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회절
2024년 5월 1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12-14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형제’라는 말은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을 때나 성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은 그 예수님을 창으로 찔려 죽였습니다. 왜요? 나름대로 진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은 인간들이 믿는 하나님은 악마였습니다.
그 증거로서 악마가 제시하는 대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시기입니다. 반면에 신약은 언약이 완성이 되어 ‘약속’이라고 불리는 시대입니다. 언약 시대를 통해서 ‘말씀의 세계’과 ‘인간의 세계’가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로 연결되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언약에 대해 몽땅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음을 통해서 다 드러났습니다. 즉 인간 세계는 결코 인간들만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었던 겁니다. 악마가 주도하고 모든 인간들은 그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세계였던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동안 악마를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악마 안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악마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하는 자리에 들어서신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거기에 악마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사람은 성도해야 하지 않나? 죽어서야 되겠어? 남들에게 인정받아야지. 힘 모으는 희망을 가져야 제대로 된 희망이다”라고 말입니다.
악마가 예수님에게나 일반인들에게 한결같이 이런 논리를 제시하는 이유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감추기 위함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그 말씀의 실효성을 나타내기(가로막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을 자꾸만 살려내려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받고도 실패한 이유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자꾸만 죽고자 하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사람들은 언약과 율법으로 자꾸만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이방여인 릇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어미 나오미는 이방 며느리 룻이 다시 친정 민족으로 돌아가기를 권합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그래서 더는 굳이 이스라엘 민족에 발을 들여놓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즉 ‘네가 살던 대로 가서 살아라’입니다. 하지만 룻이 나오미 집안에 시집와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루어져가는 나라가 아니라 율법이 율법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기 살겠다고 율법을 버린 시집이 그 율법에 의해서 어떻게 쫄딱 망했는지를 룻이 몸소 체험했기에 이 ‘율법의 살아 있음’ 속으로 자신을 죽은 자로 들어서고 싶은 겁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합니다.(룻 1:16)
악마에게 발목잡혀 꼼짝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 ‘형제되기’란 순전히 말씀 스스로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즉 천국과 지옥은 각자 말씀 자체가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천국이나 지옥은 인간들에게 아예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없는 존재, 죽어가야 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받아 놓고도 약속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이 몽땅 망한 것은 ‘시간의 회절’작용 때문입니다. 회절diffraction이란 파동이 장애물을 만날 때, 그 벽을 돌아가서 너머까지 파동이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물체는 보이지 않더라도 벽 너머 소리는 들리는 것입니다.
시간의 이런 회절 현상이 언약에서 약속으로 이어지면서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오늘날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야무지게 지켜낼 수가 없는 이유는 인간의 시간관은 과거를 근거로 한 시간관입니다. 즉 과거에 이러이러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는 겁니다.
과거에 3+5=8 이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의 지혜가 줄곧 시간 따라 진실로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서 미래를 구상합니다. 하지만 언약 완성이 약속의 차원에서 보면 미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단절로 인하여 그 어떤 인간도 배제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찔렀습니다. 이는 자기들 만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로도 충분하다는 자부심의 발로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자기들 손에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수행하므로서 자신들의 미래는 이 율법 완수성과 더불어 온전한 세계로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과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의 문제는 여전히 ‘정녕 죽으리라’가 안중에는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로마서 9:3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For I could wish that I myself were accursed, [separated] from Christ for the sake of my brethren, my kinsmen according to the flesh,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고 그 예수님 안에 이미 자신이 들어 있는 형편에 있음을 이같이 표현하는 겁니다.
즉 주님의 일에 자신이 나설 그 어떤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고 공통점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란 예수님과 공통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수행한 자는 예수님 외에는 없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예수님의 피흘리심과 관련된 일 뿐입니다. 결코 인간의 사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다 이 단일 사건에 매여있습니다. 십자기 지신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아십니다. 그러면 형제는 어떻게 발생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형제되는 자는 ‘악마의 인질이 되어 있는 형편’을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래서 모두 다 한 아버지의 말씀 안으로 들어왔기에 다음과 같은 형편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예수님만이 불렀던 아바 아버지를 같이 부르게 되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히브리서 3장 12-14절(약속의 회절)240512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2-14절입니다.
히브리서 3:12-14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서 인간은 필히 실패한다는 그 요소가 있는 언약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사전에 생각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받았으니 우리는 이제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 하는 경솔한 생각을 한 겁니다. 언약 안에 반드시 인간은 하나님과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걸 그들은 알 수가 없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이니까 그건 말씀 세계죠, 이스라엘이니까 그건 인간세계죠. 말씀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에 누가 끼어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끼워 넣은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 세계와 인간세계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패했으니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몰라도 되지 않겠느냐? 아니죠. 본격적으로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가 우리의 실패를 미리 보여준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잖아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니까 하나님의 천국 가는 데 실패하리라고,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야무지게, 작심하고, 진짜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서 ‘하나님 놓치면 나 다 잃는다. 붙잡자.’ 이렇게 덤벼들죠.
