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의미와 공적의미
2024년 6월 3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4:14-16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무엘상 2:25에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건드린 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악마의 개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인간을 용서하게 되면 인간에 대한 악마에 대한 사주에 대한 온전한 처벌이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범죄를 명확하게 해서 인간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 그 어느 인간도 예외없이 처벌대상이 됨을 드러내시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제사장 제도가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8장 전체를 걸쳐서 어떤 특정 인물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복장은 전체가 거룩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대제사장으로서 ‘거룩의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의 특징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를 따져서는 노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십니다. 인간이 이미 누구의 노예가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악마는 지옥불 속에서 인간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인간 마음 내부에 생각들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 눈에서 말을 들리고 그 악마 주변에 이글거리는 지옥불은 보이지 않습니다. 악마의 외침은 한결같습니다.
“너 자신을 믿으라. 네 앞에 누가 나타나거든 비켜라고 외쳐라. 나는 나만 믿는다고 말해주어라” 즉 악마는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사적의미를 안고 가게 합니다. 제사장 제도는 이런 상황 속에서 주어진 율법적 방식입니다. 제사장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시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려 가면서 결국 알게 된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 즉 일에서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희생 제단의 근처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양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 자신에게 내리던 시험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원인’에 개입하지 말고 ‘결과’를 수긍해야 됨을 뜻하는 겁니다.
이런 희생의 의미는 창세기 32장 야곱에게도 일어납니다. 야곱은 야밤중에 얍복강에서 누구랑 밤새도록 씨름하게 되는데 사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건드리지 말아야 될 분을 건드렸다는 감을 잡게 되고 그 분이 천상과 관련된 존재임도 압니다.
야곱은 살고 싶어서 축복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이름 바꾸기’였습니다. 곧 야곱에게 일어난 변화가 자신에게 복을 주셨던 여호와 하나님 당사자임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이 세상에 없는 분’ 혹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곧 ‘나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로서 야곱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에 본인이 참여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곧 자신의 죽음이며 사적 의미에서 공적 의미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시험이란 강제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로 인하여 도저히 사람으로 해낼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을 추진해 나가십니다. 시험의 예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욘 1:7-10)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제비뽑아서 기어이 찾아내십니다. 이
는 성도로 하여금 원인에 가담하지 못하게 하시고 결과로만 가담하게 하셔서 사적 의미에서
공적 의미로 전환시키기 위함입니다.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자기 포기
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겁니다. 그런 요나가 바다 속에 빠지고 고래
뱃 속에 들어가면서 발견한 것은 모든 인류가 이미 죽음 속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그대로 대제사장 제도 안에서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모든 인간
들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시험에서 벗어난 것은 대제사장 언약이 적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택한 백성 버
리지 아니하시는 그 원리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
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이 점은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전에 로마로
가는 배를 더는 운행하지 말라고 했지만 인솔자인 백부장이 사도 바울의 말보다 선주와 선
장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마저 사적인 의미에 유지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풍랑 속에는 276명은 하나님이 죽이시는 죽음에 참여하게 됩니다. 즉 사적 의미가 공적 의
미로 바뀌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듯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눈에 세상 전체가 지옥불 속의 세계인 것을 느끼게 하옵소
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히브리서 4장 14-16절(사적의미와 공적의미)240630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4장 14-16절입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라고 되어있어요. 우리 앞에 대제사장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나의 있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삭제당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 앞에 남이 있다, 그러면 그 남보다 내가 더 중요하죠. 그런데 우리 앞에 대제사장이 있다, 이 말은 ‘너는 있어도 소용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리 앞에 대제사장이 있는 것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나만 있었고, 처음부터 나는 내 위주로 살았고, 내 앞에 누구든지 얼쩡거리는 것에 대해 못내 불쾌하게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감히, 감히 내 앞에 나 말고 누가 있느냔 말이죠. 비켜라, 이 말이에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 앞에 누가 있어? 좀 비켜줄래? 내 앞길 막지 말고 비켜줄래? 나 당신 안 믿거든? 난 여기 나만 있다, 여기 홀로 있는 것만 믿거든? 그러니까 내 앞에서 좀 사라져줄래?” 그래서 발생 된 일이 바로 오늘 본문 15절에 나옵니다.
