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퍅의 구조
2024년 6월 1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4:9-11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강퍅이란 ‘힘’이라는 것을 소망하면서 발생하는 겁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보려는 것입니다. 그 강퍅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끝’을 모르기에 나오는 겁니다. 인간들은 아예 ‘끝’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영원하기를 원합니다. 인간들의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의 파멸’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이 설사 망해도 자신은 영원히 안 망하는 세상으로 튈 생각을 합니다. 무슨 근거로 이 주장을 요청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신이 절대 신이기 때문입니다. 신이란 최후의 가치요 최종의 의미라고 여겨지는 겁니다. 비록 현실 속에서 대단히 평범해도 이 평범한 의미를 가지고 영원까지 밀어붙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시도를 단호히 차단하십니다. 인간이 해내는 모든 성과와 과정은 다 무의미합니다. 결과마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미있고 여기시는 것을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의 성취’입니다. 아예 인간들은 이 언약 달성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아 자체에서 강퍅이 쉴새없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0: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브라함은 남들에게 자신의 의미있음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에 평범을 유지하면서 남들에 대해서 튀지 않는 생활을 지키려합니다. 남들도 무의미하지만 아브라함도 역시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아브라함을 무의미로 방치하지 아니하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선지자 기능의 현실자로 만들어버리십니다.
힘없는 신체가 합당한 인물을 내세워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인들이 임신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일하시고 그 일의 내용이 인간들이 기대한 데로 되어지지 않음이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의미를 그 이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로 확대시키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지상에 힘이 없고 대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인물로서 그 당시 가장 강대국인 바로 왕을 만나게 하십니다. 당연히 바로 왕은 모세와 아론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랬더니만 그 이후에 애굽나라 전체의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애굽나라를 끝장보시려고 하십니다.
바로왕은 버틸 때까지 버티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즉 ‘자아의 끝’을 이처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강퍅’입니다. 하지만 이 강퍅은 바로왕에서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지점이든 어느 순간이든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필히 강퍅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 완전함에 대해 집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경배, 자아에 대한 순종, 자아에 대한 현신은 현실 속에서 매사에 상처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절대를 달성할 재료나 원칙이 용납되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율법이나 말씀을 이용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완벽을 건설하고 구축하려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연마하고 또한 윤리있게 광내려고 합니다. 이 시도를 통해서 인간들은 마음에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이 상처에 대한 치료책으로 인간들은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 대해서 복수하려 합니다. 자기 상처가 더는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말입니다.
도대체 바로왕은 왜 자꾸 바로의 기적 앞에서 강퍅을 내어놓습니까? 그것은 본인이 지키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즉 “내가 이만큼 했을 때, 나는 얼마나 많은 결과를 획득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주님이 하신 일을 자기 일로 전환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마음의 샃처를 본인이 복수하므로서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은 늘 자신에게 실패감을 알려주고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이런 세상의 공격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를 앞장 세워서 내부적 상처를 잊으려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힘 모아 세상과 주변 세상에 복수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이 상상도 못하는 큰 상처를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쏟아놓은 더러운 배설물을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자신의 생명으로, 희생의 피로 정화시켜 버리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옥만들기의 정당성을 수립됩니다. 지옥이란 오로지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의 집결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기준으로 이처럼 강퍅과 교만와 완악이 정해지는 겁니다.
힘 있는 왕을 의존해서 살겠다는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9:6에 의할 것 같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즉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다 희생물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현실’과 ‘현실의 끝’을 다같이 보며 사는 백성들이 됩니다. 마치 꼬마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성도는 제사장직이라는 자리에서 세상의 현실과 그 현실이 어떻게 끝장나는지를 다같이 보게 됩니다.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자아에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몸이란 인간 자아의 것이 아니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 결과는 이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즉 성도는 자신의 자아와 몸을 분리되어 구원됩니다. 몸은 주님의 몸이요 자아도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로서 자기를 위한 구원에 애초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언약이 없는 바알종교 숭배자에게 통하는 겁니다. 아무리 자아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자신이 허락한 것만 들여다 보내어도 주님은 말씀의 위력으로 바깥에서 열고 자아 속에서 말씀을 퍼트리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말씀의 지배 안에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가 주님의 의미의 결과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히브리서 4장 7-11절(강퍅의 구조)240616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4장 7-11절입니다.
