프리카의 오손도손한 가족 하나하나를 놓고 ‘저 흑인은 노예로 팔면 얼마짜리겠는가?’ 하는 돈의 매개가 아프리카를 점령케 했던 겁니다. 이 예쁜 개를 개 시장에 내놓으면 얼마 받을까, 하고 내놓은 순간 그걸 들은 개가 ‘깽깽, 나 엄마와 하나인데, 하나가 아니었었어?’ “아니었어. 들어간 사료값을 계산해서 돈으로 바꿔치기해야겠다.”
자본주의가 생기면서 인간에게 모든 물건은 인간적 관계가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에 돈을 집어넣어서 매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사돈의 팔촌, 이웃, 형제, 자식, 부모, 한 가족 같죠? 너는 내 배에서 낳은 내 새끼라고 했죠?
그런데 여기에 자본이 개입되고 돈이 계속 들어가게 되면 돈으로 얼마짜리 자식, 얼마짜리 며느리, 얼마짜리 손자 손녀가 될까를 계산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매개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매개 관계에 있었던 겁니다. 개나 차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마저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그동안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집어넣어서 너와 나 사이에 어떤 매개가 있는데 그 매개가 뭐냐? 나를 위한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라는 걸로 너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던 겁니다. 지금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주님이여, 나를 위한 주님이어야만 합니다.’라는 자기 생각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식으로 예수를 믿어왔던 거예요.
그런데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이라는, 광야 생활에 집어넣어요. 집어넣어 버리면 인간은 드디어 분노의 한계에 도달해 버립니다. ‘이게 무슨 예수고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나를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나, 그만하자.’ 노래 가사 같기도 합니다만 “이제 그만하자! 나 이제 그만할래요. 힘들어서 예수님 못 따라가겠습니다.” “그럼 그만하고 너 뭐할 건데?” “애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애굽으로. 하나님 몰랐던, 예수님 몰랐던, 예수님 안 믿어도 상관없던 생활, 그래도 넉넉했던 생활 그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으로 돌아가려면요, 그동안 준 혼수 다 내놔야 해요. 파혼을 하면 그냥 파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광야에 왔던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면서 지도상에 나타나 있지 않은 어떤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쥐어준 은혜 다 토해내. 다 비워내.” 그렇게 돼야 하거든요.
다 토해내도 앞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꾸역꾸역 가는 것보다 은혜받은 거 내놓더라도, 반납하더라도 차라리 익숙해진 애굽 생활이 낫다고, 그래도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저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주를 통과해 왔거든요, 저주를. 같은 인간이지만 애굽 사람들은 올 수 없는 곳, 그게 뭐냐? 살아있는 인간은 벌 받을 수밖에 없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쪽에 바로 약속의 땅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기적으로 오니까 이건 뭐 사람 같으면 누구나 다 통과할 것 같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그냥 무심코 온 거예요. 왜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양식 없고 물이 없다? 지옥이 따로 있어요? 그게 지옥이죠.