그건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들이 너무 일방적인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럼 대략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실패를 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언약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걸 주의 이름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죽으려고 동행한 겁니다. 생각이 달랐던 거예요.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죽기 위해 그 말씀과 함께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기 위해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자기와 동행하는 하나님이 죽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생각이죠. 인간 생각에 ‘하나님이 죽다니. 나 같은 인간도 살고 싶어하는데’ 하나님이 죽으려고 한다는 그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자꾸 연상한 겁니다. ‘살려주시겠죠? 언제쯤 살려주시겠습니까? 언제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겠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기 살 궁리만 계속 한 겁니다. 지난 시간도 광야지만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광야 40년, 하나님에 의해 적극적으로 몽땅 다 죽여 버린 그 기간이 40년이에요. 사람들은 ‘다 몰살되었지만 그래도 40년을 버티고 있었던, 홍해를 경험하지 않은 그런 사람도 있잖아.’ 하고 자꾸 기대를 거는데 이 광야 40년을 함축해서 정답을 보여주신 분이 계셔요. 그게 바로 40일 동안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사람들은 마귀와 직접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게 사람뿐이기 때문에 저 인간, 그리고 나라는 인간, 인간 끼리 승부 걸고, 투쟁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우애 있게 지내면 내가 사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교회에 왜 옵니까?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친하게 지내고, 찌든 인생살이 하며 사랑이 많은 교회 와서 듬뿍 사랑받으면서, 그걸 교회에서는 그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인간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고 받으면서 자기에게 득이 된다고 교회 다니는 거죠.
그런데 교회에서 마귀를 만났습니까? 인간이 마귀를 만나고 싶어도 마귀는 만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마귀를 만날 수 없고 예수님은 만났냐, 이 말이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굳이 만날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마귀와 만났을 때 마귀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너 죽기 싫지? 너 성공하고 싶지? 너 인기 얻고 싶지?” 인기란 남에게 인정받는 존재예요. “너 힘을 많이 가지고 싶지?” 이걸 함축하면 세 가지 시험이에요. “너 죽기 싫지?” “예.” “너 인기 얻고 싶지?” “예.” “너 힘을 모으면서 대단하게 살고 싶지? 성공하고 싶지?” “예.” 그런데 무슨 마귀를 만나요? 마귀와 더불어 살고 있는데요.
교회에서 하는 설교도 전부 다 마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목사 입에서 마귀 이야기 밖에 안 나오는 게 고객들이 마귀 이야기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그래요. 마귀와 인간의 결탁이 창세기 2장, 3장부터 시작했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끝까지 갑니다. 세상 끝날까지 계속 마귀와 결탁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작전이 어떠냐? 두 가지를 인간이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이걸 인간이 놓치고 있고, 인간이 이미 마귀 품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놓치고 있어요. 정녕 죽으리라, 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 밀어붙이는데 그게 창세기 3장에서 아담보고 네가 흙이 된다는 거예요. 흙이 되면 인간이라는 건 없죠. 그냥 흙이니까.
‘정녕 죽으리라’는 뭐냐? 결국 너는 죽게 될 것이고 그다음에 네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거에요. 더 나아가서 그걸 더 줄여버리면 ‘너는 없다.’가 돼요. 너는 없다. 있어도 없다, 네가 있다는 것은 ‘네가 없다.’ 또는 죽음의 찌꺼기죠. 내가 없는데 내 구원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교회의 구원이라는 건 내가 있다는 걸 전제로 했을 때 하는 이야기에요. 내가 없는데 무슨 내 구원이 있고, 내가 없는데 무슨 내가 들어갈 천국이 있습니까? 심지어 내가 없으니 내가 들어갈 지옥도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성경을 볼 때 내가 여기에 있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성경 세계 뭔지 한번 볼까? 어떤 세계가 펼쳐지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성경 속으로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이 여러분 이해가 안 갈 텐데 예를 들면 쉬울 거예요.
한 새댁이 있었어요. 어떤 할머니가 물어요. “남편이 있어?” “남편 없어요.” “자식은 있고?” “자식도 없어요.” “그럼 너 고향은 있어?” “내겐 고향도 없어요.” “그럼 도대체 너는 무엇이 있는데? 너는 있어, 없어?” “저 없어요.” “그럼 너에게 있는 게 뭐야?” “율법이 있잖아요.”