히브리서 4:7-11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성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는데, 하나님이 일을 벌이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요소가 들춰지고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일을 누가 방해하느냐, 감히,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감히 누가 방해할 수 있느냐? 그런데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인간들이 여기 살아 있다, 또는 존재하고 있다, 인간이 있는 이유가 명쾌해졌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일이 마주 찾아올 때 그들은 예외 없이 강퍅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강퍅함, 완악함, 교만함,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들춰지고 있으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강퍅함, 완악함, 교만함이 나오거든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친히 찾아오신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강퍅하고 대드느냐? 하나님은 하나님만 있으면 돼요. 왜냐하면 일하는 주인공 당사자는 전부 하나님 홀로 하시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이 땅에 있어서 일할 수 있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게 뭐냐? 인간은 아무리 이 땅에 살아도 무의미하다고 하는 거예요. 무의미한 거예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창세기 20장 2절에 그랄 왕 아비멜렉을 찾아가게 됩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내와 같이 존재하고 있죠. 분명히 있단 말이죠. 있으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을 계속 있게 하기 있기 위해서 나름대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은 있고, 거기에 그랄 왕 아비멜렉도 있고, 둘 다 있는 겁니다. 둘 다 있다, 있다, 있다는 말이죠. 여러분 옆에 보세요. 다 있잖아요. 둘이 만났다 그 말이지요. 만났는데 아비멜렉 쪽에서 “너 뭐야?” 이렇게 나온 거예요. 아브라함이 “나? 너하고 똑같이 그냥 있어. 나 그냥 인간이야.”
아비멜렉이 “아닌 것 같은데? 너는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가 지난밤에 꿈자리가 보통 사나운 게 아니었거든.” 그게 그냥 꿈으로 끝난 게 아니고 그때부터 그랄 왕 아비멜렉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을 못 합니다. 태가 다 닫혀버렸어요. 그러면 아비멜렉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묻는 수밖에 없어요. “누구냐, 너!” 도대체 너 누구냐고. 아브라함이 “몰라. 왜 자꾸 나한테 물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똑같아요. 차이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여기 이 덩치가 있으니까 있는 대로 살 뿐인데 아비멜렉도 몰랐고, 아브라함도 몰랐던 새로운 의미가 아브라함에게 덧입혀진 거예요, 새로운 의미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브라함아, 네가 거기 있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너를 통해 까발리겠다.” 그것은 뭐냐? 아브라함이 움직이더라도 정작 움직이는 것은 아브라함의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냥 자기 생존에 열중했을 뿐이에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과 똑같아요. 자기 생존에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냥 밥이나 먹고 살고, 돈 벌고, 거기에 열중했어요. 그 외에는 할 것이 없으니까요. 문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생존이. 밥 먹고 살았습니다, 애 키웠습니다, 교회 다녔습니다, 이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의미가 없는가? 그 모든 인생이 어떤 경우를 당하고, 어떤 숱한 일들을 만나도 결국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뭐냐? ‘내가 여기 있네.’ 달랑 이거 하나 남는 거예요. 요양 병원에 가서 ‘내가 여기 있네.’ 이 무의미, 이 무의미를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네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기도하고, 그러니까 전도하고, 그러니까 헌금하라.’ 이게 주의 뜻이 아닙니다. 네가 헌금, 기도, 전도, 선교, 예배 참석, 성경 공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아…, 이건 무의미해서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발언들이에요.
주의 뜻은 이겁니다. “네가 있나?” “네. 저 여기 있습니다.” “네가 의미가 있나?” “저 의미 없습니다. 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게 내가 일한 결과다.” 뭘 해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고 지금 네가 있다는 자체를 내가 벌인 결과 속에 집어넣으라는 거예요.
그걸 결과 속에 집어넣으면 그동안 내가 내 생존에 집중했고, 나 지키기에 열중했던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무엇을 방해하고 있었던가, 왜 하나님은 내가 인생 사는 것을 가지고 강퍅, 교만, 완악이라는 표현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쏘아대는가, 그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강퍅한 자, 완악한 자, 교만한 자로 발각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주의 일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름 바꿉시다. 최 강퍅, 김 강퍅으로.
