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자식
2024년 6월 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4:4-8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늘 오늘’ 이러한 시간 의식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간 감각은 지나간 시간과 지금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의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아담이 선악과 따 먹은 그 현장에 없다고 우기고 또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자신은 거기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역사’를 가지고 시간을 이해합니다. 시간이 뭉쳐져 자신들이 기억하는 역사가 되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체적으로 주제가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안식’을 내용하는 바를 반복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운동’이 됩니다. 창조는 시작에 해당되며 안식은 그 창조의 완성, 혹은 마감이 됩니다. 이 두 간격으로 구성된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반복하게 되면 그렇게 해서 나타난 세상이 곧 이 세상이요 역사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율법의 취지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안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의 절대 안식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의(義)는 살아 있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인간들은 현실을 구성합니다. 요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세게 안에서 인간들은 어떻게든 자기 안식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리라고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안식의 정신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상황들을 통해서 자기 안식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로움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2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있다’와 ‘없다’의 실내용은 예수님을 두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은 하나님의 충족된 안식에 동조못하면 ‘믿음에 부합되지 않는 자’로 간주해서 심판해버립니다.
이런 심판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하고 모독하고 반발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오늘’입니다. 인간들 보기에 과거지사처럼 여겨지는 것이 모든 일도 말씀 안에서 한꺼번에 축약되어 들어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게 되면 ㉯복음 안에서 모든 말씀은 시간이 없었던 그 처음 상태로 갔다가 ㉰후대로 발사하는 식으로 시간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모세 때나 있었던 일은,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모세에 대해서 원망했던 그 일을 가지고 다윗은 자기 시대에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 사건을 통해서 형성된 그 말씀이 다윗 시대에 똑같이 적용될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이라는 말을 다윗이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나 유월절 사건이나 특히 십자가 사건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같이 자기 안식에만 관심 있습니다. 인간들과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모든 대화 속에서 자기 의로움을 증명한 넋두리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이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자기 의로움을 버리지 않는 근거로 자신에게 돈이 있다는 겁니다. 소위 ‘있는 집안’이고 싶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자기 안식을 달성하는데는 돈이 필수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 아래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이 되고 조그마한 소득이 있어 하나님에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영향력이 죽고 돈이 대세가 되면 사람들은 공간적인 차이를 이용해서 이득을 얻고자 하는 상업자본주의를 거쳐서 시간 차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즉 인간의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겁니다. 인간 배후에는 악마가 있어 인간을 사단화시켰습니다. 자기 자식인 인간을 그냥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으로 인간 세계를 급습합니다. 마치 유월절날 애굽에 사는 모든 총각인 맏아들을 죽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완성된 유언을 죽은 본인이 살아서 반복시킵니다. 이게 모순입니다. 모순이란 ‘죽은 자’가 살아서 활동하므로서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의 활동을 무용지물로 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의 안식만이 인정하는 활동입니다.
그 예가 요한계시록 12:1-2에 나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이 단 한명의 여인,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 완성에 의해서 비로소 등장하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이미 하와에서부터 예언되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즉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등장’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나타난 경우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임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모든 말의 지혜와 대립적 입장에서 나타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이 마리아의 예수님 임신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완성하신 안식이 복음을 통해서 성도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신분은 ‘한 여자’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의 구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알고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라져야 될 존재임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히브리서 4장 4-8절(사단의 자식)240609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4장 4-8절입니다.
히브리서 4:4-8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사도가 히브리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이라는 시간개념을 자꾸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이것은 시편 95편 7, 8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오늘날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이것은 옛날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자기 백성과 동행하고 있다는 표현을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으라’라고 언급하시는 거예요. 동행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따라 붙이고 있으니까. 이 말은, 인간들은 항상 시간을 생각할 때 ‘이것은 과거에 해당되는 것이고, 이것은 미래에 해당될 것이고, 지금은 현재다.’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어서 인간은 시간을 생각합니다.