그게 누구냐? 룻이에요. 그게 룻입니다. ‘율법이 있는 어머니의 세계가 나의 세계입니다. 율법이 있음으로써 나는 율법의 사람으로 율법 있음을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어머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어머니는 율법 버리고 왔잖아요. 그런데 어머니 남편 죽었죠? 자식 둘 다 죽었죠? 이제 며느리도 헤어졌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어머니가 잃어버린 율법이 살아 있어서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그 율법을 놓칠 수가 없죠. 이제는 나도 어머니처럼 율법만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이 룻이었습니다.
룻과 나오미, 나오미는 룻의 시어머니에요. 떠날 때는 이스라엘을 떠났는데 다시 들어갈 때는 율법의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율법의 세계는 딱 두 가지 원칙이 계속됩니다. 하나는 네가 죽었다는 것, ‘정녕 죽으리라.’ 정녕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귀가 대장질한다는 것.
이미 정녕 죽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이에요. 항상 죽은 자가 살기 위해 말씀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말씀은, 생명은 인간을 내쫓았잖아요. 창세기 3장 24절인데, 다시는 생명을 먹지 못하게 내쫓았단 말이죠. 죽음의 세계에서 살다가 없어지라고 내밀었잖아요.
그런데 쫓겨난 그 세계에 마귀가 있어서 ‘이미 있는 너의 인생을 살려야 하지 않겠니? 죽는 것은 늙으면 다 죽는 것이고 지금 네가 엄연히 살아 있잖아. 어떻게 조치를 해 봐야지.’ 하고 마귀가 계속 격려하고 독려해요. ‘봐, 언약 있잖아. 하나님 말씀이 있잖아. 성경 말씀 있잖아. 지금 있는 널 천국 가는 너로 바꿔야지. 지옥에 가서는 안 되잖아. 그렇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언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말씀 자체가 천국 만들고, 말씀 자체가 지옥을 만들어요. 자체적으로 만들어요. 그것은 뭐냐? 천국 백성은 말씀이 만들어내요. 지옥 백성도 말씀이 만들어내요. 이스라엘이 끼어들 자리가 못 됩니다. 인간은 말씀이 스스로 만드는 천국 지옥에 끼어들 자리를 못 만들어요.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할게요.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워낙 우리가 골통이라서.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약속이 다릅니다. 구약의 언약이 완성된 것이 신약의 약속인데요. 언약 이전에 약속이 있었어요. 약속, 그다음에 언약, 그다음에 약속입니다. 알파요 오메가는 예수님뿐이예요. 그중에 왜 예수님이 처음이고 마지막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을 한 겁니다.
천국 백성, 지옥 백성을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 다 아는 이야기니까 찾지는 않겠습니다. 씨를 뿌리매, 씨가 말씀이에요, 알곡도 나고 가라지도 나는 거예요. ‘가라지 때문에 못 살겠다. 가라지를 좀 뽑을까?’ “가만두어라.” 추수는 천사 담당이에요. 마태복음 13장 뒤에 나와요. 천사가 낫을 들고 거둬요. 말씀이 시작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알아서 챙깁니다. 그래서 거기서 누가 빠져야 돼요? 인간이 빠져야 돼요.
그런데 악마는 뭐라고 하느냐? ‘인간 널 네가 챙겨야 된다’는 거예요. 믿든지 사랑하든지 소망하든지 네가 챙겨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너 교회 안 나오면 큰일 나는 거야. 성경 안 보면 큰일 나는 거야. 헌금 안 하면 큰일 나. 전도 안 하면 큰일 나. 교회 주일 한 번 빠져버리면 큰일 나는 거야.” 이러는 거예요. “네 인생에 네가 구원받는 게 가장 큰 일인데 구원 안 받으면 안 돼. 구원 받아야 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에게는 큰일이 없어요. 예수님이 피 흘린 것 외에는 인간에게 다른 일은 벌어진 일이 없습니다. 세월호에서 애가 죽어요? 뭐 남편이 어떻게 돌아가시고, 합니까? 뭐 큰일이에요? 성경은 뭘 연관시키느냐? 내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배 타고 가다가 빠져 죽었다, 이건 기절초풍할 일이죠. 이게 나에게 큰일이죠.