고집, 고집, 지독한 고집.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 살면 그만이잖아.’ 이 지독한 고집. 그것을 우리가 그동안 애써 감춰 왔던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순종하라고 하잖아요. 말씀을 믿어라, 순종하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순종해 왔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함에 대해 이미 믿어온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미 철두철미하게 집착을 보이면서 순종해 왔습니다. 내가 나에게 순종하고, 헌신하고, 나에게 충성하고, 나를 섬기는데 평생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교회 다니는 식으로, 교회 다니는 식으로. 우리는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성경에서 강퍅이라는 이 단어, 인간들이 이해하는 그런 강퍅 단어 말고 하나님에게만 포착이 되는 강퍅이라는 의미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히브리인의 이스라엘 나라를 애굽에서 만들었어요. 그때는 이스라엘 아니고 그냥 히브리인들이었거든요. 히브리인들 그들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애굽 바로 왕의 압제에 시달렸던 겁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좀 이상한 게 있어요. 모세와 아론이 와서 “우리 여기서 탈출하자.” 하니까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같은 동족 히브리인이 반대해요. “그냥 살던 대로 살게 해줘 좀.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이대로 살래.” 사람이 하던 행세를 안 하면 이상해져요. 줄곧 해왔던 것이 뭐냐?
인간은 모든 자기 실존을 국가에 의존합니다. 국가가 나를 지켜줘요. 그래서 우리는 그 국가의 유능한 왕을 존경하고 섬깁니다. 왜냐하면 국가와 그 왕은 내가 원하는 모든 힘의 결정체기 때문에. 그 힘이 부러운 거예요. 힘이 부러우니까 힘 센 사람 밑에서 알랑거려야죠. 굽신거려야죠. 그래야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잖아요, 콩고물이라도. 권력의 말 안 들으면 내 모가지가 날아가는데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어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이거에요. “왜 사십니까?”라는 질문. “왜 사십니까?” “살려고 삽니다.” 그 질문에 다른 답변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왜 살려고 하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데 왜 자꾸 살려고 합니까?” “몰라요.” 이렇게 되죠.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강퍅이라는 것을 누구한테 대표적으로 주느냐 하면, 바로왕에게 제공합니다. 출애굽기 4장 2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러니까 바로 왕이 마음이 강퍅하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강퍅케 하심으로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강퍅의 힘에서 어느 인간도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출애굽을 누가 반대하는데요? 히브리인들 자기 동족이 반대해요.
그들은 그러한 태도가 강퍅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거죠. “그냥 살겠다는 것도 강퍅이야? 교만이야?” “그래.”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렇게 들이미냐? 끝까지 그렇게 몰아세워야 네가 속이 시원하냐?” 이런 식으로 반발이 나올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히브리인들 너네 빠져. 빠지고 모세야, 네가 지팡이 들고 앞장서서 바로왕과 한판 붙도록 해줄게. 진짜 무엇이 강퍅인지.” 강퍅이라는 단어 하나를 위해서 애굽 나라, 바로왕의 나라 전체가 총동원됩니다. 이 말은, 자기가 강퍅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구원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하고, 지식을 얻고, 그게 강퍅이에요, 그게. 하나님 찬양 드리고, 그게 강퍅이라니까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징후를 발산하며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난 게 아니에요. 죽음이 태어나고 강퍅이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생일 축하 그만하라고 해요, 생일 축하. 어디 강퍅을 보고 무슨 축하를 해요? “해피 버스데이 투 유~. 당신의 강팍을 축하합니다~” 이게 말이 돼요?
인간은 어린이일 때는 어린이의 강팍이 있고, 나이 60 먹으면 60대의 강퍅히 있고, 90되면 90대 때의 강퍅이 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죽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저주를 품고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그걸 인간들만 몰라요. 마귀도 알고 하나님은 아는데 인간들만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그 모르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이 있느냐, 가 아니라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스라엘에게만 말해줍니다. 너에게 이 하나님이 다가섬으로써 하나님이 있는 민족에는 무엇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은 민족에게는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모세가 애굽왕을 만날 때 나라도 없어요. 히브리 동족은 반대하고 나서고 모세와 아론만 달랑 외로운 싸움을 하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만들어서 끄집어 낼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4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내가 기적을 베풀 때 바로왕이 호락호락 내놓지 않게 조종을 할 것이다. 왜? 그래야 강퍅이 무엇인지 나타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살던 모든 인간은 강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강퍅이란 힘을 의지하는 거예요. 이 힘에 의지할 때 히브리인도,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왔다는 말은, 애굽나라 사람들은 고정적인 애굽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찾아가서 히브리인들을 끄집어낼 때 그 이스라엘인들은 이동하는 애굽인이에요, 이동하는 애굽인. 애굽인이 아닌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광야 생활에서 애굽인에게 나타났던 강퍅이, 숨어 있던 강퍅이 드디어 노골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 안게 전혀 없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강퍅과 더불어 살기, 뭐 이런 거죠. 강퍅과 더불어 살기, 교만과 더불어 살기, 완악함과 더불어 살기.