또 그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판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지금이고 항상 오늘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인간을 떠나지 않고 항상 따라 붙이니까, 같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옛날의 시편 말씀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라는 것은 다윗 그때에만 해당되는 말씀인가?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윗이 시편을 지은 것은 맞는데 그때 그 당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그것으로 끝났고 그 후의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적용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시편 9편에 나오는 그 말씀은 광야 때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시절은 다윗 시대보다 약 400년 전의 이야기에요. 광야 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왔잖아요.
그때 다윗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는 모세 시대예요. 모세 시대의 광야 시절에 다윗은 끼어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모세시대 때 준 그 말씀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그 말씀에 해당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인간들이 부분적으로 갖고 있는 시간 인식에 대해서 말씀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느냐 하면, 아담이 따먹었어요. 하와가 따먹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보면 그것은 옛날이야기예요. 단군 이야기보다 더 전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그 현장에 없었고 그 근처에도 안 갔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것을 지금 우리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으로 적용시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동행하고 있고 주님이 동행하고 있으니까요.
똑같은 원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두 사람이 그 현장에 십자가에 달려있었어요. 그럴 때 나는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본 적도 없고, 강도도 나는 구경도 못 했고 그것은 벌써 2천 년 전의 옛날이야기잖아요. 옛날이야기죠. 옛날이야기인데 성령께서는, 또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그 현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니 이것은 옛날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걸 봤느냐고 왜 지금 우리보고 묻느냐는 거지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갔어요.
나중에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났을 때 사도바울은 인간이 역사를 생각하고 시간을 생각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현재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인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뭔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내가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인간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그 인간의 추적을 예수님께서 따돌려 버렸어요. 예수님이 따돌린 겁니다. 그 방식이 마태복음 13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도대체 있는 것이 뭐고 없는게 뭔지를 사전에 알려주고 빼앗든지 해야 하는데 주님께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냥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께서 이 말씀을 하면서 인간들이, 제자들이 그걸 이해하라고 지금 윽박지르는 거예요. 이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데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이야기할 때 있는 ‘있는 집 자식, 없는 집 자식’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요새 한국이 집이 남아돕니다. ‘요새 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지? 있는 자식, 없는 자식?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냐’ 그 말이지요.
인간들은 대번에 알아차려요. 뭐냐 하면 ‘돈 있는 집 자식, 돈 없는 집 자식’이라고 대번에 알아먹습니다. 인간은 그것이 기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할 때 ‘예수님이 있는 자, 예수님이 없는 자’로 사전에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한 거예요.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자식,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는 자식,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있는 자는 넉넉하게 받되 예수님이 없는 자는 현재 네가 있다고 여기는 그것도 몽땅 다 빼앗긴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있는 그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예수님은 “네가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 하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있는 것을 강탈하고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엘리야하고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 하고 붙을 때 바알 아세라 선지자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기능, 종교적 기술을 총동원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는 그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박탈하는 식으로 제단 앞에서 행동을 보였어요.
그게 뭐냐? 불이 붙어야 할 제단에다 물 열두 양동이를 부어버린 거예요. 불이 붙어야 할 그 제물에 물을 부어서 축축하게 만들었어요. 있는 가능성조차 다 날아갔습니다, 있는 가능성도. 주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우리가 예수 믿을 수 있는 그 믿음을 빼앗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소망할 수 있는 그것부터 빼앗는 겁니다. 그 빼앗는 방법이 뭐냐? 바로 옛날에 줬던 그 말씀을……, 이것만 해석하면 오늘 설교는 끝났어요. 옛날에 줬던 그 말씀을 지금 오늘날 속에 전부 집약시키는 겁니다. 인간은 과거, 지나간 것, 그리고 지금 있는 것, 그리고 미래, 앞으로 올 것, 과거-현재-미래의 그 시간개념 자체를 빼앗아버려요.
빼앗아버리면서 선악과 따먹을 그때 네가 있었고, 십자가에 달릴 때 네가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 재림할 때 그 현장에 이미 네가 현재 있다는 거예요. 그걸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는 독특한, 특이한 시간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유월절날 애굽에 사는 모든 맏아들은 다 죽였습니다.