그분은 죄가 없다고 했어요. 죄가 없는데 14절에, 그분은 승천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죄가 없는데 승천하게 되었다는 말은 한때 사람들이 사는 이 땅에, 사람들 사는 세계에 오신 적이 있다는 겁니다. 오신 적이 있는데 그분 빼놓고는 어느 인간도 승천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분이 승천했다는 것은 무슨 내용을 전제로 하느냐? 그분은 죄가 없는데 인간들은 그분이 죄가 있다고 살해한 그 사건 이후에 그분은 승천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분은 죄가 없고 우리는 죄가 있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죄가 있는 채로 여기 있는데 그분은 우리 앞에 있어요. 있는데 뭐가 없느냐? 우리는 죄가 있는데 그분은 죄가 없는 분으로 우리 앞에 있어요. 어쩔 건데요? 앞으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 있는 나를 계속 붙잡을래요, 아니면 나를 떠날래요? 우리 앞에 계신 대제사장 속에 합류한다는 것은 어떤 각오를 해야 하냐면, 내가 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그런데 나만 죄 있습니까? 나만 쓰레기인가?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똑같은 나 같은 인간들이에요. 내가 죄 있다면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 죄 없는 자가 없다는 논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 죄 있는 자를 왜 붙잡습니까?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우리 앞에 제사장 있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의 어떤 인간도 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믿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예수님만이 대제사장이에요. 목사, 집사, 장로 아무도 아니에요. 어느 누구도 믿을 가치 없습니다.
주님께서 믿을 분을 내 앞에 두셨다는 것, 그런데 여기 본문에 보면 앞에 두신 분이 그냥 곱게 나타나서 나를 믿어라, 그렇게 오셨던 분이 아니고 15절에 보면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아니요’가 두 개나 붙었습니다. 어떤 점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개나 붙었어요?
‘우리 연약함을 체율하시고’, 이래도 되는 걸 가지고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부정사를 이중으로 두 개나 한 것은 우리가 평소에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그 상황을 전제로 한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을 안 해요. 자꾸 긍정을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로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아니다, 라고 할 자가 아니요.’라는 것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중부정을 넣은 것은 요지부동으로 너만 믿는 것을 그만 믿고, 네가 이중부정으로 너를 굳세게 믿은 것처럼 이제는 널 믿지 말고 이중부정으로 찾아온 나, 대제사장을 믿으라고 이런 표현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뭐 편안하게 사신 게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시험을 받은 자의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는 시험을 이겨내지를 못한 자였다, 라는 것이 이미 판정, 결론이 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 말은 “이미 우리는 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연약한 자기 자신들을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놓지 못하고 있나? 연약한데, 시험을 못 이기고 연약한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그걸 긍정하고 붙들고 있는가? 아, 그거 봐. 시험 이기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잖아. 너 아니야. 그러니까 여전히 너 자신을 믿을래?”라고 강하게 우리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핑계 대냐면 “우리는 연약하거든요!” 할 때 주께서 15절을 준비하신 것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곧 “네가 연약해? 그러면 할 수 없지. 버려야지.” 이게 아니라 연약한 자에게 긍휼하심을 주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은, 연약한 것을 충분히 내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약함을 아는데 연약해서 교회 못 나오겠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죠. “연약해서 말씀 못 지키겠어요.”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꾸 날아가게 하지 말라는 거죠. 불쌍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 말을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네가 매사에 원인으로 들어서지 말고 그 결과를 수긍하라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잖아요.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결과를 내가 얻어내겠다는 생각은 하나님이 체휼하신 긍휼하심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냥 결과 안에 사는 거예요, 결과 안에. 원인으로 합세하지 마시고, 결과를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하신 결과를. 그것도 못합니까, 정말?
생긴대로, 주어진 대로 주어진 상황대로 받아들이는 거, 그것도 못하냐, 이 말이죠.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과분한 친절을 베푸시는가, 사랑을 베푸시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그동안 누구의 말을 계속해서 내부적으로 들어왔어요. 다시 말해서 지옥 불에 서서 외치는 자는 악마예요.
악마는 이미 알아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이미 들통났어요. 나는 이미 멸망 당해서 지옥 불이 영원히 내가 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알아요. “아직 그 시기가 되지 않았는데 왜 일찍 오십니까?” 하고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들었는데 그 지옥 불이 피어 있단 말이죠.