자,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힘이 있는 결정체, 왕이 있는 나라, 그 왕이 있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족하면서 그들에게 생존을 구걸하는 식으로 살던 그들을 뭘 로 바꾸느냐? 제사장 나라로 바꿉니다. 출애굽기 19장 6절, 웬 독수리가 거기 나타나요. 4절부터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는 분명 독수리 없었어요. 보잉 747, 전세기 그런 건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걸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독수리 날개로 널 업어서 이곳까지 왔다는 말은,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우리가 나올 때 고생하고 애 많이 썼습니다.” 하는 그 입을 다물라는 말이에요.
독수리가 공중에 날듯이 독수리 날개에 업혀 나왔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고생한 결과로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그 이야기는 쑥 집어넣어라, 이 말입니다. 고생해서 구원받는다는 그것은 누구 사고방식이냐 하면, 그것은 애굽인들이 했던 사고방식이에요.
바로 왕이 강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뭔가를 지키기 위함이에요. 뭘 지키느냐? 내 나라 내 조국, ‘아! 대한민국’ 지키려고 한 거예요. 그게 강퍅이에요. 다시 말해 강퍅은 끝을 모를 때 나오는 게 강퍅이예요. 끝, 끝! 제가 어릴 때 생각이 나는데 그때 애들 다 못 살았잖아요.
코 질질 흘리면서. 3살 4살 애들 엄마가 데리고 시장에도 가고, 국민학교 입학할 때도 손수건 하나 달고 코 훔치면서 올 때 선생님이 “얘, 너 이리 와. 1학년 2반이야.” 해도 안 가요. 그때 애가 취하는 태도는 엄마 치마폭 붙들고 엄마를 안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도나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던 것은 뭐냐? 그 끝을 잡는 거예요. 엄마 치마폭을 안 놓듯이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휘날리는 그 치마폭이에요. 치마폭 붙들고 까꿍, 하면 인간세계고 또 까꿍, 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 그 죽음,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과 함께 동행하는데 그 죽음이 뭐냐? 엄마의 치마폭 같은 거예요. 그래야 끝을 이렇게 눈여겨볼 수 있는 것, 한시도 끝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위치, 그 위치만이 강퍅이 아니에요. 그 위치만이.
그래서 광야에, 물도 없고 밥도 없는, 양식이 없는 그곳에 집어넣은 거예요. “너희들 못 살겠다고 원망하지 마라. 내가 살아 있잖아.” 간단한 이야기에요. “내가 살아 있잖아.” “죽겠나이다.” “너 죽어도 괜찮아. 내가 살아 있으면 되잖아.”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단지 네가 죽을 때 죽는 이유, 왜 강팍을 품고 있느냐, 왜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있느냐는 그걸 내가 율법으로 알려줄게. 됐지? OK? 그러면 되었잖아. 다른 소망 없지?” 이게 바로 하나님과 성도의 동행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동행할 때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네가 전에 바로왕의 권력을 의지했다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따져봅시다. 바로 왕은 왜 자기의 권력과 애굽 나라를 포기하지 못하느냐? 이게 질문이 돼요.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 보고 “집사님은 왜 자꾸 살려고 해요?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 데 왜 자꾸 사십니까?” 이게 듣는 사람에게는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에요. “그럼 너나 한번 죽어봐라.” 이런 대꾸, 이런 공격이 막 날아올 것 같아.
사람이 악착같이 살려는 이유가 복수하려고 살아요. 왜 복수하려고 하느냐? 인간은 마음에 상처가 있어요. 내 맘대로 안 되는 상처, 내 뜻대로 안 되는 상처. 그 상처 안 생기면 되는데 왜 상처가 생겼느냐? 상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사탄이 인간에게 사탄의 마음을 집어넣어 줬어요. 제가 부산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인간은 ‘기계+악마의 마음’이라고. ‘기계 + 악마의 마음’ 기계는 주인공이 시키는 대로, 악마라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내 맘대로 되는 건 없습니다.
그 악마의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할당이 되고 분배가 되어있어요. 전부 배급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당하면 상처를 받느냐? 사람은 내가 모든 것을 판정하고 싶어요. 내가 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어해요. 그러면 신은 어떻게 하는가? 신은 내가 징벌자가 되는 겁니다.
너는 나에게 실패감을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실패감을 준 겁니다. 당시 최고의 제국, 애굽 제국의 최고의 권력자 바로 왕이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 들고 있는 모세와 아론, 그 노인 앞에서 패배감을 느낀 겁니다. 참을 수가 없죠.