의도적인 살해였어요, 의도적인 살해. 그게 유월절이었어요. 그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살았다는 거예요.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그 말씀만 지키면 내가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유월절 짐승의 피를 바름으로써 자기가 유월절 사건, 그 죽음 사건 이전에도 살았고 피를 발랐더니만 살았던 내가 피 이후에도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유월절을 겪은 그 이스라엘은 관심사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동행하면서 말씀으로 어떻게 다루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나저러나 내가 살면 되잖아’라는 식으로 자기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 ‘내가 여기 있다’에 관심을 두면서 유월절을 잘못 해석해 온 겁니다.
심지어 그 유월절이 반복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요. 애굽의 맏아들을 죽이는 그 유월절의 취지가 이제는 율법에 담겨서 이제는 그 대상자가 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하여 매일같이 죽인다는 사실, 그들은 유월절을 그렇게 해석을 못 한 겁니다. 다 과거지사라는 거예요, 과거지사. 과거는 지나갔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을 그대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안식을 했습니다. 그게 4절입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창조하시고 안식하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창조를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완성했는데 주님이 창조를 완성했기 때문에 본인들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모든 교인들, 모든 신학자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지사에요. 이게 과거지사가 되고 만 거예요.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내부에서 일어나는 안식입니다. 하나님 내부에서 일어난 안식이고 그 안식을 주님께서는 뭘로 바꾸는가 하면 안식일이라는 말씀으로 바꾼 거예요. 창조와 안식을 콤팩트, 그걸 간추려서 ‘안식일’로 만든 겁니다. 말씀으로 묶은 거예요. 하나의 팀을 이룬 거예요.
창조와 안식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서 그다음부터 일어나는 것은 그 모티브를 반복하는 패턴을 이뤄가는 거예요. 그 패턴이 뭐냐? 시간이 안식일, 7일 단위로 분절된다는 거예요. 끊어지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끊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 그 끊어진 안식일의 취지에 대해서 만약에 인간이 미흡하거나 모르게 되면 안식일이라는 그 패턴, 그 모티브를 살리기 위해서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죽어줘야 돼요.
왜?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인간이 죽어줘야 된다고요. 그런데 성경을 바라보는 인간들은 성경책을 통해서 본인 존재가 살려고 이렇게 꿍꿍이를 갖고 있으니 전혀 성경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안식과 창조의 그 완성의 그 모티브에 미흡하게 되면 자기 백성이라도 죽임으로써 안식을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 창조와 안식이 결합 된 것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율법이에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 지키게 되면 그 못 지킨 결과로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이 땅에서 죽음의 반복, 하나님의 심판의 반복으로써 주님의 말씀만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될 의무를 가진 민족이에요. 말씀 위주지 우리 위주가 아니에요. 우리 인간 위주가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님 있는 자식과 예수님 없는 자식이지만 구약 때는 뭐냐? 율법 있는 자식과 율법 없는 자식으로 나누거든요. 율법을 왜 못 지키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지고 예를 드십니다. 왜 그들은 율법을 못 지키는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율법을 주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뭘 노리는가 하면 자기 안식을 따로 챙긴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자기안식, 자기의 절대적 안식.
쉽게 말해서 신이라도 날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들의 현실의 성격은 한마디로 ‘자기의’입니다. 인간은 ‘자기의’로 현실을 해석하고 현실을 구성해요. 자기의, 나 잘났다로 해석해요. ‘나 잘났다’를 그렇게 지키고 싶은 이유가 인간들은 본인이 잘났다고,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의로움이 유지되어야 자기 안식이 유지가 돼요.
인간에게 유일한 현실은 반드시 자기가 잘났고 자기가 의롭기 때문에 나는 멀쩡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나한테는 앞으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하여튼 시간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인간을 위한 오늘은 미래를 내다보는 오늘이라서 사실은 그 오늘이 없는 거예요.