여러분이 상상해보세요. 지옥 불이 피어 있는데 그 속에 시커먼 하나의 어떤 인물이 서서 말을 외치는 거예요. 악마는 이미 지옥 불 속에서 외치는데 인간들 속에서는 그 지옥 불은 보이지 않고 말만 계속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성도한테는, 이미 결과에 포함된 사람에게는 이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들려오는 것은, 뉴스고 뭐고, 신문이고, 방송이고, 언론이고, 그리고 모든 TV 프로그램이 전부 다 악마와 사는 사람들이 지옥 불 속에서 외치는 거예요, 그게. 뭐 음식 만드는 프로그램에다가 운동하는 거, 살 빼는 거부터 해서 예능 프로, 드라마 등 모든 게.
지옥에 서서 인간에게 사주하고 있고, 계속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기계처럼 그대로 나타내 주는 겁니다. 그게 팩트에요. 이게 사실이에요. 그 외에 다른 사실은 없습니다. 이것을 누가 아시는가, 예수님이 아시죠. 예수님은 어떻게 아시는가? 그 지옥 불에 있는 마귀와 1대1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아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구원하면 되는데 오늘 본문에 “우리 앞에 큰 대제사장”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이라는 이스라엘에 있는 제도의 그 단어를 왜 우리 앞에 내놓는가 하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다 했다. 용서해줄 게. 같이 천당 가자.” 이러면 되는데 거기에 대제사장이라는 직능, 역할, 기능을 굳이 오늘 14절에서 왜 언급을 해주시느냔 말이죠.
대제사장, 이거 빼버리면 어떤 점에서 우리는 복음에 대해 누락된 게 되는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우리보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찾아왔어요. 이스라엘에게 찾아와서 율법이 주어졌는데 율법 안에 대제사장 제도가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28장 4절에서 41절까지 길게 그 대제사장을 세우고 특수한 복장을 입힙니다.
머리에는 가는 베실로 짠 관이 있고요, 끄트머리에 청색 실의 관 띠가 있고, 금으로 된 성패가 있는데 글씨도 있어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 그 밑에 얼굴이 나오겠죠. 얼굴 밑에 목이 나오겠죠. 그다음에 견대 두 개가 있습니다. 호마노라는 보석으로 만든 견대가 있고 그 견대에 여섯 지파씩 이름이 나눠서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금 사슬로 오늘날의 방탄복처럼 축 내려와 있는 흉패가 여기 있습니다. 흉패는 금으로 만들었고 그 하나하나가 금고리로 되어 있고 열두 개의 보석으로 가로 세줄 세로 네 줄 해서 12칸들이 있고 칸은 금으로 입혀져 있습니다. 그 금테마다 열 두 지파 이름들이 새겨져 있어요.
홍보석은 르우벤, 황옥은 시므온, 녹주옥은 유다, 석류석은 단, 남보석은 납달리, 홍마노는 갓, 호박은 아셀, 백마노는 잇사갈, 자수정은 스불론, 녹보석은 베냐민, 호마노는 므낫세, 벽옥은 에브라임. 보석마다 색을 달리해서 열두 지파를 이렇게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하나님께 점치는 판결을 할 때 두 개의 주사위 비슷한 게 그 안에 들어있어요. 그걸 가지고 ‘판결흉패’라고 합니다. 그 밑에 에봇으로 만든 띠가 있고 그 밑에 에봇이 있는데, 에봇은 금색, 청색, 자색, 홍색의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고, 에봇 받쳐주는 겉옷이 있는데 가는 베실로 짠 옷을 입었고 그 끝에 딸랑딸랑 석류로 만드는 금방울을 달아서 소리가 나도록 했습니다.
이 대제사장이 7월 10일, 홀로 1년에 한 차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성소를 지나 지성소에 들어갈 때 과연 대제사장이 아직도 살아 있나, 살아 있지 않나,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소리가 바깥으로 들리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독대하고 직접 만나는, 천사가 있고 언약궤가 있는 곳에 단독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이스라엘을 짊어지고, 이스라엘을 앞에 안고 그렇게 들어가는 사람, 하나님의 거룩을 대표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으로 완성케 되는 대표적 사람을 대제사장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이미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이 7월 10일 지성소로 갈 때 그냥 빈손으로 가면 안 되겠죠. 평소에도 제사는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제단에 소나 양과 염소를 잡고, 그 피를 들고 전체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들이 1년 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일체 묻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7월 10일은 1년 치 죄를 대사면 하는 날입니다.