이 바로왕의 자세, 태도는 오늘날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네가 뭔데 나에게 패배감을 줬느냐?” 유명한 영화 대사에 의하면 “네가 감히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요새 목욕값 7000원 하던가, 뭐 그 정도인가,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 모욕감을 준 것, 상처를 입었으니까 상처는 뭘로 치유되느냐 하면, 내가 복수를 해야 치유가 됩니다. 복수하는 방법은 뭐냐? 돈 버는 거예요, 돈 버는 거! 죽기 살기로 돈 끌어모으는 거예요. 그게 내 자존심을 회복하는 모든 사람의 일방적 상식적 차원의 공통점입니다. “너 나 무시했지? 내가 마, 서장이랑 사우나 가고, 점심 먹고, 내가 이 정도야.” 최민식 영화에 보면 나와요. “나 너희 서장이랑 밥 묵고 마…” 이러거든요.
왜 그런 허세를 부립니까? 복수하고 싶은 거예요. 누구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그러니까 내 이름이 죽으면 안 돼요. 교회 와서도 내 이름이 죽으면 안 되고, 예수님에게도 내 이름이 죽으면 안 돼요. 내 이름이 죽어버리면 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주체자가 날아가 버려요. 교회 왜 오느냐? 복수하려고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힘입어서 “봐, 기도를 철야해서 하니까 돈 줬잖아. 봐, 나 이 정도 신앙인이야.” 이게 뭐하는 시츄에이션인지, 이게 뭐 하자는 이야기인지요, 그게!
제사장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패배자가 되는 거예요, 패배자.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전 백성의 희생물. 그 정반대에 왕이 있어요. 그 왕에 대한 선망, 출세에 대한 선망이 있는 자를 어린 양을 통해 피를 발라 끄집어냈단 말이죠. 인간은 자기 상처를 못 견뎌요. 어떻게든 몸부림쳐서 상처를 만회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만회하려는 것을 약속의 땅에 가면서 다 들춰내요. 쉽게 말해 교회 다니면서 말씀 들으면서 다 들춰내요. 참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이게 바로 강퍅이야.”
그게 바로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널 노리는 것이 있다.” 즉 “네 안에 괴물 있다.”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네 안에서 네 마음을 지금 장악하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가 징벌자요, 심판주가 아닌 이상 ……, 예를 들어 학창시절에 학교 폭력을 당한 것을 복수하는 방법은 뭐 차 사고 내서 죽이는 거 말고, 자기가 부자 돼서 자기를 괴롭힌 친구 찾아가서 “너 카페 낸다며? 얼마 필요해? 이천만 원?” 확 뿌리면서 “됐냐? 이러면 내가 복수한 거다.” 뭐 그렇게 하려면 복수가, 돈이 1조 2천억 들어요. 복수 하려면 재산 4조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은 복수, 내 상처를 만회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태도와 행동과 표정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행동과 태도와 표정에는 거기 복수심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다고 해서 그 상처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상처가 없어지려면 나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가 와야 해요.
그게 뭐냐? 내가 싸놓은 모든 배설물을 자기의 고귀한 생명으로 다 닦아 없애주신 그 피 흘린 상처가 유일하게 덮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린양이에요. 어린 양의 피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화가 될 때, ‘나 깨끗함 받았다’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지옥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지옥은 자기 잘난 사람들이 다 집결해 있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와서 열심히 말씀 듣고 예배하는 이유가, 자기 안에 있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영혼을 연마해요. 반들반들 닦고 또 닦고 난리도 아니에요. 말씀으로 정화 시키고, 말씀으로 거룩하고, 정갈하고, 점점 더 성화의 삶을 살아서……. 이게 뭐냐? 자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기껏 내놓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강퍅이에요.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에게 아주 모욕감을 줘 버립니다, 실패감을. 어떻게?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이 도둑놈을 천국에 보내요, 도둑놈을. 여러분, 지금 나 혼자 웃고 있는데요. ‘나 저 세리 창기처럼 되면 나 인생 자살한다, 저건 완전히 실패야.’ 완전히 실패라고 느낀 그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들이댑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의 정화 방식과 우리의 정화 방식이 얼마나 하늘과 땅 차이인지, 지옥과 천국 차이인지 그걸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자기가 자기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애초부터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감사 외에 감사할 줄 모르는 동물입니다. 자기 인생에 환장한 인간들이에요. 자기 인생을 빛내는데 평생을 거기에 올인했어요. 다 몰두시켰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대처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야……, 옛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에 우리가 행한 것을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 되죠. 새것 폭발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은 지나갈 몸이에요.