어렵게 말해서 오늘은 없어요. 오늘이란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그 경계선이 오늘, 현재일 뿐이지 진정한 오늘이라는 것이 없어요. 말하는 순간 벌써 5분이 지났어요. 오늘이라는 것이 없고 항상 과거로 미끄러져요. 과거로 자꾸 미끄러져서 오늘이라는 것을 손에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과거 그다음에 있는 것이 ‘그래, 내일 더 잘하면 되지’ 이게 인간 자기 존재에서 나온 시간성입니다.
문제는 인간끼리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의를 계속 고집을 하는데 그 자기 의는 절대적인 의에요. 병원에 가면 뭐라고 합니까? 절대안정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절대 안식이 되려면 나는 어떤 경우가 와도 나는 잘났고 의롭다는 것이 유지가 될 때입니다.인간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인간이 그 절대 안식을 위한 절대 의를 알기 위해서 누구를 찾느냐? 바로 다른 사람, 타인을 찾아요.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를 해요.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사회생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안식, 자기 잘남이 유지되고 고정되는 것, 나 잘난 맛에 사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를 해야 되고 그것 때문에 결혼하는 것 같아요, 전부다. 이야기하고 싶어서. ‘하여튼 저 사람하고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 이런 것.
대화를 할 때는 서로가 절대안정과 절대 안식을 누리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가 안 통해요. 그냥 상호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내 이야기’ 이런 자기 넋두리를 들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그래, 네 넋두리를 들어주는 대신 내 넋두리도 들어다오.’ 이게 대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하는 나의 절대 안식의 그 증거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공통적인 관심사, 서로서로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 관심사의 내용이 뭐냐? 제가 TV 거의 안 보는데 어쩌다 수사극을 봤어요. 거기에 탐문 수사가 나와요. 우리가 그 탐문 수사를 해보자는 거예요. 형사가 찾아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혹시, 예수님에 대해서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질문을 받은 사람이 “몰라요. 나와 상관도 없고.”
그러면 형사가 그 집에 왜 갔을까요? 그 집이 교회 다닌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갔잖아요. “전에 제가 조사해보니 교회 다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니까 예수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 그 상대방이 “그건 그냥 호기심이었고 교회 다녀봤자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서 갔던 거지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요.” 그러면 형사가 조용히 물러가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날 탐문 수사 해봐야 다 예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인간들의 모든 대화를 조사해 보면 특징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결국 모든 대화가 경제문제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경제문제, 돈 문제에요. 있는 집 자식, 없는 자식 이야기로 항상 그걸로 가요.
인류의 역사에서 옛날부터 돈 문제가 아니고요, 본격적으로는 종교, 기독교가 관심이 없어질 때 돈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돈이 부각되면서 기독교는 관심이 없어지고요. 이걸 역사적으로 볼 때 전자본주의, 자본주의 전의 시대와 자본주의시대로 나눌 수 있어요.
전자본주의 시대는 뭐냐? 인간은 노동하는 게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그냥 농사지었어요. 노동한 게 아니고 그냥 고생했어요. 옛날 사람들은 고생을 해도 곡식이 익어서 수확을 하게 되면 ‘이게 어디냐’하고 그걸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가인, 창세기 4장의 그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라서 자기의 수확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린 자가 가인이었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 존재가 자연 배후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계시고 또 자연으로 나타났고, 그 자연을 통해서 우리가 그저 끼니 이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면 제공되는 것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신에게, 자연에게 감사했습니다. 이게 전자본주의 시대에요.
그런데 기독교가 히마리가 없고 예수에 아무 관심이 없어지면서 자본주의가 되는데 자본주의 시대는 뭐냐? 상업자본주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상업자본주의는 뭐냐? 공간의 차이를 노리면서 이윤을 얻는 거예요. 공간의 차이. 공간의 차이라는 것은 저 속초의 오징어값과 서울의 오징어값의 차이를 말하는 겁니다. 속초의 어부에서 오징어 사서 서울에 팔면 이윤 남는 것, 그게 바로 공간의 차이를 가지고 이윤을 내는 것을 상업적 자본주의라 합니다.