회개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일 년 치 모든 지은 죄를, 그 피를 언약궤 뚜껑에다 부음으로서 한꺼번에, 동행하는 이스라엘의 죄가 사해지면서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는 그런 장치를 대제사장이 대표해서 하는 거예요.
이렇게 율법에 나오면 역시 인간들 생각도 만만치 않거든요. 내 앞에 네가 왜 있느냐는 거예요, 내 앞에. ‘나는 나만 믿을 거야. 내 앞에 얼쩡거리지 마.’라는 이런 사고방식이 아무리 성경을 봐도 여전하거든요. ‘나는 나 외에 아무도 안 믿는다.’ 이게 여전하기때문에 ‘다 좋은데 굳이 그럴 필요 뭐 있냐. 우리를 그냥 용서하면 되잖아. 왜 대제사장 제도가 굳이 있어야 되는가?’ 그렇게 또 따지게 될 거예요.
사무엘상 2장 25절에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서로에게 잘못을 할 수가 있어요. 인간이 인간과 살다 보면 서로 건들 수는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건드리고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되면 그걸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죄지었으면 그냥 벌 받아야 되지, 하나님께 죄지었으니까 용서해 달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 배후에 이미 지옥 불에서 서서 외치고 있는 악마와 관련되어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을 용서하게 되면 악마도 용서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악마는 인간하고 죄지은 게 아니고 악마는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게 원리에요. 그게 원리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아무리 인간 사이의 우애가 돈독하고 이웃 간에 사랑이 넘쳐도 하나님을 건드린 죄에 대해서 용서할 길이 없다면 악마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지옥 불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뭐 하나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한다, 신났지?
그런데 대제사장은 왜 있지? 그냥 용서하면 되는데 대제사장 제도가 여기서 언급되는 이유가 뭐냐? 대제사장과 연관되지 않으면요, 갑자기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 돼버려요. 어른이 어린 애들 대하듯이 “선악과 따먹었어요? 잘 했어요.” 이러고 끝날 문제에요.
그 정도로 나는 대자대비한 하나님이라고, 뭐 이렇게 엉뚱하게 하나님이 부처처럼 되어 버리는 식으로 이렇게 나온다고요. 하나님을 건드리는 자는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을 건데 왜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을 용서한 것처럼 트릭을 쓰시고 위장하듯이 그렇게 찾아오시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대제사장 제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졸지에 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제사를 시키면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아브라함을 시험하사”라고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가? 아브라함은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아브라함도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건드리고, 하나님을 건드린 죄에 대해서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건드린 것에 대해서는 어떤 중재자도 소용없고, 죄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 용서받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는 것을 주께서 아시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거예요. “네 아들 바쳐라.” 마치 아들 바치면 아브라함이 용서받는 것처럼, 의인이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시험한다는 그 시험에 본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상대로 시험하지 인간하고는 시험할 대상도 아닙니다. 시험에서 이기면 구원시켜주는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이 시험이라는 것은, 이 시험은 네가 관여할 시험이 아닌 거예요. 네가 빠지지 않고 이 시험에 참여한다는 그 시험에서 네가 빠져나가야 돼요. 시험에 들지 말아야 돼요.
야고보서 1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인간 자체를 악으로 보기 때문에 악하고 거래할 생각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맛이 갔으면 너는 지옥이고 저주에요. 끝났어요. 마지막 시험 하나? 마지막 시험 없어요. 그냥 끝난 거예요. 시험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되신 그 하나님과 시험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악마와 상대할 대상조차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의 노예입니다. 노예의 특징은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그게 노예에요. 생각하면 노예가 아닙니다. 그거는 사형이에요. 무슨 기계가 생각을 해요. 네가 인공지능이야?