사람들은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요. 왜 자아가 없어져야 된다는 말을 자꾸 하냐고 따지는데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가져가지 우리 자아는 가져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구원하되 자아는 구원하지 않아요. 몸은 주님 것이지만 자아는 마귀 것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은 뭐냐? 이 자아를 구원해달라고 난리도 아니에요.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나온다고요.
“대체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전도하고 얼마나 충성하면 나를 구원하겠습니까?” 주님께선 “너는 없어. 너는 거기서 빠져.” “저 빠지면 안 되잖아요.” “너는 무의미 해.” 너 자체는 무의미하기때문에 빠지란 말이죠.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나옵니다. 다 아는 이야기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 심판 이야기할 때에 상당히 궁금했을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어 심판하실 때 도대체 기준이 뭘까, 뭐가 기준인지. 대체 뭐가 기준이냐?
양에게 이야기합니다. 염소는 지옥 가고 양은 천국 가요. 일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걸 주었고, 병들었을 때 나를 돌아봤다는 거예요. 그때 구원받아 천국 가는 양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제가 언제 했습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강퍅은 강퍅대로 다 들춰내되 그들이 들춰지는 노선 말고 다른 노선으로 일방적으로 다가가 건져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성립이 안 돼요. 이 법칙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강퍅하면 구원받는다.’ 이건 성립이 안 돼요. 강팍한 것은 강퍅 한 대로~, 그냥 평생 강퍅하세요. ‘내 몸에 자아가 붙어서 이 몸은 때려 죽어도 내 것입니다. 내가 책임질 거예요. 이 몸 가지고 난 내 상처 치유할 겁니다.’ 이렇게 나오세요.
그렇게 하되 구원은 따로 다른 노선으로 구원해버려요. 강퍅한 자들의 특징이 뭐냐? 자기 자아를 지키기 위해 안에서 문을 잠가 버립니다. ‘들어오지 마. 내 허락 없이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아무도 들어오지 마.’ 문 잠가 놔요. 이게 마귀의 마음인데요, 하나님조차도 내 삶에 손대지 말라는 게 마귀의 주장입니다. 그 마음을 인간들이 다 할당받았어요. 다 들어있어요. 문을 꽁꽁 잠가둡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미래는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보람을 달라는 거예요. 내 상처를 내 식으로, 내가 아는 방식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거예요. 말씀 지킬 테니까, 순종하라고 하면 순종하고, 강팍하지 말라고 하면 강팍 안 하고, 헌신하라면 헌신할 테니 어쨌든 말씀만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는 건 내가 알아서 선택하여 내 의지와 감정과 이성을 가지고 할 테니 좀 지켜봐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네가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지키려고 하느냐? 대체 무엇을 잃어버릴까봐서 그렇게 아까워하느냐?” “저 실패하기 싫어요.” “너 처음부터 실패자인데?” 처음부터 에덴동산에 생명 나무가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생명 나무가 없습니다, 태어난 장소가 실패의 장소에요.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고백했잖아요. 나는 모친의 저주에서 태어났다고요. 그런 건 안 믿어지죠? 이상하게. 이상하게 안 믿어지지요.
교회 나와도 소용없고, 전도 선교해도 소용없어요. 이러나저러나 의미 없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의미 없으니까 교회 와서 자꾸 의미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내게 적합한 신학은 무엇일까, 이러고…. 내게 적합한 신학, 왜 그걸 찾지요? 내게 적합한 복음은 어떤 복음일까?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에서 탈락시킵니다. 1967년도에 나온 영화가 있습니다. 안소니 퀸이라는 유명한 미국 배우가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25시> 루마니아의 잘난 것 없고 비천하고 평범한 농부인데 그 아내가 사라처럼 예뻤던 모양입니다. 그 지역 경찰서장이 수시로 그 아내에게 작업을 겁니다. 집적거려요. “오 예쁜데?” 이런 식으로.
아내가 귀찮지만 또 권력자니까 함부로는 못하고 어느 날 농담 삼아 이야기했어요. “자꾸 집적대지 마세요.” “난 당신 포기 안 할 거야.” 이렇게 하니까 “내 남편이 혹시 없다면 그때는 한번 생각해 볼게요.” 농담 삼아 그랬어요, 농담 삼아. 그다음 날 그 경찰 서장이 안소니 퀸을 불러요. “너 이제 징벌받는다.” “왜요?” “너 유대인이거든” “아닌데요?” “너는 유대인이야. 왜냐? 너는 유대인 아닌 거 맞는데 국가가 유대인이라고 하면 유대인이야.”