양식 없고 물 없는데 하나님께서 양식 주시고, 만나 주시고, 바위 깨서 물 주셨다, 그 말은 뭐냐? 그 말은 인간이라면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저주의 압력에 버틸 수 없는 곳을 네가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을 통해 불 속에서 돌 판을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약속의 땅의 목적을 향하여 계속 달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말씀 자체가 움직이는 겁니다. 말씀만 움직입니까? 땅도 같이 움직이고, 환경도 움직이고, 하늘도 움직이고, 물도 움직이고, 다 움직이거든요. 말씀의 움직임을 따라서요. 그런데 누구만큼은 지금 안 움직이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본인은 달라질 생각을 안 합니다. 자꾸 애굽 때의 그 인간 그대로를 붙박이처럼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달라져야 된다는 생각을 내가 안 하고 있어요. 쉽게 말해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분이 중보자가 되셨는데 그 중보자는 내가 중보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의 소유가 될 정도로 나와 다른 인물로 달라지기 위해서 중보자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그 중보자는 데려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많은 모욕과 모독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모세가 대신해서 원망을 받고 있지만. 그 데려가는 인간들에게 온갖 원망을 다 들으면서도 그것을 은혜로 감내하면서, 은혜로 갚아주면서 그들을 약속의 땅까지 데려가는 분이 바로 중보자입니다. 매개자에요. 그 중보자, 그 매개와 차이 나는 매개자를 하나님께서 또 광야에서 준비해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발람이에요. 여러분, 발람 선지자 들어보신 적 있죠? 발람 선지자의 특징이 이상해요. 모압에 소속된 이방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향해 칠 듯이 달려오니까 모압 왕이 지레 겁이 나서 선지자 발람에게 막대한 재물을 주고 뭘 맡기느냐? 저 다가오는 이스라엘 나라를 저주하도록 사전에 주술적인 방비책을 마련했죠.
그 많은 재물을 받았으면 “예. 왕께서 시키는 대로 제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겠습니다.” 하고 제물 준비해서 “오, 신이시여. 오는 저 나라가 자체적으로 파괴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저주를 퍼부으면 돼요. 발람 선지자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마음대로 안 돼요.
안 되면서 발람 선지자가 뭘 알았느냐? 이 세상에 모든 신은 인간 자기 행복과 자기가 불편한 것이 없도록,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고 신이다. 많은 신들이 있으니까 우리 민족, 나에게 필요한 신은 인간이 뇌물을 바쳐서라도 내가 원하는 신을 매개로 해서, 그리고 그 신의 선지자를 매개로 해서 그 신을 같이 믿는 것이 그들에겐 믿음에 화합한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을 해버린 거예요. 축복을 한 것에 머물지 않고 아예 그들 속에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특이성이에요. 발람 선지자가 알았던 거예요.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중에 있도다.”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발람이 이야기했어요. 저주를 해야 할 대상인데 이것은 자기 입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해요. 저주대신 축복을 그만 해 버린 거예요. 민수기 24장 8절에 보면 발람이 또 축복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절에 보면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들소와 같다.’ 이건 뭐 거칠 것이 없죠. 그러니까 지금 발람 선지자가 뇌물을 받고 저주를 해야 하는데 축복을 하는 거예요. “저 이스라엘은 자기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창세전부터 축복을 했고, 동시에 축복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동시에 그들 속까지 들어가서 들소 같이 움직여서, 모압 왕이 아무리 내게 뇌물을 준다 할지라도 내게 그들에게 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못 바꿉니다.”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거기까지는 우리가 이해를 해요. 그런데 정작 이해를 하지 못하겠는 것은 뭐냐? 민수기 25장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발람이 모압 선지자거든요. 지금 모압왕이 모압 선지자 발람에게 돈을 주어 이스라엘이 망하도록 저주하라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 25장에 보면 1절에 보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그것이 정당화되는 모압의 신이 있어요. 모압 신의 신전 축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한 겁니다. 누가 이 짓을 했는가?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 보면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발람이 한 거예요.
성경에 난제가 여러 가지 있지만 이것이 바로 난제 중 난제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축복을 해놓고, 그럼 발람 본인도 회개를 하든지, ‘아 내가 그동안 엉터리 신을 섬겼구나. 이제부터 여호와께 귀의하겠다.’ 하든지, 뭐 그게 욕심이라면 적어도 이스라엘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말로 했기 때문에, 자기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이 지상의 발전이고 움직임이라고 그렇게 축복을 했으면 이젠 이스라엘엔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발람의 꾀에 넘어가서 자체적으로 파괴가 일어나느냐는 거예요. 그게 난제란 말이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 그 말이지요. 여러분, 지금 이게 난제인지도 모르겠습니까? 여러분들 성경 읽어보시면서 이걸 그냥 넘어갔어요?