그런데 그 큰일을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린 일과 연관시킨 구조가 바로 성경 구조에요. ‘아, 이게 내 일이 아니구나.’ 내가 아예 없고, 내가 없기에 나의 큰일도 없다는 사실, 나에 관한 일은 벌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 전부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단일 사건이에요. 십자가 단일 사건요. 그 일만 일어났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애굽에서 살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라는 것을 알았어요. 여호와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했다. 참 이런 거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오늘날 우리와 마음이 똑같아요.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갔잖아요. 모세가 40일 동안 올라갔었어요. 그때 남은 백성들이 한 일이 뭐냐? 여호와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기념물을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었어요. 귀한 금가락지 재물들을 뽑아 만들어 섬겼거든요. 그 섬긴 취지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 여호와가 우상이라는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심보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아들이 있고 아버지 하나님이 있는데 먼저 누구하고 상대할래?” 하고 물으면 재벌 총수 있고 재벌 아들 있는데 누구와 아는 사이가 되어야 더 멋있는 관계가 됩니까? 아들 제끼고 총수와 먼저 관계하죠. 총수와 이야기해보니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미 내가 확보한 총수와 좋은 관계 맺으면 아들은 그냥 덤으로 숟가락 얹는 것처럼 붙이면 된다고 생각했죠? 이게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에요.
광야 생활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예요. 왜냐면 나라는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끝. 그러면 나는 하나님 아는 것이 되고 믿는 것이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요한복음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계속 나오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에요. 나를 모르면 너희가 아는 하나님은 마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귀.
‘너의 아비는 악마니라.’ 예수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냐면, 내가 이 땅에 나타난 것은 너희가 섬기고자 하고, 너희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반드시 생각하는데 그 신의 존재는 이미 악마가 신의 모습으로 너희와 결탁해 관계를 맺어왔다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들이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소개하는 아버지와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예수님에 대해 굳이 우리가 하나님보다는 덜 대우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서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예수님을 그들이 창으로 찌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시내산 밑에서 하나님이 우상이 된다는 것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상도 못 했죠. 율법이 온 것은, 그 언약이 온 것은, 나중에 약속으로 완성이 되는데요, 그 약속의 완성은 뭐냐?
인간이 하나님을 찔러 죽임으로써 어떤 인간도 천국 갈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약속이에요. 언약 속에 그게 포함이 되어 있었어요. 품고 있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천국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형제들아”라는 말이 나오죠? 이제 오늘 본문 보기 시작합니다. 형제, 없습니다. 형제라는 게 없어요.
형제는 언약에 관한 게 아니고 약속에 관한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백성?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 아닙니다. 하나님 자체가 그들에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찌른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요? 이건 웃을 이야기에요. 왜 하나님이 사람에게 찔립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천국이고 진짜 천국은 너희 속에 있는 심보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이게 창세기 3장 24절, 어느 누구도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갈 수 없다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왜? 정녕 죽었으니까요. 여러분, 말귀를 알아들으셔야 돼요. 정녕 죽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사도 되기 전 주님 만났을 때 주께서 먼저 운을 뗐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제가요? 누가요? 저보고 이야기하는 소리예요?” 여기서 사울이 놀라기 바빠요. 그런 소리 안 나옵니다.
사울이 놀랐던 건 뭐냐? 그동안 내가 알던 나는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없어요. 주님이 핍박하는 자로 운을 뗄 때 비로소 그 말씀 안에서 난 있었어요. 비록 핍박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 말씀 안에서 비로소 사울은 있었던 겁니다. 그때 처음으로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말씀 밖에 있었던 겁니다. 마귀와 더불어 있었던 거예요. 사실은 마귀 자체도 말씀 안에 있지만요. 사울아, 사울아, 하는 이름 대신 여러분 이름을 집어넣어 보세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건 핍박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 는 말씀에 우리가 도전한 셈이 되고 ‘정녕 죽으리라’ 자체를 거부한 셈이 돼요.
선악과를 인간이 훼손했어요. 선악과는 인간이 훼손했지만 마귀가 실패한 것은 뭐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 자체, 그것을 훼손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거예요. 죽은 자가 무슨 구원을 받아요? 죽은 자가 무슨 교회를 간다고 구원을 받아요? 죽은 자가 성경 백 독을 하고 천 독을 한들 무슨 구원이 됩니까. 죽은 자인데요.
죽은 자라는 인식이 왜 없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꼬신 거예요? 누가 홀린 거예요? 교회 가면 살 수 있다고, 예수 피 믿으면 살 수 있다고, 예수 피 믿으면, 회개하면 구원받는다고. 그거 마귀가 그렇게 꼬신 거예요. 우리가 존재하질 않는 데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로마서 9장 3절, 제가 미국 가서 설교할 때 제일 첫 번째 한 본문이 이거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제가 지금 읽어드릴게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그다음에 “내가 원하는 바로라”
<가스펠펠로우십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이 말씀을 원하는 사람 있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성경 다른 구절 다 때려치우고 딱 로마서 9장 3절만 쥐고 이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사람 있습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그런 것 말고, 그런 것 다 치우고 이 말씀.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건요, 성령을 받아서 한 거예요.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결과는 뭐다? “내가 저주받기를 원하나이다.” 그 고백이 나올 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그래요. 이건 악마의 일이 아니에요.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이건 주님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성령 받은 자를 두 자로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맏이 되시는 예수님과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했던 고백이, 사도바울이 했던 고백이 이제 형제에 들어간 사람도 고백을 하는 겁니다. 기꺼이,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억지가 아니라 기꺼이.