그런데 드디이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 상업적 자본주의는 고전적 자본주의고 순진한 자본주의였어요. 그게 산업적 자본주의로 바뀌면서 이제는 모든 사람의 숨어 있는 욕망을 자극해서 그걸 소비로 이끌어서 인간들로 하여금 욕망이 채워지는 새로움에 얼른 돈을 내고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 차이예요. 많이 만들어놓고 광고를 때려버리면 이것은 언젠가는 팔린다는 거예요. 상업자본주의에서는 순진하게도 “얘야, 아빠가 장사 열심히 해서 돈 벌었다. 이거 다 너희들 쓰기 위함이고, 우리 식구 잘 먹고 잘살기 위함이다.” 이렇게 순진하다면 이 산업화된 자본주의는요,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상품 중의 상품은 뭐냐? 돈 그 자체가 최고의 상품이에요. 돈을 모으기 위해서 돈을 버는 거예요, 돈을 모으기 위해서.
펀드에서 돈이 누적이 되는 데서 맛있는 것 안 사 먹어도 배가 불러요. 왜? 인간의 욕망은 맛있는 음식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으로 바뀌어서, 환원되어서 계속 나에게 누적이 되어야 돼요. 이게 바로 있는 집 자식이에요. 있는 집 자식입니다. 하루 세끼 먹는데 굳이 돈이 4조 2천억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게 있는 집 자식이에요.
없는 집 자식이 하루 세끼 밥 못 먹고 삽니까? 아닙니다. 모아놓은 돈이 없는 것을 가지고 없는 집 자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 사회는 계속 욕망을 자극하는 새로운 제품을 만듭니다. 휴대폰도 그렇고 심지어 학습지도 마찬가지고요. 새로운 학습지, 그리고 풍미가 있는 새로운 음식개발 해야 됩니다.
모든 기업과 모든 직장에서 회장님과 직장 상사가 직원들 닦달 내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옛날 5년 전 것 우려먹지 말고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 가져와!” 교회라면 “교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열댓 명, 이러지 말고 교인 수 불릴 수 있는 아이템 가져와, 이 부교역자야!” 모든 직장이 그래요. 공사판도 “힘들게 공사하지 말고 쉽게 공사하고 인원수 줄일 수 있는 능률적인 아이디어 가져와.”
이 세상 어느 구석도 피할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관심사, 이야기 주제는 경제에요, 경제. 있는 집 자식, 없는 집 자식, 그것뿐입니다. 이게 뭐냐? 미래성, 희망성 때문에 그래요. 지금보다 내가 더 나아진다는 희망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거는 버리고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 그것, 나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 타인이 필요하고 타인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할 때 돈이라는 수단으로 나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 언제까지? 오늘까지. 내일은? 내일은 또 새로운 시작이 와야지요. 포도품종도 늘 바뀌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혹시 형사가 와서 탐문 수사하거든요, “혹시 예수에 대해서 아십니까?” “옛날에 좀 알았는데 지금은 관심도 없어요.” 주님께서 이러한 대결구조를 가져가요.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세 그다음에 나온 사람이 여호수아에요. 여호수아 다음에 다윗 나왔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안식을 주신지 오래되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안식을 줬어요. 성경해석 끝났습니까? 아니거든요. 성경해석 끝난게 아니에요.
땅의 안식을 줬는데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그 안식을 유지시킬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한 그 취지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냥 땅만 얻어서 ‘편안하네. 적들이 다 어디 갔지? 우리가 살기 좋네.’ 이게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고 안식한 그 취지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에요. 미흡한 거예요. 미흡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다 죽습니다.
그러면 역대하 36장 21절에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게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인데 약속의 땅의 안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식은 “나가라, 다 나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부 다 나가게 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아, 꼴도 보기 싫다. 다 나가라.” 그 땅에서 다 쫓아보내는 거예요.