그래서 남편과 아내를 억지로 떼어놓고 그 못된 경찰서장이 아내를 빼앗아 갑니다. 그때부터 주인공은 유대인도 아닌데 10년 세월을 돌아다니는데 꼭 요셉과 아브라함이야기를 짬뽕해놓은 것 같아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갔는데 또 유대인이 아니라서 미국으로 못 빼돌린 데요. 이건 또 뭐예요? 이 나라에서는 유대인도 아닌 것을 유대인이라고 하고 저 나라에서는 또 유대인이라고 하니까 유대인 아니라고 해요.
또 러시아가 쳐들어오니까 주인공이 독일로 가서 일하는데 간부가 인상 보니 ‘아리아인의 정통모델’이라고 해서 타임지 모델로 나오는 바람에 천하에 선동가가 되어 버렸어요. 유대인도 아닌데, 또 독일인도 아닌데, 러시아인도 아닌데 그러면 뭐야? 나는 내가 누군지를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 사람은. 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그거예요. 네 안 자아에 들어가는 문은 바깥에서 여는 거예요, 바깥에서! 철컥, 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주인한테 반납해야 돼요. 우리는 내 몸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나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에요. 일본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에요.
그러면 뭐야? 내가 알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가! 자꾸 내가 누구라고 하니까 내 구원을 위해서 강퍅하게 성경을 이용하게 돼요, 교회 와서. ‘목사님, 어떤 복음이 있으면 내가 천당 가겠습니까?’ 말씀은 주인공이 우리가 아니고 주인공이 처음부터 알아서 우리를 죽음의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거예요.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거예요.
논산훈련소에 가게 되면 입구에서 머리 홀라당 다 깎아버립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것이 뭐냐? 머리 깎은 내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논산훈련소는 그래요. 하지만 진짜 복음적으로 하면 머리 깎은 내가 내가 아니고 새로운 주인이 내 머리를 깎아준 선임병이다, 그게 새로운 주인이 된 거예요.
그동안 내가 주인이었어요. 내가 주인이라서 내 구원을 생각해서 교회 안 나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억지로 성경 보기 싫어도 성경 봤고. 왜? 내가 내 주인이니까 내가 알아서 나를 천국 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소중하니까요. 이걸 확 빼는 거예요. 어떻게 빼는가? 간단하게 뺍니다. 뭐냐?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신을 두 종류로 만들었어요. 신이라는 개념은 뭐냐? 단독자, 유일자를 신이라 하는데 신을 둘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는 바알신으로 나눴습니다. 여호와 신은 언약을 앞장세우는 것이고 바알신은 언약이 없어요. 약속이라는 게 없어요. 약속이 없기 때문에 바알신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는 인간쪽에서 채워야 되는 겁니다.
이 바알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치게 하신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을 강퍅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인간 속에 들어있는 악마의 마음과 딱 들어맞는 신은 내 소원 들어주는,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인정해주는 신, 내 구원에 대한 노력을 착하고 훌륭하다고 인정해주는 신이 그게 바로 바알 신입니다. 언약이 없는 신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바알신은 여호와 신, 삼위일체 신, 예수신이 바알 신이에요. 나 천당 보내 주려고 애를 쓰신 그 신이 바알 신이에요. 우리 안에 들어와서 나를 추방하는 신 그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진짜 예수님이예요. “네 상처 네가 치유한다고 고생깨나 많이 했다. 그래서 네가 네 안을 열쇠로 잠가 놓고……”
서양의 집들 보면 열쇠 구멍으로 밖이 내다보이잖아요. 딩동, 누구십니까, 하면서 들여다보잖아요. “나 예수인데?” 요한계시록 3장에 있지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 그래서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그게 무슨 구원이에요, 그게! 그거 십자가 농락하는 거지요. 뭐 예수님 피가 세제입니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다음부터 우리 안은 뭐냐? 키즈카페가 돼요. 애들이 자기 맘대로 설쳐요. 말씀이 자기 맘대로 설칩니다. 공기가 있던 공간에 기체가 들어오면 그 기체는 활성 기체가 되어서 온도가 높으면 포텐셜 에너지를 말릴 수가없어요. 말씀이 우리 안에서 마음껏 설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심해, 깊은 바다에 잠수정을 보내요. 잠수정을 보내서 그대로 크레인으로 잡아당기면 그 잠수정 안에서 우리는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강퍅한 존재인 것을 발견해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 성령 안, 언약 안, 십자가 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언약, 새언약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안’이라 하는 것은 체계고 구조입니다. 구조 안에서 너는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된 채 그냥 건짐을 받는 거예요. 새언약의 위력을 우리를 통해서 자기 새언약을 증거 해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사야 40장에 보면 그 고마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면 됩니까?” “풀!” 풀, 없어질 풀, 사라질 풀! 그런데 그 풀이 잠수정 안에 들어있는 풀, 잠수정 안에 들어있어야 발각이 되는 풀.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안에 들어있어야 그 흐르는 피 안에 들어있어야 내가 강퍅한 자라는 사실,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 지옥은 정말 잘 만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지옥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 나는 게 있어요. 저는 동대구역을 자주 이용하는 데 갈 때마다 흡연실을 보고 참 궁금한 게 있어요. 담배 피우는 사람은 흡연실 가서 피우라고 흡연실 만들어놨는데 담배 피우는 사람이 흡연실에 가지 않고 밖에서 피워요. 왜냐하면 담배 연기가 싫어서. 이상해.