인간은 악마의 종입니다. 죄의 종이라고 로마서 6장에 나와 있죠. 인간은 악마의 노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냥 움직여요. 그래야 인간들도 지옥 갈 수 있거든요. 그러면 악마가 노리는 게 뭐냐?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 제도가 네 앞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말라는 거예요. 네 인생은 네가 개척하는 것이지 네가 뭘 믿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너는 소중하니까. “너의 소중함을 믿고 혹시 하나님이 뭘 사랑한다 하거든 그때는 덥석 물어라.” 왜?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중한 게 아니고 내가 소중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뭐 해준다고 하면 덥석 물고 그걸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겠죠.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을 바쳤습니다. 아브라함도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건 이번 자기에게 시험한 그 시험이 자기한테 시험한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이 자기 아들 대신 죽기로 된 수풀 속의 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빼주시는 거예요.
네가 원인자로서 들어갈 것을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하면 복 받도록 하는 것을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결과만 받을 뿐이지 내가 원인자가 되어서 그 원인의 결과를 내가 수습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다시 생각해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기도가 예수님 본인을 위한 기도에요. 예수님이 시험을 이겨내야 그 결과로, 열매로서 성도가 생기는 거예요. 그 절차가 이렇게 돼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고 오늘 본문에 나와 있죠. 그러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노예입니다. 거룩한 노예에요. 거룩한 이 노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이 죽어야 노예가 돼요. 왜? 인간이 죽지 않으면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은 성도를 의의 종으로 바꿨습니다. 의만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결과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아브라함이 시험받은 것을 다시 생각한다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시험 들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그 사적의미, 개인적 의미를 하나님께서 뭘로 바꾸느냐? 제사라는 공적의미로 전환시키는 일을 하세요. 사적의미를 공적의미로 전환시켜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하루 살면서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그렇게 매사가 안절부절한 것은 전부 다 무엇 때문에 그런가 하면, 나의 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사적 의미가 없고,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결과로 주어진 예수님과 관련된 공적의미라면 사적의미가 없는 이상은 나를 위해서 고민하거나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사적의미는 자꾸 나의 개선을 기대해요.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한다고요. 그럼 누가 좋아합니까? 뒤에서 마귀만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걸. 끝까지 자기 자신을 붙잡아야 하니까 우리 앞에 있는 제사장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용하게는 만들지만 믿지는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사적의미를 공적의미로 바꾸는데 필요한 것이 시험이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시험이 없으면 사적의미가 공적의미로 안 바뀌어요. 제가 보기에 사적의미가 공적의미로 바뀌는 적절한 예가 있어요. 최근에 에릭 치엔이라는 대만 마술사가 마술을 하는데 폭이 좁아요. 1센티도 안 되는 폭의 탱탱한 줄을 탁자 위에 걸쳐놓고 색이 파란 포커 카드를 끄집어내서 단순하게 테이블의 좁은 폭 밑으로 집어넣자마자 빨간색으로 다 달라졌어요.
이번에는 파란색을 집어넣었는데 통과하니까 빨간 카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카드를 집어넣는 중간 과정에, 잠시 그 줄에 걸치게 스톱을 시켜요. 그러니까 그 줄까지 간 것은 파란색이고 폭 1센티 줄 밖에 있는 건 빨갛게 변했어요. 마저 빼내니까 전체가 빨갛게 되었습니다.
사적의미가 대제사장을 경과하니까 공적의미로 달라졌어요. 사적의미는 내가 주인이에요. 그런데 공적의미는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공적의미의 노예에요. 종이 된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 마술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탱탱한 줄이 뭐냐? 아까 제가 제사장 제도라고 했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언약이에요. 언약을 통과하니까 개인적인 의미는 없어지고 언약을 증거 하는 공적의미의 하나의 역할을 믿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 겁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 전환, 그 전환은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만날 때 똑같이 벌어졌어요. 하나님을 만나 씨름하고 난 뒤에 야곱은 야곱이었는데 만나고 난 뒤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어요. 그럴 때 야곱은 그분이 누구냐,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내게 축복 준 그 당사자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뭐냐? 출애굽기 3장 14절에 보면,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는데 이걸 인간 세상의 말로 옮겨 버리면 여호와는 아무것도 없는 자, 이 인간 세상에는 어디에도 없는 자가 됩니다. 어디에도 없는 자. 그걸 인간을 경유해서 이야기하면 인간세계의 어떤 인간도 한 적이 없는 일, 없는 자입니다.