그 말은 단 한 명도 하나님의 안식의 취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의 패턴화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안식, 안식, 안식이 계속 유지가 되면서 이 안식이 마지막에 어디서 완성이 되느냐?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 4장 7절에서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할 때 그의 음성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복음이라고 해요. 히브리서 4장 2절에 그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혹시 천사가 형사로 위장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묻거든 “예수님이라고 이런 분 아십니까?”라고 묻거든 안다고 이야기하세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분은 복음입니다.”라고 하면 돼요. 이 복음, 기쁜 소식이 뭐냐 하면, “그분은 그분 자신이 죽으면서 자신의 유언을 본인이 완성 시키는 분”이라고 이야기하세요.
이것은 모순된 의지에요. 이게 왜 모순되는가? 죽은 자가 살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모순되는 거예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지 아니하면 그 유언의 효력이 발생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죽었어요. 죽었는데 그 죽음 자체가 살아 있어요.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겁니다.
왜 모순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내가 살아 있으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 있으면 산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간한테는 모순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 있는게 돼요.
그리고 소위 너희 살아 있다고 우기는 너희들아, 나의 죽음에 합류할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실패하지요. 실패하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의 자기 안식을 가질 자격이 없는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은 주님의 죽음에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합류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느냐?
유월절을 생각해 봅시다. 유월절에 있었던 그 맏아들 다 죽였잖아요. 그 유월절에 잡은 것은 양이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안식이 완료가 될 것 같으면 그 유월절의 양이 사람이 돼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써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 돼요. 그렇게 된다면 유월절 기능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대로 펼치게 됩니다.
어떻게 펼치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시간 없을 때로 모든 것을 끌어당겨서 시간 없을 그때의 모든 것을 완성하신 인물로서 그다음부터는 시간을 그대로 발사해버려요. 접힘과 펼침, folding과 unfolding, 졉혀 있는 것을 발사해버려요.
발사해버리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십자가 안에 창조와 안식과 유월절과 성경 안의 모든 내용이 한꺼번에 담겨있게 된다고요. 그것이 자기 백성에게 급습해요, 급습. 죽음으로써 급습한다고요. 양의 피를 발라서 우리는 살았다고 헤헤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탈락이에요. 뭐냐 하면, 주님의 그 유월절 양이 우리한테 급습을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피 발린자가 되어야 돼요. 피를 살리기 위해서 피 발린자. ㉯피가 발린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죽어 있다는 것을 확인케 해주는 거예요. ㉰죽어 있을 때 처음 창조 때의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 적용된 말씀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어느 성경 말씀도 다 어렵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어렵다는 말 안 하겠어요. 그냥 들어보세요.
1절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주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시게 되면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뭐가 생기느냐? 인간이 없어지고 여자가 돼요. 그것도 여러 여자가 아니고 한 여자가 돼요. 한 여자에서 아들이 태어나는 겁니다. 아들이 있는 집안이에요.
왜 주께서 이런 말씀을 했느냐 하면, 나의 안식이 있을 때 주님은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그 말씀의 발사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인간이 인간을 낳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탄의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봅니다. 인간이 사탄의 아들을 낳았다. 그 사탄의 아들을 낳는 예가 바로 유월절의 양인 인물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드는 그것이고요.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서 자기 유언을 스스로 완성 시키고 전개해 나가는 그 모순에 대해서 자칭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그냥 우리하고 잘해봅시다.”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한 소리가 있어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마 16:23)
근원적으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말을 그렇게 아끼시고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한 여자로만 되는 거예요. 여자의 특징은 아들을 낳지 아니하면 여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로마서 8장 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잉태하지 않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걸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보통사람은 뭐냐? 사탄이 낳은 아들이지요. 굳이 영화 <오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모가지 홱홱 돌아가는 귀신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육이 육을 낳고 육이 육을 낳는 거예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으시고…, 다 그런 거예요.