제가 만약에 담배를 피운다면 담뱃값 아끼는 방법이 뭐냐? 남이 담배 피우는 데 가서 그 연기로 흠뻑 같이 젖으면 돼요. 그러면 되는데 왜 흡연실에 담배 연기가 꽉 찼다고 왜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냐 그 말입니다. 지옥은 저주의 흡연실이에요. 강퍅의 흡연실입니다. 지옥이.
그것은 자기가 안 고쳐서가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날 것 그대로, 처음 인간 그대로를 지옥에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천국, 이것은 이상한 동네에요. “네가 왜 왔지?”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왔지? 너 한 것 있어? 너 뭐했는데? 뭐 큰일 했어? 뭐했어?” 천국에 온 사람이 말합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로 발랐습니다.” 단지 이 이야기, 다시 말해서 “주의 큰 상처가 나의 상처를 전부 다 덮어버렸습니다.” 이러고 오는 거예요, 이러고.
그러면 이것은 뭐냐? 무의미한 아브라함에게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뭐냐?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냥 전하는 거예요. 전할 때 주께서는 이 선지자를 파쇄해 버립니다.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 “김양, 아까 복사한 것이 중요한 서류니까 퇴근 전에 파쇄해.” 이러면 김양이 가위 들고 설치면 안 되지요. “여기 파쇄기가 있잖아”
파쇄기에 A4용지 넣으면 국수 가락 뽑듯이 파쇄해 버리지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생겨나는 자아를 말씀으로 날마다 밀가루 뭉치가 국수 가락으로 나오듯이 날마다 째버려요. 굵은 소나기 빗줄기 같아요. 늘 말씀으로 잘라버립니다. 자르고 돌아서면 또 생기고 자르고 돌아서면 또 생기고. A4용지 계속 생기듯이.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저는 구원 못 받잖아요.” 또 걱정을, 설교 다 끝나가는 지점에서 걱정을 하고 있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엄마의 치마폭을 떠나지 마라. 붙잡아라’라고요. 이렇게 왼쪽으로 까꿍, 하게 되면 나밖에 모르는 현실, 오른쪽으로 까꿍, 하게 되면 이것은 주님의 생명의 나라, 그 양쪽을 중간에서 다 보고 있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선지자.
마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왔을 때 제자의 기능이 뭐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변화산에 제자들 세 명 데리고 갑니다. 그때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나타난 자들이 누구냐?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들었어요. 그것을 오늘날 제자들이 해야 돼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희생제물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부터 보면 이런 이야기에요. 제자들이 우리중에 누가 높으냐 하면서 자아의 키재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네가 안 마신다고 해도 내가 마시게 해줄게, 라고 해놓고 그다음에 하는 말은 뭐냐? “세상 권세자들 봐라. 애굽왕 바로 봐라. 그들은 힘을 갖고 있다. 그 힘을 본받지 말라.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차라리 희생물이 되어라. 왜? 내가 그 길로 갈 것이니까. 내가 그 길로 갈거니까.”
이거 우리가 못합니다. 이 주의 일을 누가 방해하느냐? 나의 존재감이 방해해요. 주께서는 가만두지 않고 말씀으로 이걸 국수 가락처럼 잘라버립니다. 어떻게? 사건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주인이지 내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은 날마다 깨닫게 하실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제공한 새언약 속에 담겨있는 순종이고, 그리고 겸손이고, 헌신이고, 그리고 말씀 지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아무리 우리 자신을 감추고 싶어도 주께서 다 아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능력으로 우리 안에 쳐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엉뚱한 생각 못 하도록 하시는 그 능력이 바로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