이걸 이름을 네 자로 짓는다면 ‘아무도 안’ 아무도 아니한 일, 결과, 아무도 해 본 적이 없는 일, 이스라엘, 여호와가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존재하면서도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아니했던 사람으로 취급받은 분, 그분이 바로 ‘나, 스스로 있는 자’에요. 긍정적으로 말해서.
‘스스로 있는 자’ 아무것도 아닌 자, 부정적으로 표현했잖아요. 그걸 긍정적으로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스스로 계신 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분, 그게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개입했습니다. 그게 시험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주신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했죠.
이번에는 아브라함 말고 요나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요나 1장에 보면,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될 수 있는 대로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여호와 계시다는 성전으로부터 최고 먼, 그 당시에 제일 먼 지금의 스페인 쪽으로 배 타고 도망가려고 했었습니다.
걸렸죠. 자기는 배 탔으니까 이제는 내 계획대로 잘 됐다 하고 배 밑으로 가서 쿨쿨 잠을 자고 있었는데 바깥에서 폭풍이 치는 걸 몰랐어요. 그냥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잠을 자고 있지 않았던 다른 손님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 폭풍은 이유가 있다, 각자가 믿는 신들에게 기도하소서.”하고 선장이 선창해서 각자 자기의 신을 부르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도 바다에 던지고 했는데 요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배 밑에서 잠만 잘 자더라, 이렇게 된 거예요.
자, 7절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제비를 뽑는 거예요. 제비뽑기를 한 거예요. 어떤 언약적 결과를 우리가 나서서 내가 나에게 원인으로 집어넣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제비뽑기를 해야 돼요. 뽑기를 하는데 요나가 “나는 여호와를 선택했어.” 이런 거 없어요. 요나는 지금 여호와에게 도망치고 있습니다. 왜? 나는 나를 믿으니까. 내 계획을 믿으니까. 내 인생 스케줄을 믿으니까. ‘내가 왜 나 말고 다른 분을 믿어?’ 그럴 필요 없어요. 난 나를 믿어요.
배에서 잠자고 있을 때 누가 깨웠느냐? 주변에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요나를 깨웁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는데 하필 제비가 요나에게 딱 당했어요. 당하니까 누가 전도하느냐면 다른 신, 이방 신을 믿는 자들이 요나에게 이렇게 전도합니다. 8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절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지금 누가 누구에게 나무라고 있는 거예요? 이방 신, 동화사 주지 스님이 “너는 왜 교회도 안 나오고 이 시간에 뭐 하고 있어?” 하고 나무라는 거랑 똑같아요. 주지 스님이, 중이라고 하지 말고 스님이라 해야 돼요. 스님께서 “너는 주님을 믿어야지 왜 여기 동화사 등산하러 왔어? 갓바위 뭐라고 왔어?” 하고 크게 나무라는 거예요. 왜냐면 갓바위가 폭풍에 지금 무너질 판이에요. 동화사가 지금 무너질 판이 돼 가지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하나 제비뽑기 위해서 애꿎은 배 전체를 뒤집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누구에게 전도하느냐? 천국 갈 사람을 노리고 표적으로 삼아 주께서는 전도를 합니다. 왜? 사적의미에서 공적의미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놓칠 리가 없고 놓칠 이유가 없지요.
많은 목사님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걱정거리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목회 이렇게 하다가 정말 교인 다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돈도 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인들, 그냥 왔다 가는지 어쩐지 그런 사람들은 모르겠고, 봉사할 것 다 하고, 십일조나 헌금도 크게 다 내고, 목사에게 깜빡 죽는 그런 교인들 다 떠나버리면 나는 우째되노.’ 하는 염려와 걱정이 사업하는, 목사를 갑자기 사업가로 집어넣었습니다, 사업하는 모든 목회자에게 다 들어 있어요.
그 목회자가 무엇을 빠뜨렸느냐? 요한복음 6장 39절을 빠트린 것이 돼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는 이 말씀을, 만약에 하나님이 택한 구원받는 목사라면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교인들 다 떠나게 만듭니다.