발람 선지자 본인이 회개하든지, 회개하기 싫으면 건드리지는 말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회개도 안 할뿐더러 ‘너희들 이제 너희들 내 손에 자체적으로 무너져봐라.’ 하는 식으로 손쓰는 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죠. 이방 선지자 발람이 단단한 이스라엘이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그 일에 어떻게 관여함이 가능하냔 말이에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람 선지자가 뭘 하나 알아야 되느냐?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에 해당되지 거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자기만족에 동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은 지금 여호와라는 우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여호와를 대하고 있는 거예요. 우상이란 뭐냐?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 믿는 것을 다 우상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믿는 거예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믿는 것이 우상이기 때문에 지금 어디서 틈이 생겼느냐, 간격이 생겼는가?
인간은 여호와께서 볼 때 ‘나를 위한 하나님 여호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시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은 ‘네가 어떤 마음을 갖든지 나는 일방적으로 너를 천국 보내기를 내가 스스로 약속을 했다.’ 하는 거예요. 이 두 생각이 차이가 되고 그 간격이 벌어진 겁니다.
더군다나 더 어려운 이야기를 제가 끄집어내 볼까요? 이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라는 선지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발람 선지자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의 진행에, 여정에 차질이 되도록 만든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그 이유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 자체에 하나님의 자기 부정성을 담기로 창조한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 부정성, 자기 파괴를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과 천국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있고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화합지 못한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교회 나오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 믿는 그게 바로 우상 숭배에요. 그 이야기로 일관되게 한국 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설교단에서 그걸 이야기하게 되면 한국 교회에 교인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성당은 물론이고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도원에도 없어요. 오지도 않고 올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잠시 숙제를 내겠습니다. 숙제는 이겁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을 위합니다.’라는 명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그 명제와, 하나님을 위해 사는 나, 하나님을 위해 믿는 나를 믿는 나, 그 사이의 모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가 끝나기 전까지요.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는 나와, 결심하는 나를 붙잡아서 그게 바로 나이고 싶어하는 나를 믿는 그 두 개의 믿음은 화합지 않는 믿음이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모순되지 않게 결합할 수 있는지 그 방안을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젊은 사람들까지. 설교 끝날 때까지. 이것은 제출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제가 정리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나를 위한 신을 원하고 있는 나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제거해달라고. 나를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안 믿어요. 예수도 안 믿어요. 나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말씀으로 들춰지고 그 말씀에 의해서 주님께서 나를 믿음에 화합지 않는 자는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 말씀을 내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내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여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제가 제출한 숙제는 이겁니다. 예수 믿는 나를 안 믿을 수 있는 방안을 제출하라, 그거거든요. 방법은 뭐냐 하면, 내 안에서 주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부정당한 사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 버린 사건,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 사건이 이미 터져버렸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남자 없이 이미 임신한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홍해사건은 이스라엘 앞에서 이미, 이미 갈라진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손쓸 수 없이 터져버린 거예요. 유월절 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장자가 안 죽고 살아났다는 사건은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이미 터져버린 거예요. 그 사건만 터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런데 그게 바로 중보자예요. 매개입니다. 그게 바로 매개입니다. 거짓이 진실의 내용이 되고 죄가 의의 재료가 되는 방법, 거짓이 있을 때만 진실이 나오고 죄가 있을 때만 의가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발람선지자를 들고 나가서 모압신을 믿도록 혹하도록 한 거예요. 왜? 모압신은 뭐냐?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신이기 때문에 이게 이스라엘 내부에 이미 잠재되어서 활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발람선지자가 그렇게 이스라엘을 몰아넣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지적으로 자기를 호도하고 있었고 조작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를 사랑해서 홍해를 건너게 했고 우리를 사랑해서 약속의 땅을 준비하셨다, 너무나 고마워라 …, 이 소리가 전부 다 헛소리에 불과한 것을 본인이 몰랐던 거예요.