왜?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저주받는 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나는 없으니까. 나는 없고 말씀이 일하시면 그 안에서 없는 나가 새롭게 피조물로 만들어지니까요. 이게 바로 언약과 약속의 차이점이에요.
구약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뭘 전제로 하느냐? 항상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고,를 전제로 했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율법을 주셨다. 지키자. 이거 안 지키면 안 돼.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해.’ 그렇게 나왔습니다.
악마에 속한 인간들, 마귀에 속한 인간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지요, 궁극적으로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이걸 개조를 못 해요. 왜? 마귀가 개조를 안 시켜줘요. ‘너 살아야지. 너 성공해야지. 인정받아야지. 힘 있어야지. 그래야 살맛 나잖아. 그게 인생성공이잖아.’
이걸 어떻게 고칩니까? 사는 이유가 이것뿐인데. 이것 되려고 교회 나왔는데. 여기서 무슨 아이디어가 나옵니까? 아이디어 나와봐야 마귀 아이디어에요. 제가 내일 여행 갈 곳이 어디냐?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빈, 이 세 곳에 갑니다. 처가의 친척이 있어서 거기에 겸사겸사 가게 되었는데 가면서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합스부르크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합스부르크왕가, 철저하게 카톨릭, 천주교에요. 로마가 유럽을 평정했잖아요. 그 이상을 누가 거의 실현시켰느냐 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실현을 시켰어요. 650년 동안. 끝나기는 1차 세계대전 때 끝났어요. 황태자가 항복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그동안에 온 곳에, 천주교 문화를 유럽 전체에 건물 유리창, 거리, 다리, 성에 다 갖다 부었어요.
왜 그렇게 하는가? 글자를 모르는 문맹, 14, 5, 6세기까지 사람들이 글자를 잘 몰랐어요,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 내용을 눈에 보이는 식으로 인식을 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카톨릭 국가에 복종하도록 한 겁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진리를 인간의 문명과 문화활동으로, 인간의 지혜로 결속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연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3+5=8이지요. 이거 인간의 지혜입니다. 3+5=8, 지혜지요. 지식이고요. 그처럼 성경에도 인간이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3+5=8, 오케이?” “오케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오케이?” “오케이” 그러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걸 천주교회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서 그렇게 해 온 겁니다.
그런데 그 합스부르크의 문화재들 다 어디 있어요? 그냥 입장료 받는 문화재에 불과해요. 그들은 복음을 오락화했습니다. 오락화했다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한쪽으로 밀어놓은 거예요. 이유가 뭐냐? 전에는 순진해서 살아 있는 나를 성경이 살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본주의가 되면서 성경 말씀이 살리는 게 아니에요. 내 돈이 살린다는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마귀 말이 맞아요.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 맞아요. 아,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겁니다. 사람은 남한테 인정받는 재미로 살아요. 돈이 있어도 인정 못 받으면 자살해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어야 살아요. 마귀 말 하나 그런 말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 안 나갑니다. 유럽 사람들.
지금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20년 전만 해도 70퍼센트가 기독교 신자였는데 요새는 교회 나가지도 않아요. 내가 사는 방법을 이제는 터득한 거예요. 마귀와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마귀와 같이. 이게 편해요. 왜? 나는 살아야 되니까.
지금 성경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게 듣기 싫은 거예요. 살아 있는데 내가 왜 죽어. 살아 있는데 내가 왜 저주받아. 왜 내가 지옥 가는데?’ 아주 발작을 일으킵니다. ‘말씀이여, 내가 믿으오니 나를 살려주소서.’ 오늘 본문같이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되면 너는 약속의 땅에 갈 곳이다’ 하는 성경 말씀이 나오니까 ‘아, 그래. 내가 돈으로 살지만 이 말씀은 내가 영 버릴 수는 없지. 돈이 우선이지만 이 지식을 기억하자. 3+5=8, 이게 맞듯이 이 말씀은 맞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몰라요. 그걸 가지고 의성 말로 ‘지낀다(지껄이다)’고 하는 거예요. 지끼는대로 다 들고와요.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서, 철저에 철저를 기하면서. 혹시라도 빠뜨린 것이 있을까 봐 조마조마 두려워하면서 다 들고 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뭘 몰랐는가? 그들은 부활, 십자가, 새생명 다 들고 와요. 성화, 다 들고옵니다. 뭘 몰랐는가? 그들은 ‘십자가 안’이 있다는 사실, ‘십자가 안’에 있어야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 “저주 오케이?” “오케이” 하는 그 말씀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제가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회절(diffraction, 回折)’이라는 물리학법칙을 말씀드리겠어요. 회절이라는 것이 뭐냐? 파동이 물질을 통과하면서 장애물, 벽같은 곳에 부딪힐 때 그 뒤편까지 전달되는 현상을 회절이라는 거예요. 벽에 가로막혀 있을 때 볼 수는 없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절이 과학계에서 대히트를 친 것이 뭐냐 하면, X선 회절이에요. 그 연구를 했던 사람이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2-1958)이라는 여성인데요. 그 여자와 그리고 두 명의 남자가 연구해서 밝혀낸 것이 뭐냐? DNA 구조입니다. DNA, 그 단백질의 구조, 다시 말해서 그 원자 사이의 공간의 거리, 결정체의 위치등을 X-선의 회절을 통해서 밝혀낸 겁니다.