“다 떠났냐?” “예” “그것 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했지? 했어, 안 했어?” “했어요.” “어때?” “기뻐요.” 이렇게 되어야 되지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이 뭐냐? 나의 사적의미, 목회자의 사적의미의 선을 지나서 공적의미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요나가 선지자일 때 북이스라엘은 제일 강건하고 국토도 넓었던 때에요. 이제 선지자가 축복 안 해도 알아서 축복이 넘치는 그 시절에 ‘나는 내 할 일 다 했으니 이제는 떠나도 괜찮겠지.’ 하고 떠나는 겁니다. 요나는 걸렸어요. 걸려서 뭘 하느냐? 걸리고 뽑힌 요나만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죽음에 참여해요. 십자가 죽음에 참여한다는 것,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는 그런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그 축복, 예수님 십자가 죽음에 풍덩 들어갔지요. 들어가면서 요나가 경험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모든 인간, 이 세상 자체가 고래 뱃속이라는 것, 죽음밖에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선지자 요나가 경험하게 됩니다.
목회자가 개척교회 하면서 한 20명 모았는데 다 떠나고 말았어요. 자기 아내도 교회 안 나오려고 해요. 이제는 자기 혼자밖에 안 남았어요. 다 떠났어요. 비로소 여기서 사적의미, 내가 목사다, 라는 사적의미를 갖고 있다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되고, 걱정되고…, 이게 다 기어 나오겠지요. ‘우째? 나 우짜면 좋아? 이렇게 되면 나 또 배달의 기수 해야 해? 아니면 대리운전 해야 해?’
인터넷 보면 목사가 대리운전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요. 그것도 경쟁률이 높아요. 아직까지 그 목사는 사적의미 속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 사적의미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 악마가 있는 거예요. 지옥 불 속에서 마귀가 사적의미를 붙잡고 있도록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사도행전 27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잡혀갑니다. 약간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는데 처음에는 바울을 싣고 가는 배가 순항했어요. 그레데 섬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봐도 심상치가 않아요. 그래서 사도행전 27장 9,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여기서 쉬었다 갑시다, 하고 계속 말렸어요. 말렸는데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서 겨울 지나고 갑시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이, 인솔군인이 경험 많은 선주나 선장의 말을 더 믿었다 그 말이지요. 그것은 뭐냐? 사도 바울은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사도 바울이 원인이 되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나님이 나서서 그 사도 바울의 원인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이것은 타인의 말에 사도 바울의 인생이 구차없이 끌려가는 인생이 되게 만들었어요. 그러고 난 뒤에 과연 사도바울의 말대로 유라굴라라는 광풍이 지중해에 불어닥쳐서 다 깨졌지요. 살 여망이, 희망이 없어졌어요. 276명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럴 때 사도행전 27장 21-24절에 보면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사도 바울과 동행하는 276명이 사도 바울로 인하여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밀어붙인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이잖아요. 구원이란 뭐냐? 사적의미로부터 탈출이에요. 개인적인 의미로부터 탈출하는게 구원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생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강제조치를 해서 풍랑도 준비하고, 사도 바울의 말도 안 듣게 되고, 그들이 그렇게 믿던 배, 배 자체가 완전히 다 부서졌어요. 배가 없는데 바다를 건너가요? 뭐 출애굽도 아니고요.
출애굽은 아직도 계속됩니다. 아무도 못 한 일,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못하지만 해주신 그 일을 경과하면서 사적인 의미를 가진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 대제사장의 불쌍히 여김이 어떤 효과로, 실제적인 현실로 드러나는가, 거기에 초대받은 사람, 대제사장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함으로써 나는 죽고 예수님의 종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작업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현실로 현실로 계속 이어집니다.
배 다 부서졌지요. 갈 수 없지요. 그런데 결국 멜리데 섬에 도착했거든요. 사도바울이 거기서 갑자기 뱀에 물렸는데도 멀쩡한 일이 있고 또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의 부친의 병을 낫게 함으로써 흔쾌히 배와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해줘서 시칠리아 섬까지 가고 결국 로마에까지 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일이 지중해에서 풍랑 만난 그때만 그렇습니까, 아니면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까? 그 전에도 계속 그런 식으로 그동안 사적의미에서 공적의미, 하나님의 언약적의미, 인간이 못했지만 하나님이 해내신 그 의미로 계속 바꿔준 거예요.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 이미 체결된 그 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된 거예요.