왜? 그거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은 뻔하지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지요. ‘지겹다 이제. 말씀도 지겹고 복음도 지겹고 그냥 내버려 둬, 내버려 둬. 돌아가게 내버려 둬.’ 애굽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것은 언약이 없는 비언약적 신에게 돌아가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스라엘 백성 속에 그대로 유지시켜서 끌고오신 이유는 더 깊이 있게 보면 이렇습니다.
유월절 양이 그냥 양이잖아요. 전에 애굽에서 분리될 때 양을 매개로 해서 양의 피를 발라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계획은 이겁니다. 그 양을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그 수순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 양이 죽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어서, 어떤 특정 사람이 죽어서 내가 그 피로 천국 백성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매개자에 소속이 되는 겁니다. 그 사건 속의 인물이 되는 겁니다.
사건 속의 인물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원하는 신은 내가 필요해서 나한테 이익이 되는 신을 우리는 믿도록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내가 천하에 괴수라는 것을 아는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최고의 복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익히 알고 있는 일이고 더 나아가서 필히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에요. 내가 하는 개망나니 짓은 필히 일어나야 돼요, 필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자기를 반성해요. 반성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반성하는 나를 믿어서 그 숙제가 안 풀려요. 풀리지를 않는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개망나니 짓을 우리가 알아서 더 지어도 괜찮겠네, 라고 만약에 나온다면 그것은 뭐냐?
십자가 사건이 이미 터져버린 입장에서 그런 죄를 더 짓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 사건이 이미 터져버렸다니까요. 중보자가 내가 지은 죄가 나의 중보자가 아니에요.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그것이 예수님의 피로 해결된 게 나의 중보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일어난 십자가 사건의 재현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계속 뭔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움직이는 모습. 이 땅은 언젠가는 떨어져야 되고 우리는 가야 될 나라가 따로 있거든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가야 될 곳이 있거든요.
1980년대 나왔던, 저도 재미있게 봤던 만화영화가 있었어요. <가제트 형사>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은 잘 모르지요. 이미 어린 시절을 지난 때 나왔기 때문에. 가제트 형사는 사이보그 탐정, 기계로 만든 인간인데 반장이 지시에 따라서 사건을 해결해요. 그런데 이 가제트 형사는 의욕이 굉장히 넘쳐요. 쉽게 말해서 도파민이 넘쳐요.
그래서 사건 현장을 기피하지 않고 어떤 사건이든 달려들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가제트 형사에게 여자 조카가 있어요. 머리를 묶은 예쁘장한 그 어린 소녀 옆에는 이름을 브레인이라고 하는 개가 한 마리 따라다닙니다. 그 소녀는 형사가 아닙니다. 삼촌이 형사지요. 그런데 그 소녀는 유일하게 가제트 형사의 실체를 압니다. 어떤 일을 해도 사건 단 하나도 해결을 못 해요.
해결을 못 하는 정도가 아니고 악당한테 항상 붙잡혀요. 형사가 악당한테 맨날 지고 인질로 붙잡히고 그래요. 그런데 그 천재적인 조카가 컴퓨터를 잘 만져요. 조수인 개 브레인과 알아서 문제 해결 다 합니다. 그렇게 문제해결 다 하고 어린 소녀와 개는 빠져버리고 뒤늦게 반장이 와서 “가제트 형사! 해결 했는가?” 하면 “예! 열심히 해서 제가 해결했습니다. go! go!”
