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천국의 조각

아빠와 함께 2024. 5. 26. 20:54

천국의 조각

2024년 5월 2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15-19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말씀과 믿음이 화합치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따라서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실패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말씀의 요소에 인간쪽에서 총동원한 그 어떤 믿음과도 화합치 않는 요소를 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은 죽어서 좋은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요건을 가지고 천국을 생각해 두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분명히 예수님은 주님이 맞습니다. 주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과연 천국이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태복음 7:19에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모자라고 아름다운 열매까지 맺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이런 것조차 이미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겁니다. 인간세계는 생명나무 없는 곳에서 마귀가 살기에 이미 전체가 죽은 세계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러한 죽음의 망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 치르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단언하셨습니다.(마 8:22)

예수님의 장례,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해내셨습니다. 즉 천국이란 완전한 죽음이 아니면 도달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장례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라는 인물은 단지 물에서 살아남은 자 정도가 아니라 불속으로 들어간 자입니다.

그가 불 속에서 나올 때, 본인이 살아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고서 살아나온 겁니다. 즉 그는 말씀과 더불어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모세가 경험한 세계를 함께 해야 합니다. 신명기 4:33에 보면,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물에서 나오고 불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율법 나름대로 완성을 향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 목표로 향하여 율법은 계속 성취해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자체의 목표는 불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불은 인간이 결코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불 속에 있지 않는 살아있는 상태에 자신이 놓여 있다고 간주해서 자신이 살 동안에 죽어서 가는 세계에 미리 대비하려고 믿음이라는 것을 총동원합니다. 죽기 전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나아지는 삶을 위해 사전에 조치를 취하려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모세가 ‘말씀과 자신의 목숨을 맞 바꾼’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고 그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양이 발생됨을 언급하니, 이 야기를 듣은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평했습니다.

“ 그 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요 10:20)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으면 이런 태도를 필히 쏟아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요건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이른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인간의 생존여부와 그들의 행함에 대해 궁극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현장은 그동안 인간들을 묶어놓은 죽음의 망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아 있다고 여기고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예수님에게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에 필히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물이 나왔다는 것은 ‘심낭삼출 pericardinal effusion’ 현상으로서 완전히 심장마저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의 연결에 산  인간으로서는 그어떤 식으로 손 쓸 수 없음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곧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생활에 대한 시스템을 내부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식사를 같이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레위기 1장에 나옵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8-9)

이로 인해 죄인들은 하나님에 언약의 투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식구가 됩니다. 마치 레고 장난감 조각들이 모아서 레고의 큰 장난감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서 성령께서 이 이 일을 담당하십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 12:12-16)

신약의 성도는 맏물되시는 예수님의 몸이기에 예수님의 신앙으로 인하여 이미 예수님의 가족의 입장에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1-2)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더는 미련두지 말고 자아라는 짐을 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천국의 조각

2024년 5월 2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15-19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말씀과 믿음이 화합치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따라서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실패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말씀의 요소에 인간쪽에서 총동원한 그 어떤 믿음과도 화합치 않는 요소를 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은 죽어서 좋은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요건을 가지고 천국을 생각해 두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분명히 예수님은 주님이 맞습니다. 주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과연 천국이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태복음 7:19에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모자라고 아름다운 열매까지 맺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이런 것조차 이미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겁니다. 인간세계는 생명나무 없는 곳에서 마귀가 살기에 이미 전체가 죽은 세계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러한 죽음의 망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 치르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단언하셨습니다.(마 8:22)

예수님의 장례,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해내셨습니다. 즉 천국이란 완전한 죽음이 아니면 도달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장례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라는 인물은 단지 물에서 살아남은 자 정도가 아니라 불속으로 들어간 자입니다.

그가 불 속에서 나올 때, 본인이 살아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고서 살아나온 겁니다. 즉 그는 말씀과 더불어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모세가 경험한 세계를 함께 해야 합니다. 신명기 4:33에 보면,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물에서 나오고 불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율법 나름대로 완성을 향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 목표로 향하여 율법은 계속 성취해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자체의 목표는 불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불은 인간이 결코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불 속에 있지 않는 살아있는 상태에 자신이 놓여 있다고 간주해서 자신이 살 동안에 죽어서 가는 세계에 미리 대비하려고 믿음이라는 것을 총동원합니다. 죽기 전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나아지는 삶을 위해 사전에 조치를 취하려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모세가 ‘말씀과 자신의 목숨을 맞 바꾼’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고 그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양이 발생됨을 언급하니, 이 야기를 듣은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평했습니다.

“ 그 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요 10:20)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으면 이런 태도를 필히 쏟아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요건을 통과해야만 천국에 이른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인간의 생존여부와 그들의 행함에 대해 궁극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현장은 그동안 인간들을 묶어놓은 죽음의 망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아 있다고 여기고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예수님에게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에 필히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물이 나왔다는 것은 ‘심낭삼출 pericardinal effusion’ 현상으로서 완전히 심장마저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의 연결에 산  인간으로서는 그어떤 식으로 손 쓸 수 없음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곧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생활에 대한 시스템을 내부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식사를 같이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레위기 1장에 나옵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 1:8-9)

이로 인해 죄인들은 하나님에 언약의 투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식구가 됩니다. 마치 레고 장난감 조각들이 모아서 레고의 큰 장난감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서 성령께서 이 이 일을 담당하십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 12:12-16)

신약의 성도는 맏물되시는 예수님의 몸이기에 예수님의 신앙으로 인하여 이미 예수님의 가족의 입장에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1-2)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더는 미련두지 말고 자아라는 짐을 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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