자기가 통박 굴리면서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받겠다는 자기 구원, 사적의미를 유지한 채 구원받고자 하는 그게 마지막 시험이에요, 마지막 시험입니다. 이 말만 믿으면 나 구원받겠다 하는 그것이 마지막 시험, 악마가 준 마지막 시험이에요. 그 시험에서 벗어나야 돼요. 빠져나와야 돼요.
물론 인간의 방법으로는 안 되고 그야말로 제비뽑기가 되어야 돼요. 주변의 다른 불신자들이 전도해야 돼요. 안 믿는 사람들이 전도해야 돼요. “너는 예수 믿으면서도 왜 이런 자리에서 술을 먹느냐? 먹지 마!” 다른 사람이 예수 믿도록 부추겨 줘야 돼요.
시험에 관해서 세 번째 예를 들면 열왕기하 13장 14절-19절에 나옵니다. 북쪽 요아스와 선지자 엘리사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게 “당신 없이는 우리는 죽습니다.” 요아스 왕은 여전히 사적의미를 갖고 있어요. 내가 북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이 의미를 가지려면 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중재자는 누구다? 선지자 엘리사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병문안 와서 “살려주이소. 살려주이소!”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과연 살려주는지 망하게 하는지 봅시다. 15-17절에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활을 화살을 잡고 동쪽 창문을 열고 쏘세요, 해서 요아스 왕이 쐈어요. 그리고 18절에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번 치고 그친지라.” 화살을 땅에 내리 치라고 했는데 몇 번을 치라는 그런 말은 없었어요. 요아스 왕이 엘리사가 시키는대로 화살을 땅에 내리쳤어요. 한번, 두 번, 세 번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곧 죽을 엘리사가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19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왜 세 번만 쳤냐고 한 거예요.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쳐야지 왜 세 번밖에 안 칩니까?” ‘아, 진즉 이야기하지 진즉에! 진즉에 이야기 좀 해주지’ 정말 미칠 이야기에요. 엘리사에게 껌벅 죽는 요아스 왕 같으면요, “한 여섯 번 치세요” 했다면 여섯 번 왜 안쳤겠습니까? 몇 번 치라는 소리 안하고 그냥 치라고 해서 세 번 쳤더니 세 번 쳤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면 다섯 번 쳤다면 뭐라고 나왔겠습니까? 왜 여섯 번을 안 쳤느냐고 그렇게 나왔을 거예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당신은 사적인 의미가 있는 이상은 공적의미로 바꾸려면 당신과 당신의 나라는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당신이 구원받고 당신의 나라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해서 어떤 죄사함의 장치가 없기 때문에.
세상만사가 이런 거예요. 우리가 예수 믿고 뭘 바르게 하잖아요. 주께서 꼭 초를 칩니다. 꼭 초를 쳐요. “주님, 저는 교회 일주일에 세 번이나 갑니다.” 주께서 화를 내면서 “왜 일곱 번 안 가고 세 번만 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우리가 내놓는 어떤 것도 내가 나를 지키고, 내가 나를 구원시키고, 내가 믿는 이 나를 계속 유지하려는 책략에서 나온 마귀적 행동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를 ‘너는 아직도 마귀의 종이다’라고 판정내려서 우리로 하여금 대제사장의 죽으심에 풍덩 합류시킵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 이유가 뭐냐? 주님이 모든 것을,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분이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해서 매사를 내가 나를 동원시키고 나를 부추겨서 어떤 결과를 내고자 하는 이것, 이것 때문에 제사장이, 대제사장 예수님이 죽었다. 너 잘난 맛 때문에 죽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시고, 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리보고 지적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부터는 너 아니고 나야, 나 예수야. 너 아니고 나 예수야.” 이것을 성도라고 합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불렀다는 거예요. 제비뽑기 하듯이 불러낸 거예요. 로마서 1장 6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소유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서 작동하게 되면 출애굽기 19장 5, 6절 말씀처럼 우리는 다 이 땅의 왕 같은, 제사장 같은(벧전 2:9) 존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상식적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좋은 분이라고 간주하고 잘해주겠지, 라는 상식으로 살았는데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그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이제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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