그런데 그 남자 둘은 노벨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상을 못 받았어요. 여자라서가 아니라 이미 죽어버려서 그래요. 왜 죽었는가? X-선 연구한다고 난소암 걸려서 죽었어요.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2019년도에 유럽우주국에서 화상 탐사선 이름을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노벨상은 못 받았지만 탐사선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이 회절, 물리학의 회절이 언약에 그대로 적용이 되는데 그게 뭐냐? 시간회절이 일어나요. 인간은 미래를, 약속을 못 믿어요. 오늘 본문에 이 약속을 믿으라고 되어 있지만 약속을 못 믿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과거성입니다. 과거에 알던 지식들이 이미 나를 형성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내 과거의 지식들이 살아 있는 거예요.
지식으로 살면서도 미래는 손톱만큼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소위 미래를 알 수 없으면서 그냥 용이나 쓰는 거예요, 용이나. ‘과거대로 그대로 이어지겠지’ 그런데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과 주님의 시간인 미래가 회절을 일으켜서 미래가 인간에게 먼저 덮쳐버린 거예요.
최종 있었던 일을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먼저 주어진 거예요. 그 내용이 뭐냐? ‘어떤 인간도 정녕 죽으리라, 의 원칙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합당하다.’ 그 내용입니다. 살아 있는 내가 과거에 대해서 충실히 공부해서 공부한 것을 밀어붙이면 미래의 나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 호산나 할 때 주께서 영접하시겠지, 라는 그 모든 생각이 좌절되는 거예요. 신학의 문제점이 그거예요. “이거 알지요?” “오케이” “이거 알지요?” “오케이,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아닙니다.
십자가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실패한 것을 그대로 십자가 믿는 자들에게 되돌려줘요. 너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거예요. ‘메시아 오신다. 율법 믿자. 우리가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사야에 나오더라. 따라서 우리만큼은, 우리 유대 나라 만큼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구제를 하게 되면 우리는 메시아가 그래, 네가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받았구나. 네가 그런 짓을 두 번 다시 안 하는구나. 내가 너를 구원해주마, 해서 메시아가 온다.’라고 했던 자가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아니하고, “주여, 저 어때요?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저 저주받을 세리, 저 저주받을 창기, 저 저주받을 강도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이야기했어요.
저주받은 자를 왜 필요로 할까요? 저주받은 자가 자기의 저주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지 좀 더 설명이 필요해요. 시사로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 중입니다. 가자 작살 내고 라파지역까지 폭격을 했습니다.
전쟁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한 번 보세요. 구약성경을 제가 이 시간에 다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구약성경에서 제일 특이한 것 중 하나가 ‘다 죽여버리라’는 진멸이에요. 그것을 ‘붙이심의 전쟁’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 진멸해 버리라. 다!’
신명기 7장 16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 다 진멸해 버리라는 이야기에요. 여호수아 10장 30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진멸해 버린 거예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진멸한 거예요.