인간은 사람이라고 우기는데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여럿이 아니고 한 여자로 구축되는 겁니다. 요셉의 아내 마리아가 예수님 잉태할 때 성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저래야 된다. 혹 형사 천사가 물어올 때 “혹시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습니까?” 하면 우리는 모르지요. 몰라요.
본인이 이 땅에서 편안히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안식하기를 희구하고 그걸 유일한 소망으로 삼기 때문에. 물론 돈이 누적이 되어야 돼요. 적체된 돈이 많아야 내 마음이 안식을 누린다고요. 다들 안식을 누리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을 죽여서 그걸 여자로 만들어요. 만드는 방법은 성령이,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잉태한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에요. 그게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이게 지혜, 사람의 지식이지요, 사람의 지식으로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사람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성령의 나타남을 주입시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나타나게 되면 사람이 이성적으로 좀 아는 사람 같으면 성령이 납득이 된다’ 이렇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성령을 연계시키는 것이 아니고 아주 싹둑 잘라버려요. 유월절의 침투니까. 진짜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침공이니까. 난데없이 밤중에 맏아들을 다 죽이는 것은 상상도 못 했어요. 어떤 인간도, 히브리인도 몰랐어요. 갑자기 급습할 줄 몰랐어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열심히 하나님 믿으면 되는 줄 알았지요. 하나님 약속 믿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어느 인간도 약속 믿고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지혜라는 것이 장착되어 있고 ‘성경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에요.
뭐 듣는다고 알아요? 인간은 빼앗김이라는 것이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은 뭘로 무장되어 있는가?
자기의 잘남과 자기의 의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빼앗으려고 하면 왈칵, 그 사나운 도사견이 물어뜯듯이 확 달려듭니다. 베드로처럼요. “주님, 그래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우리가 주님 지켜드리면 되잖아요. 마음 맞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되잖아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기껏, 기껏, 기껏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거예요.
마리아가 임신을 해서 아기 가졌을 때 주변에 누구라도 알아먹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사촌 엘리사벳 자기도 6개월 전에 세례 요한을 임신해서, 둘 다 배불러 가지고 만났어요. 성경에 보면 그게 성령이 의해서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눅 2장)
그러니까 성령에 의해서 된다는 말은 우리 인간 속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그 시간관을 묵살해버리고 그 말씀 안에서 ‘미래, 과거, 현재’가 한꺼번에 다 이렇게 들어있다는 거예요. 들어있어서 어떻게 하느냐? 그 들어있는 말씀을 그냥 우리에게 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남자 털 많이 나는 곳에다가 파스를 이렇게 떡~ 붙여보세요. 붙이고, 이거는 하나의 질문으로 해도 되는데, 파스 붙이고 뜯을 때 파스만 뜯긴다. 맞다? 아니다? 아니죠. 파스를 붙이고 뜯어내면 거기에 뜯기지 말아야 할 털의 모근까지 다 뽑히죠.
말씀으로 창조와 완성, 시작과 끝이 한꺼번에 다 압축해서 들어있는 그 말씀, 그 율법도 그렇고, 그걸 뜯어내요. 뜯어낼 때, 인간들이, 사탄의 아들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데 신경을 쓰고 관심을 모으면서 서로 대화를 하는지 그 안쪽 내막, 그 안감까지 다 뜯겨서 나오도록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사람의 지혜는 자기 것을, 자기 의를 철저하게 방어하기 위해서 오로지 변명과 변명 용도로 용어들과 단어들을, 성경 구절들을 뽑아서 집결하게 되어있습니다. 나, 이 말씀 압니다, 이 말씀 압니다, 이 말씀 압니다, 십자가 압니다…, 이런 식이에요. 뜯겨나가는 게 없어요, 인간은.
여자들 그 잡티 있고 여러 가지로 기미낄 때, 기능성 화장품 팩 하나 얼굴에 처바르고, 그걸 떼기만 하면 잡티나 기미 한꺼번에 다 없어진다, 단 한 번에 없어진다면 노벨상감이죠. 그게 나왔다 싶어서 지금 귀가 번쩍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없어요. 고혼진이고 뭐고 안 돼요. 수십만 원 줘도 맞는 게 없다니까요, 이게. 레이저로 지져도 또 나오게 되어 있잖아요.