가제트 팔, 이렇게 모자 위에서 막 나오고요, 이러면서 “제가 이걸 해결했습니다.” 합니다. 저 뒤에서 조카인 소녀와 개는 어쨌거나 사건은 해결했으니 싱긋이 웃으면서 만화영화는 끝나요. 그게 시리즈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가제트 형사는 악한의 인질이 된다는 것,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의욕이 넘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해도 결국은, 결말은 악마한테 옴팍 사로잡히는 처지에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은 이미 정해졌는데 이스라엘이라는 구성요소에 계속해서 바꿔 치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부를 하나님의 합당한 백성으로 바꿔치기를 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봐서 이스라엘은 변함이 없는데 이스라엘 하나에 하나님의 완전한 만족과 안식을 유지하는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요소의 교환,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겁니다.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바꿔치기 할 수 있도록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인간들, 이방 신, 귀신에 흠뻑 빠지고, 거기에 나 몰라라 하고 완전히 매료되어 버리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데리고 가서 주께서는 온전한 이스라엘을 이루시는 거예요.
신약 마태복음 13장을 보겠습니다. 47-52절, 52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씀을 하기 전에 47절, 제가 천천히 읽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천국은 그물” 천국은 좋은 고기? 아닙니다. 천국은 나쁜 고기? 아니고 천국은 그물이에요. 천국은 그물인데 좋은 고기 나쁜 고기가 다 같이 담기는 그물이에요. 그걸 누가 하느냐? 중보자가 해요. 매개자가 하시는 겁니다. 이미 매개자는 하나님의 부정성이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버린 자만이 중보자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께 버림받은 자만이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숙제 해결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은 버림받았는데 우리가 뭐라고 지금 안 버림받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티 내는 거예요. 그 우상숭배자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없어져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자기만족에 들어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문제는 교회라 하는 것은 “그물과 같으니” 해서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어떻게? 그물에 일단 담아요. 담으니까 거기에 뭐가 있느냐? 좋은 고기도 있고 나쁜 고기도 거기 있습니다. 그다음에 골라내는 그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우리한테 있다? 아닙니다. ‘이것은 좋은 고기, 이것은 나쁜 고기’라고 구분하고 결정짓는 것은 나쁜 고기에게 없고, 좋은 고기라고 자위하는 자에게도 없고, 일방적으로 중보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너희는 사나 죽으나 나의 것, 곧 주님의 십자가의 것입니다. 나의 것이에요. 내 것이 아닙니다. 어제 광주강의에서 했지요. 죄라는 것은 우리가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고 죄는 결과적이다. 죄는 결과에서 아는 거예요.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니까, 끝까지 밀어붙이니까 비로소 죄 없다 하는 곳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굳어져 있었음을 결과적으로 발견하지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가제트 형사, 바보같은 가제트 형사에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열심히 해서 이만큼 왔다는 거예요. 꼬마소녀와 개는, 천사는 싱긋이 웃습니다. ‘네가 무슨 소리 하든 일 잘 해결되었으면 되었지.’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복음에 화합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안목을 넓히는 거예요.
나만 쳐다보고 나 천당 가기만 기다리다가 안목을 넓혀보니까 저 구석에 보니 꼬마소녀와 개가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니까 우리는 내가 크게 느껴지는데 예수님은 작게 느껴진 거예요. 그런데 이게 뒤바뀌는 겁니다. 예수님 일하심 없이는 나에게는 손톱만큼도 믿음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일하는가? ㉮모든 것을 이미 확정지어 놓고 ㉯확정 지은 상태에서 부정성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이미 창세 전에 확정해 놓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생산하는 거예요. 언약을 줄 때마다 ‘이것은 내 뜻이 아니거든, 이것은 내 뜻이 아니거든…’ 이렇게 골라내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말,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예수님이 구원받습니다. 그걸로 족하면 그게 바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입니다. 왜? 예수 안에서 새로 생산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쳐다보지 않고 주님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 쳐다보기 때문에 십자가교회요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중심으로 편하게 살면서 교회 오고 예수 믿는다 했는데 그것이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의 외침의 연속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지금도 쉬임없이 울려 나오는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는 그 이야기, 그걸 통해서 기껏 그 소리 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이미 죄인인 것을 아는 기쁨으로 가득 덮이게 하여 주시고, 그게 십자 사건 속에 일어난 일인 것을 또한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