자 그렇게 보시고 지금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봅시다. 여기서 전쟁이라 하는 것은…… 언젠가 수련회 강의안에 있어요. 전쟁에 참여한 둘 다를 패배자로 만든다고 제가 적었어요. 전쟁은 승자가 없어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거예요. 그만큼 참혹해요. 처참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쟁을 붙이는 것은 어떤 자도 승리자가 없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진멸하라는 이것에 처음에 이스라엘은 신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학을 떼었어요. 그게 사무엘상 15장에 나옵니다. 15절에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아말렉과 전쟁할 때 “야야, 같은 인간으로서 너무 과하다. 괜찮은 것은 살려주자.” 이래서 이스라엘의 사울 왕이 망한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진멸을 못 해요. 왜? 인간 속에는 인도주의적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사고방식.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요, 여러분, 성경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 내용이 아니면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는 몰라요. 같은 인간에게서 왔겠지요. 성경에서는 그것이 ‘정녕 죽으리라’의 근거가 돼요. “네가 왜 정녕 죽는지를 모르지? 네가 하나님을 죽이게 되는 이유를 모르지? 네가 나를 핍박하는지를 모르지? 네가 착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착하기 때문에, 의롭기 때문에 나의 착함과 의를 살려서라도 하나님은 나를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를 지옥 보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염라대왕의 주장이에요. 성경을 그렇게 보고 복음을 그렇게 들어도 도대체 못 알아봐요. 마치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과 율법을 그렇게 보아도 못 알아들어요, 그걸.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스라엘은 인도주의적인 것 없습니다. 라파에 가서 다 죽여버려요. 다 죽입니다. 왜? 이 전쟁에서 본인이 승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잘못은 바로 승리하겠다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잘못이에요. 진멸을 해 버린다는 그것이 잘못이에요. 자기가 전쟁의 패배자라는 것을 모르는 그게 잘못이에요.
그리고 하마스 편을 들고 있는 세상의 모든 UN에 속한 인간들은 인간이 진멸의 대상인 것을 몰라요. 자기가 ‘정녕 죽으리라’를 몰라요. 그리고 우리도 몰라요. 우리 자신도. 그래서 형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형제는 주님과의 공통점을 가져야 되는데 우리는 같은 마귀의 속성을 가진 자들의 공통점이에요. 그걸 인간이라 합니다.
이 공통점에서 우리는 발을 빼려야 빼지를 못해요. ‘정녕 죽으리라’가 싫어요. ‘정녕 저주받으리라.’가 싫어요. 왜 싫은데? 몰라요. 그냥 싫어요. 나는 나를 지키고 싶어요. 그냥 싫어요. 벌써 마귀에 물들었어요. 마귀가 우리를 놔주지를 않습니다. 해결책이 없어요. 그러면 해결책은 어떻게 생기느냐?
이스라엘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려면 하마스를 진멸한다고 승리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의 인질을 포기해야 돼요, 인질을. 이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인질을 포기한다는 말은 내 국민이었던 이스라엘의 인질을 적들에게 죽도록 내어주는 거예요. 로마서 8장.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내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내어주는 그것이 왜 안 되느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파괴되어 버려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똘똘 하나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적에게 잡혔다고 나 몰라라 하고 놔둬 버리면 남아있는 이스라엘 자체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 무너지는 것이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사는 방법이에요. 왜? 예수님도 스스로 무너졌으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현재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인질로 잡고 있어요. 나를 포기를 못 해요. 어쨌든 간에 천국에 보내야 되겠어요. 청교도가 되든지 뭘 하든지 포기를 못해요. 나는 나한테 승자가 되고 싶어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세 가지 비유가 나와요 하나는 어리석은 처녀, 열 처녀의 비유가 나와요. 두 번째는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세 번째는, 누가 소자인가, 누가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느냐, 그 이야기가 나와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어리석은 열 처녀 비유가 뭘 모르느냐 하면, 시간의 회절(diffraction, 回折)을 몰랐던 거예요. 시간이 회절.
지혜로운 처녀는 이미 시간이 끝났어요. 신랑이 여기 자기와 함께 있어요. 기름이 그걸 증명하는 거예요. 신랑이 먼저 있고 그다음이 나예요.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는 내가 시집가려고 신랑이 필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신랑 올 때 기름 준비하면 되잖아요. 아까 이야기한 룻기 다시 말씀 안 드려도 되지요? 말씀이 먼저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그걸 룻은 나오미 가정의 파탄을 통해서 발견한 겁니다.
우리는 지금 내 가정이 파탄되었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 돼요. 제가 보기에 여러분 가정 파탄 다 되었어요. 하하호호, 놀러 가도 파탄되었어요. 도대체 내 가정이 우상이 되면 안 되잖아요. 내가 내 가정의 인질이 된 거예요. 행복한 가정이요? ‘정녕 죽으리라’ 나 날아갔는데요? 마귀 존재는 어떻게 하고요?
성경책 찢으면 되겠어요? 선악과 따먹듯이 ‘어디서 나에게 저주를 이야기해?’ 찢어버릴 거야. 그런다고 ‘정녕 죽으리라’가 없어집니까? 이스라엘이 패망한 것,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없어집니까? 이스라엘은 없어졌지만 유대나라의 유대인으로 살아남았다는 거예요. 그 유대나라 한 일이 뭐예요? 주님을 창으로 찌르는 일을 했는데요.
그 유대인중의 유대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 아닙니까, 사도바울. ‘내가 저주의 찌꺼기네. 내가 찌꺼기다. 십자가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다.’ 십자가 지식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에게 일어난 일은 없어요. 일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났어요. 십자가 피 흘리는 것만 일어났어요.