지독해요, 인간의 내부에서 이 악마가, 사탄이. 사탄의 자식이니까 사탄이 우리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가 자식을 그냥 놓아주질 않아요. 사탄은 우리에게 자기의, ‘선악과 따먹은 뒤에 이제부터 새 인간 되었다, 너는 이제 의로운 인간이야.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너의 수치를 네가 커버하며 살아가게 되면 너는 인간으로서 절대 자아, 절대 존재, 절대 안식, 너는 나처럼, 이 악마처럼 신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런 식으로 훈련시킨 거예요.
여러분들이 종교에 대해서, 뭐 성경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는지 모르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텐데, 종교계를 이렇게 보게 되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수련해서 마스터 되기’예요. 영적 수련해서 마스터 되기. 수련을 거쳐서 도사 되기예요. 수염 이만큼 난 사람 있죠, 수염 난 사람. 청와대 들락거린 사람 있잖아요. 수염 많이 나고, 석유 개발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 하면서.
이거는 어떻게 되느냐? 수련하면 된다는 거예요, 수련하면. 단련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수련소가 뭡니까? 세자로, 기도원. 기도원이잖아요. 왜 수련해야 되는가? 시간의 차이를 노려서 그래요, 시간의 차이. 지금은 내가, 내가 보기에 이 정도지만 내 속에 있는 악마가 삽입시킨 그 욕망은요, 지금의 나로 절대로 만족 못 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잉태한 한 여자가 되지 못하고, 그냥 사람으로 살고 사람 구실을 하는 사람의 그 차이점이 뭐냐? 모든 일에 감사가 없어요. 감사와 기쁨이 없고, 고마움이 없어요. 항상 미흡해요. 갈증을 느낍니다. 아직 마스터가 안 된 데서 자기가 자기한테 화를 내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 안에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치렀고, 그 치른 것이 성경의 예수님의 유언이기 때문에, 유언장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 유서를, 죽은 분만 그 유서를 실제화시킬 수 있어요. 그런 능력이 있어요. 그 능력이, 살아 있는 내가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시도하는 그 인간의 지혜와 대립 되면서, 구원은 인간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분이 살아 있는 능력으로 찾아올 때, 주님은 살아 있고 나는 그 앞에서 죽어있게 되죠.
사람이 사랑을 아는 순간 비로소 자신은 죽어가고 있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마땅히 없어야 될 존재인 것은 어떤 경우냐?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나 같은 것은 어찌 되든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사랑’이라고 했거든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그 사랑은 뭐냐? 나를 빈대 찍, 하고 문대듯이, 유월절 날에 쳐들어오듯이 나를 찍어 문대니까 그게 바로, 그보다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사탄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 하나의 몸으로 태어나… 저 바다에 누워~” 하는 것처럼, 내 몸으로 태어나서 나만 챙기는 그것을 찍어눌러서 없애버림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의 의, 나의 현실, 나의 안식 자체를 뭉개버리는 그것을, 그것을 다 이루었다 하잖아요, 그걸! 십자가상에서.
그게 뭐냐? 주님이 자기 유서를 자기가 스스로 완성 시킨 증거물이 되는 거예요. 성경을 그냥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위치와 신분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바로 복음을 듣는, 주의 음성을 듣는,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그의 음성을 듣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한테 믿음 있다고 자랑질 하려고 교회 다녔는지, 교회 하나 걸치고, 다리 걸치고 있으면 혹시 나를 구원할까 싶어서 걸치고 있는지.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과 가능성을 동원한 그것이 사탄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왜 진작 우리가 몰랐을까, 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급습하여 우리를 짓밟아 죽이시는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음을 저희들이 새삼 감사하고 기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전체가 지옥인데, 그 속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기쁨의 외침을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