그걸 에베소서 1장, 2장, 범벅으로 마구마구 쏟아냅니다. 예수 안에서, 피 안에서. 에베소서 1, 2장에. 1장부터 2장까지 한 절 갈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계속 ‘안에서’예요, 안에서. 시간이 멈춰진, 시간의 회절이 일어난 그 안에서 2장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의 피.
히브리서 2장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형제가 있는데 형제는 인간에게는 없어요. 그런데 형제라는 이 단어는 바로 시편이라는 언약 안에서 예수님 자기를 향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없는 형제를 만드는데 만드는 방법이 뭐냐?
오직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 밖에는 없어요. 예수님이 피흘려 죽는 그 안에서 형제가 생겨나는 겁니다. 우리가 형제를 찾아가는데 형제를 이해한 게 아니에요. 형제가 없어요. 형제만이 구원을 받는데 형제 자체가 우리가 들어갈 수가 없다니까요. 아서라, 말아라, 못 들어가게 만들고 말씀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 뿐이에요.
모든 세상의 일이, 모든 언약이 예수님만 폐쇄적으로 닫아놓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모든 말씀이 다 이루었다, 가 되고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바깥은 마귀에 속했지요. 악마에 속해서 종교 생활한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러고 난 뒤에 그 형제 됨을 그냥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맏아들 되심으로써 비로소 다른 사람들은 양자가 되는데 그 사이를 형제라고 합니다.
그 형제가 나타나기 위해서, 없는 형제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로마서 8장에 내어줘야 돼요.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게 된 거예요. 내어주게 되고 내어주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그 다음에 로마서 8장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렇게 예수님의 영을 줘서 그때부터 어떻게 되느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어요.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5절에 ‘우리가’ 여기 ‘우리’에요, 우리. 동일한 예수님의 아버지를 전에는 예수님만 아버지라 했는데 이제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 어디 안에서, 그 피 안에서, 그 십자가 안에서요.
다시 말해서 말씀의 완성 안에서. 그러면 그 관계를 형제 관계라 해서 그 형제관계는 내가 유지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말씀으로 유지하거든요, 주님의 말씀으로. 따라서 오늘 히브리서는 신약이니까 신약 안에서는 예수님이 자기 형제를 끝까지 지켜낸다는 그 말씀 안에서 생산되는 새로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양의 사람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예요. 세 명의 직원이 있는데 두 명은 사장님이 어디 가든 말든 그냥 사장님이 함께 있어요. 왜? 어차피 자기 일이 아니니까, 사장님의 일이니까. 그런데 남아있는 지옥 가는 악한 종은 주인이 없으니까 갑자기 없는 내가 살아나 버렸어요. ‘아, 나 잘되라고 달란트 줬구나. 주인이 다시 올 때를 대비해서 딱 묻어놓으면 되지.’
올 것은 생각하는데 항상 주인이 있다가 없어짐으로써 어떤 것이 들통나느냐 하면, 사실은 주인을 믿는 체하고 하나님을 믿는 체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잘되기를 믿었다는 것, 이것은 악마의 품성이거든요. ‘정녕 죽으리라, 도 저리 가! 마귀도 필요 없어. 나는 나만 잘되면 돼.’ 이것이 들통난 거예요. 주인이 잠시 없는 동안에. 자기 생각으로부터 자기 생각으로 끝나는 거예요.
세 번째 비유,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안 보이는 모습으로 자기 형제들을 이 땅에 둬버립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일 때,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죽일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핍박했다고 보거든요. 그 관계가 형제 관계거든요. 그걸 사울이라는 사람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주의 말씀이 오니까 소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던 나도 말씀 안에서, ‘형제’라는 그 말씀 안에서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형제라는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나까지 말씀이 덮쳐버린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뭐든지 해도 상관없는 거예요. 말씀이 덮쳐버리면.
내가 피 흘렸습니까? 피 흘린 분은 주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그 고백이 안 나옵니까? 실컷 해외 구경이나 해야지. 십자가는 예수님만 들어올 수 있고요, 막아놨어요. 그다음에 십자가 안의 천국은 주님이 주신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이 들어갔던 그 절차, 죽어야 될 그 절차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킴을 감사하옵나이다. 저주가 무엇인가를 말씀으로 알게 하신 자만 주의 형제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움직이는데 내가 움직인다고 여기고, 말씀이 믿게 했는데 내가 믿는다고 우기고, 말씀이 천국 되게 했는데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아직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 우리가 패배자가 되는 즐거움을 주시고 승자는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감사하고 가볍게 여기는, 그걸 고맙게 여기는 자들이 형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원하옵나이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